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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와 앨범

신태수의 〈서해, 두무진에서 장산곶〉, 벨벳 언더그라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드 니코》

서해바다, 마르고 닳도록 욕망의 민낯, 로큰롤 지평을 넓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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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속 바다는 寒波를 견디고 있어… “평화와 행복의 바다 그리고 싶어”
⊙ 혜성처럼 빛났던 뉴욕의 아방가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자유분방한 로큰롤 세계 열어
그림 〈서해, 두무진에서 장산곶〉을 배경으로 앉은 신태수 화가. 사진=조현호
  신태수(申泰洙·57) 화백의 그림 〈서해, 두무진에서 장산곶〉을 보았다. 인천 전시회(2018년 11월)에서 보고, 서울 전시회(1월 3~16일)에서도 보았다.
 
  넋을 잃고 그림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창문으로 바다를 보는 것마냥. 바다 냄새가 그림을 뚫고, 종이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독히 추워 보이는 군청색 물빛. 그림 속 바다는 한파(寒波)를 견디고 있었다. 철조망 가시 하나 보여주지 않지만 마치 남북이 갈라진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멀리 북녘의 장산곶이 가물가물했다. 온 땅이 눈으로 하얗게 비치고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땅, 마르고 닳도록 우리의 땅이 멀리 아스라이 보였다. 슬펐다.
 
  그림 앞에 이대로 서 있다면 눈썹 위에 서리가 앉을지도 모르겠다고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보았다. 누군가 그림 앞에 선 내게 “눈빛이 풀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리라. 그날 저녁 지글지글 끓는 온돌에 온몸을 대고 잤지만 오한이 든 것 같이 몸이 무거웠다. 작년 4·27 남북회담 당시 평화의 집 4층 연회장(그것도 주빈석) 뒤편을 장식한 〈서해, 두무진에서 장산곶〉은 오래오래 기억될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이튿날 도록에서 그림 〈검은 여〉를 펼쳤다. ‘한지에 먹과 채색’. 올해, 아니 작년(2018년)에 그린 그림이었다. 〈서해, 하늘 못〉 그림도 보았다. 역시 ‘한지에 먹과 채색’. 작년에 그렸다.
 
  분명 화가는 어떤 절박한 심정으로 저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저 바다는, 지중해나 뜨거운 아랍해의 에메랄드빛 바다처럼 ‘레몬 티’가 어울릴 법한 바다가 아니었다. 빈 상자에 걸터앉아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바라보는 그런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에 복받치거나 슬픔에 복받치거나 누구보다 사랑했던 이를 이 시간 이후로 증오하거나 헤어진… 그런 느낌이랄까. “분단이라는 엄연한 사실 속에서, 그 닫힌 문이 언제 열릴지도 모르는 채, 서해 5도를 돌며 작업을 해 왔던” 신 화백의 최근 몇 해 동안 화업(畫業)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의 진실을 찾고 싶습니다”
 
〈검은여〉 69×173.5, 한지에 먹과 채색, 2018.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대치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다(그의 작품 전체를 알지 못해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철책이나 출입금지 표지, 군부대와 철모, 버려진 탄피, 여러 군 시설 등이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더 끌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화가 신태수의 고향은 내륙인 경북 의성이다. 안동 봉정사 아래에 작업실이 있다. 바다를 연모하는 내륙의 욕망이 바다 그림에 투영된 것일까. 2012년부터 3년 동안 백령도를 오가며 서해 5도의 풍광을 화폭에 담아 왔다. 기자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5~6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바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다를 관찰하다 보면 각양각색의 변화가 느껴져요. 똑같은 시간대이면서도 그날의 날씨에 따라 물 색깔이 달라집니다. 이 바다의 진실을 찾고 싶었습니다.”
 
  바다색은 어떻게 내는 것일까.
 
  “안료는 돌가루로 만든 석채(광물성)를 씁니다. 식물성 안료는 ‘등황’이라는 걸 쓰는데 노란색으로 고체덩어리라 다시 분말로 만들어 아교와 혼합한 후 건조시켜서 물에 녹여 사용합니다.
 
  표현하고 묘사하는 기법, 안료의 사용법은 작가의 능력(지식, 테크닉, 감성, 현장상황, 종이 질)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어요.
 
  분명한 건 소재가 가진 의미, 조건에 따라 순간의 감각과 현재의 능력치를 최대한 발휘하려 애쓸 뿐입니다. 서해바다의 존재, 가치는 저마다 다르겠지요?”
 
  신태수의 수묵담채화는 전통 산수화에 뿌리를 두고 실경 작업을 해 오면서 독자적인 현대 화풍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체적인 공간의 상황묘사나 화가의 감정전달이 자연스런 비결은 뭘까. 아마도 부감법 때문일지 모른다. 부감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편안한 시각적 효과가 느껴지는 화법.
 
  ‘서해 5도, 평화를 그리다’ 전시회는 작년 말 인천을 거쳐 안동, 대구, 서울에서 순회 전시회를 가졌다. 그는 “언젠가 ‘평화의 바다’를 넘어 ‘행복의 바다’를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먼 훗날 통일이 된다면 그때 서해 5도를 위해 즐겁게 붓을 다시 잡고 ‘행복의 바다’를 그리고 싶습니다. 서해 5도가 춤추는 그날을 빨리 보고 싶습니다.”
 
 
  현대인의 욕망이 앨범을 관통
 
루 리드.
  루 리드(Lou Reed·1942~2013)는 이미 고인(故人)이다. 그의 생전 얼굴은 타락한 천사 같다고 할까. 욕망의 민낯에 가까울지 모른다. 지금도 저주를 받아 허름한 뉴욕 뒷골목이나 서울의 을지로 어딘가에 서성일 것 같다.
 
  1960년대 뉴욕 아방가르드 록의 대부였던 루 리드. 혜성처럼 빛나다가 사라진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 작곡자였다. 그의 신공은 1967년 발표된 첫 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드 니코(Velvet Underground and Nico)》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앨범이 그의 전부였다.
 
  8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세션으로 앨범 녹음을 마친 저력 때문인지 잡음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직접 프로듀서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잡음이 음악적 효과로 느끼게 한다.
 
  이 앨범에 담긴 노래들은 정적인 우울한 사운드와 달리 어마어마한 가사를 담고 있다.
 
  마약 남용, 사디즘과 마조히즘, 성적 일탈 같은 현대인의 욕망이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 〈아임 웨이팅 포 더 맨(I'm waiting for the man)〉은 헤로인을 얻으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사를 짧게 인용하면 이렇다. ‘그가 온다. 그는 온통 검은 옷을 입었어. 홍보용 신발과 큰 밀짚모자. 그는 결코 이른 적이 없어. 항상 늦지. 네가 제일 먼저 배울 말은 항상 기다려야 한다는 말. 난 내 남자를 기다리지.’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아 어쿠스틱 사운드로 시작하는 〈Heroin〉에선 약물로 인한 몽롱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내 정맥에 스파이크를 넣었을 때, 내가 달리기를 할 때 나는 예수의 아들처럼 느껴. 그리고 난 그냥(And I guess that I just don't know), 그리고 난 그냥….’
 
  〈Venus In Furs〉는 또 어떤가. 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나를 깨우는 수천 개의 꿈. 눈물로 만들어진 서로 다른 색깔들. 끈 팬티. 너를 기다리고 있는 벨트. 타격(Strike), 사랑하는 여주인. 가볍게 치지 않은 사랑으로 채찍을 맛보라.’
 
  읊조리는 듯한 음성이 음산하지만 어떤 곡(〈아일 비 유어 미러(I’ll be your mirror)〉, 〈선데이 모닝(Sunday Morning)〉)은 나른하고 심약한, 무척이나 예쁜 음악적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나 노골적인 거친 표현 탓에 당시 뉴욕의 라디오는 기꺼이 방송금지 처분을 내렸다. 평론가들은 “앤디 워홀의 교묘한 겉치장에 불과하다”며 역겨워했다.
 
  음악잡지 《롤링스톤》은 흔한 리뷰조차 거부했으며 앨범은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앨범을 산 극소수의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만의 밴드를 결성, 자유분방한 로큰롤의 세계를 열었다.
 
 
  루 리드가 발견한 더러운 책 한 권의 因緣, 運命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왼쪽)와 첫 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드 니코〉.
  데이비드 보위, 뉴욕 돌스(New York Dolls), 모트 더 후플, 록시 뮤직, 섹스 스피톨스, 카스(Cars) 등 수 많은 초기 펑크그룹, 전성기 펑크그룹, 후기 뉴 웨이브 그룹, 헤비메탈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70~80년대 로큰롤이 금기(禁忌)와 형식, 권위를 허무는 쪽으로 뛰어가는 데 영향을 미쳤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탄생한 것일까. 루 리드가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더러운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제목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였다. 루 리드는 “와,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군” 하며 책을 읽었다. 한 정신과 의사가 쓴 서문엔 전쟁 전 독일 언더그라운드 신(神)의 타락상이 기술돼 있었다.
 
  루 리드는 밴드 이름을 벨벳 언더그라운드라고 정하고서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한번은 공연 티켓을 끊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저자였다. 루 리드는 그 사실을 알고 이렇게 외쳤다.
 
  “오, 이건 계시야! 누군가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거야.”
 
  루 리드는 그녀에게 저자의 사인을 요청했다.
 
  “아,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작년 6월 국내 번역된 책 《스미스 테이프》.
  이 이야기는 작년 6월 국내 번역된 《스미스 테이프(The Smith Tapes), 록이 찬란했던 날들의 기록 1969~1972》에 나온다. 이 책에는 루 리드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오랫동안 ‘마약 밴드’라고 불리지 않았느냐?”는 방송인 하워드 스미스(Howard Smith)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마약은 안 됩니다. 그건 일탈이니까요.”
 
  ― 당신들이 지독한 약쟁이 밴드였다는 건 사실 아닌가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도대체 뭐가 지독할 정도로 엄청난 약쟁이 밴드인 건지 잘 모르겠군요. 내 말은 마약은 사람들을 질리게 만드는 어리석은 길이라는 겁니다. 물리도록 할 수 있는 건 굳이 마약 말고도 더 좋은 게 많아요.”
 
  ― 이제 마약 같은 건 더는 안 하나요.
 
  “그럼요. 사실 나는 비타민을 먹고 있어요.”
 
  어찌 됐든 첫 앨범 발표 후 어떤 영문인지 몰라도, 멤버들 간의 불화가 생겼고 6년 뒤인 1973년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완전히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은 해산되지 않았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드 니코》는 지난 2009년 미국 음악잡지 《롤링 스톤》이 뽑은 ‘역대 최고의 앨범 500선’에서 13위를 기록, 놀라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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