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숨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8·15에 찾아보는 건국준비위원회 관련 자취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계동 여운형 집터에는 칼국수 집 들어서
⊙ 현대건설 주차장 앞 보헌빌딩이 건국준비위원회 있던 임용상 집 자리
⊙ 조선총독부, 박석윤(전 주폴란드 만주국 총영사) 통해 건국준비위원회에 450만 달러 전달…
    200만 달러의 행방은 묘연(최하영 전 심계원장)
서울 계동 현대건설 빌딩 근처에 있는 보헌빌딩. 일제시대 거상 임용상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
 
  함석헌의 말이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8・15해방은 갑자기 닥쳐온 사변이었다.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일제(日帝)의 패망을 내다봤거나 해방 이후를 설계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1886~1947)과 그의 동지들이 그랬다.
 
  여운형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8월 10일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현우현・황운・이석구・김진우・조동호・이여성・이상백 등의 지사들이 여기에 가담했다. 건국동맹은 산하에 농민동맹 등을 두었다. 농민동맹에는 후일 가나안농군학교로 유명해지는 김용기 장로도 참여했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나오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조선총독부의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국무총리 격)은 여운형에게 다음날 아침 8시 서울 필동의 총감 관저에서 만나자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그게 일제 패망과 관련된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동생 여운홍(呂運弘・1891~1973)에게 전화했다. 여운홍은 서울 계동 여운형의 집으로 달려갔다. 여운형이 말했다.
 
  “아까 초저녁에 용산 조선군 참모부에 있는 모(某)씨가 와서 내일 정오를 기하여 일본 천황의 특별방송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곧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전할 터이라고 하더니 조금 전에 엔도가 사람을 보내어 내일 아침 8시에 자기 관저로 와 달라고 한다.”
 
  여운형은 동석했던 홍증식(사회주의 계열의 언론인. 월북 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장 역임)에게는 매일신보사를 접수해 국민들에게 뿌릴 호외를 인쇄하라고 지시했다. 여운홍에게는 경성방송국을 접수, 우리말 밑 영문방송을 준비하라고 했다.
 
 
  치안권 이양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
  다음날 여운형과 만난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이제 패전했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곧 발표될 것이다. 당신은 치안을 맡아달라. 이제부터 우리의 생명은 당신에게 달렸다.”
 
  여운형은 5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둘째, 집단생활지인 경성(서울)의 식량 3개월 치를 확보할 것.
 
  셋째, 치안유지와 건설 사업에 어떠한 구속이나 간섭을 하지 말 것.
 
  넷째, 조선에 있어서 추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
 
  다섯째, 전 조선에 있는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우리 건설 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말 것.
 
  엔도 정무총감이 여운형을 만나 치안권을 맡아달라고 한 것은 일본의 패망이 알려진 후 한국 내에 있는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국내에 있던 여러 조선인 민족지도자들 가운데 왜 여운형을 선택한 것일까? 또 하나 의문이 있다. 어떤 정치적 사업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 혹시 총독부와 여운형 사이에서 ‘정치자금’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을까?
 
  두 의문과 관련된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심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을 지낸 최하영(崔夏永·1908~1978)의 증언이 그것이다. 당시 총독부 농상국 농상과장이었던 최하영은 총독부 내 고등문관시험 출신자들 중에서 최고참급에 속했다.
 
 
  총독부 조선인 과장 최하영의 증언
 
  1945년 8월 11일 엔도는 최하영을 불러 “전쟁의 귀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최하영은 “필승의 신념만 견지하고 나가면 어떻게든 타개될 테지요”라고 답했다. 엔도는 “그런 형식적인 얘기를 들으려고 자네를 부른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자네 진심을 한 번 들어보려고 부른 걸세. 심중대로 얘기해 봐”라고 말했다.
 
  최하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카이로회담의 내용과 같이 전쟁이 종결되면 조선은 해방이 된다고 합니다. 해방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전쟁이 끝나면 일본인과 조선인은 헤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불필요한 유혈사태는 방지해야 합니다. 해방이 되면 일본인은 조선인에게 잘 건국해 나가라고 인사하고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잘 건너가라고 인사하는 장면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방침을 180도 전환해야 합니다. 종전까지의 일본인 위주의 조선통치방침을 내일부터라도 조선인 위주로 바꾸고 일본인은 여기에서 어느 정도 불리를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을 최고 방침으로 한다면 다른 문제는 자연히 풀릴 것이 아닙니까?”
 
  엔도 총감이 말했다. “본관은 오늘 비로소 이 자리에서 인간으로서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들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네. 어제부터 민족지도자 세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나 의견을 들었는데, 최후까지 초토작전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말을 하더군. 그 말은 도저히 진심으로 안 들리고 일본이 전쟁에서 지는 것이 뻔한데 어떻게 조선에서 초토전술을 할 수 있겠나?”
 
  그날 12시에 니시히로 경무국장(경찰청장)이 점심을 같이하자고 했다. 경무국장은 “정무총감으로부터 그 구체적인 방법을 최 과장과 의논하라는 명을 받았다”면서 “통치권을 조선인에게 어느 정도 이양한다면 누구에게 이양하는 것이 좋겠느냐? 최 과장이 그 중간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최하영은 박석윤(朴錫胤·1899~1950)을 추천했다. 그 후 박석윤이 여운형을 설득해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의 치안권을 이양받도록 했다는 것이 최하영의 생전 증언이다.
 
 
  박석윤의 등장
 
주폴란드만주국 총영사를 지낸 박석윤.
  박석윤은 최남선의 매제(妹弟)로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일제시대에 《매일신보》 부사장, 만주국의 주(駐)폴란드 총영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쓰지 마사노부(辻政信) 등과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만 보면 박석윤은 대단한 친일파다. 하지만 최남선의 손자인 최학주는 박석윤이 충칭(重慶)의 임시정부와도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며 여운형의 건국동맹에도 가담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최학주는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선총독부가 정권 인계 대상으로 송진우·안재홍이 아닌 여운형을 선택한 것은 박석윤의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운형과 박석윤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다. 내가 들은 바로는 조선총독부가 당시 상해에서 중경 임시정부와 접촉하고 있던 박석윤을 급하게 불러들였고 내 할아버지도 해방 당일 새벽에 찾아온 여운형에게 박석윤을 추천했다. 여운형은 자신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할아버지의 참여를 권했지만 할아버지는 거절했고 대신 매제 박석윤을 조선총독부와의 교섭 대리인으로 천거했다.〉
 
  여운형과 박석윤의 친분 때문에 총독부가 여운형을 선택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여운형은 일본인들도 알아주는 거물이었다. 1919년 11월에는 일본 정부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해 내무대신, 육군대신 등과 만나 조선의 독립을 역설했다. 1940~1942년에는 5차례 도쿄를 왕래하면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전 총리,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전 조선총독 등으로부터 중일(中日)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또 여운형은 당시 국내에 있던 조선인 지도자들 중에서 대중적 영향력, 특히 청년・학생층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이었다.
 
  조선총독부가 미군과 소련군이 한강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도 여운형을 낙점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여운홍은 1961년 일본에 갔을 때 엔도와 만나 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엔도는 “도쿄의 내무성에서 온 전보에 조선이 분단 점령된다고 했다”고 확인해 주었다).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했고, 1922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레닌 및 트로츠키와 회견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 총독부는 여운형을 택했을 것이다.
 
 
  총독부 비자금 200만 달러의 행방은?
 
  최하영은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 당시 총독부는 건국준비위원회에 450만 달러 정도의 자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중 250만 달러만이 쓰이고 나머지 돈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당국이 그 내막을 조사하려 하자 박석윤이 월북(越北)해 버렸다는 설(說)이 있다”는 것이다.
 
  박석윤의 월북에 대한 최남선의 손자 최학주의 해석은 다르다. 박석윤이 1946년 3월 38선을 넘은 것은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서였으며 그동안 함께 활동한 여운형과 의논한 후 김일성을 만나러 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만일 그렇다면 총독부 정치자금 중 200만 달러는 북한에서의 정치공작을 위해서 박석윤이 챙겨둔 것일 수도 있다. 박석윤 임의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여운형의 동의 아래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박석윤을 체포해 1947년 재판에 회부했다. 그가 재판에 회부된 것은 ‘민생단(民生團) 사건’ 때문이었다. ‘민생단 사건’은 민생단이라는 친일단체가 심은 밀정들을 색출,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1932년 11월~1936년 2월 만주 지역 내 중국공산당 계열 유격대에서 벌어졌던 소동을 말한다. ‘역(逆)매카시즘’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인 셈이다.
 
  1983년 중국공산당 연변주위원회 조직부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모두 497명이 체포되어 367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됐다는 추정도 있다. 이 사건으로 만주의 공산주의운동도, 조선인 사회도 큰 타격을 입었다. 민생단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인이 대부분이었던 옌지·왕칭·훈춘 등 3개 현의 공산당원 숫자가 1299명에서 181명으로 86.1%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박석윤은 만주국 건국 후인 1931년 9월 민생단을 결성한 장본인이었다. 박석윤은 자신이 만든 민생단은 ‘40만명의 만주 거주 조선인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조직한 단체라고 주장했다. 박석윤은 민생단은 이듬해 7월 만주국과 조선총독부의 비협조로 해체되었고, 민생단 사건을 일으킨 친일단체 간도협조회(1934년 김동한이 설립)와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박석윤은 1948년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10월 19일 처형됐다. 이날은 국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
 
  어쩌면 박석윤은 총독부의 정치자금 450만 달러 중 200만 달러를 김일성에게 전달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북한에 억류된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총독부의 공작이 아니었을까? 북한 당국이 민생단 사건으로 박석윤을 얽어 처형한 것은 총독부의 구린 돈이 ‘김일성 장군’에게 전달됐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임용상의 집에서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나타난 여운형. 해방 후 첫 정치집회였다.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다시 해방 직후의 여운형 이야기로 돌아간다. 8월 15일 오후 여운형과 엔도 정무총감이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중이 서울 계동 휘문중학교(지금의 현대건설 본사 자리)로 몰려들었다. 휘문중학교와 여운형의 집은 바로 붙어 있었다. 여운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중은 밤늦도록 만세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다가 흩어졌다.
 
  이날 저녁 여운형은 계동에 있는 거상(巨商) 임용상의 2층 양옥집에서 안재홍(安在鴻・1891~1965) 및 건국동맹 동지들과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8월 25일 나온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선언에서는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인류 역사상 공전적(空前的) 참사인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찾아왔다.… 그러나 조선 민족 해방은 다난한 운동사상에 있어 겨우 1보를 내어놓은 데 불과하다. 완전한 독립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으며 새 국가의 건설을 위한 중대한 과업은 우리의 전도(前途)에 놓여 있다.… 일시적으로 국제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선언문은 당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극좌파가 참여하고 있던 건국준비위원회가 ‘해방’과 ‘건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해방과 건국은 별개이며 건국을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이전의 건국동맹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러한 인식의 소산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대 독립운동가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1941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표한 〈건국강령〉에서는 일제하 항일운동시기를 ‘복국(復國)’ 단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민주정부 수립 단계를 ‘건국’ 단계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들어온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옛 풍문여고.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건국치안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8월 16일 군중이 다시 휘문중학교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여운형의 이름을 외쳤다. 오후 1시, 군중 앞에 여운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 만난 사실, 민주주의에 입각한 건국, 일본인의 무사 귀환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군중은 여운형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열광했다. 그때 어떤 자가 뛰어들어와서 외쳤다. “2시에 남대문역(서울역)에 소련군이 들어온다!” 이 한마디에 청중은 서울역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당대 최고의 명연설가였던 여운형의 연설로도 이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해방 후 첫 정치집회는 이렇게 우습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소련군이 서울역에 들어온다는 얘기를 퍼뜨린 것은 누구일까?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적인 소행일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젊은 대한민국사-건국》의 저자 김원은 총독부의 대중조작으로 본다. 8월 16일이 되면 군중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일본의 관공서 등을 습격할 것을 우려한 총독부가 ‘소련군 도착’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군중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해방 후 사흘 동안 여운형의 위세는 자못 등등했다. 8월 16일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에 가서 정치범들이 석방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같은 날 오후 여운형은 각급 학교의 체육교사, 무도인, 체육인들을 휘문중학교 강당에 모이게 해서 건국치안대(대장 장권)를 조직했다. 건국치안대는 안국동 풍문여고 교사(校舍)를 본부로 사용했다.
 
  대중의 눈에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새 조선의 정부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0여 개 지부가 만들어졌다. 건국준비위원회 본부 격이던 임용상의 집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경기고녀 강당에서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8월 18일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맡겼던 치안권을 회수했다. 일본 군인과 경찰이 다시 거리에 깔렸다.
 
  건국준비위원회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해방 전 만들어진 건국동맹 인사들과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인사들 간에 불협화음이 나왔다. 점조직 형태로 만들어졌던 건국동맹 인사들 사이에서도 잡음이 나왔다.
 
  더 큰 문제는 이념적 갈등이었다. 송진우(宋鎭禹・1887~1945) 등 우파 인사들은 당초부터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다.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참여했던 안재홍은 우파 세력을 보강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했다. 9월 4일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 개편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건국준비위원회 내에 박헌영이 조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뒤였다.
 
  9월 6일 저녁 서울 계동 경기고등여학교(현 헌법재판소 자리)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9월 8일 미군 진주에 앞서 국가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이날 사회를 본 여운형은 “연합군의 진주가 금명간 있을 것이므로 그들과 절충할 인민 총의의 집결체가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집결체의 준비공작으로서 급히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해명했다.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허헌, 내무부장에 김구, 외무부장에 김규식, 재무부장에 조만식, 군사부장에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본인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은 일방적인 인선이었다.
 
  인민공화국 수립에 대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인민공화국 수립에 있어서 형님은 능동적이 아니고 수동적이었다. 이 같은 과격하고 급진적인 정치행태는 형님의 생리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세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형님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는 다음날 문을 닫았다. 9월 8일 진주한 미군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18일 귀국한 이승만, 11월 23일 귀국한 김구·김규식 등도 조선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칼국수 집이 된 여운형 집터
 
여운형의 집터에는 지금은 칼국수 집이 있다. 바로 뒤로 현대엔지니어링 건물이 보인다.
  해방 후 20여 일 남짓했던 건국준비위원회의 드라마가 펼쳐졌던 곳들은 직선거리로 500m 이내에 몰려 있다. 여운형의 집터(계동 140-16)에는 안동칼국수라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37년간 이곳에서 장사를 했다는 사장은 “1982년 현대그룹이 오면서 길이 생기기 전에는 도로 중앙선까지가 여운형 선생의 집이었다”면서 “그래도 2013년 불이 나기 전까지는 여운형 선생의 집 모습이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안동칼국수 바로 뒤가 해방 후 여운형의 첫 연설이 있었던 휘문중학교 자리다. 안동칼국수 바로 뒤로는 현대엔지니어링이, 율곡로 대로변에는 현대건설이 들어와 있다.
 
  현대건설 주차장 맞은편에 모던한 느낌의 건물(보헌빌딩)이 있다. 여기가 바로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이 논의되었고, 그 본부가 있던 임용상의 집이 있던 곳이다. 여운형의 집터에서는 직선거리로 120m 정도밖에 안 된다.
 
도로가 나기 전 여운형의 옛집.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여기서 150m쯤 떨어진 곳에 헌법재판소가 있다. 옛날 경기여고(나중에는 창덕여고)가 있던 곳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된 장소이기도 하다.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하나였던 홍영식(洪英植)의 집이 있던 곳이다. 홍영식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조정에서는 이 집을 적몰(籍沒)해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으로 만들었다.
 
  건국치안대가 있던 풍문여고 자리는 이곳에서 250m밖에 안 된다. 1882년 순종과 세자빈의 가례(嘉禮)가 치러진 안동별궁이 있던 곳이다. 풍문여고(현 풍문고)가 강남으로 이사가면서 이 자리에는 서울공예박물관이 들어올 예정이다. 현재 문화재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710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MAGAZINE 인기기사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