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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우리 풍수

‘계급독재’와 조선의 풍수

성군(聖君)과 반(反)풍수 대신(大臣)과의 풍수논쟁

글 : 김두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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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숭유숭불숭풍(崇儒崇佛崇風), 조선은 숭유억불숭풍(崇儒抑佛崇風)’
⊙ “나라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니다”(정도전)
⊙ 주자는 《산릉의장(山陵議狀)》 지을 정도로 풍수 신봉했지만, 조선 사림들은 풍수 배격

김두규
1960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독문학·중국학·사회학 박사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저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풍수 이야기》《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1947)에서 “독재 중에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라 하였다. 백범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지만, 동시에 조선의 주자학도 계급독재로 규정하였다. 조선의 주자학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 규정하는 독재”였으며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되었다고 단언한다.
 
  풍수 역시 그러한 ‘계급독재’에 의해 질식되고 왜곡되면서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로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 풍수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사상이자 문화가 된단 말인가? 이에 대해 이한우는 우리 역사 속의 풍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고려는 숭유숭불숭풍(崇儒崇佛崇風), 조선은 숭유억불숭풍(崇儒抑佛崇風)이었다’(《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2012). 즉 고려는 유학·불교·풍수를 숭상하였고, 조선은 유학과 풍수를 숭상한 반면 불교를 배척하였다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 1000년 우리 민족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풍수였다.
 
 
  “풍수는 조선 사회의 특질”
 
《조선의 풍수》 등을 지은 무라야마 지준.
  우리 민족의 풍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다. 1931년 그가 펴낸 《조선의 풍수》에서였다. 그는 이 책에서 “풍수는 조선 사회의 특질(特質)로서 멀리 삼국시대부터 신라·고려·조선이라고 하는 유구한 세월을 거쳐 왔으며 그 영향력은 미래에도 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 《조선의 습속》 《조선의 귀신》 《조선의 풍수》 《조선의 무격(巫覡)》 등과 같은 저서를 20여 년(1919~1941)에 걸쳐 출간하여 조선학(한국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의 활동이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이뤄졌다는 이유에서다. 해방 이후 한국학자들은 그를 인용하면서도 제대로 그를 평가한 이들은 없다. 일부러 무시하려 한다.
 
  그가 1931년에 출간한 《조선의 풍수(일본어)》는 85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당시 이 책이 출간되자 그 어떤 책보다 많이 팔렸다. 복사판들이 풍수술사들뿐만 아니라 일부 지식인 사이에 나돌았다.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할 즈음 이 책이 긴급히 수배되었다. 도로를 내면서 잘리게 될 수많은 산맥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하여서이다. 많은 사람에게 풍수 교과서 역할을 하였으며, 필자 역시 번역본이 나오기 전부터 일어판을 복사하여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이 ‘풍수고전’으로 지속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가지 이유이다.
 
  첫째, 책의 내용이 충실하여 풍수입문으로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없다.
 
  둘째, 우리 민족이 본래 갖고 있던 풍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무라야마는 조선 문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풍수임을 단언한다.
 
 
  “반도 어디를 가더라도 믿지 않은 자가 없다”
 
  “조선 문화의 이면적 근저적(根底的) 형상의 하나가 풍수라는 것이다. 이 풍수라는 것은 현재 표면적 문화형상만을 가지고서 조선 문화를 논하려는 많은 사람, 이른바 신세대 가운데에서는 ‘구세대의 누습, 문맹자 사이에서 지지되는 미신’이라 하여, 이것을 조선 문화의 하나로 추가하는 것을 꺼리는 자가 있으며, 비교적 진지한 조선 문화 연구가들조차도 이를 옛 시대의 풍습이며, 민도 낮은 자들에 의해 형성된 문화라는 이유로 그다지 중요시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풍수라는 것은 적어도 십수 세기의 장기간 조선 민속신앙계에 그 지위를 점해 왔고,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반도 어디를 가더라도 믿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일반에게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므로 다른 문화에 비해 그 지지의 강고함과 광범위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그 특질이 멀리 삼국시대로부터 신라·고려·조선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그 심원한 깊이와 강한 보급력은 앞으로도 생활상에 영향을 충분히 약속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삼국시대부터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풍수는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과 같이한다. 그 최초 우리 민족의 ‘풍수서’는 《신지비사(神誌秘詞)》이다. 《삼국유사》 《고려사》 및 조선 초기까지 인용되는 《신지비사》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우리 민족이 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적어도 3000여 년 전에 제작된 조선 고대의 국문”(《조선상고사》)으로 보았다. 일종의 역사서이면서 국토 전반을 아우르는 국역풍수서였지만 아쉽게도 몇 문장 이외에는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앞에서 이한우는 고려와 조선이 공통적으로 풍수를 숭상하였다고 하였지만, 풍수 내용은 전혀 다르다. 고려에서는 《신집지리경》 《유씨서》 《지리결경》 《경위령》 《지경경》 《구시결》 《태장경》 《가결》 《소씨서》 《도선기》 《옥룡기》 《삼각산명당기》 《삼한회토기》 《해동비록》 등이 주요 ‘풍수교과서’였다. 조선에서는 《청오경》 《장서(금낭경)》 《호순신(지리신법)》 《명산론》 《지리문정》 《감룡경》 《착맥부》 《의룡경》 《동림조담》 《탁옥부》 등이 ‘풍수교과서’였다.
 
  《신지비사》에서 출발한 풍수가 왕조를 달리하면서 풍수교과서가 달라진 것은 시대문제를 해석 혹은 대응하는 논리가 시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풍수는 10학에 포함된 국학이었다. 그러한 풍수를 집요하게 없애려고 한 세력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주자학 독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그 처음은 조선 개국 직후였다.
 
 
  정도전의 ‘억불억풍(抑佛抑風)’
 
풍수를 비판했던 정도전. 그의 무덤은 서초구청 인근에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라기보다는 공동창업자였다. 그는 고려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의 필연성을 통찰하였다. 낡은 제도와 이념을 버려야 했다. 고려가 취했던 ‘숭유숭불숭풍(崇儒崇佛崇風)’ 가운데 ‘숭유’만 취하고 ‘억불억풍(抑佛抑風)’을 하였다. 불교와 풍수를 배척하였다. 그는 왜 불교를 배척해야 하는지 《불씨잡변》에서 이같이 말한다.
 
  “저 불씨는 사람이 사악한지 정의로운지 올바른지 그른지는 가리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부처에게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이것은 비록 열 가지의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면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풍수도 그에게는 제거 대상이었다. 당시 풍수가 문제가 된 것은 도읍지를 옮기는 문제에서였다. 예부터 나라를 세운 창업자들이 가장 먼저 하였던 것은 새로운 도읍지 선정이었다. 불가피하게 기존 도읍지를 쓴다 할지라도 전 왕조의 궁궐을 쓰지 않았다. 허물고 다른 곳으로 옮겨 지었다. 왜 그러했는가?
 
  원(元)나라를 세운 쿠빌라이(忽必烈)의 일등공신은 유병충(劉秉忠)이었다. 유병충은 풍수에도 전문가였다. 새로운 제국 도읍지와 관련하여 그는 말한다. “옛날부터 나라를 세움에 있어, 가장 먼저 지리의 형세를 이용하여 왕기를 살려서 이를 바탕으로 대업을 성취한다.”
 
  이 말은 나라를 세운 이들에게 금과옥조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이다. 지금 내가 계룡산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태조 2년, 1393년)
 
 
  ‘나라의 다스림은 사람에게 있는 것’(정도전)
 
  천도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394년 8월 8일부터 8월 13일 사이였다. 그것도 조정에서가 아닌 당시 도읍지 후보로 떠오른 무악(현 연세대 일대)과 한양(현 경복궁 일대)이란 현장에서였다. 무려 6일간에 걸쳐 현장에서 벌어진 풍수논쟁이자 천도논쟁이었다. 이때 천도에 대해 개국공신들과 풍수관리들 대략 세 파로 나뉘어 의견을 달리한다.
 
  첫째 부류는 천도론 찬성론자들이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지식인들 가운데 음양·풍수의 3대가로 알려진 권중화·하륜·무학이 그들이다. 권중화는 이성계에게 계룡산을, 하륜은 무악(현 연세대)을 추천할 정도로 풍수에 정통하였다. 특히 하륜은 자신의 풍수설로 계룡산 도읍지 불가론을 주장하면서 개국 직후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무학은 이성계가 천도를 결정할 때 최종적으로 의견을 물었던 인물이다.
 
  둘째 부류는 대부분의 풍수관리, 즉 서운관(書雲觀)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풍수설에 따르자면 개경이 최고의 길지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풍수설을 내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후원 세력이었던 전 왕조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세상의 큰 틀을 읽어내지 못한 기능인들이었다.
 
  세 번째 부류는 정도전을 비롯한 일부 유학자들이다. 무악과 한양 그 어디도 마땅치 않게 여기며 개성(송도)을 고집한다. 토목공사로 쓸데없이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다가 주자학의 사상적 기반에 바탕을 둔 신념, 즉 ‘나라의 다스림은 지세가 아니고 사람에게 달렸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정도전은 임금 앞에서 말한다.
 
  “신은 음양술수(풍수)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라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태조 3년, 1394년)
 
  이에 태조 이성계는 화를 내며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으며, 의심스러운 것은 소격전에 가서 결정하겠다”며 논란을 매듭짓는다. 소격전에 가서 점을 쳐 결정, 즉 신탁(神託)에 따르겠다는데 정도전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4년 뒤인 1398년 정도전은 죽임을 당한다. 반면 이성계 천도론에 찬성하였던 하륜·조준·김사형·무학 등은 천수를 누린다.
 
 
  풍수를 반박한 어효첨
 
세종이 묻힌 경기도 여주의 영릉. 세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풍수의 효능을 인정했다.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지 50년쯤 지난 뒤의 일이다. 새 나라 조선은 안정되었고, 도읍지 한양은 인구가 2배 이상 늘어났다. 주민들이 배출하는 쓰레기가 명당수인 개천(청계천)을 오염시키는 문제가 생긴다.
 
  집현전 관리이자 풍수에 능했던 이선로가 “개천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여 물이 항상 깨끗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임금에게 건의를 한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대제학 정인지 이하 주요 대신들로 하여금 논의를 하게 한다. 논의 결과 ‘여러 관청이 성내 각 집들을 분담하여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개천에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
 
  왜 임금과 대신들이 개천 물 관리에 그토록 진지했을까? 풍수적 이유이다. 조선조 풍수학 고시과목 《지리신법》의 명당에 흐르는 물(명당수)에 관한 대목이다.
 
  “대개 산은 사람의 형체와 같고 물은 사람의 혈맥과 같다. 사람은 형체를 갖고 있는데, 사람의 생장영고(生長榮枯)는 모두 혈맥에 의존한다. 이 혈맥이 한 몸 사이를 순조롭게 돌아 일정한 궤도가 있어 순조롭고 어그러짐이 없으면, 그 사람은 편안하고 건강하다. 일정한 궤도를 거슬러 절도를 잃으면 반드시 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조선 왕실의 운명은 한양의 명당수(개천)를 잘 관리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런데 어효첨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풍수를 논하는 소(論風水疎)’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서였다. 다음은 그 핵심 문장이다.
 
  “명당수(청계천)에 더러운 물건을 던져 넣지 못하도록 금하기로 했다 합니다. 신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도읍의 땅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번성하게 사는지라, 번성하게 살면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쌓이게 됩니다. 반드시 소통할 개천과 넓은 시내가 그 사이에 종횡으로 트여 더러운 것을 흘려내야 도읍이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물은 맑을 수가 없습니다.”
 
  어효첨이 도성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한 반면, 임금과 주요 대신들은 풍수설을 바탕으로 나라와 왕실의 운명을 우선한다. 그런데 어효첨은 “무릇 운수의 장단과 국가의 화복은 모두 천명과 인심의 유무에 달린 것이고, 실로 풍수지리와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쐐기를 박는다.
 
 
  풍수를 거부한 김종직
 
어효첨의 아버지의 묘. 풍수에서 말하는 좋은 요건은 다 갖추었다고 정인지는 말했다.
  당연히 세종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옆에 있던 정인지에게 물었다. “어효첨의 주장이 그럴듯한데 그가 부모를 장사지낼 때 풍수지리설을 따르지 않았는가?”
 
  난처한 정인지가 절묘하게 대답한다.
 
  “일찍 제가 명을 받아 함안에 가서 어효첨이 그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을 보았는데 풍수지리에 현혹되지 않은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룡·백호·주작·현무 등 전후좌우에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풍수에 현혹되지는 않았으나 사신사가 구비된 땅에 장사지냈다’는 뜻이다. 세종은 어효첨으로 하여금 더 이상 왕실과 국가풍수에 관여치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너그러운 세종 임금이었다. 그러나 아들 세조는 달랐다.
 
풍수 등 잡학을 배척했던 조선 주자학의 종장 김종직과 그의 묘.
  1464년 세조 임금은 훗날 사림파 종장(宗長)으로 추앙받게 될 34세의 김종직을 파직한다. 이유는 “임금이 문신들로 하여금 유학 말고도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을 함께 공부하게 함은 마땅치 않다”고 직무보고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언급된 잡학들 가운데 지리·음양·복서는 사주와 풍수로 표현할 수 있으니 김종직은 이것들을 율려·의약과 함께 배제시키라고 주장한 것이다.
 
  “지금 문신들로 하여금 천문·지리·음양·율려·의약·복서·시사(詩史)의 7학을 나누어 닦게 합니다. 시사는 본래 유학자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이야 어찌 유학자가 힘써 배워야 할 학이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세조는 김종직을 파직시킨다(그 이듬해 복직됨).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
 
  조선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유학뿐만 아니라 잡학도 함께 써야 한다는 주장과 유학(특히 주자학)만으로 충분하다는 두 주장이 충돌한 것이다. 오너 CEO 세조 입장에서는 미래 전문 CEO가 되어야 할 김종직이 유학만 고집하는 것이 경박하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게 느껴졌다. 세조는 잡학도 학문으로 인정하여 그 실용성을 취할 것을 신하들에게 요구하였다. 반면 김종직은 주자학 하나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학문의 경직화 그리고 주자학 이외의 모든 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는 결과를 야기한다. 훗날 김종직이 사화의 주인공이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한 것도 그의 이런 경직된 사고에 의해서였다.
 
 
  주자는 풍수설 신봉
 
주자학을 개창한 주자는 풍수신봉자였다.
  대개 나이가 들면 세상에 대해 유연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종직은 달랐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485년(성종 16년)의 일이다. 대구부사를 역임하고 병조참지란 현직을 지닌 최호원이 황해도를 다녀와 아홉 가지 일을 보고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도선풍수를 되살려 활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신이 가만히 황해도의 산천 형세를 살펴보니, 안악·신천은 모두 후덕한 산으로 형세가 단정하고 두터워 … 나쁜 병이 생기지 않음이 당연합니다. 반면 황주와 봉산은 돌산이 높게 솟아서 모두 뾰족하며 험악한 모양이며 … 물길이 이리저리 찢어져 흘러갑니다. 산천에 독기가 없을 수 없어 질병과 여귀가 생김은 마땅한 것입니다. … 청컨대 도선의 비보(裨補)풍수설에 의거하여 다스리는 법을 밝히소서.”
 
  이 상소는 임금과 조정대신들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온건론부터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의견이 다양했다. 그 가운데 김종직도 있었다. 당연 강경론자였다. “최호원이 이미 비보풍수설로 글을 올려 한 나라(一國)를 현혹”시켰는데 겨우 “세 사람 이상의 대중을 현혹시킨 율”에 따라 처벌함이 불가하다며 엄벌을 주장한다. 김종직에게 풍수는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술(邪術)이었다. 주자학만이 유일한 진리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림파들이 유일한 진리로 숭상하였던 주자학의 주인공 주자는 풍수설을 신봉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송나라 황제인 영종(寧宗)에게 《산릉의장(山陵議狀)》(1194년)을 올려 풍수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밝힐 정도였다. 이 《산릉의장》은 중국과 조선의 사대부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풍수서가 된다. 유독 주자학만 숭상하던 사림파들이 주자의 풍수설을 취하지 않은 것은 조선만의 특이한 현상이었다. 주자학만을 고집하던 사림파의 이율배반을 지적한 것은 정조 임금이었다.
 
 
  정조와 이현모의 풍수논쟁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
홍릉 오른쪽의 빈자리는 영조가 유언한 자리라고 한다.
  1776년 정조가 임금에 오른 직후 황해도사 이현모(후에 이철모로 개명)를 관직에서 내쫓았다. 원래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는 생전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정해 놓았다. 영조의 첫째 부인 정성왕후가 1757년 죽자 지금의 서오릉 홍릉(弘陵)에 안장한 뒤, 그 오른쪽을 자신의 무덤 자리로 정해 놓았다. 영조의 수릉(壽陵)이었다. 영조가 죽자 조정대신들은 당연히 그 자리로 안장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풍수설을 내세워 다른 곳을 찾게 한다. 당장 반박 상소가 올라온다. 그 첫 번째 상소를 올린 이가 이현모였다.
 
  “홍릉 오른쪽 비워놓은 자리는 곧 대행대왕(영조)께서 유언하신 곳입니다. …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풍수설은 주공이나 공자와 맹자가 말하지 않은 바입니다. 어버이 장사를 주공·공자·맹자처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과 함께 벼슬에서 내치도록 지시한다.
 
  “술사(풍수사)들을 많이 불러 널리 명산을 찾는 것은 이미 정자(程子)·주자가 정해 놓은 논의가 있었으니, 어찌 성인들이 말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 마땅히 엄하게 조처해야 할 일이다마는 (풍수)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인 듯하니, 그의 상소를 돌려주되 돌아가 주자의 《산릉의장》을 연구하게 하라.”
 
  이현모가 공자·맹자를 인용하자 정조는 정자·주자를 인용하여 받아쳤다. 정조가 주자말고도 정자를 인용한 것은 정자 역시 풍수설을 깊게 신봉하여 〈장설(葬說)〉이란 풍수론을 남겨 중국과 조선의 풍수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 풍수 배격 심해져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였고 세종·세조·정조는 문화를 융성시킨 위대한 임금들이었다. 그들은 풍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풍수학을 연구하게 하였고, 세조 역시 부왕(父王) 세종의 명으로 풍수를 공부하였다. 정조 임금은 세손 시절부터 15년 넘게 풍수 공부를 한다. 자신이 어떻게 풍수 공부를 하였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조는 방대한 기록을 남겨 지금도 《홍재전서》에 수록되어 전한다.
 
  국가 경영에 성리학만이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임금들과 달리 성리학만이 조선을 다스릴 유일한 진리라고 강조했던 주자학자들은 풍수를 철저하게 배척했다. 이른바 백범이 말한 ‘계급독재’였다. 정작 주자학의 주인공인 정자나 주자도 풍수를 수용하였는데,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정자와 주자가 남긴 〈장설〉과 《산릉의장》까지 애써 무시하려 들었다. 조선의 모든 유학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퇴계학자 김기현(전북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조선 중기 이전은 사림파(주자학)와 같은 권위주의가 없었다. 학문 풍토가 그리 경직되지 않았다. 훈구파는 부국강병책과 외교의 유연성을 가졌다. 반면에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는 성리학 이외에 그 어떤 학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학문의 경직화는 사문난적이란 이름으로 다른 사상을 가진 자들을 처형하기까지 이른다. 사림파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을 말한다.”
 
 
  주유야풍(晝儒夜風)
 
  풍수는 분명 조선의 국학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자학 강경파에 밀려 풍수는 더 이상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주유야풍(晝儒夜風)’이었다. 낮에는 유학을 논하고 밤에는 풍수를 논한다는 말이다. 특히 정조 죽음 이후 풍수는 더 이상 국가기관이나 인식력이 뛰어난 문신들에 의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는다. 국역풍수는 말할 것도 없이 묘지풍수이론조차도 제대로 전수되거나 강습되지 않아 풍수는 하찮은 잡술로 타락하였다. 거의 사라질 조선 풍수의 원형을 조금이나마 복원한 이가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였다. 역사학자 이병도의 명저 《고려시대연구》는 고려시대를 풍수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인데 이는 해방 후의 일이다(1947년).
 
  전 세계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정원은 일본정원이다. 일본정원의 고전 《작정기(作庭記)》에는 풍수가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한때 금지되었던 풍수가 ‘복권’되면서 중국에서 풍수는 마천루와 도시 건설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생태학과 환경학의 기본 바탕으로 차용된다. 우리에게 지금 풍수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직도 대선(大選) 후보들의 선영(先塋)이나 찾아다니면서 ‘제왕지지(帝王之地)’ 운운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풍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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