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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근대잡지 《소년》 발상지와 조선광문회 터는 어디인가

문화사, 문학사, 근대사를 아우르는 정신문화 발상지의 현장을 기억하자

글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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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 창간된 신문관의 주소는 사정동 59통 5호와 8호, 지금의 을지로 유안타증권 건물 인근
⊙ 신문관이 있던 두 번째 장소인 32통 4호 일대는 후일 을지로 인쇄소 골목
⊙ 상리동 32통 4호 신문관에서 3·1독립선언서 조판

자료조사·고증 : 吳仁煥 연세대 정년퇴임 교수
금년은 육당 최남선이 최초의 근대잡지 《소년》을 창간한 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는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이 최초의 근대잡지 《소년》을 창간한 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소년》에 앞서 대략 35종의 잡지가 발행되었지만, 체계를 갖춘 근대잡지의 효시(嚆矢)는 《소년》이었다. 잡지협회가 1965년부터 11월 1일을 ‘잡지의 날’로 정하여 기념행사를 갖는 것도 《소년》 창간일을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 글은 최초의 근대잡지 《소년》의 발상지가 어디였는지 그 역사적 현장을 찾아보려는 것이 목적이다. 나는 2년 전 2016년 10월 잡지협회 발행 《매거진 저널(Magazine Journal)》에 〈잡지의 발상지에 건립하는 기념 조형물/ 《소년》 《개벽》 《사상계》 《학원》 잡지의 뿌리를 복원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었다. 문학과 관련된 기념관과 조형물은 전국 여러 곳에 수없이 건립되어 있지만 국민의 정신문화를 고양하면서 근대화와 항일(抗日), 민주화를 이끌었던 잡지와 관련된 기념물은 없다는 아쉬움을 지적한 것이다.
 
  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잡지 네 개를 제시했다. 최남선의 《소년》(1908년 11월 창간)을 비롯하여 1920년대를 대표하는 일제(日帝)강점기 종합잡지 《개벽》(1920년 6월), 1950~1960년대 민주화 투쟁을 선도한 《사상계》(1953년 4월), 전쟁 중에 창간되어 중·고등학생들의 정서함양과 마음의 양식이 되었던 《학원》(1952년 11월)이었다. 《소년》과 《개벽》은 발행 장소가 서울이고, 《사상계》는 부산, 《학원》은 대구에서 창간되었으니, 잡지협회의 주도로 지방자치단체의 협조를 얻어 추진하면 가능한 사업으로 보았다.
 
  위에 거론한 잡지의 발행 장소는 잡지 역사의 차원에서만 중요하다고 볼 문제는 아니다. 문화사·문학사·근대사를 아우르는 정신문화의 산실이자 발상지였다. 문학사에 길이 남는 작품을 발표한 문인은 물론이고, 교수와 연구자들, 정치인, 논객들이 드나들었고 삽화를 그린 화가와 편집자들이 모여 새로운 정신문화를 도입하고 겨레의 진로를 모색하고 이론을 제시한 현장이었다.
 
  기념관이나 조형물을 세우려면 우선 정확한 위치를 찾아야 한다. 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전쟁의 참화를 겪는 동안 서울은 지형과 건물, 도로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던 부산과 대구도 도시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 새로운 도로와 빌딩이 들어서서 원래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중요한 잡지가 발행된 산실이 어디였는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적임자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오인환(吳仁煥·83) 교수이다.
 
 
  최남선, 황실 國費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일제강점기 신문관 위치 지적도. 황금정(을지로)을 사이에 두고 아래에 《소년》이 창간된 사정동(絲井洞, 실우물골)이 있었다. 인접한 위치가 동현(銅峴, 구리개)이었다. 《소년》 발행지는 ‘한성남부 사정동 59통 5호’와 ‘인출처(印出處) 사정동 59통 8호’였다.
  이 글은 오인환 교수가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집필하였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최남선이 신문관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소년》을 시작으로 여러 잡지를 발행하고,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여 고전을 수집 출판하여 우리의 정신문화 유산을 복원하고 널리 알려서 ‘조선학(朝鮮學)’의 토대를 닦으려 했던 장소가 어디였는지를 알아보려는 목적이므로 이미 알려진 최남선의 언론·문화 활동은 주제와 관련이 있는 부분에 한해서 간단히 언급하는 선에서 그치려 한다.
 
  최남선은 한성 중부 상리동(上犁洞) 21번지(을지로 2가 22번지)에서 최헌규(崔獻圭)의 차남으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2가 22번지로 알려진 지번은 21번지의 잘못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장소는 최남선이 출생할 때에 최헌규가 살았던 집이 아니다. 1910년에 신문관을 이전하여 출판 활동과 함께 조선광문회를 창립하여 고전 간행과 사전 편찬사업을 벌였던 곳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최남선의 출생지는 《소년》 발행지였던 한성남부 사정동 59통 5호와 8호였다고 보아야 한다. 토지대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지점이지만 주소는 《소년》의 판권에 확실히 나온다. 출생지는 사정동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최헌규는 관상대 기사이면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력을 축적했다. 최남선은 육 남매 가운데 넷째였고, 아들로는 둘째였다. 큰아들인 형 창선(昌善)은 1898년에 출생하여 후에 최남선과 함께 신문관·조선광문회를 경영했는데, 신문관의 대표로 최남선이 편집한 여러 잡지의 발행인이었다. 동생 두선(斗善)은 1895년에 태어났다. 후에 《동아일보》 사장, 국무총리, 적십자사 총재를 지내는 인물이다. 여동생이자 막내인 설경(雪卿)은 1899년에 출생해서 1913년에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같은 반 졸업생 가운데는 허영숙(許英肅)과 이각경(李珏璟)이 있었다. 허영숙은 후에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여의사로 이광수와 결혼했다. 이각경은 1920년부터 《매일신보》 부인기자로 근무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다. 이각경은 최초의 여기자로 알려진 최은희(1924년 《조선일보》)보다 4년 먼저 《매일신보》 부인기자로 활동했다.
 
《소년》 《청춘》 등 여러 잡지 발행 장소와 조선광문회 자리. 현재의 지도에서 ① 《소년》을 창간한 사정동 ② 신문관-조선광문회가 출판사업과 고전을 출간한 을지로 2가 11번지 SKT타워 ③ 옛 삼각정 21번지(최헌규 소유)와 21-1(최남선 소유). ③에는 현재 ‘조선광문회 터’ 표석이 있다.
  최남선은 열네 살이었던 1904년 10월 황실이 파견한 국비(國費) 유학생 5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는 제일 어린 나이였음에도 반장이 되었다. 일행은 11월 5일 도쿄부립 제일중학교에 입학했다. 같이 간 동급생 가운데는 최린(崔麟)·조용은(趙鏞殷·趙素昻)·강전(姜荃) 등이 있었다.
 
  최린은 3·1운동 33인 중 한 사람으로 최남선과 행동을 같이했으나, 나중에는 친일(親日)로 돌아서서 1938년부터는 《매일신보》의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강전은 후에 《경남일보》에 관계했다는데, 《경남일보》 창간 시(1909년 10월 15일)에는 부사장이었다. 최남선은 강전의 호(號)를 ‘위사(渭史)’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이듬해 4월 제2대 사장을 맡는 강위수(姜渭秀)와 같은 인물일 것이다.
 
 
  《대한유학생회학보》 편집
 
  최남선은 일본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불과 한 달 뒤인 12월 3일 자로 퇴학, 1905년 1월에 귀국했다. 가장 먼저 나온 최남선 연구서인 홍일식의 《육당연구》에 의하면, 같이 갔던 나이 든 유학생들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보고 열네 살 어린 나이의 최남선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워 돌아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후에 나온 연구서 중에는 최남선이 《황성신문》에 투고했던 글이 필화를 입어 민병도(閔丙燾)와 함께 1개월간 구류되었다는 설(說)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 머물던 1905년 12월 3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최창선·최남선 형제 명의로 민영환(閔泳煥)의 죽음을 애도하는 광고가 실려 있다. 형제는 이때 벌써 시국문제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06년 3월 최남선은 자비(自費)유학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9월에 와세다(早稻田)대학 고사부(高師部) 지리역사과에 입학했다. 최남선은 이때 처음으로 잡지 편집 기회를 가졌다. 유학생회가 발행하던 《대한유학생회학보》의 편찬원 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편집과 동시에 몇 편의 글도 발표했다(《대한유학생회학보》, 제1호, 1907년 3월, pp.91~94 〈회록〉 참조). 대한유학생회는 1906년 9월 2일 유학생 259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열고 결성한 단체였다.
 
  최남선이 편집한 《대한유학생회학보》 첫 호는 이듬해인 1907년 3월에 출간되었다. 매호 100페이지 정도 크기로 5월까지 모두 3호가 나왔는데 판권란에는 ‘편집인 최남선, 발행인 유승흠’으로 되어 있다. 최남선이 편집을 전담했다는 뜻이다. 그가 도쿄에서 잡지 편집을 맡았던 경험은 한 해 뒤 1908년에 창간하는 《소년》 제작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최남선은 《유학생회학보》 첫 호에 글 세 편을 실었다. 첫머리에 실은 〈현시대의 요구하는 인물〉을 비롯해서 과학논문 〈혜성설〉과 워싱턴 전기가 그것이다. 〈혜성설〉과 〈현시대의 요구하는 인물〉은 최남선의 기명이고 〈화성돈전(華盛頓傳·워싱턴전)〉은 최생(崔生)으로만 되어 있어 최남선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장차 그가 만드는 잡지들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아 최남선 집필로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최남선은 제2호에도 권두언 〈국가의 주동력〉과 〈지리학잡기〉(崔生)를 실었는데 이때 벌써 논객과 잡지 편집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유학도 1년 만에 끝났다. 이번에는 자진 퇴학이었다. 1907년 6월 와세다 대학생들 주최 모의국회가 있었는데 토의안건이 〈조선왕 래조(來朝)에 관한 건〉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된 조선 국왕이 일본에 오는 데 대한 접대 절차를 토의하자는 모욕적인 주제였다. 이에 와세다대학 재학 한국 유학생들이 분개하여 총장에게 항의했다. 학교에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자 유학생 70여 명이 모두 자진 퇴학해 버렸다. 최남선도 퇴학하여 그의 학교 공부는 이로써 끝나고 말았다.
 
 
  인쇄시설 도입 신문관 설립
 
신문관 첫 출간 책 《경부철도의 노래》. 수첩 크기 50쪽 분량의 작은 책으로 1908년 3월 20일 초판 발행 한 달 뒤(4월 20일)에 재판, 5월 10일에는 3판이 발행되었다.
  최남선은 이때부터 자신이 직접 출판사업을 벌이기로 하고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도서관에서 내외문헌을 섭렵하면서 오하시 신타로(大橋新太郞)가 박문관(博文舘)을 경영하면서 여러 잡지와 출판물을 발행하는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오하시는 다양한 잡지와 문학 전집을 발행하여 일본 신문화운동의 일대 연총(淵叢)이 되었을 뿐 아니라 거액을 내놓아 오하시도서관을 설립한 인물이었다. 최남선은 이 도서관에 다니면서 감화와 영향을 받았다. 오하시는 《태양》 《소년세계》 《문예구락부》(세 잡지 1895년 창간), 《중학세계》(1898), 《유년세계》(1900), 《여학세계》(1901), 《사진화보》(1906) 등 다양한 잡지와 《일본문학전서》(1890), 《일본문고》(1891) 등을 발행했다. 최남선도 여러 잡지와 고전, ‘륙전소설’이라는 문고본을 출판, 사업을 벌이게 된다.
 
  우선 신문관의 창립 연도부터 알아보자. 1907년 여름으로 알려진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육당이 이 땅에 오신 지 백주년》(동명사, 1990)과 《육당 최남선》(조용만, 1964), 그 밖의 여러 자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남선은 1907년에 도쿄에서 《대한유학생회학보》를 편집하고 있었다. 그는 6월에 와세다대학을 자퇴했는데(하타노 세쓰코의 앞 책에는 1907년 3월 자퇴로 되어 있다) 바로 귀국하여 여름에 출판사를 창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계와 서적 구입 등의 준비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 기사와 당시의 정황을 고려하면 1908년 초에 귀국하여 신문관을 설립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최남선은 1907년에 와세다를 자퇴한 후 아버지로부터 자금을 얻어내어 도쿄의 수영사(秀英社·전신은 秀英舍)에서 인쇄기계와 조판 식자시설을 구입하여 출판사 설립을 서둘렀다.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4월 17일 자에 동현(銅峴) 사는 최남선이 4월에 인쇄기 구입을 위해 일본에 갔다고 보도했다가, 2주일 뒤인 5월 2일 자[事實相違]에 먼저 기사는 오보(誤報)라고 정정했다. 최남선이 수년 동안 일본에 머물고 있으며 본국에 돌아온 적이 없기 때문에 4월 17일 자 기사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 직후인 5월 14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18세 청년 최남선이 출판사[書籍館]를 설립할 계획으로 아버지로부터 자금 2만환을 얻어 각종 서적과 활자기계를 사들였다고 보도했다.
 
  최남선이 1908년 초에 귀국했을 것으로 보는 또 다른 근거는 최남선 자신이 1918년 6월에 발행한 《청춘》 제14호에 〈신문관 창업 10주년〉을 회고하는 글을 실었던 것을 보아도 와세다 자퇴 이듬해인 1908년 초에 귀국하여 신문관을 설립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최남선이 인쇄기를 들여와서 신문관을 설립한 때는 1908년 초였고 처음 출간한 책은 《경부철도의 노래》였다. 수첩 크기 50쪽 분량의 작은 책으로 1908년 3월 20일 초판 발행 한 달 뒤(4월 20일)에 재판, 5월 10일에는 3판이 발행되었다. 신문관이라는 이름으로 우선 작은 단행본 출판을 시작하였다가 11월에는 정기간행물 《소년》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잡지 출판 활동을 벌이게 된다.
 
 
  《소년》 창간은 사정동 59통
 
《소년》이 창간된 신문관의 위치. 유안타증권(을지로 2가 185번지) 언덕 근처 약간 위쪽 어느 지점이 1910년 7월까지 《소년》을 발행한 신문관 자리로 추정된다.
  신문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출판사업을 시작하고 잡지를 창간했던 장소는 어디였을까? 첫 출판물인 《경부철도의 노래》(1908년 3월 20일 발행) 판권에는 주소가 없다. ‘인출처(印出處) 신문관 인쇄처, 총발행처 한성 신문관’으로만 되어 있다. 그런데 《소년》 창간 직전인 10월 15일에 발행된 《한양가》 판권에는 두 개의 주소가 기재되어 있다. ‘총발행처 신문관’(한성남부 사정동 59통 5호)과 ‘인출처 신문관인출소’(사정동 59통 8호)로 같은 지번인데 호수가 약간 다르다. 마주 보고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11월에 창간된 《소년》의 광고란과 창간호 판권에도 신문관은 주소가 두 곳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양가》와 마찬가지로 ‘판매부’는 한성남부 사정동(絲井洞) 59통 5호, ‘인출부(印出部)’는 사정동 59통 8호이다. 판매부는 잡지와 책을 편집하고 판매하는 곳이고, 인출부는 인쇄하는 장소였다. 장차 언론사와 문화사에 길이 남을 여러 잡지를 창간하고 출판사업과 문화운동을 벌이는 출발점이 사정동 59통 5호와 8호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소년》 창간 당시의 발행소인 사정동 59통 5호와 8호가 최남선의 아버지 최헌규의 자택이자 최남선의 본가였다고 생각한다.
 
  첫째, 1908년 4월 17일 자 《대한매일신보》가 ‘동현 사는 최남선’이 4월에 인쇄기 구입을 위해 일본에 갔다고 보도했던 것을 보면 《소년》을 창간할 당시 최남선의 거주지는 사정동이었던 것이다. 동현(구리개)은 사정동(실우물골)과 인접하여 경계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동현 사는 최남선’으로 보도했던 것이다. 동현방에는 동현동, 사정동, 박궁동, 조동 4개 동이 속해 있었는데 신문기사에서 동현은 동현방을 가리킨다.
 
  둘째, 1911년 12월 2일에 사정(査定)한 토지대장에는 삼각정 21-1(대지 122평)의 소유주인 최헌규의 주소가 반정동(半井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 반정동이라는 동명이 없기 때문에 사정동을 잘못 표기했을 것이다. 최헌규의 거주지인 사정동(반정동)은 바로 최남선의 거주지였다.
 
  셋째, 조용만은 1964년에 나온 《육당 최남선》에서 최남선이 상리동(上犁洞) 본가 건너편에 집을 얻어 편집실과 공장을 설치하고 신문관이라 이름 붙였다고 썼다. 상리동 본가로 알려진 삼각동 21번지는 신문관의 실제 위치인 사정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이곳을 ‘본가 건너편’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조용만은 사정동 본가(사정동 59통 5호)의 건너편 사정동 8호를, 그 후에 최남선이 살았던 상리동 본가 건너편으로 혼동하여 이렇게 썼을 것이다.
 
  신문관-《소년》의 발상지를 고찰한 선행 연구자도 있었다. 부끄럼(bookgram)이라는 필명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는 판권에 기재된 사정동 59통 5호가 신문관의 본관이 있던 장소라고 본다. 그 건너편이었을 59통 8호는 인쇄 설비가 마련된 공장, 즉 인쇄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관 건물에서는 편집과 영업, 판매가 이루어졌고, 인쇄부에서는 인쇄만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했다(http://bookgram.pe.kr/120093277822). 그는 정확한 고증을 통해서 조용만이 신문관-《소년》의 발상지를 사정동이 아니라, 상리동(웃보시고지) 본가 건너편으로 잘못 지정하는 바람에 그 후에 혼란을 야기했다고 지적한다.
 
  한편 《육당 최남선전집》(현암사, 1974) 제15권에 실린 연보에는 신문관의 위치를 “여름에 상리동 자택을 개수하여 출판사와 인쇄소를 설치하고, 신문관을 창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잘못 기록된 것이 명백하다. 《소년》의 첫 발행지는 상리동에서 을지로를 건너야 하는 위치인 사정동이라는 사실은 판권에 기재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조용만과 그 후의 기록에 나오는 ‘상리동 본가의 건너편’은 ‘사정동 본가의 건너편’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최남선의 아버지 최헌규나 형 최창선 소유의 집이 사정동에 있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소년》이 창간된 신문관의 주소는 분명히 사정동 59통 5호와 8호다. 지금은 어디일까. 을지로 입구 큰길에서 2가 쪽으로 바라보는 위치에서 두 번째 오른쪽으로 꺾인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경사진 언덕으로 이어지는데, 골목 입구 왼쪽에는 현재 유안타증권 건물이 서 있다. 그 언덕 근처 약간 위쪽 어느 지점일 것이다.
 
 
  상리동 32통 4호(을지로)로 이전
 
신문관발매서적목록.
  사정동 59통 소재 신문관에서 최남선은 1908년 3월부터 1910년 7월까지 《소년》 통권 19호를 발행하면서 출판사업을 병행했다. 1910년 7월에 발행된 《소년》에 신문관 인출국을 한성남부 대평방 상리동 32통 4호로 옮겼다는 ‘이주광고(移徒廣告)’를 실었다. 인쇄시설은 이전했지만 판권에는 사정동 59통 5호가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기재되어 있다. 편집부는 이전하지 않았다가 1년 뒤 1911년 5월에 발행된 마지막 호 《소년》에 상리동 32통 4호로 기재되었다. 이때부터 편집, 인쇄를 모두 32통 4호에서 진행했던 것이다(표1).
 
  신문관이 이전한 장소는 《소년》이 발행되던 사정동 59통 5호에서 을지로 건너 약 150m 지점인 상리동 32통 4호다. 을지로 입구에서 6가 쪽을 바라보면 오른쪽에 사정동이 있었고, 길 건너 왼쪽 상리동의 SKT타워 모퉁이 지점이 최창선 소유의 건물(77평)이었다. 첫 발행지보다는 좀 더 넓고 편리한 공간으로 옮겨 잡지와 출판사업을 확대한 것이다. 2층 건물이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광문회를 창립하여 사무소로 사용한 곳도 이 건물이었다.
 
  신문관이 이전한 장소이자 조선광문회 건물이었던 상리동 32통 4호(일제 당시 황금정 2정목 21번지, 광복 후 을지로 2가 21번지)는 SKT타워가 세워지면서 터를 넓게 잡은 지번통합으로 현재는 ‘을지로 2가 11번지’의 일부에 편입되어 을지로 2가 21번지는 없어졌다. 최남선은 《소년》 이후 다음 잡지를 발행했다.
 
  ‌《붉은 져고리》(월 2회 간, 1913.1~ 1913.6, 12호 발행)
  《새별》(1913.4~1915.1, 16호 발행)
  《아이들보이》(1913.9~1914.9, 13호 발행)
  ‌《청춘》(1914.6~1915.3, 6호 발행, 1917.5~1918.9, 15호 발행)

 
  《청춘》은 이광수(李光洙)도 참여하여 잡지 발행을 도왔다. 이광수는 1913년 11월에 정주(定州) 오산학교 교사를 사직하고 만주·상하이·러시아를 떠돌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이듬해 7월경에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신문관에 머물면서 최남선의 잡지 편집을 도왔다. 해외의 경험을 ‘외배’, 또는 ‘춘원’이라는 필명으로 여러 편 실었고 《청춘》이 실시한 ‘현상문예’(1915년 5월 제7호부터)의 단편소설 심사도 맡았다. 그러던 중에 이광수는 조선광문회에서 만난 송진우(宋鎭禹)의 중개로 김성수(金性洙)의 도움을 받아 두 번째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신문관 발행 《붉은져고리》의 편집인 김여제(金輿濟)는 이광수가 오산학교에서 가르친 수제자로, 이광수의 추천으로 최남선이 서울로 불러와서 잡지 편집을 맡겼다.
 

 
  광문회도 신문관과 같은 건물
 
신문관 제2차 위치. 을지로 2가 11번지 SKT타워가 서 있는 장소. 원래 을지로 2가 21번지였으나 지번 통합으로 현재는 그 지번이 없어졌다. 이곳에서 최남선은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1910년대에 《청춘》을 비롯한 여러 잡지와 약 20여 종의 고전을 발간했고, 최초로 국어사전과 현대적인 한자사전을 편찬했다.
  《소년》 제4권 제2호(1911년 5월 15일)에 실린 조선광문회 광고도 상리동 32통 4호로 잡지 발행소와 같은 주소다. 최남선이 여러 잡지를 발행하고 광문회를 운영하는 등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장소다.
 
  조선광문회의 취지문과 규정은 1910년 8월 《소년》이 정간당한 뒤 새 잡지 《역사지리연구》에 발표하려 했으나 잡지 허가가 나오지 않자 이해 12월에 속간된 《소년》 제3년 제9권에 게재했다. 스러져 가는 고문헌을 수집하고 새로 편찬, 간행, 보급한다는 목적이었다. “5000년 왕성선철(往聖先哲)의 정신적 유산을 되살려 민족 문화를 현창(顯彰)하며, 조선 고문명과 세계 학계에 이바지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1년에 5000페이지 이상을 출판하여 매월 평균 200~300페이지 정도의 책 2권씩을 회원들에게 배포한다는 계획이었다. 조선광문회는 주간과 고문을 두고 지방 지회를 둔다는 독립체 형태였으나 신문관의 부설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동국통감(東國通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역사(海東繹史)》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 방대한 고전들을 간행했다.
 
  광문회는 1911년부터 1918년경까지 약 20여 종의 고전을 발간했고, 최초로 국어사전과 현대적인 한자사전을 편찬했는데, 신문관이 모태였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서는 광문회가 출판한 서적을 신문관 출판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신문관과 광문회의 출판은 확실히 구분되는 것도 있지만, 겹쳐서 애매한 경우도 있다.
 
  1914년 5월까지 출간된 《신문관발행서적 총목록》은 수첩 크기 작은 책자 68쪽 분량으로 신문관과 조선광문회 발행 서적을 소개하고 이를 20개 항목으로 분류했다. 교과서류를 비롯하여 사전 자전서, 종교 이학(理學)서, 수양서, 사전(史傳) 연표서, 지리 지도서, 춘향전, 옥루몽, 수호지와 같은 소설과 ‘륙전소설’(심청전, 흥부전, 홍길동전, 남훈태평가, 사씨남정기) 등 방대한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4년에 출간한 《연려실기술》(광문회), 《신자전》(광문회, 1915, 1920), 《현금 조선문전》(신문관, 1920, 1928)이 모두 상리동(황금정 2정목 21)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문관-광문회의 실질적인 소재지는 상리동 2가 21번지였다고 보아야 한다.
 
  광문회는 언론인,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문인, 미술가 등 당대의 지도급 인사와 문화인들이 모여들었던 문화와 학술의 본산이었다. 주시경도 신문관에서 《말의 소리》(1914)를 출간했고, 조선어 사전 《말모이》를 편찬하던 중에 사망했다. (이곳에 드나들었던 인물에 관해서는 오영섭, 권두연의 연구 참조.)
 
  두 번째 발행소 상리동 32통 4호에서 청계천 쪽으로 약간 떨어진 삼각동에는 최헌규(21번지, 122평)와 최남선(52평, 21-1번지) 부자 명의의 집이 인접해 있었다. 이곳에 있던 2층 건물은 광문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은 광문회가 고전을 발굴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등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곳은 아니다. 출판물을 편집 발행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회합과 사랑방 역할을 했던 장소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리동 32통 4호(을지로 2가 21번지, 1917년과 1927년 지적목록에 최창선 소유로 되어 있다) 신문관 두 번째 장소였다.
 
  상리동의 신문관-광문회는 많은 책과 잡지를 편집, 발행하고 인쇄했던 장소다. 신문관이 있던 을지로 2가 뒤쪽 일대는 신문관 이후에 소규모 인쇄소들이 밀집했던 지역이다. 신문관이 있던 장소가 후에 인쇄소 골목으로 확대된 셈이다(표2).
 

 
  1969년 철거
 
조선광문회 터가 있는 을지 한빛거리. 오른쪽 오인환, 왼쪽 정진석. 오른쪽에 ‘조선광문회 터’라는 작은 표지석이 보인다.
  최남선이 3·1운동 후에 잡지 발행을 중단했던 시기인 1920년대에는 인쇄소로 활용되어 《개벽》(1920년 6월 창간), 《문예시대》(1926년 11월 창간)도 신문관에서 인쇄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사해 보면 더 많은 잡지와 단행본이 이곳에서 인쇄되었을 것이다.
 
  상리동 2가 21번지(후에 삼각동으로 지명이 바뀜)에 있던 2층 최남선 소유 건물은 광문회로 알려져 있다. 최남선의 손자 최학주는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가 살림집을 삼각동 굽은다리[曲橋]로 옮기고 엄친의 사랑채 2층에 조선광문회를 창립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의 해 12월이다. 1층으로는 신문관이 이사했다. 나는 아직도 청계천 광교 남쪽 언저리에 있던 이 건물을 기억한다. 목조 건물이고 지붕은 약간 푸른색이 도는 기와로 덮여 있었다.”(최학주,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 나남, 2001, p.147)
 
  하지만 최학주도 신문관의 두 번째 사옥에서 광문회가 실질적으로 제일 활발하게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잘 몰랐던 것 같다. 광문회의 마지막 장소는 골목 안에 위치해서 청계천까지 약간의 거리가 있었지만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천변이 넓어지면서 천변에 있던 집들이 사라지고 이때 파란 2층집이었던 광문회도 철거되고 말았다. 현재 청계천 ‘한빛광장’에는 작은 표석 하나가 박혀 있다. 광문회 터 표석으로 간단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조선광문회는 1910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단체로서 신문화(新文化)의 요람이자 나라를 잃은 지식인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곳이다.
  육당은 이곳에서 삼국사기 동국통감 등 많은 고전을 간행하고,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청춘’(靑春) 등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또한 1919년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파란 2층 목조의 조선광문회 건물은 1969년 도로 확장으로 철거되었다.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상리동 32통 4호 신문관에서 조판까지 마쳤으니 이곳은 독립운동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는 장소다. 최남선은 우리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화려하고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조선광문회에 대해 좀 더 많은 사람이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기념관을 세울 수는 없을까. 서울시와 잡지협회가 앞장서서 《소년》 발행지와 광문회 복원사업을 추진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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