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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젊은 ‘이승만 연구가’ 데이비드 필즈

이승만, 미국예외주의 활용해 한국 독립 달성 성공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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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선교사 통해 ‘미국은 특별한 나라이며, 자신이 가진 특별한 조건을 하느님의 뜻을 관철하는 데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미국예외주의 배워
⊙ 1905년 미국이 한국을 배신했던 것 상기시키면서 제2차 세계대전 후 한반도를 미국예외주의의 시험대로 만들어… 분단 상태로나마 독립 성취
⊙ 엘리너 루스벨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빙 크로스비 등과 접촉… 이승만의 홍보고문 올리버 박사는 美 상원의원의 한국 독립 지지 연설문 작성

데이비드 필즈
1983년생. 美 트리니티인터내셔널대학 역사학과 졸업, 위스콘신대학(매디슨) 라틴아메리카관계학 석사, 위스콘신대학 역사학 박사 / 위스콘신대학 강사, 現 위스콘신대학 동아시아센터 부소장 / 저서 《외국인 친구들: 이승만, 미국예외주의, 그리고 한국의 분단》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께 다음과 같이 전달해주기 바람.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류의 수호자인 가장 위대한 공화국의 탄생일인 7월 4일을 각하와 모든 미국 국민과 더불어 축하드리는 바임. 1776년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싸우도록 미국 국민을 분발시킨 그 신조는 이제 우리 한국인에게 우리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지키라고 분발시켜주고 있음. 전 세계가 민주주의의 축복을 누리며 자유를 구가하게 될 그날까지 모든 민주국가가 공산주의에 대한 각하의 세계정책의 정신을 구현해나감에 있어 일치단결하기를 원함.〉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1949년 7월 2일, 장면(張勉) 주미대사에게 백악관으로 보내도록 지시한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메시지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독립기념일에 즈음해 한국인들 역시 미국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 자유세계 리더로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해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국경일을 맞아 국가 원수(元首)들이 보내는 의례적 메시지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특히 미국인들의 의식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 보낼 수 있는 메시지다. 이승만의 이런 통찰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 문제를 연구한 학자가 있다. 미국 위스콘신대학 동아시아연구센터 부소장인 데이비드 P. 필즈(David P. Fields・36) 박사이다. 그는 최근 미국 켄터키대학 출판부에서 《외국인 친구들: 이승만, 미국예외주의, 그리고 한국의 분단(Foreign Friends; Syngman Rhee, American Exceptionalism, and the Division of Korea)》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40여 년간 미국을 상대로 끈질기게 외교활동(로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특히 미국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미국예외주의(美國例外主義・American Exceptionalism)에 호소했다. 일제(日帝)의 패망(敗亡)을 앞두고 소련이 만주와 북한으로 진공(進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 남쪽이나마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승만의 그러한 노력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스콘신대학 한국동문회 행사 참석차 내한(來韓)한 필즈 박사를 7월 2일 만났다. 필즈 박사가 2년간 한국에 머물 당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으로 그의 연구활동을 도와주었던 류석춘(柳錫春) 연세대 교수가 동석해 인터뷰를 도와주었다.
 
 
  미국예외주의란?
 
데이비드 필즈 박사의 책 《외국인 친구들: 이승만, 미국예외주의, 그리고 한국의 분단》.
  ― 그 나이의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이승만 연구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떻게 이승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나.
 
  “미국예외주의와 미국 외교, 로비에 대한 연구를 위해 자료를 찾아보던 중, 우연히 위스콘신대학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홍보고문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 박사의 책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올리버 박사는 위스콘신대학에서 수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음 -기자 註)
 
  ― 올리버 박사의 책이라면, 《이승만: 신화 속의 인물(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인가.
 
  “맞다. 그 책이다. 그래서 한국으로 건너와 2년간 머물면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 있는 자료들을 들여다보면서 이승만에 대해 연구했다.”
 
  ― 미국예외주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중요한 질문이다. 미국예외주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미국인의 정체성(正體性)으로, ‘미국인은 특별하다’는 인식이다.
 
  두 번째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외적으로 부강하고 특별한 조건을 부여받아 특별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나라다. 미국이 자신이 가진 특별한 조건을 하느님의 뜻을 관철하는 데 쓰지 않으면, 그런 조건과 기회는 다른 나라에 넘어가버릴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승만이 주목한 것은 두 번째 의미에서의 미국예외주의이다. 그런 인식은 지금은 많이 약화되었지만, 이승만이 활동할 당시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 미국예외주의를 알게 됐을까.
 
  “한국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후일 미국에서 유학하고 생활하면서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됐을 것이다. 특히 이승만은 미국 유학 초기, 미국인 가정에서 아들 태산을 맡아준 것을 보면서 미국인들의 도덕적 사명감에 깊이 감명받았다. 후일 이승만은 미국 정부는 비판해도 미국인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비현실적인 방도였고, 효과도 없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렇지 않다. 이승만은 단기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달성한다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꾸었고, 이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데는 성공했다.”
 
  ― 1905년 이승만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보전을 호소했지만, 실패하지 않았나.
 
  “1905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뿐 아니라, 거의 모든 미국인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찬성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승만, 한국의 기독교 급성장 활용
 
  ― 무슨 소리인가.
 
  “이승만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급성장하고 있는 현실을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렸다. 당시 미국인들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데 대해서는 무관심했지만, 한국의 기독교화에는 큰 관심이 있었다. 1905~1907년 그는 미국 교회 등에서 200회 이상 강연을 하면서 ‘한국의 기독교화와 일제 식민지화는 양립(兩立)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특히 1907년 평양대부흥회 이후 한국이 ‘동방의 이스라엘’,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도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됐다.”
 
  ― 하지만 이승만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참석, 1921년 워싱턴회의 참석에도 실패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많은 미국인이 한국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미국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존중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지만, 미국 역시 1882년에 한국과 맺은 조약을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1919~1920년 한국 독립과 관련해 8000건의 기사가 미국 신문에 실렸고, 연인원 20만명이 그의 강연을 들었다. 미국 14개 도시에 한국친우회 지부가 설립됐고, 2만5000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미국 의회에서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표결은 불과 7표 차이로 부결됐다. 1905년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일본과 갈등을 원치 않는 미국인들이 많아 한국에 대한 동정이 정책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이승만, 아이돌 스타 같은 인기 누려”
 
이승만은 1942년 미국 워싱턴D.C에서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했다. 왼쪽부터 호머 헐버트 박사, 폴 더글러스 아메리칸대학 총장, 이승만.
  ― 제2차 세계대전 중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려는 노력도 실패하지 않았나.
 
  “제2차 세계대전 중 1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미군과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국인은 ‘한국인 모두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미국은 한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43년 12월 미국은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여기에는 이승만의 노력이 크게 기여했다.”
 
  ― 그것이 이승만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나.
 
  “이승만은 1941년 《일본내막기(Japan Insideout)》를 썼다. 그 책이 나온 지 6개월 후 진주만 기습이 발생했다. 이승만은 예언가라는 평가를 받았고, 오늘날의 아이돌(idol) 스타와 같은 인기를 누렸다.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유명 가수 빙 크로스비와 만났고, 우드로 윌슨을 소재로 한 영화 개막식에 초대받기도 있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이승만 부부를 만나고 난 후인 1945년 3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칼럼을 신문에 쓰기도 했다.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 교회 지도자들,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책 뒤에는 당시 이승만이 접촉했거나, 교계(敎界) 지도자들을 통해 영향을 미친 미국 상・하 양원 의원들의 이름이 나와 있다.”
 
  ― 이승만이 미국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 구체적인 사례가 있나.
 
  “예컨대 웨인 모스 상원의원이 미 의회에서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는데, 그 연설문은 이승만의 홍보고문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작성해준 것이었다.”
 
  ― 이승만은 어떻게 미국인들을 설득했나.
 
  “이승만은 기회 있을 때마다 ‘1905년에 미국은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을 배신하고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던 한국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후 일본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일으킨 것은 바로 미국의 그런 배신행위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외교의 도덕적 실패 상기시켜
 
  ― 맞다. 이승만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 얘기를 정말이지 평생 써먹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승만은 그런 주장을 할 때 미국예외주의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1905년부터 진주만 기습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을 아시아에서 미국이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례로 몰아붙이면서, 전후(戰後) 한국을 미국예외주의의 시험대로 만들었다.”
 
  필즈 교수는 ‘전후 한국을 미국예외주의의 시험대로 만든’ 사례로 1945년 봄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폭로를 꼽았다.
 
  “루스벨트가 한국을 스탈린에게 넘기기로 했다는 이승만의 주장이 미국 신문들 1면에 보도됐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미국 교계 지도자들과 상・하 양원 의원들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다시 한 번 값싸게 넘기는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미국이 그런 과오를 다시 저지른다면 하느님이 미국인들에게 부여한 소명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압박한 것이다.”
 
  ― 그게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들에게 먹혀들었나.
 
  “당시 미국 군부(軍部)는 전후 한국정책과 관련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미국은 일본을 장악하는 걸로 충분하며,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치 않고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있었다. 반면에 국무부는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미국예외주의에 호소한 이승만의 로비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분단
 
38선을 그은 딘 러스크(왼쪽)와 찰스 본스틸 대령. 후일 딘 러스크는 국무장관, 본스틸은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냈다.
  ― 책에서 ‘이승만과 그의 진영은 전후 한국을 미국예외주의의 시험대로 만들었다. 이들이 원한 것은 결코 분단이 아니었지만, 분단이라는 최종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데 이들이 로비를 통해 기울인 노력은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자칫 이승만이 분단을 초래했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일본이 항복할 당시,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에 진공하기 시작한 반면, 미군은 한반도에서 6주나 걸리는 오키나와에 있었다. 소련군이 급속히 남하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두 명의 미군 대령 딘 러스크(케네디 정부 시절 국무장관 역임), 찰스 H. 본스틸(주한미군사령관 역임)이 서둘러 38도선을 그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38도선 이남이나마 포기하지 않았고, 분단 상태로나마 대한민국이 세워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 얘기는 여기에는 이승만의 그동안의 로비(외교활동)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겠지만, 한반도 전체를 소련이 장악했을 것이다.”
 
  ― 딘 러스크나 본스틸이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의 활동을 알고 있었고, 그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인가.
 
  “물론 두 사람은 이승만을 몰랐다. 딘 러스크는 나중에 그것이 전략적(strategic)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symbolic)인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 이승만은 자신이 미친 영향을 인식했을까.
 
  “이승만은 통일을 원했다. 그는 분단이라는 현실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분단된 상태이기는 했지만, 한국의 독립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66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나라”
 
  ―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미국이 1905년 한국을 배신했던 것을 계속 강조하는 등 미국예외주의를 십분 활용했다. 지금 한미동맹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데, 미국예외주의에 호소하는 전략이 여전히 유효할까.
 
  “오늘날에는 안 먹힐 거다. 미국에서 기독교 정신과 영향은 이승만이 활동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현저히 약화됐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 무엇인가.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무역으로 인해 자신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트럼프가 이 점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지만, 트럼프만 그런 게 아니다. 공화당, 민주당 할 것 없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대립은 이제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 한미동맹은 결국 무너지게 되는 건가.
 
  “쉽게 파기되지는 않겠지만, 미국이 6600마일(10만km)이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60년 이상 지속됐지만,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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