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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

‘엔카의 여왕’ 계은숙

“기모노나 한복은 입고 싶지 않았다. 노래로 평가받자는 생각이었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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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HK 홍백가합전〉 7회 출연 대기록은 7년 연속 프로야구 올스타전 출전에 비견할 일
⊙ 여전히 계은숙을 기다리는 일본 팬들, “당신이 남긴 수많은 노래는 우리의 보물”
⊙ 高2 때 가수 데뷔… 1980년 ‘노래하며 춤추며’와 ‘기다리는 여심’으로 대박
⊙ 인기 절정이던 1983년 失戀 후 渡日… 1986년 ‘오사카의 황혼(大阪暮色·오사카 보쇼쿠)’으로 일본 가요계 데뷔
⊙ ‘각성제 복용’은 교통사고 후 두통약으로 알고 주위 권유로 복용하게 된 듯
사진=조준우
  문화는 힘이 세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刻印)을 남기고, 대중의 내면(內面)을 변화시켜 행동으로 이끈다. 그래서 한류(韓流)다. 한류의 강물을 타고, 친근하며 세련된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세계로 퍼진다. 현대사회에서 ‘스타’들은 어쩌면 민간 외교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일(韓日) 관계가 순조롭지 않은 지금, 일본 올드팬들의 마음을 움직일 ‘스타’는 누가 있을까? 이 질문이 이번 인터뷰의 출발점이다.
 
  계은숙(桂銀淑·60)은 일본에 진출한 대한민국 가수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일본의 대표적 송년(送年) 프로그램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 7년 연속 출연(1988~1994년)이라는 대기록 보유자다. 최초 출연자인 조용필(趙容弼)의 4회, 21세기의 신성(新星) 보아의 6회 출연을 넘어선다. 우리나라 가수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외국인 가수를 통틀어 최다 출연 기록이다. 게다가 계은숙의 장르는 ‘일본의 트로트’라 할 수 있는 ‘엔카’였다. 그녀의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2007년 각성제 파동이 계은숙의 발목을 잡았다. 귀국 후에도 여러 가지로 부침(浮沈)이 많았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성함은 계춘환. 이북 출신으로, 경향신문사에서 근무하고 구두 공장도 경영했다고 들었다. ‘들었다’고 한 이유가 있다. 계은숙이 태어나기 전, 부모님이 남남으로 갈라섰기 때문이다. 두 분은 6·25 와중에 처음 만났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따로 가정이 있다는 걸 안 건 결혼식 한참 후다. 어머니 송종열(宋宗烈·1937~2016년)은 계은숙을 임신한 사실도 모른 채 친정으로 낙향했다. 충청남도 서산이다. 송종열은 신접살림을 차렸던 서울 중구 인현동으로 돌아와 계은숙을 낳았다. 충남에서 꽤 소문난 집안이었지만, 6·25 때 위로 오빠 하나만 살아남아 딱히 의지할 데가 없었던 까닭이다.
 
 
  아역 배우로 TV 출연
 
  어머니가 생계를 해결한 곳은 명동이다. 내무부(현 KEB 하나은행 자리)와 이화증권 사이 골목에서 자그마한 매점을 했다. 계은숙 소녀는 어머니를 도와 우산이나 껌, 석간신문을 팔기도 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비닐우산 가격은 도매가 40원, 판매가 60원이다.
 
  “풍족하게 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린 내가 나설 정도로 돈이 궁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고생하시는 엄마를 돕는다는 생각에서 한 것이죠. 1970년대 초반에는 우리 또래 아이들이 신문이나 우산 파는 걸 흔하게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계은숙의 주요 출몰 지역(?)은 ‘매점 앞’이 아니었다. 명동 국립극장 바로 옆 골목에 친구 어머니가 운영하던 주점(酒店)이 있었다. 막걸리에 수육과 아귀찜이 유명했던 집이다. 훗날 KBS 드라마 제작국장을 역임하는 최상식(崔常植·76)은 1971년 입사 이후에도 명동 국립극장 단골 관객이었다. 어느 날 국민학생 꼬마 하나가 간절한 부탁을 했다.
 
  “아저씨, 극장 갈 때 제 손 좀 잡고 들어가 주세요.”
 
  부모님을 따라온 어린이 관객은 무료입장이 가능하던 시절이다.
 
  “행상(行商)하는 예쁘장한 아이가 연극을 보여달라니 깜짝 놀랐죠. 동화 〈소공녀(小公女)〉의 주인공이 살아나온 것 같았습니다. 이후에도 서너 번 같이 연극을 봤어요. 현대물이었고, 창작극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72년 최상식 PD는 조연출로 데뷔한다. KBS가 처음으로 편성한 주간 어린이 드라마다. 명동에서 마주친 계은숙에게 최상식은 “연극을 그렇게 좋아하니까 드라마 해볼래?”라고 제안했다. 계은숙은 바로 어머니 허락을 받아왔다.
 
  데뷔작은 〈개나리 섬의 합창〉. 낙도 교사의 수기를 극화한 드라마로 연출은 이유황(李裕皇) PD였다. 8·15 특집극 〈마지막 수업〉도 기억하는 작품이다. 일제(日帝)하에서 조선어 수업을 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으로는 한혜숙, 조연으로는 1972년 4월부터 12월까지 방송한 국민 드라마 〈여로〉에서 무라카미 순사 역을 맡았던 정래협 등이 나왔다.
 
 
  비디오와 오디오를 모두 갖춘 가수
 
계은숙의 데뷔곡 〈배타고 간 님〉 등이 수록된 음반.
  연기자로서의 수명은 길지 않았다. 〈미워도 다시 한번〉(1968년) 등을 제작한 필동 한진흥업의 연기실에 등록하고 연기를 배웠지만, 목소리가 문제였다. 얼굴은 주인공인데, 나이답지 않은 걸걸한 허스키 보이스가 걸림돌이었다. 대사를 치면 PD들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래도 연예계로 향하는 문이 아주 닫힌 것은 아니었다. 1977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앞 길거리 캐스팅. 계은숙은 럭키 샴푸(현 LG생활건강) CF를 찍으며 여러 매체에 존재를 알렸다. 미모로 소문난 ‘명동 아가씨’에게 이장호 감독이 영화 출연을 제의했지만, 거절한 적도 있다.
 
  “영화보다는 노래가 하고 싶었어요. 노래의 세계가 저한테는 더 부드럽고 좋았거든요. 사람들과 덜 마주쳐도 되는 일이기도 하고, 연기학원을 다닐 때 수강료가 비싸서 엄마한테 부담 드렸던 기억도 있었으니까요.”
 
  노래를 시작한 것도 반은 우연이다. 앞서 말한 명동 주점 단골 중엔 민요가수 김부자(74)도 있었다. ‘달타령’ ‘팔도기생’ ‘사랑은 이제 그만’ 등의 히트곡을 낸 명가수 앞에서 장기자랑처럼 노래를 불렀는데 “잘한다, 가능성이 있다”는 진지한 칭찬이 돌아왔다.
 
  명동 출입이 잦던 문화인들의 권유와 추천으로 오디션도 봤다. 중구 을지로 2가에 있던 극장식당 판 코리아 ‘한 부장님’ 앞이었다. ‘판 코리아’는 공연만 아니라, 양재협회 의상발표회 등도 개최하던 복합 문화공간이자 대형 식당이었다.
 
  처음엔 ‘노래 못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1년간의 수련 끝에 유니버어살레코드에서 데뷔 음반을 냈다. 고2 시절이던 1978년, 데뷔곡은 ‘배타고 간 님’이었다. 1집은 반응이 미미했지만, 다음 해 금맥(金脈)이 터졌다. 1980년 서라벌레코드로 옮겨 발표한 ‘노래하며 춤추며’와 ‘기다리는 여심’이 그야말로 대박을 친 것이다. MBC ‘10대가수가요제’ 신인상을 수상하자, 일정이 폭주했다. 1981년에도 ‘나에겐 당신밖에’ ‘다정한 눈빛으로’(태양음향)로 연타석 홈런. 1980년 12월에 시작한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계은숙에겐 날개와 같았다. 오디오와 비디오를 모두 갖춘 신인 여가수에게 대중은 열광했다.
 
  “너무 뛰어다녀서, 그때 뭘 하고 다녔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방송국 일정도 많았고, 매일같이 무교동 극장식당들을 순회하며 노래를 불렀어요. 무랑루즈, 국일관, 유토피아, 판 코리아, 코리아타운 같은 곳이죠. 지방 일정도 많았습니다. 공연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고, 끝나면 바로 짐 챙겨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식으로 몇 년을 살았어요.”
 
 
  失戀과 渡日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MBC 〈웃으면 복이 와요〉가 50분 코미디 드라마를 방송하던 시절, 주인공으로 계은숙을 섭외했을 만큼(1981년 10월 14일 방영한 ‘나는 바보입니다’ 편) 그녀는 인기 절정이었다. 배일집·배연정 등 코미디언과 친하게 지내는 배경이다. 코미디언에서 가수로 전직한 방미도 이 무렵에 만났다. 그렇게 ‘가수 계은숙’은 스타덤에 올랐지만, ‘여자 계은숙’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1983년, 그녀가 홀연히 일본으로 떠난 배경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어요. 명문가 자제였죠. 결혼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집에서 반대가 심했습니다. ‘홀어머니에 딴따라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말까지 들었어요. ‘내 아들과 헤어져 달라’며 돈 봉투를 주시기에 그 자리에서 돈을 던지고 나왔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수입은 없고, 사랑하는 남자와도 만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연약한 가슴을 더 아프게 하기 싫었죠. 그래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도일(渡日) 전인 1981년 3월부터 2개월간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한 것도 결혼 문제와 관련이 있다. 너무나 괴로워 방송 펑크를 낸 벌(罰)이었다. ‘사적(私的)인 용무를 보느라 출연 불이행’이란 기사가 났지만,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출연료 인상을 요구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2개월 후 오해가 풀렸다. 당시의 상황을 보도한 1981년 6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강상헌 기자가 쓴 ‘가요계 매니저 천태만상의 세계’라는 기사다.
 
  〈착취형 매니저들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가수 7~8 매니저 2~3의 비율로 수입을 나눠 가지지만 어떤 경우는 5대 5의 비율이 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빽빽이 스케줄을 만들어 가수를 혹사시키는 것도 착취의 한 방법. 최근 관계를 청산한 매니저 박 모씨와 계은숙과의 계약이 그 대표적 케이스.〉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棺 속에 들어가는 심정”
 
계은숙의 일본 시절 히트곡인 〈오사카의 황혼〉 〈꿈의 여인〉 음반.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라는 오기로 일본에 상륙했지만, 객지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는 톱스타였으나 일본에서는 무명(無名) 가수였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연습 장소와 시간은 내줬지만, 일정은 알아서 관리하고, 먹고사는 일도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데뷔 전의 신인 연습생과 다름없는 처지였다.
 
  “돈이 없어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간신히 먹고살았어요. 행여 식당에 한국 사람이 나타나면 저를 알아볼까 봐 도망치기 바빴지요. 다다미방에서 궁상맞게 살면서 싸구려 청바지를 닳고 닳도록 입었습니다. 한국에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상처받고 일본으로 도망 온 건데, 한국에서는 온갖 소문이 다 들려오고…. 무인도(無人島)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비참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어요. 볕이 제대로 안 드는 방이라 진드기가 많았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관(棺) 속에 들어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지금도 다다미방은 가지 않아요. 특유의 습한 냄새에 질려서.”
 
  ― 한국에서 유명 가수였다는 걸 소속사에선 몰랐나요.
 
  “그때는 모든 정보를 바로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잖아요? 입사 인터뷰 때도 일부러 알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일 프로덕션(第一プロダクション) 기시베(岸部淸·1931~2019년) 사장님이 사실을 아시고 ‘속이 깊다’며 좋게 봐주셨죠. 구두쇠였지만, 좋은 분이셨어요. 저에겐 아버지 같은 은인이십니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히고, 노래 연습도 혼자 했다. 일본에서 데뷔하기까지 2년 정도가 걸렸다. 김시종 민단 중앙본부 부단장 등이 애써준 결과다. 공부한다는 느낌, 생애 첫 음반을 낸다는 심정으로 긴장하며 작업했다. 좋아하는 일을 집중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일본 데뷔곡은 하마 게이스케(浜圭介) 작곡의 ‘오사카의 황혼(大阪暮色·오사카 보쇼쿠)’(1986년). 하마 게이스케는 계은숙의 음색을 고려, 장점을 극대화하는 곡을 썼다. 1987년 계은숙과 듀엣으로 취입한 ‘북공항(北空港)’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일본 엔카 듀엣곡 중 가라오케 랭킹에서 아직도 상위권을 유지하는 전설의 명곡이다.
 
  ‘오사카 보쇼쿠’는 발표하자마자 바로 반응이 왔다. 계은숙 본인도 놀랄 만큼 폭발적인 기세였다. 오사카발(發) 폭풍이 일본 열도 전체로 순식간에 퍼졌다. 특유의 허스키 보이스에 빼어난 외모가 시너지를 낸 것이다. 계은숙 이전까지, 일본 엔카계는 청아하거나 간드러진 목소리의 여가수가 주류였다. 계은숙은 목소리가 탁했고, 꺾는 창법도 구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짙은 감성으로 호소하는 마력(魔力)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한 몸에 구현해 빚어내는 아주 특별한 분위기. 그것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파천황(破天荒)이었다. 발레리나 출신의 스모 챔피언, 혹은 스모 선수가 추는 발레를 보는 느낌이 그랬을까?
 
 
  〈NHK 紅白歌合戰〉 7회 출연
 
1988년 〈NHK홍백가합전〉에 첫 출연했을 때의 계은숙. 계은숙은 노래를 마치고 눈물을 보였다. 사진=유튜브 캡처
  이후로 계은숙은 ‘참새의 눈물(すずめの涙)’ ‘꿈의 여인(夢おんな)’ ’흠뻑 취해서(酔いどれて)’ ‘한밤중의 샤워(真夜中のシャワ一)’ ‘베사메무초’ 등 매년 차트 1위를 달리는 히트곡을 냈다. 거의 매년 전일본유선방송대상, 고가마사오 기념 음악대상, 일본 레코드 대상 등 각종 음악상을 휩쓸며 정상을 달렸다. ‘진격의 거인’이었다. 1988년은 기념비적인 해다. 계은숙은 ‘꿈의 여인(夢おんな)’으로 제21회 일본유선대상(日本有線大賞) 그랑프리를 차지했고 연말에는 NHK의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홍백가합전〉 출연 확정 통보를 받고 나서 많이 울었어요. 그동안의 고생이 다 인정받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감사하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정작 방송 때는 흥분하고 떨려서 어떻게 노래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NHK 홍백가합전〉은 NHK가 매년 12월 31일에 방송하는 남녀 대항 형식의 음악 프로그램이다. 일본에서 ‘1년을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1945년 이래 단 한 번도 연기나 결방이 없는 국민축제다. 출연 확정 자체가 뉴스가 되고, 아티스트의 소속사에서 별도의 보도자료를 내며 자체 영상을 만들 만큼 비중이 큰 프로그램이다. 리허설을 사흘 동안 진행할 만큼 공을 들이는데, ‘이 바쁜 연말연시에 며칠씩 스케줄을 비워야 하느냐’는 항의를 아무도 하지 않는다. 출연 자체가 성공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출연으로도 일본 대중에게 영원히 기억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글 서두에 이야기한 ‘7회 연속 출연의 신화(神話)’가 위대한 업적인 이유다. 프로야구로 치면, 한국 선수가 일본에 건너가 7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한 것이라고 할까? 물론 시청자 수는 〈홍백가합전〉 쪽이 올스타전보다 훨씬 더 많다.
 
  ‘7회 연속 출연’ 중에는 ‘사상(史上) 최초’의 타이틀도 있다. 1992년 호리우치 다카오(堀內孝雄)와 듀엣으로 ‘도시의 천사들(都会の天使たち)’을 발표해 크게 히트했는데, 이해의 〈홍백가합전〉에서 백팀 소속인 호리우치 다카오와 홍팀 소속의 계은숙이 이 곡을 함께 불러 프로그램 역사상 ‘최초로 혼성(混成) 듀엣’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시절의 일상을 계은숙은 “정신없이 굴러가는 축구공처럼 살았다”고 회상한다.
 
  “일본 전국 순회공연을 하는데 발톱이 여러 개 빠질 정도였어요. 인기를 얻은 뒤로는 하루에 4~5시간 자고 새벽부터 밤까지 매일 돌아다녔습니다. 일본의 콘서트는 거의 초청 가수 없이, 주인공 가수가 혼자서 2~4시간씩 노래를 하거든요. 중간에 쉴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노래인가 노동인가 싶을 정도였죠. 대극장 공연을 1년에 100번도 넘게 했으니까요.”
 
  계은숙의 뛰어난 음악성과 인기를 입증하는 증거들은 더 있다. 하나는 스티비 원더가 일본에서 컬래버로 공연한 유일한 가수라는 것. 도쿄에서의 디너쇼 행사였다. 두 번째는 전국 투어를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했다는 것.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버금가는, 음폭(音幅)이 넓은 가창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在日한국인들의 偶像’

 
  일본 팬들은 열광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등 두 명의 전 총리가 공개석상에서 열혈 팬을 자처할 정도였다. 가는 곳마다 팬이 몰려, 거리를 다니기가 어려웠다. 1996년 세금 문제 등 복잡한 사정이 겹쳐 타이거엔터프라이즈(タイガ一エンタ一プライズ)로 이적했는데, 중국 민족이 낳은 역대 최고의 가수 덩리쥔(鄧麗君·1953~1995년)이 속해 있던 회사다. 덩리쥔은 방송국에서 만나면 ‘외국에서 고생 많다’며 함께 차도 마시고, 건강 조심하라며 위장약도 챙겨준 선배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성애(李聖愛)는 만나지 못했고, 김연자(金連子)와는 방송국에서 세 번 정도 마주쳤다. 이기현 김기수기념사업회 대표는 계은숙과 천호상고 동기동창이다. 학교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다. 이기현은 1988년 일본으로 건너가 1990년까지 다이어트 복싱 트레이너로 일했다.
 
  “TV를 틀면 어느 시간에나 ‘계은숙’이 나왔어요. 그때만 해도, 한일 양국의 격차가 커서, 일본에 건너가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계은숙은 기존의 재일교포들, 그리고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모두의 우상(偶像)이었어요. 한국 가수가 일본 팬들의 사랑을 받고 정상을 달린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이었으니까요. TV에서 계은숙을 보면 ‘고생(苦生) 얼마 안 남았어. 힘내!’라는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가라오케에서도 가장 많이 찾는 노래여서, ‘계은숙의 전곡(全曲)을 외워서 치지 못하면 건반 연주자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있었죠.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계은숙과 친구라고 하면, ‘저렇게 유명하신 분과 어떻게 친구냐’라며 저보고 사기꾼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세계로 나가겠다는 꿈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인생이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1992년 2월 22일에 계은숙은 3세 연상의 사업가와 조용기 목사의 주례로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결혼했고 1998년에 이혼했다.
 
  “어려서부터 오빠 동생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요. 저도 그렇지만, 그분도 자기 삶 없이 바쁘게 산 사람입니다.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죠. 잘되기를 바랍니다.”
 
  콘서트를 하면 여전히 5000석이 넘는 대극장의 전 좌석을 순식간에 매진시키는 능력자였지만, 중년의 우울증이 함께 찾아왔다. 2001년부터 시작해서 2006년에 화해로 끝난 전 소속사와의 수십억 원 규모의 지급금 반환소송도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 계기는 2007년 11월 26일에 벌어진 사건이다. 관동지방 후생국 마약단속부가 계은숙을 ‘각성제단속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도쿄 지방법원은 12월 21일 즉결재판을 통해, 그녀의 각성제단속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인물의 증언이다.
 
  “계은숙씨가 각성제를 복용한 이유는 20여 년 전 대구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입니다. 당시 유리 파편이 머리에 박혔는데 완벽하게 치료하지 않고 행사를 다녔어요. 나이가 들면서 더욱 고통이 심해진 겁니다. 누군가가 두통약이라며 사다 준 건데, 본인은 의약품이라고 알고 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계은숙은 한 번도 일본 귀화(歸化)를 고려하지 않았고, 이름도 한국식 발음을 고집했다. 개명(改名)하고 귀화하라는 요구에 응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부(富)와 인기가 보장된 편안한 길을 그녀가 마다했다는 사실이다.
 
  “한번은 〈홍백가합전〉에 기모노를 입고 나오라고 하더군요. 난처했죠. 엔카 가수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때였고, 저를 오랫동안 아껴준 일본 팬들을 등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대신 엔딩 때는 한복을 입고 나가는 조건을 달았어요. 방송국에서도 오케이 했죠. 당시 방송을 보시고 교민들이 많이 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일본 방송에서 한국어로 노래한 적도 있어요. 한국 특집이라든가, 교포들 대상 공연에서 한복을 입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 공연은 다릅니다. 저는 기모노나 한복은 다 입고 싶지 않았어요. 의상이 아니라, 노래로 평가받자는 생각이었으니까요. 일본에서 저는 외국인 가수잖아요? 제 마음속에 태극기가 있는데, 굳이 경계심을 줄 이유가 없죠. 귀화 제의를 거절한 건 ‘가수로서 세계로 나가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계은숙을 추방하지 않았다. 초범(初犯)이며 실수였다고는 하지만 여론 때문에 당분간은 활동 금지라고 했다. 오랫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한 매니저와 스태프들의 생계가 걸린 일이라, 고민 끝에 실어증(失語症)까지 찾아왔다.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다시 일본으로 갈 수 없게 됐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출국 전에 일본 법무성과 재입국 관리사무소 등을 찾아 절차를 밟고 동의를 얻었어야 했는데, 그 과정을 생략했던 탓이다.
 
 
 
어머니

 
귀국 후인 2009년 어느 날 교회로 향하는 계은숙. 이 시기 그에게는 안 좋은 일들이 이어졌다. 사진=조선DB
  2008년 한국으로 돌아온 계은숙은 은거(隱居)했지만,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2014년 국내 복귀를 타진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 무렵 사기(詐欺) 혐의로 송사(訟事)에 휘말렸고, 마약 소지 혐의 등으로 수감생활도 했다.
 
  “30년 지기 친구 보증을 섰다가 사기를 당했습니다. 일본에서 번 돈으로 구입한 땅, 한국의 집 한 채 등 120억원에 이르는 돈을 사기당했어요. 겨울인데 집세도 못 내고 난방도 못 하고, 오갈 데가 없을 정도였죠. 어머니 건강도 급속히 나빠지고, 막다른 길에 몰린 느낌이었습니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심정에 나쁜 생각도 많이 했어요.”
 
  계은숙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닌 기독교인이다. 처음 출석한 교회의 담임이 활빈교회 김진홍(金鎭洪) 목사다. 감방 안에서 울며 회개하고 ‘엄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6·25 전쟁고아로 태어나 치매(癡呆)까지 앓는 어머니의 병원비조차 낼 수 없는 냉정한 현실…. 어머니는 2016년 계은숙이 옥중(獄中)에 있을 때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법무부로부터 3박 4일간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어머니의 빈소(殯所)를 찾았다. 영정(影幀) 앞에서 통곡하는 모습에 팬들도 함께 울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걸 처음 알고 계(桂)씨 종친회를 수소문해 두 분을 만나게 해드렸어요. 두 분 만남은 서로 냉랭하게, 애정없는 말만 하시다 짧게 끝났죠. 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나를 속였나, 한편으로는 배신감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가 불쌍했어요. 그래서 ‘엄마를 내가 지켜드려야 한다, 빨리 돈 벌어서 호강시켜 드리자’는 생각을 아주 어려서부터 했습니다. 일본에서 성공했을 때도 엄마를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죠.
 
  어머니는 떠나시기 직전까지도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혼자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거니?’ ‘뭘 하고 싶니?’라며 제 걱정을 하셨어요. 돌아가시던 날도 제 면회를 오려고 하셨답니다. 제가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지인을 통해 나중에 들으시고는 한동안 곡기를 끊으셨다고 들었어요. 교통사고 후유증에 노환, 당뇨, 치매가 겹쳐 건강이 급격하게 안 좋은 상태였는데 그만…. ‘엄마가 오래 살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라고 했는데, 제가 자식 노릇을 못 한 거죠. 어머니 장례 치르려 구치소 담당 주임한테 얘기하고 밖에 나오기까지 7~8시간이 걸렸는데, 그 시간이 마치 지옥 같았어요. 저는 불효자식입니다. 어머니는 제 모든 것이었어요.”
 
 
  아직도 계은숙 기다리는 일본 팬들
 
계은숙은 2019년 5월 새 정규앨범 〈Re:Birth〉 발매를 계기로 무대 복귀를 알렸다. 사진=뉴시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한다는 것이 계은숙의 다짐이다. 자살 예방 캠페인 ‘365생명사랑’의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고, 9월에는 신영균 선생을 기리는 일에 홍보대사로 명(命)받았다. 큰 무대나 국내 방송 활동은 거의 없었지만, 2010년 3월 이태원 캐피탈호텔 디너 콘서트, 테레비 아사히(テレビ朝日) 인터뷰, 2019년 약 37년 만에 새 정규앨범 〈리:버스(Re:Birth)〉 발매 후 서강대 메리홀 공연 등을 했다. 소규모 팬미팅은 꾸준하게 해온 편이다.
 
  ― 공연 계획은 없습니까.
 
  “먼저 송사를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유력 정치인의 조카를 믿었다가 여러 일을 겪었는데, 다 사람들을 너무 믿었던 제 불찰(不察)이죠. 연말까지는 명예회복에 집중하겠습니다. 활동은 그다음에 할 생각입니다. 일본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동포들, 외로운 계은숙에게 가족이 되어주었던 일본 팬들을 저는 잊을 수 없어요. 일본 활동 중단 후 ‘계은숙을 위한 청원운동’을 하신 일본 팬들이 계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앞서 얘기한 이기현 김기수기념사업회 대표도 동창생을 위해 물밑 작업 중이다.
 
  “2010년 〈테레비 아사히〉 인터뷰는 시청률이 36%였다고 합니다. 2019년 12월 24, 25일에 워커힐호텔 극장식당에서 계은숙 공연이 있었죠. 전석매진(全席賣盡)이었어요. 수많은 일본 팬이 ‘돌아와 주길 바란다’며 공연장 입구에서 꽃다발을 들고 기다렸어요. 그때의 박수와 환호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팬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코로나19 상황이 풀리면 계은숙을 그리워하는 한국·일본 팬들을 대상으로 ‘계은숙 콘서트’ 여행 상품을 만들 계획입니다. 명동의 호텔 무대에서 고품격 콘서트를 정기적으로 여는 거죠. 9월 하순에 명동 호텔 운영자분들과 계은숙, 저 다 같이 만나서 막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한류의 개척자’
 
  명동(明洞)은 일본인 관광객의 최애(最愛) 관광지이고 계은숙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김기수의 챔피언 빌딩과 기념사업회가 자리한 곳이다. ‘계은숙 명동 콘서트’는 어쩌면 소식 끊어진 옛 친구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가는 ‘추억여행(追憶旅行)’일 터이다. 한일 양국의 ‘마음의 다리(橋)’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다시 이기현 대표의 말이다.
 
  “오사카 공연 때 분장실로 찾아갔었죠. 저를 보고 멀리서 흔들어주던 손을 잊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가까이 갈 수 없었고 얘기도 한마디 못 나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계은숙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줬습니다. 그 불씨를 살리고 널리 퍼뜨리는 일을 누군가는 꼭 해야 합니다.”
 
  계은숙 관련 유튜브에는 인상적인 댓글이 많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 생활이 곤란한 한국인들에게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어느 누구도 갚은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루빨리 복귀하여서 옛날 그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정한 한류의 개척자. 모국이 따뜻하게 품어줘야 합니다”라는 한국 팬들의 글도 보이고 “눈물 흘리며 듣고 있습니다. 결코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이 남긴 수많은 노래는 우리의 보물입니다. 공연이 실현되면 꼭 가고 싶습니다!”라는 일본 팬들의 절절한 호소도 있다.
 
  계은숙은 한일 양국을 잇는 추억의 가교(架橋)다. 양국 팬들의 그리운 눈물을 닦아줄 의무가 있다. 그녀의 노래가 다시 들려오면, 우리는 다리 위에서 다 같이 만날 것이다. ‘흠뻑 취해서’ ‘노래하고 춤추며’ 모두 어울려 다 같이 마음을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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