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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월북시인 설정식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산 지식인의 비극적 末路”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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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美 유학… 광복 후 美 군정청 근무하다 北 인민군 입대
⊙ 1951년 개성 휴전회담 朝中대표단의 영어통역관… 53년 美 스파이 혐의로 처형
⊙ “영어로 말할 때 설정식의 깊고 울리는 음성은 마치 한민족의 슬픈 역사의 메아리 같아”
⊙ 헝가리 종군기자 티보 머레이와 우정 나눠… 2005년 방한해 설정식 가족과 만나
시인 설정식의 30대 모습이다.
  지난 2016년 5월 110번째 연세대 국학총서로 간행된 《근현대 한국의 지성과 연세》(혜안 刊)라는 책이 있다. 20세기 한국을 빛낸 연세대 출신 선구자의 학문적 업적을 담은 책이다.
 
  위당 정인보(鄭寅普·1892~?), 유석 조병옥(趙炳玉·1894~1960), 한글학자 정태진(丁泰鎭·1903~1952), 근대 수학을 개척한 이춘호(李春昊·1893~1950), 한국 물리학계의 대부 최규남(崔奎南·1898~1992)과 함께 시인 설정식이 담겨 있다. 시인으로 연희전문학교 하면 윤동주(尹東柱·1917~1945)가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설정식은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美 유학파와 ‘미제 스파이’
 
시인 설정식의 차남 희순씨(왼쪽)와 삼남 희관씨.
  설정식(薛貞植·1912~1953). 시인이자 소설가, 영문학자다. 호는 오원(梧園), 하향(何鄕). 1912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독립운동가이며 개신 유학자인 오촌(梧村) 설태희(薛泰熙·1875~1940)의 4남 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 마운트유니언대학과 컬럼비아대학을 다녔다. 아버지의 위독 소식을 듣고 귀국해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해방 후 미 군정청 여론국장과 과도입법의원 부비서장으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입대하여 월북, 1951년 개성 휴전회담 조중(朝中)대표단의 영어통역관으로 일했다. 당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신념으로 지지했다고 해도 직접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한 유학파의 월북에 많은 이가 충격을 받았다.
 
  1953년 북한의 남로당계 인사 숙청 과정에서 ‘미제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박헌영, 임화, 이태준 등과 함께 처형됐다. 주요 작품으로 신문연재 소설인 〈청춘〉 〈해방〉 등을 비롯해 1947년부터 2년간 《종(鐘)》 《포도》 《제신(諸神)의 분노》 등 시집 3권을 잇달아 출간했다.
 
  번역에도 힘써 해방 후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하므(햄릿)》(1949년 9월)을 완역하는 등 해방공간인 1946년부터 4년간 폭넓은 작품 활동을 했다. 설정식은 월북 문인이란 점에서 베일에 가려졌으나 1987년 10월 19일 정부의 월북작가 문학 작품 2차 해금 대상에 포함되면서 조명되기 시작했다.
 
  설정식은 아내 김증연(金曾蓮· 1914~1977)과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한국일보》 사회부 베테랑 기자로 활약했던 막내 희관(薛熙灌·74)씨가 평생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왔다. 그의 말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남기신 시집 3권과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본인 《햄릿》, 그리고 빛바랜 사진들을 신주 모시듯 간직해왔어요. 월북작가 해금 조치 후 모(某) 출판사에서 전집을 내겠다고 책들과 사진 몇 장을 가져갔는데 몇 달 뒤 사옥을 이전하면서 분실했다는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경우를 당했습니다.
 
  시집들은 서울대 도서관 등지에서 어렵사리 복사해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햄릿》은 딱한 사정을 들은 이성부(李盛夫) 시인이 소장하고 있던 원본을 주어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만 세 살 때 아버지가 월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 석 자는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가 어느 때는 원망의 ‘주홍글씨’였다. 부재(不在)라는 끝없는 그리움이 선친의 편린을 찾게 만들었다. 그런 중 설정식 탄생 100주년인 지난 2012년 방일영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설정식 문학전집》(산처럼 刊)이 세상에 나왔다.
 
  지난 8월 26일 서울 서초구에서 설정식의 차남 희순(薛熙淳·79)씨와 삼남 희관씨를 만났다. 기자는 그들을 통해 한 지식인의 슬픈 초상(肖像)과 비극적 가족사를 듣게 되었다.
 
 
  아들이 부르는 평생의 思父曲
 
  삼남 희관씨의 말이다.
 
  “부산 피란 시절,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학년 초마다 가정환경을 조사했죠. 어느 해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다에 손을 들었고 다음 해는 돌아가신 쪽이었어요. 아버지는 해마다 막내아들의 머릿속에서 생과 사를 반복한 셈입니다.
 
  큰형님(薛熙澣·설희한・작고)과 누이(薛貞惠·설정혜·80)는 서울 할머니 댁과 친척 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부산 집에서 어머니가 둘째 형과 저를 데리고 사셨습니다. 매일 새벽 아버님의 생환을 바라시던 어머님의 독경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방 한구석 조그만 상 위에 갓 지은 쌀밥과 정화수를 올려놓고 불경을 읽으시며 아버지의 무사귀환을 비셨죠.
 
  지금도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부분적으로 외울 수 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육자진언(六字眞言)을 암송하셨죠. 제가 등교할 때도, 중학교 시험일에도, 소풍을 갈 때도 어머니는 ‘옴마니반메훔’을 외시며 제게도 그리하라는 눈빛을 보이셨습니다.
 
  지금은 개신교 신자이지만 길을 가다가 심인당 도량을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옴마니반메훔’을 외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부처님에 의지해 홀로 자식을 키우느라 신산(辛酸)의 세월을 보내신 어머니는 평생의 한을 못 풀고 1977년 어린이날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2004년 펴낸 시집 《햇살무리》에 ‘아버지’란 시가 있다.
 
  이데올로기의 홍수 속에/ 모습도 남기지 않은 채 휩쓸려간 사람/ 그래서 나는 그의 얼굴을 모른다/ 옆모습 뒷모습도 허망하다/ 목소리는 어땠나 키는 몇 척이었나/ 도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30대 청년의 정면 사진 한 장이/ 한평생 영정으로 남은 사람이여
 
  (설희관의 ‘아버지’ 중 1연)

 
  차남 희순씨의 말이다.
 
  “형(설희한)의 증언에 따르면, 6·25전쟁이 한창일 때 경남도청 담벼락에 세워놓은 그림에서 북에서 처형된 면면들을 보게 됐다고 해요. 조마조마 가슴 졸이던 그 흉한 비보에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 이제 다시는 아버님을 뵐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해요.
 
  저는 1·4후퇴 때 공주를 거쳐 부산에서 초중고를 다녔습니다. 커가면서 의문이 계속 남았죠. 왜 아버지는 집안 다른 분들과 달리 홀로 북으로 가셨을까, 하고 말이죠. 남기신 문학작품 속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지요.
 
  어머니는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염불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염불, 그리고 자식을 챙기는 일, 그것뿐이셨죠. 그러나 자식들은 어머니를 잘 챙겨드리지 못했어요.”
 
  장남 설희한이 2017년 펴낸 시집 《수선화》에 ‘불효자의 노래’라는 시가 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항상 입 다문 채/ 우물 우물 우물//
 
  처자식 버리고 월북한 뒤 소식 없는/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주문을 외우셨다/ 입속으로 “옴마니반메훔”//
 
  입 꼭 다문 채 “나무아미타불”//
 
  쌀 한 보시기/ 절에 가져갈 자루에 떠 놓고는 “관세음보살”//
 
  아궁이에 불 지피며/ 또 우물 우물 우물//
 
  밥 안치면서도 우물 우물 우물/ 밥 푸면서도 우물 우물 우물/ 염송을 하셨다//
 
  내가 열네 살 때/ 북으로 가버리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미움이 항상 엇갈렸다//
 
  마흔도 안 되어 홀로 되신/ 어머니의 부처님을 향한/ 염송 소리와 기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설희한의 시 ‘불효자의 노래’ 전문)

 
 

  헝가리 종군기자를 통해 드러난 아버지의 죽음
 
왼쪽 사진은 1951년 개성 휴전회담장 부근에서 북한 인민군 대표단의 지프에 탄 설정식(맨 왼쪽). 오른쪽 사진은 개성 휴전회담에서 조중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설정식(맨 왼쪽).
  설정식의 아내는 전쟁 중 남편의 안부를 알지 못했다. 낯선 인민군 군복을 입고 판문점 휴전회담 장소에 통역관으로 참석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나중 일이다.
 
  6·25 전에도 자주 형사들이 설정식을 찾으러 서울 명륜동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때까지도 “아직은 안녕하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53년 8월6일자 《동아일보》에 아버지가 박헌영 등과 함께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었죠. 당시 아버지 나이는 마흔한 살. 그때 돌아가신 것을 알았지만 작고하신 날짜를 몰라 아버지의 생신날(음력 8월 9일)에 제사를 지냈어요.”(설희관)
 
  “또다시 아버지 소식을 들은 것은 1962년 9월이었죠. 대학 시절 우연히 책방에서 《사상계(思想界)》를 읽다가 헝가리 종군기자인 티보 머레이(Tibor Meray)가 쓴 〈한 시인의 추억, 설정식의 비극〉을 읽고서야 아버지의 비극적 최후를 생생히 알게 됐습니다.”(설희순)
 
  헝가리의 소설가이자 종군기자인 티보 머레이는 1951~52년까지, 그리고 1953년에 헝가리 공산당 중앙기관지 《스자바네프(Szabad Nep・자유인)》의 특파원으로 한국, 정확히는 북조선을 찾았다. 14개월간 머무르며 6·25전쟁의 참상과 판문점의 휴전 조인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북한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고 한다.
 
  머레이는 휴전 후 헝가리로 돌아갔으나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의 한 잡지에 〈한 시인의…〉를 기고했다. 1962년 당시 월간지 《사상계》가 이를 번역해 보도한 것이었다.
 
  머레이의 글에 놀랍게도 설정식의 육성이 그대로 실려 있다. 설정식은 자신의 짧지만 마디 굵은 삶을 벽안(碧眼)의 종군기자에게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글에는 “남에서 북으로, 한 독재를 피해 다른 하나의 독재로 간 한 인간의 비극”이 담겨 있다.
 
미 군정청에 근무하던 30대 중반의 설정식. 사진 배경은 경복궁으로 보인다.

  〈… 나(설정식)는 1912년 함남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이른바 선비였다. 혁명가는 못 되었지만 그의 농업에 관한 저술에서 그는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암시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그 저서를 몰수하였다.
 
  여덟 살 때 서울에 와 살게 되었다. 서울에서 농업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 거기에 가담했다는 죄로 퇴학당하였다. 그 뒤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봉천(奉天)에 갔다. 그러나 1년 후에 소위 만보산사건이 일어나 한중 양국 학생 간의 충돌로 나는 봉천에 남아 있지 못하게 되었다. 북경에 잠시 머문 뒤 나는 서울에 돌아와 신교에서 경영하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거기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36년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하이오주 마운트유니언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다시 컬럼비아대학에서 2년 더 연구하였다. 나는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고국에 돌아왔으나, 아무 일자리도 얻지 못하고 농장에서 일하였다. 농장에서 일한 몇 해 동안은 허송세월이었다. 나의 저술을 출판할 기회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독서만이 유일의 기쁨이었다. 종전과 해방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남한에 미국인들이 들어왔을 때, 나는 희망과 낙관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처지가 마침내 나아지리라 믿었다. 나의 대학 은사의 권고로 군정청 공보처에서 1년가량 일을 보았다. 나는 그 후 1947년 1월까지 미 군정청 과도입법원의 사무차장 일을 맡아 보았다.
 
  내가 공산당의 지하조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때 일이었다. 나는 미국인이 나를 쌍수를 들어 받아들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로 말하면 오하이오주의 대학을 나왔고, 영어를 잘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날 필요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미국인에 실망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자기네 군사기지가 있는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군사기지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나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전과 다름없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무런 경제적 향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또 그들이 부패와 인권의 억압을 못 본 체하고, 그 무자비한 독재자 이승만만은 전폭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48년 나는 《서울타임스》라는 영자신문의 편집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내가 그 신문을 좌경케 했다고 하면서 탄압하였다. (중략) 인민군이 서울로 진입하였을 때, 나는 잠시 작가 동맹의 일을 보다 자원입대하였다. 나는 가족과 아내와 세 아들과 외딸과 작별하였다. 나는 그들의 소식을 통 듣지 못한다. 군이 후퇴할 때 나도 따라 후퇴하였다. 심장병으로 입원했다가 지금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다.…〉

 
 
  ‘키가 작았고 몸도 약했으며 얼굴은 앳돼…’
 
  희관씨의 말이다.
 
  “선친은 1951년 개성 휴전회담 조중(朝中)대표단의 영어통역관으로 일하셨습니다. 티보 머레이는 1951년 8월 22일 밤 휴전 협상지 개성의 적막을 깨뜨린 폭발음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열린 미군과 조중대표단 간 회의장에서 선친을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티보 머레이는 〈한 시인의 추억, 설정식의 비극〉이란 글에서 통역관인 설정식을 이렇게 묘사했다.
 
  〈… 장대좌(張大佐·조중대표단 수석연락장교)의 바로 뒤에 40세가량의 한 장교가 통역으로 서 있었다. 이 장교는 자기 상관보다 키가 작았고 몸도 약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앳돼 보였다. 그러나 장대좌의 말을 영어로 통역할 때 그의 깊고 울리는 음성이 마치 한민족의 슬픈 역사의 메아리인 양 밤의 적막을 뚫는 것이었다.…〉
 
  계속된 희관씨의 말이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문학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티보 머레이 역시 낯선 개성에서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휴전협상의 지루함을 견디며 저녁이면 서로의 숙소를 오가며 보드카나 부다페스트에서 보내온 브랜디를 마셔가면서 밤늦도록 ‘후세에 남은 《맥베스》의 원고가 진짜냐, 아니냐’ ‘서풍부(西風賦) 같은 시를 바르게 번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등을 논하셨다고 합니다.”
 
  티보 머레이는 막바지 전쟁과 휴전협정으로 들끓던 1953년 여름, 다시 한국을 찾았다. “휴전협정 조인식 날 새벽 개성에 도착, 판문점의 모든 천막을 뒤졌으나” 설정식을 찾을 수 없었다. 며칠 후 평양에 가서 ‘미국 스파이와 반역자’에 대한 정치적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의 1년 만에 설정식을 다시 보았다. 수인(囚人)들은 꿰맨 자국이 선명한 다 해진 옷을 입고, 등 뒤에 죄의 경중의 순으로 1에서부터 14까지의 번호가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설정식은 ‘맨 끝’에 있었다. ‘맨 끝’의 의미는 뭘까
 
  “14명 중 죄가 가장 가볍다는 뜻이 아닐까요?”(설희순)
 
  “제 생각은 달라요. 가장 무겁다는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설희관)
 
  당시 1번 피고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이자 사법상을 지냈던 이승엽이었고 14번이 설정식이었다.
 
  티보 머레이는 2005년 5월 24일부터 사흘 동안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초대되어 처음으로 남한의 수도 서울에 왔다. 밤새도록 설정식의 3남 1녀와 이야기꽃을 피웠다. 설희관씨의 말이다.
 
  “티보 머레이 선생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분은 60여 년 전 취재노트와 김일성에게 받은 훈장 등을 보여주었어요. 선친의 시를 헝가리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우정의 서사시》라는 시집, 개성 휴전회담장의 선친 사진 등 소중한 자료를 주고 가셨습니다.”
 
 
  ‘나는 그 재판이 거대한 조작극이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설정식을 만났던 헝가리 종군기자 티보 머레이(가운데). 2005년 5월 방한 당시 유족들과 만난 장면이다. (왼쪽부터) 설정혜·희순·희관씨.
  이번에는 설희순씨의 말이다.
 
  “티보 머레이를 만났는데 마치 북에 계신 아버지가 살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그분은 아버지를 ‘누구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을 사랑했다’고 회고하셨죠. ‘휴전회담장에서 헝가리 술을 마시고 셰익스피어를 얘기했는데 문학을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로 의기투합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저는 2008년 프랑스로 가 다시 그분을 만났지요.”
 
  티보 머레이는 옛 친구인 설정식을 추억하는 또 다른 글인 〈기억과 고통, 의심 그리고 희망〉을 2005년 서울에서 공개했다. 이 글에 설정식의 재판 이야기가 나온다. 일부를 인용한다.
 
  〈… 나는 그를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본디는 수려했던 그러나 고문으로 뒤틀린 그의 얼굴은 체념과 탈진으로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로봇처럼 움직였다. 나는 간절하게 희망했다. 제발 그가 내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기를. 나에게 배당된 통역사가 조목조목 피고들의 죄목을 일러주었다. 미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테러와 살인, 가택침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한 국가 전복기도. 더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이 죄목이 너무나 낯익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행해졌던 판에 박은 재판들과 1930년대 소련에서 행해졌던 사전 각본에 의한 요식적 재판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재판을 둘러싼 모든 사항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설정식이 관련되었다는 이 재판은 더더욱 그러했다. 도대체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해 그가 무슨 짓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중략) 섬세한 심장을 가진 일개 시인이 개성과 판문점을 오가며, 어찌 간 크게 간첩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발적 선택으로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온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북한 정권에 대해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더구나 가족도 버리고 그 자신을 전쟁의 숱한 위험 속에 기꺼이 노출시켰던 사람이. 나는 그 재판이 거대한 조작극이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아버지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마저도 삼켜버렸습니다”
 
  이미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두 아들은 민주주의를 경험한 아버지의 이념 선택을 어떻게 생각할까.
 
  “광복 직후와 6·25전쟁 중 많은 문인이 북으로 갔죠. 신념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북한 체제는 이상을 안고 사는 문인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였겠지만 결말은 불행했어요. 홍명희와 박태원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숙청됐으니까요.
 
  소설가 이원규의 말처럼, 우리 민족사에는 양지와 음지가 있습니다. 호수처럼 잔잔한 태평성대도 있지만 성난 파도가 모든 것을 휘감는 위기의 시대도 있었죠. 역사의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삼켜버렸습니다. 아버지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마저도 삼켜버렸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미군정 시절, 현실과 타협했더라면 남한 정부에서 장관쯤은 했을지도 몰라요. 반대로 북한에서도 타협했다면 살아남아 영화를 누렸을지 모르죠.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셨죠. 어쩌면 아버지의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일지 모릅니다.”(설희관)
 
  “저는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가 한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모두 공산주의자가 된다.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모두 반공주의자가 된다.’
 
  아버지의 시비(詩碑)를 세우고 싶어요. 1923년 9월 1일 동경대지진이 일어났지요.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했다’는 유언비어로 조선인이 공식적으로 6000여 명, 비공식으로 2만명이 학살당했죠. 원혼을 위로한 시가 딱 한 편 있는데 바로 아버지의 시입니다. 시 ‘진혼곡’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합니다.”(설희순)
 
  시 ‘진혼곡’의 1연을 소개한다.
 
  조국 땅이 좁아서/ 간석지를 파야 될 까닭이 없었다/ 조국 땅이 좁아서/ 멀미 나는 현해탄을 건널 까닭이 없었다/ 조국 땅이 좁아서/ *우전천(隅田川) 시궁창에서 널쪼각을 주울 까닭이 없었다/ 조국은 어디로 갔기에/ *천기(川崎) *심천구(深川區) 제육공장 제함(製函) 공장/ 화장터 굴뚝 연기는 그래도 향기로울까/ 초연(硝煙) 십 리 사방 줄행랑에/ 두 눈깔 흰자위마저/ 시커멓게 썩을 까닭이/ 없었다 다만 조국 주권이/ 조국 주권을 팔아먹은 자가 있어/ 조국이 간석지로 밀려나간 것이었다/ 조국 주권을 팔아먹은 자가 있어/ 그 족속이 유랑을 업으로 삼았었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도/ 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어/ 순(順)이의 봄을 오십 원에 팔았은들/ 애비를 나무랄 자 없이 되리만큼/ 조국은 어디로 가버려
 
  (*우전천: 스미다가와. 일본 도쿄에 있는 강. *천기 심천구: 가와사키 후카가와 구)
 
  설희관씨는 얼마 전 법원에 아버지의 실종신고서를 제출하였다. 가족관계 등록서(호적)에 아직도 생존해 있는 아버지의 적(籍)을 실종으로 정리하기 위해, 형과 누이를 보증인으로 세워 절차를 끝내고, 법원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마무리 또한 기구한 가족사이다. 그의 말이다.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들은 적 없는 아버지를, 이제야 돌아가셨다고 바른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긍심 높은 설정식 집안 이야기
 
설정식과 김증연의 결혼식 직후(1936) 모습이다.
  설정식은 1936년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김증연과 결혼해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설희한(1937~2020)은 성균관대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 해병대에 입대했으며 제대 후 한국공업, 삼화제철, 세방여행사에서 근무했다. 197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떠나 부동산중개업, 건축업에 종사했다. 나이 예순에 공원묘지 내 꽃집을 인수하여 20여 년간 운영했다. 아내 김정자(金靜子)와의 사이에 2녀를 낳았다. 장녀 설윤숙(薛允淑)은 심리학 박사, 차녀 설정윤(薛禎允)은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
 
  차남 설희순은 서울대 공대 기계과를 나와 삼성물산, 삼성전자 전무를 지냈다. 대승불교연구원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노자(老子) 사상에 심취해 《도덕경, 노자 웃으시다》 《노자와 어머니 그리고 별》을 펴냈다. 김희선(金姬善)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장녀 설은이(薛恩伊)는 약사이고 남편 이수웅(李秀雄)은 이현재 전 총리의 삼남이다. 전기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삼성전자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차녀 설재은(薛在恩)은 스위스계 증권회사 이사로 재직 중이고 장남 설홍기(薛弘基)는 인디애나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와튼연구소에서 근무하다 몇 해 전 중앙대 경영학과 조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삼남 설희관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한 뒤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했다. 사회부장, 문화부장, 총무국장, 한국일보50년사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대시학》 《한국수필》을 통해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했다. 김혜숙(金惠淑)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는데 설정기(薛貞基), 설민기(薛民基) 모두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장녀 설정혜는 남편(許英)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바로 ‘의리의 사나이’로 알려진 배우 김보성이다. 본명은 허석(許碩).
 
차남 설희순의 돌 때 찍은 가족 사진. 엄마(김증연) 품에 안긴 아이가 설희순, 그 옆이 장남 설희한과 외딸 설정혜, 그리고 아버지 설정식이다. 막내 설희관이 태어나기 전이다.
  설정식의 가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국권을 상실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절, 올곧은 지조로 자긍심을 지킨 집안이었다. 형제와 후손들의 가족사가 흥미로웠다.
 
  설정식의 아버지 설태희(薛泰熙· 1875~1940)는 함남 단천 출생의 개신(改新) 유학자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에 참여했으며 이동휘, 이준 등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고 대한협회 단천지회 등 계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고 한다. 1908년 함경남도 갑산군수, 영흥군수를 지냈지만 1910년 국권 피탈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개신 유학자였던 설정식의 아버지 설태희와 어머니 완산 이씨.
  설태희는 완산(完山)이씨(1881~ 1961)와의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먼저 딸 정순(薛貞筍)의 남편은 김두백(金枓白·1900~?)인데, 그는 김두봉(金枓奉·한글학자, 조선노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동생으로 《동아일보》 기자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사람들-김두백’편에 따르면,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서기로 들어왔다가 퇴사하고 25년 재입사해 정치부·사회부 기자로 활약했다. 1933년 8월 영남 일대에 대홍수에 이어 태풍으로 피해가 발생하자 통영에 특파돼 취재와 구호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장남 설원식(薛元植·1896~1942)은 1910~20년대 민족운동에 참가하던 인물들과 교유했는데, 주시경(周時經)과 친교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어학회 사전편찬 비밀후원자 명단에 아버지 설태희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한글학회 50년사》 참조). 만주에서 농장을 경영했고 광산업에도 뛰어든, 씩씩한 외모의 사업가였다고 전한다.
 
  설원식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국환(薛國煥)은 합동통신 기자와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언론인 출신이었다. 국환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영기(薛永基)는 대한여행사 회장, 차남 원기(薛源基)는 덕성여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하다 지금은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있다. 장녀 명기(薛明基)는 미국 뉴욕의 디자인 명문대학인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의 교수로 재직했다.
 
 
  설정식의 형은 언론인 설의식… 후손들 변호사, 과학자, 수학자, 바이올리니스트, 화가 등
 
  설원식의 딸 순봉(薛順鳳)은 서울대 영문과 출신의 영문학자이며, 그녀의 남편은 김우창(金禹昌) 고려대 명예교수다. 설순봉·김우창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자녀 모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장녀 김 마가레뜨 윤미는 뉴욕주 변호사로 일하다가 현재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장남 김준형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생물학과장이자 컴퓨터공학과 겸임교수다. 차남 김민형 교수는 세계적 수학자로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영국 워릭대학 수학과 및 수학 대중교육 석좌교수다. 2012년 호암과학상을 받았다. 차녀 김윤형은 케임브리지대학 수학박사로, 지금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설의식과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설정식의 첫 시집 《종》(1947)과 아들 설희관씨가 펴낸 《설정식 문학전집》(2012)
  설태희의 차남은 설의식(薛義植· 1901~1954)인데,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주일특파원,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사를 떠났다가 광복 후 재입사해 주필 겸 부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 《새한민보》를 창간해 사장으로 취임했고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최초 한글 번역했다고 한다. 전조선문필가협회 부회장, 조선언론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설의식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6·25 당시 경기고 재학 중이던 두 아들은 전쟁 통에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딸 순희(薛順姬)는 남편 김준용(金準鏞)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김영걸은 카이스트 교수, 장녀 김은영은 미국에서 거주 중인데 남편(Victor)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라고 한다. 차녀 김화림은 뉴욕주립대 박사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삼녀 김영아는 피트니스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사녀 김선희는 중견기업인 매일유업 사장이다.
 
  설태희의 4남인 도식(薛道植·1915~ 1975)은 일제강점기 말에 가수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에는 사업가로 이름을 남겼다. 1936년 빅터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되어 1938년 10월까지 21개의 음반을 냈다고 한다. 대표곡은 ‘애상의 가을’ ‘달려라 호로(포장)마차’ ‘헐어진 쪽배’라고 전한다.
 
  형인 설의식이 《동아일보》에서 퇴직한 후, 일제의 언어말살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극작가 서항석과 함께 ‘라미라 가극단’을 만들어 향토가극 운동을 벌였는데, 그 모임에 설정식·도식·김순남(‘산유화’의 작곡가) 등이 참여했다고 한다. 슬하에 희철(薛熙澈)·희종(薛熙宗)·희중(薛熙重) 등 아들 셋과 딸 영자(薛玲子)를 두었다.
 
  ▲참조: 김영식의 《그와 나 사이를 걷다》, 조형렬의 〈개신 유학자 설태희를 통해 본 ‘문화운동’의 이념적 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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