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각의 들창을 닫아라. 五官의 구멍을 봉쇄해 버려라!
⊙ 주먹으로 가슴을 치니 찢어진 북[鼓]이 울고
⊙ 주먹으로 가슴을 치니 찢어진 북[鼓]이 울고
- 《신문예(新文藝)》 1924년 3월호에 실린 심훈의 시 〈미친놈의 기도〉가 일제 검열에 의해 삭제된 모습.
심훈(沈熏)의 작품 전집은 지금까지 3차례 간행됐다. 36세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시, 장·단편 소설, 수필, 평론, 영화평, 일기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심훈의 중형 심명섭(沈明燮)이 광복 후 동생의 유고를 묶어 《그날이 오면》(1949년)이란 시집을 내놓았다.
1953년 한성도서(漢城圖書)에서 처음으로 《심훈전집》(전 7권)을 출간했고 1966년 탐구당에서 《심훈문학전집》(전 3권)을 꾸렸다. 탐구당판(版) 전집은 심훈 30주기 기념이다.
심훈 작품에 대한 서지 작업은 그동안 진전을 보지 못한 상태다. 심훈 관련 문학연구 성과도 미흡하다. 중앙대 국문과 김민정 교수는 지난 9월 18일 충남 당진시청에서 열린 ‘제1회 심훈문학연구소 심포지엄’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심훈 관련 학위 논문 수는 44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심훈 문학만을 다룬 논문은 2편이고 박사 논문은 7편뿐이다.
《월간조선》은 심훈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지금까지 전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을 발굴, 소개한다. 모두 《조선일보》 지면에 실렸던 시와 산문들로, 심훈이 《조선일보》 기자 시절(1928~1931년) 발표한 것들이다. 작품을 싣기에 앞서 원본 의미를 살리면서 일부 한자를 한글로 바꿨으며 현대어 맞춤법 표기를 따랐음을 밝혀둔다. ‘공연예술자료 연구가’ 김종욱(金鍾旭)씨가 발굴,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김씨는 조만간 이근배(李根培) 시인과 함께 심훈 전집을 새롭게 간행할 예정이다.
〈춘소산필(春宵散筆)〉
춘색뇌인면부득(春色惱人眠不得)
야반에 비 듣는 소리 영창을 두드린다. 문풍지를 떨며 스며드는 실바람이 홀로 누운 베갯머리에 봄 내음새를 머금다가 가만히 풍겨준다.
봄은 오려는가? 그러나 어디로부터 누구를 찾아서 오려는고?
계화(桂花)가 버들가지같이 흩날리는 ○○(판독불가-편집자주) 호반에 피어오르는 신록 연둣빛 아지랑이를 마시고 아찔하게 취해도 보았고 오월의 지원(祗園)(京都의 歡樂境) 밤은 비에 젖어서 예기(藝妓)가 뜯는 삼매경(三昧鏡) 소리조차 느즈러질 제 부질없는 향수에 온 밤을 하얗게 밝혀도 보았다.
오! 그러나 이 몸을 낳아준 ○혹[○域]의 몸은 낙지(落地) 이후에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경칩이 지나면 ‘두더지’도 움직여 나오고 누항(陋巷)에서도 해동(孩童)들의 피리소리나마 들리겠거늘 내 마음속은 구석구석이 뒤져보아도 몸은 한 번도 찾아와준 기억조차 없다.
전전(剪剪)한 바람소리 섬돌에 오열하는 저 빗소리 다 쓰러진 초가집 지붕 우에도 봄비는 몇 번이나 뿌렸을 것이다. 그러나 성냥 한 가지를 그어 대어도 타버릴 만큼 메마른 내 마음은 단 한 차례도 촉촉하고 부드러운 봄비에 포근히 젖어본 적이 없었다.
오~ 봄의 내음새 질식하려는 심령의 호흡이여!
그래도 뚫어진 미닫이 틈을 비비고 봄은 기어코 오겠다는 선문(先聞)을 전한다. 지금은 소식조차 알 길 없는 상화(相和)씨의 시구를 생각하며
“××한 이 땅에도 봄은 오려나!”
하고 애상의 장태식(長太息)이나 뿜고 있어야 옳을 것인가?
“질척질척한 땅속에 파묻힌 시체로 모여드는 버러지에게 내 뼈의 마디를 빨리려노라. 오오 그래도 오히려 이 몸의 고통이 남아 있을 것인가?”
하고 아편을 빤 ‘보들레르’의 원혼이나 불러주었으면 어심(於心)에 조그마한 위자(慰藉)나마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천정으로부터 엄숙한 소리 있어 내 마음을 꾸짖는다.
— 감각의 들창을 닫아라 — 오관(五官)의 구멍을 봉쇄해 버려라! 자연은 얼음같이 찬 것 그 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봄의 자취를 붙잡으려는 하염없는 노력을 가엾은 마음아 꿈도 꾸지 마라. 너는 혀를 깨물고 황소걸음을 본떠서 묵묵히 걸어나가려무나. 앞만 보고 오직 앞길만 바라보고 다 닥치는 곳은 도살장이든 단두대이든 지옥이든 또한 천국이든 일개의 동물인 네 자신이 점쳐 알 바 아니다.
그러나 간드러진 봄바람은 요사스러운 계집같이도 한쪽 귀에 속살거린다.
— 나는 어린애 머리카락처럼 허느적거리는 수양가지에도 불고요, 팔구십 먹은 노인네 은실 같은 백발도 날릴 줄 안답니다. 그러구요, 똑같은 바람이 꼭 한때에 부는 법이라나요 — 라고.
유리조각 풍경도 추녀 끝에 잠이 들고 ‘야기야모’ 장사의 애처로운 외침도 골목 안에서 죽은 지 오래다. 밤은 새로 3시. 뒤집어 베인 베개가 어느 틈에 또 젖어간다.
교통차단(交通遮斷)
다섯 살 먹은 조카 놈이 급성 성홍열에 걸려 집안이 발끈 뒤집히고 교통차단을 당해서 경리가 두 명씩이나 파수를 보고 섰으니 요새같이 청명한 봄날을 침침한 방 한구석에 감금이 된 채 여러 날이 지났다.
하도 무료하기에 묵은 책권이나 뒤지고 누웠으려니까 하목수석(夏目漱石)의 ‘고양이’에서 이러한 의미의 한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 사람의 새끼들은 땅덩어리 몇 조각을 쪼개 내가지고 요것이 내 땅이니 이것은 네 영토니 하고 몇천을 두고 싸움질을 하고 있다. 게[蟹] 딱지만 한 집과 집 사이에도 담을 쌓고 철망을 치고 하다가 나중에는 공간까지도 갈라내는 꾀를 내어가지고서 저것은 네 공기다 이놈아, 이것은 내게로 불어오는 바람이다, 하고 악지를 쓰며 서로 꼬집고 쥐어뜯을 날이 오고야 말았다.…”
어지간히 신랄한 풍자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뒤 대문을 꼭 봉해 버린 한 가족이란 궤짝 속에도 자그락거리는 싸움이 끊일 사이가 없고 가족끼리도 서로 교통이 차단된 지도 벌써 오래다.
사랑과 안방의 교통이 안방과 건넌방과 아랫방과 그리고 행랑방과의 교섭이 두절되어 있다. 50년이나 동서(同壻)해 왔고 또 동혈(同穴)할 남편과 아내이건만 정의(情誼)의 내왕이 끊어지고 어버이와 자녀 사이에는 의사의 소통이 막히고 형과 아우며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제각기 별다른 감정의 세계에서 내려다보고 치어다보며 속눈을 흘기고 주인과 사환은 중문간 문지방 하나를 격(隔)해서 계급의 성벽이 가로막혀 있다.
그러면 서로 교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구태여 예를 들자면,
사당방 시렁 우에 분칠해 논 밤나무 토막이 ‘광’ 속에서 구르는 장작개비와 그 본질이 나무[木]인 면에 있어서 가깝다 하겠고 주방과 변소와의 교통이 하루 한 번쯤은 간접으로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직계의 접근할 관계가 있으니까 어머니가 자기 뱃속으로 낳아 논 자식의 마음을 핏줄이 서로 엉켜서라도 알 수 있으리라 한다. 그러나 밤새도록 울며 보채는 젖먹이의 심사를 그 자모가 들여다보지 못하지 않는가?
혹자의 금언을 들면 연애가 삼매지경에 들어가면 은 두 개 이성의 마음이 혼연히 합치되므로 상대자에게서 자아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 한다. 그러나 ‘키스’는 불같이 뜨거워도 한 조각 살점의 찰나적 감촉에 지나지 못하고 조골이 우그러들도록 포옹을 한다기로서니 새빨간 염통과 염통이 가락지를 끼고 두 덩어리가 하나로 녹아들어 가본 체험을 해본 사람이 있다 하던가? 연애의 행위 가운데에는 고문이나 또는 외과수술과 유사한 맛이 있을 뿐이 아닌가?
우리네 시조 할아버지 원후공(猿猴公) 당시로부터 도당유우(陶唐有虞) 몇만 년에 다만 몇 초 동안이나 사람의 영과 혼이 ‘새끼’를 꼬아본 적이 있다고 뉘 있어 증좌(證左)하려는고?
세기와 세기가 시대와 시대가 자연과 인생이 국경과 국경이 인간과 인간이 교도와 신앙의 대상이 동지와 동지가 놈과 년이 그리고 일분자와 일종자까지 그 핵심이 반죽이 되고 서로 호리(毫釐)의 차가 없이 얼크러져 본 적이 있는가?
근처만 가도 급살을 맞는 흑사병술이나 붙은 것처럼 격리하고저 애를 쓰고 피 한 방울만 섞여도 전염이 되는 문둥이[癩病患者]나 만난 듯이 도피하려고만 들지 않았는가?
유폐다 — 차단이다 — 단절이다 — 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꼭꼭 봉쇄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돌(咄)! 못생긴 마음아. 그래도 고적하다고 밤중마다 보챌 터이냐? 그다지도 못 견디겠거든 잠깐만 참아라. 멀지 않아서 너의 ○○(판독불가) 사직원을 제출하고 흙덩이와 ○○(판독불가)만 하는 날이면 땅 버러지들은 네 콧구멍 속으로 빈번히 내통할 것이요 고총(古冢)을 파헤치는 여우의 뾰족한 혓바닥이 너의 이마[額]를 다정히 핥아주리라.
이 어리석고도 가엾은 조그만 넋[魂]아!
(출처=《조선일보》 1928년 3월 14~15일)
춘영집(春集)
내가 부는 피리[橫笛]소리 곡조는 몰라도
그 사람이 그리워 마디마디 꺾이네
길고 가늘게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어서
봄 하늘의 별 하나 눈물에 젖네
(출처=《조선일보》 1928년 4월 8일)
저창삼수(低唱三首)
짝 잃은 기러기 새벽하늘에
외마디 소리 이끌며 별빛을 가[耕]네
단 한잠도 못 맺은 기나긴 겨울밤을
기러기 홀로 나 홀로 잠든 천지(天地)에 울며 헤매네
장자(膓子)를 쥐어뜯어도 바람벽을 들이받아도
마음속으로 파고만 드는 그의 그림자
덩이 피에 벌룽거리는 사나이의 염통이
조그만 소녀의 손에 사로잡히고 말았네
주먹으로 가슴을 치니 찢어진 북[鼓]이 울고
발꿈치로 땅을 구르니 티끌만 풍겨
참을 길 없는 설움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밤중이면 이불 속에서 깨물어 죽이네
(출처=《조선일보》 1928년 11월 11일)
원단잡음(元旦雜吟)
어렸을 때의 일기장을 무심히 들추어보다가
눈감고 가슴을 움켜쥐었네 떨리는 손으로—
면도하려고 든 거울에 주름살 잡힌 내 얼굴
터럭 하나 깎기도 전에 그 얼굴에 구름이 서리어
눈 쌓인 뜰 우에 강아지란 놈 가로 뛰고 세로 뛰고
방안에선 나 홀로 어깨 들먹 다리 들먹 흉내 내어 보았네
추녀 끝에 고드름 발등 우에 방울방울
비 맞은 새 새끼처럼 퍼득이려는 내 마음이여!
삼 년 만에 친구의 이름 엽서에 써놓고도
주소 없어 못 부치네 앞서 간 d 군(君)의 얼굴
그대나 부디 행복하소서! 하고 온종일 빌다가
말없이 넘어가는 원단(元旦)의 해만 멀거니 바라보네(己巳元旦)
(출처=《조선일보》 1929년 1월 2일)
저음수행(低吟數行)
아침마다 꿈길처럼 허겁지겁 기어 들어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나서는 물끄러미 바라다보네
십 년이나 다닌 친구의 얼굴을
책상 우에 꺾어다 꽂은 복숭아꽃
잎잎이 시들어 향기 없어 떨어져
네 열매는 어느 곳에 맺으려는고
개천바닥을 뚫고서
파릇파릇 피어오르는 풀 잎새
이 몸이 망아지나 되어지고 송아지나 되어지고
창에 기대어 봄바람 가슴껏 들이마시니
새빨간 피 혈관 속을 쭉쭉 뻗어 달리네
오오 나는 아직도 청춘이로구나
창경원 꽃구경을
휩쓸려 들어갔다가 등을 밀려나온
가등(街燈) 밑에 기-다란 내 그림자여! (1929. 4月 18日의 日記로)
(출처=《조선일보》 1929년 4월 20일)
야구(野球)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든 야구장으로,
소리라도 마음껏 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육월의 태양이 끓어 내리는 ‘그라운드’에
상청수(常靑樹)와 같이 버티고 선 점(點), 점, 점
꿈틀거리는 그네들의 혈관 속엔
덩이 피 쭉 쭉 쭉 뻗어 달린다
‘피처’의 꽂아 넣는 ‘스트라이크’는 ××××
‘배트’로 갈겨 내친 ‘볼’은 수뢰(水雷)의 ××!
Home-run-bat- Home-run-bat!
시퍼런 하늘 바다로 유성같이 난다
고함소리에 무너지는 군중의 성벽
Victory— Victory Victory Victory— Victory—
찔려 죽어도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는
오오 이 땅의 젊은이의 의지를 보라
지고도 웃으며 적의 손을 잡는
이 강산에 자라난 남아의 가슴을 헤쳐보라!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든 야구장으로,
소리라도 마음껏 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1929. 6. 10)
(출처=《조선일보》 1929년 6월 13일)
가을
내 누구에게 주려고 글을 쓰는가
내 누구에게 들려주고자 노래를 부르는가
새침한 가을바람 안 가슴을 파고들고
벌레소리 이마를 쪼며 밤을 새우는데
내 무엇을 기다리길래 눈을 감지 못하는가?
창경원의 호랑이 호통을 친다
쇠창살 하나 물어 떼지는 못하여도
우렁찬 목소리에 나무가 떨며 앞산이 울고
사자란 놈은 눈 딱 감고 뒹구는 마음의 여유나 있으련만
내게는 무엇이 있느냐 오오 무엇이 남았느냐?
붓대를 꺾어 던지고 ×××× (검열로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편집자주) 바꾸어 잡자
거리 거리에 열린 것이 × 끝을 기다리나니
길바닥에 시(詩)를 쓰자 새빨간 글씨로 —
동무여 그리하여 시집의 제명을 붙이자
《피로 쓴 가을의 노래》라고 (1929. 8. 27)
(출처=《조선일보》 1929년 8월 28일)
고독음(孤獨吟)
진종일 앓아 누워서 다녀간 사람 손꼽아보니
창살을 걸어간 햇발과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
두 손길 펴서 가슴에 안고 임종 때를 생각해 보다
그림자하고 단둘이서만 지내는 살림이거늘
천장이 떨리도록 그의 이름은 왜 불렀는고
이웃 사람 들었을세라 혼자서 얼굴 붉혔네
밤 깊어 첩첩이 닫힌 덧문 밖에 그 뉘라서 뒤설레는고
미닫이 열어젖히자 굴러드느니 낙엽 한 송이 머리맡에
어루만져 재우나 모진 잠은 와 주지 않네
값없는 눈물 흘리지 말고 몇 번이나 맹서했던가
울음을 씹어서 웃음으로 삼키기도 한 버릇 되었으련만
뜨거운 눈두덩 주먹으로 부비니 목젖만 껄떡거리네 (1929. 이웃나라 雙十節에)
(출처=《조선일보》 1929년 10월 15일)
동우몽몽(冬雨)
저 비가 줄기줄기 눈물일진대
헤어보면 천만줄기나 되엄 즉 허이
단 한 줄기 내 눈물엔 베개만 젖지만
그 많은 눈물 비에 사태가 아니 내리리
남산인들 삼각산인들 허물어지지 않으리
야반(夜半)의 기적소리!
고기에 주린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냐
이 바닥 젊은 사람의 울분을 뿜어내는 호통이냐
저력 있는 그 소리에 주춧돌이 움직이니
구들 돌장 밑에서 지진이나 터져 오르지 않으려는가?
하늘과 땅이 맞붙어서 맷돌질하기를
빌고 바라는 마음 몹시도 간절하건만
단 한 자[尺] 솟지 못하는 가엾은 이 몸이여
달리다 뛰면 현해탄인들 못 건너리만
걸음발 타는 동안에 그 비가 너무나 차구나! (1929. 12. 14)
(출처=《조선일보》 1929년 12월 17일)
봄의 마음
봄이 사나이의 가슴에 안겨 몸부림친다
쓰라린 지난날의 마디마디를 깎고 저며서
염통 속에 똑- 똑- 똑- 묵은 피가 고인다
달 밝은 밤 모래밭 위에 방울방울 뿌린 눈물이라면
지향 없이 떼어놓는 발자국이 피부터 나주려니
속속들이 미쳐 날뛰는 마음이라 겉잡을 길 없구나
봄아! 눈보라만 치는 이 땅에 무엇 하러 기어드느냐?
네 모양이나 어느 놈의 품안에 안길지도 모르며 분을 바르고
경대 앞에 저 홀로 해죽거리는 매음녀(賣淫女)의 상판 같구나
저게 무슨 소리냐 거리거리에 요란히 들리는 소리가—
조그만 것들이 골목골목 모여서 피리 부는 소릴세
오오 우리네 아기들이 콧물을 흘리며 자라나는 소릴세!
피리소리 들으니 눈물이 저절로 거두어지네
그 소리 가늘고 곡조는 삑삑- 삑삑- 멋이 없어도
가락가락 생기 있어 메마른 영혼을 어루만지네
네 어버이는 명랑한 햇빛을 등지고 살아도
너희나 무럭무럭 커지거라! 자라나거라!
버들가지에 물오르듯 그 가지가 하늘로 뻗어 오르듯
내 이제 어린 것의 앞날이나 축복하려는 생각이
어느 때부터 마음속에 싹 돋았던고? 자라났던고?
참으려도 참으려도 깨물었던 울음이 또다시 터지는구나! (1930. 4. 20)
(출처=《조선일보》 1930년 4월 23일)⊙
1953년 한성도서(漢城圖書)에서 처음으로 《심훈전집》(전 7권)을 출간했고 1966년 탐구당에서 《심훈문학전집》(전 3권)을 꾸렸다. 탐구당판(版) 전집은 심훈 30주기 기념이다.
심훈 작품에 대한 서지 작업은 그동안 진전을 보지 못한 상태다. 심훈 관련 문학연구 성과도 미흡하다. 중앙대 국문과 김민정 교수는 지난 9월 18일 충남 당진시청에서 열린 ‘제1회 심훈문학연구소 심포지엄’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심훈 관련 학위 논문 수는 44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심훈 문학만을 다룬 논문은 2편이고 박사 논문은 7편뿐이다.
《월간조선》은 심훈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지금까지 전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을 발굴, 소개한다. 모두 《조선일보》 지면에 실렸던 시와 산문들로, 심훈이 《조선일보》 기자 시절(1928~1931년) 발표한 것들이다. 작품을 싣기에 앞서 원본 의미를 살리면서 일부 한자를 한글로 바꿨으며 현대어 맞춤법 표기를 따랐음을 밝혀둔다. ‘공연예술자료 연구가’ 김종욱(金鍾旭)씨가 발굴,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김씨는 조만간 이근배(李根培) 시인과 함께 심훈 전집을 새롭게 간행할 예정이다.
〈춘소산필(春宵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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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28년 3월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실린 수필 〈춘소산필(春宵散筆)〉. |
야반에 비 듣는 소리 영창을 두드린다. 문풍지를 떨며 스며드는 실바람이 홀로 누운 베갯머리에 봄 내음새를 머금다가 가만히 풍겨준다.
봄은 오려는가? 그러나 어디로부터 누구를 찾아서 오려는고?
계화(桂花)가 버들가지같이 흩날리는 ○○(판독불가-편집자주) 호반에 피어오르는 신록 연둣빛 아지랑이를 마시고 아찔하게 취해도 보았고 오월의 지원(祗園)(京都의 歡樂境) 밤은 비에 젖어서 예기(藝妓)가 뜯는 삼매경(三昧鏡) 소리조차 느즈러질 제 부질없는 향수에 온 밤을 하얗게 밝혀도 보았다.
오! 그러나 이 몸을 낳아준 ○혹[○域]의 몸은 낙지(落地) 이후에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경칩이 지나면 ‘두더지’도 움직여 나오고 누항(陋巷)에서도 해동(孩童)들의 피리소리나마 들리겠거늘 내 마음속은 구석구석이 뒤져보아도 몸은 한 번도 찾아와준 기억조차 없다.
전전(剪剪)한 바람소리 섬돌에 오열하는 저 빗소리 다 쓰러진 초가집 지붕 우에도 봄비는 몇 번이나 뿌렸을 것이다. 그러나 성냥 한 가지를 그어 대어도 타버릴 만큼 메마른 내 마음은 단 한 차례도 촉촉하고 부드러운 봄비에 포근히 젖어본 적이 없었다.
오~ 봄의 내음새 질식하려는 심령의 호흡이여!
그래도 뚫어진 미닫이 틈을 비비고 봄은 기어코 오겠다는 선문(先聞)을 전한다. 지금은 소식조차 알 길 없는 상화(相和)씨의 시구를 생각하며
“××한 이 땅에도 봄은 오려나!”
하고 애상의 장태식(長太息)이나 뿜고 있어야 옳을 것인가?
“질척질척한 땅속에 파묻힌 시체로 모여드는 버러지에게 내 뼈의 마디를 빨리려노라. 오오 그래도 오히려 이 몸의 고통이 남아 있을 것인가?”
하고 아편을 빤 ‘보들레르’의 원혼이나 불러주었으면 어심(於心)에 조그마한 위자(慰藉)나마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천정으로부터 엄숙한 소리 있어 내 마음을 꾸짖는다.
— 감각의 들창을 닫아라 — 오관(五官)의 구멍을 봉쇄해 버려라! 자연은 얼음같이 찬 것 그 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봄의 자취를 붙잡으려는 하염없는 노력을 가엾은 마음아 꿈도 꾸지 마라. 너는 혀를 깨물고 황소걸음을 본떠서 묵묵히 걸어나가려무나. 앞만 보고 오직 앞길만 바라보고 다 닥치는 곳은 도살장이든 단두대이든 지옥이든 또한 천국이든 일개의 동물인 네 자신이 점쳐 알 바 아니다.
그러나 간드러진 봄바람은 요사스러운 계집같이도 한쪽 귀에 속살거린다.
— 나는 어린애 머리카락처럼 허느적거리는 수양가지에도 불고요, 팔구십 먹은 노인네 은실 같은 백발도 날릴 줄 안답니다. 그러구요, 똑같은 바람이 꼭 한때에 부는 법이라나요 — 라고.
유리조각 풍경도 추녀 끝에 잠이 들고 ‘야기야모’ 장사의 애처로운 외침도 골목 안에서 죽은 지 오래다. 밤은 새로 3시. 뒤집어 베인 베개가 어느 틈에 또 젖어간다.
교통차단(交通遮斷)
다섯 살 먹은 조카 놈이 급성 성홍열에 걸려 집안이 발끈 뒤집히고 교통차단을 당해서 경리가 두 명씩이나 파수를 보고 섰으니 요새같이 청명한 봄날을 침침한 방 한구석에 감금이 된 채 여러 날이 지났다.
하도 무료하기에 묵은 책권이나 뒤지고 누웠으려니까 하목수석(夏目漱石)의 ‘고양이’에서 이러한 의미의 한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 사람의 새끼들은 땅덩어리 몇 조각을 쪼개 내가지고 요것이 내 땅이니 이것은 네 영토니 하고 몇천을 두고 싸움질을 하고 있다. 게[蟹] 딱지만 한 집과 집 사이에도 담을 쌓고 철망을 치고 하다가 나중에는 공간까지도 갈라내는 꾀를 내어가지고서 저것은 네 공기다 이놈아, 이것은 내게로 불어오는 바람이다, 하고 악지를 쓰며 서로 꼬집고 쥐어뜯을 날이 오고야 말았다.…”
어지간히 신랄한 풍자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뒤 대문을 꼭 봉해 버린 한 가족이란 궤짝 속에도 자그락거리는 싸움이 끊일 사이가 없고 가족끼리도 서로 교통이 차단된 지도 벌써 오래다.
사랑과 안방의 교통이 안방과 건넌방과 아랫방과 그리고 행랑방과의 교섭이 두절되어 있다. 50년이나 동서(同壻)해 왔고 또 동혈(同穴)할 남편과 아내이건만 정의(情誼)의 내왕이 끊어지고 어버이와 자녀 사이에는 의사의 소통이 막히고 형과 아우며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제각기 별다른 감정의 세계에서 내려다보고 치어다보며 속눈을 흘기고 주인과 사환은 중문간 문지방 하나를 격(隔)해서 계급의 성벽이 가로막혀 있다.
그러면 서로 교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구태여 예를 들자면,
사당방 시렁 우에 분칠해 논 밤나무 토막이 ‘광’ 속에서 구르는 장작개비와 그 본질이 나무[木]인 면에 있어서 가깝다 하겠고 주방과 변소와의 교통이 하루 한 번쯤은 간접으로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직계의 접근할 관계가 있으니까 어머니가 자기 뱃속으로 낳아 논 자식의 마음을 핏줄이 서로 엉켜서라도 알 수 있으리라 한다. 그러나 밤새도록 울며 보채는 젖먹이의 심사를 그 자모가 들여다보지 못하지 않는가?
혹자의 금언을 들면 연애가 삼매지경에 들어가면 은 두 개 이성의 마음이 혼연히 합치되므로 상대자에게서 자아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 한다. 그러나 ‘키스’는 불같이 뜨거워도 한 조각 살점의 찰나적 감촉에 지나지 못하고 조골이 우그러들도록 포옹을 한다기로서니 새빨간 염통과 염통이 가락지를 끼고 두 덩어리가 하나로 녹아들어 가본 체험을 해본 사람이 있다 하던가? 연애의 행위 가운데에는 고문이나 또는 외과수술과 유사한 맛이 있을 뿐이 아닌가?
우리네 시조 할아버지 원후공(猿猴公) 당시로부터 도당유우(陶唐有虞) 몇만 년에 다만 몇 초 동안이나 사람의 영과 혼이 ‘새끼’를 꼬아본 적이 있다고 뉘 있어 증좌(證左)하려는고?
세기와 세기가 시대와 시대가 자연과 인생이 국경과 국경이 인간과 인간이 교도와 신앙의 대상이 동지와 동지가 놈과 년이 그리고 일분자와 일종자까지 그 핵심이 반죽이 되고 서로 호리(毫釐)의 차가 없이 얼크러져 본 적이 있는가?
근처만 가도 급살을 맞는 흑사병술이나 붙은 것처럼 격리하고저 애를 쓰고 피 한 방울만 섞여도 전염이 되는 문둥이[癩病患者]나 만난 듯이 도피하려고만 들지 않았는가?
유폐다 — 차단이다 — 단절이다 — 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꼭꼭 봉쇄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돌(咄)! 못생긴 마음아. 그래도 고적하다고 밤중마다 보챌 터이냐? 그다지도 못 견디겠거든 잠깐만 참아라. 멀지 않아서 너의 ○○(판독불가) 사직원을 제출하고 흙덩이와 ○○(판독불가)만 하는 날이면 땅 버러지들은 네 콧구멍 속으로 빈번히 내통할 것이요 고총(古冢)을 파헤치는 여우의 뾰족한 혓바닥이 너의 이마[額]를 다정히 핥아주리라.
이 어리석고도 가엾은 조그만 넋[魂]아!
(출처=《조선일보》 1928년 3월 14~15일)
춘영집(春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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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4월 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심훈의 〈춘영집(春咏集)〉. 심훈과 함께 안석주, 김동환 등도 참여해 시를 썼다. |
그 사람이 그리워 마디마디 꺾이네
길고 가늘게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어서
봄 하늘의 별 하나 눈물에 젖네
(출처=《조선일보》 1928년 4월 8일)
저창삼수(低唱三首)
짝 잃은 기러기 새벽하늘에
외마디 소리 이끌며 별빛을 가[耕]네
단 한잠도 못 맺은 기나긴 겨울밤을
기러기 홀로 나 홀로 잠든 천지(天地)에 울며 헤매네
장자(膓子)를 쥐어뜯어도 바람벽을 들이받아도
마음속으로 파고만 드는 그의 그림자
덩이 피에 벌룽거리는 사나이의 염통이
조그만 소녀의 손에 사로잡히고 말았네
주먹으로 가슴을 치니 찢어진 북[鼓]이 울고
발꿈치로 땅을 구르니 티끌만 풍겨
참을 길 없는 설움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밤중이면 이불 속에서 깨물어 죽이네
(출처=《조선일보》 1928년 11월 11일)
원단잡음(元旦雜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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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의 〈원단잡음(元旦雜吟)〉이 실린 《조선일보》 1929년 1월 2일자. |
눈감고 가슴을 움켜쥐었네 떨리는 손으로—
면도하려고 든 거울에 주름살 잡힌 내 얼굴
터럭 하나 깎기도 전에 그 얼굴에 구름이 서리어
눈 쌓인 뜰 우에 강아지란 놈 가로 뛰고 세로 뛰고
방안에선 나 홀로 어깨 들먹 다리 들먹 흉내 내어 보았네
추녀 끝에 고드름 발등 우에 방울방울
비 맞은 새 새끼처럼 퍼득이려는 내 마음이여!
삼 년 만에 친구의 이름 엽서에 써놓고도
주소 없어 못 부치네 앞서 간 d 군(君)의 얼굴
그대나 부디 행복하소서! 하고 온종일 빌다가
말없이 넘어가는 원단(元旦)의 해만 멀거니 바라보네(己巳元旦)
(출처=《조선일보》 1929년 1월 2일)
저음수행(低吟數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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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의 〈저음수행(低吟數行)〉(《조선일보》 1929년 4월 20일자). |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나서는 물끄러미 바라다보네
십 년이나 다닌 친구의 얼굴을
책상 우에 꺾어다 꽂은 복숭아꽃
잎잎이 시들어 향기 없어 떨어져
네 열매는 어느 곳에 맺으려는고
개천바닥을 뚫고서
파릇파릇 피어오르는 풀 잎새
이 몸이 망아지나 되어지고 송아지나 되어지고
창에 기대어 봄바람 가슴껏 들이마시니
새빨간 피 혈관 속을 쭉쭉 뻗어 달리네
오오 나는 아직도 청춘이로구나
창경원 꽃구경을
휩쓸려 들어갔다가 등을 밀려나온
가등(街燈) 밑에 기-다란 내 그림자여! (1929. 4月 18日의 日記로)
(출처=《조선일보》 1929년 4월 20일)
야구(野球)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든 야구장으로,
소리라도 마음껏 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육월의 태양이 끓어 내리는 ‘그라운드’에
상청수(常靑樹)와 같이 버티고 선 점(點), 점, 점
꿈틀거리는 그네들의 혈관 속엔
덩이 피 쭉 쭉 쭉 뻗어 달린다
‘피처’의 꽂아 넣는 ‘스트라이크’는 ××××
‘배트’로 갈겨 내친 ‘볼’은 수뢰(水雷)의 ××!
Home-run-bat- Home-run-bat!
시퍼런 하늘 바다로 유성같이 난다
고함소리에 무너지는 군중의 성벽
Victory— Victory Victory Victory— Victory—
찔려 죽어도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는
오오 이 땅의 젊은이의 의지를 보라
지고도 웃으며 적의 손을 잡는
이 강산에 자라난 남아의 가슴을 헤쳐보라!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든 야구장으로,
소리라도 마음껏 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1929. 6. 10)
(출처=《조선일보》 1929년 6월 13일)
가을
내 누구에게 주려고 글을 쓰는가
내 누구에게 들려주고자 노래를 부르는가
새침한 가을바람 안 가슴을 파고들고
벌레소리 이마를 쪼며 밤을 새우는데
내 무엇을 기다리길래 눈을 감지 못하는가?
창경원의 호랑이 호통을 친다
쇠창살 하나 물어 떼지는 못하여도
우렁찬 목소리에 나무가 떨며 앞산이 울고
사자란 놈은 눈 딱 감고 뒹구는 마음의 여유나 있으련만
내게는 무엇이 있느냐 오오 무엇이 남았느냐?
붓대를 꺾어 던지고 ×××× (검열로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편집자주) 바꾸어 잡자
거리 거리에 열린 것이 × 끝을 기다리나니
길바닥에 시(詩)를 쓰자 새빨간 글씨로 —
동무여 그리하여 시집의 제명을 붙이자
《피로 쓴 가을의 노래》라고 (1929. 8. 27)
(출처=《조선일보》 1929년 8월 28일)
고독음(孤獨吟)
진종일 앓아 누워서 다녀간 사람 손꼽아보니
창살을 걸어간 햇발과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
두 손길 펴서 가슴에 안고 임종 때를 생각해 보다
그림자하고 단둘이서만 지내는 살림이거늘
천장이 떨리도록 그의 이름은 왜 불렀는고
이웃 사람 들었을세라 혼자서 얼굴 붉혔네
밤 깊어 첩첩이 닫힌 덧문 밖에 그 뉘라서 뒤설레는고
미닫이 열어젖히자 굴러드느니 낙엽 한 송이 머리맡에
어루만져 재우나 모진 잠은 와 주지 않네
값없는 눈물 흘리지 말고 몇 번이나 맹서했던가
울음을 씹어서 웃음으로 삼키기도 한 버릇 되었으련만
뜨거운 눈두덩 주먹으로 부비니 목젖만 껄떡거리네 (1929. 이웃나라 雙十節에)
(출처=《조선일보》 1929년 10월 15일)
동우몽몽(冬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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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29년 12월 17일자에 실린 〈동우몽몽(冬雨濛濛)〉. |
헤어보면 천만줄기나 되엄 즉 허이
단 한 줄기 내 눈물엔 베개만 젖지만
그 많은 눈물 비에 사태가 아니 내리리
남산인들 삼각산인들 허물어지지 않으리
야반(夜半)의 기적소리!
고기에 주린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냐
이 바닥 젊은 사람의 울분을 뿜어내는 호통이냐
저력 있는 그 소리에 주춧돌이 움직이니
구들 돌장 밑에서 지진이나 터져 오르지 않으려는가?
하늘과 땅이 맞붙어서 맷돌질하기를
빌고 바라는 마음 몹시도 간절하건만
단 한 자[尺] 솟지 못하는 가엾은 이 몸이여
달리다 뛰면 현해탄인들 못 건너리만
걸음발 타는 동안에 그 비가 너무나 차구나! (1929. 12. 14)
(출처=《조선일보》 1929년 12월 17일)
봄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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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30년 4월 23일자에 실린 심훈의 〈봄의 마음〉. |
쓰라린 지난날의 마디마디를 깎고 저며서
염통 속에 똑- 똑- 똑- 묵은 피가 고인다
달 밝은 밤 모래밭 위에 방울방울 뿌린 눈물이라면
지향 없이 떼어놓는 발자국이 피부터 나주려니
속속들이 미쳐 날뛰는 마음이라 겉잡을 길 없구나
봄아! 눈보라만 치는 이 땅에 무엇 하러 기어드느냐?
네 모양이나 어느 놈의 품안에 안길지도 모르며 분을 바르고
경대 앞에 저 홀로 해죽거리는 매음녀(賣淫女)의 상판 같구나
저게 무슨 소리냐 거리거리에 요란히 들리는 소리가—
조그만 것들이 골목골목 모여서 피리 부는 소릴세
오오 우리네 아기들이 콧물을 흘리며 자라나는 소릴세!
피리소리 들으니 눈물이 저절로 거두어지네
그 소리 가늘고 곡조는 삑삑- 삑삑- 멋이 없어도
가락가락 생기 있어 메마른 영혼을 어루만지네
네 어버이는 명랑한 햇빛을 등지고 살아도
너희나 무럭무럭 커지거라! 자라나거라!
버들가지에 물오르듯 그 가지가 하늘로 뻗어 오르듯
내 이제 어린 것의 앞날이나 축복하려는 생각이
어느 때부터 마음속에 싹 돋았던고? 자라났던고?
참으려도 참으려도 깨물었던 울음이 또다시 터지는구나! (1930. 4. 20)
(출처=《조선일보》 1930년 4월 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