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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집

신문으로 보는 1945년 해방 前後의 한국

70년 전 8월 15일, 만세 환호는 없었다!

글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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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敗戰 직전 신문들 보면 거짓 勝戰譜 속 극장 광고 눈길
⊙ 日帝. 천황의 항복 방송에 대해 ‘보도지침’… 《경성일보》 《매일신문》 敗戰 얼버무려
⊙ 건국준비위원회, 《매일신보》 접수해 《해방일보》 발행 시도
⊙ 안재홍의 방송 보도한 《매일신보》 8월 17일자부터 해방의 감격 엿보여
⊙ 널리 알려진 서대문 형무소 思想犯 석방 사진, 8·15 직후 사진인지는 의심스러워

鄭晉錫
⊙ 76세. 중앙대 영문학과 졸업. 영국 런던대 정경대학(LSE) 언론학 박사.
⊙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委 위원, 방송委 위원, LG상남언론재단 이사,
    한국외국어대 언론학 교수, 同사회과학대학장, 정책과학대학원장 역임.
⊙ 저서 :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인물한국언론사》 《언론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과 한국현대사》 《6·25전쟁 납북》 《언론조선총독부》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등.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진은 사실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1945년 8월 15일의 서울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말을 하지 않고도 작은 물결이 일듯이 전달되는 동안에 큰 파도가 되어 삼천리 강토를 쓰나미처럼 뒤덮었다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날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표현일 뿐이다. 시가지의 진짜 풍경은 조용했다. 서대문 형무소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독립운동가들이 쏟아져 나와 두 팔을 높이 들고 조국의 해방을 기뻐하는 모습이 연출되지는 않았다. 그런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면 단지 극적인 효과를 노린 역사의 왜곡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당시를 회고하는 ‘증언’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의 ‘기억’은 사실을 미화(美化)하거나 자기중심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는 믿음, 그러지 않을 수 없다는 당위성(當爲性) 같은 것이 역사적 사실로 굳어지게 되는 경우이다.
 
  사람의 기억은 객관적이거나 정확하지 않다. 신빙성 있는 자료는 사건이 일어난 시점의 신문, 잡지, 수사기록, 법원 판결문 같은 것이다. 그 자료들도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정도까지는 믿을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의 공적(功績)을 심사할 때에 본인의 주장이나 주변의 증언보다 가장 신뢰하는 자료는 바로 위에서 열거한 객관성 있는 증거물이다.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 기록하고 공개 검증을 거친 자료를 찾아야 한다. 그런 증거물이라 해도 조심해서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1945년 8월 15일’의 사진일까?
 
  8월 15일 일제(日帝) 패망(敗亡)의 소식이 전해진 직후의 감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으로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공인’한 사진이 있다. 국편은 《자료 대한민국사》 제1권(1970년 발행) 맨 앞에 ‘출옥한 항일투사들을 앞세우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는 광경’이라는 설명과 함께 문제의 사진을 실었다. 이 사진은 신문, 잡지나 방송이 광복의 그날을 묘사할 때에 언제나 등장하는 사진이다.
 
  문화방송-《경향신문》 발행 《눈으로 보는 광복 30년 시련과 영광의 민족사》(1975)에는 “출옥하는 독립투사들과 함께 서울 서대문 형무소 앞의 환호군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동아일보》의 《사진으로 보는 한국 100년: 1876~1978》(1978)에는 “옥문이 열리던 날 8·15 조국 해방은 옥중 독립투사들에게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와 해방만세를 외치는 출옥 애국인사들과 이들을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로 되어 있다.
 
  이 사진에 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진이 적어도 1945년 8월 15일의 장면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의 여러 정황을 살펴본 나의 결론이다. 사진이 찍힌 장소는 지금은 형태가 많이 달라진 서대문 로터리 전차 종점이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문제는 촬영 시점이다. 8월 15일 이후 언젠가 어떤 신문 또는 잡지가 이 사진에 1945년 8·15라는 설명을 갖다 붙였고, 그 후로는 별다른 검증 없이 8월 15일의 출옥 장면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1945년 8월 15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고, 시간이 더 흐른 뒤 또는 그다음 해 여름 어느 날이거나 그보다 더 지난 시기일 가능성도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가 찾아왔을 때에 나는 이 사진에 관한 의문점을 제기하면서 설명을 붙일 때에 주의하도록 조언했다. 그래서 《아사히》는 이 사진에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기뻐하는 조선인들=1945년”이라는 다소 애매하고 유보적인 설명을 붙였다(《신문과 전쟁》, 2008. 6, 65쪽). 8월 15일에 찍은 사진은 아닐 것이라는 나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반영한 것이다. 《신문과 전쟁》은 《아사히신문》이 2007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주 5회 연재했던 내용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책이다.
 
 
  日語로 편집된 天皇의 ‘詔書’
 
1945년 8월 15일자 《매일신문》. ‘패전’이나 ‘항복’이라는 표현은 없이 ‘평화재건’ 운운하는 제목을 달았다.
  역사적인 8월 15일의 평균 기온은 27.2도, 오전 9시 하늘에는 80%의 구름이 끼었으나 일본 천황(天皇)의 항복 방송이 있고 난 뒤 오후 3시 무렵은 쾌청이었다. 이는 2005년 8월 7일자 《조선일보》에 8·15 관련 칼럼을 쓰면서 기상청에 그날의 날씨가 어땠는지 문의해 본 결과다. 우리말 신문으로는 단 하나밖에 없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이 날짜 지면을 보면 일제의 항복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다만 15일자를 대판(大版)으로 발행한 것이 전날과 다른 점이었다. 한 달 반 전 7월 1일부터는 지면을 타블로이드 2페이지로 축소 발행하고 있었는데 이날은 이전과 같은 통상적인 크기로 넓힌 것이다. 1면 머리에는 ‘평화재건(平和再建)에 대조환발(大詔渙發)’이라는 통단 제목을 달고 천황의 ‘조서(詔書)’를 3단 박스로 편집했다. ‘조서’는 번역하지 않은 채 본문보다 큰 글자로 뽑아 일본어로 게재하였다.
 
  일어(日語)신문 《경성일보》도 동일한 편집이었다. 타블로이드에서 대판으로 지면을 키우고 천황의 조서를 머리에 실었다. 그러나 두 신문 어디에도 ‘항복’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조서 아래에는 ‘미·영·지·소(米英支蘇-‘米’는 미국, ‘支’는 지나[支那] 즉 중국을 말함-편집자 주) 사국(四國)에 대하야 공동선언 수락통고’라는 제목으로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만세(萬世)를 위하사 태평(太平)을 열랴고 하옵시는 성려(聖慮)로 14일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통고하도록 하였다고 보도했다(당시 신문기사의 제목이나 내용을 인용할 때에는 당시 표기법에 따르되, 한자는 필자가 괄호 안에 넣는 것으로 바꾸었음. 이하 같음-편집자 주). 천황의 항복 방송에 대해서는 “특히 전혀 어이례(御異例)에 속하는 것이지만은 15일 정오 황공하옵게도 대어심(大御心)으로부터 대조(大詔)를 어방송(御放送)하옵시엇다”라고 말했다. 천황이 방송을 통해서 직접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것이 황공하다는 뜻이다.
 
 
  1942년 국내 라디오 대수는 27만7283대
 
  이어서 총독 아베(阿部信行)의 ‘유고(諭告)’를 게재하여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음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매일신문》은 또한 “잔인 흉포한 신병기 원자탄”의 강력한 파괴력은 지금까지의 전쟁 형식을 근본적으로 변혁하였다면서 와신상담 국난극복을 호소했다. ‘와신상담’이라는 단어는 내각정보국(일제시대에 정부의 공보·언론 업무를 담당하던 부서-편집자 주)의 ‘대동아전쟁 종결(終結)교섭에 따르는 여론지도방침’이 특별히 그 사용에 주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정보국은 ‘여론지도방침’을 시달하면서 와신상담의 의미를 “장래 우리나라의 판도를 확대하려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세계평화 건설을 위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라는 ‘주의’를 덧붙였다.
 
  《매일신보》-《경성일보》의 편집은 조선인들에게 해방의 감격을 전달하는 보도가 아니라 전쟁에 패한 일본의 입장을 완곡하게 변명한 보도였다. ‘신형폭탄’으로 표현되던 단어가 ‘원자탄’으로 바뀌어 이 날짜에 처음 등장했다는 점이 후일 이 신문을 면밀히 관찰하면 찾아볼 수 있는 차이점이지만, 원자탄의 파괴력과 피폭자(被爆者)의 후유증 같은 것은 아직 알 도리가 없는 정보였다. 일본 내각정보국의 여론지도방침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제작한 신문이다. 조선 민족이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었다는 엄청난 역사적인 변혁이 일어난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12시 방송을 들은 군중이 거리로 뛰어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의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연출될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이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기쁨을 표출할 정도로 명확한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의 라디오 수신기 보급 현황은 통계가 남아 있는 1942년의 경우 조선인 14만9652대, 일본인 12만6049대, 외국인 1582대를 합하여 27만7283대였다. 인구 1만명당 110.10대 비율이었다.
 
  8월 15일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상황을 돌이켜본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단 하나의 한국어 일간지 《매일신보》에는 연일 승전보(勝戰譜)가 실렸다. 일본군은 적의 함대를 괴멸(壞滅)하고 비행기를 격추하면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기사를 열심히 내보내고 있었다. 신문은 태평양전쟁 이후 심각한 용지난을 타개하기 위해 날이 갈수록 지면을 줄여서 발행하는 상황이었다.
 
 
 
勝戰譜로 가득했던 敗戰의 기록

 
  1944년 3월 10일부터는 조선신문춘추회의 결의로 석간(夕刊) 발행을 중단했고, 6개월 후인 9월에는 주(週) 18면제를 실시했다. 수요일과 토요일만 4면, 다른 날은 2면 발행이었다. 1944년 11월부터는 매일 2면 발행, 주당 14면으로 다시 축소되었다. 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 7월에는 타블로이드 발행으로 손바닥 크기의 신문 2면으로 쪼그라들었다.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내각정보국의 언론통제와 대본영(大本營) 발표에 따른 지면 조작이 물샐틈없이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일제가 패망(敗亡)할 것이라는 징후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경성일보》는 6월 30일자 1면 머리에 오키나와 방면 최고 지휘관 우지시마 미쓰루(牛島滿) 중장과 그의 참모장 조 이사무(長勇) 소장이 ‘최후의 공세 결행 후 장렬하게 자결’했다고 보도했다. 《매일신문》은 다음날 1면 머리에 ‘우도(牛島) 최고사령관/ 장렬, 할복자결/ 장 참모장도 지휘관 따라’라고 보도하면서 ‘일본 무사도의 정화(精華)’라고 찬양했다.
 
  지금 와서 결과론으로 당시의 지면(紙面)을 보면 이 기사는 일본이 오키나와 방어에 실패했으며 이제 패망의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정보가 통제된 당시 상황에서는 냉정하게 사태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역사학자 차기벽(車基璧)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해방 후에는 우리 민족이 독립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떠드는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나는 일제 말 당시에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한국 민족주의의 이념과 실태》, 까치, 1978. 같은 책이 2005년에 한길사에서도 발행되었다.)
 
 
  안쓰러운 ‘木製비행기 개발’ 보도
 
  7월 4일에는 조선언론보국회와 《경성일보》·《매일신보》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본토 결전 부민대회(서울시민대회)’가 덕수궁에서 열렸다. 타블로이드 2페이지의 좁은 지면은 군은 물론이고 민간인들도 전쟁 수행에 총동원되어 싸우고 있는 모습으로 가득 채워졌다. 특히 남방 보르네오에서는 적의 군함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린다는 소식이 실리고 있었다.
 
  적기(敵機)의 공습에 대비하는 필승의 대책으로 흰옷을 벗자는 ‘대(對)국민운동’도 전개되었다. 흰옷은 적 비행기의 표적이 되기 쉬우므로, 색깔 있는 옷으로 바꿔 입자는 것이다. 흰옷 입은 사람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풍설(風說)이 돌았지만, 오히려 공습의 표적이 된다는 주장이다. 서울, 인천, 평양, 부산 등 대도시 어린이들 일부는 부모 품을 떠나 공습의 안전지대로 가서 ‘집단소개(集團疏開)’ 생활에 들어가기도 했다. 서울 죽첨국민학교 어린이 48명은 7월 28일부터 북한산 기슭의 진관사(津寬寺)에서 피란 중이었다.
 
  신문광고 가운데 8월 15일 이전까지 끊어지지 않았던 업종은 병원과 극장이었다. 1단 또는 2단 크기로 외과, 내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등의 병원 광고가 실렸다. 극장 광고도 위축되는 추세였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죽음과 생활고에 위로받을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장소가 극장이었던 것일까. 8월 9일부터 ‘조선악극단’의 〈금(金)의 나라, 은(銀)의 나라〉(동양극장), 13일부터 극단 ‘현대극장’의 〈산비둘기〉(박재성 작, 유치진 연출, 약초국민극장), 14일부터는 명치좌(明治座·명동의 옛 국립극장)에서 ‘만타악극단(萬朶樂劇團)’의 창립공연 가극 〈목장의 노래〉가 예정되어 있었다.
 
  ‘순 일본적 병기의 개발로 본토 결전의 승산이 절대적’이라는 기술원 총재의 담화도 보인다(7월 23일). 8월 5일자 2면 머리에는 ‘나온다 목제(木製) 비행기/ 영・소를 능가할 우수 국산품에 개가(凱歌)’라는 기사가 실렸다. 나무로 만든 비행기를 가지고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애처로운 안간힘이었다.
 
 
 
‘원자탄’ 대신 ‘신형폭탄’이란 용어 사용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8월 6일 인류 최초의 원자탄을 히로시마(廣島)에 투하했다. 일본의 패망은 이제 시간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8일자 《매일신문》과 《경성일보》는 이 엄청난 사실을 아주 짧게 보도했다. ‘적(敵) 신형 폭탄 사용/ 광도시(廣島市)에 상당한 피해’라는 2단짜리 제목으로 1면 아랫부분에 대수롭지 않은 듯이 다루었다. 원폭 투하에 관한 기사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동경전화] 대본영(大本營) 발표 (소화 20년 8월 7일 15시30분) ① 작 8월 6일 광도시(廣島市)는 적 B29 소수기(少數機)의 공격에 의하야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엿다. ② 적은 우(右) 공격에 신형폭탄을 사용한 것 같은데 상세(詳細)는 방금 조사 중이다.〉
 
  언론통제의 총본산 내각정보국은 ‘원자폭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국민의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다. 정보국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원자탄 공격에 대해서 적극적인 선전보도의 대책을 수립했었다.
 
  첫째, 대외적으로는 이 같은 비인도적 무기의 사용에 관해서 철저한 선전을 개시하여 세계의 여론에 호소한다. 둘째, 대내적으로는 원자탄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여 전쟁수행에 관해서 국민의 새로운 각오를 요청한다. 이를 위해서는 즉각적인 사실보도와 진상조사를 병행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외무성도 이 같은 방침에 찬성했지만, 군부(軍部)는 반대였다. 그래서 항복 선언이 있기까지 원자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신형폭탄’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였다(山中 恒, 《新聞は戰爭お美化せよ! 戰時 國家情報機構史》, 小學館, 2001, pp.789~790). 정보국과 군부의 철저한 통제하에 제작된 신문이었으므로 불가항력이기는 했지만, 일본의 패망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기사로서 국민을 기만한 지면이었던 것이다. 《경성일보》는 8월 12일자 1면 톱으로 ‘미국의 신형폭탄에 제국정부 항의’라는 기사를 싣고, “이는 인류에 대한 새로운 죄악이며 잔혹성이 독가스를 능가한다”고 크게 다루었다.
 
  《매일신보》 8월 8일자는 머리기사로 ‘장절(壯絶) 함대육탄(艦隊肉彈)/불멸(不滅)할 해상특공대 수훈/제국 해군 혼의 정화’라는 제목의 최후 발악적인 기사를 크게 실었다. 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단신으로 몰고 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적함을 격침시키는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와 마찬가지로 폭탄을 실은 배를 몰고 가서 적함을 격침시키겠다는 결의였다. 괴멸상태에 이른 해군이 승리를 거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든 지면이었다.
 
 
  히로시마 原爆에 ‘戰死’한 조선왕족
 
고종의 손자 이우 公이 히로시마에서 原爆에 맞아 사망한 사실을 보도한 1945년 8월 9일자 《매일신문》.
  이런 가운데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에 맞아 조선의 왕족 이우(李鍝) 공이 사망했다. 이우의 전사 기사는 8월 9일자에 실렸다. 군복 정장 차림의 반신(半身) 사진을 1면 머리에 싣고 그의 죽음을 큰 비중으로 보도했다. ‘이우공 전하, 7일 히로시마서 어(御)전사’라는 톱 기사에 “이우공 전하께서는 재작 6일 히로시마에서 작전임무 어(御)수행 중 공폭에 의하야 어(御)부상하시어 작 7일 어(御)전사하시었다”는 설명을 달았다.
 
  이우는 의왕(義王) 이강(李堈)의 차남으로 고종(高宗)의 손자이다. 1912년 11월 15일에 태어나 일본 귀족학교인 가쿠슈인(學習院)에서 공부했고 일본육사(陸士)를 졸업하여 중좌(中佐·중령)까지 승진했던 33세 청년이었다. 히로시마 주둔 서부군관구 사령부에 고급 참모로 근무하면서 말을 타고 출근하던 중에 원자탄에 희생된 것이다.
 
  일본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는 이우가 “대륙(중국)에서 위훈을 세운 후 6월 10일 히로시마에 부임하여 군 참모로 근무하던 중 전사했다”고 애도했다.
 
  10일자 1면 머리도 이우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로 채워졌다. 유해는 8일 오전 11시40분 서울로 공수(空輸)되어 운현궁에 안치되었다. 13일자로 육군 대좌로 추서(追敍)되었으며 공(功) 3급 금계(金鷄)훈장과 천황의 목배(木杯) 1조가 하사되었다. 금계훈장은 육군과 해군에 수여되는 훈장으로 1급에서 7급까지 나누어지고 종신연금(終身年金)이 지급되는 훈장이다. 장례식은 15일 오후 1시에 서울운동장에서 조선군관구 참모장 이하라(井原潤次郞) 중장을 장의위원장으로 육군장(陸軍葬)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宮塚利雄, ‘그저 멍하기만 했다’, 《월간조선》, 1995. 8)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연기되어 이날 오후 5시에 거행되었다.
 
  이우의 아버지 이강 역시 일본 육군 중장 군복을 입고 일본 다카마쓰육군대연습지를 방문한다는 기사와 군복 입은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린 일도 있었다(《동아일보》, 1922. 11. 12).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왕(英王) 이은(李垠)은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육군 중장이었다.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에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는데 ‘이우 공 전하 외 2만여 영위(靈位)’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2만여 명의 한국인이 원폭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8일 0시 마침내 일본을 상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만주 소련 국경과 북조선 국경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경성일보》는 ‘소련군 돌연 월경(越境)/ 불법공격을 개시’라는 기사를 톱으로 보도했다. 대본영 8월 9일 오후 5시 발표 내용이었다. 일본 육군대신은 전 장병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단호히 신주(神洲)를 호지(護持)하라. 풀을 먹고 흙을 깨물면서라도 싸워서 최악의 사태를 타개하자.’
 
  8월 12일자 《매일신문》은 이 같은 비장한 결의를 담은 지면에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번째 원자탄 기사를 1면 맨 아랫부분에 2단으로 간단하게 배치했다. 적기 2대가 나가사키에 신형폭탄 같은 것을 떨어뜨렸는데 피해는 근소하다는 것이다.
 
 
  신문이 유포한 狂的 확신이 사회 지배
 
히로히토 천황의 ‘종전조서’. 한학자들의 교열과 각료들의 논의를 거쳐 작성했다.
  일본은 이처럼 패망 직전까지 국내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전세(戰勢)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하다는 전황(戰況)을 알리지 않았다. 모든 정보가 왜곡되어 있었다.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광적(狂的)인 확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매일신문》과 《경성일보》가 보도하는 정보는 왜곡되어 있었다. 대본영의 발표를 그대로 실을 수밖에 없었고 정보국의 ‘지도’에 따라 용어 하나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두 신문 또는 일본에서 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매일신문》과 《경성일보》는 일본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광적인 확신이 사회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광복 전야의 신문은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반영하지 않았다. 일치단결 목숨을 아끼지 말고 추악한 적을 격멸하자는 결의가 지면을 채웠고, 조선인들의 생활과 관련해선 쌀 배급, 등화관제, 징용, 보리와 밀, 감자의 공출(供出), 국민의용대, 육탄공격, 무훈(武勳) 같은 제목이 식민지 백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단어였다.
 
  8월 14일, 마침내 일본은 어전회의를 열고 항복을 결정했다. 항복 방송 ‘조칙’은 8월 9일에 처음 초고(草稿)가 작성되었고, 14일에 한학자의 교열과 각료들의 논의를 거쳐 완성되었다(小森陽一, 송태욱 옮김,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뿌리와 이파리, 2004).
 
 
  ‘항복’ 대신 ‘전쟁종결’
 
  천황의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은 8월 15일 12시에 일본 전역과 조선에 방송되었다. 평상시라면 항복 사실을 신문에 내려면 이튿날 조간(朝刊)이나 가능했다. 그런데 같은 날짜 신문이 이를 보도했다. 일본의 패망을 미리 알고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은 ‘예정고(豫定稿)’라는 것을 준비해 두는 경우가 있다. 큰 사건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원고를 미리 만들어두거나 조판(組版)까지 해두었다가 즉각적으로 발행하는 것이다. 국가원수나 유명인사가 위독한 때에는 죽음을 대비하여 예정 기사를 써놓는 것이고, 전쟁이 일어나거나 끝나는 상황도 미리 기사를 준비해 둘 수 있다. 그러나 군부가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외치던 시기에 패망을 예측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일본 교토대학의 사토 다쿠미(佐藤卓己) 교수의 《8월 15일의 신화》(2005년 7월)는 8월 15일의 항복 방송에 관해서 상세히 고찰한 책이다. 천황은 14일 심야 11시25분부터 50분 사이에 일본 궁내성(宮內省) 청사 2층에 있는 정무실(政務室)에서 녹음을 마쳤다. 원반형 독일제 텔레풍켄 녹음기는 78회전으로 10인치 음반에 약 3분 분량만 녹음되기 때문에 2장에 4분37초, 815자의 조서를 육성으로 담았다. 우연인지 글자 수도 8월 15일과 일치했던 것이다.
 
 
  내각정보국, 마지막까지 언론통제
 
1945년 8월 14일 히로히토 천황은 정부와 군부의 요인들을 모아놓고 ‘종전’에 대한 그의 의지를 전달했다.
시라카와 이치로 그림.
  같은 시각 수상 관저에서는 내각서기장관 사코미즈(迫水常久)가 기자단에 조서를 전달하면서 이튿날 정오 방송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보도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지시했다. 따라서 이튿날 신문은 오후에 배포되었다. 이보다 약간 앞선 시각, 내각이 항복을 결정한 직후인 14일 오후 5시, 언론통제의 본산이었던 내각정보국은 ‘대동아전쟁 종결(終結)교섭에 따르는 여론지도방침’을 각 신문에 시달했다.
 
  ‘전쟁종결’의 내용에 관해서 전 국민의 결속과 분기(奮起)를 요망하는 방향으로 지면을 제작하라는 것이었다. ‘항복’이라는 단어 대신 ‘전쟁종결’이 사용되었으며, 전 국민의 결속을 유지하고 국체(國體)를 호지하여 미증유의 곤란에 처할 것을 강조하라는 요지였다. 엄중히 금지할 특기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①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인 언론 ② 정부가 결정한 방침에 반대하여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말 또는 국내 결속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논의 ③ 군과 정부의 지도층(전쟁지도 책임자)에 대한 비판은 일절 불가 ④ 직접행동을 시사하거나 자폭적 언론은 엄격한 단속(取締)의 대상이다(高桑幸吉, 《マッカーサーの新聞檢閱, 揭載禁止・削除になった新聞記事口》 讀賣新聞社, 1984, pp.34~36).
 
 
  암호문처럼 난해한 ‘詔勅’
 
‘항복’의 실상을 흐리기는 1945년 8월 15일자 《경성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신문도 마찬가지 여건에서 발행되었다. 8월 15일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을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으나 일반인들의 시국인식은 무지했다. 일본의 패망을 믿지 않을 정도로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는 14일 밤부터 15일 아침에 걸쳐서 일본 동맹통신 본사를 통해 ‘조서(詔書)’가 전달되었다.
 
  총독부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 사장 요코미소 미쓰테루(橫溝光暉)는 내각정보국의 초대 부장을 지낸 엘리트였다. 언론통제의 총본산에서 활동했던 경력의 관록과 정보에 밝은 인물이었다. 그는 새벽에 동맹통신 서울지사에 가서 ‘조서’를 보았다. 이리하여 8월 15일자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똑같이 1면 머리에 본문보다 큰 4호 활자로 조서를 실었다. 조선인들에게 해방의 감격이 아니라 정보국의 여론지도방침에 따라 전쟁에 패한 일본의 입장을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전달한 것이다.
 
  《매일신보》는 1면 머리에 주먹만 한 0호 활자로 ‘평화재건에 대조환발’이라는 제목을 가로질렀고 그 아래 3단 4호 일어 활자로 ‘조칙’을 짠 통단 편집이었다. 제목은 한눈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암호 같았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臣民)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로 시작되는 ‘종전조서’는 지금 읽어보면 거의 암호문이라고 할 만한 정도다.
 
  미·영·중·소 네 나라의 공동선언을 수락했다는 것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의미했지만 일반인들이 방송이나 신문을 보고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홋카이도(北海道)·규슈(九州)·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제8항)로 되어 있었다.
 
  카이로 선언(1943년 11월 27일)은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고 명시하여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보장받은 선언이었다. 카이로 선언은 이상의 목적으로 3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을 천명하였는데, 1945년 포츠담 선언에서 이 조항이 재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애매한 815자 문장의 ‘조칙’을 방송으로 듣거나 그날 신문의 일본어 문장을 읽고 당장 조선이 독립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는 없었다.
 
  천황의 항복 방송과 관련해서 《매일신보》는 “천황폐하께옵서는 만세를 위하사 태평을 열랴고 하옵시는 성려로 14일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다”고 보도했다.
 
 
  아베 총독, “輕擧를 嚴戒하야…”
 
  〈와신상담 국난극복 [동경전화]잔인 흉폭한 신병기 원자탄은 드디어 아등(我等)의 전쟁노력의 일체(一切)를 오유(烏有)에 귀(歸)케 하엿다. 강열한 파괴력은 지금까지의 전쟁형식을 근본적으로 변혁하야 1억 봉공(奉公)의 감투정신에 응결한 우리 전선(前線)장병이나 총후(銃後)국민이나 모다 이 고성능 병기에 대하야는 싸우는 노력을 명료히 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엇다. 전국도시는 초토화 하야 무고(無辜)의 노유(老幼) 부녀자에 대한 잔학한 대량살육이 가해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황공하옵게도 세계평화의 급속한 극복과 1억 민초의 안위에 기프옵신 대어심을 나리옵시는 성하폐하께옵서는 이 원자탄의 참해가 더욱더 민초 우에 가중될 것을 깊이 어진념(御軫念)하옵시어 정부로 하여금 전쟁종결의 방도를 강구케 하옵신 것이다.(원문의 한자는 괄호 안에 넣었음-필자 주)〉
 
  ‘조서’ 아래에는 총독 아베의 ‘유고’가 실렸다. “경거(輕擧)를 엄계(嚴戒)하야 냉정침착 하라”는 제목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나라가 광복을 찾았다는 감격을 담은 편집은 아니었다. 이 날짜 《매일신보》는 1면에만 기사를 싣고 2면은 백지(白紙)로 발행했다.
 
  《경성일보》는 일본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폐간(廢刊)되지 않았다. 약 3개월이 지난 후인 12월 11일까지는 일어판 발행이 계속되었다. 8·15 직후에는 오히려 조선인 사원들을 축출하고 사장을 비롯하여 일본인 중심으로 발행되었다. 사장 요코미소는 자신이 겪었던 《경성일보》 최후의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한 회고록을 남겼다(橫溝光暉, 〈京城日報の終刊〉, 《昭和史片鱗》, 經濟來往社, 1974, pp.328~341).
 
  회고에 따르면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있었던 8월 15일은 서울 시내가 비교적 조용했고 경성일보사 내부도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하룻밤을 지내자, 이때부터 서울 시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소련군이 입성한다는 포스터가 사방에 보였다. 총독부의 가장 충성스러운 대변자였고, ‘일선융화(日鮮融和)’에 앞장섰던 《경성일보》에는 오히려 가장 과격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튿날인 8월 16일자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조선인 사원들, 사원대회 열어
 
  ‘일억 민초의 위에, 큰 자애의 큰 천황의 마음(一億民草の上に, 大慈愛の大御心), 전 각료 어전에서 통곡(各閣僚御前で慟哭)’
 
  ‘스즈키 내각 총사직(鈴木內閣總辭職), 어제 궐하에 사표봉정(昨日闕下に辭表捧呈)’
 
  ‘지불제한 등 절대 안 된다(支拂制限等絶對行はず), 통화금융정책에 만전(通貨金融方策に萬全)’
 
  ‘국민인고의 결실이야말로 황국의 운명개척(國民忍苦の結實こそ皇國の運命開拓), 국민 금후의 새 각오를 요청(國民今後の新覺悟を要請)’
 
  ‘미국 회답 접수(米回答接收)’
 
  ‘소련도 회답을 수리(ソ聯も回答を受理)’
 
  ‘포츠담 선언 내용(ポツダム宣言內容)’
 
  ‘공동선언, 교환공문 정문(共同宣言, 交換公文正文)’
 
  ‘일본군의 전투정지에 관한 통고(日本軍の戰鬪停止に關する通告)’

 
  조선인 사원들은 8월 16일 사원대회를 열고 위원을 선출한 다음 《경성일보》의 접수를 기도했다. 좌익 사원들이 부사장 나카호에게 “우리들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경성일보를 관리하기로 되었으니 사무를 인계하라”고 요구했다. 나카호는 이를 거절하고 사장과 의논해서 이튿날 아침에 대답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바로 이웃에 사옥이 있었던 《매일신보》도 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파견된 이여성(李如星), 김광수(金光洙), 양재하(梁在厦) 등이 《해방일보》의 발행을 시도하고 있던 때였다.
 
 
  獄門은 어떻게 열렸나
 
  8월 15일에 옥문이 열리고 사진에서 보듯이 출옥한 항일투사들을 앞세우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는 감격의 장면이 과연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연출되었나? 우선 그때 출옥한 독립운동가는 누구였나? 과문(寡聞)한 탓인지, 8·15 당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누가 석방되었는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일본 쪽 자료에는 서대문 형무소장 사가라 하루오(相良春雄), 작업과장(靑柳義雄) 외에 직원 3명이 구속되어 재판 끝에 1946년 3월 25일에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보호관찰소장 기우삼(崎祐三)은 일본 패망 후에 보호관찰소의 기록을 불태웠고, 기밀비 9만 엔을 대화숙(大和塾) 회원 5명에게 송금해 약 50명의 치안대를 조직해서 교통정리, 여론 지도, 구류 일본인 석방 등의 활동을 하도록 했다는 책임으로 1946년 3월 20일에 징역 1년 6개월의 판결을 받았다(森田芳夫, 《조선종전의 기록》, 巖南堂, 1964, 838쪽).
 
  조선에서 고위급 교정관리를 지낸 모리 도쿠지로(森德次郞, 1941년 경성 형무소 전옥[典獄])가 일본의 《월간행정》에 쓴 ‘조선총독부 형무소 종언기(終焉の記)’에는 당시 서대문과 대전 형무소의 재소(在所) 인원이 기록되어 있다. 남자 장기수 가운데 사상범(思想犯)은 대전 형무소, 무기수(無期囚)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8・15 당일 조선 전체 수감인원은 2039명이었는데, 서대문 형무소에는 1543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농장에 배치되어 있는 죄수가 496명이었고 취업하지 않은 인원이 192명(미지정자 100명, 환자 70명, 기타 22명)이었다. 대전 형무소에는 2472명이 있었는데 미결수 72명, 기결수 2400명이었다. 사상범은 240명이었고, 해남보국대 보충인원으로 300명을 선발하여 대기 중이었다.(모리 도쿠지로의 《조선총독부 형무소 종언기(終焉の記)》는 《월간조선》 오동룡 기자가 입수하여 2010년 8월 《주간조선》 2120호에 게재했다.)
 
 
  思想犯 석방
 
  모리 도쿠지로가 ‘사상범’으로 표현한 수형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등 이른바 ‘과격사상’을 지닌 인물을 지칭한다. 1933년 무렵부터 총독부는 사상범을 서대문 형무소가 아닌 대전 형무소에 이감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가들을 일반 범죄자들과 섞어서 수용하면 독립사상이 전파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구연흠(具然欽), 최익한(崔益翰)과 같은 유수한 독립운동가 32명을 대전 형무소에 이감하였는데 1933년 3월경에 대전 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은 500여 명이었다(《동아일보》, 1933년 3월 28일, ‘사상수(思想囚)와 보통수(普通囚)의 분리집형(執刑)을 결정? 안 도산(安島山) 이하 사상수 속속 이감/ 사상수 감옥은 대전 형무소로’). 이 가운데 최익한은 1936년 1월 8일 아침에 대전 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했다(《동아일보》, 1936. 1. 10).
 
  이처럼 독립운동가와 사상범들은 대부분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8・15 당일에 서대문의 옥문이 열리자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매일신보》 8월 16일자에는 사상범 석방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사상관계자 등 석방. 전 조선의 각 형무소와 경찰서 안에 있는 사상범을 필두로 하는 경제위반, 노무관계 위반자를 전부 석방하기로 되어 15일 관계방면에 시달되었다. 이에 따라 전기 세 가지 종류의 관계자들은 즉일부터 즉시 출옥하게 되었는데 강·절도 등 일반 형법범(刑法犯)은 원칙적으로 출옥하지 않는다.〉
 
 
  《매일신보》, 여운형 동정 상세 보도
 
여운형(원 안)은 1945년 8월 16일 서울 휘문중학교 교정에 나타나 해방 후 첫 정치집회를 열었다.
  《매일신보》 지면에 해방의 감격이 나타나기 시작한 날은 8월 17일자부터였다. 이날자 1면 머리에는 ‘호애(互愛)의 정신으로 결합, 우리 광명의 날 맛자, 3천만에 건국준비위원회 제1성’이라는 제목으로 안재홍(安在鴻)의 방송을 소개했다. 안재홍은 경성중앙방송을 통해 16일 오후 3시10분부터 약 20분 동안 해방의 기쁨을 전하면서 국민들의 자중을 당부하는 연설을 한 것이다. 기사는 “새날은 왓다. 삼천리 근역(槿域)에 광명과 희망이 가득하고 3천만 동포의 가슴이 환희와 감격이 넘쳐흐르는 가운데 역사적 일보(一步)는 당당히 진발(進發)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라는 리드로 해방의 감격을 전해주었다. 이전의 편집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신문기자도 태극기를 정확하게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소설가이면서 《매일신보》 기자였던 이봉구(李鳳九)는 광복 직후에 신문에 태극기를 게재하기 위해 유자후(柳子厚)에게 물어보았으나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를 만나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한참 고서를 뒤적였으나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회고했다(《신천지》, 1948년 8월호, ‘신문기자가 겪은 8・15’).
 
  《매일신보》는 한동안 국내 정치세력의 집결체 형국을 띠었던 건국준비위원회의 기관지와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遠藤隆作)와 만났던 사실을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청중에게 밝혔다. 《매일신보》는 여운형의 연설 기사를 박스로 처리하여 비중 있게 다루었다. 여운형은 투옥된 정치 경제범의 즉시 석방을 비롯하여 5개 항을 엔도에게 요구했으며, 엔도는 여운형에게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민중에 합당하엿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업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야 마음조케 헤여지자. 오해로 서로 피를 흘린다든지 불쌍사가 이러나지 안토록 민중을 잘 지도하야 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고난의 밤은 가고…’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배경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우선적으로 신문을 장악하는 일에 착수했다. 건준은 8월 16일 매일신보사의 접수를 기도하다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동포의 ‘자중과 안정(安靜)’을 요망하는 전단을 제작 살포하여 국민 앞에 그 이름을 드러내었다.
 
  〈조선동포여! 중대한 현 단계에 잇어 절대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 우리들의 장래에 광명이 잇스니 경거망동은 절대의 금물이다. 제위(諸位)의 일어일동(一語一動)이 민족의 휴척(休戚)에 지대한 영향이 잇는 것을 맹성하라! 절대의 자중으로 지도층의 포고에 따르기를 유의하라.〉
 
  《매일신보》는 2면 좌측에 이 전단을 사진판으로 게재하고 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감격을 드러내는 글을 실었다.
 
  〈오! 고난의 밤은 가고 엄숙한 민족의 아침을 밝엇다. 우리들의 하늘, 우리들의 바람, 우리들의 신성한 국토—오! 우리 사랑하는 3천만 형제자매들아!〉
 
  8·15 당시에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인물이 누구였는지 정확한 명단을 찾을 수는 없다. 형무소 입장에서는 강·절도 등의 잡범(雜犯)을 제외하고 사상범을 선별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분류하지 않고 강도 또는 절도와 같은 잡범으로 취급한 경우도 흔히 있었다. 그러므로 석방될 인물을 선별하는 과정에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에는 살인, 사기, 절도 등의 잡범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옥문을 열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에 패했다 하더라도 미군이 진주한 9월 9일 이전에는 엄연히 무력(武力)을 지니고 있던 일본군과 경찰이 치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형무소의 일본 간수들은 오래전부터 독립운동가들이 석방된 후에 일어날 수 있는 소요사태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관행이 있었다. 3·1운동으로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 가운데 17명이 1921년 11월 5일에 만기 출옥되었는데 형무소 측은 한꺼번에 모두 석방하지 않고 네 사람씩 나누어 내보냈다.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과 일반인들이 소요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동아일보》, 1921년 11월 5일, ‘독립선언 관계자 17인의 만기출옥’).
 
  3·1운동 무렵과 8·15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했다고 해서 옥문을 활짝 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국내에 있던 정치범 가운데 가장 긴 옥중생활을 했던 독립운동가로는 정이형(鄭伊衡)이 있었다. 그는 8월 17일 대전 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상경(上京)하여 ‘8·15출옥혁명동지회’를 결성했다. 공주 형무소에서 출옥한 김근(金槿) 외에 20~30명이 간부로 활동했으며 약 400여 명의 회원 가운데는 국내와 만주, 러시아, 중국 관내 등에서 활동하다 투옥된 인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출옥혁명동지회는 8·15 이후 전국 각지에서 출옥한 인원을 1300여 명으로 추산하였다(박환, 《잊혀진 혁명가 정이형》, 국학자료원, 2004).
 
 
  8월 15일의 신화
 
《국제통신》에 실린 정치범 석방사진. 제공=오영식.
  일본 천황의 종전조서는 난해한 한문체였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의미를 얼른 알아보기 어려웠다(사토 다쿠미, 《8월 15일의 신화》). 그런데 일본에서도 ‘옥음방송’을 듣는 장면이 오랫동안 신문에 실린 경우가 있었다. 직립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여자 정신대(근로자)의 《아사히신문》 사진과 《홋카이도신문(北海島新聞)》의 천황의 조서발표 방송을 듣는 사진 등이 있었는데, 후에 그 사진은 연출 조작된 장면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그 밖에도 여러 종류의 조작된 사진에 관해서 사토 교수는 실증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러면 8월 15일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찍었다는 사진은 진실인가?
 
  1945년 11월 20일에 창간된 《국제통신》에는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한국의 애국자들이 8월 16일에 석방되어 자유롭게 숨 쉬면서 서울 거리에 나섰다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실려 있다. 15일에는 석방이 없었고, 16일 오전 9시부터 정치범이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형무소 앞 현장에 찾아갔던 좌익 인물 전후(全厚)는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그날(8월 16일) 혁명가대회에서 와서 석방되는 동무들의 편리를 보고 있었고, 눈에 뜨이는 것은 다만 조선비행기주식회사접수위원회에서 보내온 자동차 한 대, ‘혁명동지 환영’이라고 쓴 혁명가대회의 기빨 한 폭, ‘권오직 동무 김대봉 동무환영’이라고 써서 어떤 부인이 들고 있는 조그마한 초롱 한 개— 이리하여 이날 해방조선의 첫 페이지는 열렸다.〉(〈혁명자의 私記, 혁명에의 길, 좌익인사의 양심〉, 《신천지》, 1946년 3월호)
 
안재홍의 연설을 게재한 1945년 8월 17일자 《매일신보》. 여기서부터 비로소 해방의 기쁨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의 기록은 모두가 8월 16일, 또는 그 이후에 정치범(독립운동가, 사상범)이 석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재홍은 16일 오후 3시10분부터 약 20분 동안 경성방송국에서 ‘호애의 정신으로 결합, 우리 광명의 날 맞자’라는 요지의 방송을 했다. 거리에 환희와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던 것도 이날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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