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 受賞 이상웅 대한럭비협회장 : 월간조선

기적이라는 말이 딱 맞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승부였다. 상대는 럭비 강국인 홍콩.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작은 빈틈도 결코 내주지 않았다. 경기종료 1분 전. 스코어는 7대 0. 이대로라면 완패는 수순이었다. 그때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막판 30초 전, 극적인 동점골. 가까스로 얻어낸 연장전, 그리고 12대 7로 역전승.

‘말이 돼?’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진짜 있었던 일이다. 2019년 11월 24일, 인천 남동아시아드 럭비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 결승전에서다.

경기를 끝낸 선수들은 서로를 얼싸안다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땀인지, 눈물인지를 하염없이 흘렸다. 겨울 초입, 차디찬 경기장 바닥은 뜨겁게 달궈졌다. 약 100년간 불모지였던 땅에 새싹이 돋았다. 장장 96년이 걸렸다. 4년마다 열리는 ‘그 흔한’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기까지. 그날, 선수들 뒤에서 가슴으로 운 이가 있다. 이상웅 대한럭비협회장(세방그룹 회장·63)이다. 그는 “럭비 불모지던 한국에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했다.

열악한 환경 속 이룬 쾌거

지난 2019년 11월 24일 대한민국 럭비팀이 96년 만에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한국 럭비 사상 최초다. 사진=대한럭비협회 제공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묻는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습니다. 대학 합격, 결혼식, 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다음이 바로 2019년 11월 24일입니다.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전율이 일어요. 혹시 그날 경기 보셨습니까? 영상으로 꼭 한 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극적인 동점 트라이와 연장전, 그리고 결승 진출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영화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중영화’는 아니다. 럭비대회는 월드컵과 올림픽에 이어 전 세계 스포츠인들의 ‘3대 축제’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인기가 적다. 1923년 도입돼 역사는 꽤 깊지만, 럭비 선수는 10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실업팀 3개(한국전력공사·포스코건설·현대글로비스)와 국군체육부대, 대학팀 4개(고려대·연세대·경희대·단국대)가 고작이다. 이 회장에 따르면 취미 인구까지 모두 합쳐도 ‘럭비인’은 1000명 안팎이다.

여느 비인기 종목이 그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일군 쾌거인 셈이다. 지난 11월 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세방그룹 본사에서 만난 이 회장은 앉자마자 이번 승리가 얼마나 거두기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2020 도쿄올림픽에 럭비 종목은 전 세계 12개국만 참가한다. 이때 출전권은 국가별이 아닌 ‘대륙별’로 배정받는다. 아시아에서는 단 한 나라만 뽑는다. 이는 한국에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방식이다. 아시아권인 홍콩, 일본, 중국이 모두 럭비 강국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올림픽 개최국은 제외한다는 경기규정에 따라 일본은 빠졌지만, 예선전에서 중국, 홍콩과 맞붙어야 했다. 축구에 빗대자면 월드컵에서 한국이 독일과 브라질을 차례로 물리친 수준이다. 이 회장은 “국가대표팀의 실력 49%와 정신력, 운 등 2%가 더해져 우승을 거둔 것 같다”면서 “그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을 흘린 선수들의 노고가 결실을 맺었다”고 했다.

럭비의 ‘럭’字도 몰랐다

천금(千金) 같은 기회. 사실 이를 잡은 데는 이상웅 회장의 숨은 조력도 크게 한몫했다. 이 회장은 2015년 2월 대한럭비협회의 제2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놀랍게도 그간은 럭비의 ‘럭’자도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제가 해병대 장교(중위)로 전역했는데, 해병대 모임에서 럭비선수 아들을 둔 동문이 제안을 하더군요. 협회장 자리가 공석인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처음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럭비 경기를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설득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30년여간 기업인으로만 살았던 그는 결국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원리는 똑같다’는 생각에 도전을 결심했다. 문외한이던 건 오히려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협회 내 고질적인 병폐를 ‘쿨하게’ 처단할 수 있었다.

“취임 당시 협회는 완전히 표류상태였습니다. 전임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1년 반째 공석이 이어진데다, 직원 간 파벌 형성에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죠. 쓸데없이 새는 돈부터 시작해 재정상황도 엉망이었고요.”

그는 “이사회 또한 100% 럭비 경기인 출신으로 구성돼 마치 동호회처럼 운영되고 있더라”면서 “대대적으로 새판을 짰다”고 했다.

“물론 경기인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나 한 단계 도약하려면 다양한 외부 전문가들도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비율을 50대 50으로 맞췄습니다. 부임 후 가장 먼저 이사진 공고를 냈어요. ‘한국 럭비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누구든 환영’이라고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일일이 면접 보면서 이사회를 꾸려갔습니다.”

백지상태에서 사무국을 재정비했다. 이사진이 탄탄해지니 지속적 발전이 가능한 선순환 구조가 구축됐다. 조직 투명성을 확보한 후에는 재정을 확충해나갔다. 난파 직전의 배는 그렇게 차츰 닻을 올리기 시작했다.

결승전 한국 유치 일등공신

내부 살림을 어느 정도 정비하고 난 뒤에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월드럭비와 아시아럭비연맹과의 소통 창구를 마련했다.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수출 교두보를 확보한 세방그룹의 경영 노하우를 ‘스포츠외교’에도 접목한 것. 그 결과 2015년 말, 홍콩 소재 아시아럭비연맹에서 최초로 한국인 집행위원을 선출했다. 이를 통해 현지 소식을 직통으로 접하는 건 물론 의사결정에도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아시아럭비연맹에서 도쿄올림픽 예선 경기를 어디서 치를지 회의했는데, 집행위원이 그러더군요. 이대로 가다가는 자연스레 홍콩에서 열릴 것 같다고요. 아, 이거 안 되겠다 싶었어요. 홍콩은 안 그래도 럭비 강국인데, 홈 어드밴티지까지 누리면 우리 팀 패배는 자명하니까요. 무조건 한국에서 유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직접 연맹을 설득하는 한편 ‘아시아 럭비의 균등한 발전을 기한다’는 명목의 발전기금도 쾌척하기로 했다. 무려 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 주변에서는 말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그게 ‘신(神)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발전기금을 내고 2~3개월 뒤에 연락이 오더군요. 한국(인천)에서 열자고요. 아마 홍콩에서는 ‘가서 가뿐히 이겨주고 오자’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하하.”

그는 “큰돈이라면 큰돈이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홍콩협회장은 이 판정을 뒤집기 위해 얼마를 쓸까. 만일 과거로 돌아간 홍콩협회장이 ‘1000만 달러(약 110억원)를 줄 테니 결과를 바꾸자’고 한다면, 나는 바꿀 것인가. 절대 안 바꿀 겁니다. 절대요. 그 정도로 저한테는 값진 결과입니다.”

正道경영의 원칙

지난 10월 15일 이상웅 대한럭비협회장(오른쪽)은 한국 럭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이유에서 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사진=대한럭비협회 제공

궁금했다. 그렇게까지 공을 들인 이유가 뭔지. 평생을 럭비 ‘덕후’로 살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협회장 자리만 유지하다 임기만 채우면 된다? 그럴 거면 애초에 안 하는 게 낫죠. ‘원해서든, 원치 않게든 한번 맡았으면 제대로 하자’는 게 제 철학입니다. 무릇 조직의 리더가 됐으면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는 “회사 경영이나 협회 운영이나 원칙은 똑같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이 경영하는 세방그룹은 종합 물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방㈜’과 로케트 배터리로 친숙한 ‘세방전지㈜’ 등의 계열사로 구성돼 있다. 창업주인 이의순 회장이 1965년 설립해 일찍이 매출액 1조원을 돌파한 중견기업이다. 그는 “정도(正道)경영을 통해 세방이 지난 5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경제에 이바지한 것처럼 협회 운영에도 같은 기준을 세웠더니, 비주류 종목 경기의 발전을 끌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도 그의 공을 인정했다. 이 회장은 지난 10월 15일 “럭비협회의 행정・재정 지원, 협회 홍보, 국제 활동 등에 헌신적으로 노력해 럭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을 받았다.

럭비의 매력

한국 럭비 국가대표 선수들이 홍콩을 상대로 승리한 후 이상웅 대한럭비협회장을 헹가래하고 있다. 사진=대한럭비협회 제공

그의 말 마디마다에는 럭비에 대한 애정이 스며 있었다. 그중 하나. ‘비인기 종목’ 대신 ‘저(低)인기 종목’이라는 단어를 썼다. 럭비의 인기가 낮은 것일 뿐, 없는 건 아니라는 뜻에서다. 이 회장은 “럭비 시합이 늘어나고 지상파에서 경기 중계만 해줘도 인기는 급격히 올라갈 것”이라면서 “그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운동”이라고 했다.

“럭비에서는 공을 앞으로 못 던지게 돼 있습니다. 몸은 계속 전진(前進)하면서도 공을 옆과 뒤로만 던질 수 있죠. 따라서 팀원의 절대적인 서포트가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나아갈 수가 없어요. 7인, 15인의 팀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영국 등 럭비 종주국에서 학생 때부터 ‘럭비 정신’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럭비의 중심철학은 ‘올 포 원(All for One), 원 포 올(One for All)’이다. 모든 선수는 공을 가진 한 사람을 지원하고,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뛰어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영국에는 이런 말도 있다. “축구는 불량배들이 하는 신사적인 스포츠이고, 럭비는 신사들이 하는 불량한 스포츠(thug’s game)다.”

“거구(巨軀)의 선수들이 보호 장비도 없이 부딪히고 넘어지며 격렬히 뛰는 스포츠죠. 굉장히 터프해 보이지만 동시에 무척 신사적입니다. 경기가 끝나면 두 팀이 마주 서서 이긴 팀이 먼저 진 팀에게 엄지를 세워주고 진 팀의 퇴장을 박수로 환송해주기도 합니다. 어느 스포츠보다 규율이 엄격하다는 점도 매력 중 하나입니다. 한번 휘슬이 울리면 심판에게 무조건 복종합니다. 심판 판정에 대한 불복이나 사소한 항의가 없죠.”

럭비에서 경기 종료를 ‘노 사이드(No Side)’라 하는 이유다. 타 경기처럼 ‘타임아웃’이나 ‘게임오버’가 아니다. 이제 경기가 끝났으니 어느 편도 없게 됐다는 말이다.

도쿄올림픽 각오

코로나19로 도쿄올림픽 출전은 1년이 연기된 상태. 상심은 없을까.

“취소된 게 아니라 1년 연기된 것뿐입니다. 경기가 미뤄진다고 선수들의 실력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바이러스는 개인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컨트롤 가능한 부분을 신경 쓰는 게 최선일 겁니다.”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정진하다 보면 올림픽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거라 생각한다”면서 “선수들 또한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묵묵히 훈련에 임하고 있다”고 했다.

“냉정하게 말해 12개 출전국 가운데 한국은 12위입니다. 객관적인 순위가 그래요. 하지만 스포츠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반신반의하던 준결승도 이뤄내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부터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이변(異變)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제 목표는 1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