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철 前 원주시 부시장의 ‘은퇴 증후군’ 극복 스토리 : 월간조선

은퇴 증후군의 정확한 의학적 명칭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적응장애로 분류할 수는 있다. 최광철(62) 전 원주시 부시장을 처음 만난 건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는 강원도의 어느 산막 모임에서였다. 그의 ‘은퇴 증후군 극복기’를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2014년 명예퇴직을 한 후 작년 겨울까지 아내(원춘희·58)와 함께 프랑스, 룩셈부르크,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와 중국, 일본, 한국을 자전거로 종주했다. 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 각각 석 달씩, 여섯 달 동안 텐트에서 자며 그가 주파한 거리는 7700km였다. 6월 8일 그의 여행담을 듣기 위해 강원도 원주시 혁신도시에 있는 집을 찾았다.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고 했다. “멘붕이 오기 시작한 건 은퇴 3년 전부터였다. 뭘 할까 고민을 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없는데 은퇴 날짜는 다가오니 두려움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아무 결정도 못 하고 퇴직했다. 그제야 온실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헛헛하다고 해야 하나? ‘아직 힘이 넘치고 더 일할 수 있는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몇몇 기업에서 고문직을 제의했다. 지방 정치인들의 콜도 있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직에 평생 몸담았는데 갑자기 브로커로 전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갈 수 있는 코스는 없었다”

독일 로만틱 가도에서 점심식사 중인 최광철·원춘희 부부.

최 전 부시장은 1977년 23세 때 9급 공무원으로 임관해 지방직 공무원으로는 최고직인 부시장을 지냈다. 그는 “아버지가 토목공사 관련 사업을 했는데 망해서 집이 어려웠다”며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했고 생계를 위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3남 2녀 중 차남이다. 맏형은 중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러 서울로 떠났다.

사실상 집안에서 맏이가 된 그는 남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나무를 하고 풀을 캐러 다녔다. 그는 “떳떳한 직업 없는 초졸자, 방위병이 덜컥 공무원이 됐다”며 “내게 소중한 행운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공무원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남들보다 낮은 학력을 메우려 새벽 4시부터 3~4시간 공부를 하고 나서야 일터로 갔다. 1985년 7급 공채에 합격한 후 검정고시를 준비해 1992년 중·고교 과정을 모두 수료했다. 50세가 되던 해에는 행정학사 학위도 취득했다. 강원도청, 화천군, 원주시등에서 36년을 근무했고 2013년 부시장이 됐다.

그는 창 너머를 가리켰다. “저 산에는 등산로가 여러 개 있다. 4~5급 공무원만이 가는 코스, 국장급들만 가는 코스도 있다. 코스가 하나뿐인 쪽은 직급별로 산행 시간이 나뉜다. 서로 불편하니 자연스레 나뉘는 것이다. 그런데 은퇴를 앞둔 내가 갈 수 있는 코스는 없었다. 동료들이 어느새 불편한 존재가 됐다. 후배들은 나를 점점 피하는 것 같았다. 짜장면 한 그릇 먹으러 가도 눈총을 주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그때 왜 그랬나 싶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안 좋은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혼돈 상태에 빠졌다. 비관은 또 다른 비관을 낳는다. 몸이 쑤시고 의욕이 떨어졌다. 아침 일찍 눈뜨는 게 그렇게 싫었다. 우울증이 찾아온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큰일 날 것 같아 아내에게 무작정 자전거 여행을 가자고 했다.”

도피하기 위해 시작한 자전거 여행

프랑스 에스블리의 한 신혼부부와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그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퇴직 8년 전이다. 아내와 한 달에 한두 번꼴로 탔다. 1박 이상의 자전거 여행을 한 것은 퇴직 3년 전부터다. 하계휴가 때는 6박 7일 동안 해남 땅끝마을도 다녀왔다. 자전거가 그에게는 스트레스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2014년 7월 16일부터 10월 15일까지는 오스트리아,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에서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을 종주, 3500km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하루 평균 50km를 달렸다. 보통 6시간, 어떤 때는 12시간 달릴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자전거 여행이 예측이 어렵다. 길 상태에 따라 펑크가 나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휴대폰에 내비게이션이 있었지만 길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지쳐서 목적지에 못 간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의 동물적인 감각을 일깨웠다. 야생에 버려진 어린 사자처럼 세상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는 “여행으로부터 무엇을 얻었느냐”는 질문에 “나의 틀을 깨는 계기가 됐다”고 대답했다. “내 밑에서 지시를 따르던 공무원이 4000명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는 손수 모든 일을 해야 했다. 텐트 치기, 밥짓기, 사진촬영, 자전거 수리까지 모든 것을 다 했다. 손에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했다.”

그는 “여행을 통해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고 했다. “나는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타지에서 도움없이는 살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보니 자세가 달라졌다. 그동안 흑백으로만 세상을 보며 어깨에 쓸데없는 힘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유럽에서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그가 90일간 남긴 여행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에스블리에서 만난 신혼부부는 길을 잃고 기진맥진해 있던 이들 부부에게 음식과 잠잘 곳을 제공했다. 영국 위츠터블에서는 길을 잃고 산속에 갇혔는데 경찰이 달려와 도움을 주었다. 밤늦은 시각 가까스로 찾은 캠핑장이 문을 닫아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는 한 영국인 청년이 다가와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 캠핑장까지 데려다줬다. 이런 환경 속에서의 여행은 최 전 부시장을 바꿔놓았다. 도움준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준비해 간 청실홍실을 선물했다. 청실홍실의 의미를 설명하자 그들은 환한 미소를 보였다.

아내 원춘희씨는 “이 사람이 원래 고집 세고 목이 뻣뻣했는데 여행 후 자신을 낮추려고 노력하더라”고 했다. 최 전 부시장은 “은퇴한 지 반년도 안 됐는데 딱딱한 껍데기가 벗겨지기 시작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학적 도피로 시작했던 여행의 최종목표는 원래 세계일주였다. 그런데 이걸 꼭 하지 않더라도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석 달 여행이 사회적응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망이 보이고 도전의 목표가 생겼다.”

두 번째 여행

중국 시안의 고루광장에서.

최 전 부시장은 작년 8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중국, 일본, 한국, 총 4200km를 자전거로 종주했다. 중국은 유럽보다 자전거 안전시설이나 치안이 열악해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인터넷에서 황허 유역을 살펴보니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지형들만 나왔다”며 “결국 갈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는 “첫 번째 여행으로 이미 두려움은 없었다”며 “두 번째 여행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중·일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도 담아 여행을 결정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중국의 비중이 컸다. 중국에서만 총 거리 4400km의 절반인 2200km를 달렸다.

중국 루트는 시안에서 출발해 린펀-한단-헝수이-베이징-친황다오-후루다오-선양 순이었다. “가슴에 중국, 한국, 일본 국기를 달고 달렸다. 만나는 사람들이 정겹게 대해줬다. 여행 난이도는 첫 번째보다 훨씬 힘들었다. 중국은 역주행 차량이 너무 많아 위험했다. 차량과 오토바이가 뒤섞여 신호를 안 지키고 넘어갔으며, 상가마다 고성능 스피커를 틀어놔 시끄러웠다. 기온은 40도에 육박했다. 눈으로 땀이 계속 들어가고 석탄 실은 차량 때문에 흩날리는 먼지들이 눈을 찔렀다. 향신료가 입에 맞지 않아 만두하고 빵만 먹었다. 도로가 좋지 않아 자전거도 6번이나 고장 났다.”

강원도 원주시 혁신도시 자택에서 만난 최광철·원춘희 부부.

힘이 된 것은 한국을 좋아해 주는 시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자전거에 연신 물병을 꽂아줬다. 그는 “나는 두 번째 여행에서 중국인들의 정에 흠뻑 취했다”며 “공안에게 잡히는 등 곤란한 상황에서도 중국 사람들이 도와줬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필요한 짐 상자를 기꺼이 주기도 했는데 이들에게도 유럽에서처럼 소중한 인연을 상징하는 청실홍실을 나눠줬다”고 말했다.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최 전 부시장은 인천공항에 도착해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3개월이 3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서둘러 왔는데 대부분이 “벌써 3개월이 지났어?”라고 했다. 그는 7700km의 여행을 마친 느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는 전·현직 동료들을 만나는 데 마음이 편하다. 은퇴 후에도 상하관계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는데 그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마음을 여니 주변엔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최 전 부시장은 여행에서 느낀 점을 바탕으로 대학, 각 시도 인재개발원 같은 공무원 교육기관, 서울시 50+재단 등에서 은퇴를 앞둔 사람들을 위한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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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철 前 원주시 부시장의 ‘은퇴 증후군’ 극복 스토리

은퇴 후 아내와 7700km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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