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소 완전히 망가져… 자기를 헌법재판관으로 만들어 준 이에 충성하는 분위기”
⊙ “박근혜 탄핵재판 때 소추 사유의 80%가 거짓말”
⊙ “헌법재판관·헌재 소장·대법원장 차라리 추첨·호선제로”
⊙ “二元집정부제로 개헌해야… 총선 이긴 당이 총리 후보 내고 총리가 장관 임명”
⊙ “헌법학자들, 박근혜 탄핵 논문 한 편 없어… 해외 헌법학자들 눈엔 난센스”
鄭宗燮
1957년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법학박사 / 제24회 사법시험 합격,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서울대 법대학장·법학전문대학원장 역임 / 행정자치부 장관, 제20대 국회의원 역임. 現 한국국학진흥원장
⊙ “박근혜 탄핵재판 때 소추 사유의 80%가 거짓말”
⊙ “헌법재판관·헌재 소장·대법원장 차라리 추첨·호선제로”
⊙ “二元집정부제로 개헌해야… 총선 이긴 당이 총리 후보 내고 총리가 장관 임명”
⊙ “헌법학자들, 박근혜 탄핵 논문 한 편 없어… 해외 헌법학자들 눈엔 난센스”
鄭宗燮
1957년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법학박사 / 제24회 사법시험 합격,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서울대 법대학장·법학전문대학원장 역임 / 행정자치부 장관, 제20대 국회의원 역임. 現 한국국학진흥원장
- 사진=조준우
바야흐로 헌법(憲法)의 계절이다. 헌법이란 미로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로 대한민국이 아우성이다.
잔인한 봄날, 헌법을 공부한다. 헌법을 배웠다는 사람들마저도 ‘미치겠다’고 소리 친다. 대통령이든 검찰이든 공수처든 여(與)든 야(野)든, 헌법을 향해, 헌법재판소를 향해 성난 삿대질을 한다.
‘내란죄 소추 사유 철회로 중대한 흠결(欠缺)이 있는 대통령 탄핵심판’과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내란 수괴(首魁)’라는 주장이 여전히 맞선다. 헌법재판소는 ‘반(反)헌법 욕설소’ ‘헌법도망소’가 됐다. 기자는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헌법 공부를 하기 위해 헌법학 교수님을 찾아갔다.
잔인한 봄날의 헌법 공부
정종섭(鄭宗燮·67)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1989~95년)을 지냈다. ‘헌법의 정당성’을 연구하기 위해 헌법학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허영 당시 경희대 교수를 따라다니며 석사(경희대)·박사(연세대)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서울대 법대 교수로 학장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원장, 한국헌법학회장을 지냈다. 《헌법연구1~3》(1994, 2001), 《헌법재판연구》(1995), 《헌법판례연구》(1999) 같은 전문서적은 물론 초심자를 위한 헌법 해설서인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2013), 《정종섭과 김중만이 함께 읽는 대한민국 헌법》(2015)을 썼을 만큼 헌법학에 정통하다.
관계, 정계 경험도 쌓았다. 안전행정부-행정자치부 장관(2014~16년)을 거쳐 20대 국회의원(2016~20년)을 지냈다. 국회의원 시절, 평생 배우고 가르친 헌법이 한순간에 파탄 나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또다시 겪게 됐다.
헌법에 관한 정종섭 원장의 지론(至論)은 ‘모든 세대는 자신들의 헌법을 새로 쓸 권리를 가진다’이다. 계엄과 탄핵을 접한 우리 세대가 앞으로 쓰게 될 헌법은 어떤 헌법일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1조 2항 후단)는 헌법 규정이 행여 깨지는 건 아닐까 두렵다. 정 원장에게 들을 얘기가 많았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고, 지난 3월 7일 오후 서울 충무로 한 커피숍에서 정 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세대는 자신들의 헌법을 새로 쓰고 ‘자기만의 헌법’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나라 국민이든 자기 수준만큼의 헌법밖에 못 가진다’고도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이 세대들이 쓰는 헌법은 어떤 헌법입니까? 살아 움직이는 국가 최고의 법입니까?”
그는 스스로 가슴을 치듯 걱정이 묻어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식인들이 아무리 정치를 걱정하고 우려해도 현실에선 그 나라 국민 수준만큼의 정치밖에 못 가지는 겁니다.”
프랑스 헌법과 한국의 1987년 헌법
― 그럼 헌법을 고치면 국민 수준도, 정치 수준도 비례해서 올라갑니까?
“그러니까 제도를 고쳐 사회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죠. 예를 들어 대통령과 국회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정면충돌하는 사태가 안 생기도록 만들 수 있잖아요.”
― 모든 세대가 자신들의 헌법을 새로 쓴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요?
“국가가 건실하게 유지되고, 지속 가능하게 발전하며, 그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이를 실현하는 헌법을 만드는 것은 각 세대의 몫이라는 겁니다. 위기에 빠진 헌법을 구출하는 것도 바로 우리, 여러분의 몫입니다. 어느 세대나 스스로 헌법을 만들 권리를 가집니다.”
1948년 처음 제정된 헌법(제헌헌법)은 우리 헌정사에서 모두 9차례 개정이 이뤄졌다. 정종섭 원장에 따르면 어느 나라든지 한번 만든 헌법을 계속 고수하는 곳은 거의 없다. 헌법도 시대 변화에 부응하면서 ‘진화’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헌법을 고칠 수 있도록 개헌 절차가 경직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헌법을 고치기도 한다.
정 원장이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에 쓴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는 프랑스가 1789년 대혁명 이래 공화국에서 군주국으로, 또 다시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국가 형태가 바뀌는 과정을 소개한다. 권력구조를 여러 차례 변경하면서 그때마다 헌법을 손질했다. 정 원장의 말이다.
“헌법 개정이 모두 타당하고 정당한 것이냐의 물음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 헌법사를 보면 주로 정치권의 권력투쟁에 의해 개헌이 이뤄졌고, 정부 형태와 대통령의 권한이 헌법 개정의 주된 관심거리였어요. 물론 사회 변화에 따른 요구들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기본권 조항의 발전과 헌법재판의 발전은 헌법 개정이 권력투쟁의 산물만이 아님을 웅변하죠.”
헌법재판소(헌재)는 1987년 현행 헌법을 만들 때 태어난 헌법기관이다. 각종 탄핵심판과 정당 해산, 법률의 위헌 여부 결정을 위해 만들었지만, 헌재가 지금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기관이 될 줄 그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 번째 대통령 탄핵까지도 절차 보완 미비”
대법원과 검찰은 헌법재판소를 무시하고 각종 인사에서 ‘물먹은’ 이들을 헌법재판관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4부(府)’ 헌재가 입법·사법·행정 3부 위에 군림하게 될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표적 사례가 노무현·박근혜·윤석열 세 차례 현직 대통령 탄핵심판이다.
그러나 위상이 커지는 데 비례해 헌재를 향한 불신도 커졌다. 선고를 앞두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질타가 쇄도하고 있다. 헌재 설립 초기에 헌법연구관을 지낸 정종섭 원장도 지금의 헌재가 행사하는 권한의 범위를 용납하기 어렵다. 그는 우선 “헌재의 탄핵재판 절차 규정이 너무 허술하다”고 했다.
“대통령을 파면해야만 할 정도로 중대한 헌법·법률 위반 재판을 하면서 절차 규정 상 흠결을 발견하면 재빨리 보완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세 번째 대통령 탄핵까지도 안 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할 건가요?”
― 지금의 헌재 시스템으로 재판하는 게 난센스라는 말인가요?
“예를 들어 국회가 탄핵소추를 하면서, 초기에 분위기를 잡으려고 거짓말도 막 한단 말이에요. 대여섯 가지 소추 사유를 묶어 탄핵소추 의결을 시키고 보는 거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별게 아니거든. 그럼 탄핵소추를 해놓고 나중에 일부 소추 사유를 빼겠다고 합니다. 그건 국회에서 재의결을 해야 하는 사항이야! 그런 절차 규정이 헌재에 따로 없어요. 헌재 심판은 법리적으로 명확한 부분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논란거리가 있으면 안 되거든.
헌법과 법률 위반이라는 탄핵소추 사유들은 하나하나마다 의결해야 하는 거예요. 헌법·법률 위반에 해당하는지 안 하는지. 박근혜 탄핵재판 때를 떠올려 봐요. (소추 사유의) 한 80%가 거짓말 아니었어요? 그렇게 소추해 놓고는 정작 헌재는 판단을 안 해버렸잖아. 이런 헌법재판을 하는 나라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지.”
“의회 독재의 기록이자 헌정 파괴의 실록”
― 민주당은 29번의 연쇄 탄핵안을 발의하고 23번의 특검법을 통과시켰는데요.
“탄핵 제도라는 것은 원래 목적이 있는 거예요. 그걸 악용해서 ‘나’를 재판하는 판사를 내쫓아야겠다? 수사하는 검사를 (수사) 못 하게 하겠다? 탄핵소추만으로도 거의 6개월 동안 (업무에서) 배제해 버리니까, 그 효과만 보고 국회가 악용하는 거지.”
― 민주당의 줄탄핵이 가져오는 국정 마비 사태를 헌재는 모릅니까?
“악용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도 법률가들이 그대로 놔두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지. 안 그래요? 전 세계에서 자기 재판에 불리하다고 판검사를 탄핵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이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없다 이 말이에요. 법이라는 것은 항상 중립적이어야 하고 공정해야 하는 거야. 누가 해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안 짚어지잖아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카랑카랑하게 크레셴도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일수록 절차적인 정당성, 절차적인 합법성이 굉장히 중요한데 거기에 허점이 많으니까, 결국은 그런 허점이 있으면 당사자들이 불복할 수밖에 없죠. 절차상 하자가 있기 때문에. 치밀하게, 절차적으로 완결성을 기해야만 그 결정에 국민이 승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탄핵 제도가 완전히 잘못 작동하고 있어요.”
― 탄핵소추 당한 공직자는 무조건 업무에서 배제하도록 한 건 타당한 겁니까?
“탄핵소추를 당한 사람을 직(職)에서 배제하는 문제는 (탄핵소추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독일에선 그걸 헌법재판소에다 가처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요. 사안의 성격 상 직무에 그대로 둘지 여부를 헌재가 판단하는데, 우리나라 법은 딱 직무에서 배제시켜 버렸어요.”
민주당은 윤 대통령을 비롯해 한덕수 총리(대통령 권한대행),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최재해 감사원장,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등 13명의 공직자를 연쇄 탄핵소추해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를 두고 “의회 독재의 기록이자 헌정 파괴의 실록(實錄)”이라는 비난이 나왔다.
“재판관 스스로 회피해야”
― 이 정부 들어서만 29번이나 탄핵을 발의하고 13건을 소추했는데, 탄핵이 기각됐을 때 소추를 주도한 사람의 책임을 묻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으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옛날에 헌법을 만들 때는 우리가 (책임을 묻는 제도를) 생각지 못한 거죠. 상식적으론 탄핵 대신 장관 해임 건의를 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니까.”
―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말인가요?
“여야가 강대강(强對强) 대치로 가다 보니까 모든 제도가 무용지물이 되는 거지. 지금처럼 정치가 작동이 전혀 안 되니까 대놓고 탄핵을 하는데, 보통 재판에서는 패소한 쪽이 재판 비용을 부담하거든요. 왜냐하면, 재판에서 이겼는데 이긴 사람이 비용을 부담하는 건 안 맞으니까.”
윤석열 정부 출범 후 21~22대 국회가 탄핵심판에 지출한 비용은 4억6024만원이다. 구체적으로 2023년 9900만원, 지난해 3억624만원, 올해 3월 현재 5500만원이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와 헌재의 심판이 있었던 2016~17년 국회가 탄핵심판 비용으로 지출한 예산(1억6500만원)의 두 배에 가까운 세금이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탄핵심판 비용으로 들어갔다.
― 탄핵소추로 국민 세금까지 축내고 있는 걸 고치기 위해선 헌법 개정이 필요한가요?
“헌법에다 넣을 순 있겠죠.”
― 연쇄 탄핵과 관련해, 우리법연구회 출신 변호사들이 야당 소추위원을 대리하고, 역시 ‘우리법’ 출신인 헌법재판관들이 심판하는 구조입니다.
“변호사야 얼마든지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데… 헌법재판관까지 반드시 그런 판결을 할지 안 할지는 알 수가 없죠. (재판관의 이념과 판결 간에)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는 따져봐야 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 수 있거든요.”
― 그렇긴 합니다만, 보수적 성향의 재판관들도 그렇게 노골적인 판결을 할까요?
“재판에서 공정성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과거 재판관이 썼던 논문이나 글들이 재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면 그건 공정한 재판을 위해 배제해야 하고, 그 전에 재판관 스스로 회피를 해야겠죠.”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거지요”
―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대행이 과거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재표와 사적 친분 관계를 소셜미디어로 드러낸 적도 있는데요.
“이런 경우 심판에 참여해야 한다, 안 된다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할 게 아니라, 비슷한 케이스가 외국에 분명히 있을 거예요.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조사해 보면 판단할 수 있는 거죠.”
― 헌법재판관들의 면면을 보면 대통령이 재판관 3명을 임명하고,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또 3명을 임명하고, 여야가 또 3명을 임명하지 않습니까. 정치적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나요?
“1987년 헌법재판소가 출범할 때부터 학계에서 지적을 해온 사안입니다. 제가 봤을 때 초기 헌법재판관들은 누가 그 자리에 가든 재판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 했는데, 어느 시점부터 재판관들이 누가 자기를 재판관 만들어 줬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정종섭 원장은 “어떤 정권이든 자기 사람 쓰는 데 혈안이 돼있다”고 개탄했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권력기관이 재판 관여를 못 하게 돼있어요. 지금은 어느 정권이든 권력자가 전부 자기 사람을 심는 데 정신이 없는 거야. 그러면서 이게(국가가) 서서히 망가진 거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그 이유를 법제도에 다 설계해 놨는데, 이걸 망가뜨려 가지고 정치적으로 중립 아닌 사람을 집어넣는 게 일상이 됐거든요.
이럴 바에야 헌법재판관이나 헌재 소장, 대법원장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는 게 제일 나을지 몰라요. 돌아가면서 호선(互選)을 하든지. 사실 헌재 소장이나 대법원장은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근데 그 자리에 자기 사람 심겠다는 건 대통령이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거잖아요.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거지요.”
헌법재판을 아시아에서 처음 한 나라
―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 혹은 마은혁 후보자까지 9명의 이름까지, 우리가 알 필요도 없는데 아는 것은 역설적으로 헌재에 대한 불신이 담겨 있는 게 아닐가요? 헌법학자로서 어떻게 봅니까?
“헌법재판소에 제가 근무했었잖아요. 우리나라는 헌법재판을 아시아에서 처음 한 나라예요.”
― 우리나라가 아시아 처음이요?
“네, 아시아 최초로 헌법재판을 시작했습니다. 헌법재판을 하지 않는 나라는 헌법이 죽어 있는 거예요. 헌법이라는 것이 단순한 선언문이 아닙니다. 죽은 헌법이면 그냥 듣기 좋은 얘기만 써져 있는 거야. 그래서 그걸(헌법을) 위반한다고 해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헌법재판을 도입한다는 것은, 헌법에 위반되면 누구든 무엇이든 불문하고 다 효력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이죠.
과거 헌법재판소 초기에 보면, 국가정보기관에서 결정한 사안도 헌재가 판단할 수 있도록 했어요. 무소불위 권력까지 헌법의 통제 안에 들어오게 만들었죠. 그 정도로 헌법재판이 굉장히 중요해졌지요.”
“초기 헌법재판관이나 헌법연구관은…”
정종섭 원장에 따르면 1987년 헌법은 그해 6월 민주화 항쟁에서 표출된 국민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 점과 더불어, 그전 1980년 헌법(5공화국 헌법)에 비해 국민의 기본권을 강화하고 통치권 행사의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많이 보완한 것이 특징이다.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서는 취약한 부분이 없을 만큼 완비했으며, 명시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기본권까지도 헌법재판을 통한 헌법 해석으로 보장되도록 했다. 이전 헌법들에서 이름뿐이었던 ‘헌법위원회’ 대신 막강한 헌법재판소가 출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7년 헌법에서 명실공히 모든 종류의 기본권이 보장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계속된 그의 설명이다.
“초기 헌법재판관이나 헌법연구관은 법조계의 엘리트들이고 누가 봐도 평판이 높은 분들이 왔어요.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헌법 역사를 새로 쓴다는 사명감도 있었고 프라이드도 굉장히 강했죠. 민주화 이후 헌법이 정착되는 데 상당히 기여했고, 위헌 법률 심판도 많이 했단 말이죠. 그런데….”
― 그런데?
“초기 재판관들이 봤을 때 가슴을 칠 정도로 안타까운….
어느 시점부터 헌법재판관을 굉장히 정치적으로 배치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자기를 헌법재판관으로 만들어 준 사람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헌법재판관은 오로지 헌법에 따라서 재판하는 사람이지, 어떤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움직이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심지어 일반 국민도, ‘대통령에게 임명받은 사람은 대통령 편에 서줘야 되지 않느냐’ ‘야당 추천으로 임명된 사람은 야당 입장을 대변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이게 심각한 문제가 됐는데, 탄핵심판을 하면서 그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거죠.”
그러면서 정 원장은 “헌법재판소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냉정하게 진단했다.
“지금 와서 보면, 이분들이 과연 헌법재판관의 자질과 실력을 제대로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 국민이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재판관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서 재판을 그리 할지 안 할지, 그건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그런 기준이 작동되면서 헌법재판소가 완전히 망가졌다….
헌법재판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절치부심(切齒腐心) 애썼던 (초기) 재판관들이 봤을 때는 가슴을 칠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럼 지금이라도 자신이 없으면 (그 자리에) 가면 안 되는 것이고, 헌법에 대한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공부하고 고민했던 사람들이 헌법재판관으로 가야 돼.”
― 지금은 헌법 전문가들이 아니라 민·형법 전문가들이 가는 자리처럼 보입니다만.
“법원·검찰 인사에서 밀린 사람들, 변호사로 있다가 정치권에 줄을 댄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가면 헌법재판소는 당연히 망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떠한 문제를 낳게 될지 너무나 가볍게 보고 헌법재판관을 충원한 결과 오늘날 이 사태까지 왔다고 볼 수 있어요.”
“헌법의 성장이 아니라 퇴행”
― 이전 문재인 정권은 사법부가 ‘정치 권력에 의한 사법 장악의 실험장’이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사법 농단’ ‘재판 거래 의혹’이라는 게 문재인 정권 5년 내내 이어졌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100명 가까운 전·현직 판사들이 수사를 받았고, 검찰이 법관 14명을 기소했지만 11명에게 무죄 선고가 났습니다. 지난 정권의 사법 농단, 사법 장악 행태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내가 분석을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깊이 있는 분석을 해서 그런(사법 농단)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죠. 사실은 그 사건은 논문이 나와도 여러 편 나왔어야 합니다. 《월간조선》 같은 데서 집중 분석을 하면 좋겠어요. 정권의 사법 장악 음모가 있었는지 말이죠.”
― 이번에 이진숙 방통위원장 탄핵심판에서 헌법재판관들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서 4 대 4로 나뉘었잖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죠.”
― 4 대 4로 나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재판관들의 과도한 이념으로….
“어떤 사안이든 간에, 헌법재판소가 정치적인 요소를 고려해 재판하면 안 됩니다. 헌법재판소는 그야말로 법리에 따라서 정확한 판단을 해줘야 되는 거야.”
― 물론 헌재는 스스로 재판관들의 개인적 이념과 판결은 다르다고 말합니다만…. 자, 1987년 이후 38년 동안 헌법을 고치지 않은 건 마치 성인이 갓난아이 적 옷을 그대로 입은 것과 같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성인이 됐으니 낡은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옛날 성인이 지금 소년으로 퇴행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계속 살아 숨 쉬고 생동하는 규범이 헌법”
― 성장이 아니라 퇴행했다는 말이군요.
“우리가 민주화 과정을 거친 건 정상적인 국가를 만드는 과정이었어요. 그런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을 위해 국가가 정확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가 원했던 민주화예요. 누가 재판을 받아도 예외 없이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하는 게 사법부의 역할이고요. 법원은 어떤 경우에도 정치성, 편향성을 띠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민주주의라는 게 뭡니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켜 서로간에 통제를 하면서 효율성을 높이는 제도입니다. 법치주의가 작동해 국민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만드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 헌법은, 우리가 흔히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것이, 당시에는 대통령 직선제가 주된 관심사였기에 나머지는 깊이 검토하지 못한 겁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들 하듯이 대통령이 마음대로 하는 행태가 계속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이것을 제도적으로 다루려면 헌법을 손질하는 수밖에 없어요. 흔히 ‘권력구조를 다시 민주 국가에 맞도록 손질하자’고 하는데, 그게 뭐겠어요? 결국은 대통령한테 국가원수 역할이 따로 있고 정부를 운영하는 역할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공동체의 최고규범인 헌법이 어떤 시기에 한번 정해지면 변경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가치나 의미를 계속 추가해 현실에서 계속 살아 숨 쉬고 생동하는 규범이 헌법이라는 얘기다.
무소불위 의회 권력과 대통령 권력이 정면충돌하면

그런데 헌법 개정이 너무 잦으면 최고법으로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다. 헌법에 담을 내용은 추상적이고 개방적으로 정하되, 세세한 것은 헌법보다 개정하기 쉬운 하위의 법률이나 명령·규칙 등에 맡겨 놓는다.
― 그래도 국가권력의 배분, 권력의 행사와 절차 등에 관한 사항만큼은 통치자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헌법에다 상세히 정해야겠죠?
“대통령제를 취하는 나라에서 행정부와 의회가 정면충돌하면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탄핵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다른 나라들은 정면충돌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의원내각제에서는 국회 해산과 정부 불신임 제도가 있어요. 대통령(총리)과 국회가 정면충돌할 때 국민이 ‘둘 다 그냥 그만두라’는 거야. ‘정부를 스톱시키고, 국회도 해산시키고, 우리 국민이 다시 뽑겠다, 다시 총선을 해서 국회도 정부도 새로 구성할 테니 너희는 손 떼라.’ 이게 소위 정부 불신임 제도거든요. 그런데 해방 이후 아주 잠깐만 빼곤 대통령제가 이어졌기에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거예요. 이번처럼 무소불위 의회 권력과 대통령의 권력이 정면충돌하면….”
― 충돌하면?
“최악의 상황이 올 줄 아무도 예측 못 했던 거죠, 87년 체제에서는. 거대권력 간의 충돌, 그러니까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국회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충돌한다는 것은, 국민이 지지하는 사람들 간에 대충돌을 일으킨다는 뜻이잖아요.”
― 지지자들 간의 극한 분열, 공동체 내 갈등도 최고조에 달하고요.
“사회 통합력이나 구심력이 약화되고 대신 사회 원심력이 강해지면 결국엔 사회가 분열되고 사회가 해체되는 단계로 가는 거죠. 사회가 해체되고 분열되는 상황으로 가면 국제 질서로 봤을 때 최약체 국가의 길로 가는 것이고, 쉽게 이야기해서 국가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이 봤을 때는 언제든지 호시탐탐 욕심을 내게, 그걸 자초하는 거죠.”
이원집정부제 개헌
― 헌법 개정을 두고 국회 해산권, 정부 불신임 등 온갖 얘기들이 나옵니다. 국회 양원(兩院)제를 제안하기도 하던데요.
“‘헌법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뭐든지 헌법에 집어넣자는. 사실 그럴 필요가 없죠. 이번에 (개헌을) 성사시키려면 최소 부분만, 합의된 부분만 집어넣는 거예요. 총선에서 승리한 제1당이 총리 후보를 내고, 그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면 총리는 장관을 임명하는 거죠.
― 지금도 총리가 장관 임명을 제청하게 돼있잖아요.
“그런데 사실상 무력화돼 있죠. 제대로 하려면 총선에서 승리한 당에서 총리를 결정하는 게 제일 좋아요.”
― 그러면 대통령은?
“외교·국방 같은 문제가 국가원수로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면 외교·국방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죠.”
― 의원내각제 같은….
“정확하게는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대통령제 국가니까, 최소한 그렇게라도 한 발자국을 움직여야 국가 위기 사태를 반복할 가능성이 없어지지 않겠어요?”
―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원 포인트 개헌’을 하자는 건가요?
“어떻게 보면 그렇죠. 대통령 임기 조항을 하나 고치고, 그다음에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고. 그런 식으로 하면 되죠.”
― 그런데 대통령을 중임(重任)으로 바꾸는 게 꼭 전제돼야 하나요?
“대통령 중임제라는 것이, 4년을 하고 심판을 받아 다시 4년을 더 할 수 있다는 건데, 책임을 진다는 관점에서는 중임제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권력 분산 없이 지금 상태에서 임기만 중임제로 가면 이건 8년 대통령제를 허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강력한 제왕적 8년짜리 대통령이 만들어지는 거겠죠. 그야말로 역사가 거꾸로 가는….”
― 우리 사회는 정말 다양한 목소리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쏟아지고 있잖아요.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사회 저변에서 자기만의 헌법을 새로 쓰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촛불정신’을 헌법 전문(前文)에 담자, 또 광주5·18정신, 동학혁명 정신을 담자는 등의 목소리도 있을 수 있는데요.
“그렇게 하면 개헌은 안 된다고 봐야 돼요. 원 포인트 개헌만 하자고 정치권이 합의를 해야 합니다.”
촛불정신, 광주5·18정신
― 과연 국민이 수용할까요?
“안 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사실 개헌할 때마다 국민투표를 하는 나라는 정말 없거든요. 독일은 국민 기본권에 관한 개헌만 국민투표로 하죠. 기본권은 굉장히 중요하니까, 국민들의 권리 문제니까 국민투표로 결정하고, 그 밖에 국가의 정치제도를 고치는 건 국회의원 3분의 2 의결로 언제든 바꿀 수 있게 돼있죠.”
지난해 말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대한민국헌정회가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단축하되 한 차례까지 연임을 허용하고, 국회에 상원(上院)을 더해 양원제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하원(민의원)은 인구 비례 다수대표제로 200석 이상, 상원(참의원)은 광역자치단체 중심의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로 80석 이하로 구성한다는 내용이다.
― 지역대표형 상원제를 도입하는 방안은 어떨가요?
“지방의 이익을 대표하는 방법 중 하나로 상원을 만드는 것 자체는 좋은 발상인데, 거기까지 논의를 확장시키면 또 거기에도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개헌은 되기 힘들다고 봐요.”
지방분권이 더딘 이유
―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지방분권 요구들도 거셀 것 같습니다.
“지방분권 요구의 80%는 법률만 고치면 됩니다. (개헌이 아니라 법 개정만으로) 지금이라도 분권화가 다 됩니다. 지금은 중앙(정부)에서 시행령에서 다 집어넣어 버리니까, 행정부 규칙에서 다 정해 버리니까, 지자체에서 손을 댈 수 없어요. 행정안전부는 지방자치를 확산시키려고 하고, 나머지 부처는 지방자치를 별로 찬성 안 하니까…. 근데 지방자치가 그렇게 중요하면 지금 국회에서 하면 되는 거예요.”
헌법 제117조 1항은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 조항이 자치입법권을 확대하는 데 걸림돌이다. 시행령(대통령령)이나 시행규칙보다 지방의회가 제정한 조례가 하위에 있는 것도 문제다. 대한민국 지방자치 제도는 지역의 자기결정권이나 다양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제도다.
정 원장은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치단체가 조례를 만들 수 있도록 해주면, 시행령으로 자치권을 제한하는 것은 최소한 완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지방 출신이나 지역구 국회의원이 수도권보다 많은데도 그렇게 안 되는 건 왜입니까?
“그렇게 하면 국회의원 하는 맛이 없어져 버리니까요 .”(웃음)
박근혜 탄핵을 보는 해외 헌법학자들의 시각
― 꼭 8년 전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이 법리적으로 엉터리였다는 지적도 나오던데, 어떻게 보시나요?
“헌법학자들이 분석해야 하는데 지금 분석이 안 돼있죠. 논문 한 편 안 나와 있지요.”
― 놀랍네요.
“그래서 해외 헌법학자들이 그건 난센스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 당시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가 중대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는데.
“면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정치적으로 평가할 게 아니고, 헌법학자의 눈으로 제대로 된 분석, 연구가 돼야 합니다.”
― 학자들이 왜 연구를 안 했을까요? 눈치 보는 건가요?
“아직까지는….”
― 박근혜 탄핵 때 전원일치가 될 때까지 평의를 계속한 걸로 알려졌는데요, 의견이 갈렸다고 하는데 8 대 0으로 재판관 전원일치 인용(파면) 결정을 내렸습니다.
“박근혜 탄핵은 쟁점 상 반대·소수 의견을 얼마든지 낼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에, 전원일치라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 재판관들이 어떻게 해서 그리했는지 난 잘 모르겠어요.”
― 어떤 정치적인….
“그건 모르겠어요.”
― 이번 윤석열 탄핵의 경우도 만약 8 대 0이 나오면요? 만약에….
“어쨌든 간에 재판관들은 여론에 휘둘려서 안 됩니다!”⊙
잔인한 봄날, 헌법을 공부한다. 헌법을 배웠다는 사람들마저도 ‘미치겠다’고 소리 친다. 대통령이든 검찰이든 공수처든 여(與)든 야(野)든, 헌법을 향해, 헌법재판소를 향해 성난 삿대질을 한다.
‘내란죄 소추 사유 철회로 중대한 흠결(欠缺)이 있는 대통령 탄핵심판’과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내란 수괴(首魁)’라는 주장이 여전히 맞선다. 헌법재판소는 ‘반(反)헌법 욕설소’ ‘헌법도망소’가 됐다. 기자는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헌법 공부를 하기 위해 헌법학 교수님을 찾아갔다.
잔인한 봄날의 헌법 공부
정종섭(鄭宗燮·67)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1989~95년)을 지냈다. ‘헌법의 정당성’을 연구하기 위해 헌법학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허영 당시 경희대 교수를 따라다니며 석사(경희대)·박사(연세대)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서울대 법대 교수로 학장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원장, 한국헌법학회장을 지냈다. 《헌법연구1~3》(1994, 2001), 《헌법재판연구》(1995), 《헌법판례연구》(1999) 같은 전문서적은 물론 초심자를 위한 헌법 해설서인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2013), 《정종섭과 김중만이 함께 읽는 대한민국 헌법》(2015)을 썼을 만큼 헌법학에 정통하다.
관계, 정계 경험도 쌓았다. 안전행정부-행정자치부 장관(2014~16년)을 거쳐 20대 국회의원(2016~20년)을 지냈다. 국회의원 시절, 평생 배우고 가르친 헌법이 한순간에 파탄 나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또다시 겪게 됐다.
헌법에 관한 정종섭 원장의 지론(至論)은 ‘모든 세대는 자신들의 헌법을 새로 쓸 권리를 가진다’이다. 계엄과 탄핵을 접한 우리 세대가 앞으로 쓰게 될 헌법은 어떤 헌법일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1조 2항 후단)는 헌법 규정이 행여 깨지는 건 아닐까 두렵다. 정 원장에게 들을 얘기가 많았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고, 지난 3월 7일 오후 서울 충무로 한 커피숍에서 정 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세대는 자신들의 헌법을 새로 쓰고 ‘자기만의 헌법’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나라 국민이든 자기 수준만큼의 헌법밖에 못 가진다’고도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이 세대들이 쓰는 헌법은 어떤 헌법입니까? 살아 움직이는 국가 최고의 법입니까?”
그는 스스로 가슴을 치듯 걱정이 묻어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식인들이 아무리 정치를 걱정하고 우려해도 현실에선 그 나라 국민 수준만큼의 정치밖에 못 가지는 겁니다.”
프랑스 헌법과 한국의 1987년 헌법
― 그럼 헌법을 고치면 국민 수준도, 정치 수준도 비례해서 올라갑니까?
“그러니까 제도를 고쳐 사회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죠. 예를 들어 대통령과 국회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정면충돌하는 사태가 안 생기도록 만들 수 있잖아요.”
― 모든 세대가 자신들의 헌법을 새로 쓴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요?
“국가가 건실하게 유지되고, 지속 가능하게 발전하며, 그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이를 실현하는 헌법을 만드는 것은 각 세대의 몫이라는 겁니다. 위기에 빠진 헌법을 구출하는 것도 바로 우리, 여러분의 몫입니다. 어느 세대나 스스로 헌법을 만들 권리를 가집니다.”
1948년 처음 제정된 헌법(제헌헌법)은 우리 헌정사에서 모두 9차례 개정이 이뤄졌다. 정종섭 원장에 따르면 어느 나라든지 한번 만든 헌법을 계속 고수하는 곳은 거의 없다. 헌법도 시대 변화에 부응하면서 ‘진화’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헌법을 고칠 수 있도록 개헌 절차가 경직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헌법을 고치기도 한다.
정 원장이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에 쓴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는 프랑스가 1789년 대혁명 이래 공화국에서 군주국으로, 또 다시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국가 형태가 바뀌는 과정을 소개한다. 권력구조를 여러 차례 변경하면서 그때마다 헌법을 손질했다. 정 원장의 말이다.
“헌법 개정이 모두 타당하고 정당한 것이냐의 물음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 헌법사를 보면 주로 정치권의 권력투쟁에 의해 개헌이 이뤄졌고, 정부 형태와 대통령의 권한이 헌법 개정의 주된 관심거리였어요. 물론 사회 변화에 따른 요구들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기본권 조항의 발전과 헌법재판의 발전은 헌법 개정이 권력투쟁의 산물만이 아님을 웅변하죠.”
헌법재판소(헌재)는 1987년 현행 헌법을 만들 때 태어난 헌법기관이다. 각종 탄핵심판과 정당 해산, 법률의 위헌 여부 결정을 위해 만들었지만, 헌재가 지금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기관이 될 줄 그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 번째 대통령 탄핵까지도 절차 보완 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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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을 앞두고 경찰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주변을 지키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러나 위상이 커지는 데 비례해 헌재를 향한 불신도 커졌다. 선고를 앞두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질타가 쇄도하고 있다. 헌재 설립 초기에 헌법연구관을 지낸 정종섭 원장도 지금의 헌재가 행사하는 권한의 범위를 용납하기 어렵다. 그는 우선 “헌재의 탄핵재판 절차 규정이 너무 허술하다”고 했다.
“대통령을 파면해야만 할 정도로 중대한 헌법·법률 위반 재판을 하면서 절차 규정 상 흠결을 발견하면 재빨리 보완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세 번째 대통령 탄핵까지도 안 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할 건가요?”
― 지금의 헌재 시스템으로 재판하는 게 난센스라는 말인가요?
“예를 들어 국회가 탄핵소추를 하면서, 초기에 분위기를 잡으려고 거짓말도 막 한단 말이에요. 대여섯 가지 소추 사유를 묶어 탄핵소추 의결을 시키고 보는 거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별게 아니거든. 그럼 탄핵소추를 해놓고 나중에 일부 소추 사유를 빼겠다고 합니다. 그건 국회에서 재의결을 해야 하는 사항이야! 그런 절차 규정이 헌재에 따로 없어요. 헌재 심판은 법리적으로 명확한 부분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논란거리가 있으면 안 되거든.
헌법과 법률 위반이라는 탄핵소추 사유들은 하나하나마다 의결해야 하는 거예요. 헌법·법률 위반에 해당하는지 안 하는지. 박근혜 탄핵재판 때를 떠올려 봐요. (소추 사유의) 한 80%가 거짓말 아니었어요? 그렇게 소추해 놓고는 정작 헌재는 판단을 안 해버렸잖아. 이런 헌법재판을 하는 나라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지.”
“의회 독재의 기록이자 헌정 파괴의 실록”
― 민주당은 29번의 연쇄 탄핵안을 발의하고 23번의 특검법을 통과시켰는데요.
“탄핵 제도라는 것은 원래 목적이 있는 거예요. 그걸 악용해서 ‘나’를 재판하는 판사를 내쫓아야겠다? 수사하는 검사를 (수사) 못 하게 하겠다? 탄핵소추만으로도 거의 6개월 동안 (업무에서) 배제해 버리니까, 그 효과만 보고 국회가 악용하는 거지.”
― 민주당의 줄탄핵이 가져오는 국정 마비 사태를 헌재는 모릅니까?
“악용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도 법률가들이 그대로 놔두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지. 안 그래요? 전 세계에서 자기 재판에 불리하다고 판검사를 탄핵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이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없다 이 말이에요. 법이라는 것은 항상 중립적이어야 하고 공정해야 하는 거야. 누가 해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안 짚어지잖아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카랑카랑하게 크레셴도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일수록 절차적인 정당성, 절차적인 합법성이 굉장히 중요한데 거기에 허점이 많으니까, 결국은 그런 허점이 있으면 당사자들이 불복할 수밖에 없죠. 절차상 하자가 있기 때문에. 치밀하게, 절차적으로 완결성을 기해야만 그 결정에 국민이 승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탄핵 제도가 완전히 잘못 작동하고 있어요.”
― 탄핵소추 당한 공직자는 무조건 업무에서 배제하도록 한 건 타당한 겁니까?
“탄핵소추를 당한 사람을 직(職)에서 배제하는 문제는 (탄핵소추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독일에선 그걸 헌법재판소에다 가처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요. 사안의 성격 상 직무에 그대로 둘지 여부를 헌재가 판단하는데, 우리나라 법은 딱 직무에서 배제시켜 버렸어요.”
민주당은 윤 대통령을 비롯해 한덕수 총리(대통령 권한대행),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최재해 감사원장,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등 13명의 공직자를 연쇄 탄핵소추해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를 두고 “의회 독재의 기록이자 헌정 파괴의 실록(實錄)”이라는 비난이 나왔다.
“재판관 스스로 회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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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시절의 정종섭 원장(왼쪽에서 두 번째). 2017년 2월 23일 정종섭, 김진태, 최교일 의원 등이 국회 정론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정종섭 의원은 “헌재가 일방적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진=조선DB |
“옛날에 헌법을 만들 때는 우리가 (책임을 묻는 제도를) 생각지 못한 거죠. 상식적으론 탄핵 대신 장관 해임 건의를 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니까.”
―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말인가요?
“여야가 강대강(强對强) 대치로 가다 보니까 모든 제도가 무용지물이 되는 거지. 지금처럼 정치가 작동이 전혀 안 되니까 대놓고 탄핵을 하는데, 보통 재판에서는 패소한 쪽이 재판 비용을 부담하거든요. 왜냐하면, 재판에서 이겼는데 이긴 사람이 비용을 부담하는 건 안 맞으니까.”
윤석열 정부 출범 후 21~22대 국회가 탄핵심판에 지출한 비용은 4억6024만원이다. 구체적으로 2023년 9900만원, 지난해 3억624만원, 올해 3월 현재 5500만원이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와 헌재의 심판이 있었던 2016~17년 국회가 탄핵심판 비용으로 지출한 예산(1억6500만원)의 두 배에 가까운 세금이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탄핵심판 비용으로 들어갔다.
― 탄핵소추로 국민 세금까지 축내고 있는 걸 고치기 위해선 헌법 개정이 필요한가요?
“헌법에다 넣을 순 있겠죠.”
― 연쇄 탄핵과 관련해, 우리법연구회 출신 변호사들이 야당 소추위원을 대리하고, 역시 ‘우리법’ 출신인 헌법재판관들이 심판하는 구조입니다.
“변호사야 얼마든지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데… 헌법재판관까지 반드시 그런 판결을 할지 안 할지는 알 수가 없죠. (재판관의 이념과 판결 간에)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는 따져봐야 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 수 있거든요.”
― 그렇긴 합니다만, 보수적 성향의 재판관들도 그렇게 노골적인 판결을 할까요?
“재판에서 공정성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과거 재판관이 썼던 논문이나 글들이 재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면 그건 공정한 재판을 위해 배제해야 하고, 그 전에 재판관 스스로 회피를 해야겠죠.”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거지요”
―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대행이 과거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재표와 사적 친분 관계를 소셜미디어로 드러낸 적도 있는데요.
“이런 경우 심판에 참여해야 한다, 안 된다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할 게 아니라, 비슷한 케이스가 외국에 분명히 있을 거예요.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조사해 보면 판단할 수 있는 거죠.”
― 헌법재판관들의 면면을 보면 대통령이 재판관 3명을 임명하고,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또 3명을 임명하고, 여야가 또 3명을 임명하지 않습니까. 정치적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나요?
“1987년 헌법재판소가 출범할 때부터 학계에서 지적을 해온 사안입니다. 제가 봤을 때 초기 헌법재판관들은 누가 그 자리에 가든 재판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 했는데, 어느 시점부터 재판관들이 누가 자기를 재판관 만들어 줬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정종섭 원장은 “어떤 정권이든 자기 사람 쓰는 데 혈안이 돼있다”고 개탄했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권력기관이 재판 관여를 못 하게 돼있어요. 지금은 어느 정권이든 권력자가 전부 자기 사람을 심는 데 정신이 없는 거야. 그러면서 이게(국가가) 서서히 망가진 거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그 이유를 법제도에 다 설계해 놨는데, 이걸 망가뜨려 가지고 정치적으로 중립 아닌 사람을 집어넣는 게 일상이 됐거든요.
이럴 바에야 헌법재판관이나 헌재 소장, 대법원장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는 게 제일 나을지 몰라요. 돌아가면서 호선(互選)을 하든지. 사실 헌재 소장이나 대법원장은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근데 그 자리에 자기 사람 심겠다는 건 대통령이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거잖아요.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거지요.”
헌법재판을 아시아에서 처음 한 나라
―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 혹은 마은혁 후보자까지 9명의 이름까지, 우리가 알 필요도 없는데 아는 것은 역설적으로 헌재에 대한 불신이 담겨 있는 게 아닐가요? 헌법학자로서 어떻게 봅니까?
“헌법재판소에 제가 근무했었잖아요. 우리나라는 헌법재판을 아시아에서 처음 한 나라예요.”
― 우리나라가 아시아 처음이요?
“네, 아시아 최초로 헌법재판을 시작했습니다. 헌법재판을 하지 않는 나라는 헌법이 죽어 있는 거예요. 헌법이라는 것이 단순한 선언문이 아닙니다. 죽은 헌법이면 그냥 듣기 좋은 얘기만 써져 있는 거야. 그래서 그걸(헌법을) 위반한다고 해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헌법재판을 도입한다는 것은, 헌법에 위반되면 누구든 무엇이든 불문하고 다 효력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이죠.
과거 헌법재판소 초기에 보면, 국가정보기관에서 결정한 사안도 헌재가 판단할 수 있도록 했어요. 무소불위 권력까지 헌법의 통제 안에 들어오게 만들었죠. 그 정도로 헌법재판이 굉장히 중요해졌지요.”
“초기 헌법재판관이나 헌법연구관은…”
정종섭 원장에 따르면 1987년 헌법은 그해 6월 민주화 항쟁에서 표출된 국민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 점과 더불어, 그전 1980년 헌법(5공화국 헌법)에 비해 국민의 기본권을 강화하고 통치권 행사의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많이 보완한 것이 특징이다.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서는 취약한 부분이 없을 만큼 완비했으며, 명시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기본권까지도 헌법재판을 통한 헌법 해석으로 보장되도록 했다. 이전 헌법들에서 이름뿐이었던 ‘헌법위원회’ 대신 막강한 헌법재판소가 출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7년 헌법에서 명실공히 모든 종류의 기본권이 보장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계속된 그의 설명이다.
“초기 헌법재판관이나 헌법연구관은 법조계의 엘리트들이고 누가 봐도 평판이 높은 분들이 왔어요.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헌법 역사를 새로 쓴다는 사명감도 있었고 프라이드도 굉장히 강했죠. 민주화 이후 헌법이 정착되는 데 상당히 기여했고, 위헌 법률 심판도 많이 했단 말이죠. 그런데….”
― 그런데?
“초기 재판관들이 봤을 때 가슴을 칠 정도로 안타까운….
어느 시점부터 헌법재판관을 굉장히 정치적으로 배치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자기를 헌법재판관으로 만들어 준 사람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헌법재판관은 오로지 헌법에 따라서 재판하는 사람이지, 어떤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움직이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심지어 일반 국민도, ‘대통령에게 임명받은 사람은 대통령 편에 서줘야 되지 않느냐’ ‘야당 추천으로 임명된 사람은 야당 입장을 대변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이게 심각한 문제가 됐는데, 탄핵심판을 하면서 그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거죠.”
그러면서 정 원장은 “헌법재판소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냉정하게 진단했다.
“지금 와서 보면, 이분들이 과연 헌법재판관의 자질과 실력을 제대로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 국민이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재판관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서 재판을 그리 할지 안 할지, 그건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그런 기준이 작동되면서 헌법재판소가 완전히 망가졌다….
헌법재판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절치부심(切齒腐心) 애썼던 (초기) 재판관들이 봤을 때는 가슴을 칠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럼 지금이라도 자신이 없으면 (그 자리에) 가면 안 되는 것이고, 헌법에 대한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공부하고 고민했던 사람들이 헌법재판관으로 가야 돼.”
― 지금은 헌법 전문가들이 아니라 민·형법 전문가들이 가는 자리처럼 보입니다만.
“법원·검찰 인사에서 밀린 사람들, 변호사로 있다가 정치권에 줄을 댄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가면 헌법재판소는 당연히 망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떠한 문제를 낳게 될지 너무나 가볍게 보고 헌법재판관을 충원한 결과 오늘날 이 사태까지 왔다고 볼 수 있어요.”
“헌법의 성장이 아니라 퇴행”
― 이전 문재인 정권은 사법부가 ‘정치 권력에 의한 사법 장악의 실험장’이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사법 농단’ ‘재판 거래 의혹’이라는 게 문재인 정권 5년 내내 이어졌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100명 가까운 전·현직 판사들이 수사를 받았고, 검찰이 법관 14명을 기소했지만 11명에게 무죄 선고가 났습니다. 지난 정권의 사법 농단, 사법 장악 행태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내가 분석을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깊이 있는 분석을 해서 그런(사법 농단)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죠. 사실은 그 사건은 논문이 나와도 여러 편 나왔어야 합니다. 《월간조선》 같은 데서 집중 분석을 하면 좋겠어요. 정권의 사법 장악 음모가 있었는지 말이죠.”
― 이번에 이진숙 방통위원장 탄핵심판에서 헌법재판관들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서 4 대 4로 나뉘었잖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죠.”
― 4 대 4로 나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재판관들의 과도한 이념으로….
“어떤 사안이든 간에, 헌법재판소가 정치적인 요소를 고려해 재판하면 안 됩니다. 헌법재판소는 그야말로 법리에 따라서 정확한 판단을 해줘야 되는 거야.”
― 물론 헌재는 스스로 재판관들의 개인적 이념과 판결은 다르다고 말합니다만…. 자, 1987년 이후 38년 동안 헌법을 고치지 않은 건 마치 성인이 갓난아이 적 옷을 그대로 입은 것과 같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성인이 됐으니 낡은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옛날 성인이 지금 소년으로 퇴행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계속 살아 숨 쉬고 생동하는 규범이 헌법”
― 성장이 아니라 퇴행했다는 말이군요.
“우리가 민주화 과정을 거친 건 정상적인 국가를 만드는 과정이었어요. 그런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을 위해 국가가 정확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가 원했던 민주화예요. 누가 재판을 받아도 예외 없이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하는 게 사법부의 역할이고요. 법원은 어떤 경우에도 정치성, 편향성을 띠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민주주의라는 게 뭡니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켜 서로간에 통제를 하면서 효율성을 높이는 제도입니다. 법치주의가 작동해 국민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만드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 헌법은, 우리가 흔히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것이, 당시에는 대통령 직선제가 주된 관심사였기에 나머지는 깊이 검토하지 못한 겁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들 하듯이 대통령이 마음대로 하는 행태가 계속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이것을 제도적으로 다루려면 헌법을 손질하는 수밖에 없어요. 흔히 ‘권력구조를 다시 민주 국가에 맞도록 손질하자’고 하는데, 그게 뭐겠어요? 결국은 대통령한테 국가원수 역할이 따로 있고 정부를 운영하는 역할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공동체의 최고규범인 헌법이 어떤 시기에 한번 정해지면 변경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가치나 의미를 계속 추가해 현실에서 계속 살아 숨 쉬고 생동하는 규범이 헌법이라는 얘기다.
무소불위 의회 권력과 대통령 권력이 정면충돌하면

그런데 헌법 개정이 너무 잦으면 최고법으로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다. 헌법에 담을 내용은 추상적이고 개방적으로 정하되, 세세한 것은 헌법보다 개정하기 쉬운 하위의 법률이나 명령·규칙 등에 맡겨 놓는다.
― 그래도 국가권력의 배분, 권력의 행사와 절차 등에 관한 사항만큼은 통치자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헌법에다 상세히 정해야겠죠?
“대통령제를 취하는 나라에서 행정부와 의회가 정면충돌하면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탄핵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다른 나라들은 정면충돌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의원내각제에서는 국회 해산과 정부 불신임 제도가 있어요. 대통령(총리)과 국회가 정면충돌할 때 국민이 ‘둘 다 그냥 그만두라’는 거야. ‘정부를 스톱시키고, 국회도 해산시키고, 우리 국민이 다시 뽑겠다, 다시 총선을 해서 국회도 정부도 새로 구성할 테니 너희는 손 떼라.’ 이게 소위 정부 불신임 제도거든요. 그런데 해방 이후 아주 잠깐만 빼곤 대통령제가 이어졌기에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거예요. 이번처럼 무소불위 의회 권력과 대통령의 권력이 정면충돌하면….”
― 충돌하면?
“최악의 상황이 올 줄 아무도 예측 못 했던 거죠, 87년 체제에서는. 거대권력 간의 충돌, 그러니까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국회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충돌한다는 것은, 국민이 지지하는 사람들 간에 대충돌을 일으킨다는 뜻이잖아요.”
― 지지자들 간의 극한 분열, 공동체 내 갈등도 최고조에 달하고요.
“사회 통합력이나 구심력이 약화되고 대신 사회 원심력이 강해지면 결국엔 사회가 분열되고 사회가 해체되는 단계로 가는 거죠. 사회가 해체되고 분열되는 상황으로 가면 국제 질서로 봤을 때 최약체 국가의 길로 가는 것이고, 쉽게 이야기해서 국가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이 봤을 때는 언제든지 호시탐탐 욕심을 내게, 그걸 자초하는 거죠.”
이원집정부제 개헌
― 헌법 개정을 두고 국회 해산권, 정부 불신임 등 온갖 얘기들이 나옵니다. 국회 양원(兩院)제를 제안하기도 하던데요.
“‘헌법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뭐든지 헌법에 집어넣자는. 사실 그럴 필요가 없죠. 이번에 (개헌을) 성사시키려면 최소 부분만, 합의된 부분만 집어넣는 거예요. 총선에서 승리한 제1당이 총리 후보를 내고, 그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면 총리는 장관을 임명하는 거죠.
― 지금도 총리가 장관 임명을 제청하게 돼있잖아요.
“그런데 사실상 무력화돼 있죠. 제대로 하려면 총선에서 승리한 당에서 총리를 결정하는 게 제일 좋아요.”
― 그러면 대통령은?
“외교·국방 같은 문제가 국가원수로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면 외교·국방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죠.”
― 의원내각제 같은….
“정확하게는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대통령제 국가니까, 최소한 그렇게라도 한 발자국을 움직여야 국가 위기 사태를 반복할 가능성이 없어지지 않겠어요?”
―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원 포인트 개헌’을 하자는 건가요?
“어떻게 보면 그렇죠. 대통령 임기 조항을 하나 고치고, 그다음에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고. 그런 식으로 하면 되죠.”
― 그런데 대통령을 중임(重任)으로 바꾸는 게 꼭 전제돼야 하나요?
“대통령 중임제라는 것이, 4년을 하고 심판을 받아 다시 4년을 더 할 수 있다는 건데, 책임을 진다는 관점에서는 중임제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권력 분산 없이 지금 상태에서 임기만 중임제로 가면 이건 8년 대통령제를 허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강력한 제왕적 8년짜리 대통령이 만들어지는 거겠죠. 그야말로 역사가 거꾸로 가는….”
― 우리 사회는 정말 다양한 목소리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쏟아지고 있잖아요.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사회 저변에서 자기만의 헌법을 새로 쓰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촛불정신’을 헌법 전문(前文)에 담자, 또 광주5·18정신, 동학혁명 정신을 담자는 등의 목소리도 있을 수 있는데요.
“그렇게 하면 개헌은 안 된다고 봐야 돼요. 원 포인트 개헌만 하자고 정치권이 합의를 해야 합니다.”
촛불정신, 광주5·18정신
― 과연 국민이 수용할까요?
“안 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사실 개헌할 때마다 국민투표를 하는 나라는 정말 없거든요. 독일은 국민 기본권에 관한 개헌만 국민투표로 하죠. 기본권은 굉장히 중요하니까, 국민들의 권리 문제니까 국민투표로 결정하고, 그 밖에 국가의 정치제도를 고치는 건 국회의원 3분의 2 의결로 언제든 바꿀 수 있게 돼있죠.”
지난해 말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대한민국헌정회가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단축하되 한 차례까지 연임을 허용하고, 국회에 상원(上院)을 더해 양원제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하원(민의원)은 인구 비례 다수대표제로 200석 이상, 상원(참의원)은 광역자치단체 중심의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로 80석 이하로 구성한다는 내용이다.
― 지역대표형 상원제를 도입하는 방안은 어떨가요?
“지방의 이익을 대표하는 방법 중 하나로 상원을 만드는 것 자체는 좋은 발상인데, 거기까지 논의를 확장시키면 또 거기에도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개헌은 되기 힘들다고 봐요.”
지방분권이 더딘 이유
―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지방분권 요구들도 거셀 것 같습니다.
“지방분권 요구의 80%는 법률만 고치면 됩니다. (개헌이 아니라 법 개정만으로) 지금이라도 분권화가 다 됩니다. 지금은 중앙(정부)에서 시행령에서 다 집어넣어 버리니까, 행정부 규칙에서 다 정해 버리니까, 지자체에서 손을 댈 수 없어요. 행정안전부는 지방자치를 확산시키려고 하고, 나머지 부처는 지방자치를 별로 찬성 안 하니까…. 근데 지방자치가 그렇게 중요하면 지금 국회에서 하면 되는 거예요.”
헌법 제117조 1항은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 조항이 자치입법권을 확대하는 데 걸림돌이다. 시행령(대통령령)이나 시행규칙보다 지방의회가 제정한 조례가 하위에 있는 것도 문제다. 대한민국 지방자치 제도는 지역의 자기결정권이나 다양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제도다.
정 원장은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치단체가 조례를 만들 수 있도록 해주면, 시행령으로 자치권을 제한하는 것은 최소한 완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지방 출신이나 지역구 국회의원이 수도권보다 많은데도 그렇게 안 되는 건 왜입니까?
“그렇게 하면 국회의원 하는 맛이 없어져 버리니까요 .”(웃음)
박근혜 탄핵을 보는 해외 헌법학자들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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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서울대 법대 학장 시절의 정종섭 교수. 사진=조선DB |
“헌법학자들이 분석해야 하는데 지금 분석이 안 돼있죠. 논문 한 편 안 나와 있지요.”
― 놀랍네요.
“그래서 해외 헌법학자들이 그건 난센스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 당시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가 중대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는데.
“면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정치적으로 평가할 게 아니고, 헌법학자의 눈으로 제대로 된 분석, 연구가 돼야 합니다.”
― 학자들이 왜 연구를 안 했을까요? 눈치 보는 건가요?
“아직까지는….”
― 박근혜 탄핵 때 전원일치가 될 때까지 평의를 계속한 걸로 알려졌는데요, 의견이 갈렸다고 하는데 8 대 0으로 재판관 전원일치 인용(파면) 결정을 내렸습니다.
“박근혜 탄핵은 쟁점 상 반대·소수 의견을 얼마든지 낼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에, 전원일치라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 재판관들이 어떻게 해서 그리했는지 난 잘 모르겠어요.”
― 어떤 정치적인….
“그건 모르겠어요.”
― 이번 윤석열 탄핵의 경우도 만약 8 대 0이 나오면요? 만약에….
“어쨌든 간에 재판관들은 여론에 휘둘려서 안 됩니다!”⊙
지금은 ‘헌법’을 읽는 시간 1월 헌법 도서 판매량 13배 폭발 요즘 ‘헌법’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한 인터넷 서점에서는 지난 1월 헌법 분야 도서 판매량이 2024년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1285%나 증가했다는 소식이다. 국회도서관은 2월부터 오는 6월까지 국회도서관 법률정보센터(206호)에서 〈헌법, 시대를 잇다: 역사의 기록에서 미래로〉라는 주제로 특별전시를 열고 있다. 세계 각국의 헌법 제1조 비교,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적 흐름, 세계 주요국의 헌법 개정 사례, 헌법에 반영되어야 할 현대적 가치를 다룬 도서 등을 전시 중이다. ― 요즘 헌법을 읽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헌법에 관한 대중적인 책을 두 권 썼잖아요. ‘국민 헌법읽기운동’을 했었죠. 헌법 읽기 열풍은, 잘나갈 줄 알았던 나라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위태롭다고 느끼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래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정체성,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나를 보호하며, 나는 이 속에서 어떻게 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죠. 현실에서는 실현 안 되고 때로는 왜곡되기 때문에, 스스로 직접 확인해 보자는 뜻에서 헌법 책을 읽는 겁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