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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석성장학회 창립 30주년 맞는 조용근 이사장

“나의 마지막 꿈은 ‘감동공장 공장장’”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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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2억2800만원으로 시작… 창립 30주년 맞아 기금 100억원 조성
⊙ 초·중·고생들에게 ‘선행장학금’ 지급… “청소년들의 인성 키워주는 재단”
⊙ 지적발달장애인 돕는 ‘석성1만사랑회’… ‘석성 나눔의 집’ 10호째 건립
⊙ 천안함재단 초대 이사장… 기금 396억 모금해 유족에 1인당 5억 지급
⊙ 민주평통자문회의 북한지원특위 위원장… “멘토링 활성화로 껴안아야”
⊙ 미얀마 현지 고교, ‘대한민국 석성고등학교’ 문패 달고 애국가 4절 제창
⊙ “성적보다 인성교육에 특화된 인재 길러내는 장학재단 만들 것”
사진=오동룡
  지난 3월 1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제13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 수여식이 끝난 후 열린 오찬식에서 국민포상을 받은 조용근(趙鏞根·78) 석성장학회 이사장이 윤석열(尹錫悅) 대통령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세금쟁이 출신 샐러리맨입니다. 198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허름한 주택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을 종잣돈으로 1994년 장학회를 설립했습니다. 무학자(無學者)이신 부모님의 가운데 이름자를 따서 ‘석성장학회’라 이름 짓고, 30년간 4600명에게 35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중략) 1984년도에 5000만원으로 시작한 장학회가 현재 100억원으로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조 이사장이 자기소개를 마치자, 당시 오찬장에 참석했던 윤 대통령을 비롯해 다른 수상자들은 ‘와’ 하는 탄성과 함께 큰 박수로 화답했다.
 
  조용근 이사장은 약관(弱冠)의 나이에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대전지방국세청장, 천안함재단 초대(初代) 이사장, 한국세무사회장을 역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사회봉사단체인 ‘석성장학회’와 ‘석성1만사랑회’를 이끌고 있는 조 이사장은 한국 사회에 ‘나눔과 섬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나눔 전도사’다. 그는 국세청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던 1994년, 석성장학회를 설립했다.
 
 
  철제 ‘스누피’ 저금통
 
스누피 캐릭터가 그려진 철제 저금통. 조 이사장은 “세무공무원 시절 선물받은 이 작은 저금통이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고, 나에게 ‘나눔 전도사’라는 별명을 갖게 해준 귀중한 선물이다”고 했다. 사진=오동룡
  석성장학회가 12월 27일로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특히 조 이사장은 2005년 설립한 세무법인 석성의 회장으로, 매출액의 1%를 매년 기부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각계로 전파하고 있다. 해외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조용근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강남 서초빌딩 사무실을 찾았다. ‘2024년 석성 선행장학금 전달식’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이사장실 앞에서 청바지 차림의 조 이사장이 기자를 반겼다. 김장환(金章煥) 극동방송 이사장의 평전 《빌리 킴》 옆으로 만화 〈피너츠〉의 캐릭터 ‘스누피’가 그려진 철제 저금통이 눈에 띄었다.
 
  ― 이 저금통은 뭔가요?
 
  “1982년 국세청 실무자로 재직할 때 어떤 분이 저한테 선물로 주고 가셨어요. 이 저금통을 보고 청소년 가장(家長)을 한번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장학회를 시작하게 만든 추억의 기념품입니다.”
 

  ― 남을 돕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셨나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시고 한평생 한스럽게 살다가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기리고 싶었어요. 198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부모님이 남겨주신 허름한 집을 팔아 5000만원을 종잣돈으로 마련했고요. 10년간 2억원으로 불린 다음에 아내(류영혜)와 상의해 1994년 장학회를 설립했습니다.”
 
  ― 석성장학회는 이사장님의 호를 딴 겁니까?
 
  “아버지(趙石奎)와 어머니(姜成伊)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따 석성(石成)으로 장학회 이름을 지었어요.”
 
 
  세무법인 석성 매출액의 1%를 기부
 
지난 3월 15일 용산 대통령실 자유홀에서 열린 제13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 참석한 조용근 이사장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 재단법인으로 출발하려면 최소 3억원이 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처음엔 재단법인 등록 요건인 3억원을 넘지 않아 임의단체로 등록할 수밖에 없었지요. 매년 은행에서 나오는 정기예금 이자 수익을 가까운 지인이 추천해 준 강원도 산골 화전민촌에 사는 어려운 청소년들 몇 명에게 전달했어요. 이게 장학금 지급의 시초입니다. 장학생 숫자가 늘어가자 ‘혹시 뇌물을 받아 장학회를 운영하는 것 아니냐’며 가자미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요. 결국 장학회 기금이 불어나면서 석성장학회 출범 7년 만인 2001년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재단법인 석성장학회’ 설립 인가를 받았습니다.”
 
  ― 현재 기금 총액은 얼마나 됩니까?
 
  “1994년 5000만원 종잣돈이 30년이 지나 100억원가량 됐습니다. 지금까지 4600명에게 35억원이 나갔습니다. 장학생 숫자가 늘어나다 보니 ‘제가 석성맨입니다’라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때마다 ‘잘했구나, 석성장학회를 내 목숨처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현재 세무법인 석성을 운영하고 있는 조용근 이사장은 재단 설립 30주년인 올해 3월 3일 납세자의 날에 사회공헌분야 모범납세자로 기획재정부장관상을 받았다. 특히 지난 3월 15일에는 국민들에게 직접 추천을 받아 진행된 제13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국민포장’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장학회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나요?
 
  “석성장학재단을 모체로 해서 세무법인 석성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상호발전한다는 차원에서 ‘세무법인 석성에서 매년 발생하는 매출액의 1%를 석성장학재단에 기부한다’는 연결조건을 만들었습니다. 매출액의 1%를 기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지켜지고 있어요. 건물 임대료와 기부금까지 합치면 매년 4~5억 원가량이 시스템적으로 들어옵니다.”
 
 
  ‘굿 스튜던트’ 배지
 
지난 5월 24일, 석성장학회는 서울 서초구 석성장학회 회의실에서 초·중·고·대학생 605명을 올해의 ‘석성 선행(善行)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장학금 2억6000만원을 전달했다. 사진=석성장학회
  ― 어떤 방식으로 장학제도를 운영하려 하나요?
 
  “석성장학회는 장학생들에게 ‘굿 스튜던트(Good Student)’ 배지를 달게 합니다. 스스로 ‘선행장학생’이라는 자각을 하게 만드는 거죠. 요즘 청소년들 가운데 마약과 도박에 손대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자’ ‘남을 배려하자’면서 청소년들의 인성을 계발하는 걸 목표로 장학제도를 운영하려 합니다. 인성 계발을 위한 장학금은 매년 3억~4억원 나갑니다. 인성이 올바른 학생들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꾸준히 장학금을 지급하려고 합니다.”
 
  ― 석성장학생 수혜자 가운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없나요?
 
  “석성장학회는 출범 초기부터 성적이 우수한 학생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학생들 위주로 뽑았습니다. 남편과 이혼하고 일선 세무서에서 근무한 여성의 사연인데요, 대학생 아들과 어렵게 살다가 말기암으로 죽음이 임박하자 휴학 중인 아들을 복학시키기 위해 석성장학생으로 추천했어요. 나중에 아들이 엄마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보내왔는데, 소중한 석성장학금이 사랑하는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란 사연을 읽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건 드문 일 아닌가요?
 
  “국세 공직자가 장학재단을 만든 것은 지금껏 전무(全無)했다고 해요. 국세청 사람들은 저를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해요. 지금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강북 사람들이 강남 사람들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이유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 국세청에서 그런 것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인생 후반전’은 남을 섬기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1만 명이 매월 1만원씩
 
  조 이사장은 2011년 4월 5000만원을 쾌척해 지적발달장애인을 위한 공익법인 ‘석성1만사랑회’를 출범시켰다. 1만 명이 매월 1만원씩 내면 매월 1억원으로 중증장애인을 돌볼 수 있다는 원리다. 여기에는 국세공무원과 세무사, 대학생 등 회원 5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회원들이 보내주는 후원금으로 중증장애인을 위한 공동생활관 ‘석성 나눔의 집’을 한국해비타트와 함께 건립하고 재활치료비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 ‘석성 나눔의 집’ 사업은 진행 중이군요.
 
  “2014년 충남 논산에 패션모델 출신 장애인 김성자 원장이 운영하는 ‘석성 나눔의 집 1호점’ 건립을 시작으로 경기 용인(2호점), 서초구 양재동(3호점), 수원 중앙기독학교(4호점-도예공방), 경북 구미(5호점-여성생활관), 강원 양양(6호점-정다운마을), 경북 구미(7호점-남성생활관), 전남 여수(9호점-평생교육원)까지 아홉 군데 건립했습니다. 2025년 상반기엔 제주에 ‘석성 나눔의 집 10호점’이 준공될 예정입니다. 공동생활관 건축엔 매년 2억원가량 들어가요. 이곳에 지적발달장애인을 위한 공동생활관과 공동작업장을 지어 주거와 일자리를 해결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석성장학회는 초대형 태풍 피해를 입은 미얀마 양곤시 소재 ‘딸린 제3고등학교’ 재건사업에 나서 8개동의 학교 건물과 실내체육관을 지어줬다. 이 고등학교는 그 보답으로 ‘대한민국 석성고등학교’로 명명하기도 했다. 현지 교육감은 조 이사장에게 ‘우서디가’란 미얀마 이름을 지어주었다. ‘많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나눠주는 존귀한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조 이사장은 “준공식 때 미얀마 교육부 장관까지 참석했고, 학교 측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어 감격했다”고 했다.
 
 
  20세 때 국세청 첫 공채 합격
 
1965년 경북사대부고 3학년 시절.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조용근 이사장. 사진=석성장학회
  조용근 이사장은 1946년 경남 진주 칠암동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본으로 징용 가 오사카에서 결혼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방이 되자 귀국했다. 아버지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일본행 밀항선을 탔고, 전쟁통에 두 살짜리 막내 남동생(1949년생)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마지막 수단으로 ‘정체불명의 고기’(들쥐) 수십 마리를 먹였다”고 했을 정도로 가난은 혹독했다. 3년 후 귀국한 아버지는 일본에서 직조 기술을 배워 당시 섬유산업이 번창했던 대구로 이사를 갔다. 1969년 여름 큰형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대구 집을 처분한 알토란 같은 돈을 사기꾼에게 날려버린 남편과 다투다 충격으로 중풍에 걸려 몸져누웠다. 어머니는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인생의 절반인 1972년 52세 나이에 눈을 감았다.
 
  1966년 3월 3일은 국세청이 처음으로 문을 연 날이다. 그해 경북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진학을 포기한 조용근은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배달된 신문에서 ‘사세직(司稅職) 5급을(乙)류 공무원 임용공고’를 보고 눈이 번쩍 트였다. 그의 운명을 바꾼 ‘구인광고’였다.
 
  “국세청이 문을 열고 3개월 후인 6월 20일 9급공무원을 채용한 거죠. 경쟁률이 100대 1이었는데, 서울상대를 준비했던 터라 필기시험은 어렵지 않았어요.”
 
  ― 첫 근무지는 어디였나요?
 
  “닷새가 부족한 만 20세였어요. 제 생각에 최상위권 합격자였던 것 같아요. 이낙선(李洛善) 당시 국세청장 명의로 합격증이 왔는데, 희망 근무지를 아무 곳이나 써도 좋다는 거야. 아버지에게 여쭤보았더니 대구 달성공원 앞 20분 거리에 있는 대구서부세무서가 좋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1~3지망 모두 대구서부세무서라고 썼고 그곳에서 첫 근무가 시작됐어요.”
 
 
  개업식 날 화환 대신 ‘사랑의 쌀’ 요청
 
  조용근은 세무공무원으로 있을 때 ‘부동산 투기 업무 원조’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국세청 재산세과 사무관 시절에는 재산세제 업무(특히 양도소득세) 전문가로 통해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출연하기도 했다.
 
  9급으로 출발한 그는 대전지방국세청장까지 36년간 공직 생활을 하고 퇴임 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간 한국세무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나눔 전도사’라는 별칭처럼 청량리 다일밥퍼나눔운동본부 명예본부장, 중증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석성1만사랑회 이사장, 크리스찬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이사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조 이사장은 “돈이 안 되는 직함들”이라며 웃는다.
 
  ― 세무법인 석성의 개업식 날 에피소드도 유명합니다.
 
  “2005년 11월 11일 11시에 세무법인 석성을 개업하면서 초청장에 화환 대신 20kg 한 포대에 5만원 하는 ‘사랑의 쌀’을 보내달라고 썼습니다. 개업식을 마치고 ‘사랑의 쌀’ 값으로 들어온 축하금이 무려 5800만원이었어요. 이 성금 5800만원은 강남구 구룡마을에 사는 홀어르신 800명을 비롯해 청량리 밥퍼나눔운동본부, 지체장애아 수용시설인 소망의 집, 말기암 환자를 위한 샘물 호스피스, 암 투병 중인 현직 세금쟁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줬습니다.”
 
 
  DJ 정권 언론사 세무조사 때 국세청 공보관
 
  2000년 김대중(金大中) 정부 출범 직후 실시된 ‘전국 23개 중앙 언론사에 대한 동시 특별세무조사’ 당시 국세청 공보담당관이 조용근이었다. 그 는 공보관으로 김대중 정부와 언론사 사이에서 ‘곤욕’을 치렀다. 조 이사장은 “당시 세무조사는 김대중 정부가 2000년 12월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비판적인 논조를 펼쳤던 언론사를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펼친 세무조사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세무조사는 2001년 2월 1일부터 한 달간 실시됐고, 정부는 서울국세청 조사1~4국을 총동원해 전국 23개 중앙 언론사를 강도 높게 조사했다. 조 이사장은 “김대중 정부가 세무조사를 통해 ‘언론 길들이기’를 하려 했던 것 같다”며 “청와대는 언론사를 상대하는 공보관을 ‘비호남’ ‘TK’로 가는 것이 무난하겠다는 판단하에 나를 공보관으로 발령한 것으로 보였다”고 했다.
 
  ― 세무조사 발표 당일 기억나나요?
 
  “그때의 자괴감(自愧感)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2000년 1월 마지막 날, 기자실이 온통 난리였어요. 통신사 기자가 데스크(팀장)에 송고한 기사를 보여주는데, ‘국세청, 전국 23개 중앙 언론사에 대한 특별세무조사 실시’라고 내용 없이 제목만 달랑 있는 거예요. 공보관인 나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국세청장실로 뛰어올라가 안정남(安正南) 청장에게 ‘제가 공보관 맞습니까? 저를 못 믿으신다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주십시오’라고 항의했어요. 안 청장은 인터폰으로 담당 국장에게 ‘왜 공보관에게 알리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담당 국장은 ‘비밀이 누설될까 알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2001년 6월 29일 김대중 정부의 국세청은 23개 중앙 언론사에 대한 특별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손영래(孫永來) 서울지방국세청장은 매우 긴장된 모습으로 5000억원의 세금 포탈 사실과 6군데 언론사와 사주(社主)들에 대한 검찰 고발 문제까지 발표했다.
 

  ―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당시 언론사 세무조사를 평가한다면?
 
  “23개 중앙과 지방 언론사를 한꺼번에 묶어 무리하게 세무조사를 벌이다 보니, 평소 원수지간이던 언론사들도 뭉쳐 대정부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언론사 사주도 있고, 동아일보사의 종부(宗婦)가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습니다.”
 
  조 이사장은 “당시 국세청과 언론사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언론에 실린 기사 제목에 ‘국세청 또 비리’ ‘세리(稅吏)들 또 비리 저질러’ 등 ‘또’자(字)가 자주 등장했다”며 “이런 기사 제목들이 신문 가판(街版)에 실릴 때마다 한밤중에 전화통을 붙들고 ‘편집국장님, 또자 하나만 빼주십시오’라고 읍소해야 했다”고 했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 격려
 
2011년 11월 11일 조용근 이사장이 최윤희 당시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명예해군’으로 위촉받고 있다. 오른쪽은 2016년 11월 천안함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날 당시 해군과 천안함 유족이 전달한 감사패. 사진=석성장학회
  조 이사장은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천안함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천안함이 인양되던 날, 세무사회 회장 자격으로 2300만원을 들고 KBS 성금 모금에 참여했다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구성한 ‘성금 배분 특위’에 시민단체 대표로 얼떨결에 참여하게 됐어요. KBS와 전경련이 국민 성금을 396억원 모금했고, ‘세무사회장에다 재단이사장인 분에게 성금 관리를 맡기자’며 절 추대했어요. 유족(46명)과 한준호 준위 유족에게 1인당 5억원씩 나누어드렸고, 금양호 선원까지 모두 250억원을 위로금으로 전달했습니다. 그해 12월 보훈처에서 재단 설립 인가를 받아 146억원으로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천안함재단 이름도 제가 지었습니다.”
 
  ― 천안함재단 이사장으로 시급했던 일은?
 
  “46용사 유족을 챙기는 일이었어요. 또 58명의 생존 장병들을 비롯해서 복무 중인 해군 장병들의 병영문화를 개선해 주기 위해 고민도 해야 했습니다. 2011년 초 재단의 첫 번째 사업으로 해군의 도움을 받아 58명의 생존 장병들을 대방동 해군회관으로 불러 1인당 500만원의 격려금을 지급했어요. 천안함 폭침은 이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어찌 보면 우리 국민 모두의 책임 아닌가 합니다.”
 
  ― 재단 운영은?
 
  “임기 3년을 두 번 채우고 6년 만에 물러났습니다만, 재단을 투명하고 깨끗하게 운영하는 데 힘썼어요. 재단 제공 신용카드는 일절 쓰지 않았고, 웬만한 경비는 개인 돈으로 지출했습니다. 후임 이사장이 애를 먹었겠지요(웃음).”
 
  2016년 12월 조 이사장이 물러나자 엄현성(嚴賢聖) 해군참모총장은 ‘천안함 46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장병들의 항재전장(恒在戰場) 의식 고취에 큰 도움을 주셨다’며 감사패를 전달했다. 앞서 2011년엔 최윤희(崔潤喜) 총장에게 ‘명예해군’으로 위촉받았다.
 
 
  탈북민의 ‘멘토’로 활동
 
지난 3월 27일 조용근 이사장이 민주평통 사무처에서 열린 ‘북한 이탈주민 지원 특별위원회’ 출범식에서 위원장으로 위촉됐다. 사진=석성장학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는 지난 3월 27일 오후 민주평통 사무처에서 ‘북한이탈주민 지원 특별위원회’ 출범식을 개최하고 탈북민 지원사업에 본격 착수했다. 탈북민 멘토링 사업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국무회의에서 민주평통에 탈북민 멘토 역할을 당부한 데 따라 추진됐다. 이를 위해 산하에 특별위원회(이하 특위)를 출범하고 위원장에 조용근 이사장을 임명했다. 전국의 민주평통 자문위원 1000여 명이 탈북민 ‘멘토’로 활동한다.
 
  “지난 3월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북한이탈주민을 잘 챙겨주는 것이 통일의 지름길’이란 말씀을 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먼저 온 통일’인 3만4200명의 북한이탈주민들이 같은 민족, 동포로서 일체감은 물론, 희망을 갖도록 특위가 주도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목숨 걸고 내려온 그들에게 ‘그래, 잘 내려왔다’고 하면서 우리가 품어야 합니다.”
 
  ― 탈북민들이 생활하는 현장도 가보셨나요?
 
  “얼마 전 의정부에 있는 경기 북부의 유일한 탈북민 대안학교인 ‘한꿈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재학생이 50명 남짓이었어요. 곰팡이 핀 지하공간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들의 꿈을 물어보니 ‘제발 햇볕 보고 공부하게 해달라’는 거였어요. 통일부와 연계해서 지원하는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 탈북 청소년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탈북 청소년들은 아버지가 중국인인 경우도 많아 ‘탈북민’인 동시에 ‘다문화’라는 정체성의 혼란도 겪고 있습니다. K-컬처에 환호하는 꿈 많은 탈북 청소년들이 자신의 현실을 보고 좌절을 해요. 그리고 어려서부터 집단농장에서 노동일을 했기 때문에 탈북민 청소년들은 공장이나 농장, 건설 현장 등 육체적 노동을 꺼립니다. 자유를 찾아온 땅에서 똑같은 노동을 하는 것에 자괴감을 가져요. 그래서 얼마 전 한국세무사회에 소속한 6000명의 개업 세무사들과 탈북 청소년들에게 전산세무회계 교육을 시켜 세무보조원으로 취업시키자는 MOU를 체결했어요.”
 
 
  “심성 바른 인재 길러내겠다”
 
  조용근 이사장은 공자(孔子)가 말한 ‘근자열원자래(近者說遠者來)’, 즉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구름떼같이 몰려온다는 말을 새기며 산다. 조 이사장은 소홀했던 부부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아내와 함께 ‘부부행복학교’를 수년간이나 다녔다. ‘부부행복학교’를 토대로 2003년 4월 국세청 직원들과 함께 가정문제 해결과 어려운 이웃들을 돕자는 ‘마태모임’을 만들었다.
 
  성경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와 세무서장에 해당하는 삭개오는 2000년 전의 세금쟁이 ‘선배’들이다. 마태모임이 유명세를 타자 이진삼(李鎭三) 전 육군참모총장, 연극인 윤석화(尹石花), 가수 윤형주(尹亨柱) 등이 모임에 참석했다. 조 이사장은 “특히 가수 윤형주씨는 명예회원으로 끼워달라며 가끔 ‘열린 가정음악회’도 열어주었다”고 했다.
 
  ― 장학회 창립 30주년을 맞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장학회를 운영해 나갈 생각인가요?
 
  “현재 전국적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한국장학재단도 있고, 시·도 지자체, 각 대학, 기업들이 운영하는 장학재단이 3100개나 됩니다. 저는 석성장학회를 한마디로 ‘감동공장’으로 만들고 싶어요. 국가에 기여할 심성이 바른 인재들을 길러내는 데만 관심을 가질 겁니다. 딸 수빈이가 대학 졸업하고 받은 첫 월급을 석성에 기부했고, 딸과 아들의 결혼식 축의금 1억5000만원을 장학회에 기부하면서 아들과 딸에게도 장학회와 더없이 소중한 인연을 맺게 해주었습니다. 저의 마지막 꿈은 석성장학회의 ‘감동공장 공장장’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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