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문명탐사] 그리스 인문정신과 올림픽 : 월간조선

제대로 된 인문학을 접하려면 서양 문명의 원천(源泉)인 그리스 문명에서 시작해야 한다. 고대(古代) 그리스인들이야말로 서양 문명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와 민주와 평등의 개념을 창안했고 국가와 사회제도 속에 그 개념들을 구현하고 체화(體化)하려고 애썼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산하고 전파한 독창적인 사유(思惟)와 문화는 서양 문명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줬고 모든 현대 국가의 보편적 가치 관념과 문화·예술의 토대가 됐다.

노예적 삶을 극도로 혐오한 자유인의 정신, ‘아레테(arete)’를 추구하며 감히(!) 신(神)과 경쟁했던 기개와 모험정신, 《일리아드》《오디세이아》에서부터 시작되는 삶의 심연(深淵)을 풍부하게 드러내 준 탁월한 문학작품들, 신이 빚어낸 것 같은 아름다운 예술품들…. 이 모든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룩한 위대한 성취다.

올림피아 제전이 대단한 이유

체육관 팔라스트라(Plastra). 올림피아 유적지. 기원전 8세기.
올림피아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복싱, 레슬링 등 경기 연습을 실시하던 실내 체육관이었다.

올림픽은 그리스인들이 인간과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침 제31회 하계올림픽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고 있다. 이 올림픽이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기원전 776년에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 알티스 성역(聖域)에서 제1회 고대 올림피아 제전이 열렸다. 그 이전부터 유사한 경연이 열렸었다는 설도 있다. 무려 2800여 년 전 즈음에 시작된 일이다. 그때 고대 그리스인들은 왕과 귀족, 민중의 구분 없이 한자리에 모여 대규모 스포츠 경연을 즐겼던 것이다.

그리스 본토의 각 도시국가와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있는 식민도시에서 출전한 선수들은 단거리 경주, 중거리 경주, 장거리 경주, 갑옷을 입고 달리기, 멀리뛰기, 원반던지기, 권투, 레슬링, 격투기, 창던지기, 마차 경주 등에서 실력을 겨뤘다.

그리스 각지에서는 이 체육경기를 보며 자국의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몇 달 걸려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자연히 올림피아 제전 전후 하계 3개월간 모든 도시국가는 휴전해야 했다. 4만5000명을 수용하는 올림피아 스타디온을 가득 채우고도 알티스 성역에는 수만 명이 북적였을 것이다.

헤라 신전 유적. 올림피아 성역의 제우스 신전 인근에 있다. 기원전 7~6세기에 세워졌다. 이 신전 앞에서 올림픽 성화가 채화된다.

엄청난 이벤트들을 많이 보아온 현대인들은 올림피아 제전의 탄생이 과연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가볍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고대에는 대규모 민중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예삿일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라. 이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초기에 해당되고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300)의 후기 즈음에 해당된다. 이때 중국이나 한반도에서는 전쟁과 축성, 치수, 분묘 조성을 위해 필요한 때에나 대규모 백성이 모였다. 이런 집결은 모두 통치자에 의한 강제 동원의 성격을 띠었다. 동양에서는 대규모 백성이 자발적으로 집결한다는 것 자체가 통치자에게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동양에서는 반란이 일어난 경우 이외에는 백성들에게 대규모로 회합을 가질 수 있는 장소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그리스의 경우 올림피아 제전에 출전하거나 참관하는 데 국가의 조직적 동원이나 지원은 전혀 없었다. 모두 스스로 경비를 조달하여 자의로 참가했다. 올림픽 출전자나 참가자에게 그들이 통과하는 모든 나라의 국경은 열려 있었다. 원수같이 싸우던 나라 간에도 그랬다.

2800여 년 전 고대기에 이런 발상과 실천을 해냈던 그리스인들에게 어찌 경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자유로운 인간들의 경합이 이루어졌던 올림피아 제전은 그리스 문명의 경이로운 창조물 가운데 하나다.

올림피아 우승자에게는 올리브관 수여

디아두메노스(Diadoumenos) 상. 기원전 450~425년경에 제작한 원작을 기원전 100년에 복제한 작품.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머리띠가 운동선수임을 나타낸다. 인체의 비례가 잘 조화를 이루며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지고 균형 잡힌 몸매가 잘 표현된 수작이다. 그리스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의 작품이다. 델로스 섬 ‘디아두메노스의 집’에서 발굴되었다.

고대 올림피아의 시상식에서는 메달 대신 그리스에서 가장 흔한 나무인 올리브 가지를 엮어 만든 올리브관(冠)을 수여했다. 흔히 올림피아 승리자에게 월계관이 주어진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은 스포츠 제전마다 수여하는 관이 달랐다. 월계관은 델포이에서 개최된 피티아 제전의 승리자에게 수여됐다. 여기에 네메아 제전과 이스트미아 제전을 합쳐 범(汎) 헬라스 제전은 모두 4개였다. 직업화된 선수들은 매년 다른 제전에 참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헤르메스 상. 기원전 340~330년경.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이 헤르메스 상은 현존하는 헤르메스 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올림피아 성역의 헤라 신전에 봉헌된 것으로 그리스가 낳은 최고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Praxiteles)의 작품이다. 어린 디오니소스를 어르고 있는 헤르메스의 나신(裸身)은 완벽한 육체미를 보여주고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멀리 흩어져 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선수들이 그 힘든 여정을 마다 않고 올림피아로 몰려들었던 이유는 뭘까. 승리자에게 주는 관도 나뭇잎 관이지 않은가. 물질적 보상 못지않은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는 여건이 있었다. 선수들은 탁월한 육체적 기량을 만방에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수양을 완성하고 나아가 개선장군 못지않은 영예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시인들은 승리자의 영광을 영원히 기리는 찬가를 불렀다. 올림피아 송가(頌歌) 시인으로 이름 높았던 시모니데스(Simonides)는 여러 나라 체육 영웅들을 찬미하는 시를 숱하게 지었다. 올림피아 성역과 ‘조국의 광장’에는 체육 영웅들의 흉상이 조각됐다. 아테네에서는 올림픽 승자들에게 영빈관에서 식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기도 했다.

제우스 신전에서

레오니다이온 유적. 올림피아 유적지. 올림피아의 선수촌 역할을 했던 레오니다이온 유적이다. 이곳에 장방형의 거대한 숙박시설이 있었다. 가운데 둥그런 관목이 있는 곳이 중정(中庭)이다. 기원전 330년에 낙소스인들의 기부로 건립되었다.

왜 이 체육 제전에 올림피아 제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체육 제전이 열리던 알티스 성역은 제전이 있기 오래전부터 여러 신을 모시는 종교적 성지(聖地)였다. 이곳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올림포스 신족(神族)의 최고 신인 제우스를 숭배하는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 체육 제전이 올림피아 제전으로 명명된 연유다. 체육 제전은 제우스에 대한 인간들의 숭고한 봉헌 차원에서 시작됐다. 알티스 성역의 중심에 웅장한 제우스 신전이 건립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인간이 신께 바치는 첫 번째 봉헌은 신성한 동물들을 희생하여 바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 또한 신에 있어 가상한 일일 터…. 인간이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역량을 최고로 갈고 닦아 신에 버금가는 탁월성을 보인다면 그것만큼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올림피아 제전은 그렇게 최고가 되기 위한 인간들의 열정적 경연을 신께 경건하게 바치기 위한 종교적 의식의 일환이었다.

제우스 신전에 안치되었던 제우스 신상은 올림피아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참배 대상이었다. ‘신들의 신’을 알현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일은 출전하는 선수들에게는 가슴 벅차는 일이자 더없이 경건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제전에 참가하는 선수와 코치, 심판진은 공식적으로 제우스 신상 앞에서 공정한 경기를 하겠다고 선서했다.

올림피아 감독관 헬라노디카이

암포라에 그려진 달리기 경주 모습. 기원전 500년경. 올림피아 올림픽 경기 박물관.

올림피아 제전을 주관하던 측에서는 이 제전이 공명정대하게 진행되도록 특별한 노력을 했다. 제전이 열리기 열 달 전부터 신망 있는 귀족 가운데에서 뽑힌 감독관 헬라노디카이(Hellanodikai)들은 선수 합숙소를 마련하고 훈련하는 선수들을 수시로 관찰하며 경기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특히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헬라노디카이에게 접촉하려고 할 경우 엄한 벌을 내려 부정을 사전에 차단했다. 헬라노디카이의 임기를 단임(單任)으로 한 것도 부정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술잔 킬릭스(kylix)에 그려진 레슬링 경기 장면. 기원전 500년경. 올림피아 올림픽 경기 박물관.

경기에 임박해 올림피아에서 합숙 훈련을 하는 선수들의 기량과 스태미나, 지구력 등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선수들의 행태와 성격, 도덕성까지 파악하는 게 헬라노디카이의 주된 활동이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건강한 신체 못지않게 건강한 정신을 소중하게 여긴 그리스인들의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오로지 스포츠 기량의 대결에 치중하고 이들의 경기 관리자 역할에 그치는 현대 스포츠 제전의 주관자들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오늘날 고대 올림피아를 수놓던 그리스 청년들의 열전을 생생하게 상상하기는 어렵다. 다행히 그리스 문명이 남긴 다양한 도기(陶器)와 조각 작품을 통해 당시 치열했던 경기 종목들의 장면과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모습이 그리스인들이 일상에서 쓰는 각종 도기에 즐겨 묘사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리스인들이 올림피아 제전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발군의 실력을 찬탄하고 경기 승리자들의 영광스런 삶을 동경했음을 말해준다.

아레테

올림피아 출전 선수들이 몸에 바를 기름을 넣어 다니던 병과 몸의 먼지와 때를 긁어내던 스트리길(strigil). 기원전 500년경. 올림피아 올림픽 경기 박물관.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던 최고의 가치는 ‘아레테’였다. 뛰어남과 탁월한 기량을 의미하는 아레테의 정신은 그리스 청년들을 학문과 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스포츠 영역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최고로 발휘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스인들은 청년들이 아름답고 균형 잡힌 육체와 각종 스포츠의 기량을 갖춘 영웅으로 성장해 나가는 열망을 펼칠 수 있는 장으로서 국가대항전 형태의 올림피아 제전을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한계를 다투던 열전은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정체성(正體性)을 고양시키고 하나로 묶는 평화의 제전이 됐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잠재능력을 최고로 발휘함으로써 신께 다가가려 했다. 신께 바치는 최상의 봉헌은 유감없이 발휘된 인간의 탁월성 그 자체였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올림피아 성역의 여러 신전에 최고의 예술 작품들을 앞을 다투어 숱하게 봉헌한 것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거나 신을 숭상하는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지구 반대편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은 그리스의 유산이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리스 문명은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데 긴요한 살아 있는 소재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는 ‘오래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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