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크라이스트 처치에서는 오늘도 옛날을 먹으며 전통을 마시는 만찬이 벌어진다
⊙ 로마 콜로세움의 놀랄 만한 야경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진짜 로마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 누구든 연구하겠다면, 보고 싶고 알고 싶다면, 보고 알고 연구하도록 해 주는 것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
劉光洙
⊙ 43세.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문학박사. 연세대 학부대학 조교수.
⊙ 2007년 제1회 《조선일보》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진시황 프로젝트》
(2008) 《왕의 군대》(2011), 고전 편역서 《홍계월전》(2011).
⊙ 로마 콜로세움의 놀랄 만한 야경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진짜 로마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 누구든 연구하겠다면, 보고 싶고 알고 싶다면, 보고 알고 연구하도록 해 주는 것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
劉光洙
⊙ 43세.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문학박사. 연세대 학부대학 조교수.
⊙ 2007년 제1회 《조선일보》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진시황 프로젝트》
(2008) 《왕의 군대》(2011), 고전 편역서 《홍계월전》(2011).
- 빅벤(Big Ben). 영국 국회의사당 동쪽 끝에 있는 대형 탑 시계.
여름 성수기가 겹친 데다 갑작스런 출국이다 보니 비행기 표가 없었다. 어렵사리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경유하는 표 두 장을 구했다. 덕분에 이번 여행의 모든 것이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인천을 떠난 지 5시간 정도 지나 타슈켄트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을 떠나온 눈엔 ‘이게 공항 맞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균열된 것을 ‘땜빵처리’한 활주로에 2층짜리 건물 달랑 한 채가 전부였다. 화장실 변기가 막혀 넘쳐흘러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나, 공항 아무데서나 마음껏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것을 보며 움찔했지만 마음을 달랬다. 아니, 참았다. 영국에만 가면 되니 까짓것 좀 참자였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타슈켄트는 우리처럼 동쪽에서 날아와 경유하기도 하지만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처럼 남쪽에서 유럽 갈 때도 많이 경유했다. 그걸 몰랐다. 사실 알았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는 창측으로 세 좌석이 있었다. 먼저 들어선 내가 창측에 앉고 동행한 민 박사가 중간 자리에 앉았다. 민 박사 바로 옆, 복도 쪽 자리에 바로 문제의 파키스탄 청년이 앉았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20대 초반의 얼굴이 퍽 호감이 갔다. 처음엔 아무 문제 없었다. 사실 비행기 타고 그냥 날아가는데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영화처럼 느닷없이 불쑥 일어선 테러범이 총을 꺼내 들며 위협할 리도 없고, 뒤로 젖혀지지 않는 불량품 좌석을 국제선 비행기에 그대로 방치하는 이런 우즈베키스탄 항공사를 목표로 폭탄테러를 할 리 없으니 말이다. 지나서 생각이지만 차라리 테러범이라면 화끈하기라도 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키스탄 이 친구, 정말 기상천외했다
나와 동행한 민 박사는 그리 꽉 막힌 사람도 아니고 과민한 사람도 아니다. 난 그가 한 번도 남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 5분 지났을까, 나에게 눈짓을 하며 알려왔다. 옆을 슬쩍 보니 참 해도 너무했다. 그 파키스탄 청년의 팔꿈치가 자기 팔걸이를 넘어서 민 박사의 옆구리를 찔러댈 정도로 밀어대고 있어, 민 박사는 몸을 기울여 내 쪽으로 기대다시피 한 상태였다. 거기다 이 파키스탄 친구가 왼발을 올려서 자기 무릎에 걸쳤는데 구두 바닥이 민 박사 허벅지를 왔다 갔다 문질러댔다. 거기까지였다면 좀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쳤을 거다. 하지만 시작이었다.
자꾸 민 박사에게 서툰 영어로 뭔가를 물어보며 치근대는데 그 눈빛은 내가 봐도 심상치 않았다. 대놓고 그를 외면하는 것이 외려 그를 무안하게 만들까봐 민 박사는 내가 앉은 창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서는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려 했다. 하늘 높이 날면 똑같은 구름 빼고는 제대로 볼 것도 없지만, 아무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에, 이 파키스탄 친구가 우리가 보는 손바닥만한 창을 같이 보겠다는 듯이 몸을 아예 민 박사에게 기대질 않는가!
순간 비수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파키스탄 사람들 특유의 체취였다. 여러 곳을 다니며 이런저런 냄새를 맡아 봤고 또 비슷한 냄새에 익숙했지만, 이때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냄새가 싫다기보다는 내 맘이 섬뜩했기 때문이다.
우린 남자 둘이고 저쪽은 혼자였다. 다른 동료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두려움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묘하게 돌아가는, 그리고 그칠 줄 모르는 정황이 점점 광기를 닮아 가는 것 같아서였다. 꽉 막힌 비행기 안에 팽팽한 공기가 터질 듯 밀려 들어와 갑갑하게 옥죄는 것 같아서였다.
영국 영공에 가까워지자, 스튜어디스가 나눠 준 입국심사 카드를 작성해야 했다. 파키스탄 청년은 아예 대놓고 베꼈다. 국적까지 ‘Korea’로 적는 것이 아닌가. 이해심 깊은 민 박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히드로 공항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것을 번연히 알면서 그냥 둘 수는 없는 거였다. 그러자 이 파키스탄 친구는 자기 여권과 다른 서류를 보여주며 써 달라고 했다. 이때 비로소 이 친구가 파키스탄인으로 런던에 있는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 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비행기는 히드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고, 우리는 쏜살같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파키스탄 트라우마
파키스탄 청년은 그냥 불안한 여행객이었을 게다. 서툰 영어에 20대 초반, 자기 나라보다 더 발전된 나라에서 공부하겠다고 나선 호기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선 젊은이였을 뿐이다. 처음 여행에 문화권이 달라 무례하게 보이는 실수를 연방 해댄 것이다. 그래도 같은 피부색의 좀 덜 부담스러운 남자들을 만나 이런저런 것을 물어볼 수 있었던 것을 알라신께 감사했을 게다.
먼 옛날 우리 선배들이 외국 땅을 처음 밟을 때, 그 파키스탄 청년처럼 저리 허둥대고 불안한 눈을 끔벅거렸을 거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두려움, 그 어색함, 그리고 암담함까지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한 다음 날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을 지나 국회의사당의 빅벤(Big Ben)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템즈강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골목으로 우리를 유인하려 했던 수상한 사내를 따돌린 후였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이 아니었지? 그지?”
그랬다. 템즈강 건너편에서 만난 사내는 집시 풍이었다. 동양인 둘을 노린 거였다. 계속 저쪽으로 가면 좋은 곳이 있다며 말을 걸어 왔다. 싫다고 하자 자기 핸드폰을 쥐여주고 자신을 찍어 달라며 애처로운 눈빛을 짓기까지 했다. 그때 파키스탄 청년이 트라우마로 떠오르지 않았다면 따라갔을 거다.
“덕분에 우린 괜찮았는데, 파키스탄인도 괜찮을까?”
모르겠다. 서툰 영어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 자신이 공부하기로 한 대학이 있는지, 여기저기 쭈뼛거리며 두리번거릴지… 정말 모르겠다. 상냥한 목소리로 알려주겠다는 뾰족한 코의 집시 사내를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글쎄 모르겠다. 내가 너무 파키스탄인을 무시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 역시 우리처럼 지혜롭게 잘 대처할 거라 생각한다. 이 영국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을 모두 배워, 꽉 채워 자기 나라로 돌아갈 거라 믿는다. 우리에겐 트라우마였지만 그는 그 나라 파키스탄에서는 뽑히고 뽑힌 지혜로운 청년일 테니 말이다.
“영국놈들 참 대단해”
영국의 박물관은 공짜다.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은 물론, 어느 박물관이든 그냥 들어간다. 영국은 심심한 나라다. 유럽인들에게 더욱 그렇다. 딱히 맛난 음식도 없고, 특색 있는 거라 해야 별것 없다. 내세울 것이 없으니 박물관이라도 공짜여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내심 중얼거렸다. 부아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야 관광객들이라도 끌어들이지.”
대영박물관 1층 로비를 걸으면서였다. 단단히 심통이 난 것은 2층에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데모를 하기 때문에 통제한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만 반복했다. 2층 한구석에 있는 한국관, 중국관 등은 아예 디뎌 보지도 못한 거였다. 기실 거기에 있는 한국 유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고, 대영박물관 중국관에서 볼 것보다 더 엄청난 것들은 이미 중국에서 수차례 본 터였다. 새로울 것이 없지만 난 유물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유물이 들려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셈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 박제가 되었는지, 그들의 사연을 풀어낼 생각이었는데, 그걸 가로막은 거였다.
“하루 종일 다 돌아다녀도 모두 못 본다는 것은 설레발이었어.”
어쨌든 대충 훑어보기에는 그럭저럭 볼 만한 정도이지 압도할 만큼은 아니었다. 알렉산더 특별전은 특별전이기에 입장료를 받는다는 말에 더 엇나갔다.
“세상에! 벽을 다 뜯어 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흉악한 놈들이여….”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시리아 유적들을 제대로 보려면 대영박물관에 가야 하는 이유가 그거였다. 정말 이런 것을 뜯어 올 생각을 한 것이 문화에 대한 높은 안목이 있어선지는 모르지만 도둑질이란 사실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들 말마따나 그대로 두면 모두 훼손될 세계 인류 유산을 제대로 잘 보존하려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여간 이런 것까지 뜯어다가 세워 놓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영국놈들, 참 대단해.”
옥스퍼드에서 옛날을 숨 쉬고 전통을 먹다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옥스퍼드(Oxford)로 향했다. 옥스퍼드는 대학도시다. 여러 대학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상가와 주거 건물이 들어선 형태이다. 우리처럼 대학 캠퍼스가 구분된 형태를 생각하면 안 된다. 런던 빅토리아 역(Victoria Coach Station)에서 2층버스를 탔다. 차가 우리와 반대인 왼쪽으로 가는 것은 낯설었지만 버스 2층 맨 앞에 앉아 주변 경관을 보는 것은 괜찮았다. 버스엔 와이파이도 장착되어 있어 스마트폰을 맘껏 이용할 수 있었고, 살짝 더운 정도의 여름 날씨도 우리 여름 같지 않아 나쁘지 않았다.
옥스퍼드에 내리자 때마침 장터가 열렸다. 신기하게 생긴 과일들과 빵과 채소, 청바지, 치마, 속옷, 간단한 생활용품에서 책을 비롯해 골동품처럼 보이는 항아리들까지 볼 거리가 풍성했다. 골목에 있는 ‘코코넛(Coconut)’이란 카페에 들어갔다. 500mL 생수는 1.2파운드(약 2000원)인데 콜라 캔은 1파운드(약 1800원)였다. 대부분의 유럽에서 물보다 콜라가 더 싼 것은 알았지만, 막상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린 커피와 홍차를 마셨다. 가격은 우리나라 커피전문점과 비슷한 정도였지만, 좋은 날씨에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한가하게 마시는 커피 맛은 더 비싸더라도 먹을 만했다.
이렇게 조금 풀어진 마음이 다시 배배 꼬이게 된 것은 애슈몰린 박물관(Ashmolean Museum)에 들어서서였다.
홉뜬 눈으로 다가와 ‘플래시를 터트리지 마시오’라고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애당초 플래시를 터뜨리지도 않았다. 그냥 사진기를 들고 있는 동양인을 보자, 마구 터뜨릴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경고한 거였다. 아무튼 그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배낭을 뒤로 메지 마시오’라며 앞으로 배낭을 메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갓난아이를 안은 것처럼 엉거주춤한 꼴이 된 것도 우습지만, 배낭 멘 다른 관광객들에겐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보다도 볼 것이 없는 데다 새로울 것도 없는 것들이어서 대강 둘러보고 나왔다.
평생 영국에 빈정상할 것 같던 기분이 완전히 날아간 것은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 들어가서였다.
크라이스트 처치는 1532년 헨리 8세(Henry VIII)가 설립한 대학이면서 성당이라는 점보다는, 영화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학교 장면을 찍은 곳으로 더 유명했다. 특히 영화 속 호그와트 학생들이 모두 모여 풍성한 만찬을 즐기는 바로 그 만찬장이 크라이스트 처치에 있었다.
영국이 영국인 이유
정말 무슨 액이 낀 것인지, 크라이스트 처치의 바로 그 만찬장 앞에서 다시 길이 막혔다. 올라가는 계단 아래 팻말 하나 세워 놓고 안내인이 어슬렁거렸다.
‘설마 내가 온다는 걸 영국이 알고 있던 건 아니겠지?’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하며 안내인에게 입장이 안되는 이유를 물었다. 회의 때문에 오후 2시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거기서 회의를 한다는 건지, 높은 양반들이 회의하러 가기 전에 먼저 들르라고 통제를 한다는 건지, 더 물어야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그냥 돌아서서 나왔다.
다행히 한여름 영국 날씨는 우리 가을 날씨 같았다. 따스한 햇살이 맘 풀라며 피부를 보듬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꽃들도 눈에 고왔다. 그렇게 햇살과 꽃들 사이에서 새들과 시간을 보내다 2시 조금 넘어 그 만찬장을 도로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난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대영박물관에서부터 내내 틀어진 심보가 얼마나 옹졸했는지, 대강 만만하게 보고 코웃음을 친 것이 얼마나 얼간이 같은 것이었는지, 이미 지는 해가 아니냐며 눈 아래로 깔아본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날 크라이스트 처치 만찬장 안에는 영국이 영국인 이유가 있었다.
영화에서 본 것과 똑같은, 높은 천장과 널따란 홀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액자와 그 그림, 삐걱 소리를 질러댈 것 같은 나무 의자와 책상, 촛대와 장식품 모두 똑같았다. 사실 그건 예상한 거였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짐작한 터였다. 내가 벼락이 친 것처럼 놀란 것은 다른 것 때문이었다. 그 만찬장에 있어서는 안 될, 아니 있을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라면 절대로 있게 하지 않을 것이 벽 한쪽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그건 커피머신이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는 익힌 고기와 채소 볶은 냄새와 함께 그날 그 만찬장에는 커피머신이 놓여 있었다.
‘정말 여기서….’
그들은 정말 여기서 2시까지 회의를 했던 거였다. 그 옛날 그들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앉아 식사를 했던 거였다. 조상들이 먹던 음식과는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앉던 그 의자, 그들이 사용하던 그 식탁, 그들이 생각을 정리하며 바라보던 그 그림은 꼭 같았다. 그들의 진지한 얼굴을 비춰주던 촛불 사이에서 그들을 굽어보던 천장까지 그대로 둔 채, 바로 여기에 앉아 그 옛날 그들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중요한 것을 논의하고 결정하고 즐겁게 음식을 나눴던 것이다.
고이고이 모셔 두면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된다?
내 충격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이들은 정말 옛날을, 문화를, 전통을, 있는 그대로 먹고 마시고 숨 쉬며 새로운 그들의 사연을 만들어 가고 있는 거였다. 박제된 과거, 만들어진 옛날이 아니었다. 옛것이란 구분조차 무의미한, 있는 그대로의 삶, 생활로 이어진 그들의 전통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거였다.
뒤에서 미는 관광객들이 아니었다면 난 충격에서 더 오래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였다. 크라이스트 처치의 만찬장을 나오며 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경복궁 근정전 안에서 뱃놀이를 하고 연회를 베풀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아니, 하면 그것을 실행할 수는 있을까. 문화재관리청이 가만히 있을까. 허가해 줘도 문화재를 함부로 다룬다며 여기저기서 삿대질이 쏟아지진 않을까. 갑론을박이 주먹 쥐고 튀어나와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하게 두들겨 패대지는 않을까.
길이 다르고 격이 달랐다. 고이고이 모셔 두면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된다는 생각과, 사용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전통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크라이스트 처치의 충격은 비로소 영국의 영국다움을 놓치지 않고 보게 만들었다. 이어진 다른 박물관에서 전시된 유물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했다. 구석기 시대 돌도끼, 신석기 시대 화살촉 옆에 아무나 만질 수 있도록 투석기 원리를 설명한 장치가 놓여 있는 것도 놓치지 않았고, 실제로 핑핑 날려 볼 수 있는 석궁도 눈에 쏙 들어왔다. 나는 그것들을 주무르고 만지고 당기고 쏘아 보았다. 플래시를 지적하고 배낭을 메라고 했던 안내인들이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지그시 지었다. 그 미소는 석궁을 만지던 손이 눈앞에 나란히 놓인, 시대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돌도끼를 만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바로 그런 미소였다.
비로소 《해리포터》를 쓴 조앤 K. 롤링이 영국인이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죽었다 깨도 다른 나라에서는 그 상상력이 나올 수 없는 거였다. 《반지의 제왕》도 《나니아 연대기》도 《황금나침반》도 영국이니까, 옥스퍼드니까 나올 수 있었던 거였다.
이젠 더 이상 예사롭지 않았다. 버킹엄 궁전 앞에서 날마다 퍼레이드를 벌이는 기마경찰들도, 말들이 싸 놓은 똥들이 즐비한 도로 바로 옆 풀밭에 누워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도, 좁은 2층집을 오가며 홍차를 홀짝이는 사람들까지, 모두 예사롭게 보이질 않았다.
왜냐하면 크라이스트 처치에서는 오늘도 옛날을 먹으며 전통을 마시는 만찬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또 다시 새로운 그들의 삶과 사연과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게 분명하다.
테르미니와 콜로세움에서 야누스의 두 얼굴을 만나다
로마의 공기는 끝내줬다. 누구는 로마가 너무 더워 고생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는데, 우리가 있는 동안은 여름철이지만 쾌적했다. 선글라스 끼고 나서면 둘러보기에 딱 적당한 날씨였다.
이런 마음은 로마에 도착한 둘째 날 아침, 리치몬드 호텔 옥상 노천카페에 한가롭게 앉아 각종 과일에 진한 치즈를,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보드랍기 그지없는 빵에 넣어 실컷 먹고 난 후 얘기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식탁 주위에 날아와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먹으려고 종종거리는 참새들의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콜로세움을 바라볼 때 그렇단 얘기다. 그 전날은 완전 반대였다. 엉망진창이었다.
로마 테르미니 기차역에 도착한 것은 어둑한 저녁이었다. 영국에서의 흥분이 푹 꺼진 이유는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역무원 때문에도 그랬지만 바로 그것, 저녁 늦은 시간에 로마에 도착한 때문이었다. 이젠 아무리 깜깜한 밤이라 해도 용산역 주변 지린내 풍기는 어둑하고 허름한 골목을 찾기 힘들지만, 로마는 아직 그랬다. 맥주병을 들고 흔들거리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이방인을 바라보는 흑인의 하얀 눈알이 어둠 속에 번뜩이는 것도 주눅들 만했다. 벌겋고 퍼런 래커로 기기묘묘한 그라피티를 그려 놓은 벽에 검정 래커로 거칠게 암호마냥 덧칠한 표지는 당장이라도 갱들이 뛰어나와 총질을 해댈 것처럼 기괴해 보였다. 모두 다 어두웠기에 더 그랬다.
무엇보다 맥이 빠진 건 코를 찌르는 지린내를 따라 민박집 주소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내내 엄청나게 크기만 한 건물들 외엔 이렇다 할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로마의 야경 때문이었다. 거리 이정표가 아니라 오줌 썩는 냄새를 따라가 민박집을 찾은 것이 분명하다는 게 의심이 들 정도의 집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고 들어간 집 안은 더 가관이었다. 엄청난 높이의 좁은 홀에 《대부》에 나오는, 그 을씨년스런 닭장처럼 생긴 엘리베이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버튼이 눌리고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엘리베이터지, 기본 프레임에 철조망으로 벽을 한 그건 꼭 공사판에서 시멘트와 벽돌 실어 나르는 리프트, 바로 그거였다.
공동화장실에, 공동목욕탕, 비좁은 복도에 에어컨 없는 방, 원래 맛이 무엇이었을지 가늠이 안 되는 반찬들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셌다. 둘이 한 방에 같이 묵는데도 민박이 120유로(약 18만원)라니, 완전히 사기당하는 기분이었다.
일단 씻었지만, 씻어도 후텁지근한 방안 공기에 다시 땀이 배어 나왔다. 열어젖힌 창밖에선 누군가 악쓰는 소리와 함께 지린내가 스며들었다. 저녁 9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로마의 첫인상은 오줌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무서운 표정의 흑인들, 엄청난 건물 크기, 살인적 물가 정도로 끝날 거였다. ‘도대체 여길 왜 온 거야?’ 하는 퉁명스러움이 대번에 바뀐 것은 달랑 지도 한 장 들고 나선 밤길 덕분이었다.
로마제국 시절에 깔았던 돌의 4분의 1 정도 되는 돌멩이들로 깐 도로는 반질반질 가로등에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든 로마의 좋은 점을 찾으려고 애쓰던 마음에, 연말마다 연례행사처럼 도로를 갈아엎는 서울 보도블록보다는 백배 낫다며 민 박사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가로등 비치는 골목을 따라 걷던 우리는 곧 억지로 지어낸 흥분으로 분위기를 띄울 필요가 없어졌다.
콜로세움(Colosseum)의 놀랄 만한 야경이 눈앞에 떡 나타나는 순간, 진짜 로마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유대를 멸망시킨 후 그들을 끌고 와 만들게 하고는, 그 안에서 사자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어 죽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사진으로 숱하게 봐 왔지만 달랐다. 육중한 크기 때문은 아니었다. 엄청난 조형물이라면 중국에서 눈이 아프도록 보았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 뭔가가 거기 있었다. 뭔지 모를 마력이 거기에 잠들어 있었다. 홀린 듯 콜로세움을 빙글빙글 돌다가 그 옆을 지나가는 도로 바로 밑으로 푹 꺼진 듯한 폐허 유적에 눈이 닿았다. 지하도시처럼 보이는 것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도로 밑에 숨 쉬고 있었다. 그곳이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는 것을 그 다음 날 알게 되었다.
“로마의 중심은 바로 여기야!”
우리는 즉시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근처 호텔들로 무작정 들어갔다. 그리고 방값을 흥정했다. 세 군데 만에 트윈 룸을 구했다. 로마 시내 별 4개짜리 호텔인데, 겨우 140유로(약 20만원)였다. 코앞 왼쪽으로 콜로세움, 오른쪽으로 포로 로마노가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로마의 살인적 물가를 생각하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판테온에서 흘러가는 향연에 휩싸이다
로마 시내는 그 자체가 유적이다. 저쯤이면 있겠지 하면 꼭 광장이 있고 거기엔 꼭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어김없이 한가하게 앉아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있을 것은 다 있을 것 같지만 정작 없어서 불편한 것은 수퍼마켓이었다. 테르미니 역에 두 군데 있고 바티칸으로 향해 가는 길에서 하나 본 것 말고는 못 봤다. 로마의 물가는 살인적이어서 수퍼마켓을 만나면 무조건 생수를 사서 배낭에 넣고 다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훨씬 비싼 가격에 생수를 파는 노점상에서 사야 한다. 그도 아니면 그냥 길가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고 그 물을 받아 마시면 된다. 설마 누가 길가에 있는 수도에서 물을 그냥 마실까 했는데, 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마셨다. 우린 조금 망설였지만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성이 스스럼없이 입을 대고 마시는 것을 본 이후로 주저하지 않고 따라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저녁에 배가 살살 아팠다. 아니면 본젤라토 아이스크림이 끝내준다기에 물어물어 찾아가서 한참을 줄 섰다가 먹은 아이스크림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맛은 끝내줬지만 콘 하나에 4.5유로(약 7000원) 하는 엄청난 가격 때문에 충격받았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며칠간 발가락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히도록 로마를 돌아다녔기에, 성 베드로 성당 뒤쪽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지상의 맛이 아닌 라자냐를 맛볼 수 있었고, 스페인 광장에서 결혼한 신랑신부를 향해 박수쳐 줄 수 있었다. 조그만 광장 귀퉁이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금발 미녀의 매력적인 눈빛과 분수 앞에서 홀로 노래를 부르던 여가수의 아련히 흐느끼는 듯한 선율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San Pietro Basilica)과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의 찬란한 미술품들과 조각상, 태피스트리, 거대한 양탄자, 이집트에서 온 미라 같은 엄청난 것들도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부족했다. 엄청난 조각상과 미술품들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시스티나 성당 가이드들이 각국 언어로 사람들을 주르륵 몰고 다니며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목청껏 열심히 설명해도 마찬가지였다. 빠진 것은 그 그림, 그 조각, 그 예술품을 만들던 손길, 그들의 숨결과 온기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박물관 안에 갇힌 신세였다. 더 이상 화장으로 감출 수 없는 늙은 창녀의 쇼윈도 안에서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는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져서였다.
티투스는 자기 개선문 아래 관광객들이 수다를 떨지 상상이나 했을까?
조금 갑갑한 마음은 성 베드로 성당의 돔 천장(cupola)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로마 시내 전경을 바라볼 때부터 서서히 풀려 갔다. 포로 로마노의 폐허 속을 거닐며 공화정 당시 로마를 상상하는 것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티투스는 먼 훗날 자기 개선문 아래에 관광객들이 모여 사진을 찍으며 수다를 떨 것인지 상상이나 해 봤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슬쩍 입가가 올라가기도 했다. 카이사르를 화장했다는 화장터에 아직도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의 꽃들이 매일 쌓이는 것도 흥미로웠고,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장대한 콜로세움 안에서 벅찬 감격에 사로잡혔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핥는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 트레비 분수에 다이빙해 볼까 하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로마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었다.
거대한 건물들과 그 앞 광장에 매력적으로 뻗은 오벨리스크는 옛날을 보여주며 그 옛날을 말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광장에 모여 음식을 먹으면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거였다. 어스름해지는 저녁 판테온 앞에 하나둘씩 모인 정복 입은 경찰들이 하나씩 악기를 꺼내 들고 오케스트라가 되어 펼쳐 보여주는 황홀한 심포니는 나만 듣는 것이 아니라, 건물도 듣고 광장도 듣고 오벨리스크도 듣는 거였다. 경찰 오케스트라 앞을 꼭 폴리스라인처럼 빙 둘러싼 남녀들이 피자 한 조각에 음료를 마시며 선율에 따라 고갯짓을 하고, 달콤한 기운에 취해 남자친구 어깨에 고개를 기댄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기는 것이 꼭 나만은 아니란 말이다. 광장 노천카페에 앉아 빵을 손으로 뜯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노부부도 그 연주를, 그 그림을 즐기는 거였다.
곡이 끝날 때마다 따뜻한 답례의 호응이 우리에게서 나왔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그날 밤 경찰 오케스트라는 오페라하우스에 선 세계적인 성악가, 연주가들을 향한 우레 같은 박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더 진지한 갈채를 받으며 자신들의 악기를 챙기고 다시 그들의 위치로 돌아갔다. 우리들도 그렇게 흩어졌다. 하나씩 가슴에 흥분과 감동을 담은 채로.
그렇게 로마에는 움직이는 조각상, 살아 있는 미술품들이 매일 밤마다 만들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그려졌다. 오랜 세월 지켜본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이 모든 예술품들을 보고 듣고 간직했다가 다시 멋 훗날 로마를 찾는 사람들에게 말해 줄 거다.
‘여기 우리의 웃음과 슬픔과 삶이 있다’고.
뮌스터 자전거 길에서 희망을 건지다
독일은 심심한 나라다. 꼭 봐야 한다고 수선을 피우지만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은 로마에서 눈만 돌리면 보던 개선문보다 못했고, 쾰른 대성당(Cologne Cathedral)도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과 로마의 산 지오반니 성당(San Giovanni in Laterano)을 본 내 눈엔 심심해 보였다. 아무튼 내겐 그랬다.
어쩌면 독일은 새벽부터 빵을 구워 내는 빵집과 가장인 아버지, 남편들이 그 빵집 밖에 줄을 서서 갓 구운 빵을 사 가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향긋한 빵을 잘 잘라 내고 진한 버터를 발라 치즈와 함께 뒷맛이 약간 신 달마이어(Dallmayr) 커피를 마시는 아침을 준비하는 남편들의 마음에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돼 이가 빠지고 금 간 그릇을 전통이라 여기며 계속 사용하고, 물과 전기는 물론 매사에 절약 습관 속에 독일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독일다운 것을 난 기차역에서 보았다.
요일마다 다르고, 타는 위치에 따라 또 다르고, 가다가 열차가 반으로 분리되어 각기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하는 등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고속열차(ICE)와 전철(S-bahn)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지만 목숨처럼 시간과 노선을 지키는 모습, 거기에 독일다움이 있는 듯했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집요하게 묻는 관광객에게 끝까지 웃으며 친절하게 상담해 주고 그 내역까지 프린트로 뽑아 주기까지 하는 안내소 직원들의 미소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모든 역에는 개찰구가 없었다. 그냥 걸어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가끔 차장이 표를 검사하기도 한다지만 우린 한 번도 차장을 만나지 못했다. 무임승차도 많겠다는 내 말에 독일에서 오래 살았던 민 박사가 싱끗 웃으며 말했다.
“여긴 신용사회잖아.”
부끄러운 감정이 신선한 충격과 함께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시작이었다. 진짜는 뮌스터에서였다.
뮌스터는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을 체결한 곳이고 ‘재세례파 운동’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 시청사와 재세례파 우두머리 3인을 가둬 죽인, 새장처럼 생긴 철장이 아직도 매달려 있는 교회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자전거였다.
“뮌스터 인구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아.”
이쪽에 한 대, 저쪽에 한 대. 그렇게 여기저기 자전거를 두고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차도와 함께 자전거 도로가 있고 신호등도 자전거용이 따로 있었다.
‘우리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인의 것이다’
자전거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은 뮌스터 대학에 있는 신약성서 연구소(The Institute for New Testament Textual Research)를 방문했을 때 놀람으로 바뀌었다. 이 연구소는 신약성서 사본 연구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곳이다. 고대 그리스어 사본, 파피루스 사본을 비롯해 루터 번역본 등 온갖 성서 사본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놀람은 그 사본들을 너무나 쉽게 열람시켜 주고 또 복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 박사가 그쪽의 권위자이고 이곳에서 공부했기에 안면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나 쉽게 수천 년 전의 자료를 그냥 복사해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우리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인의 것이다.’
그들이 소장하고 집적하고 모아 놓았을 뿐이란 생각이었다. 누구든 연구하겠다면, 보고 싶고 알고 싶다면, 보고 알고 연구하도록 해 주는 것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그런 생각이었다. 그들의 자세에 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도서관들을 돌아다니며 20세기 초 필사본 소설을 복사하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었던 경험이 절로 겹쳐졌다.
독일에 대한 진정한 놀람과 충격은 우리 KBS와 독일 방송에서 몇 번 다큐멘터리로 다루었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의 아버지 김동욱 선생을 뵈었을 때 정점을 찍었다.
“혹시 계실까?”
뮌스터 시내 한 집의 초인종을 누르며, 민 박사가 그렇게 말했다. 계획에 없던 귀중한 만남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신학을 공부하러 독일에 건너온 가난한 유학생 부부에겐 어린 세 딸이 있었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다시 한 번 쓰러지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재활했고, 건강해졌지만 불현듯 다시 쓰러졌다. 건장한 몸에 강인한 체력이 있었지만 느닷없는 뇌졸중이 그렇게 네 번 겹쳤다. 가장의 병이 가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비단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극심할 수밖에 없다. 첫째 딸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었다. 주변에서 격려가 이어졌고, 귀한 바이올린을 빌려주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그 딸은 바이올린의 재능을 꽃 피웠고, 독일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독일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한국인
김 선생은 내가 뵈었을 때도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운동하고 계셨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네 번씩이나 쓰러지고 걷지 못할 거다. 또 보통 요즘 애들 같았다면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 뮌스터에 마지막 남은 200년 된 브로이 맥주를 파는 식당으로 가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정말 저럴 수 있었을까.’
답이 쉽지 않다. 뭐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있다. 독일이니까 가능했다는 것, 바로 그것 말이다. 그건 외국에서 온 유학생에게까지 의료혜택을 베푸는 진정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복지 정책을 목표로 하는 독일 정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를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배려하고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독일 사회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것을 거저 주며 ‘네가 열심히 연주한다면 그 바이올린이 더 영광스러울 거야’라며 웃어 주는 독일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브로이 맥주를 앞에 놓고 부끄러워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쉽게 나라 탓, 사회 탓 하는 내 심보가 부끄러워서였다.
‘여긴 신용사회잖아!’
독일이 신용사회인 것은 사회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 사는 내가 신용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200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온 기법으로 빚었다는 브로이 맥주의 황금색이 깊어 가는 뮌스터의 밤공기 속에서 찬란히 빛났다.
레닌을 티무르로 바꾼 나라에서 눈물을 삼키다
경유할 때는 상관없었지만, 우즈베키스탄에 입국할 때는 상당히 번거로웠다. 입국심사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적어 내야 했다. 그리고 출국할 때 다시 가진 돈의 액수를 적게 했다. 외화 반출을 막으려는 정책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술한 검색대만큼이나 나라가 헐거워 보였다. 공항요원들은 다른 공항에서는 아무 문제 없던 라이터만 뺏어 수북하게 한쪽에 쌓아 놓았다. 내일이면 그것들 대부분이 지하시장에 풀려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공항을 나섰다.
강렬한 빛에 건조해 목구멍까지 타들어 간다는 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날씨였다. 찜통이라면 습기라도 있다. 후텁지근한 것이 아니라 아예 온 몸에서 그냥 쑥 에너지가 뽑혀 나가는 것 같은 더위였다.
“지금은 그래도 괜찮은 거야. 40도까지 올라가기도 해.”
타슈켄트에서 만난 친구는 아무 것도 아니란 듯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반겨 주었다.
차는 프린스였다. 뒤쪽 창문은 올라가질 않았고 에어컨도 나오질 않았다. 미터기는 85만km에서 멈춰선 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4년째 더 타고 있다고 했다. 한국 차가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알았다.
“여긴 자동차값이 집값과 맞먹어.”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70%는 대우차였다. 티코 택시도 있었다.
“대우 현지공장이 있거든.”
그래도 관세를 물고라도 수입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현지 조립차는 불량률이 높았다. 사는 순간 고쳐야 하는데, 고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뒷유리로 비가 샌다니까.”
손으로 억지로 잡아 내린 뒷문으로 더운 바람이 미친 듯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뜨거운 광풍이지만 땀은 나지 않았다. 피부까지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메말랐다.
대우 ‘프린스’ 자동차, ‘티코’ 택시
한참 달려 도착한 곳엔 놀랍게도 가톨릭 성당이 있었다. 로마에서 눈을 버린 후 웬만한 성당은 성당으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차에서 내려 들어간 이유는 우즈베키스탄이 바로 이슬람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 이슬람 지역 중 유일하게 성당이 있는 곳이 바로 타슈켄트였다. 또 오래전부터 그리스정교회 성당이 있는 곳도 여기였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여기로 성지순례도 와.”
내부 장식도 소략하고 단출한 것이 유럽과 비길 순 없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만난 성당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가톨릭이 지배적인 베네치아에서 개신교 교회를 우연히 만났던 것보다 더 신기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한국인 식당을 찾았다. 어디 가나 눈에 띄는 태극문양에 한글로 쓰인 글씨가 키릴문자들 사이에서 반가웠다. 친구는 차를 세우고는 뒤트렁크에서 뭔가가 담긴 검정 비닐을 꺼냈다. 밥을 먹고 계산할 때 그게 다 돈이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된장찌개 3인분을 먹고 뭉칫돈 두 묶음을 내는 게 아닌가.
“인플레 때문에 통화가치가 장난이 아니야. 이게 액면가가 가장 높은 지폐인데도 그래.”
우즈베키스탄을 떠날 때까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바로 돈을 다발로 들고 다니며 계산하는 바로 그거였다. 수퍼에 가서 사탕 하나를 사고도 지폐를 몇 장이나 냈다. 거슬러 받는 다른 지폐와 동전이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다음 날 다니엘의 무덤과 다윗 왕이 승천한 동굴을 보려고 사마르칸트에 갈 때는 에어컨이 잘 나오는 차를 대절했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차로도 4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황량한 벌판에 아스팔트 도로만 있는 곳을 시속 120km로 달리는 총알차를 탔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이 운전사 양반은 과속은 물론 끼어들기와 경적 울리기를 떡먹듯이 했다. 중간에 쉴 때 내려서 보니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의외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둘러볼 곳을 보고 하루 만에 돌아와 다시 다른 일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우리를 경찰이 붙든 적이 있는데 그땐 과속이 아니었다.
“적당히 뜯어서 챙기지 않으면 집에 식구들이 죽어 나가.”
운전사와 경찰이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차 안에서 바라보던 친구가 우리에게 한 말이었다.
경찰이 경찰 봉급으로는 살 수 없고, 회사원이 회사에서 주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는 나라였다. 적당히 뒤로, 밑으로 챙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꼭 내가 어렸을 적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함과 아련함이 뒤섞였다.
경찰과 헤어져 운전석에 다시 앉은 운전사는 씩 웃고는 다시 총알처럼 달렸다. 그의 웃음이 오랫동안 가슴에 사무쳤다.
대통령 퇴근길 도로는 쥐새끼 하나 없이 통제
마지막 날은 타슈켄트 시내 가운데 있는 광장으로 갔다. 더워서도 그럴 테지만 사람이 많지 않았다. 광장 한복판에는 말을 탄 아무르 티무르(Amur Timur) 동상이 서 있었다.
“지금은 저렇지만 내가 처음 왔을 때는 레닌 동상이었어.”
친구는 우즈베키스탄에 들어온 순서로 치면 네 번째 한국인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옛 소비에트 연방이었는데 연방이 해체되며 독립된 후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에 민족의 상징으로 아무르 티무르를 강조하면서 그 동상을 세운 것이다. 레닌이 서 있던 때에 비하면 자유로워졌을지 모르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저기 보이는 건물 있지. 아니, 아니. 손가락질하지 말고.”
전 KGB 건물이라고 했다. 물론 지금도 정보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쪽을 향해 사진을 찍는 것만 봐도 추적해서 찾아온다고 했다.
차를 다시 타고 대통령이 지나는 시내 중심 도로로 나갔다. 대통령이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직선 도로였다. 그때는 도로를 완전히 통제한다고 한다. 친구는 또 내가 사진기를 꺼내 들까봐 주의를 주었다.
“가로수 속에 감시카메라가 있어. 이 도로에서는 공연한 짓을 하면 안 돼.”
너무 과민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은 우즈베키스탄을 떠나던 날 저녁 완전히 날려 버렸다. 대통령 퇴근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말 그대로 도로는 쥐새끼 하나 없이 통제되었다. 다니는 사람은 물론 차도 없고 주차해 놓은 차도 없었다. 그 대통령 출퇴근 도로로 이어지는 주변 도로에는 정복 경관들이 하나씩 나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뒤로 물러나라 말했다. 잠시 후 경찰 오토바이 3대가 쏜살같이 내닫고 그 뒤로 검은색 방탄 지프 두 대가 내달리고 바로 이어 검정 벤츠 서너 대가 미친 듯이 달려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지프가 따라 달렸다.
세무조사 한다며 검은 스키 마스크를 쓰고 들이닥치는 나라
“어느 차에 탈지는 경호실장도 모른대. 물론 퇴근 시간도 제각각이고.”
그런데도 며칠 있는 동안 그걸 보다니 정말 행운이라고 친구가 말했다. 그게 행운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즈베키스탄의 음울한 치부를 본 것만은 맞았다.
공항으로 향하는 친구의 차 안에서 나와 민 박사는 말이 없었다.
국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국이 불가능한 나라, 3일 넘게 다른 곳에 가면 반드시 주거등록을 해야 하는 나라, 고용창출을 위해 달리는 차창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고, 그것을 주워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 절대 다수인 나라,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팔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나라, 세무조사 한다며 검은 스키 마스크를 쓰고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들이닥치는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바로 그 나라에 친구만 두고 우리만 쏙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도대체 하고 많은 나라 중에 하필 이곳에 왜 온 것인지, 군대를 마치자마자 이름도 생소했을 이 나라에 무작정 날아온 것은 무슨 배짱인지, 지금과 달리 그때는 적성국가라며 따로 신고까지 하고 사상검증까지 받아야 올 수 있는 곳이었는데… 도대체 이 땅에서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인지, 그것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았다. 구태여 물을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한국인이기에, 용기 있는 진취적인 기백이 치솟는 한국인이기에 이 척박하고 살벌한 땅에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랬을 게다.
뒤 창문이 내려오지 않는 ‘프린스’가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말없이 내려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 짊어졌다.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두워진 공항에서 친구와 마지막으로 껴안았다. 격한 감정이 나도 모르게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내 마음을 아는지 친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그 나라를 떠났다.
인천공항이 가까워졌다는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주마등처럼 많은 이야기가 눈앞을 스쳐가며 명멸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한국이, 우리나라가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참 좋은 곳이구나!’⊙
인천을 떠난 지 5시간 정도 지나 타슈켄트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을 떠나온 눈엔 ‘이게 공항 맞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균열된 것을 ‘땜빵처리’한 활주로에 2층짜리 건물 달랑 한 채가 전부였다. 화장실 변기가 막혀 넘쳐흘러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나, 공항 아무데서나 마음껏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것을 보며 움찔했지만 마음을 달랬다. 아니, 참았다. 영국에만 가면 되니 까짓것 좀 참자였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타슈켄트는 우리처럼 동쪽에서 날아와 경유하기도 하지만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처럼 남쪽에서 유럽 갈 때도 많이 경유했다. 그걸 몰랐다. 사실 알았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는 창측으로 세 좌석이 있었다. 먼저 들어선 내가 창측에 앉고 동행한 민 박사가 중간 자리에 앉았다. 민 박사 바로 옆, 복도 쪽 자리에 바로 문제의 파키스탄 청년이 앉았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20대 초반의 얼굴이 퍽 호감이 갔다. 처음엔 아무 문제 없었다. 사실 비행기 타고 그냥 날아가는데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영화처럼 느닷없이 불쑥 일어선 테러범이 총을 꺼내 들며 위협할 리도 없고, 뒤로 젖혀지지 않는 불량품 좌석을 국제선 비행기에 그대로 방치하는 이런 우즈베키스탄 항공사를 목표로 폭탄테러를 할 리 없으니 말이다. 지나서 생각이지만 차라리 테러범이라면 화끈하기라도 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키스탄 이 친구, 정말 기상천외했다
나와 동행한 민 박사는 그리 꽉 막힌 사람도 아니고 과민한 사람도 아니다. 난 그가 한 번도 남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 5분 지났을까, 나에게 눈짓을 하며 알려왔다. 옆을 슬쩍 보니 참 해도 너무했다. 그 파키스탄 청년의 팔꿈치가 자기 팔걸이를 넘어서 민 박사의 옆구리를 찔러댈 정도로 밀어대고 있어, 민 박사는 몸을 기울여 내 쪽으로 기대다시피 한 상태였다. 거기다 이 파키스탄 친구가 왼발을 올려서 자기 무릎에 걸쳤는데 구두 바닥이 민 박사 허벅지를 왔다 갔다 문질러댔다. 거기까지였다면 좀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쳤을 거다. 하지만 시작이었다.
자꾸 민 박사에게 서툰 영어로 뭔가를 물어보며 치근대는데 그 눈빛은 내가 봐도 심상치 않았다. 대놓고 그를 외면하는 것이 외려 그를 무안하게 만들까봐 민 박사는 내가 앉은 창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서는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려 했다. 하늘 높이 날면 똑같은 구름 빼고는 제대로 볼 것도 없지만, 아무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에, 이 파키스탄 친구가 우리가 보는 손바닥만한 창을 같이 보겠다는 듯이 몸을 아예 민 박사에게 기대질 않는가!
순간 비수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파키스탄 사람들 특유의 체취였다. 여러 곳을 다니며 이런저런 냄새를 맡아 봤고 또 비슷한 냄새에 익숙했지만, 이때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냄새가 싫다기보다는 내 맘이 섬뜩했기 때문이다.
우린 남자 둘이고 저쪽은 혼자였다. 다른 동료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두려움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묘하게 돌아가는, 그리고 그칠 줄 모르는 정황이 점점 광기를 닮아 가는 것 같아서였다. 꽉 막힌 비행기 안에 팽팽한 공기가 터질 듯 밀려 들어와 갑갑하게 옥죄는 것 같아서였다.
영국 영공에 가까워지자, 스튜어디스가 나눠 준 입국심사 카드를 작성해야 했다. 파키스탄 청년은 아예 대놓고 베꼈다. 국적까지 ‘Korea’로 적는 것이 아닌가. 이해심 깊은 민 박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히드로 공항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것을 번연히 알면서 그냥 둘 수는 없는 거였다. 그러자 이 파키스탄 친구는 자기 여권과 다른 서류를 보여주며 써 달라고 했다. 이때 비로소 이 친구가 파키스탄인으로 런던에 있는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 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비행기는 히드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고, 우리는 쏜살같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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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영 박물관(British Museum) 전경. 대충 훑어보기에는 그럭저럭 볼 만한 정도이지 압도할 만큼은 아니었다. |
파키스탄 트라우마
파키스탄 청년은 그냥 불안한 여행객이었을 게다. 서툰 영어에 20대 초반, 자기 나라보다 더 발전된 나라에서 공부하겠다고 나선 호기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선 젊은이였을 뿐이다. 처음 여행에 문화권이 달라 무례하게 보이는 실수를 연방 해댄 것이다. 그래도 같은 피부색의 좀 덜 부담스러운 남자들을 만나 이런저런 것을 물어볼 수 있었던 것을 알라신께 감사했을 게다.
먼 옛날 우리 선배들이 외국 땅을 처음 밟을 때, 그 파키스탄 청년처럼 저리 허둥대고 불안한 눈을 끔벅거렸을 거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두려움, 그 어색함, 그리고 암담함까지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한 다음 날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을 지나 국회의사당의 빅벤(Big Ben)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템즈강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골목으로 우리를 유인하려 했던 수상한 사내를 따돌린 후였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이 아니었지? 그지?”
그랬다. 템즈강 건너편에서 만난 사내는 집시 풍이었다. 동양인 둘을 노린 거였다. 계속 저쪽으로 가면 좋은 곳이 있다며 말을 걸어 왔다. 싫다고 하자 자기 핸드폰을 쥐여주고 자신을 찍어 달라며 애처로운 눈빛을 짓기까지 했다. 그때 파키스탄 청년이 트라우마로 떠오르지 않았다면 따라갔을 거다.
“덕분에 우린 괜찮았는데, 파키스탄인도 괜찮을까?”
모르겠다. 서툰 영어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 자신이 공부하기로 한 대학이 있는지, 여기저기 쭈뼛거리며 두리번거릴지… 정말 모르겠다. 상냥한 목소리로 알려주겠다는 뾰족한 코의 집시 사내를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글쎄 모르겠다. 내가 너무 파키스탄인을 무시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 역시 우리처럼 지혜롭게 잘 대처할 거라 생각한다. 이 영국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을 모두 배워, 꽉 채워 자기 나라로 돌아갈 거라 믿는다. 우리에겐 트라우마였지만 그는 그 나라 파키스탄에서는 뽑히고 뽑힌 지혜로운 청년일 테니 말이다.
“영국놈들 참 대단해”
영국의 박물관은 공짜다.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은 물론, 어느 박물관이든 그냥 들어간다. 영국은 심심한 나라다. 유럽인들에게 더욱 그렇다. 딱히 맛난 음식도 없고, 특색 있는 거라 해야 별것 없다. 내세울 것이 없으니 박물관이라도 공짜여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내심 중얼거렸다. 부아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야 관광객들이라도 끌어들이지.”
대영박물관 1층 로비를 걸으면서였다. 단단히 심통이 난 것은 2층에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데모를 하기 때문에 통제한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만 반복했다. 2층 한구석에 있는 한국관, 중국관 등은 아예 디뎌 보지도 못한 거였다. 기실 거기에 있는 한국 유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고, 대영박물관 중국관에서 볼 것보다 더 엄청난 것들은 이미 중국에서 수차례 본 터였다. 새로울 것이 없지만 난 유물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유물이 들려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셈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 박제가 되었는지, 그들의 사연을 풀어낼 생각이었는데, 그걸 가로막은 거였다.
“하루 종일 다 돌아다녀도 모두 못 본다는 것은 설레발이었어.”
어쨌든 대충 훑어보기에는 그럭저럭 볼 만한 정도이지 압도할 만큼은 아니었다. 알렉산더 특별전은 특별전이기에 입장료를 받는다는 말에 더 엇나갔다.
“세상에! 벽을 다 뜯어 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흉악한 놈들이여….”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시리아 유적들을 제대로 보려면 대영박물관에 가야 하는 이유가 그거였다. 정말 이런 것을 뜯어 올 생각을 한 것이 문화에 대한 높은 안목이 있어선지는 모르지만 도둑질이란 사실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들 말마따나 그대로 두면 모두 훼손될 세계 인류 유산을 제대로 잘 보존하려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여간 이런 것까지 뜯어다가 세워 놓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영국놈들, 참 대단해.”
옥스퍼드에서 옛날을 숨 쉬고 전통을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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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스퍼드 거리. 상가·주택이 대학 캠퍼스 중간중간에 들어서 있다. |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옥스퍼드(Oxford)로 향했다. 옥스퍼드는 대학도시다. 여러 대학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상가와 주거 건물이 들어선 형태이다. 우리처럼 대학 캠퍼스가 구분된 형태를 생각하면 안 된다. 런던 빅토리아 역(Victoria Coach Station)에서 2층버스를 탔다. 차가 우리와 반대인 왼쪽으로 가는 것은 낯설었지만 버스 2층 맨 앞에 앉아 주변 경관을 보는 것은 괜찮았다. 버스엔 와이파이도 장착되어 있어 스마트폰을 맘껏 이용할 수 있었고, 살짝 더운 정도의 여름 날씨도 우리 여름 같지 않아 나쁘지 않았다.
옥스퍼드에 내리자 때마침 장터가 열렸다. 신기하게 생긴 과일들과 빵과 채소, 청바지, 치마, 속옷, 간단한 생활용품에서 책을 비롯해 골동품처럼 보이는 항아리들까지 볼 거리가 풍성했다. 골목에 있는 ‘코코넛(Coconut)’이란 카페에 들어갔다. 500mL 생수는 1.2파운드(약 2000원)인데 콜라 캔은 1파운드(약 1800원)였다. 대부분의 유럽에서 물보다 콜라가 더 싼 것은 알았지만, 막상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린 커피와 홍차를 마셨다. 가격은 우리나라 커피전문점과 비슷한 정도였지만, 좋은 날씨에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한가하게 마시는 커피 맛은 더 비싸더라도 먹을 만했다.
이렇게 조금 풀어진 마음이 다시 배배 꼬이게 된 것은 애슈몰린 박물관(Ashmolean Museum)에 들어서서였다.
홉뜬 눈으로 다가와 ‘플래시를 터트리지 마시오’라고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애당초 플래시를 터뜨리지도 않았다. 그냥 사진기를 들고 있는 동양인을 보자, 마구 터뜨릴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경고한 거였다. 아무튼 그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배낭을 뒤로 메지 마시오’라며 앞으로 배낭을 메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갓난아이를 안은 것처럼 엉거주춤한 꼴이 된 것도 우습지만, 배낭 멘 다른 관광객들에겐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보다도 볼 것이 없는 데다 새로울 것도 없는 것들이어서 대강 둘러보고 나왔다.
평생 영국에 빈정상할 것 같던 기분이 완전히 날아간 것은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 들어가서였다.
크라이스트 처치는 1532년 헨리 8세(Henry VIII)가 설립한 대학이면서 성당이라는 점보다는, 영화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학교 장면을 찍은 곳으로 더 유명했다. 특히 영화 속 호그와트 학생들이 모두 모여 풍성한 만찬을 즐기는 바로 그 만찬장이 크라이스트 처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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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이스트 처치 내부. 영화 <해리포터>에서 본 것과 똑같이 높은 천장과 널따란 홀이 펼쳐져 있었다. 삐걱 소리를 질러댈 것 같은 나무 의자와 책상, 촛대와 장식품 모두 똑같았다. |
영국이 영국인 이유
정말 무슨 액이 낀 것인지, 크라이스트 처치의 바로 그 만찬장 앞에서 다시 길이 막혔다. 올라가는 계단 아래 팻말 하나 세워 놓고 안내인이 어슬렁거렸다.
‘설마 내가 온다는 걸 영국이 알고 있던 건 아니겠지?’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하며 안내인에게 입장이 안되는 이유를 물었다. 회의 때문에 오후 2시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거기서 회의를 한다는 건지, 높은 양반들이 회의하러 가기 전에 먼저 들르라고 통제를 한다는 건지, 더 물어야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그냥 돌아서서 나왔다.
다행히 한여름 영국 날씨는 우리 가을 날씨 같았다. 따스한 햇살이 맘 풀라며 피부를 보듬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꽃들도 눈에 고왔다. 그렇게 햇살과 꽃들 사이에서 새들과 시간을 보내다 2시 조금 넘어 그 만찬장을 도로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난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대영박물관에서부터 내내 틀어진 심보가 얼마나 옹졸했는지, 대강 만만하게 보고 코웃음을 친 것이 얼마나 얼간이 같은 것이었는지, 이미 지는 해가 아니냐며 눈 아래로 깔아본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날 크라이스트 처치 만찬장 안에는 영국이 영국인 이유가 있었다.
영화에서 본 것과 똑같은, 높은 천장과 널따란 홀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액자와 그 그림, 삐걱 소리를 질러댈 것 같은 나무 의자와 책상, 촛대와 장식품 모두 똑같았다. 사실 그건 예상한 거였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짐작한 터였다. 내가 벼락이 친 것처럼 놀란 것은 다른 것 때문이었다. 그 만찬장에 있어서는 안 될, 아니 있을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라면 절대로 있게 하지 않을 것이 벽 한쪽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그건 커피머신이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는 익힌 고기와 채소 볶은 냄새와 함께 그날 그 만찬장에는 커피머신이 놓여 있었다.
‘정말 여기서….’
그들은 정말 여기서 2시까지 회의를 했던 거였다. 그 옛날 그들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앉아 식사를 했던 거였다. 조상들이 먹던 음식과는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앉던 그 의자, 그들이 사용하던 그 식탁, 그들이 생각을 정리하며 바라보던 그 그림은 꼭 같았다. 그들의 진지한 얼굴을 비춰주던 촛불 사이에서 그들을 굽어보던 천장까지 그대로 둔 채, 바로 여기에 앉아 그 옛날 그들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중요한 것을 논의하고 결정하고 즐겁게 음식을 나눴던 것이다.
고이고이 모셔 두면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된다?
내 충격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이들은 정말 옛날을, 문화를, 전통을, 있는 그대로 먹고 마시고 숨 쉬며 새로운 그들의 사연을 만들어 가고 있는 거였다. 박제된 과거, 만들어진 옛날이 아니었다. 옛것이란 구분조차 무의미한, 있는 그대로의 삶, 생활로 이어진 그들의 전통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거였다.
뒤에서 미는 관광객들이 아니었다면 난 충격에서 더 오래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였다. 크라이스트 처치의 만찬장을 나오며 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경복궁 근정전 안에서 뱃놀이를 하고 연회를 베풀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아니, 하면 그것을 실행할 수는 있을까. 문화재관리청이 가만히 있을까. 허가해 줘도 문화재를 함부로 다룬다며 여기저기서 삿대질이 쏟아지진 않을까. 갑론을박이 주먹 쥐고 튀어나와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하게 두들겨 패대지는 않을까.
길이 다르고 격이 달랐다. 고이고이 모셔 두면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된다는 생각과, 사용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전통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크라이스트 처치의 충격은 비로소 영국의 영국다움을 놓치지 않고 보게 만들었다. 이어진 다른 박물관에서 전시된 유물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했다. 구석기 시대 돌도끼, 신석기 시대 화살촉 옆에 아무나 만질 수 있도록 투석기 원리를 설명한 장치가 놓여 있는 것도 놓치지 않았고, 실제로 핑핑 날려 볼 수 있는 석궁도 눈에 쏙 들어왔다. 나는 그것들을 주무르고 만지고 당기고 쏘아 보았다. 플래시를 지적하고 배낭을 메라고 했던 안내인들이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지그시 지었다. 그 미소는 석궁을 만지던 손이 눈앞에 나란히 놓인, 시대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돌도끼를 만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바로 그런 미소였다.
비로소 《해리포터》를 쓴 조앤 K. 롤링이 영국인이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죽었다 깨도 다른 나라에서는 그 상상력이 나올 수 없는 거였다. 《반지의 제왕》도 《나니아 연대기》도 《황금나침반》도 영국이니까, 옥스퍼드니까 나올 수 있었던 거였다.
이젠 더 이상 예사롭지 않았다. 버킹엄 궁전 앞에서 날마다 퍼레이드를 벌이는 기마경찰들도, 말들이 싸 놓은 똥들이 즐비한 도로 바로 옆 풀밭에 누워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도, 좁은 2층집을 오가며 홍차를 홀짝이는 사람들까지, 모두 예사롭게 보이질 않았다.
왜냐하면 크라이스트 처치에서는 오늘도 옛날을 먹으며 전통을 마시는 만찬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또 다시 새로운 그들의 삶과 사연과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게 분명하다.
테르미니와 콜로세움에서 야누스의 두 얼굴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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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코폴라에서 내려다본 로마의 광경. |
로마의 공기는 끝내줬다. 누구는 로마가 너무 더워 고생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는데, 우리가 있는 동안은 여름철이지만 쾌적했다. 선글라스 끼고 나서면 둘러보기에 딱 적당한 날씨였다.
이런 마음은 로마에 도착한 둘째 날 아침, 리치몬드 호텔 옥상 노천카페에 한가롭게 앉아 각종 과일에 진한 치즈를,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보드랍기 그지없는 빵에 넣어 실컷 먹고 난 후 얘기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식탁 주위에 날아와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먹으려고 종종거리는 참새들의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콜로세움을 바라볼 때 그렇단 얘기다. 그 전날은 완전 반대였다. 엉망진창이었다.
로마 테르미니 기차역에 도착한 것은 어둑한 저녁이었다. 영국에서의 흥분이 푹 꺼진 이유는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역무원 때문에도 그랬지만 바로 그것, 저녁 늦은 시간에 로마에 도착한 때문이었다. 이젠 아무리 깜깜한 밤이라 해도 용산역 주변 지린내 풍기는 어둑하고 허름한 골목을 찾기 힘들지만, 로마는 아직 그랬다. 맥주병을 들고 흔들거리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이방인을 바라보는 흑인의 하얀 눈알이 어둠 속에 번뜩이는 것도 주눅들 만했다. 벌겋고 퍼런 래커로 기기묘묘한 그라피티를 그려 놓은 벽에 검정 래커로 거칠게 암호마냥 덧칠한 표지는 당장이라도 갱들이 뛰어나와 총질을 해댈 것처럼 기괴해 보였다. 모두 다 어두웠기에 더 그랬다.
무엇보다 맥이 빠진 건 코를 찌르는 지린내를 따라 민박집 주소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내내 엄청나게 크기만 한 건물들 외엔 이렇다 할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로마의 야경 때문이었다. 거리 이정표가 아니라 오줌 썩는 냄새를 따라가 민박집을 찾은 것이 분명하다는 게 의심이 들 정도의 집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고 들어간 집 안은 더 가관이었다. 엄청난 높이의 좁은 홀에 《대부》에 나오는, 그 을씨년스런 닭장처럼 생긴 엘리베이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버튼이 눌리고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엘리베이터지, 기본 프레임에 철조망으로 벽을 한 그건 꼭 공사판에서 시멘트와 벽돌 실어 나르는 리프트, 바로 그거였다.
공동화장실에, 공동목욕탕, 비좁은 복도에 에어컨 없는 방, 원래 맛이 무엇이었을지 가늠이 안 되는 반찬들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셌다. 둘이 한 방에 같이 묵는데도 민박이 120유로(약 18만원)라니, 완전히 사기당하는 기분이었다.
일단 씻었지만, 씻어도 후텁지근한 방안 공기에 다시 땀이 배어 나왔다. 열어젖힌 창밖에선 누군가 악쓰는 소리와 함께 지린내가 스며들었다. 저녁 9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로마의 첫인상은 오줌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무서운 표정의 흑인들, 엄청난 건물 크기, 살인적 물가 정도로 끝날 거였다. ‘도대체 여길 왜 온 거야?’ 하는 퉁명스러움이 대번에 바뀐 것은 달랑 지도 한 장 들고 나선 밤길 덕분이었다.
로마제국 시절에 깔았던 돌의 4분의 1 정도 되는 돌멩이들로 깐 도로는 반질반질 가로등에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든 로마의 좋은 점을 찾으려고 애쓰던 마음에, 연말마다 연례행사처럼 도로를 갈아엎는 서울 보도블록보다는 백배 낫다며 민 박사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가로등 비치는 골목을 따라 걷던 우리는 곧 억지로 지어낸 흥분으로 분위기를 띄울 필요가 없어졌다.
콜로세움(Colosseum)의 놀랄 만한 야경이 눈앞에 떡 나타나는 순간, 진짜 로마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유대를 멸망시킨 후 그들을 끌고 와 만들게 하고는, 그 안에서 사자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어 죽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사진으로 숱하게 봐 왔지만 달랐다. 육중한 크기 때문은 아니었다. 엄청난 조형물이라면 중국에서 눈이 아프도록 보았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 뭔가가 거기 있었다. 뭔지 모를 마력이 거기에 잠들어 있었다. 홀린 듯 콜로세움을 빙글빙글 돌다가 그 옆을 지나가는 도로 바로 밑으로 푹 꺼진 듯한 폐허 유적에 눈이 닿았다. 지하도시처럼 보이는 것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도로 밑에 숨 쉬고 있었다. 그곳이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는 것을 그 다음 날 알게 되었다.
“로마의 중심은 바로 여기야!”
우리는 즉시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근처 호텔들로 무작정 들어갔다. 그리고 방값을 흥정했다. 세 군데 만에 트윈 룸을 구했다. 로마 시내 별 4개짜리 호텔인데, 겨우 140유로(약 20만원)였다. 코앞 왼쪽으로 콜로세움, 오른쪽으로 포로 로마노가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로마의 살인적 물가를 생각하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판테온에서 흘러가는 향연에 휩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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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테온 신전 앞. 어스름해지는 저녁이 되자, 판테온 앞에 정복 입은 경찰들이 하나둘 모여 멋진 연주를 했다. |
로마 시내는 그 자체가 유적이다. 저쯤이면 있겠지 하면 꼭 광장이 있고 거기엔 꼭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어김없이 한가하게 앉아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있을 것은 다 있을 것 같지만 정작 없어서 불편한 것은 수퍼마켓이었다. 테르미니 역에 두 군데 있고 바티칸으로 향해 가는 길에서 하나 본 것 말고는 못 봤다. 로마의 물가는 살인적이어서 수퍼마켓을 만나면 무조건 생수를 사서 배낭에 넣고 다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훨씬 비싼 가격에 생수를 파는 노점상에서 사야 한다. 그도 아니면 그냥 길가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고 그 물을 받아 마시면 된다. 설마 누가 길가에 있는 수도에서 물을 그냥 마실까 했는데, 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마셨다. 우린 조금 망설였지만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성이 스스럼없이 입을 대고 마시는 것을 본 이후로 주저하지 않고 따라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저녁에 배가 살살 아팠다. 아니면 본젤라토 아이스크림이 끝내준다기에 물어물어 찾아가서 한참을 줄 섰다가 먹은 아이스크림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맛은 끝내줬지만 콘 하나에 4.5유로(약 7000원) 하는 엄청난 가격 때문에 충격받았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며칠간 발가락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히도록 로마를 돌아다녔기에, 성 베드로 성당 뒤쪽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지상의 맛이 아닌 라자냐를 맛볼 수 있었고, 스페인 광장에서 결혼한 신랑신부를 향해 박수쳐 줄 수 있었다. 조그만 광장 귀퉁이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금발 미녀의 매력적인 눈빛과 분수 앞에서 홀로 노래를 부르던 여가수의 아련히 흐느끼는 듯한 선율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San Pietro Basilica)과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의 찬란한 미술품들과 조각상, 태피스트리, 거대한 양탄자, 이집트에서 온 미라 같은 엄청난 것들도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부족했다. 엄청난 조각상과 미술품들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시스티나 성당 가이드들이 각국 언어로 사람들을 주르륵 몰고 다니며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목청껏 열심히 설명해도 마찬가지였다. 빠진 것은 그 그림, 그 조각, 그 예술품을 만들던 손길, 그들의 숨결과 온기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박물관 안에 갇힌 신세였다. 더 이상 화장으로 감출 수 없는 늙은 창녀의 쇼윈도 안에서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는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져서였다.
티투스는 자기 개선문 아래 관광객들이 수다를 떨지 상상이나 했을까?
조금 갑갑한 마음은 성 베드로 성당의 돔 천장(cupola)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로마 시내 전경을 바라볼 때부터 서서히 풀려 갔다. 포로 로마노의 폐허 속을 거닐며 공화정 당시 로마를 상상하는 것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티투스는 먼 훗날 자기 개선문 아래에 관광객들이 모여 사진을 찍으며 수다를 떨 것인지 상상이나 해 봤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슬쩍 입가가 올라가기도 했다. 카이사르를 화장했다는 화장터에 아직도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의 꽃들이 매일 쌓이는 것도 흥미로웠고,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장대한 콜로세움 안에서 벅찬 감격에 사로잡혔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핥는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 트레비 분수에 다이빙해 볼까 하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로마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었다.
거대한 건물들과 그 앞 광장에 매력적으로 뻗은 오벨리스크는 옛날을 보여주며 그 옛날을 말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광장에 모여 음식을 먹으면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거였다. 어스름해지는 저녁 판테온 앞에 하나둘씩 모인 정복 입은 경찰들이 하나씩 악기를 꺼내 들고 오케스트라가 되어 펼쳐 보여주는 황홀한 심포니는 나만 듣는 것이 아니라, 건물도 듣고 광장도 듣고 오벨리스크도 듣는 거였다. 경찰 오케스트라 앞을 꼭 폴리스라인처럼 빙 둘러싼 남녀들이 피자 한 조각에 음료를 마시며 선율에 따라 고갯짓을 하고, 달콤한 기운에 취해 남자친구 어깨에 고개를 기댄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기는 것이 꼭 나만은 아니란 말이다. 광장 노천카페에 앉아 빵을 손으로 뜯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노부부도 그 연주를, 그 그림을 즐기는 거였다.
곡이 끝날 때마다 따뜻한 답례의 호응이 우리에게서 나왔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그날 밤 경찰 오케스트라는 오페라하우스에 선 세계적인 성악가, 연주가들을 향한 우레 같은 박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더 진지한 갈채를 받으며 자신들의 악기를 챙기고 다시 그들의 위치로 돌아갔다. 우리들도 그렇게 흩어졌다. 하나씩 가슴에 흥분과 감동을 담은 채로.
그렇게 로마에는 움직이는 조각상, 살아 있는 미술품들이 매일 밤마다 만들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그려졌다. 오랜 세월 지켜본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이 모든 예술품들을 보고 듣고 간직했다가 다시 멋 훗날 로마를 찾는 사람들에게 말해 줄 거다.
‘여기 우리의 웃음과 슬픔과 삶이 있다’고.
뮌스터 자전거 길에서 희망을 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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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뮌스터의 한 교회. 1536년 재세례파 우두머리를 죽인, 새장처럼 생긴 철장이 달린 교회. |
독일은 심심한 나라다. 꼭 봐야 한다고 수선을 피우지만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은 로마에서 눈만 돌리면 보던 개선문보다 못했고, 쾰른 대성당(Cologne Cathedral)도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과 로마의 산 지오반니 성당(San Giovanni in Laterano)을 본 내 눈엔 심심해 보였다. 아무튼 내겐 그랬다.
어쩌면 독일은 새벽부터 빵을 구워 내는 빵집과 가장인 아버지, 남편들이 그 빵집 밖에 줄을 서서 갓 구운 빵을 사 가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향긋한 빵을 잘 잘라 내고 진한 버터를 발라 치즈와 함께 뒷맛이 약간 신 달마이어(Dallmayr) 커피를 마시는 아침을 준비하는 남편들의 마음에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돼 이가 빠지고 금 간 그릇을 전통이라 여기며 계속 사용하고, 물과 전기는 물론 매사에 절약 습관 속에 독일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독일다운 것을 난 기차역에서 보았다.
요일마다 다르고, 타는 위치에 따라 또 다르고, 가다가 열차가 반으로 분리되어 각기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하는 등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고속열차(ICE)와 전철(S-bahn)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지만 목숨처럼 시간과 노선을 지키는 모습, 거기에 독일다움이 있는 듯했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집요하게 묻는 관광객에게 끝까지 웃으며 친절하게 상담해 주고 그 내역까지 프린트로 뽑아 주기까지 하는 안내소 직원들의 미소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모든 역에는 개찰구가 없었다. 그냥 걸어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가끔 차장이 표를 검사하기도 한다지만 우린 한 번도 차장을 만나지 못했다. 무임승차도 많겠다는 내 말에 독일에서 오래 살았던 민 박사가 싱끗 웃으며 말했다.
“여긴 신용사회잖아.”
부끄러운 감정이 신선한 충격과 함께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시작이었다. 진짜는 뮌스터에서였다.
뮌스터는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을 체결한 곳이고 ‘재세례파 운동’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 시청사와 재세례파 우두머리 3인을 가둬 죽인, 새장처럼 생긴 철장이 아직도 매달려 있는 교회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자전거였다.
“뮌스터 인구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아.”
이쪽에 한 대, 저쪽에 한 대. 그렇게 여기저기 자전거를 두고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차도와 함께 자전거 도로가 있고 신호등도 자전거용이 따로 있었다.
‘우리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인의 것이다’
자전거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은 뮌스터 대학에 있는 신약성서 연구소(The Institute for New Testament Textual Research)를 방문했을 때 놀람으로 바뀌었다. 이 연구소는 신약성서 사본 연구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곳이다. 고대 그리스어 사본, 파피루스 사본을 비롯해 루터 번역본 등 온갖 성서 사본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놀람은 그 사본들을 너무나 쉽게 열람시켜 주고 또 복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 박사가 그쪽의 권위자이고 이곳에서 공부했기에 안면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나 쉽게 수천 년 전의 자료를 그냥 복사해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우리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인의 것이다.’
그들이 소장하고 집적하고 모아 놓았을 뿐이란 생각이었다. 누구든 연구하겠다면, 보고 싶고 알고 싶다면, 보고 알고 연구하도록 해 주는 것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그런 생각이었다. 그들의 자세에 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도서관들을 돌아다니며 20세기 초 필사본 소설을 복사하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었던 경험이 절로 겹쳐졌다.
독일에 대한 진정한 놀람과 충격은 우리 KBS와 독일 방송에서 몇 번 다큐멘터리로 다루었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의 아버지 김동욱 선생을 뵈었을 때 정점을 찍었다.
“혹시 계실까?”
뮌스터 시내 한 집의 초인종을 누르며, 민 박사가 그렇게 말했다. 계획에 없던 귀중한 만남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신학을 공부하러 독일에 건너온 가난한 유학생 부부에겐 어린 세 딸이 있었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다시 한 번 쓰러지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재활했고, 건강해졌지만 불현듯 다시 쓰러졌다. 건장한 몸에 강인한 체력이 있었지만 느닷없는 뇌졸중이 그렇게 네 번 겹쳤다. 가장의 병이 가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비단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극심할 수밖에 없다. 첫째 딸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었다. 주변에서 격려가 이어졌고, 귀한 바이올린을 빌려주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그 딸은 바이올린의 재능을 꽃 피웠고, 독일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독일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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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스터에 있는 200년 전통의 브로이 맥주집 앞 골목. |
김 선생은 내가 뵈었을 때도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운동하고 계셨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네 번씩이나 쓰러지고 걷지 못할 거다. 또 보통 요즘 애들 같았다면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 뮌스터에 마지막 남은 200년 된 브로이 맥주를 파는 식당으로 가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정말 저럴 수 있었을까.’
답이 쉽지 않다. 뭐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있다. 독일이니까 가능했다는 것, 바로 그것 말이다. 그건 외국에서 온 유학생에게까지 의료혜택을 베푸는 진정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복지 정책을 목표로 하는 독일 정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를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배려하고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독일 사회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것을 거저 주며 ‘네가 열심히 연주한다면 그 바이올린이 더 영광스러울 거야’라며 웃어 주는 독일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브로이 맥주를 앞에 놓고 부끄러워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쉽게 나라 탓, 사회 탓 하는 내 심보가 부끄러워서였다.
‘여긴 신용사회잖아!’
독일이 신용사회인 것은 사회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 사는 내가 신용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200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온 기법으로 빚었다는 브로이 맥주의 황금색이 깊어 가는 뮌스터의 밤공기 속에서 찬란히 빛났다.
레닌을 티무르로 바꾼 나라에서 눈물을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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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슈켄트에 위치한 아무르 티무르 무덤. 14세기에서 15세기에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아무르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전쟁영웅이다. |
경유할 때는 상관없었지만, 우즈베키스탄에 입국할 때는 상당히 번거로웠다. 입국심사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적어 내야 했다. 그리고 출국할 때 다시 가진 돈의 액수를 적게 했다. 외화 반출을 막으려는 정책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술한 검색대만큼이나 나라가 헐거워 보였다. 공항요원들은 다른 공항에서는 아무 문제 없던 라이터만 뺏어 수북하게 한쪽에 쌓아 놓았다. 내일이면 그것들 대부분이 지하시장에 풀려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공항을 나섰다.
강렬한 빛에 건조해 목구멍까지 타들어 간다는 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날씨였다. 찜통이라면 습기라도 있다. 후텁지근한 것이 아니라 아예 온 몸에서 그냥 쑥 에너지가 뽑혀 나가는 것 같은 더위였다.
“지금은 그래도 괜찮은 거야. 40도까지 올라가기도 해.”
타슈켄트에서 만난 친구는 아무 것도 아니란 듯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반겨 주었다.
차는 프린스였다. 뒤쪽 창문은 올라가질 않았고 에어컨도 나오질 않았다. 미터기는 85만km에서 멈춰선 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4년째 더 타고 있다고 했다. 한국 차가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알았다.
“여긴 자동차값이 집값과 맞먹어.”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70%는 대우차였다. 티코 택시도 있었다.
“대우 현지공장이 있거든.”
그래도 관세를 물고라도 수입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현지 조립차는 불량률이 높았다. 사는 순간 고쳐야 하는데, 고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뒷유리로 비가 샌다니까.”
손으로 억지로 잡아 내린 뒷문으로 더운 바람이 미친 듯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뜨거운 광풍이지만 땀은 나지 않았다. 피부까지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메말랐다.
대우 ‘프린스’ 자동차, ‘티코’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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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다니엘의 무덤. 유대인 다니엘의 무덤이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이유는 뭘까. |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여기로 성지순례도 와.”
내부 장식도 소략하고 단출한 것이 유럽과 비길 순 없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만난 성당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가톨릭이 지배적인 베네치아에서 개신교 교회를 우연히 만났던 것보다 더 신기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한국인 식당을 찾았다. 어디 가나 눈에 띄는 태극문양에 한글로 쓰인 글씨가 키릴문자들 사이에서 반가웠다. 친구는 차를 세우고는 뒤트렁크에서 뭔가가 담긴 검정 비닐을 꺼냈다. 밥을 먹고 계산할 때 그게 다 돈이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된장찌개 3인분을 먹고 뭉칫돈 두 묶음을 내는 게 아닌가.
“인플레 때문에 통화가치가 장난이 아니야. 이게 액면가가 가장 높은 지폐인데도 그래.”
우즈베키스탄을 떠날 때까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바로 돈을 다발로 들고 다니며 계산하는 바로 그거였다. 수퍼에 가서 사탕 하나를 사고도 지폐를 몇 장이나 냈다. 거슬러 받는 다른 지폐와 동전이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다음 날 다니엘의 무덤과 다윗 왕이 승천한 동굴을 보려고 사마르칸트에 갈 때는 에어컨이 잘 나오는 차를 대절했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차로도 4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황량한 벌판에 아스팔트 도로만 있는 곳을 시속 120km로 달리는 총알차를 탔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이 운전사 양반은 과속은 물론 끼어들기와 경적 울리기를 떡먹듯이 했다. 중간에 쉴 때 내려서 보니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의외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둘러볼 곳을 보고 하루 만에 돌아와 다시 다른 일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우리를 경찰이 붙든 적이 있는데 그땐 과속이 아니었다.
“적당히 뜯어서 챙기지 않으면 집에 식구들이 죽어 나가.”
운전사와 경찰이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차 안에서 바라보던 친구가 우리에게 한 말이었다.
경찰이 경찰 봉급으로는 살 수 없고, 회사원이 회사에서 주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는 나라였다. 적당히 뒤로, 밑으로 챙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꼭 내가 어렸을 적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함과 아련함이 뒤섞였다.
경찰과 헤어져 운전석에 다시 앉은 운전사는 씩 웃고는 다시 총알처럼 달렸다. 그의 웃음이 오랫동안 가슴에 사무쳤다.
대통령 퇴근길 도로는 쥐새끼 하나 없이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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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르 티무르의 기마상. |
“지금은 저렇지만 내가 처음 왔을 때는 레닌 동상이었어.”
친구는 우즈베키스탄에 들어온 순서로 치면 네 번째 한국인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옛 소비에트 연방이었는데 연방이 해체되며 독립된 후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에 민족의 상징으로 아무르 티무르를 강조하면서 그 동상을 세운 것이다. 레닌이 서 있던 때에 비하면 자유로워졌을지 모르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저기 보이는 건물 있지. 아니, 아니. 손가락질하지 말고.”
전 KGB 건물이라고 했다. 물론 지금도 정보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쪽을 향해 사진을 찍는 것만 봐도 추적해서 찾아온다고 했다.
차를 다시 타고 대통령이 지나는 시내 중심 도로로 나갔다. 대통령이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직선 도로였다. 그때는 도로를 완전히 통제한다고 한다. 친구는 또 내가 사진기를 꺼내 들까봐 주의를 주었다.
“가로수 속에 감시카메라가 있어. 이 도로에서는 공연한 짓을 하면 안 돼.”
너무 과민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은 우즈베키스탄을 떠나던 날 저녁 완전히 날려 버렸다. 대통령 퇴근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말 그대로 도로는 쥐새끼 하나 없이 통제되었다. 다니는 사람은 물론 차도 없고 주차해 놓은 차도 없었다. 그 대통령 출퇴근 도로로 이어지는 주변 도로에는 정복 경관들이 하나씩 나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뒤로 물러나라 말했다. 잠시 후 경찰 오토바이 3대가 쏜살같이 내닫고 그 뒤로 검은색 방탄 지프 두 대가 내달리고 바로 이어 검정 벤츠 서너 대가 미친 듯이 달려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지프가 따라 달렸다.
세무조사 한다며 검은 스키 마스크를 쓰고 들이닥치는 나라
“어느 차에 탈지는 경호실장도 모른대. 물론 퇴근 시간도 제각각이고.”
그런데도 며칠 있는 동안 그걸 보다니 정말 행운이라고 친구가 말했다. 그게 행운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즈베키스탄의 음울한 치부를 본 것만은 맞았다.
공항으로 향하는 친구의 차 안에서 나와 민 박사는 말이 없었다.
국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국이 불가능한 나라, 3일 넘게 다른 곳에 가면 반드시 주거등록을 해야 하는 나라, 고용창출을 위해 달리는 차창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고, 그것을 주워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 절대 다수인 나라,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팔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나라, 세무조사 한다며 검은 스키 마스크를 쓰고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들이닥치는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바로 그 나라에 친구만 두고 우리만 쏙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도대체 하고 많은 나라 중에 하필 이곳에 왜 온 것인지, 군대를 마치자마자 이름도 생소했을 이 나라에 무작정 날아온 것은 무슨 배짱인지, 지금과 달리 그때는 적성국가라며 따로 신고까지 하고 사상검증까지 받아야 올 수 있는 곳이었는데… 도대체 이 땅에서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인지, 그것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았다. 구태여 물을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한국인이기에, 용기 있는 진취적인 기백이 치솟는 한국인이기에 이 척박하고 살벌한 땅에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랬을 게다.
뒤 창문이 내려오지 않는 ‘프린스’가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말없이 내려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 짊어졌다.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두워진 공항에서 친구와 마지막으로 껴안았다. 격한 감정이 나도 모르게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내 마음을 아는지 친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그 나라를 떠났다.
인천공항이 가까워졌다는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주마등처럼 많은 이야기가 눈앞을 스쳐가며 명멸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한국이, 우리나라가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참 좋은 곳이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