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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신념이 나라를 망친다

평화만을 추구하다 전쟁 불러들인 네빌 체임벌린

“大英제국을 전쟁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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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 방관, 주데텐 위기 발생하자 체코슬로바키아에 독일에 양보하도록 강요
⊙ “나는 히틀러에게서 한 번 약속을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먼 나라의 주민들 사이에서 분쟁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방공호를 파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이상하며 믿을 수 없는 일인가?”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돌아온 체임벌린은 열광하는 군중 앞에서 히틀러와의 성명서를 흔들며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장담했다.
  “나의 선량한 동포 여러분! 독일로부터의 명예로운 평화를 다우닝가(街)에 가져오게 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이것이 두 번째 일입니다. 나는 우리 시대가 평화로울 것을 믿어 마지않습니다(I believe it is peace for our time)!”
 
  1938년 9월 30일 아서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1869~ 1940) 영국 총리가 런던 다우닝가의 총리 관저 앞으로 몰려든 시민들 앞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날 독일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을 독일에 넘겨주는 대가(代價)로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유럽의 평화’를 약속받고 돌아왔다. 방공호(防空壕)를 파고 가스마스크를 지급받으면서 전쟁의 공포에 떨던 영국민들은 체임벌린을 개선장군처럼 환영했다. 그들 앞에서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함께 서명한 선언서를 의기양양하게 흔들어대면서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 평화는 1년짜리 평화였다. 이듬해 9월 1일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기 때문이다. 1887년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가 독일 베를린회의에서 가져온 첫 번째 ‘명예로운 평화’가 27년간 지속됐던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평화였다. 이후 체임벌린과 그가 성사시켰던 ‘뮌헨협정’은 ‘잘못된 유화(宥和)정책’의 상징이 됐다.
 
 
  보건장관으로 복지제도 확충
 
  네빌 체임벌린은 오늘날 영국에서 역대 총리를 평가할 때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사람 중 하나다. 그와 필적하는 사람은 1956년 수에즈전쟁을 일으켰다가 망신스럽게 퇴각해 대영제국의 쇠락을 세상에 확인시켜 준 앤서니 이든 정도다. 하지만 뮌헨의 악몽만 아니었다면 그는 정치인으로서 그렇게까지 저평가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네빌 체임벌린의 아버지는 식민지장관 등을 지낸 조지프 체임벌린이다. 조지프 체임벌린은 20세기 초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관세개혁과 복지제도 확충을 주장, 일세를 풍미했던 거물 정치인이었다. 조지프 체임벌린의 큰아들이자 네빌 체임벌린의 이복(異腹)형인 조지프 오스틴 체임벌린은 외무장관 등을 지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질서를 안정시킨 로카르노 조약을 성사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네빌 체임벌린 역시 체신장관·보건장관·재무장관, 보수당 원내대표·당 의장 등을 역임한 영국 정계의 거물이었다. 특히 1920년대에는 스탠리 볼드윈 총리 아래서 보건장관으로 국민건강보험법을 제정하는 등 영국 복지제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보건장관 재직 중 25개의 사회개혁법안을 제안했고, 그중 21개를 입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볼드윈이 내세웠던 ‘새로운 보수주의’, 즉 사회개혁에도 적극적인 보수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체임벌린은 1930년대에는 보수당-노동당 거국일치(擧國一致) 내각에서 총리 램지 맥도널드(노동당), 추밀원 의장 스탠리 볼드윈(보수당)과 함께 정국(政局)을 이끄는 핵심 3명 가운데 하나로 활약했다. 재무장관 시절에는 아버지의 비원(悲願)이던 관세개혁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37년 5월 총리가 됐을 때,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준비된 총리’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잘못된 시기의 잘못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 말았다.
 
 
  히틀러, 베르사유 체제를 흔들다
 
  네빌 체임벌린이 총리가 된 시기는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형성된 베르사유 체제를 흔들어대기 시작할 때였다. 다만 아직은 노골적으로 전쟁이라는 수단에 호소하지는 않고 있었다.
 
  1935년 3월 16일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軍備)제한 규정을 무시하고 재무장을 선언했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히틀러를 비난하고 유럽의 현상유지를 선언한 로카르노 조약(네빌 체임벌린의 형 오스틴이 성사시켰던)을 재확인했다. 히틀러는 그해 5월 21일 의회 연설에서 ‘평화’를 호소했다.
 
  “민족사회주의(나치) 독일은 평화를 갈망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본적 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전쟁수단에 의해서는 어떠한 유럽의 고뇌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것 같지 않다는, 지극히 간단한 원시적 사실의 인식에 의거하여 독일은 평화를 원한다.… 모든 전쟁의 주요 성과는 그 나라의 정수(精髓)를 파괴하는 것뿐이다.… 독일은 평화를 필요로 하며 또 이 평화를 원한다.”
 
  히틀러는 국제연맹이 관리하던 자르(라인강 연안의 탄광지대)가 국민투표에 의해 독일로 돌아온다면 ‘프랑스와의 국경을 결정적인 것으로 승인하고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랫동안 독일과 프랑스가 다투었던 알자스-로렌을 포기하겠다는 얘기였다. 폴란드와 불가침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우리는 이것을 무조건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 내정에 간섭하거나 병합, 합방할 의도가 없다”고 선언했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인접 국가들과의 불가침조약과 군축협정을 제안했다. 히틀러는 특히 영국에 대해 영독(英獨)해군협정 체결을 제안했는데,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의 35%로 제한하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20세기 벽두 독일과 건함(建艦) 경쟁을 벌이다가 제1차대전으로 비화됐던 경험을 갖고 있던 영국에는 커다란 유혹이었다. 영국은 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계속해서 보게 되겠지만, 평화를 깨는 도발을 저지른 후, 긴장이 고조되면 재빨리 평화공세로 나서서 세계를 현혹시키는 것은 히틀러의 상습적인 수법이었다.
 
 
  라인란트 進駐
 
1936년 3월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을 깨고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로 進駐했다.
  1936년 3월 2일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비무장지대로 규정되어 있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進駐)시켰다. 작전에 동원된 부대는 불과 3개 대대였다. 프랑스군은 100개 사단에 달했다. 독일군 수뇌부는 내심 프랑스가 반격해 올 경우 36계 줄행랑을 놓을 계획이었지만, 아무런 반격도 받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 의회에 나가 “우리는 영토적 욕구를 갖고 있지 않다”면서 “독일은 결단코 평화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반격을 모색하면서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친독파(親獨派)인 로시언 경(卿)은 “독일은 자신의 뒤뜰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야(前夜)의 독일을 직접 목격했던 미국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는 《제3제국의 흥망》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라인강의 다리를 건너 3개 대대가 전진한 것으로 유럽의 전략정세가 흔들렸을 뿐 아니라, 다시는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히틀러(그리고 영국에서는 처칠)뿐이었던 것 같다.”
 
  1936년 7월 11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폰 슈슈니크와 독일-오스트리아 협정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는 자신이 ‘독일인의 국가’라는 것을 인식하고 외교정책에서 독일과 보조를 같이할 것을 약속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정간섭을 하지 않기로 한 기존의 약속을 재확인했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히틀러의 약속들은 나중에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영국은 평온을 필요로 하고 있다”
 
  네빌 체임벌린은 바로 이럴 때 영국 총리가 됐다. 당시 서유럽의 양대 강국은 영국과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독일의 재부상(再浮上)을 경계하고 있었고, 10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다만 좌우(左右) 갈등으로 정정(政情)이 불안했고, 중요한 전략적 결단을 내릴 리더십이 없었다. 독일이 유럽의 안보지형을 흔들 때마다 프랑스는 런던의 의중부터 살폈다. 대서양 너머 미국은 고립주의를 고집하고 있었고, 소련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내부가 소란했다. 영국, 아니 네빌 체임벌린은 유럽 문제의 키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네빌 체임벌린은 취임 초부터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은 체임벌린의 이런 입장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독일 외무부 정무국장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의 아버지)는 이렇게 기록했다.
 
  “영국은 어디까지나 평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영국이 이 평온을 위해 자진해서 무엇을 지불하려고 하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유익한 일이다.”
 
  1937년 11월 영국의 귀족 핼리팩스 경이 나치 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의 초청을 받아 독일을 방문했다. 체임벌린은 핼리팩스의 방독(訪獨)을 열렬히 지지했다. 괴링·히틀러 등과 만나고 돌아온 핼리팩스는 체임벌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히틀러는 가까운 장래에 모험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모험이 이익을 가져오지도 않을뿐더러, 독일 국내의 건설이 바쁘기 때문이다. 괴링은 ‘독일이 절대절명적으로 강요되지 않는 한 유럽에서 독일인은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체임벌린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핼리팩스의) 독일 방문은 대성공이다. 유럽의 현안 해결에 포함되어 있는 실제적인 여러 문제에 대하여, 독일과의 협의를 가능하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목적이 달성됐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의 이런 태도는 당시 영국 사회 일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정서의 반영이었다. 이런 정서는 ‘다시는 각국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됐던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들이 독일에 너무 가혹했다. 이제 유화정책을 펴서 독일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맞아들이는 것만이 제1차대전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는 것을 막고 유럽에 항구적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2017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사구로의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에서 친독파 영국 귀족 달링턴 경은 이렇게 말한다.
 
  “갈등이 끝난 마당에 이처럼 적국을 계속 증오한다는 것은 보기 흉한 작태입니다. 링에서 상대를 다운시켰으면 그걸로 끝내는 것이 온당합니다. 그다음에도 계속 발길질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오스트리아 합병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히틀러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빈에 입성했다.
  베르사유 체제를 멋대로 유린하면서도 계속해서 올리브 가지를 흔들어대던 히틀러는 영국의 이런 태도를 십분 활용했다. 히틀러는 1938년 2월 20일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000만이 넘는 독일인이, 우리나라 국경에 인접하고 있는 두 나라에 살고 있다.… 독일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해서, 권리의 박탈, 즉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일반적인 여러 권리가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국경 연변에 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서는 도저히 그 정치적・정신적 자유를 획득할 처지에 있지 못한, 이들 독일 민족을 보호하는 것은 독일의 큰 관심사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700만명의 게르만족이 사는 오스트리아, 325만명의 독일계 주민이 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체임벌린은 이 연설에 대해 공감을 표시했다. 체임벌린 정부의 외무장관이던 앤서니 이든(후일 총리 역임)은 체임벌린의 이탈리아 무솔리니에 대한 유화정책에 항의해 사임했다. 체임벌린은 대표적인 친독파인 핼리팩스 경을 후임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독일은 만세를 불렀다.
 
  1933년 집권 초부터 오스트리아 나치를 배후 조종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위한 공작을 벌여오던 히틀러는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합병 다음날인 3월 14일 체임벌린은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난 사태는 어떠한 것으로도 이를 저지할 수 없었음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우리나라 및 다른 여러 국가가 무력을 행사할 용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이제 다음 차례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것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3월 17일 소련은 독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3월 24일 의회 연설에서 체임벌린은 이를 거부했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 필연적인 결과로, 유럽 평화의 전망을 해롭게 한다.… 배타적인 국가집단의 결성을 돕는 결과가 될 것이다”라는 게 그 이유였다. 나중에 주데텐 위기 때, 그리고 그 이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임박해 있던 상황에도 체임벌린은 한사코 소련을 배제하려 했다. 이는 그가 히틀러보다 공산주의를 더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는 비판할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반소적(反蘇的) 자세는 히틀러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3월 24일의 의회 연설에서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외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은 이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체임벌린은 아울러 유사시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맹관계인 프랑스를 지원하겠다고 시사(示唆)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5월 위기’
 
주데텐독일당 지도자 콘라트 헨라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신생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에는 325만명의 독일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데텐이라는 지방이 있었다. 주데텐은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제국의 일부였던 적은 있어도 독일에 속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들이 ‘독일계’라는 이유로 주데텐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조종을 받은 콘라트 헨라인은 주데텐독일당을 조직, 이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왔다. 독일군은 1937년 6월 이래 ‘녹색작전’이라는 암호명 아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처럼 총 한 방 못 쏘아보고 독일에 항복할 생각은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유럽 유수의 공업력을 바탕으로 유사시 100만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와도 동맹을 맺고 있었다.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기 위해 개입할 경우, 프랑스와 동맹관계인 영국도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구조였다.
 
  1938년 5월 중순이 되자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독일군이 국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에 대비,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독일 주재 영국・프랑스 대사는 독일 외무부를 방문,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유럽전쟁을 뜻한다”고 경고했다. 히틀러의 침략 야욕 앞에 처음으로 유럽 열강들이 단합한 것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새로운 세계대전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히틀러는 일단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을 보류했다.
 
 
  체임벌린, 양보부터 생각
 
에드바르트 베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당시 베를린에 있던 미국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는 “체임벌린이 나치스 침략에 대해, 결국 하게 될 바에야 차라리 그때 한다고 히틀러에게 솔직히 통고했더라면 총통(히틀러)은 제2차대전을 일으키는 짓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후일 술회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5월 14일 체임벌린은 한 오찬모임에서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할 경우, 영국도, 프랑스도, 그리고 아마 소련도 구원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면서 “영국은 평화를 위해 주데텐을 독일에 넘겨주는 데 찬성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비보도(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미국 언론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6월 1일 《타임스》는 “비록 그것이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더라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국내 소수 민족에게 ‘자결권’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주데텐 독일인들을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내 소수민족들의 주민투표를 제안했다. 며칠 후 주영독일대사관은 이 사설이 체임벌린이 앞서 행했던 오프 더 레코드 발언에 바탕을 둔 것으로 체임벌린 총리의 의중이 담긴 것이라고 본국 외무부에 보고했다. 주독 영국대사 네빌 헨더슨 경은 사석에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1명의 수병, 1명의 비행사도 잃게 되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8월 말 네빌 체임벌린은 주독 영국대사 헨더슨 경에게 히틀러에게 ‘온건한 경고’를 하는 한편, 비밀리에 히틀러와의 대화통로를 구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영국은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노력은 히틀러가 아니라 에드바르트 베네시, 즉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주데텐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체임벌린, 히틀러에게 정상회담 제안
 
  베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했다고 느꼈다. 그는 9월 5일 주데텐독일당 지도자들을 불러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써내라.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주데텐독일당 지도자들은 주데텐에 ‘국가 내의 국가’를 수립하는 수준의 요구를 내놓았다. 베네시는 이를 수락했다. 주데텐독일당 지도자들조차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통 큰 양보’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주데텐독일당 당수 헨라인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제안을 거부하고 일체의 교섭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히틀러로서 주데텐 문제는 자신의 이니셔티브, 가능하면 찬란한 군사적 승리를 통해 달성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9월 12일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나치당대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다시 한 번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향해 “주데텐 독일인에게 ‘공정한 대우’를 하라. 그렇지 않으면 독일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호응해 주데텐 독일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베네시는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독일로 도망친 헨라인은 종전의 자치 주장을 거둬들이고 주데텐은 독일에 병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한 번 긴장이 고조됐다. 전쟁 위험이 고조될수록 유사시 체코슬로바키아를 보호하러 나서야 하는 프랑스가 발을 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는 9월 13일 체임벌린 영국 총리에게 독일과의 협상을 간청했다.
 
  그날 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양국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지급(至急) 메시지를 보냈다. 체임벌린은 다음날 바로 항공편으로 독일을 향해 출발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때 체임벌린의 나이는 69세, 당시로서는 무척 고령(高齡)이었다. 비행기 여행이 지금처럼 편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독일 알프스산맥에 있는 베르히테스가르텐까지는 7시간이나 비행해야 했다. 게다가 체임벌린은 그때까지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체코, “우리는 버림받았다”
 
  체임벌린이 이런 결심을 한 것은 물론 어떻게 해서든 전쟁만은 피해 보려는 충정(衷情)의 발로였다. 하지만 전체주의 독재자 히틀러는 이를 체임벌린이 자신의 열세(劣勢)를 인정하고 굽히고 들어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9월 15일 체임벌린과 만난 히틀러는 이렇게 요구했다.
 
  “영국은 민족자결권을 바탕으로 한 주데텐 지구의 할양에 동의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체임벌린은 “개인적으로는 주데텐 지구를 분리하는 원칙을 인정한다고 언명할 수 있다”면서 “본국으로 돌아가 정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얻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체임벌린은 헤어지기 전 히틀러에게 “다시 회담할 때까지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기분 좋게 이에 응했다. 그는 10월 1일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기로 이미 정해 놓았기 때문에 그 정도 선심(?)은 써줄 수 있었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감격했다. 그는 “나는 그에게서 한번 약속을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2000년 6・15 선언 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은 대화가 되는 사람이고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체임벌린은 그 길로 런던으로 돌아와 내각과 의회를 설득했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에 동원될 부대들을 편성하고 지휘관들을 선임했다.
 
  9월 18일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와 조르주 보네 외무장관이 런던에 도착, 체임벌린과 주데텐 할양에 대해 논의했다. 두 사람은 주데텐 독일인이 50% 이상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독일에 넘겨주되, 영국과 프랑스는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국제적으로 보장하는 데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다음날 프라하 주재 영국・프랑스대사는 이러한 제안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제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를 수락하는 것은 조만간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의 완전한 지배하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거부했다. 9월 21일 영국과 프랑스는 베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영국과 프랑스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체코슬로바키아는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마치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거부하는 월남의 응우옌 반 티에우 대통령에게 리처드 미국 대통령이 “만일 월남이 끝내 평화협정 수락을 거부한다면, 미국은 단독으로라도 월맹(북베트남)과 협정을 조인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월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중단될 것”이라고 압박했던 것과 흡사하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소련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 조약은 프랑스가 행동할 경우에 소련도 행동에 나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프랑스가 나서지 않는 이상, 소련과의 조약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9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굴복했다. “우리 혼자만이 버림받아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
 
  다음날 체코슬로바키아 내각은 총사퇴하고 양 시로비 장군이 새로운 내각을 조직했다.
 
 
  독일 장군들, “전쟁 났으면 히틀러 정권 붕괴했을 것”
 
  9월 22일 체임벌린은 독일의 고데스베르크에서 다시 히틀러와 만났다. 히틀러는 그해 5월 위기 때 영국・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의 단합된 의지 앞에서 뒤로 물러나야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세 나라에 앙갚음을 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무력(無力)함을 세계에 보이고 싶어 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에 양도할 지구에서 9월 26일부터 철퇴(撤退)하기 시작, 9월 28일까지 완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히틀러의 무리한 요구에 실망한 체임벌린은 “더 이상 회담을 해도 무의미하다”면서 귀국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나는 좀처럼 내가 한 말을 거두어들이지 않지만, 당신이니까 특별히 양보하겠다”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철퇴 기한을 10월 1일로 늦추어주겠다고 했다. 이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히틀러가 이미 설정해 놓은 침공일자였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감격했다. 체임벌린과 헤어지기 전 히틀러는 이렇게 장담했다. “주데텐은 내가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요구하는 영토입니다.”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은 체임벌린은 나중에 의회에서 “히틀러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그렇게 말했다”고 강조했다.
 
  체임벌린은 평화에 대한 기대를 안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영국 내각과 프랑스 정부는 고데스베르크 합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동원령을 선포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80만명의 야전군을 포함해 100만명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프랑스도 부분 동원에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주재 독일 무관(武官)은 프랑스가 6일 내에 65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에 비해 독일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 절반밖에 안 됐다. 영국도 함대를 동원하고, 공군보조부대를 소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남은 체면조차 짓뭉개버리려던 히틀러의 과욕이 역효과를 부른 것이다.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10월 1일에는 내 마음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결말을 짓겠다. 프랑스나 영국이 대항하겠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뻗댔다.
 
  금방이라도 평화가 올 것 같던 상황에서 다시 전쟁위기가 고조됐다. 독일에서는 일반 시민들은 물론 군(軍) 상층부조차 전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패전(敗戰) 후 뉘른베르크 전범(戰犯) 재판에 회부된 독일 장군들은 입을 모아 “당시 독일군은 영국・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등을 상대로 전쟁을 할 능력이 없었으며, 그때 전쟁이 일어났으면 히틀러 정권은 붕괴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나는 내 영혼 깊숙한 곳까지 철저한 평화애호자”
 
  하지만 히틀러는 능수능란했다. 그는 9월 26일 열린 대중집회에서 베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맹공하고 “어쨌든 10월 1일에는 주데텐을 손에 넣겠다”고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그간 평화를 위해 노력해 온 체임벌린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주데텐은 내가 유럽에서 요구하는 마지막 영토다. 우리는 단 한 사람의 체코슬로바키아인도 필요 없다”고 공언했다. 한 입으로 전쟁과 평화를 교대로 말하며 사람을 홀리는 것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북한 김정은만큼이나 현란했다.
 
  공원과 광장에서는 방공호를 파고, 학생들을 지방으로 소개(疏開)시키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체임벌린은 필사적으로 평화를 모색했다. 체임벌린은 9월 27일 베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9월 28일 오후 2시까지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하는 한편, 대(對)국민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먼 나라의 주민들 사이에 분쟁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방공호를 파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이상하며 믿을 수 없는 일인가?”
 
  “우리는 크고 강력한 이웃 나라와 대결하고 있는 조그만 나라에 동정하지만, 어떠한 사정이 있든 다만 그것만을 위해 전(全)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한다면 그보다 더 큰 문제라야 한다.”
 
  “나는 내 영혼 깊숙한 곳까지 철저한 평화애호자이다. 국가 간의 무력 충돌은 내게는 악몽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이건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할 때, 나는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지배하에서는 자유를 믿는 인간의 생명은 그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전쟁에 끼어드는 경우엔 참으로 중대한 문제가 놓여 있다는 것을 우선 명확하게 해두어야 한다.”
 
  많은 영국인이 24시간 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감 속에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히틀러는 체임벌린에게 전격적으로 친서를 보내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체코슬로바키아 5개국 회담을 제안해 왔다.
 
 
  뮌헨협정
 
뮌헨회담에서 악수를 나누는 체임벌린(왼쪽)과 히틀러.
  여기에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숟가락을 얹었다. 형식상 무솔리니의 발의로 주데텐 문제 해결을 위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회담이 9월 29일 독일 뮌헨에서 열렸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들은 글자 그대로 옆방에서 대기했다. 자국(自國)의 운명이 결정되는 자리에 그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히틀러는 자기가 요구하는 바를 무솔리니의 손을 빌려 내놓았다. 그것은 며칠 전 히틀러가 고데스베르크에서 체임벌린에게 제안했다가 영국・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거절당했던 안(案)과 대동소이했다. 독일에 할양해야 할 면적은 오히려 더 넓어졌다. 하지만 목전으로 닥쳐온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했던 영국과 프랑스 총리의 눈에는 그런 게 들어오지 않았다. 체임벌린은 “두체(무솔리니의 칭호로 ‘수령’이라는 뜻)의 제안을 환영하며, 나도 이 제안의 노선에 따르는 해결책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젊은 시절 기업인으로 활약했고 재무장관을 지냈던 경제통답게 체임벌린은 “주데텐에서 독일이 넘겨받는 공유(公有)재산에 대해서는 누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보상하느냐”고 물었다. 히틀러는 “이런 하잘것없는 일로 낭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면박을 주었다.
 
  9월 30일 오전 1시, 히틀러, 무솔리니, 체임벌린, 달라디에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은 10월 1~7일 4단계에 걸쳐 독일 군대가 ‘주로 독일인이 거주하는 지역’, 즉 주데텐을 점령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대신 양국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새 국경을 보장한다고 선언하면서 독일・이탈리아에도 그러한 보장을 하도록 요청하는 규정을 협정 부속문서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러한 보장을 끝내 하지 않았다.
 
 
  처칠, “우리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히틀러의 위험을 경고했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뮌헨협정이 체결된 후 몇 시간 동안 눈을 붙인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자택으로 찾아가 유럽의 여러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담 후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문서를 하나 내밀면서 서명을 요청했다. 그 문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독일 총통 겸 총리와 영국 총리는 오늘 거듭 회합하여 영국과 독일의 문제는 양국과 유럽에 있어서 제1급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인정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는 어젯밤 서명된 협정과 영독해군협정을,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양 국민이 희구하는 상징이라고 인정한다.
 
  우리는 양국에 관한 모든 문제를 협의를 통해 해결하겠다고 결의한다. 의견 대립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여, 유럽 평화 확보에 기여할 것을 결의한다.〉
 
  히틀러는 이를 읽어본 후 바로 서명했다. 이 문서가 바로 체임벌린이 귀국한 후 공항에서 흔들어 보이면서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했던 바로 그 문서이다.
 
  체임벌린은 개선장군처럼 귀국했다. 《타임스》는 “전장(戰場)에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 정복자 그 누구도 이보다 더 고귀한 월계관으로 장식된 사람은 없었다”고 극찬했다. 체임벌린에게 감사하는 모금운동이 조직되기까지 했다.
 
  오직 한 사람, 윈스턴 처칠만이 의회 연설에서 “우리는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라고 외쳤다. 그의 연설은 야유와 고함 속에 묻혀버렸다.
 
 
  “오늘은 슬픈 날”
 
  체임벌린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불과 5개월여가 지난 1939년 3월 히틀러는 슬로바키아에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체코)는 독일의 보호령으로 삼아버렸다. 그해 8월에는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와 발트 3국 등을 나누어 갖기로 밀약(密約)을 맺었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체임벌린은 급히 폴란드와 상호안보조약을 체결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에게 폴란드를 침공하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유럽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독일의 재군비로부터 시작해 라인란트 진주, 오스트리아 합병, 주데텐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해체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경고대로 행동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주데텐 위기 때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에 훨씬 못 미치던 독일의 군사력은 급속히 증강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합병, 주데텐 위기 당시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독일을 구하겠다면서 반(反)히틀러 쿠데타 음모를 꾸몄던 독일 군부는 잇단 히틀러의 승리에 주눅이 들어 양처럼 고분고분해졌다. 반면에 영국과 프랑스에는 염전(厭戰)사상과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그해 9월 1일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기 위해 열린 의회에서 체임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우리 모든 동료들에게는 가장 슬픈 날입니다만,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때문에 힘써 일해 오던 모든 것은, 나의 공적(公的) 생애를 통해 굳게 믿어오던 모든 것이 허물어져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렇게까지도 많은 희생을 바쳐온 주의・주장의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육체적으로 있는 힘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히틀러주의가 분쇄되어, 해방된 유럽이 재건되는 날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체임벌린의 역할은 이미 끝났다. 이듬해 5월 10일 그는 패전의 와중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1930년대 내내 홀로 히틀러의 위험을 경고해 왔던 윈스턴 처칠이 그 뒤를 이었다. 의회에서의 신임투표를 앞두고 보수당 의원 레오폴드 에멀리는 체임벌린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물러나라! 그대가 비록 약간의 공로를 쌓았다 하나, 그대는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다. 내가 감히 말하노니, 그대는 지금 즉시 그 의자에서 걸어 내려옴으로써 신(神)의 소명(召命)에 따르라!”
 
  정신적・육체적 힘이 고갈된 체임벌린은 독일 공군이 영국 런던을 맹폭(猛爆)하고 있던 무렵인 1940년 11월 9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히틀러주의가 분쇄되고 해방된 유럽이 재건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칠은 《제2차세계대전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국이 도전해 온다면 반드시 맞받아쳐야 한다는 사람들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겸허한 자세와 인내와 성실로 평화적 타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틀린 것도 아니다. 아니, 대개의 경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더 나은 선택을 했다고 할 것이다. 인내와 꾸준한 선량함 덕분에 이제껏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이 몇 번일까! 종교와 도덕은 개인들끼리만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온화함과 겸허함을 종용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안전, 동포의 생명과 자유가 걸린 문제에서 최후의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면, 그런 확신이 있는 한 무력 사용을 피하면 안 된다. 그것은 정당하고 절실한 문제다.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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