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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그리스학자 유재원 교수가 말하는 ‘언어전쟁’에서 살아남는 법

“무기 중의 무기는 言語, 민족 생존은 母國語에 달려 있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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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유일의 학문어는 그리스어. 풍부한 어휘를 가져다 쓸 언어의 보물창고
⊙ 일본은 17세기 이후 서양의 문학과 학술 서적을 번역하며 한국·중국을 앞질러
⊙ 일본이 치열하게 번역한 것을 한국은 막 가져다 써. 매우 위험해
⊙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문자를 얻은 민족이 한국… 학자의 모국어 인식이 민족 운명 결정

劉載源
1950년생. 서울대 언어학과 졸업, 그리스 아테네대학 언어학 박사, 그리스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대학 명예박사 / 한양대·한국외국어대 교수, 한국외국어대 어문대학 학장, 세계문자연구소 공동대표, 한국·그리스학 연구소장 역임. 現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한국 카잔차키스의 친구들 모임’ 명예회장, 한국·그리스협회 이사장
지난 6월 27일 그리스 테살로니키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뒤 유재원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 동상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두 종류의 전쟁을 한다. 총칼을 든 무력전쟁과 문화·언어전쟁을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전쟁의 끝은 언어 정복이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치명적인 무기인 ‘문자(文字)’를 평생 연구해온 학자가 있다. 유재원(劉載源·69)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그리스학과 그리스어라는 수천 년 된 무기를 불에 달궈 두드려서 한국 것으로 만들어왔다. 수많은 문헌과 고서, 자료의 봉인을 풀려고 학문의 전선을 누볐다.
 
  그리스학(어)과 관련된 논문과 저서를 많이 남겼지만 《표준 한국어 발음 대사전》 《바른글 한국어 전자사전》 등을 편찬할 정도로 우리글과 우리말에 애정을 보였다. 지난해부터 그가 만든 ‘현대 그리스어-한국어 온라인 사전’이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제공되고 있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6월 27일, 유 교수의 평생 업적을 심사한 그리스 국립 테살로니키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테살로니키대학은 젊은 시절 그에게 박사학위를 준 아테네대학과 라이벌 대학이라고 한다.
 
  기자는 유럽 문명의 원형인 그리스, 그리고 서양 학문어(學問語)의 뿌리인 그리스어에 대한 유 교수의 열정을 듣고 싶었다. 소설가 유경숙(柳京淑)씨가 만남을 주선했다. 유 작가는 ‘한국 카잔차키스의 친구들 모임’ 회장을 지냈는데, 유 교수는 이 모임의 명예회장이다. 지난 8월 7일 ‘한국·그리스협회’ 사무실이 있는 서울 공덕동에서 유 교수와 만났다.
 
지난 6월 27일 그리스 국립 테살로니키대학에서 유재원 교수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뒤 대학 관계자와 기념촬영을 했다.
  ― 그리스어 연구자이지만, 우리 말과 글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여러 종류의 한국어 사전을 만들면서 저는 한국어의 어휘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한국어를 좀 더 수준 높은 고급 언어로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혼자서 고민을 했지요. 그래서 이미 최고 수준에 도달한 세계적 언어들을 살펴보았죠.”
 
  ― 어떤 언어가 학문어 위상을 지니고 있나요.
 
  “생각보다 많지 않았어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 정도입니다. 고급 문학과 학문을 이루어낸 언어들을 살펴보면서 제가 발견한 것이 있어요. 이런 언어에서 고급스럽고 섬세한 의미를 나타내는 낱말들은, 원형을 그대로 차용했든 번역을 통해 받아들였든 대부분 그리스 어원을 가졌다는 사실이죠.”
 
  유 교수는 “세계 최초의 학문어이자 동시에 세계 유일의 학문어가 그리스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며 “(그리스어는) 심오하고 풍부한 어휘를 가져다 쓸 언어의 보물창고”라고 했다. “이 보물창고에 들어오는 데에는 입장료도 없고 자격증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구든 들어와서 자기가 필요한 낱말을 마음껏 골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유럽의 선생’
 
그리스학과 그리스어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그리스 테살로니키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마음껏 가져갈 때 필요한 것은 그리스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자신의 언어 발전을 위해 필요한 낱말들을 고를 수 있는 안목, 모국어 현실에 맞게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려면 그리스어를 높은 수준까지 배워야 한다. 단순히 언어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돼야 정확한 번역을 할 수 있다. 유 교수의 말이다.
 
  “그리스는 ‘유럽의 선생’이라 말하죠. 서양 문학의 기원을 따지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시작합니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서양 문학의 원천을 이루고 있죠.”
 
  ― 그리스가, 그리스어가 ‘학문’의 기원이라는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네요.
 
  “서양이 인류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이라고 자랑하는 자연과학의 뿌리도 탈레스와 아낙시메네스, 아낙시만드로스 같은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에게 두고 있죠. 수학과 기하학은 피타고라스와 에우클레이데스, 의학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 뛰어난 공학자인 아르키메데스도 빼놓을 수 없죠.”
 
  ― 철학은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은 여전히 서양 철학의 핵심이 아닌가요?”
 
  유 교수는 그리스어로부터 우리말로 고급 개념어들을 가져오고, 또 그 어휘들의 배경이 되는 문화적 맥락을 한국인들에게 이해시키려 고민해왔다. 그러다가 “이런 노력이 나 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하고, 우리 세대만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학의 후학을 기르기 위해 그리스학과를 설립했다. 설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 일은 학문 행위가 아니라 정치 행위였다”고 회고했다. 결국 2004년 3월 한국외국어대에 그리스학과를 세울 수 있었다. 학과가 개설될 당시 학과명은 ‘그리스·발칸어과’였다. 2011년에 ‘그리스·불가리아어과’로 바뀌었다. 현재 명칭은 ‘그리스·불가리아학과’다.
 
  지난 6월 유재원 교수가 테살로니키대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 준비한 ‘수락 강연문’을 읽어보았다. 이런 문장이 눈에 띄었다.
 
  “…칼과 활로 무장한 군대가 미사일을 가진 군대를 이길 수는 없다. 언어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도로 정확하고 섬세한 개념을 표현할 수 있는 풍부한 어휘를 갖지 못한 언어가, 아주 고도의 학문과 추상적인 철학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이길 수는 없다.…”
 
  유 교수에 따르면, 그리스 이후(구체적으로 르네상스 이후) 서양에서 최초로 자기 나라 말로 철학을 논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언어전쟁에서 승리해 세계 정복을 꿈꾸는 미국·영국”
 
  17세기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리바이어던》을 영어로 출판했고, 로크(John Locke·1632~ 1704)와 흄(David Hume·1711~1776)이 뒤따랐다. 자연과학 부문에서는 뉴턴(Sir Isaac Newton·1643~1727)이 영어로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 Descartes·1596~1650)와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 등이 프랑스어로 학문을 시작했다.
 
  한 세기 뒤에 독일도 자국어로 학문을 시작했다. 1781년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순수이성비판》을 독일어로 출판했고, 그 뒤를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1860),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가 따랐다. 그의 말이다.
 
  “시각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면, 17세기부터 중국의 패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일본은 서양의 문학과 학술 서적을 번역하며 당시 한국이나 중국을 앞선 학문 강국으로 발돋움했어요.”
 
  ― 일본은 17세기에 이미 중국을 앞질렀네요.
 
  “그렇죠. 일본이 그렇듯, 학문이 앞선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는 현상이 오늘날 더욱 심화되고 있죠. 가장 전형적인 예가 미국과 영국이에요. 영어가 모국어인 두 나라는 자국 언어의 패권과 그에 따른 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 결과, 한때 학문 강국이었던 네덜란드와 독일, 덴마크의 학자들은 영어로 논문 쓰는 것을 선호하고, 한국도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학자들을 중심으로 영어로 논문 쓰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유 교수는 “영국과 미국의 경우 언어전쟁에서 승리하여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고 했다. 처칠 영국 총리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어 확산의 야심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민중들에게서 지역이나 경작지를 빼앗거나 그들을 착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보상을 가져온다. 미래의 제국은 정신의 제국이 될 것이다(The power to control language offers far better prizes than taking away people’s provinces or lands or grinding them down in exploitation. The empires of the future are the empire of the mind).”
 
 
  영어 패권주의와 모국어로 학문하기
 
그리스 아테네대학 유학시절 아내 마은영씨와 파르테논 신전을 찾은 유재원 교수.
  이런 영어의 제국주의 패권의 야망에 대해 다른 언어는 속수무책이다. 그 어떤 언어도 영어의 해일(海溢)을 피할 방법이 없다. 영어를 모르고선 학문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세계 엘리트들에게 영어는 필수 언어다.
 
  유재원 교수는 그러나 “영어의 절대적 우위가 모국어로 학문함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의 예를 보듯, 한 언어의 학문적 수준은 바로 그 언어를 쓰는 나라의 힘에 비례한다. 모국의 수준이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학문과 나라의 흥망에 대해 예를 들 필요는 없어요. 학문을 자기 모국어로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그 언어 사용자들의 운명이 결정되죠. 한 나라 학문의 첨단을 맡고 있는 학자들 자신의 모국어에 대한 인식 수준이 그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언어학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 모국어의 인식 수준이란 번역 수준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제가 작년에 《그리스인 조르바》(문학과지성사 刊)를 번역했습니다. 사실 우리말로 적는 순간 우리 것이 되는 거예요. 심하게 말해 남의 나라 말과 글을 빼앗아오는 것이 번역이죠. 그래서 번역의 질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본의 예를 들어볼게요. 일본은 자국의 좋은 논문과 책을 번역해서 외국에 내보냅니다. 저자가 하지 않아도 ‘일본 번역국’이 알아서 하죠. 2008년 노벨물리학상 공동수상자인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영어를 거의 말하지도 쓰지도 못한 사례로 유명하죠. 그가 노벨상 탔을 때 외신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내자 ‘I can’t speak English’라고 했죠. ‘영어로 된 학술논문을 쓰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안 썼다’고 했고요. 다 일본 번역국에서 한 일이죠.
 
  친구 아들이 판사인데, 최근의 미국 판례를 보려고 한국어 번역기를 돌려 본대요. 참담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법률전문 번역기가 있는데 정확하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일본은 세계 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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