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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로 조명감독 馬龍天이 털어놓은 데뷔시절 申星一

“20대의 申星一… 잘생긴 정도가 아니야. 조명이 불필요”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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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필름 공개 오디션에 헐레벌떡 뛰어오던 申星一… 한눈에 대성할 줄 알았지”
⊙ “선배 연기도 세밀히 관찰하고 조명기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 “스타를 한 명 발굴했으니 申相玉 감독의 성에다 별 星, 한 一을 넣어 申星一로 하지?”
⊙ 조명에 민감했던 女배우는 김지미와 문희

馬龍天
1927년 출생. 남산 드라마센터 수학, 동국대 중퇴 / 〈망나니비사〉(1955)에서 영화 조명 시작, 1958년 신필름 입사, 〈인생역마차〉(1956), 〈자유부인〉(1956),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서울의 지붕밑〉(1961) 등 수백 편 조명작업 / 〈사나이 가슴에 비가 내린다〉(1971) 등 제작
  지난 11월 4일 별이 졌다. 배우 신성일(申星一)이 졌다. 영화와 같은 생(生)이었지만 팬은 물론 영화인에게도 그는 별(스타)이었다.
 
  1927년생인 원로 영화인 마용천(馬龍天)씨는 한국영화 조명감독(과거엔 ‘조명기사’로 불렸다) 계보에서 3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1950년대 활동하던 1~2세대 조명감독들이 대부분 작고한 지금, 오직 그만이 국내 영화 조명의 역사를 속속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신성일이 충무로를 주름잡던 1960~ 70년대 조명기기란 6·25 때 노획한 소련제 텅스텐 조명기기가 다였다. 하지만 고(故) 신상옥(申相玉· 1926~2006) 감독은 일본에서 들여온 ‘류덴샤’라는 조명기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마용천은 때로 10kg이 넘는 조명기기를 들고 데뷔 때부터 신성일을 지켜보았다. 흔히 조명을 ‘빛의 마술’ ‘빛의 예술’이라 부른다. 그러나 신성일의 마스크는 ‘마술’이나 ‘예술’이 없이도 빛이 나는 얼굴이었다고 마용천은 기억한다.
 
  그는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지난 2001년 제38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영화발전공로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사)한국영화100주년기념사업회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지난 11월 7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인근에서 만나 신성일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1959년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프로덕션인 ‘신(申)필름’에서 신인배우 오디션을 했어요. 그때 신필름 사무실이 광화문에 있었는데 명동 YMCA 옆에 있다가 광화문으로 옮겼어요.
 
  신성일의 부고(訃告) 기사를 보니 오디션에 참가한 이들이 2640명이라고 적혀 있던데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연기를 꿈꾸는 젊은이가 많이 왔었어요.”
 
  ― 그 시절엔 남자 연기지망생이 많았겠지요.
 
  “그럼, 대개가 남자였어요. 당시 나는 오디션을 심사할 위치는 아니었고, 지망생들을 오디션장으로 안내하거나 질서를 잡는 역할을 했었죠.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 나랑 신필름의 촬영감독이던 김종래, 김영인 등 셋이서 당구를 치러 가기로 했어요.”
 
  ― 그때 신필름은 광화문 어디에 있었나요.
 
  “그러니까, 지금 광화문 조선일보사자리에 ‘아카데미’라는 영화관이 있었고, 덕수궁에서 영국대사관 쪽으로 가다 보면 3~4층짜리 현대식 건물이 있었어요.”
 
  ― 지금의 성공회 성당 쪽인가 보네요.
 
  “그렇죠.”
 
 
  “성일이는 ‘우리가 발견한 스타’”
 
2018년 11월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배우 신성일의 영결식이 열리면서 안성기를 비롯한 영화배우들이 관을 들고 있다. 고인은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경북 영천의 선영으로 옮겨졌다.
  계속된 그의 이야기다.
 
  “당구장으로 가는데 저 멀리 한 청년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라고. 시계를 보니 (오디션이) 끝난 시간대야. 그런데 종일 봤던 지망생 얼굴과 차이가 날 정도로 눈에 띄더군요. 한눈에 대성할 수 있겠다 싶었지. 부랴부랴 오디션장으로 안내해서 심사위원 앞에 딱 앉혔어요. 아니나 다를까 두말없이 뽑혔습니다.
 
  나중에 우리 셋(마용천·김종래·김영인)은 (신)성일이를 ‘우리가 발견한 스타’라고 말하곤 했죠.”
 
  신성일의 데뷔 전 본명은 강신영. 신성일이란 예명은 신상옥 감독이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용천 감독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때 오디션 심사를 봤던 분들을 기억해요. 신상옥 감독이 당연히 계셨고 최은희 여사, 그리고 기획 일을 보면서 연기자를 겸했던, 나중에 새한영화사를 차린 황남씨, 영화감독을 하면서 엔지니어 기술 쪽에 박식했던 이형표 감독, 나머지 한 분이 지방(극장) 흥행과 기획을 담당하던 이상철씨였어요.
 
  이상철씨는 아주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분이었는데 그때 나이가 60대 중반이었어요. 그분이 신 감독에게 ‘당신이 스타 하나를 발굴했으니 신 감독 성을 따고 별 성(星)자에다 한일(一)자를 넣어 신성일로 하자’고 했어요.”
 
  신성일이란 이름은 이상철씨가 처음 제안했다는 것이다.
 
  마용천 감독은 1927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났다. 1937년생인 신성일과는 열 살 차이다.
 
  “촬영장에서 자주 만나 자연스레 벗이 된 거야. 두 친구(김종래・김영인)는 (신)성일이와 연배가 비슷해 서로 말을 놓고 지냈지만 나에게는 ‘형, 형’이라며 친근감 있게 불렀어요.”
 
  ― 데뷔 초기 신성일을 어떻게 기억하세요.
 
  “스타 탄생 이전의 그는 무슨 일이든 열성으로 했어요. 선배 연기도 세밀히 관찰하고 조명기기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조명을 위쪽에 설치하는 것을 일본말로 ‘아시바’(조립식 비계)라고 하는데 성일이는 그런 조명도 유심히 보고… 영화에 대한 집념이 세밀하더라고. 물론 처음(데뷔)이니까 관심을 갖는 것이겠지만….
 
  그땐 조명기기가 쇳덩이랄 만큼 무거워 어깨에 메고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중노동이었어요. 당시엔 기자재가 부족했고 스튜디오에 기본적인 조명도 없었으니까요. 성일이가 조명기기를 많이 들어주었어요.”
 
  ― 시켜서 한 것은 아니었겠죠.
 
  “물론 아니지. 당시엔 영화제작 파트가 나뉘어 있긴 했지만 손이 부족하면 서로 도와주고 할 때였어요. 보통 스태프가 연출이나 조감독 등을 포함해서 스무 명 정도인데 조명 파트가 최소 5명에서 6~7명은 됐어요. 조명기기가 무거워 손이 필요했으니까.”
 
  ― 20대 무렵 신성일의 마스크는 어땠나요.
 
  “잘생긴 정도가 아닙니다.”
 
 
  신필름의 배우 신성일, 신상옥 감독을 떠나다
 
신성일의 데뷔 영화 〈로맨스 빠빠〉의 한 장면. 신성일은 둘째 아들 바른이로 나왔다.
  당시 1950~60년대 조명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영화 상영시간 90분 중 20여 분 정도를 제외하곤 전부 낮 장면을 찍었다. 20여 분의 밤 장면도 모두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었다고 한다. 조명기기의 부족으로 밤 촬영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성일의 경우는 뭐랄까 기본적인 조명으로 충분했다고 할까? 배우보다 인물 캐릭터의 주변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조명의) 관건이었어요. 컴컴하게 할 것이냐, 무엇을 강조할 것이냐… 연출자의 지시가 있지만 나 역시 조명을 구상하는 거지.”
 
  ― 당시 배우 중에서 어떤 이가 조명에 신경을 많이 쓰던가요.
 
  “아무래도 여자 연기자가 조명에 민감한데 아주 유난을 떨고 욕심을 부리던 이가 있었지. 그 시절엔 메이크업해 주는 파트가 따로 없어서 본인들이 직접 분장을 했어요. 얼굴에 조명이 제대로 비춰졌나, 안 비춰졌나를 세밀히 살피던 배우들이 몇몇 있었어.”
 
  ― 예컨대….
 
  “예컨대, 김지미, 문희 같은 배우가 그랬어요. 작품 속 캐릭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쁘게 나오는 게 최상의 목적이었으니까, 여배우들은 다 라이팅(lighting)에 욕심을 냈어요. 시사회 때 조명이 안 좋다 싶으면 퉁퉁 부어가지고 조명 담당을 원망하고….”
 
유현목 감독의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한 신성일. 아역배우가 안성기다.
  마용천 원로감독은 신성일의 데뷔작인 〈로맨스 빠빠〉(1960)를 떠올렸다.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신필름의 첫 작품이기도 했다.
 
  “등장인물이 비교적 단출했다고 할까. 김승호, 주증녀, 김진규, 최은희, 남궁원, 도금봉, 엄앵란, 주선태 같은 중견배우가 나왔고 이 작품을 통해 배우 신성일이 태어났죠.”
 
  〈로맨스 빠빠〉는 주인공 김승호가 청춘을 바쳐 일한 직장에서 해고당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큰아들 어진(남궁원)은 대학에 다닌다고 부모를 속이고 영화감독이 되려 한다. 둘째 딸 곱단은 배우 도금봉, 막내딸 이쁜이는 엄앵란이 출연했다. 신성일은 둘째 아들 바른이로 나왔다.
 
  ― 첫 작품이니 NG를 많이 내던가요.
 
  “제 기억으론 별로 없었어요. (신성일은) 일단 노(老)배우들 틈에서 아주 돋보이는 얼굴인 데다 생생한 맛이 나니까 주목을 받을 수밖에요.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날래게 행동했어요. 센스가 있었어.”
 
  신필름 설립 첫 작품으로 제작된 〈로맨스 빠빠〉는 작품성과 흥행 양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다. 1960년 문공부 우수국산영화상 최우수상을 받았고 국산 영화의 해외 수출이 전혀 없던 당시 태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그해 만들었던 영화 〈백사(白蛇)부인〉도 기억나. 신상옥 감독의 부인이자 영화계 대선배인 최은희 여사의 상대역으로 (신성일이) 캐스팅됐잖아요. 흰 뱀을 특수 촬영해야 하는데 그 시절엔 ‘특수한’ 장비가 없었어. 뱀이 꾸불꾸불 움직여야 하는데 얼마나 고생해서 찍었는지 몰라. 그런데 성일이가 신필름 영화는 얼마 안 했어요….”
 
젊은 시절의 신성일과 엄앵란.
  마용천 감독은 〈로맨스 빠빠〉 이후의 신성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로맨스 빠빠〉 〈백사부인〉을 찍고 잠깐 공백이 있었어요. 그때 라디오극 중에서 한운사 원작의 〈아낌없이 주련다〉가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유현목(兪賢穆·1925~2009) 감독이 그걸 영화화한 거지. 나도 라디오극을 열심히 들었는데 훗날 영화감독이 되면 〈아낌없이 주련다〉를 연출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때 성일이에게 출연 교섭이 갔나 봐.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한번은 ‘형!’ 하고 날 부르면서 속내를 털어놓기에 ‘나도 탐나더라’고 솔직히 얘기했지. 성일이는 신필름에서 배신자 소리를 듣기 싫었던 거지.
 
  그러더니 결국 유현목 감독에게 갔어. 놀랍게도 〈아낌없이 주련다〉(1962)가 완전 대히트를 쳤고 거기서부터 신성일이 충무로 바닥에서 최고 스타가 된 거야. 만약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겹치기 출연의 悲哀
 
신상옥 감독의 홍콩 합작영화 〈반혼녀〉(1973)의 조명을 맡았던 마용천 감독. 오른쪽은 홍콩배우 리칭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자 충무로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사람들이 영화관으로 몰리고 지방 흥행사들은 영화 판권을 사기 위해 입도선매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용천 감독은 조명감독으로 박상호, 문여송, 임원식, 나봉한, 최인현, 이경태, 이장호, 장일호, 이봉래, 최훈, 김수용, 김수동, 장형일, 정인엽, 고영남, 김효천, 심우섭, 이강천 같은 신필름의 쟁쟁한 영화감독들과 함께 일했다.
 
  “그때 1년에 150편, 200편씩 영화가 개봉될 때였어요. 돈이 되니까 충무로에 100여 개의 소규모 영화사가 난립했어. 영화관에 손님이 들끓었고 출연 배우만으로 흥행이 보장되던 시절이었어. 신필름이 신성일을 양성했지만 오히려 신성일은 다른 곳에서 터져버린 거야.”
 
  한국영화진흥공사가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는 모두 507편에 이른다고 한다. 또 118명의 여자 주인공과 로맨스 연기를 했다. 당시 신성일은 멜로 영화의 단골 주인공이었다.
 
  “(신)성일이를 섭외하려고 서로 난리였으니 겹치기 출연을 할 수밖에. 스케줄을 하루에 4~5 부분으로 쪼개 A영화사는 오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B영화사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런 식으로 겹치기 출연을 했어요.”
 
  ― 고인이 투병할 때, ‘주연을 하고도 못 봤던 자기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랬을 거야. 자기 작품이 뭔지도 모르고 막 찍었을 때니까.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으니까. 영화사마다 배우를 쟁탈하기 위해 경쟁이 엄청났어요. 그런데 겹치기 출연을 하니 문제가 생겨요. 왜냐면 어제 입은 와이셔츠와 오늘 입은 옷이 다르면 어떻게 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찍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 조명 파트는 어땠어요.
 
  “우리도 인력난을 겪었지. 나도 배우 못지않게 바빴어요. 내 밑에 조명담당 조수를 5개 팀이나 뒀으니까. 바깥(야외)에서 로케를 할 때는 반사판이 필요한데 그땐 내가 안 나가고 조수만 보냈어요. 중요한 실내 세트 조명이 필요하면 내가 나가고…. 나도 하루에 4~5개 촬영이 있어서 어디로 먼저 갈지 망설이곤 했어요. 기본적으로 신필름만 해도 1년에 소화하는 작품이 20~30편은 됐으니까. 돈도 많이 벌었고….”
 
  마용천 감독은 1969년 신필름을 나와 변장호 감독의 〈명동의 왕과 박〉(1970), 〈남대 여〉(1970), 〈사나이 가슴에 비가 내린다〉(1971) 등의 작품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조명감독에서 제작자로 변신한 것이다. 여기에 신성일과의 에피소드가 있다.
 
  “제 고향이 함경도입니다. 6·25 때 단신으로 월남해 우연히 신문을 통해 알게 된 극작가 유치진 선생이 운영하던 효제동의 배우학원을 알게 돼 수강을 했어요. 그때 견습생 신분으로 〈망나니비사〉(김성민 감독, 1955)의 촬영 현장을 찾게 되었고 거기서 조명 스승인 이한찬 조명기사를 만나 평생의 업(業)으로 영화 조명 일을 하게 됐어요.”
 
  ― 조명감독으로 후회는 없으시죠.
 
  “… 많습니다. 마음 한쪽엔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어요. 조명 일이란… 아무리 애를 써도 빛은 안 나고… 연출을 새로 시작하기엔 늦어버렸고…. (조명 출신인) 내가 영화감독을 하면 누가 인정하겠어요. 그래서 제작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거지. 시나리오만 좋으면 지방 6개 도시의 극장에서 선수금을 주는 시절이었으니까.
 
  그때 성일이가 ‘형님, 한번 봐줄게. 개런티의 절반만 받고 출연할게’ 그러더라고. 너무 고마웠지.”
 
 
  “아이고, 형! 얼굴이 왜 이렇게 됐어”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조우한 마용천 감독과 신성일.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 영화 제목이 뭔가요.
 
  “변장호 감독의 〈사나이 가슴에 비가 내린다〉였어요. 당시 멜로는 신성일, 액션은 박노식인데, 둘 다 스타니까 서로를 껄끄러워했어. 스토리는 거의 신파야. 형제가 이런저런 사연으로 헤어져 살게 되는데 형(박노식)은 성장해서 깡패 두목이 되고 동생(신성일)은 검사가 돼. 나중에 둘이 맞붙게 된다는 얘기야. 나는 흥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 스토리가 괜찮은데요. 익숙한 스토리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말이야. 촬영 스케줄을 다 잡아놨는데 (박)노식이가 광화문에서 술 먹고 사고를 쳐서 잡혀버렸네. 그때는 3~4개월이면 영화 한 편은 만들던 시절인데 감방에 있으니 어떻게 해. 촬영이 늦어지니 지방 극장에서 난리야. 겨울에 (박)노식이가 출소해 촬영을 시작했는데 여름 장면을 한겨울에 찍으니 엉망이 된 거지.”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쨌든 완성을 해서 극장에 올렸는데 흥행이 안 돼…. 이 시련을 어떻게 해. 내가 분수도 모르고 오버한 거야.”
 
  마 감독은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고인을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했다.
 
  “사실, 성일이가 암 투병 한다는 얘기가 작년에 나왔잖아. 전화해서 건강을 묻기도 뭐하고, 영화인들이 이심전심으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전부 충격을 받았지. 그런데 성일이는 영화행사나 영화제에 초청받아 거의 빠지지 않았거든. ‘아, 괜찮구나’ 싶었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성일 회고전’을 하는데 나를 보더니 귀빈석상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
 
  나더러 ‘아이고, 형! 얼굴이 왜 이렇게 됐어’라면서 안타까워했어요. 오랜만에 본 내 모습이 과거와 달랐던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말했지. ‘이봐, 성일이! 지금 내 얘기 하게 생겼어? 네 몸이나 생각하라’고 했어요.
 
  지난 10월 4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우린 만났지. 성일이가 세상을 뜨고 누가 나한테 그날 악수하던 사진을 보내왔어. 그 사진을 보면 지금도 눈물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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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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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창욱    (2018-12-17)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나도 조명따윈 필요없다. 조명없이도 확실히 못생겨 보이니까
  파천황    (2018-12-17)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강신영님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公이 남기신 발자취는 오히려 큰 별이 되어 다시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박승익    (2018-12-13)     수정   삭제 찬성 : 29   반대 : 0
불세출의 명 배우 신성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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