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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특별 인터뷰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

“오대영이 없었으면 16강도 없었을 것”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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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에서 상대방은 라이벌이지만, 그들이 없다면 경기를 할 수 없어… 정치인들이 축구로부터 이런 점들을 배웠으면”
⊙ “‘한 번 졌다고 실망하지 않고, 성공을 향해 길게 보고 나아가라’는 것이 축구가 주는 교훈”
⊙ “(홍명보, 박항서 등) 저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지도자로 성공했다는 뉴스는 늘 저를 흥분시켜”
⊙ “특출 난 일류 선수들과 보통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야 팀이 성장”
⊙ “2002년 월드컵 독일전 때 김남일 뛰었으면 결과 달라졌을지도”
⊙ “히딩크는 세계인의 언어인 축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 위대한 통역자이자 스승”(송준섭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주치의)
사진=전형찬
  한 사회가 어느 한순간에 기적처럼 질적으로 도약(跳躍)하는 경우가 있다. 패러다임 체인지(Paradigm Change) 혹은 개념돌파(槪念突破)라 불리는 사건이다. 기존의 고정관념과 관습을 일거에 타파하고, 공동체는 새로운 집단이 되어 미래로 항해한다. 인류사(人類史)의 복권(福券)이자 마법(魔法) 같은 시간. 한국인에게는 2002년 6월이 그랬다. 우리를 단번에 고원(高原)으로 데려가 산 아래 먼 들판을 굽어볼 수 있게 해준 은인(恩人)이 있다. 거스 히딩크(Guus Hiddink·76)다. 우리의 영웅(英雄)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무릎 수술차 한국에 온 그를 찾아간 이유다. 축구인에겐 축구가 세계의 중심이니 축구 이야기로 첫 질문을 던졌다.
 
 
  “홍명보 우승해서 저 역시 행복”
 
홍명보 울산현대 감독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 밑에서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했다. 사진=조선DB
  ―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울산 현대가 17년 만에 K리그에서 우승했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죠. 뉴스에서 봤습니다.”
 
  ― 홍 감독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으세요.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 따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홍 감독이 자랑스러워요. 우승팀 감독이니까 한동안은 행복하게 지내라고 말하고 싶네요. 제 핵심 선수였던 그가 우승해서 저 역시 행복합니다. 홍 감독은 제 선수였을 뿐 아니라, 동료이기도 했어요. 러시아에선 선수가 아니라 코치로 일하며 저를 도왔죠.”
 
  세계적인 명장(名將)에겐 늘 이런저런 제안이 끊이지 않았다. 보여준 업적이 많으니 모셔가려는 팀이 언제나 넘쳤다. 터키 대표팀 감독(2010~2011년)에 이어 히딩크 감독이 선택한 자리는 러시아 프로축구 안지 마하치칼라 감독(2012년 2월~2013년 7월). 런던올림픽 동메달이라는 업적을 이룬 홍명보는 유럽 축구를 현장에서 접할 기회를 찾았고, 스승에게 도움을 구했다. 안지 마하치칼라 구단은 스승과 제자를 전례 없는 예우로 환대했다. 시즌 중반의 단기 연수였는데도, 2013년 1월부터 5월까지 홍명보의 정식 코칭스태프 합류를 허락한 것이다.
 
  유럽 주요 리그 구단에서 정식 코칭스태프로 일한 한국인은 아직까지는 홍명보가 유일하다. 1988/89 시즌을 마치고 바이엘 레버쿠젠 구단에서 은퇴한 차범근에게 분데스리가 몇몇 구단이 감독을 포함, 여러 제의를 한 적은 있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즌에 코칭스쿨 과정도 마친 상태여서 본인이 남으려면 얼마든지 남을 수도 있었지만, 차붐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주저 없이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자신의 유럽 경험을 후대에게 온전히 전하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가 독일에 남았다면,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의 소속팀은 한국 대표팀이었을까 아니면 통일 독일 대표팀이었을까.
 
 
  “일류 선수들에겐 특별한 마인드가 있다”
 
히딩크 감독과 박항서 감독. 2002년 9월 파주트레이닝센터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
  “홍명보는 은퇴 이후 대한축구협회에 들어가 전무로 일하며 축구 행정에도 관여했었죠. 그것도 훌륭한 선택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격상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울산 현대 우승 이야기를 하셨는데, 베트남에서 엄청나게 큰 인물이 된 ‘나의 박 코치(박항서)’처럼, 저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지도자로 성공했다는 뉴스는 늘 저를 흥분시키죠. 박 코치나 명보는 선수들 하나하나를 직접 다루며 긴 과정을 거쳐 챔피언에 올랐어요. 그것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박진감이며 성취입니다.”
 
  히딩크는 ‘나의 박 코치’를 한국어로 발음했다. ‘안녕하세요’ ‘대~한민국!’도 그가 구사하는 한국어 가운데 하나였다.
 
  ― 선수들을 다룬다는 건, 그들 한 명 한 명과 밀고 당기며 거래하는 것, 그러니까 동기부여도 하고 신상필벌(信賞必罰)도 하고, 때로는 자극도 주고,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겁니까? 일류 선수들은 다들 개성이 강해서 그들을 한 팀으로 묶는 일도 쉬운 과제는 아닐 듯합니다. 선수들을 다룰 때,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합니까.
 
  “일류 선수들에겐 특별한 마인드가 있습니다. 왜? 일류니까요.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기를 원하고, 자신들의 재능을 보여주고 싶어 하죠. 자신의 방식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경기장에서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합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언제나 보통 선수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죠. 특출 난 일류 선수들과 보통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야 팀이 성장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일부러 안정환 자극”
 
  ― 어떤 선수들이 특출 난 일류 선수입니까.
 
  “큰 경기에서 남과 다른 뭔가를 만드는 선수입니다. 2002년 홍명보는 거의 모든 경기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어요. 스페인과의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선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경기 후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홍명보는 페널티 스폿으로 걸어가면서 ‘이걸 못 넣으면 이민 가야 하나’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오른쪽 상단 구석으로 찬 킥은 자기 킥에 대한 자신이 없다면 택할 수 없는 코스다. 성공 확률이 높지만, 자칫하다간 허공으로 날려버릴 위험이 큰 선택이기 때문이다.
 
  “안정환도 역시 일류 선수죠. 정환을 처음 만났을 때 일부러 그를 조금 자극했습니다. 톱클래스로 끌어올리고 싶었으니까요. 정환은 미국과의 경기,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연장전 등,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골을 넣어줬죠. 어떤 경우에도 위축되지 않고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 선수입니다. 강팀을 만나면 오히려 투지가 솟는 타입이죠. ‘내가 오늘 확실한 것 하나는 꼭 보여준다!’는 식으로 고도의 집중력을 보입니다. 일류 선수들은 개성이 강하지만, 그들과 작업하는 건 매우 즐거운 경험입니다. 정신 자세가 훌륭하니까요.”
 
 
  “오대영 별명, 자랑스러워”
 
한때 ‘오대영’으로 불리던 히딩크 감독은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쓰면서 국민적 영웅이 됐다. 사진=조선DB
  ― 2002년 월드컵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겐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언제나 즐겁고 신나니까요. 2002년 월드컵이란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한국에 온 건 2000년입니다. 오자마자 코칭스태프와 축구협회 지원팀 모아놓고 ‘쉬운 길, 어려운 길 중에 어려운 쪽으로 가겠다’고 했어요. ‘아시아 팀들을 상대하면 늘 3골, 4골, 5골 차로 크게 이길 거다. 그러면 누구나 아, 우리가 월드컵 준비를 정말 잘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다. 어려운 곳에서 어려운 상대와 어려운 경기를 하겠다. 그래야 우리의 약점이 보이고 보완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라고 했어요. 크게 질 것을 알면서도 강팀과 붙은 건 월드컵에서 어떻게 플레이해야 하는가를 체득(體得)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체코와의 원정 경기, 월드컵 직전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 등 강팀들과 자주 만나면서 선수들의 자신감도 커졌습니다.”
 
  2001년 대구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 전, 앞서 말한 체코와의 원정 경기에서 한국은 5대0으로 졌다. 그래서 월드컵 전까지 히딩크의 별명은 ‘오대영’이었다. 히딩크도 자신의 별명을 알고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저는 한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월드컵 준비 기간엔 신문, 방송을 보지 않았어요.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봐도 무슨 뜻인지 몰랐으니까요. 5대0으로 지고 나서 몇 달이 지나 누군가가 제 별명을 알려줬습니다. 지금은 그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선택한 길이 옳았고, 우리 선수들이 난관을 뚫고 정상 가까이 나아갔다는 증거니까요.”
 
  ― 질 걸 아셨다고 했는데, 선수들도 크게 질 거라는 걸 미리 알았습니까.
 
  “그럼요. 다 알았죠. 제가 말했으니까요. 경기 전에 라커룸에서 선수들 모아놓고 ‘오늘 우리는 질 거다. 아직 저들에게 이길 실력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우리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어떻게 지는지, 이 순간을 통해 배워라.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가다 보면, 실력을 기르다 보면 우리는 16강에 진출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한국이 16강은커녕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없었잖아요?(1954~1998년 참가, 4무 10패) 깨지고 넘어지면서 부족한 점을 체크해서 보완책을 만든 겁니다. 오대영이 없었으면 16강도 없었을 겁니다.”
 
  ― 준비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야 하는지, 왜 이 방법밖에 택할 수 없는지를 코치와 선수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었죠. 축구는 이기려고 하는 것인데, 제가 계속 ‘우리는 진다’라고 하니까 앞뒤가 안 맞잖아요. 대패(大敗)하면 우리 팀의 체면이 깎입니다. 그건 맞아요. 차기 월드컵 개최국이라 전 세계가 한국팀을 주목할 때니까, 창피함이 더했죠. 하지만 체면 상하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크게 지는 경기를 통해 서너 걸음 앞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했어요. ‘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이건 너 개인과 우리 팀 전체의 소중한 경험이다’라며 선수들을 독려했습니다.”
 
 
  “최종 명단을 추릴 때가 가장 힘들었다”
 
  히딩크는 “준비 과정이 아니라 ‘대회 직전 최종 명단을 추릴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대회 직전까지 26~30명의 선수들과 훈련했습니다. 내부 경쟁을 극대화한 거죠. 이번 카타르 월드컵은 날씨를 감안해 최종 엔트리가 26명이지만, 보통은 23명만 갈 수 있잖아요? 탈락한 선수를 감독실로 부르고 통보하는 건 언제나 괴롭습니다. ‘넌 좋은 선수지만 23명에 들지 못했다. 미안하다.’ 때로는 같은 포지션에 이미 두 명의 좋은 선수가 있으니까, 세 명은 뽑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선수들의 실망한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슬픈 일이지만, 그건 감독으로서의 숙명입니다.”
 
  ― 월드컵 참가는 축구 선수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로망인데, 탈락 통보를 잘 받아들이나요.
 
  “네.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들이 얼마나 실망할지를 제가 아니까 제 마음도 착잡하죠. 주전 선수, 후보 선수 가리지 않고 팀 전체가 큰 야망을 품고 함께 고생했는데, 그야말로 마지막 순간에 탈락하는 거니까요. 감독이라면, 이런 어려움도 이겨내야 합니다.”
 
  23명 최종 명단을 추린 이후에도 문제는 계속된다.
 
  “주전 11명은 불만이 없어요. 경기에 나가니까. 12~16번째 선수도 불만이 없습니다. 교체 멤버로 출전할 수 있으니까요. 21~23번째 선수도 괜찮습니다. 대표팀에 뽑혔으니까 그 자체로 감사한 거죠. 팀에서 나오는 불만과 문제점의 80%는 17~20위 4명에게서 나옵니다. 그들의 에너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하느냐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김남일의 부상
 
  ― 가장 어려웠던 일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렇다면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저는 준결승전, 상암에서 맞붙었던 독일과의 일전을 잊을 수 없습니다. 0대1로 졌지만 밀리는 경기는 아니었거든요. 거의 골과 다름없었던 두 번의 찬스도 기억합니다. 둘 다 이천수가 관여했죠.
 
  “독일은 월드컵 역사를 통틀어 거의 지지 않는 팀으로 유명하죠. 실력도 뛰어났지만, 발락의 득점엔 승운(勝運)도 따랐습니다. 첫 슈팅이 이운재에게 막혔는데 튕겨나간 볼이 다시 발락 앞으로 왔으니까요. 2009년 2월 첼시에서 감독과 선수로 다시 만났을 때 보자마자 ‘발락, 그때 왜 골 넣었어?’라고 했습니다. 독일전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아주 멀고 험한 길을 달려와 이렇게까지 성공적인 팀을 만들었다는 기념비적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점은 따로 있어요.”
 
  ― 뭡니까.
 
  “아주 중요한 선수 하나가 부상으로 결장(缺場)한 겁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결정적 패인(敗因)입니다.”
 
  ― 그 선수가 누굽니까.
 
  “김남일입니다. 준준결승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다치는 바람에 뛸 수 없었죠. 제가 아까 스타플레이어에 대해 얘기했잖아요? 모든 카메라와 미디어는 스타플레이어를 주목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선수도 팀에 꼭 필요해요. 경기장에서 볼이 없을 때, 볼이 없는 지역에서의 움직임을 말하는 겁니다. 김남일은 대한민국 중원(中原)을 책임진 미드필더였어요. 상대 공격을 미리 막고 위험을 방지해 사라지게 만드는 특별한 선수였습니다. ‘진공청소기’라는 별명도 제가 지어줬죠. 김남일이 뛰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히딩크는 ‘오대영’ 상황에서도 자기 플레이를 꾸준하게 하는 선수는 김남일밖에 없었다며 독일 전 그의 부재(不在)를 거듭 아쉬워했다.
 
 
  축구와 문명의 공통점
 
2002년 6월 14일 인천에서 벌어진 한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킨 박지성이 히딩크 감독과 포옹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사진=조선DB
  ― 2002년 멤버들은 가끔 만납니까.
 
  “금년 5월에도 모두 모여서 저녁 만찬을 가졌습니다. 용사(勇士)들의 재회(再會)죠. 나의 박 코치는 베트남에 있으니까 못 왔고, 이미 고인(故人)이 된 유상철 등을 제외하고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왔어요. 오후에 만나 저녁 늦게까지 밥 먹고 예전 얘기하면서 떠들고 웃고 잘 놀았습니다. 현역 감독도 있고 코치도 있고 행정가도 있고…. 어제 TV를 보니 (최)진철과 (김)태영이 5인제 여자 축구팀 감독으로 나오더군요. 제 선수들이 무슨 일이든 축구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합니다. 특히 젊고 어린 선수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요. 젊은 세대에게 우리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야 발전하는 건 축구와 문명(文明)의 공통점입니다. 세대와 세대를 넘어, 그렇게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영웅(英雄)은 ‘문명과 역사(歷史)’를 말했다. 그의 역사관과 관련해, 언젠가 읽었던 일화가 떠올랐다. 조갑제(趙甲濟) 전 《월간조선》 편집장의 글이다.
 
  〈2004년 3월 나는 상미회(尙美會) 여행단과 함께 전자회사 필립스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공업도시 에인트호번에 가서 이 도시 축구팀 감독이던 히딩크 부부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필립스는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電球)를 유럽에서 맨 처음 대량 생산한 회사이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 일행을 축구팀의 홈 스타디움 식당으로 초대했다.
 
  일행 중 20여 명이 갖고 온 축구공과 티셔츠 등에 히딩크의 사인을 받았다. 일행 중 한 분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에서 산 책을 내밀면서 사인을 부탁했다. 나의 맞은편 자리에 있던 히딩크 감독은 책을 펴놓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만년필로 한 문장을 써서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귀하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아주 심각한 부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였다. 안네 프랑크 가족 등 많은 유대인이 네덜란드 사람들의 밀고(密告) 또는 협조에 의해 나치에 끌려가 희생되었다는 점에 대한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반성(反省)이 담긴 글이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사인을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깊이 한 다음 의미 있는 글을 써주는 히딩크 감독의 인격에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히딩크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표현이 절제되고 정확하다. 문득 실용적(實用的)인 네덜란드 사람처럼 속이기 어려운 민족도 없을 것이고, 명분론(名分論)이 강한 한국 사람처럼 속이기 쉬운 민족도 드물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히딩크는 “한국 선수단을 맡아보니 한국인들의 본성(本性)을 알 수 있었다. 감정의 기복(起伏)이 심하고 잘할 때와 못할 때의 격차가 매우 커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히딩크는 우리 여행단을 다음 날 경기에 초대까지 해주었다. “내일 게임엔 여러분을 위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출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 팀과 한 경기였는데 두 한국 선수가 맹활약한 덕분에 에인트호번이 3대0으로 이겼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 이때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안네 프랑크가 숨어 살던 곳이 제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아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매일 일기를 적었다는 건, 그녀가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는 뜻이겠지요. 진정한 영웅입니다. 제가 1946년생이잖아요. 제 아버지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셨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파일럿들을 도우셨는데, 일흔이 넘어서야 그때 일들을 조금씩 말해주셨어요. 불의(不義)에 맞서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저항했다는 점에서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겸손하게 이야기하셨는데, 그때 저는 개안(開眼)을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네덜란드 국민으로서, 그리고 축구인으로서 모두.”
 
  ― 안네 프랑크 일기와 축구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개인이 쓴 일기는 사소한 것이지만,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줬잖아요? 축구의 영향력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데, 저도 축구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싶습니다.”
 
  ― 축구 전도사시네요.
 
  “누구에겐 축구가 큰 이슈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정해요. 하지만 저는 축구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로 묶이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이념을 달리하는 세계의 정치인들은 모여서 축구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축구는 종교, 인종, 정치적 신념을 따지지 않으니까요. 같이 땀 흘리고 경기 후 맥주 한 잔 함께 하면 인류의 당면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 이념 가지고 바보처럼 싸우는 대신에 말이죠.”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축구는 매우 유용하고 훌륭한 사회 통합, 인류 통합의 수단이죠.
 
  “축구에서 상대방은 라이벌이지만, 그들이 없다면 경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축구로부터 이런 점들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히딩크는 ‘축구를 통한 인류 화합’을 말했다. 이상론(理想論)은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상을 실현해 보여주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히딩크는 이미 2002년 대한민국의 국민 통합에 기여하고 전 아시아인의 자존감을 드높여준 바 있다. 그래서 그의 말엔 힘이 실린다. ‘검증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방법’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면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사진=조선DB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히딩크가 이룩한 패러다임 체인지 혹은 개념돌파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히딩크는 대한민국을 ‘진정한 세계화’의 신세계로 데려갔다. 외국인에 대한 배타(排他)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나라나 공통이다. 히딩크는 외국인(外國人)이라도 대한민국을 위해 얼마든지 기여(寄與)할 수 있으며, 어느 한국인보다도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우리 마음속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장벽 하나를 거의 혼자 힘으로 허물고 녹인 것이다. 뱀발을 덧붙이자면, 체육훈장 청룡장 수상자이자 대한민국 명예국민 1호인 히딩크 감독은(한국 여권도 있다) 본인이 원할 경우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도 있다.
 
  히딩크의 중요한 공로를 딱 하나만 더 살펴보자. 그는 정신력(精神力)을 강조하던 우리 사회에 과학적 방법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심박수(心搏數), 근력 지표, 경기 중 주행 거리 등 세세한 데이터를 장기간 수집해 선수들의 실력이 언제 어떻게 향상되는지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알려줬다. 막연한 훈련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을 적용해 실력 향상을 시킨 뒤에 비로소 플러스알파로 정신력을 덧붙였다. ‘그래야 불필요한 노력과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메시지는 비단 축구에만 해당하는 사안은 아닐 것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주치의였던 송준섭(53) 강남제이에스병원 원장은 “히딩크는 세계인의 언어인 축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 위대한 통역자이자 스승”이라고 평한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는 ‘우리가 알던 세상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려준 구루’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송준섭 박사는 2014년 히딩크의 무릎을 수술했다.
 
 
  수술실의 ‘환자 히딩크’, “대~한민국!”
 
  두 사람은 2013년 10월 10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처음 만났다. 11월 벨기에에서 인공관절 수술을 받기로 예약을 마친 상태에서 히딩크는 송 원장으로부터 ‘제대혈줄기세포 수술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히딩크 감독은 “수술이 실패해도 인공관절 수술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한 달 뒤 연락이 왔다. “줄기세포 수술을 받겠다”라는 답변이었다. 무릎 연골 재생 치료제 ‘카티스템’이 식약청 허가를 득한 때는 2012년.
 
  “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골재생술을 막 시도하는 시점이라고 솔직하게 얘기했죠. 영문으로 된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벨기에 의료진은 ‘인공관절 수술을 하면 걸을 수는 있지만, 테니스와 골프를 다시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라고 했답니다.”
 
  ‘운동 영구 금지.’ 이것이 히딩크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타였다. 히딩크 감독은 2014년 1월 송 원장에게 제대혈줄기세포 무릎 수술을 받았다. 송 원장은 한국 의료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수술비를 한 푼도 안 깎아주고 다 받았다’라고 했다. 이 방법으로 시행하는 첫 수술이라 바짝 긴장하고 수술방에 들어갔는데 ‘환자 히딩크’가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바람에 ‘웃음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라는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수술 결과는 해피엔딩이다. ‘지팡이와 휠체어의 히딩크’는 현재 정기적으로 테니스와 스쿼시, 골프 그리고 축구를 하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수술 이후 지난 8년간 제 무릎 상태는 완벽합니다. 퇴행성관절염으로 오른쪽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있었어요. 뼈와 뼈가 맞닿으니 하루 종일 아팠죠. 밤에도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누가 밤새 긴 바늘로 무릎을 깊숙하게 쉬지 않고 찌른다고 생각해보세요.”
 
  송 원장은 수술 전 히딩크 감독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심한 관절염으로 연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무릎 뒤쪽 뼈에 골극(종아리 근육을 당기는 튀어나온 뼈)이 자라서 무릎을 완전히 펼 수 없었어요. 천천히 걷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줄기세포 무릎 연골 수술 1호 환자
 
송준섭 박사로부터 수술 경과에 대한 설명을 듣는 히딩크 감독. 사진=전형찬
  제대혈줄기세포 수술의 원리는 이런 것이다. 분만 후 아기의 탯줄에서 나온 혈액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해 배양한다. 이 세포를 무릎에 이식하면 없어진 연골이 다시 생긴다. 다시 송 원장의 설명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근원 세포인 줄기세포는 손상된 신체조직을 치유하고 재생시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수술 당시 히딩크 감독님은 60대 후반이었는데, 젊은이의 싱싱한 새 연골을 얻으신 거죠. 이번엔 왼쪽 무릎에 문제가 생겼는데, ‘더 나빠지기 전에 미리 수술하자’라고 하시더군요. 아, 줄기세포 수술이 만능은 아닙니다. 인공관절 수술이 필요한 환자도 있어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명문 구단 첼시 FC 홍보팀은 히딩크가 첼시 감독을 하던 2016년 ‘히딩크 감독의 무릎 수술 전과 후’라는 홍보물을 제작했다. 첼시 TV는 수술 전 45도 각도로 몸을 틀고 왼발로 한 발씩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히딩크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고, 두 발로 계단을 뛰어오르는 모습, 테니스와 축구를 하며 격렬한 동작을 소화하는 모습을 비교 방영해 화제를 모았다.
 
  다시 송준섭 원장의 말이다. “지금은 국내에서 줄기세포 무릎 연골 수술을 많이 합니다. 히딩크 감독님 덕분이죠. 감독님이 한 수술이라고 하면 신뢰감 급상승이거든요. 지금까지 줄기세포 수술을 2000회 넘게 했고 1호 환자가 히딩크 감독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세계화뿐만 아니라, 퇴행성관절염의 근본적인 치료법인 제대혈줄기세포 수술의 세계화에도 큰 공이 있으신 겁니다.”
 
  송 원장은 전 세계 최초로 줄기세포 무릎 치료를 주제로 한 SCI급 논문 5편을 미국 학회지 등에 등재했다. 필자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병원 로비에서 논문 내용과 왼 무릎 수술 전후 사진을 히딩크 감독에게 브리핑하기도 했다.
 
  “2017년엔가 히딩크 감독님이 ‘13년 만에 스쿼시를 처음 쳤다고 정말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코끝이 찡했고, 큰 보람을 느꼈죠. 히딩크 감독님의 사례가 저희에게는 움직이는 광고판입니다. K-의료를 널리 알린 것 같아서 뿌듯하죠. 감독님께서 가는 곳마다 수술 결과를 자랑하시거든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아니, 송 박사, 감사는 내가 해야지. 고통 없이 잠들게 해달라고 매일 신(神)께 빌었는데 당신이 완벽하게 나를 살렸잖아. 수술로 다시 얻은 무릎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야. 왼쪽 무릎도 잘 부탁해.”
 
 
  “언젠가는 피치에 나갈 수 없는 순간 온다”
 
왼쪽부터 필자, 히딩크 감독, 송준섭 박사. 사진=전형찬
  그렇다면 히딩크 감독은 축구도 다시 시작했을까?
 
  “제가 어릴 때부터 축구를 했잖아요? 지금도 바로 뛸 수 있는데 송 원장이 3주 동안 운동하지 말라고 하네요. 이봐, 송 원장, 공 가져와. 장 박사에게 내 상태를 보여줘야지. 네덜란드에서 매주 2~3회 공을 찹니다. (허정무, 이영표, 박지성 등이 활약했던) PSV 에인트호번, 아약스 등에서 뛰었던 은퇴한 노인들과 축구를 하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 언제나 축구 하는 걸 좋아합니다.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한 모든 이와 함께 축구를 계속할 겁니다.”
 
  ― 현재의 포지션은 어딥니까.
 
  “공격형 미드필더입니다. 제 초년병 시절의 포지션이죠. 수비수로는 뛰지 않아요. 수비력이 떨어져서 잘 뚫리거든요. 김남일 같은 선수가 지금 우리 팀에 있다면 참 좋겠어요.”
 
  ― 현역 복귀 계획은 없습니까? 다시 감독을 맡으실 의향이 있습니까.
 
  “아뇨. 제 나이가 70대 중반입니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피치에 더 이상 설 수 없는 때가 오죠. 요즘 네덜란드코치협회 회장을 맡아 감독과 코치들에게 조언하고, 제 경험을 젊은 세대에게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코치와 선수, 단장, 구단 대표에게 축구 발전을 위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재미있어요. 저 스스로가 노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매일 피치에 나갈 수 있는 나이는 아니잖아요? 지금은 젊은 세대가 예전에 제가 했던 일들을 이어받아야지요.”
 
 
  이탈리아 전에서 이기고 흐느껴
 
  ― 감독으로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여러 순간을 기억합니다. 2002년 한국, 유럽컵 4강에 진출했던 러시아(2008), 네덜란드 감독으로 준결승에서 브라질에 2대3으로 져 결승에 못 갔던 1998년 월드컵. 프로팀 감독으로는 첼시, 세계 최고의 클럽 가운데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 시절엔 세계 클럽선수권 대회에서 우승(1998)했죠. 첼시에서 FA컵 우승했던 순간도 잊지 못합니다.”
 
  ―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요.
 
  “많죠. 하나를 꼽으라면 2006년 월드컵 16강전 호주 대 이탈리아의 경기입니다. 이탈리아가 한 명 퇴장으로 10명이었는데, 종료 직전 페널티킥으로 1대0으로 이겼어요. 호주 감독을 맡아서 호주를 40년 만에 월드컵 본선으로 이끌었기에 국내외의 열기가 대단했죠. 우루과이와 대륙 간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승부차기까지 가서 이기고 본선에 갔는데, 2002년 한국 못지않게 난리가 났었어요.”
 

  ― 이탈리아의 페널티킥은 정당한 판정이었습니까.
 
  “호주의 루카스가 태클을 했는데, 이탈리아의 그루소가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체 접촉은 없었어요. 그래서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심판의 판정을 따라야죠. 이제 와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시 모 방송사가 재미있는 기획을 했다. ‘축구는 ○○이다’라고 빈칸을 남겨두고, 경기 직후 작가들이 결과에 맞춰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호주 대 이탈리아 경기 직후의 문장은 ‘축구는 때론 이 남자의 능력 밖이다’였다.
 
  이탈리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덧붙이자. 상대는 이탈리아, 경기장은 대전, 스코어는 0대1, 남은 시간은 10분. 홍명보도 빼고 최진철도 빼고, 수비수는 김태영 하나만 남겨놓은 대 도박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다 안다. 설기현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골든골에 힘입은 대한민국의 2대1 역전승. 피치에선 연신 어퍼컷을 날리며 환호했지만, 감독실로 들어온 히딩크는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전설적 명장에게도, 어마어마한 중압감(重壓感)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몇몇 방송사 카메라가 이 광경을 영상에 담았지만 방송하지 않았다.
 
  ‘8강전을 치러야 하는데, 감독님의 약한 모습(?)이 공개되는 건 우리에게 불리하다’라는 축구협회 관계자의 요청에 모든 사람이 군말 없이 따랐다. 특종보다는 8강이 먼저였다. ‘국민 대통합’의 실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축구는 제 인생 그 자체”
 
  히딩크는 코앞에 닥친 2022년 월드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월드컵에선 첫 경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첫 경기에서 지면 조별리그 통과가 어렵습니다. 누구는 이탈리아 전, 포르투갈 전, 독일 전을 말하지만, 2002년 첫 경기에서 폴란드에 ‘우아한 공격수’ 황선홍과 유상철의 연속골로 2대0으로 이긴 경기(부산 아시아드 경기장)가 가장 중요한 일전(一戰)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첫 경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2002년엔 유럽 리거가 페루자 소속의 안정환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토트넘의 손흥민, 나폴리의 김민재 등 여럿이니까, 좋은 결과를 기대해보겠습니다.”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우리의 영웅을 더 이상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무리 질문을 던졌다.
 
  ― 축구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축구를 하면서 저는 최고의 성공과 가장 쓰디쓴 패배를 다 맛보았습니다. ‘한 번 졌다고 실망하지 않고, 성공을 향해 길게 보고 나아가라’는 것이 축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축구를 통해 저는 전 세계의 친구를 얻었고, 축구계 이외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한 것도 축구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지요. 그래서 축구는 제 인생 그 자체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추억 그 자체다. 여전히 우리의 영웅이다. 영원한 영웅이다. 당신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국민이며 대한민국이 얼마나 멋진 나라인지를 알게 되었다. 늘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呪文)을 외치노니, 오 필승 코리아, 아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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