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이탈리아 북부 역사기행(밀라노, 베네치아, 베로나, 비첸차) : 월간조선

5월 20일. 밀라노의 하늘은 새파랗다. 그 아래 하얀색 대리석으로 된 밀라노 두오모(Duomo)가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 마리 백조(白鳥) 같았다.

밀라노 두오모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고딕(Gothic) 양식의 성당이다. 같은 고딕 양식이지만, 전에 본 적이 있는 프라하의 성피터 대성당이나 빈의 성슈테판 대성당과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작지만, 단아한 모습이다. ‘고딕’이라고 하면 오만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은 그로테스크한 시커먼 성당만을 알고 있던 내게 그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1386년 밀라노 공작 잔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명령으로 건축을 시작한 이 두오모는 1805년 나폴레옹에 의해 완공됐다. 이후로도 자잘한 공사들이 이어져 마지막 성당 문이 만들어진 것은 1965년이었다고 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둘이다. 하나는 관광객용, 다른 하나는 예배자용.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하게 검색을 한다. 파리와 로마를 박살내겠다는 IS 협박의 여파일까? 그들의 모습을 담고 싶어 디지털 카메라를 들었더니, 찍지 말라고 고함을 지른다.

성당 오른쪽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밀라노칙령(313년)을 기념하는 기념명판(銘板)이 있다. 그 기념명판보다 좀 더 입구 쪽에는 오토네 비스콘티(1207~1295)의 묘소가 있다. 밀라노의 대주교였던 그는 이후 130여 년간 밀라노를 지배했던 비스콘티 가문의 개조(開祖)였다.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함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1906~1976)가 이 가문의 후예다.

스포르체스코성

밀라노 두오모의 옥상. 하얀색 첨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스포르체스코성은 비스콘티가에 이어 80여 년간 밀라노를 통치했던 스포르차가의 거성(居城)이다. 성벽을 둘러싼 해자(垓字)와 위압적인 망루, 내성(內城) 쪽 해자 안에 놓여 있는 둥근 석탄(石彈)들이 스포르차 가문의 무단적(武斷的) 성격을 웅변하는 듯했다.

스포르차 가문을 연 무치오 아텐돌로 스포르차(1369~1424)는 원래 농부였다가 용병(傭兵)대장으로 입신했다.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1401~1466)는 밀라노공국의 영주인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서녀(庶女)와 결혼했다. 용병대장으로 베네치아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던 그는 1450년 베네치아의 편으로 돌아서서 밀라노공국을 차지해 버렸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용병의 배반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이 사건을 꼽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례는 출신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만 있으면 평민에서 군주로 올라서는 것도 가능했던 르네상스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스포르체스코성을 건설한 게 바로 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이다.

스포르체스코성 구내 시립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1475~1564)의 유작(遺作) 〈피에타 론다니니(Rondanini Pieta)〉가 있다. 원래는 피에타만 볼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포식을 했다. 석기시대의 마제(磨製)석기부터, 로마 시대의 벽화 파편, 중세의 아이콘(성화)과 조각, 성화(聖畫)를 수놓은 카펫,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과 조각들, 중세 및 근대의 창검과 화승총, 갑옷 같은 무구(武具)들이 성찬(盛饌)을 이루고 있었다. 지하에는 난데없는 이집트 문화재들까지 있었다. 미라, 〈사자(死者)의 서(書)〉가 그려진 관….

피에타 론다니니

밀라노 스포르체스코성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피에타 론다니니. 미켈란젤로의 유작이다.

하지만 이 박물관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피에타 론다니니〉다. ‘피에타’는 경건·자비·슬픔이라는 의미로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담은 조각이나 그림을 말한다. 로마의 론다니니 궁전에 오랫동안 소장되어 있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피에타 론다니니〉는 십자가에서 막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마리아가 뒤에서 부축하고 있는 형상이다. 예수의 하반신은 비교적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지만, 예수의 상반신과 마리아의 형상은 거칠다. 미켈란젤로는 1556년부터 8년간이나 이 작품에 매달렸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조각상을 쳐다본다. 다듬다 만 마리아의 얼굴, 그보다 더 덜 다듬어진 예수의 얼굴…. 마치 현대의 추상(抽象)조각을 보는 것 같다. 성피에트로 성당의 〈피에타〉(사진으로만 본 것이지만)가 ‘경건’하다는 느낌을 먼저 준다면, 〈피에타 론다니니〉에서는 ‘슬픔’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마리아의 얼굴은 ‘성모(聖母)’로 신격화된 이의 얼굴이 아니다. 그저 참척(慘慽·자식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음)의 슬픔으로 가득한 일개 아낙의 모습일 뿐이다. 예수의 얼굴은 더 슬프다. 이목구비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서 그런지 그 얼굴은 더 일그러져 보인다. 만일 자신의 죽음을 보면서 슬퍼하는 부모의 모습을 죽은 자식이 볼 수 있다면 지을 법한 표정이다.

89세의 나이에도 망치와 정을 들고 대리석을 쪼았던 미켈란젤로가 만일 이 작품을 완성했더라도 이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미완성이 때로는 완성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다.

카테리나 코르나로와 오셀로

최초의 근대 출판업자 알도 마누치오(원 안)가 살던 베네치아 마닌. 지금은 은행이 들어서 있다.
건물 벽에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아버지 주세페 마치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5월 23일.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 인근의 오래된 호텔에서 나와 산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골목길과 크고 작은 운하들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들을 건넜다. 골목과 운하들 때문에 길을 잃기 쉽다고 하지만, 산마르코 광장, 리알토 다리 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있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산살바도르 성당.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성당은 아니다. 이곳을 찾은 것은 시오노 나나미가 《르네상스의 여인들》에서 다루었던 카테리나 코르나로(1454~1510)를 만나기 위해서다. 카테리나는 베네치아 귀족의 딸로 1472년 키프로스왕국의 자크 2세에게 출가했다. 남편과 1년여 만에 사별(死別)한 후, 15년 동안 키프로스를 다스렸던 그는 1489년 모국 베네치아의 압력을 받아 키프로스왕국을 베네치아공화국에 ‘증여’했다. 이후 베네치아는 1571년 오스만튀르크에 이 땅을 잃을 때까지 지배했다. 카테리나는 아솔로라는 시골에 있는 작은 궁정에서 사교생활을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르네상스 시기 유명 시인 피에트로 벰보는 카테리나의 궁전을 무대로 《리 아솔리니(아솔로 사람들)》라는 작품을 남겼다. 산살바도르 성당 제단 오른쪽에 카테리나 코르나로의 무덤이 있다. 무덤 아래에는 키프로스에 도착한 카테리나를 맞는 자크 2세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1508년 크레타 총독 크리스토포로 모로가 키프로스에서 크레타로 가는 선상에서 아내를 죽인 사건이 있었다. ‘모로’는 ‘무어인(북아프리카의 흑인)’이라는 뜻인데, 피부가 검은 사람에게 흔히 붙이는 별명이기도 했다. 아마 이 사건이 무어인 키프로스 총독 오셀로가 자기 아내 데스데모나를 살해하는 비극의 모티브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산살바도르 성당을 나와 리알토 다리로 향했다. 1582년 안토니오 다 폰테가 만든 이 다리는 베네치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아쉽게도 리알토 다리는 그 섹시한 자태를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보수공사 중이어서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리알토 다리를 바라보며 선 내 가슴은 뻐근했다. 디탈리아 은행이 있는 마닌이라는 그곳이 바로 알도 마누치오(1449~1515)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알도 마누치오가 누구냐고? 《책공장 베네치아》의 저자 알레산드로 마뇨는 “회화에 라파엘로가, 조각에 미켈란젤로가, 건축에 브루넬레스키가 있다면, 출판에는 알도 마누치오가 있다”고 말한다. 마누치오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최초의 출판업자’였다. 문고판책, 이탤릭체, 세미콜론 등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베네치아의 역사가 마린 사누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포켓북은 정치적 격무나 학문연구에서 자유로운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종전에는 독서가 학자나 사제, 정치인, 관리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마누치오는 독서가 대중의 취미생활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오늘날 내가 주말이면 느긋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는 것도,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면서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다 마누치오 덕분인 셈이다.

‘정기간행물의 발상지’

리알토 다리 인근은 근대 ‘정기간행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무역대국이었던 베네치아에서는 일찍부터 보험업·은행업이 발달했다. 리알토는 바로 그 베네치아에서도 상업중심지였다. 당연히 리알토 일대에서는 경제나 경제에 영향을 줄 만한 각종 정보가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베니스의 상인》 제3막에서 “요즘 리알토에는 어떤 소식이 돌고 있나?”라는 대사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상인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담은 소식지가 등장한 것이다. 오늘날 여의도 증권가에 정치·경제·사회·연예계 동향을 전하는 ‘지라시’처럼…. 환전업자 판필로 브랑카치와 보니파시오 치에라는 통화환율과 상품가격을 ‘일반 편지봉투에 쉽게 넣을 수 있는 얇은 종이조각’에 인쇄한 소식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소식지가 정기적으로 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정기간행물’이 탄생한 것이다. 1585년 3월 14일의 일이었다.

근대 신문이 탄생한 곳도 베네치아다. 1736년 ‘가제타’라고 불리는 필사(筆寫) 신문이 등장했다. 1760년에는 가스파로 고치가 《가제타 베네타》를 창간했다. ‘가제타’는 베네치아에서 주조한 동전을 가리키는 말인데, 동전 한 닢으로 살 수 있다고 해서 신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서양 신문에 흔히 붙는 ‘가제트’ ‘가제타’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가제타’에서 전하는 소식들은 ‘새로운 소식(Nuove)’ 혹은 ‘새로운 소식들(Novelle)’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뉴스(News)’가 되었다.

책을 좋아하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근대적 출판업, 최초의 정기간행물, 근대적 신문과 뉴스가 탄생한 리알토는 ‘성지(聖地)’였다.

리알토 다리에서 산마르코 광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메르체리에(잡화점) 거리는 16세기에는 수십 개의 서점이 늘어선 서점가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를 찾는 지식인들은 그 많은 서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16세기 초 유럽에서 인쇄된 책의 절반가량이 베네치아에서 출간되었다고 한다.

베네치아를 당대 최고의 ‘출판도시’ ‘책공장’으로 만든 것은 자유였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베네치아는 중세를 지배했던 가톨릭이나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였다. 다른 나라에서 종교적·정치적 이유로 출판되지 못하는 책들도 베네치아에서는 거리낌없이 출판할 수 있었다. 최초의 포르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음란한 소네트》, 어디서나 핍박받던 유대인들의 경전 《탈무드》가 최초로 출판된 곳이 베네치아였다. 세계 최초의 인쇄본 《쿠란》도 베네치아에서 나왔다.

두칼레궁에서

바포레토(수상버스)에서 바라본 산마르코 광장. 왼쪽이 산마르코 종탑, 오른쪽이 두칼레 궁전이다.
앞에 보이는 두 개의 석주는 제4차 십자군 전쟁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해 온 것이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베네치아 관광의 중심인 산마르코 광장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세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경우에 대비해 잡아놓은 일정이 있었다. 두칼레궁(宮) 관람이었다.

두칼레궁은 베네치아공화국의 최고통치자였던 도제(Doge・통령)의 집무실과 대평의회, 원로원, 10인 위원회, 40인 위원회, 재판소 등 주요 정부기구들이 들어 있던 정부종합청사다. 두칼레궁의 1층 회랑은 산마르코 광장과 그대로 이어져 있다. 행인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돌벤치까지 마련되어 있다. 두칼레궁은 구조에서부터 대중과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두칼레궁 2층으로 올라서는 순간 그림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벨리니, 베로네세, 틴토레토, 바사리….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앞에도, 천장에도 그림이었다. 구약성서의 한 장면, 예수의 공생애를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황소로 둔갑한 제우스가 아름다운 처녀 에우로페와 통정(通情)하는 그림도 있었다. 제4차 십자군의 자라(아드리아해의 연안도시) 공략, 콘스탄티노플 정복, 공화국 도제와 교황 알렉산드로6세의 만남 등 베네치아 역사를 다룬 그림, 베네치아공화국의 도제들이 성인들의 축복을 받는 그림도 있었다. 대평의회 회의실에는 세계 최대의 유화 작품이라는 틴토레토의 〈천국〉이 걸려 있었다.

내용을 떠나 웅장하고, 화려하고, 압도적이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부자가 돈 자랑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베네치아공화국은 5세기 중엽 훈족의 침입에 밀려 석호(潟湖)지대로 도망 온 난민들이 세운 나라다. 전성기에 베네치아시의 인구는 15만, 내륙이나 식민지의 인구를 다 합쳐도 150만 정도에 불과했지만, 국부(國富)는 당대 프랑스나 스페인을 능가할 정도였다. 두칼레궁의 화려한 그림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봤지?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야! 우습게 보지 마!”라고 시위하는 듯했다.

마리노 팔리에로

화려한 그림들로 장식된 두칼레궁 대평의회 회의실. 앞에 보이는 벽화가 틴토레토의 〈천국〉이다.

대평의회 회의실 벽면 상단에는 역대 도제들의 초상화들이 빙 둘러가면서 걸려 있다. 베네치아공화국 1300년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제4차 십자군 전쟁에 ‘투자’해서 1204년 비잔틴제국을 무너뜨리고 동방과의 통상패권을 장악했던 엔리코 단돌로(?~1205)의 초상도 보인다. 그 아래에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소재로 한 그림이 걸려 있다. 산마르코 성당 테라스를 장식하고 있는 네 마리의 동마(銅馬·진품은 성마르코 성당 박물관에 있음), 두칼레궁 옆에 있는 두 개의 석주(石柱)는 이 ‘탈선한 십자군 전쟁’의 전리품이다. 두칼레궁 근처에 있는 고급 호텔 다니엘리는 단돌로 가문의 저택이었다.

단돌로의 초상에서 오른쪽 모퉁이로 고개를 돌리면 초상화 대신 검은 천이 걸려 있다. 그게 누구의 자리인지, 나는 알고 있다. 마리노 팔리에로의 자리다. 베네치아공화국의 도제였던 그는 1355년 귀족공화국에 불만을 품은 일부 평민세력과 결탁해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지만,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현직 국가원수가 반역죄로 처형된 것이다. 이 사건은 1300년 베네치아 역사상 유일한 반역음모였다. 이 극적인 사건은 훗날 외젠 들라크루아 등이 그림으로 그렸다.

마리노 팔리에로의 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걸려 있는 검은 천에는 흰색 글씨로 “마리노 팔리에로는 범죄행위로 처형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 검은 천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공화국은, 자유는, 이렇게 가차없는 결단으로 지켜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내게는 이곳이 이번 여행의 절정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5월 24일 베로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답게 그들의 흔적(?)이 시내 곳곳에 있다. 유명한 줄리엣의 집, 로미오의 집도 있고, 줄리엣의 무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줄리엣의 무덤이 좋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성프란체스코 수도원 자리다. 이곳에 ‘줄리엣의 무덤’이라고 알려진(아마도 사기성이 농후한) 지하무덤이 있다. 그보다 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곳에 있는 작은 박물관이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로마 유물의 파편,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상과 프레스코 벽화의 파편, 슬픈 표정의 예수상,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들….

1530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와 교황 클레멘트7세의 만남을 그린 벽화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카를5세는 1525년 ‘로마약탈’을 감행, 르네상스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다. 작품의 제목이나 그림의 내용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중세 1000년 동안의 역사를 훑는 듯한 느낌이었다. 베네치아 두칼레궁에서는 최고급 호텔에서 유명 셰프들이 만들었다는 음식들이 쉴 새 없이 나왔지만 젓가락도 대지 못하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여행하다가 우연히 들어간 시골식당에서 정갈한 밥상을 받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유럽 최초의 게토에서

5월 25일. 비첸차를 찾기에 앞서 호텔 근처에 있는 ‘게토(Ghetto)’를 찾았다. 게토로 접어드는 골목 입구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느껴졌다. 아마 샤일록도 이 문을 드나들었으리라.

‘게토’는 흔히 유대인 격리구역을 말한다. 그 악명 높은 게토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곳이 바로 베네치아다. 1516년의 일이다. 베네치아공화국이 게토를 설치한 것은 유대인들이 도제에게 특정지역에서나마 기독교인들의 눈총을 받지 않고 맘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청원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원래 주물공장이 있어서 ‘금속을 던지던(Gettava) 곳’이었다. 그래서 게토라고 불리다가 독일로 이 단어가 유입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게토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된 베네치아 출신 유대인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서 있다. 담장 위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유대인들의 학살을 형상화한 동판들이 붙어 있다. “베네치아시는 1943년 11월과 1944년 8월 나치 절멸캠프로 이송된 베네치아의 유대인들을 상기한다”고 새겨진 동판이 눈에 들어온다. ‘베네치아시’의 이름으로 ‘상기’한다는 선언에 가슴이 뭉클했다. 역사를 온전하게 기억하려는 노력은 아름답다.

건축가들의 성지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대표작 빌라 로톤다. 오른쪽에서는 프랑스에서 온 건축학도들이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

비첸차는 ‘건축계의 미켈란젤로’라고 할 수 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1508~1580)의 도시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이름이지만, 건축학도나 건축가들 중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폴 존슨은 그의 건축 양식을 “아름다움과 기능주의, 장대함과 유용성의 조화”라고 평가했다.

비첸차 시내에서 떨어져 있는 빌라 로톤다는 1시간 반을 기다려서야 볼 수 있었다. 2시 반에 연다던 문을 3시가 넘어서 여는 것이 완전히 ‘배짱장사’였다. 빌라 로톤다 입구의 철문을 열자, 푸른 초장 위에 정사각형의 대리석 건물이 자태를 드러냈다. ‘그림 같다’는 진부한 표현이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정원 한 편에서는 프랑스에서 온 대학생들이 그늘에서 교수의 열강을 듣고 있었다.

빌라 로톤다를 돌아본 후, 시내에 있는 팔라디오의 작품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작품을 3~4개쯤 보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척 보고 ‘아, 저건 팔라디오의 작품이다’라고 느낌이 왔다. 사실 팔라디오의 작품 양식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어딘지 낯익다. 바로 미국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등이 ‘팔라디오 양식’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팔라디오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이름을 딴 ‘양식’을 만들어내고, 그 양식이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미국 의회는 2010년 12월 팔라디오를 ‘미국 건축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실 미국은 비첸차에 빚이 많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것을 밝혀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업적을 열심히 알린 것은 비첸차 출신의 베네치아 저술가와 출판업자들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정식 국호는 United States of Columbia가 됐을지도 모른다.

문화예술인들의 순례지 카페 플로리안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카페 플로리안 앞에 선 기자. 수많은 문인과 화가, 음악가들이 다녀간 유서 깊은 카페다.

5월 26일 여행의 마지막 날. 다시 한 번 산마르코 광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수상버스인 바포레토를 이용했다. 곤돌라는 아니지만, 물살을 가르며 카날 그란데(대운하)를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죽었다는 시립 카지노, 귀족의 저택이었던 카도르, 리알토 다리,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살루테 성당 등 베네치아의 명소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노를 젓는 곤돌라 사공들의 노랫소리가 흥겹다.

사흘 전과는 달리 화창한 날씨였다. 산마르코 종탑에 올라 보는 베네치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산조르조마조레 성당의 모습은, 아래에서 바라볼 때와는 그 느낌이 달랐다. 산조르조마조레 성당도 팔라디오의 작품이다.

종탑에서 내려와 산마르코 성당을 거닐어본다. 오른편에 있는 알라 나폴레오니카궁은 나폴레옹이 남긴 상처다. 1797년 5월 12일, 베네치아 국회는 나폴레옹의 위협에 굴복해 스스로 나라의 문을 닫았다. 나폴레옹은 산마르코 광장 우측에 있던 건물들을 헐어버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할 건물을 지었다. 그게 알라 나폴레오니카궁이다. 원래 광장 왼쪽에 있던 프로쿠라토레궁과는 건축 양식이 확연하게 다르다. 어느 쪽이건 간에 지금은 명품점들과 카페, 음식점들이 들어와 있다. 문화재로 ‘보호’해야 마땅할 것 같은 옛 건물에서 그러는 게 유럽에서는 심상한 일이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역시 신기하다.

프로쿠라토레궁 쪽에 있는 카페들 가운데서 유독 눈길을 끄는 카페가 있다. 카페 플로리안이다. 1683년에 문을 연 이탈리아 최초의 카페다. 원래의 이름은 ‘베네치아의 승리’였지만,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후 이름을 바꾸었다. 루소, 스탕달, 바이런, 셸리, 조르주 상드, 샤토 브리앙, 바그너, 디킨스, 모네, 마네, 하이네, 니체, 릴케 등이 이 카페의 단골이었다. 카페 플로리안은 또 나폴레옹과 그 뒤를 이은 오스트리아 점령기에 저항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카페 플로리안에서 느긋하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광장의 햇살을 만끽하고 싶다. 그래도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희대의 괴짜이자 ‘최초의 전업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살았다는 카 볼라니 에리초에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아리베데르치(Arrivederci·다시 보자), 베네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