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晉錫
⊙ 1939년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英런던대 언론학 박사.
⊙ 관훈클럽 사무국장,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同 사회과학대학장, 정책과학대학원장 역임.
⊙ 1939년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英런던대 언론학 박사.
⊙ 관훈클럽 사무국장,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同 사회과학대학장, 정책과학대학원장 역임.
<임페리얼 크루즈>(The Imperial Cruise)는 작년 1월에 출간된 후 아마존 역사부문에서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100년 전 미국 외교정책의 숨은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파헤친 문제작이면서 흥미로운 서술방식으로 독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내용 가운데는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1909년 재임)가 펼쳤던 잘못된 제국주의 외교정책의 결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망국(亡國)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 가장 주목을 끄는 핵심에 해당한다. 금년이 한일(韓日)강제병합 100주년의 시점이기에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니고 읽을 수 있다. 1세기 전의 역사를 오늘의 관점에서 되새겨보고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시점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원서(原書) 출간 1년이 지나지 않은 때에 한국 독자들이 번역판을 접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을 종결짓는 포츠머스조약을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첫 번째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인물이면서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저자 제임스 브래들리는 루스벨트에 관한 기존의 통설(通說)을 완전히 뒤집는 해석을 내린다. 루스벨트는 약소국(弱小國)을 향해 미국의 힘을 휘두른 인물이며 “한마디로 몽둥이 철학에 투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브래들리는 루스벨트가 추구했던 정책은 태평양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 중국 공산혁명,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긴장사태들을 일으킨 불씨가 되었다고 신랄하게 지적한다.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을 배신하고 일본의 아시아 대륙에 대한 영토 확장 계획을 도와주었던 결과로 인해 수십 년 뒤 또 다른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 제32대: 1933∼1945 재임)이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프트의 아시아순방사절단
브래들리가 책을 쓴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군의 진주만 침공으로 시작된 끔찍한 태평양전쟁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기원을 따라가 보려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 80여 명이 1905년 7월 5일 샌프란시스코항(港)을 출발하던 날에서 시작된다. 사절단은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고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을 거치는 긴 여정이었다. 미국이 태평양 지역의 패권(覇權)을 장악하고 세계의 절대강자로 부상하도록 만들기 위한 원정대(遠征隊)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후임으로 제27대 대통령이 되는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를 비롯하여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과 다수의 군인 및 민간 관료들이 배에 타고 있었으며 기자들도 동승했다. 일행 가운데는 루스벨트의 매력적인 21세의 딸 앨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앨리스 공주’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사절단의 꽃이었다.
대통령 루스벨트와 딸 앨리스, 그리고 여러 등장인물의 경력과 이념을 서술하는 스토리 전개방식은 역사를 소설처럼 흥미롭게 쫓아가도록 만든다. 복잡하고도 무거운 주제에 작은 에피소드들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파헤치는 수법도 읽는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하와이, 일본, 필리핀, 홍콩, 상하이를 거쳐 서울에 오는 여정의 역사에 담겨 있는 미국의 만행(蠻行)도 냉정한 태도로 들추어낸다. 이 ‘제국주의 순방’을 통해 루스벨트는 앞으로 수세대에 걸쳐 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중대한 정책들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의 백인(白人)우월주의 세계관과 포츠머스조약이 상징하는 잘못된 외교정책은 1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후대(後代)에 큰 재앙을 몰고 왔다는 사실을 가차없이 드러낸다. 사절단장 태프트의 임무는 태프트-가쓰라(桂) 비밀협약의 체결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도록 허용한 이 협약은 결국 일본의 한국강점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기여’하고 말았다.
태프트-가쓰라 조약
고종과 미국 거주 한국 교민들은 미국의 속셈을 까맣게 몰랐다. 사절단 일행이 첫 기착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던 7월 14일, 현지 거주 한국 교민들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할 것으로 믿고 일행을 뜨겁게 환영했다. 8000명의 하와이 거주 교민들은 루스벨트에게 한국의 독립유지를 도와달라는 청원서를 보내기로 하고 후에 초대(初代)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李承晩)과 윤병구(尹炳球) 목사를 대표로 선출했다.
태프트는 7월 15일 호놀룰루를 떠나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이틀 뒤에 태프트-가쓰라 비밀협약을 체결했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8월 4일 루스벨트를 찾아가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두 사람은 미국이 한국을 구해 줄 것으로 믿고 호소해 보았지만 루스벨트는 한국의 믿음을 배신했다.
루스벨트는 ‘무력(無力)한’ 나라들은 문명국의 합법적인 먹잇감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을 지닌 루스벨트와 태프트는 2인 1조 한팀이 되어 후대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릴 전쟁이 태평양에서 일어나도록 파란불을 켜 주었다. 하지만 포츠머스조약 체결로 루스벨트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고, 조약을 중재(仲裁)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는 영광을 차지한다. 한국인에게 민족적인 고통을 안겨준 데 대한 아이러니한 대가였다. 책의 저자는 이렇게 썼다.
“인종(人種)이론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지, 국제외교와 아시아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던 루스벨트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어두운 길을 따라 달리게 해 마침내 1941년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지 두 달 뒤 상하이에서 두 그룹으로 헤어졌다. 태프트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앨리스 일행은 베이징을 거쳐 9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요지의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된 날로부터 2주일 뒤였다. 일본은 한국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한반도 침략에 가속도를 붙였다. 두 달 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다.
국빈대접 받은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고종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밀(密)거래의 내막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앨리스를 국빈(國賓)으로 대접했다. 자신의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는 미국 대통령의 딸이 방문하는 곳에 한미(韓美) 두 나라 국기를 교차 게양하여 환영과 경의를 표하도록 정부 각 부처에 지시했다. 예식관(禮式官) 고희경(高羲敬)과 궁내부(宮內府) 참서관 남정규를 인천까지 보내 영접토록 하고 황제의 전용열차마저 제공했다. 앨리스가 서울에 도착하자 궁내부대신 이재극(李載克)이 정거장에 마중 나와 황실의 가마에 태워 숙소로 안내했다. 연도에는 서울 거주 외국인과 한국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튿날인 9월 20일 낮 12시 앨리스는 고종을 알현(謁見), 식사를 함께했고 미국 공사관의 만찬, 청량리의 홍릉과 남한산성을 관광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앨리스가 지나가는 길의 보수비용으로 국고(國庫) 2900원을 지출했다. 9월 29일 앨리스가 열차편으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떠날 때에는 특별열차를 제공했다. 그녀가 떠나는 날에는 각부(各部) 대신이 남대문 정거장에 나와 전송했다고 <황성신문>이 보도했다. 루스벨트의 무례한 딸 앨리스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것이다. 앨리스가 서울에 머물던 때인 9월 27일자 <황성신문>은 루스벨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외신(外信)을 실었다.
남의 탓만 할 수는 없다
대한제국의 멸망에 관해서는 한국인, 서양인, 일본인들이 쓴 여러 종류의 책이 있지만 이 책은 서술방법과 시각이 기존의 책들과는 다르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마지막 모습을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심정은 안타깝고도 허무하다.
책의 행간(行間)에서 읽어야 할 교훈은 대한제국의 멸망을 외세의 침략에만 그 원인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나라는 침략당하고 망한다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지배하던 100년 전이었다. 자신의 과오를 성찰(省察)하지 않고 침략자를 성토(聲討)하는 자세만으로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제국주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가감(加減) 없이 적용되는 국제사회의 논리다.
열강(列强) 세력의 농단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채 고종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 여러 나라를 향해 구원을 호소하는 밀서(密書)를 보내거나 밀사(密使)를 파견하는 방법으로 마지막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냉엄한 국제무대에서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긴 채 강제합병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대한제국은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장엄한 최후를 맞지도 않았고, 처절한 비장미(悲壯美)를 보여주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뼈아픈 교훈이다.⊙
내용 가운데는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1909년 재임)가 펼쳤던 잘못된 제국주의 외교정책의 결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망국(亡國)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 가장 주목을 끄는 핵심에 해당한다. 금년이 한일(韓日)강제병합 100주년의 시점이기에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니고 읽을 수 있다. 1세기 전의 역사를 오늘의 관점에서 되새겨보고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시점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원서(原書) 출간 1년이 지나지 않은 때에 한국 독자들이 번역판을 접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을 종결짓는 포츠머스조약을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첫 번째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인물이면서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저자 제임스 브래들리는 루스벨트에 관한 기존의 통설(通說)을 완전히 뒤집는 해석을 내린다. 루스벨트는 약소국(弱小國)을 향해 미국의 힘을 휘두른 인물이며 “한마디로 몽둥이 철학에 투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브래들리는 루스벨트가 추구했던 정책은 태평양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 중국 공산혁명,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긴장사태들을 일으킨 불씨가 되었다고 신랄하게 지적한다.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을 배신하고 일본의 아시아 대륙에 대한 영토 확장 계획을 도와주었던 결과로 인해 수십 년 뒤 또 다른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 제32대: 1933∼1945 재임)이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프트의 아시아순방사절단
브래들리가 책을 쓴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군의 진주만 침공으로 시작된 끔찍한 태평양전쟁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기원을 따라가 보려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 80여 명이 1905년 7월 5일 샌프란시스코항(港)을 출발하던 날에서 시작된다. 사절단은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고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을 거치는 긴 여정이었다. 미국이 태평양 지역의 패권(覇權)을 장악하고 세계의 절대강자로 부상하도록 만들기 위한 원정대(遠征隊)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후임으로 제27대 대통령이 되는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를 비롯하여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과 다수의 군인 및 민간 관료들이 배에 타고 있었으며 기자들도 동승했다. 일행 가운데는 루스벨트의 매력적인 21세의 딸 앨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앨리스 공주’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사절단의 꽃이었다.
대통령 루스벨트와 딸 앨리스, 그리고 여러 등장인물의 경력과 이념을 서술하는 스토리 전개방식은 역사를 소설처럼 흥미롭게 쫓아가도록 만든다. 복잡하고도 무거운 주제에 작은 에피소드들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파헤치는 수법도 읽는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하와이, 일본, 필리핀, 홍콩, 상하이를 거쳐 서울에 오는 여정의 역사에 담겨 있는 미국의 만행(蠻行)도 냉정한 태도로 들추어낸다. 이 ‘제국주의 순방’을 통해 루스벨트는 앞으로 수세대에 걸쳐 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중대한 정책들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의 백인(白人)우월주의 세계관과 포츠머스조약이 상징하는 잘못된 외교정책은 1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후대(後代)에 큰 재앙을 몰고 왔다는 사실을 가차없이 드러낸다. 사절단장 태프트의 임무는 태프트-가쓰라(桂) 비밀협약의 체결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도록 허용한 이 협약은 결국 일본의 한국강점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기여’하고 말았다.
태프트-가쓰라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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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어도어 루스벨트. |
태프트는 7월 15일 호놀룰루를 떠나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이틀 뒤에 태프트-가쓰라 비밀협약을 체결했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8월 4일 루스벨트를 찾아가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두 사람은 미국이 한국을 구해 줄 것으로 믿고 호소해 보았지만 루스벨트는 한국의 믿음을 배신했다.
루스벨트는 ‘무력(無力)한’ 나라들은 문명국의 합법적인 먹잇감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을 지닌 루스벨트와 태프트는 2인 1조 한팀이 되어 후대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릴 전쟁이 태평양에서 일어나도록 파란불을 켜 주었다. 하지만 포츠머스조약 체결로 루스벨트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고, 조약을 중재(仲裁)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는 영광을 차지한다. 한국인에게 민족적인 고통을 안겨준 데 대한 아이러니한 대가였다. 책의 저자는 이렇게 썼다.
“인종(人種)이론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지, 국제외교와 아시아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던 루스벨트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어두운 길을 따라 달리게 해 마침내 1941년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지 두 달 뒤 상하이에서 두 그룹으로 헤어졌다. 태프트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앨리스 일행은 베이징을 거쳐 9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요지의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된 날로부터 2주일 뒤였다. 일본은 한국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한반도 침략에 가속도를 붙였다. 두 달 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다.
국빈대접 받은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고종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밀(密)거래의 내막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앨리스를 국빈(國賓)으로 대접했다. 자신의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는 미국 대통령의 딸이 방문하는 곳에 한미(韓美) 두 나라 국기를 교차 게양하여 환영과 경의를 표하도록 정부 각 부처에 지시했다. 예식관(禮式官) 고희경(高羲敬)과 궁내부(宮內府) 참서관 남정규를 인천까지 보내 영접토록 하고 황제의 전용열차마저 제공했다. 앨리스가 서울에 도착하자 궁내부대신 이재극(李載克)이 정거장에 마중 나와 황실의 가마에 태워 숙소로 안내했다. 연도에는 서울 거주 외국인과 한국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튿날인 9월 20일 낮 12시 앨리스는 고종을 알현(謁見), 식사를 함께했고 미국 공사관의 만찬, 청량리의 홍릉과 남한산성을 관광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앨리스가 지나가는 길의 보수비용으로 국고(國庫) 2900원을 지출했다. 9월 29일 앨리스가 열차편으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떠날 때에는 특별열차를 제공했다. 그녀가 떠나는 날에는 각부(各部) 대신이 남대문 정거장에 나와 전송했다고 <황성신문>이 보도했다. 루스벨트의 무례한 딸 앨리스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것이다. 앨리스가 서울에 머물던 때인 9월 27일자 <황성신문>은 루스벨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외신(外信)을 실었다.
남의 탓만 할 수는 없다
대한제국의 멸망에 관해서는 한국인, 서양인, 일본인들이 쓴 여러 종류의 책이 있지만 이 책은 서술방법과 시각이 기존의 책들과는 다르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마지막 모습을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심정은 안타깝고도 허무하다.
책의 행간(行間)에서 읽어야 할 교훈은 대한제국의 멸망을 외세의 침략에만 그 원인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나라는 침략당하고 망한다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지배하던 100년 전이었다. 자신의 과오를 성찰(省察)하지 않고 침략자를 성토(聲討)하는 자세만으로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제국주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가감(加減) 없이 적용되는 국제사회의 논리다.
열강(列强) 세력의 농단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채 고종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 여러 나라를 향해 구원을 호소하는 밀서(密書)를 보내거나 밀사(密使)를 파견하는 방법으로 마지막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냉엄한 국제무대에서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긴 채 강제합병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대한제국은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장엄한 최후를 맞지도 않았고, 처절한 비장미(悲壯美)를 보여주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뼈아픈 교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