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연구] 한국의 서원 15곳을 가보다 : 월간조선

한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던 ‘한국의 서원’이 예비심사에서 낙제점을 받아 신청을 철회키로 했다. 지난 4월 19일 전해진 뉴스다. 9곳의 서원은 소수(경북 영주), 도산·병산(경북 안동), 도동(대구 달성), 무성(전북 정읍), 돈암(충남 논산), 남계(경남 함양), 옥산(경북 경주), 필암서원(전남 장성) 등이다.

이들 서원을 방문한 린 디 스테파노 홍콩대 교수는 “아홉 곳의 서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고 서원 건축물뿐 아니라 주변 자연경관도 관리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가 단지 이 말만을 했는지, 다른 구체적 사유도 밝혔는데 우리 정부가 공개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유산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가 불교유산, 두 번째가 서원(書院)과 향교(鄕校)다. 그런데 이번에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실패하면서 우리 정부의 ‘문화 콘텐츠 감별력’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9개 서원을 돌며 대체 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실패했는지 살펴보았다.

서원의 기원은 당 현종 때 집현전서원

서원은 중국 당(唐) 현종 때 궁중에 설치된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과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 세종이 천하의 인재를 모으기 위해 설치한 집현전 역시 당 현종을 본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종은 집권 후반기 양귀비에 빠져 나라를 망쳤지만 초기에는 명군으로 꼽혔다.

자고로 위정자의 역할은 기재(奇才)들을 끌어모아 나라의 동량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현종이 집현전서원·여정전서원을 만든 후 중국 역대 황제들도 이름을 내려 서원 설립을 장려했다. 이것을 사액(賜額·현판을 내린다)이라 하는데 대개 면세혜택과 재정지원이 뒤따르며 수양·석고·백록동·악록서원 등이 대표적이다.

서원은 두 가지 기능을 가졌다. 첫째로는 공부하는 곳이다. 때문에 서원의 구조를 보면 정문 격인 누각(樓閣)이 있고 그 뒤 중심에 전체 스승과 제자들이 모여 강론하는 강당(講堂)이 있다. 누각과 강당 사이에는 좌우로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었다. 동재와 서재는 낮에는 공부, 밤에는 학생들의 숙소로 보통 사용됐다.

그렇다면 대개 무슨 공부를 하는가. 서원은 주자학의 융성과 깊은 관계가 있어 기본적인 공부의 목표는 법성현(法聖賢), 즉 공자·맹자·주자 같은 인물들의 저술을 익히고 그들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양리(養吏), 즉 벼슬아치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고시(高試) 합격자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법성현’에서 훗날 과거시험 통과에 치중

도산서원의 도서관 격인 광명실이다.

법성현 못지않게 훗날 서원들이 양리에 집중하게 된 것은 그것이 서원의 위상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견줘보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에서 고시 합격자를 다수 배출하면 학교의 위상이 높아지고 우수한 후배들이 들어오며 그것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학교 발전에 공헌을 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의 2차 기능은 선현(先賢)을 모시는 것이다. 배향(配享)은 임금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나 공로 있는 신하를 종묘(宗廟)에 모시거나 학덕이 있는 이를 문묘(文廟) 등에 모시는 것을 말한다. 서원도 문묘처럼 자신들이 학문적으로 추앙하는 현인을 중심에 놓고 모셨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 1519),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등이 문묘에 배향되느냐는 서원의 관심사였다. 문묘에 배향되느냐에 따라 서원의 흥망이 갈렸기 때문이다. 배향 그 자체가 학맥과 가문의 영예였으며 후손에게는 시험 없이 벼슬길에 나서는 문음(門陰) 등 여러 특전이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법성현과 양리, 선현을 모시는 것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서원의 기능이 있다. 바로 도서관 역할이다. 서원들은 하나같이 강론 영역에 장경각(藏經閣) 혹은 장판각이라는 부속건물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귀중한 도서나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책이나 문서, 서원 자체에서 출판한 문서 등이 보관돼 왔다.

일례로 경북 경주의 옥산서원은 866종 4111책을, 경북 안동 도산서원은 907종 4338책을, 부근 병산서원은 1071종 3039책을, 전남 장성 필암서원은 132종 595책을, 대구 달성 도동서원은 95종 529책을 소장하고 있다. 유명 서원들은 귀중한 도서와 문서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암암리에 경쟁했을 것이다.

주자는 유학에 사생관과 우주관을 보완한 ‘제2의 공자’

그렇다면 조선의 서원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유학(儒學)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유학은 공자(孔子·기원전 551~479)가 체계화시킨 사상을 말한다. 공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가 유학의 적통계보이며, 공자의 ‘논어’, 증자의 ‘대학’, 자사의 ‘중용’, 맹자의 ‘맹자’가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가 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사서와 함께 ‘시경’ ‘서경’ ‘역경’의 삼경을 일컬어 사서삼경이라 했고 훗날 ‘예기’ ‘춘추’가 추가돼 사서오경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학의 골간(骨幹)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유학은 신분은 존비(尊卑-계급제)하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이것은 유학이 종교라기보다는 정치학·윤리학·사회학에 가까운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자는 존비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함으로써 자신이 존경해 왔던 ‘선왕(先王)의 도’에 이른다고 믿었다. 여기서 선왕의 도는 중국인이 리더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요순시대부터 주나라 주공(周公)을 이른다. 앞서 말했던 유학은 크게 보면 정치학이었기에 유교(儒敎)라고 불리기에는 종교성이 매우 약했던 게 사실이다.

불교 등의 종교와 비교할 때 사생관, 사후세계, 우주관이 빈약했던 것이다. 이런 유학의 약점을 크게 보완한 사람이 주희(朱熹·1130~1200)였다. 주자(朱子)로 불린 주희는 송대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태어났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며 이름 높은 선비를 찾아 공맹(孔孟)의 학문에 전념했다.

자신보다 시대가 앞선 주돈이, 정호, 정이 등 쟁쟁한 유학 거장들의 학문을 섭렵한 뒤 이를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유학이 불교와 도교에 비해 약했던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의 체계를 만든 것이다. 주자 이후 유학은 유교로 불릴 만한 위치에 올랐는데 주자의 학문은 ‘성리학’ ‘주자학’이라 불릴 만큼 독보적이었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적 이(理)와 형이하학적 기(氣)로 구성됐다고 봤다. 이는 순(純), 기는 불순(不純)이니 양자의 작동에 따라 만물의 운동이 달라지는데 이와 기의 작동 원리가 ‘태극’이다. 이는 주자가 주염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정이(程頣)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안향이 《주자전서》 보고 주자학 고려에 도입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노송들이 빼곡하다. 이곳은 원래 숙수사라는 절터였다.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고려시대 관리로 일했던 안향(安珦·1243~1306년)이 주희가 남긴 《주자전서》를 처음 접한 것이 1286년(충렬왕 12년) 무렵이다. 그는 정동행성의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과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으며, 같은 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갔다가 수도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를 보게 됐다고 한다.

그는 기쁜 나머지 《주자전서》를 베끼고 공자·주자의 화상(畫像)을 그려 돌아온 뒤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했으니 주자 사후 86년 만에 주자학이 고려에 전래한 것이다. 그는 얼마나 주자를 흠모했는지 그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었으며 자신의 호(號)도 주자의 호 회암(晦庵)과 비슷한 회헌(晦軒)으로 지었다.

안향은 그로부터 성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도산서원에는 성리학의 계보도가 있다. 안향→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는 도은 이숭인과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리는데 포은과 야은의 고향이 각각 경북 영천, 경북 구미라는 사실이다.

소수서원 옆 죽계천 암벽에는 경(敬)자가 암각돼 있다. 백운동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성리학의 개척자들이 경북 영주(안향)-영천(정몽주)-구미(길재)를 기반으로 하면서 이후 영남(嶺南)은 성리학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이제 소수서원이 생긴 연혁을 알아보자. 우리나라 최초 서원으로 1541년 풍기군수가 된 주세붕이 이곳 출신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白雲洞)서원을 세웠는데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운동이라는 말은 중국의 백록동(白鹿洞)서원에서 유래한다. 백록동서원은 강소성 여산오로봉 밑에 있는데 당나라 때 이발(李渤)이 은거해 백색 사슴을 기르며 독서에 몰두했다는 곳이다. 이 백록동서원을 재건한 이가 주자로, 그는 스스로 백록동서원의 원장이 돼 삼강오륜과 ‘중용’을 강의하며 천하제일 학교로 만들었다.

백운동서원이 생긴 지 9년 뒤인 1550년 (명종 5년)에는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서원의 격을 높이려고 임금에게 송(宋)대의 예를 언급하며 서원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줄 것과 정책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扁額)과 많은 책, 노비를 하사했다.

소수서원 정문 옆의 경렴정이다.

‘소수’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紹而修之)”는 데서 나온 말이다. 소수서원은 숙수사(宿水寺)라는 큰 절이 있던 터에 세워졌다. 숙수사는 부근 부석사(浮石寺) 못지않은 규모였다 하는데 소수서원에는 입구에 울창한 소나무 숲과 함께 절에서만 볼 수 있는 당간지주가 잘 보존돼 있다.

소수서원은 내부 건축물보다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주변을 흐르는 죽계천의 암벽에는 ‘백운동’ ‘경(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경’은 유학자들이 심성을 수양할 때 지표로 삼는 경구(警句)다. 소수서원 출신은 4000명이 넘는데 그중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다.

다시 성리학의 계보도로 돌아가 본다. 앞서 말했듯 우리 성리학의 계보는 안향→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진다. 김숙자(金叔滋·1389~1456)와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김숙자는 구미시에 통합된 경북 선산 출신으로 길재의 제자다. 그는 1456년 처가가 있는 경남 밀양에서 죽었다.

그는 길재의 제자들 가운데 처음 입지(立地)를 세운, 즉 중앙 정계에 진출했기에 길재의 적통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길재에게 받은 성리학의 계통을 아들 종직에게 전했는데 이 때문에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이런 말을 남겼다.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반이 선산에서 나왔다.”

김종직은 부관참시 후 사림파의 중시조 돼

김종직이 사림파(士林派)의 중시조로 꼽히는 것은 그가 세조 이후 여러 요직을 거쳤을 뿐 아니라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의 제자를 뒀기 때문이다. 김굉필의 제자가 정암 조광조였으니 김종직과 조광조는 손제자 관계가 된다. 그런 그는 훗날 글 하나 때문에 부관참시를 당했다.

김종직은 세조에게 중용됐지만 내심 수양대군 시절 조카 단종을 폐위한 데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은 게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김종직은 단종과 세조의 관계를 초 의제와 항우에 비유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방의 한(漢)과 항우의 초(楚)가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초한쟁패기 이전 항우는 조카를 살해하고 왕이 됐다.

조의제문의 원문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정축(1457년)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훨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장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쏜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그런데 이 글을 보고 단종과 세조를 연결시킨 이는 많지 않았던 듯하다. 워낙 글이 난해했기 때문이다. 훗날 조의제문을 접한 연산군마저 “어찌 이 글이 세조를 능멸하고 노산군(단종)을 위한 제문이란 것인가?”라고 되물었을 정도였다. 여기서 ‘칠장(七章)의 의복’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칠장이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입은 제복(祭服)을 말한다. ‘장’은 옷을 장식하는 해, 달 등의 문양을, ‘7’은 문양의 수를 말하는데 신분 서열에 따라 무늬의 수가 달랐다(고려 때는 임금이 9장, 신하는 7장, 5장, 3장, 1장을 사용했음). 조선과 중국에선 왕이 칠장복을 입었으니 꿈속의 인물이 임금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스승의 글이 사림파의 의식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판단해 사초(史草)에 실었는데 이 사초가 1498년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됐다. 반면 사후 부관참시가 됨으로써 김종직은 ‘사림파의 영수’라는 이름을 후대까지 남기게 됐으니 역설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동방 5현 동국 18현 선정도 알고 보면 세력다툼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밀양에서 숨졌다. 아버지 사후 김종직은 밀양에서 자랐고 이후 밀양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동에 버금간다며 스스로를 소안동(笑安東)이라고 불렀다. 즉 안동을 비웃는다는 뜻이다. 이는 함양 사람들이 일두 정여창으로 인해 ‘좌안동 우함양(咸陽)’이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밀양에는 김종직의 생가 터와 김종직을 기리는 예림(禮林)서원이 있다. 그런데 왜 예림서원은 이번에 유네스코에 제출한 9개의 서원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그가 성리학의 중시조이며 동방 5현 혹은 동국 18현에 포함된 많은 이름난 선비들의 스승인데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한우 단국대 인재아카데미 주임교수의 말이다.

“그는 벼슬을 오래했지만 이렇다 할 행적을 생전에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퇴계가 동방 5현을 선정할 때도 제외됐다.” 또 다른 이들은 이런 설명을 하기도 한다. “그의 사후 저작이나 문서가 다 사라져 그의 공적을 알 수 없다.”

다른 해석도 있다. 이 교수가 쓴 《왕의 하루-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문묘 배향은 예송논쟁과 더불어 서인과 남인 간 이데올로기 논쟁의 핵심 쟁점이었다. 이이(李珥)의 문묘 배향은 인조반정 한 달여 만에 제기됐다. 반정 세력은 그전부터 이 문제를 오랫동안 숙의해 왔던 것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이이와 성혼의 직간접적인 문인들이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서인은 이이를 이황과 대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동방 5현이니 동국 18현이니 하는 문묘 배향 인물을 선정하는 데 그 학파의 세력이 어느 정도냐가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뜻한다. 같은 책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현종대는 서인들의 힘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예송논쟁에서도 서인들이 압승을 거뒀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송시열과 송준길은 이이와 성혼의 저작들을 현종이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하는 방식으로 문묘 배향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은 뜻밖에도 숙종 때에 와서 이뤄졌다. 경신환국이 있고 나서 서인들이 집권하자 서인 계통의 관리들과 유생들은 전방위로 숙종을 압박해 들어갔다. 숙종은 마침내 1681년 9월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 요청을 윤허한다’고 명한다. 인조반정 이후 무려 4대 58년에 걸친 논란 끝에 문묘 배향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이와 성혼에 이어 서인의 실질적인 지도자 김장생에 대한 문묘 배향 운동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1631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직후 장유가 김장생의 시호를 청했지만 인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인들의 움직임은 집요했고 1658년 마침내 문원(文元)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는 신호탄일 뿐 궁극적인 목표는 문묘 배향이었다. 숙종대 말인 1712년 유생 1000여 명이 상소해 청하면서 김장생의 문묘 배향 운동이 시작됐다. 결국 운동을 시작한 지 5년 만인 1717년 상소가 받아들여져 문묘의 동무에 배향됐다. 동무란 문묘의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쪽을 말한다. 왼쪽보다 더 권위 있는 자리다.”

도학의 창시자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

수월루를 지나면 나오는 환주문. 그 사이로 도동서원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김종직의 제자는 정여창·김굉필·김일손인데 이 중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김굉필과 정여창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김굉필의 서원이 있다. 도동(道東)서원이다. 그의 스승 김종직이 영남 사학을 크게 일으켜 많은 학자를 배출한 교육자였다면 김굉필은 학문의 내적 기반을 공고히 한 도학(道學)의 창시자라고 평가되고 있다.

도학이란 유학의 한 분파로 유교 도덕을 수양하는 학문을 말한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 도동서원은 선조가 즉위했던 1568년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잿더미가 됐다. 이때 서원 재건에 나선 인물이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이자 그의 학문을 이어받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다. 김굉필의 제자가 조광조다.

서원 앞에 있는 이 고목이 이른바 ‘김굉필 나무’다.

조광조는 김굉필이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무오사화에 연루돼 평안도 회천으로 귀양갔을 때 그 먼 곳까지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평생 소학(小學)을 읽고 실천해 ‘소학 동자’로 불린 김굉필은 가는 곳마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사람이 들끓었다고 한다. 다음 시를 보면 그가 오직 지성(至誠)으로 후학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공부를 해도 기본을 몰랐는데
소학을 읽고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이제부터 정성껏 자식 구실 하려 하니
구차하게 어떻게 잘살기를 바라리오.’

동방 5현에 포함되는 이언적은 김굉필의 제자였던 외삼촌 손중돈에게서 학문을 배워 김굉필 계보로 분류되지만 퇴계 이황은 별다른 계보가 없다. 반면 이황의 라이벌이었던 이이는 학문적으론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 분류된다. 그의 스승 백인걸과 성수침(성혼의 아버지)이 모두 조광조의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도동서원의 강당에는 용머리를 돌로 만들어 기단석에 넣어두었다. 앞을 흐르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물에서 사는 용으로 비보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언적·이황은 동방 5현에 포함됐고 이이와 우계 성혼은 동국 18현에만 그쳤으며 왜 이언적·이황의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은 이번 유네스코 등재 신청 9개 서원에 포함됐는데 이이의 자운서원과 성혼의 파산서원은 제외된 것일까.

더 궁금한 것은 동방 5현에 당당히 포함된 조광조의 서원은 왜 유네스코 등재 신청 서원 목록에서 탈락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를 모신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파괴됐다가 다른 9개 서원에 비해 규모가 작고 허름하게 복원됐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볼 뿐이다.

도동서원에는 세월의 흔적이 짙게 묻어 있다.

이황과 이이 이후 사림파는 영남학파와 기호(幾湖)학파로 분화된다. 영남학파의 기둥인 안동의 도산(陶山)서원은 절경이다. 이곳에 서원이 생긴 것은 1574년인데 퇴계는 그보다 앞선 1557년부터 여기 터전을 마련했다. 그가 안동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 서원의 토대를 마련한 이유는 산수가 수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산에서 하회마을로 오면 그 유명한 병산(屛山)서원이 있다. 병산은 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의 산이 병풍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뒤편은 안동의 진산인 화산이다. 이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柳成龍) 선생을 모신다. 서애는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이었지만 역시 동방 5현 동국 18현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퇴계가 서원에 배향된 수 제일 많아

유홍준은 만대루를 우리 누각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만대루는 두보의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병산서원의 으뜸은 단연 만대루(晩對樓)다. 우리 누각 중 멋지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만대루는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백곡회심유(白谷會深遊)’에서 따왔다.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 만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라는 뜻이다.

유네스코 등재 신청 목록에 포함된 회재 이언적의 옥산서원, 일두 정여창의 남계서원, 사계 김장생의 돈암서원도 품격 있기로 유명한 서원이다. 하지만 문제의 ‘설명하기 힘든 부분’ 때문에 “누군 빠지고 누구는 들어갔느냐”는 의문을 자아냈고 급기야 “백화점에서 명품 쇼핑하듯 서원을 골랐다”는 비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런 의문은 신라 말기의 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무성서원에서 더욱 증폭된다. 최치원은 유명하긴 하지만 이번에 선정된 9개의 서원 가운데 나머지 8개 서원과 비교해 보면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이하게도 최치원을 모시는 무성서원은 전라북도에 있다.

무성서원의 모습. 이곳은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서원에 모셔진 인물은 퇴계가 31곳으로 압도적 1위이며 송시열(26곳)-이이(21곳)-주자(20곳)-조광조·이언적(각각 16곳)-정구(14곳)-정몽주·김굉필(각 13곳)-김장생(12곳)-정여창·조헌·민정중(9곳) 등의 순서였다. 이것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선비사회에서 누가 추앙받았고 영향력이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 정리해 본다. 이번 9개 서원 선정은 ▲지역 안배(경상도 6곳-충남, 전북, 전남 각 1곳)에 치중했다는 느낌이 들며 ▲학맥·학파가 잘 연결되지 않고 ▲김종직·조광조·율곡 이이와 남명 조식(曺植)의 서원이 제외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으며 ▲지리적으로도 연관성이 없고 ▲주변 다른 문화유산과의 연결성도 약한 것이다.

증보문헌 비고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 수는 모두 378곳이었다. 이것은 조정에서 파악한 숫자일 뿐 사우(嗣宇)까지 합치면 1000여 개가 넘었다. 그랬던 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47곳만 남고 모조리 훼절됐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가 선비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이유가 있다.

일례로 충북 괴산에 있는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모시는 곳인데 훗날 그 횡포가 극에 달했다. 화양서원은 자의로 ‘화양묵패’라는 것을 만들었다. 남의 재산을 평가하고 세금 고지서를 묵패와 함께 보내면 양반이고 상민이고 간에 논밭을 팔아 돈을 바쳐야 했을 정도다. 불응하면 서원으로 붙잡혀가 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서원이 본래 기능을 잃고 악의 소굴로 바뀌자 대원군이 제일 먼저 없앤 곳이 바로 화양서원이었다. 이렇게 훼절된 서원은 당대에는 비록 박수를 받았으나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파괴됐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