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의 ‘아트토크’ <끝> - 미술에서 ‘사실주의’ : 월간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 명화는 무엇일까? 사람들 머릿속에 몇 개씩 떠오를 텐데, 아마 밀레(Jean-François Millet·1814~75)의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은 꼭 들어갈 것이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한 밀레의 이 두 대표작은 한때 우리나라의 달력과 포스터에 단골로 등장했던 그림이고, 이렇게 복제된 밀레의 그림은 이발소나 다방 등 어디에서나 즐겨 걸던 것이라서, 대표적인 ‘이발소 그림’이라고까지 불리곤 했다.

그런데 대체 그토록 유명하고 우리를 비롯한 세계 모든 나라 사람이 그렇게 좋아하는 밀레는 왜 훌륭한 화가인 걸까?

‘실제 삶’을 그린 사실주의 화가들

19세기 초·중반 프랑스의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샘>(1820~56). 당시까지만 해도 신화의 소재나 완벽한 몸매의 이상적인 모델만이 그림의 소재로서 가치가 있었다.

밀레, 쿠르베 등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화가들은 서양 미술사에서 본격적으로 ‘사실(寫實)주의’ 그림을 시작한 선구자들이었다. 미술뿐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든, 역사를 바꾸는 데 획을 그은 ‘역사적 인물’은 중요하다. 그런데 미술에서 ‘사실주의’라면, 그린 방법이 사진처럼 똑같이 사실 그대로 모사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보다는 주제적인 면을 뜻한다.

작가가 속한 시대와 공간의 현실을 반영한 그림을 ‘사실주의’ 또는 ‘리얼리즘’ 미술이라 부른다. 19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신화나 역사, 완벽하고 이상적인 몸매의 모델을 그리는 것만이 주류였다. 앵그르 같은 19세기 초·중반 화가들의 그림이 얼마나 고전적인 스타일로 인체를 이상적으로 표현했는지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들어 프랑스에서 평범한 실제 프랑스 시골풍경을 그리는 화가 그룹이 생겨났다. 이들은 ‘바르비종(Barbizon)’이라는 지역에 모여서 그렸기 때문에 ‘바르비종 스쿨’이라고 불렸다. 밀레는 이 ‘바르비종 스쿨’의 화가로서, 더 이상 신화나 역사 속에 나오는 상상의 풍경이 아닌 실제 그 화가들이 살고 있는 프랑스의 풍경을 거짓없이 그렸다. 그리고 다른 바르비종 화가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꾸밈없이 그렸다.

그런데 흔히 지나치는 농부들의 일상, 이웃 주민들의 모습이 막상 그림이 되고 나니 그 역시 아름다웠고, 그림으로서 당시 프랑스의 현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감동을 받았고, 이후 화가들은 소재와 표현 방법에서 점점 자유로워졌다. 실제 자신들이 속한 삶의 솔직한 모습을 쓱쓱 느낌대로 그린 듯한 자유로운 그림이 많아졌다. 여기에서 시작해 인상파, 후기인상파, 입체파, 야수파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획기적으로 바꾼 다양한 미술사조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서양 미술사에 많은 사조가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현대미술에 이르는 데 첫 단추를 꿴 사조를 꼽으라면 아마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은 모두 내 작품 안에”

미국의 19세기 중·후반 사실주의 화가 토머스 에이킨스의 <그로스 박사의 임상 수업>.

밀레와 비슷한 시기인 19세기 중·후반 미국에서는 토머스 에이킨스(Thomas Eakins·1844~1916)가 미국식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에이킨스는 “내 삶은 내 작품 안에 모두 들어 있다”고 말했다. 에이킨스는 미국 동부인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자신이 태어나서 살던 고향 필라델피아의 삶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미국 미술계에선 이 역시 충격적인 일이었다.

에이킨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로스 박사의 임상 수업>(1876)은 에이킨스가 그림을 그릴 당시 70세였던 실존인물인 새뮤얼 그로스라는 의학박사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퍼슨 의과대학에서 임상 수업을 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화가 에이킨스는 제퍼슨 의과대학에서 실제로 해부학 수업을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의학기술의 발달을 기록으로 남기는 그림을 그렸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문제가 생긴 인체의 부위를 절단해 버렸지만, 의학의 발달로 인체 부위를 절단하지 않고 보존하는 외과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그로스 박사는 이 분야에서 저명한 의사이자 제퍼슨 의과대학의 스타 교수였다.

‘그로스 박사의 임상 수업’은 실제 있었던 수술 장면을 토머스 에이킨스가 목격하고 그린 것이다. 수술하는 의사들과 그로스 박사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고, 칼을 들고 살을 째는 것도 그대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에이킨스는 수술의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그린 게 아니라 당시 화제가 되었던 뛰어난 의학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그린 것이다.

사실주의 그림이 그 시대에 꼭 인정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피가 흐르는 외과수술 장면을 그대로 그려낸 토머스 에이킨스의 그림도 그 당시에는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에이킨스는 이 그림을 완성한 해인 1876년에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국제전’에 출품했지만, 심사위원회에서는 이 그림을 거절했다.

하지만 에이킨스 그림의 역사적 중요성은 훗날 입증되고 있다. ‘그로스 박사의 임상 수업’은 토머스 제퍼슨 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가 2006년에 팔았는데,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 측이 공동구매한 가격은 6800만 달러(약 713억원)였다.

時空 초월하는 사실주의 그림

미국 20세기 초반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위호켄에서 부는 동풍>(1934). 2013년 경매에서 약 425억원에 낙찰됐다.

20세기로 넘어온 뒤에도 사실주의 그림은 시대상을 차가운 시선으로 그대로 전해주면서 신선하고 충격적인 감동을 주었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사실주의 화가로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가 꼽힌다.

그가 그린 <위호켄에서 부는 동풍(East Wind Over Weehawken·1934)>은 2013년에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048만 달러(약 425억원)에 팔려, 20세기 초반 미국 미술작품 중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호퍼는 20세기 초반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이라면, 유럽에서는 각종 새로운 경향의 아방가르드 미술이 휩쓸고 미국은 유럽의 화풍을 받아들인 뒤 그들만의 또 다른 추상화로 가던 시기다.

이런 때 호퍼는 조용히 미국의 현실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호퍼가 갑자기 혼자 불쑥 나온 것은 아니다. 호퍼 이전에 미국 뉴욕에는 ‘애시캔 스쿨(Ashcan School)’이라고 하는 일종의 사실주의 화풍 화가의 그룹이 있었다.

1900년대와 1910년대에 주로 활동한 ‘애시캔 스쿨’은 뉴욕의 평범한 거리 풍경과 가난한 이웃의 생활 모습 등 주변의 하찮은 소재를 그렸다. 쓰레기처럼 허접한 일상 소재를 그렸다고 해서 ‘쓰레기통’을 뜻하는 ‘애시캔’이라는 말이 이 화가들에게 붙었다.

에드워드 호퍼는 이 ‘애시캔 스쿨’의 영향을 받은 화가다. 활동한 시대는 달랐지만, 애시캔 스쿨이나 토머스 에이킨스는 모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던 일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그렸다는 특징이 있다.

호퍼가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1930년대 미국은 경제 대공황을 겪고 난 직후였다. 호퍼는 당시 미국의 풍경을 휑하게 그렸는데, 그때 상황을 리얼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위호켄에서 부는 동풍>은 미국 뉴저지의 위호켄이라는 지역을 그린, 전형적인 미국 동네의 풍경화다. 그런데 반듯반듯한 집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마을에는 사람 사는 왁자지껄한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다.

사람들 모습은 간신히 윤곽 정도만 보이고, 실제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이나 개, 꽃, 자동차 등 ‘살아 있는’ 소재는 하나도 없다. 미국 집의 상징인 정원의 잔디는 오랫동안 깎지 않아 잡초처럼 무성하고,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팝니다(For Sale)’라는 매매 팻말이 희미한 글자로 씌어 있어서 더 쓸쓸해 보인다. 언뜻 보면 작가는 그저 눈에 뻔히 보이는 당시의 풍경을 밋밋하게 그린 것 같다. 하지만 호퍼는 이런 식의 표현으로 그 시대의 황량한 미국을 바라보는 자신의 쓸쓸한 시선을 담은 것이다.

사실주의 그림은 그 그림이 그려진 당시의 현실을 담았어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사람들에게 보편적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21세기의 우리가 밀레의 그림을 보면서 평범한 농촌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부유한 현대사회에서 마음이 썰렁한 자신들의 처지를 느끼는 것이다. 어느 시기에서든 그 시기의 현실을 진솔하게 그려낸 사실주의 미술은 오늘날 현대인들도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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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현의 ‘아트토크’ <끝> - 미술에서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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