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인과의 차 한 잔 ⑤ ‘불가능’의 詩學을 탐구하는 시인 이성복

“이성복과 추성훈(이종격투기 선수)이 싸우면 이성복이 이긴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계명대 교수로 정년퇴임 후 4년 전 서울에 정착
⊙ “내게 詩는 인생 탐구. 예술은 자신의 전 생애를 거는 것!”
⊙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비유를 바꿔치기해서 삶이 얼마나 달라 보일 수 있는지 보여줘야”
⊙ “각방 쓰는 부부가 어쩌다 손을 스치면 화들짝 놀라듯 詩가 내 마음대로 안 돼요”
⊙ “무지하게 소심하고 겁이 많아. 그런데 남들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 말해”

李晟馥
1952년생.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同 대학원 졸업(문학 박사) / 前 계명대 불어불문학과·문예창작학과 교수 / 1977년 《문학과지성》 겨울호에서 시 ‘정든 유곽에서’ ‘1959년’ 두 편으로 등단 /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아, 입이 없는 것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래여애반다라》 《어둠 속의 시: 1976~1985》 등 / 김수영문학상, 소월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수상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이성복 시인. 여행 가방의 손잡이가 들어간 자신의 ‘B컷 사진’을 들고 있다.
  사랑으로 가는 먼 길.
 
  이성복(李晟馥·70) 시인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말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1980년대 이후 창비(창작과비평사)와 대척점에 있던 문지(문학과지성사) 사단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온 그의 시력(詩歷)은 ‘삶의 절개지로부터 능선에 이르는 여정’(문학비평가 이경호)으로 압축될지 모른다. 산정(山頂)을 향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그는 문학의 길을 걸었다.
 
  시인이 걸어온 길은 아주 좁고 먼 산길이었다. 그 길은 ‘헐떡거리는 개처럼 목이 마르고’ ‘비유도 허락되지 않은 울음’이며, ‘숨길 수 없는 노래’ ‘생에 대한 각서’지만 종국엔 문학이 인생을 어찌하리라는 믿음으로 혹은 사랑으로 혹은 배반으로 시를 써왔다.
 

  이성복 시인은 계명대 불문학과·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한 후 4년 전 서울로 올라왔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의 대구에서 36년을 보냈다. 지금은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살고 있다. 지난 7월 2일 그의 집필실 맞은편 북한산이 그렇게나 푸르게 보였다.
 
  이성복 시인은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이후 지금까지 8권의 시집을 냈다. 과작(寡作)이라면 과작이다. 최근의 시집이 2014년 낸 《어둠 속의 시: 1976~1985》이다. 시적 에너지가 충만하던 20~30대 무렵 쓴 시들을 기억의 저편 ‘어둠’ 속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따지고 보면 2013년 《래여애반다라》 이후 새로운 시를, 시집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에 대한 생각만큼은 밑바닥까지 투철한’ 그이지만 산고(産苦)가 깊어지고 있다. 어느덧 고희(古稀)의 나이에 이르렀다. 일흔은 《논어》에서 ‘뜻대로 해도 어긋나지 않는(從心所欲 不踰矩·종심소욕 불유구)’ 나이다.
 
 
  “마치 각방 쓰는 부부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처럼”
 
이성복 시인의 작업실 책상. 저 노트북 속에 ‘시 공장’이 있다. 시인은 요즘 ‘불가능의 시’를 탐색하고 있다.
  시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이성복의 18번은 ‘밤배’(둘다섯) 혹은 ‘칠갑산’(주병선)”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글이 오버랩됐다.
 
  “나에게 이런 딜레마가 있어요. 사실 시가 한때 전부인 시절이 있었는데 그땐 시가 방법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일정 기간 둘러보면 나한테… 내게 시는 인생 탐구 혹은 라이프 스터디의 일환이랄까, 일부랄까 그런 것입니다.
 
  처음부터 시를 인생 탐구로 시작했고 지금도 인생 탐구가 1번 자리죠.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시와 인생 탐구가 궤도를 따로 노니까 시로부터 한참 멀리 떠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에게 던지는 음성은 허스키 보이스의 미성(美聲)이었으나 메시지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에게서 “시로부터 멀리 떠나온 것 같다”는 고백을 들을 줄 몰랐다. 또 “그놈의 문학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인생 탐구 프로그램하고 시 프로그램하고, 둘이 잘 안 맞아. 컴퓨터로 치자면 두 개의 프로그램이 충돌해서 깨지고… 그런 느낌이 있어요. 내가 시를 가장 많이 썼을 때는 그게 한 몸이었는데 지금은 시가, 나한테는 어리석음이고 말장난이고…, 시에 대한 불신 같은 게 있는 거라. 어떻든 나와 결혼한 사이인데 지금은 황혼 이혼도 못 하고…, 그런 형편이지.”
 
  그러더니 이런 비유를 덧붙였다.
 
  “마치 각방 쓰는 부부가 어쩌다 손을 스치게 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처럼….”
 
  이 비유가 너무 적나라하다고 느꼈는지 “하하하” 하고 웃었고, 기자도 따라 웃었다. 문학과의 신접살림은 이미 깨어지고 갈등과 불화, 별거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 뜻밖이네요.
 
  “그렇다면 여기서 관계를 끝낼 것인가? 그건 모르죠. 끝날 가능성이 많지. 많은데, 그래도 어떻든 갈 데까지 가봐야지.”
 
  길 떠난 이의 허기진 노독(路毒)처럼 그는 고통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시… 시가 불편해. 내 인생이 정리가 안 되는 거라. 어쩌면 정리가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자꾸 하는지도 모르지만, 시를 쓰든 안 쓰든… 시에서 자유롭게 되면 끝인데, 이걸 놓기도 힘들고 잡기도 힘들고….”
 
  토로를 듣자니 그의 시론집 《불화하는 말들》(2015)에 나오는 인상적인 비유가 떠올랐다.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노파 역의 배우는
  ‌돌절구에 이빨을 부딪치는 연기를 하는데,
  ‌실제로 두세 개를 부러뜨렸다 해요. 저처럼 겁 많은 사람은
  예술 안 하면 안 했지, 그런 거 못 해요.
  ‌이런 게 예술가와 딴따라의 차이일 거예요.
  ‌예술, 자신의 전 생애를 거는 것!〉(10쪽)

 
  전 생애를 걸었던 그의 시적 여정이 위험에 처한 것일까. 시인과의 인터뷰를 위해 준비해간 여러 질문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땐 ‘사람이 시 없인 어떻게 살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성복 시인의 모습. 어느 작가가 찍은 사진이다. 시인은 대학교수이자 시인으로 살아왔다. 완벽증, 결벽증, 강박증의 모습으로 세상과 소통해 왔다.
  “스스로 한심할 때도 많고, 왜 이렇게 됐나. 그렇다고 스스로를 구박할 수도 없는 것이고. 시가 내게 1번이 되기는 바라는데 실제로는 마음이 자꾸 떠나.
 
  그럼 지금 나에게 1번이 뭐냐.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불교적인 선(禪)?
 
  ‘선’이라는 말도 불편하고 ‘깨달음’도 불편한데, 어떻든 내가 인생을 수용할 수 있는 어떤… 어떤 안목이나 관점들이 어느 날엔 세워졌다가 이튿날 무너지니까, 어쩌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둘 다 잃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과 문학이 피가 터지게 맞서는 살육의 전쟁터에서 시인이 꺼낸 화두는 쉽게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너무 가까이 있어 볼 수 없거나 묻기 전에는 알았는데 물어보면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뭔지, 왜 이런 생을 살아야 하는지 늘 관심을 가졌기에, 지금 와서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골프라든지, 세상적인 일들에 관심이 많았다면 이런 고민도 필요 없을 테지.”
 
  ― 문학으로 걸어갔기에 인생 문제를 화두로 잡을 수밖에 없겠지요.
 
  “난 사상을 (공부)하려 했는데 하다 보니 예술철학, 문학, 시로 다가섰어요. 그땐 시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카프카도 그랬는데, 처음엔 ‘왜 그럴까’ 하는 질문이 신기했다면, 지금은 ‘왜 그럴까 하는 질문을 했다’는 게 신기한 거라. 그땐 ‘사람이 시 없인 어떻게 살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그렇게 믿었고, 정말 그렇게 살았어요.”
 
 
  “한 편의 詩는 한 편의 인생 쓰기예요”
 
  시인이 말하는 시작(詩作)의 고통을 그저 짐작할 뿐이지만, 인생 탐구와 시를 향한 두 길이, 아니 하나로 이어진 길이 그에게 무척이나 진지하고 절실하며 거룩하게 느껴졌다. 삶의 천길 벼랑 혹은 절개지 난간에서 시와 마주한 그는 자신의 시력을 중얼거리듯 더듬어갔다.
 
  “1976년 대학(서울대 불문과)에 복학하고 77년에 등단한 후 3~4년은 정말 시 없이는 못 살 것처럼 살았으나 그다음부터는 시달리더라고. 어떤 이는 ‘(시가) 너무 어렵다’고 하고, ‘이해를 못 하겠다’ 하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진됐다고 할까.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문학으로부터 도피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죠. 재능에 대한 불신, 문학 자체에 대한 불신도 있겠고, 이 둘에 대한 불신이 섞여 있겠지요.”
 
  하지만 시인은 《불화하는 말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인생 쓰기예요.
  잘 쓰는 게 잘 사는 거지요.〉(78쪽)

 
  이성복 시인은 시를 잘 쓰기 위해 늘 몸부림쳤고, “비둘기 목 색깔처럼 순간순간 달라지는 언어의 빛깔에 민감”했다. 그는 늘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몇 해 전 그가 어느 문학강연 자리에서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서정시는 비정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비유를 바꿔치기해서 삶이 얼마나 달라 보일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시인에게 시는 저 깊은 절망, 비정한 현실, 온통 비가(悲歌)뿐인 사막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올의 시어를 내딛는 낙타의 절름발이 걸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쓸 지점이 있다면 不可能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내 시집에 나름의 서사(敍事)를 구현하자면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는 ‘아버지’를, 《남해금산》(1986)은 ‘어머니’를, 《그 여름의 끝》은 ‘당신’을 말했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테마는 ‘가족’이었고,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일상생활의 사물들, 《래여애반다라》는 인생 전 과정을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쓸 지점이 있다면 결국엔 ‘불가능(不可能)’… 불가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해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의 시를 쓰겠다”는 다짐을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서럽다’ ‘외롭다’의 (서정의) 문제가 아니고, 손댈 수 없다는 게 인생인데, 그 손댈 수 없는 이야기를 썼으면 합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지향할 인생에 대한 원대한 안목, 아니 원만한 혹은 원명한 (안목을) 가지는 게 아니라 돼지 10마리를 아무리 세어도 9마리밖에 안 보이는 게 생(生)이잖아요. 자기는 빼고 세니까….
 
  이를테면 있기는 있는데 은폐되어 사유가 안 되는 지점들. 그게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수학으로 치면 ‘공집합’에 해당하는 겁니다, 공집합. 공집합이 뭐냐 하면, 부분집합을 계산할 때 아무것도 없는 것도 집합의 하나로 넣는 게 공집합입니다. 다른 말로 복소수 혹은 허수(虛數)라는 말을 들어봤어요?”
 

  ― 워낙 수학을 놓은 지 오래되어서….
 
  “허수는 눈에 전혀 안 띄지만 그게 있어야 계산이 되는…, 일종의 맹점(盲點)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지향이 되지 않을까요?”
 
  그가 쓴 아포리즘 형식의 시론집 《무한화서》(2015)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95쪽)
 
  계속된 시인의 말이다.
 
  “그러나 어떻든… 시에 무언가를 담는 노력보다는 지금 당장은 내가 살고 있는 게 뭐며, 이 인생을 수긍하고 납득할 수 없다면 내게 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어느 작가가 찍은 이성복 시인의 얼굴. 그는 늘 겸손하고 문단에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더니 혼잣말을 하듯 이렇게 말했다.
 
  “내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이 꿈이다.’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인 줄, 현실인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삶이 깨지기 전에는 삶이 꿈인 줄 모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어떤 지점이 있겠지요.
 
  다시 말해 꿈속에서 오만 가지 일이 있지만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꿈 깨면 꿈 깬 ‘나’만 남는 거지. 우리 인생도 모든 게 리얼하지만, 눈감으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다만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고 보았다는 의식만 남는 거지요. 굳이 말하자면 그래요.
 
  그러니까 그게 문학과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고, 문학과 헤어지는 지점이기도 해요. 꿈 안에 있는 것을 현실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거든. 그런데 문학은 일종의 다른 꿈이니 인생의 또 다른 꿈을 (문학으로) 꾸는 것이니까.”
 
  이성복의 시 ‘그렇게 소중했던가’에 꿈과 삶의 변주(變奏)가 나온다.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이성복의 ‘그렇게 소중했던가’ 전문

 
 
  “시는 꿈이라는 현실과 현실이라는 꿈 사이에서 꾸는 더 짧은 꿈이에요”
 
어느 잡지에 실린 이성복 시인의 모습. ‘그의 데뷔 시집은 불도저 같은 전염력으로 당대의 정서에 불을 지폈고 뒤이어 내놓은 시집들은 그 신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써 있다.
  시 ‘그렇게 소중했던가’를 읽으면 삶의 통찰이 느껴진다. 그 통찰을 꼬집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어쩌면 시는 ‘말할 수 없는’ 양식인지 모른다. 이 ‘말 할 수 없는’ 것이 불가능이요, 이 불가능이 바로 이성복 시학(詩學)의 형식이자 내용이다. 그가 쓴 《무한화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것도 책의 첫머리에.
 
  ‌〈…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前提)를 무시하는 거예요. … 시는 진실과의 우연한 만남이에요. 시를 쓸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시는 무지(無知)가 주는 기쁨의 약속이에요.〉(12쪽)
 
  어쩌면 시를 통해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은, 캄캄한 지하실에서 켜는 한 개비 성냥불처럼 덧없고 무력한 일인지 모른다. 시인은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다.
 
  “그 불꽃은 우리를 위로해주거나 해방시켜주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불꽃이 사라져도 ‘우리가 보았던 불꽃’은 꺼지지 않습니다.”
 
  이성복은 그 꺼지지 않는 불꽃을 위해 “자기 생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고 투자며 투기가 바로 문학”이라고 했다.
 
  “시라는 것이 본래 ‘불가능’이고, ‘불가능’을 표현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해요. 실패하지 않는 시가 어디 있겠어요. 시 쓰기는 늪 속의 허우적거림처럼, 사막에서의 제자리걸음처럼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않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성장소설’ ‘교양소설’에서 보이는 원융(圓融)한 인생관의 터득과는 다른 것이지요.”
 
  문득 《무한화서》에 나오는 이 문장이 떠올랐다.
 
  ‌〈… 자기 꿈속에서 헤매는 사람은 누구나 중생이라 하지요. 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현실은 꿈보다 더 지독한 꿈이에요. 시는 꿈이라는 현실과 현실이라는 꿈 사이에서 꾸는 더 짧은 꿈이에요.〉(52쪽)
 
 
  “‘내가 그렇게 살았느냐?’ 그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뜻이고…”
 
  그는 시인이자 대학교수로 평생을 살았다. 시인의 길과 스승의 길 중 어느 길이 더 간절했을까.
 
  “내가 인터뷰를 겁내고 기피하는 이유는 아무런 할 이야기가 없기도 하고, 실패의 흔적을 보여줄 수밖에 없어서인데…, 학생들에게 어떤 도달한 길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막다른 골목에 세우는, 다시 말해 읽는 사람이 보기에 ‘이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식으로… 하하하.
 
  때로는 선생의 할 일이 생사를 건네주는 것인데, 여러 책에서 읽은 지식으로 학생들에게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었으나, ‘내가 그렇게 살았느냐?’ 그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뜻이고…. 또 한 가지는, ‘인생이란 어떤 해결책도 위안도 없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확인하는 길’이라는 점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데, 이 두 가지를 겸해서(가르쳤어요)….”
 
  대화 도중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어둔 ‘진정견해(眞正見解)’라는 글자를 보여주었다.
 
  “임제의현(臨濟義玄·?~867) 선사의 말인데 공부하는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참되고 바른 견해를 얻는 게 가장 급선무지. 참되고 바른 견해… 예를 들자면 내가 이쪽으로 보면, 이것밖에 절대 안 보여. 보는 각도, 관점을 정확하게 맞추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에요.”
 
  시인은 또 책장 한쪽에서 ‘노조면벽(魯祖面壁) 불통소식(不通消息), 이보진전(移步進前) 일림형극(一林荊棘)’이라고 적힌 프린트물을 찾아 기자에게 내밀었다.
 
  “옛날에 ‘노조’라는 선사가 있었는데 면벽 수도로 유명하신 분이지. 멀리서 누가 ‘도(道)’를 물으러 찾아오면 벽을 향해 돌아섰어. ‘도’는 말로 전하는 게 아니기에 ‘불통소식’이라고 한 거지. 불통소식… 굉장히 귀한 말씀입니다. 왜냐면 세상적인 게 다 통하는 것 같지만 세상적인 게 쓸모없는 지점이 불통소식인 겁니다. 한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가면 가시 형극처럼 나갈 수 없는, 빼도 박도 못 하는 지점, 그 지점이 바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불통소식’의 지점인 거지.”
 
 
  막다른 지점으로 몰아넣어 빼도 박도 못 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성복 시인이 요즘 마음에 새기는 한자 문장들. ‘타피부득시(嚲避部得時) 부득경의심(不得更擬心), 불의심시(不擬心時) 일체현성(一切現成)’이란 문장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이성복 시인은 소화가 안 된 기자에게 계속 경구(警句) 같은 문장을 쏟아냈다.
 
  “이런 말도 있어요. ‘향심사의상불급처(向心思意想不及處) 진일보간(進一步看)’이라고 마음과 생각, 뜻, 상상이 불급처, 그러니까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한걸음 더 가서 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더니 ‘타피부득시(嚲避部得時) 부득경의심(不得更擬心), 불의심시(不擬心時) 일체현성(一切現成)’이라는 문장도 설명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인데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는 의심, 즉 마음을 헤아리지 마라. 어떤 마음으로도 헤아릴 수 없을 바로 그때 모든 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면 여기에 도달하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어떤 방법이나 가능성이 다 무너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당신’이 찾던 그곳에 이를 수 있어요.
 
  내 생각에는 선(禪)이나 깨달음에도 두 가지 전망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꿈이고, 세상 모두가 내가 꾸는 꿈인 것이지. 다른 하나는 피할 수 없는 막다른 지점으로 몰아넣어 빼도 박도 못 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 지점 자체가 말하자면 ‘구원(救援)’이라는….”
 
  시인의 말을 듣자니 문득 《무한화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화 ‘롱쉽(The Long Ships)’에 나오는 얘기예요. 황금종(黃金鐘)을 찾으려고 섬을 파헤치던 사람들이 마침내 포기하고 곡괭이를 내던지자 종소리가 울려 퍼져요. 섬 전체가 종이었던 거지요.〉(21쪽)
 
이성복의 詩作法
 
  비틀기, 틈새 만들기, 어긋나기
 
  이성복 시인은 시론집 《불화하는 말들》(2015)에서 자신의 시작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적 글쓰기는 비틀기, 틈새 만들기, 어긋나기예요. 가령, ‘나는 밥을 먹고…’라는 말 뒤에 ‘밥그릇 속에 잠시 앉아 있었다’는 말을 끼워 넣으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나지요. 문장을 살짝 비틀기만 해도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요. 그건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섬광(閃光)이에요. 우리가 시를 쓰는 건 섬광과도 같은 문장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예요.”
 
  “시를 잘 쓰든 못 쓰든 시를 쓸 수만 있으면”
 
이성복 시인의 작업실 한쪽 책상에 꽂혀 있는 책들. 《김수영전집》 《헤밍웨이 단편선 1, 2》 《정신분석사전》 《카프카 평전》 《반고흐 영혼의 편지》 《스피노자의 철학》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 《의사지바고》 같은 책들이 눈에 띈다.
  ― 그래도 시가 고통스럽지만, 여전히 좋은 거죠.
 
  “문학 안에서 (인생) 탐사가 이뤄지면 더 바랄 나위가 없는데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문학 안에서 그런 탐사, 탐색을 한다면 모델이 누굴까 생각해보니, 가령 릴케 같은 사람이지. 예이츠나 프로스트일 수도 있고.
 
  그런데 문학이 잘 안 되는 거라. 한편으론 문학 자체에 대한 불신도 있고, 내 재능, 나 자신에 대한 불신도 있고.”
 
  ― 쓰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내가 글을 쓴다면 어떻게 쓸지 다 알아요. 왜냐면 글을 써봤고,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쳤기에 이렇게 저렇게 쓰면 된다는 걸 알아요. 알고 있으니까 한편으로 귀찮기도 하고, 양가감정이 다 있어. 뭣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 거기에 담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시인은 시 쓰기가 고통스럽다고 했다.
 
  “먹고 싶으면 자연히 음식에 손이 가잖아요. 그런데 시에 손이 닿으면 바로 밀어내버리는…. 앞서 말한 비유처럼 각방 쓰는 부부가 어쩌다 손을 스치면 화들짝 놀라듯. 그게(시가) 내 마음대로 안 돼요.”
 
  한숨을 쉬듯 이런 말을 보탰다.
 
  “난들 즐겁겠나. 제일 괴로운데. 시를 잘 쓰든 못 쓰든 시를 쓸 수만 있으면 괜찮겠는데, 인생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시인의 작업실에 꽂혀 있는 손바닥 크기의 을유문고판 시집 3권. 발레리, 타골, 릴케의 시집이다. 요즘도 즐겨 읽는다.
  ― 고희는 ‘뜻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는’ 나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시의 지평이 열릴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나보고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하고. 스스로도 강한지 약한지 모를 때가 있어. 이런 얘기를 하기가 좀 그렇지만, 팔십이 돼 글을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기보다 징그러워.”
 
  ― 하하하.
 
  “솔직히 말해, 이렇게 몸이 성할 때 빨리 갔으면 좋겠다 싶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애착 같은 게 별로 없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가는 육십에 서고, 시인은 칠십에 선다고,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인생에 의미를 둔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 ‘선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설 입(立). ‘선다’는 말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서너 살 된 아이가 한사코 떼를 써서 소를 몰고 갔다는 거야”
 
이성복 시인은 “내게 시는 인생탐구, 혹은 라이프 스터디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나이 어느덧 일흔에 이르렀으니 이제 새롭게 ‘설’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 교수라는 밥벌이에서도 이미 해방되었다. 글자 그대로 시인, 오롯이 시를 쓰는 자유인이 되었다.
 
  “내 특징이 뭐냐면 친구가 없어요. 제자들도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이가 없어요. 계명대 불문과와 문예창작과 학부에서 만난 이들과도 이후 관계를 안 맺었어요. 어떤 학생은 내가 시를 쓰는지도 모릅니다.”
 
  ― 그럴 리가요.
 
  “대구 문단, 서울 문단에서도 연락을 하는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학교 동창들과도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고…. 그 상태가 난 편해.
 
  의도적이라기보다 천성이 그래요. 오히려 관계를 만들면 내가 많이 불편했어. 사람들이 날 넣지도 않았고, 내가 들어가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고.”
 
  ― 냉정한 성격인가요.
 
  “뭔지 모르겠어. 어떤 사람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해요. 동료 시인 장옥관(계명대 문창과 교수) 선생은 ‘이종격투기 선수 추성훈과 이성복이 싸우면 이성복이 이기는 데 건다’는 말을 했어요. 그분이 빈말하실 분이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해가 안 가요.
 
  무지하게 소심하거든. 소심하고 겁도 많은데 아내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래요. 그러고 보면 한번 고집을 피우면 절대 물러나지 않았어요. 어쩌면 내가 겪고 있는 이 딜레마도 그 연장선상인지 모르겠어. 쉽게, 쉽게 가지 않는다고 할까. 뭐가 있으면 샅샅이 찾아서 원천격파하지 않으면 안 돼. 난공불락의 신경증적 야심이랄까.
 
  어린 시절 이런 일화가 있어요. 경북 상주 시골에서 이웃 마을로 이사 가는데 서너 살 된 아이가 한사코 떼를 써서 소를 몰고 갔다는 거야. 또 우두(牛痘) 맞을 때 하도 악을 써서 의사 선생님이 식겁했다고 해요. 심지어 국민(초등)학교 5학년 때 단식하고 버텨서 혼자 서울로 유학 갔다니까.”
 
 
  “마지막 돌을 어디다 놓을지…”
 
이성복 시인은 경북 상주시 오대리에서 아버지 이한구(李漢求)와 어머니 송정남(宋丁男)의 오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뒷줄 맨 왼쪽이 이성복 소년이다.
  1959년 상주 남부국민학교에 입학한 이성복은 공부도 1등이지만 글쓰기도 1등이었다. 시험지 답을 놓고 선생님께 고집을 피우다가 코피 흘리도록 얻어맞은 기억도 있다.
 
  “5학년 때 부산서 전학 온 아이로부터 상주에서 1등을 해도 도시로 나가면 30등밖에 안 된다는 말이 듣기 싫어서 서울에 있는 학교로 갔어요. 서울 갈 집안 형편이 안 됐지만 글로 출세하겠다, 서울 가서 출세하겠다고 생각한 거지. 우리 집이 몰락한 양반 가문입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자손이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외손 집안입니다.
 
  처음엔 문학이 아니고 출세해 가문을 빛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경기고에 들어가 웅변반 반장을 했거든. 출세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때 웅변반 선배가 이철·유인태 전 의원이고 후배는 박원순 전 시장이지.
 
  그런데 고2에 올라가면서 문학과 사상, 루소가 갑자기 당겼던 거야. 이후 정치 지망은 다 날아가버리고 문학에 빠져들었지요. 어떻든 남한테 지고는 못 살았는데….”
 
  ― 아내나 아이들한테는 져줘야 가정이 화목하잖아요.
 
  “마찰 없이 살았지. 내가 물어보거든. ‘불편한 사람이냐 편한 사람이냐’고. 난 뭐든지 잘 먹어요. 아침에는 토스트, 점심은 햇반, 저녁은 누룽지를 먹고. 고기나 생선은 일절 안 먹어요. 40대부터.”
 
  ― 아내는.
 
  “자연히 나를 따라오지.”
 
  ― 아이들은.
 
  “다 출가했는데 안 먹기를 바라지. 육식을 하면 느낌이 안 좋잖아요.
 
  어떻든 내가 까다롭나요? 까다롭다면 한없이 까다롭고 문제가 없다면 문제없는 것이지.
 
  내가 먹는 것은 늘 풀이지만 늘 맛있게 먹거든.
 
  일정 범위 안에선 절대적으로 편한 거야. 그런데 나머지에 대해선 벽을 쌓고 있는 거지.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고. 바늘구멍 같은 통로를 만들어 소통하지요.”
 
  ― 이렇게 살아가는 게 시인의 길인가요.
 
  “그렇게는 생각 안 해요. 시인도 여러 종류니까. 시도 여러 가지라 생각해요. 정신적 모험도 모험이듯이.”
 
  ― 문학과 삶을 그렇게 일치시켜야, 헌신해야 작품이, 좋은 시가 나오나요.
 
  “일장일단이 있고, 내가 쓰는 시가 있을 뿐이고 이게 전부라 할 수도 없지요. 그렇게 살아왔기에… 사방이 막혀서 출구가 없어 보이는데 마지막 돌을 어디다 놓을지….”⊙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207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