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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에드워드 L. 로우니 장군

38선 분단, 6·25 발발, 인천상륙작전의 현장 목격자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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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분할 당시 러스크 등은 39도선 주장했으나, 전략정책실장 에이브 링컨 준장이 38도선 고집
⊙ 6·25 발발 당시 당직 장교로 맥아더에게 북한 남침 사실 보고
⊙ 인천상륙작전 기획 참여, 한강 도하 작전시 舟橋 건설 지휘… 장진호 전투 등 참전
⊙ 카터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Ⅱ)에 반대해 예편… 레이건, “미국의 ‘힘을 통한 평화’ 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
한국과 인연이 깊은 로우니 장군(왼쪽에서 두 번째)은 1970~1971년 한미1군단장으로 서부전선 방위를 책임졌다. 사진=조선DB
  38선 획정, 6·25전쟁,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 흥남철수…. 한국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 순간들을 모두 지켜본 미국인이 있다. 2017년 12월 17일 타계(他界)한 에드워드 L. 로우니(Edward L. Rowny) 장군이 바로 그 사람이다.
 
  에드워드 로우니는 1917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 태생의 목수였다. 1939년 명문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 1941년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가 다시 육사로 진학한 것은 그해 9월 아버지의 고국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아 패망(敗亡)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후일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공학 및 국제문제(international affairs) 석사 학위를, 아메리칸대학에서 국제관계(international studies)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의 경력은 공학과 국제관계학이라는 학문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전개되었다.
 
  로우니는 육사 졸업 후 ‘노래하는 공병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41공병연대에 배속되어 유럽 전선에서 복무했다. 로우니는 이때 만난 연대장 존 E. 우드 대령(육군 준장 예편)을 평생 멘토로 여겼다.
 
 
  운명의 1도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 로우니는 육군부 작전과에 근무하면서 일본 본토상륙작전 기획에 참여했다. 그가 38선 획정 과정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책 《운명의 1도》에 의하면, 일본 패망을 며칠 앞두고 조지 C.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참모들에게 한국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얻어낼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에이브 링컨 장군(준장)에게 한반도를 어느 곳에서 분할할 것인지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링컨은 전략정책단(Strategy and policy Group)을 소집했다. 딘 러스크 대령(케네디 정부 시절 국무장관 역임)은 북위 39도선을 제안했다. 한반도에서 동서간 폭이 가장 좁은 곳이어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병력으로 방어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링컨 장군은 “아니야”라면서 지도 위에 북위 38도선을 따라 선을 그었다. 앤디 굿패스터 대령이 물었다.
 
  “39도선이 가장 적당한 해결책인데, 왜 1도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까?”
 
  링컨은 “니컬러스 스파이크만 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 니컬러스 스파이크만은 《평화의 지리학》이라는 책을 쓴 당대의 유명한 지정학자였다. 그는 “림랜드(유라시아대륙 주변부)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세계 최고의 문학과 발명품 중 90%가 38도선 북쪽에서 탄생했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스파이크만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링컨은 그 자리에 모인 부하들에게 “모든 사람이 38도선에 대해 알고 있지만 39도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거야”라고 말했다. 결국 38도선은 링컨 장군의 현학(衒學) 취향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로우니는 “하지만 몇몇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파이크만의 책을 읽어보기는커녕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면서 이렇게 술회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큰 실수였다. 39도선으로 결정했다면 방어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고, 더불어 수많은 미군의 생명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영원한 운명이 될 38선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북한 남침 가능성 보고
 
10군단장 앨먼드 장군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로우니. 앨먼드는 공병인 로우니가 보병으로 轉科하는 것을 도왔다.
  1949년 예일대에서 학업을 마친 로우니는 일본에 있는 맥아더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는 본격적인 근무에 들어가기 전 한 달에 걸쳐 일본 전역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의 관찰을 바탕으로 그는 구(舊)일본군의 위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주일미군은 다른 곳에서의 군사활동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캠프로 되돌아가야 하며, 일본 내 치안유지와 자연재해 등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의 주(州)방위군을 본뜬 자위대를 창설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로우니는 “당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다른 곳은 바로 한국이었다”고 회상했다.
 
  1950년 6월 초 로우니는 기밀 전보를 읽고 상관인 드위트 암스트롱 대령에게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암스트롱 대령은 참모장 에드워드 M. 앨먼드 장군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앨먼드 장군은 이 보고서를 정보국장 찰스 A. 윌로비 장군에게 보냈다. 하지만 정보국 외부에서 자신의 업무에 간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윌로비는 이 보고서를 묵살했다. 윌로비는 북한의 남침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맥아더사령부의 당직장교는 바로 로우니였다. 로우니는 참모장 앨먼드 장군과 함께 맥아더 원수의 관저로 달려갔다. 맥아더 원수는 로우니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나에게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려는 건가?”
 
  맥아더는 북한 남침을 예견하는 보고서를 올렸던 로우니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로우니는 맥아더의 대변인(공보장교)으로 임명됐다. 맥아더가 내린 지침은 “귀관은 기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려주고,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전부였다.
 
 
  맥아더, “우리의 목표는 서울”
 
  낙동강 방어전이 한창이던 맥아더는 북한군의 후방을 치는 상륙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21일 미 육군 7사단과 해병 1사단이 상륙부대로 선발됐다. 맥아더는 린 스미스 대령, 제인드 랜드럼 대령, 로우니 중령 등 세 사람에게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세 사람 모두 서해안에 상륙해야 한다는 점에는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상륙지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스미스 대령은 고전적인 상륙작전 개념에 충실하게 접적(接敵) 지역 바로 위에 상륙하자고 주장했다. 랜드럼 대령은 최전선 북쪽 10km 후방 상륙을 주장했다. 로우니는 적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는 최전선 북방 20km 지점에 상륙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앨먼드 참모장은 맥아더 앞에서 브리핑을 하게 했다. 최전선에서 가장 북쪽에서 상륙작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은 로우니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질책을 받을 것 같아 긴장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참석자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지도 앞으로 다가간 맥아더는 색연필로 최전선에서 350km 떨어진 지점, 즉 인천을 관통하는 커다란 화살표를 그렸다.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목표 지점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서울이다!”
 
  맥아더는 상륙작전 계획을 입안한 장교들에게 “자네들은 너무 신중한 것 같군”이라면서 이렇게 물었다.
 
  “인천으로 상륙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에 대해 고려해 봤는가?”
 
  로우니가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장군님, 그곳으로 가면 안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천은 서울과 매우 가까운 곳이라 틀림없이 적군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강하게 저항할 것입니다.
 
  둘째로, 인천은 상륙하기 매우 어려운 장소입니다. 조수(潮水)차가 너무 큽니다. 인천의 조수간만 차는 32피트(9.7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곳입니다. 다음 밀물에 맞춰 추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먼저 상륙한 부대가 단독으로 전투를 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맥아더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냥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떤가? 조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여러 장애물 중 하나에 불과하네. 앤드루 잭슨(미 제7대 대통령)의 말처럼 절대 두려움과 타협하지 말게.”
 
 
  “인천은 세계 역사상 22번째의 위대한 전투”
 
  미국 합동참모본부도 높은 조수간만의 차이와 함께 항구 주변에 있는 30피트(9m) 높이의 방파제(防波堤) 때문에 상륙 자체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합참 회의에 참석한 각군 참모총장들은 잇달아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맥아더는 6시간에 걸쳐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현대에 이르는 전쟁사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부관 알렉산더 헤이그(후일 나토군사령관·미 국무장관 역임) 소위가 샌드위치를 갖고 들어왔지만 맥아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맥아더는 미군 최고 지휘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맥아더는 로우니에게 말했다.
 
  “인천은 세계 역사상 22번째의 위대한 전투로 남을 걸세.”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크리시는 마라톤전투에서 워털루전투에 이르는 15개의 전투를 ‘세계 15대 전투’로 꼽은 바 있다. 그 결과가 달라졌을 경우 서구 문명이 종말을 맞게 됐을 수도 있는 전투를 말한다. 그 후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크리시가 말한 전투에 5개의 전투를 더해 ‘세계 20대 전투’를 꼽았는데,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세계 역사상 22번째의 위대한 전투’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궁금해진 로우니가 물었다.
 
  “21번째 전투는 무엇인가요?”
 
  맥아더가 대답했다.
 
  “1920년의 바르샤바 전투라네.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 원수 유제프 피우스트스키는 볼셰비키군의 바르샤바 점령을 막았다네. 그때 바르샤바가 함락됐다면, 공산주의자들은 서유럽까지 점령하려고 했을걸세.”
 
  폴란드계인 로우니는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한강 도하
 
  로우니는 스미스 대령, 랜드럼 대령과 함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 참여했다. 이들은 9월 15일이 상륙작전에 가장 적합한 날짜라고 보고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조수간만의 차이 못지않게 9m에 달하는 인천의 방파제도 상륙작전의 장애물이었다. 이를 극복하는 숙제는 공병 출신인 로우니에게 떨어졌다. 일본의 여러 공장들에 조립식 알루미늄 사다리 제작을 주문했다. 기자들이 이 사실을 포착했다. 미군이 인천상륙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맥아더는 서울을 공산군에게 빼앗긴 지 3개월이 되는 9월 29일, 자신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한강을 건너 서울에 입성하기를 원했다. 홍보효과에 민감했던 맥아더는 헬리콥터나 상륙주정(上陸舟艇)으로 한강을 건널 경우 서울수복의 상징성이 반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차량 편으로 한강을 건너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강교는 국군에 의해 폭파됐고, 한강철교도 북한군이 폭파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맥아더의 뜻대로 하려면 한강에 주교(舟橋)를 가설해야 했다. 맥아더는 이 임무를 로우니에게 맡기면서 중령이던 그를 임시준장(臨時准將)으로 승진시켜 10군단 공병여단장으로 임명했다.
 
  한강 도하를 앞두고 미 해병대 장교들은 로우니에게 이렇게 호소해 왔다.
 
  “퀀티코(미 해병대 장교훈련소)에서 저희는 해안을 공격하는 방법은 배웠지만, 강을 건너 공격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습니다.”
 
  로우니는 김포비행장에 해병대 대대장과 중대장들을 모아 놓고 도하작전에 대한 강의를 했다.
 
  맥아더가 주문한 다리를 한강에 놓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북한군은 다리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박격포와 야포 포격을 가해 왔다. 여러 명의 장병들이 희생됐다. 로우니 휘하 5명의 공병 대령 가운데 한 명도 주교 설치 작업을 진두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9월 28일에는 갑자기 돌풍이 불어 주교 일부가 한강 하류로 떠내려갔다. 장갑차를 이용해 주교를 회수해 왔지만, 다리를 완공하려면 5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두 시간 후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한강을 건너겠다고 알려왔다. 공병들은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가까스로 다리를 완성했다. 1시간 후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 일행을 태운 44대의 승용차 및 지프차 행렬이 한강을 건넜다. 로우니는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수복 기념식에 참석했다.
 
 
  장진호 전투
 
  1950년 10월 말 앨먼드 장군 예하 10군단(미 해병 제1사단, 육군 7보병사단, 육군 3보병사단)은 개마고원 깊숙이 진격했다. 이때는 이미 중공군이 비밀리에 북한지역으로 들어와 있었지만, 유엔군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1월 말 동서 양 전선에서 중공군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 9병단이 공격해 들어왔다. 서부전선이 중공군 13병단의 공격으로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동부전선에서도 미 육군 7사단과 3사단이 패주하는 상황에서 미 해병 1사단만이 영웅적으로 항전했다. 이것이 유명한 ‘장진호(長津湖) 전투’였다.
 
  로우니의 공병여단은 영하 30~35도의 혹한 속에서 미군의 철수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군에게 보급품을 공수(空輸)하기 위해 임시 야전 활주로를 건설해야 했다. 공병대는 활주로 건설 부지에 커다란 텐트를 치고 난로를 피워 땅을 녹인 후 불도저로 땅을 다듬었다. 이렇게 만든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편으로 수백 명의 부상자들이 후송될 수 있었다.
 
  로우니의 다음 과제는 폭이 9~30m에 이르는 고토리의 여러 협곡들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알 윌더 소령이 다리 부품들을 C-119 수송기로 공수해 와 협곡 가장자리에 투하한 후 조립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로우니의 공병여단은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미 해병대는 부상자와 전사자들을 적지에 버려두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흥남철수
 
흥남 부두가 폭파되는 장면을 지켜보는 로우니(오른쪽 끝). 그는 흥남철수작전의 기획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장진호를 비롯한 북한 동부지역에서 철수한 미군들은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10군단장 앨먼드 장군은 미 3사단에 방어선을 구축, 중공군을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로우니는 병력 및 물자의 철수 및 흥남부두 폭파 임무를 맡았다.
 
  이때 해병대의 에드워드 H. 포니 대령이 로우니를 찾아왔다. 포니 대령은 피란민 10만명을 미군 함정 편으로 철수시키자는 현봉학 박사의 호소를 그에게 전달했다. 로우니는 포니와 함께 앨먼드 10군단장을 찾아가 설득했다. 앨먼드도 동의했다.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크리스마스 카고’ 작전이 시작됐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비롯한 미군의 수송선을 타고 9만8000여 명의 피란민이 자유를 찾았다. 그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우니는 피란민들과 물자들이 수송선에 들어가는 작업을 감독했다. 그러고도 미처 싣지 못한 물자들은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폭파해 버렸다. 부두 시설도 함께 폭파됐다.
 
  로우니는 무전병·운전병과 함께 마지막 보트를 타고 항구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태우러 오던 보트가 해안에서 90m 지점에서 갑자기 폭발해 버렸다. 로우니는 아마 승조원 중 한 명이 버린 담배꽁초가 화약에 떨어져 그렇게 된 것으로 추측했다. 이들이 타고갈 예정이었던 USS 마운트 매킨리함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들이 가진 것은 권총 한 자루와 카빈 소총 두 자루가 전부였다. 무전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운전병은 해안에 버려진 여러 통의 전지분유를 가지고 인근 비행장 아스팔트에 SOS-USA라고 썼다. 지나가던 미군 비행기가 이걸 보고 착륙, 이들을 구출해 주었다. 비행기는 그 길로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 로우니는 이곳에서 가족과 만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보병연대장이 되다
 
  한국으로 돌아온 로우니는 10군단 군수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 6월 앨먼드 장군은 1년 더 한국에서 근무하면 보병연대장으로 기용하겠다고 제안했다. 로우니는 이미 공병여단장을 지냈지만, 그건 임시준장 계급으로 그랬던 것이었다. 공병으로서는 승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로우니는 보병으로의 전과(轉科)를 원하고 있었다.
 
  로우니는 연대장이 되기 전인 1951년 9월 제2보병사단 38연대 부연대장으로 연대장을 대리해 펀치볼 인근 1234고지 점령작전을 지휘했다. 미군의 포격 지원을 받으면서 요한 크리스티안손 소령의 네덜란드군 대대가 선봉에 섰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북한군은 200여 명의 전사자, 6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반면, 로우니의 부대는 20여 명의 부상자만을 냈다. 요한 크리스티안손 소령은 후일 네덜란드군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그해 10월 로우니는 병력을 10대의 헬리콥터에 태워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고지를 기습하는 ‘수직포위작전’을 입안, 성공시켰다.
 
  1951년 12월 로우니는 2사단 38연대장이 됐다. 당시는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상부에서는 소대 규모 이상의 작전은 벌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듬해 3월 로우니는 전방의 적군이 새로운 전초(前哨)기지를 세운 것을 확인했다. 사단장은 적정(敵情) 파악을 위해 적군을 생포해 오라고 닦달하고 있었다. 로우니는 1개 소대를 투입했다. 하지만 이 부대는 작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포격을 받으면서 고립되었다. 포위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로우니는 중대 병력을 추가로 투입했다. 덕분에 포위되어 있던 소대를 구출하고 적군 두 명을 생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전사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 날 사단장 대행이던 보트너 장군이 찾아왔다. 그는 로우니를 연대장직에서 해임하라는 워싱턴의 명령을 전했다. 1개 소대 이상을 작전에 투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게 그 이유였다. 상황을 조사한 보트너 장군은 로우니의 판단이 옳았다고 판단했다. 보트너는 워싱턴으로 전보를 보냈다.
 
  “만약 누군가를 해임해야 한다면, 저를 해임하십시오. 이곳의 지휘관은 바로 접니다.”
 
  덕분에 로우니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로우니는 “이 사건은 내게 도덕적 용기에 대한 교훈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로우니는 1955 ~1958년 유럽연합군최고사령부(SHAPE) 합동참모장으로 근무했다. 1967년 드골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를 선언한 후, 그는 프랑스 주둔 미군과 물자들을 철수하는 작전을 입안, 집행했다.
 
  1960년대 초 로우니는 사이러스 밴스 육군장관(후일 국무장관 역임)의 지시를 받아 베트남전쟁에서 무장헬기를 활용한 강습(降襲)작전을 연구, 검토하는 일을 맡았다. 6·25 당시 그런 작전을 해 보았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영화 〈위 워 솔저스(We were soldiers)〉에서 보는 것처럼 미군이 무장헬기를 타고 기동(機動)하는 것은 이후 베트남전의 상징적인 모습이 됐다.
 
  이후 로우니는 제24보병사단장, 미국 유럽사령부 참모장 등을 역임한 후 197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지휘하게 된 부대는 한미1군단이었다. 한국군 6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으로 구성된 한미1군단은 한국의 서부전선을 책임지는 부대였다. 당시 부군단장은 10·26사태 당시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李在田) 장군이었다. 1971년 닉슨독트린에 따라 미 7사단 병력 2만명이 철수하는 상황 속에서 한미1군단은 한반도 방위의 핵심 역할을 했다. 한미1군단은 1980년 한미야전군으로 개편되었다가 평시 작전권 환수에 따라 1992년 해체됐다.
 
 
  SALT Ⅱ에 반대해 예편
 
  로우니는 1971년 북대서양조약기구 군사위원회 부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73~1979년 미소(美蘇) 제2차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Ⅱ) 협상에 미 합참 대표로 참석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SALT Ⅱ를 자신의 외교적 업적으로 삼고 싶어했지만, 로우니는 이 협정이 미국의 안보를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그는 1979년 6월 육군 중장을 끝으로 예편했다. 이후 그는 의회와 시민사회를 상대로 SALT Ⅱ의 부당함을 알리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1년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를 소련과의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의 선임대사로 기용한 것이다. 1984년 전략무기감축협상이 타결됐다. 닉슨-포드-카터-레이건을 거치면서 10년 이상 대소(對蘇) 협상에 참여한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그가 회담에 참석한 시간만 2000시간에 달했다. 그 후에도 로우니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아래서 군비통제특별자문관으로 일했다.
 
  1989년 레이건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로우니에게 대통령시민훈장(Presidential Citizen Medal·미국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두 번째 등급의 훈장)을 수여했다. 훈장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에드워드 L. 로우니는 미국의 ‘힘을 통한 평화’ 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군사문제 협상가이자 대통령 자문관으로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용기와 능력을 훌륭하게 발휘했다.”
 
 
  행복한 말년
 
2014년 7월 27일 ‘제61주년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서 정홍원 국무총리(왼쪽)는 대통령을 대신해 로우니 장군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사진=조선DB
  1989년은 로우니에게 행복한 해였다. 동구 및 소련의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폴란드 이민자의 아들인 로우니는 아버지의 고국인 폴란드를 위해 할 일이 많았다. 1992년 그는 피아노곡 ‘소녀의 기도’로 유명한 폴란드의 음악가이자 정치가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의 유해를 폴란드로 송환하는 사업을 성사시켰다. 2003년 이후에는 미-폴란드자문협의회(APAC) 부총재 및 총재로 양국 친선을 위해 노력했다. 2004년에는 조지타운대학에 폴란드 대학생들에게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교육하기 위한 파데레프스키기금을 설립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5년 공산주의피해자기념재단으로부터 트루먼-레이건 메달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도 2014년 그에게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로우니는 2017년 12월 17일 100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꽉 차게 살다간 100년의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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