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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암살 그후 | 김성동의 인간탐험

美 CIA 출신 마이클 리가 보는 김정남 암살

“장성택은 중국 측에 김정남을 김정은의 代案이라고 말했다”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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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택, 중국에 “필요하다면 우리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말해
⊙ 살해에 독극물질을 사용했다는 것은 전형적인 북한 방식
⊙ 김정은 후계 확정 후 백두혈통이란 용어 본격 사용돼
⊙ 장성택의 북한 경제개혁 시도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좌절된 것
⊙ 배타적이고 다혈질인 트럼프는 머지않아 한반도 문제를 정리할 것
  마이클 리는 전직 미(美)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이다. 올해 84세다. 그는 502 군사정보단, CIA 등 미국 정부에서 40년간 근무했다. 58년부터 근무한 502 군사정보단에서 그는 대공(對共) 업무를 주로 맡았다. 송추 무장공비 사건, 거물간첩 황태성 사건, 실미도 사건 등을 직접 조사했다.
 
  74년 502 군사정보단의 업무가 대한민국 정보사령부로 이관되면서 그는 이민을 떠났다. 미국 시민권이 나오기도 전인 76년부터 그는 CIA 요원이 됐다. 그를 CIA 요원으로 채용한 사람은 훗날 미국 대통령을 지낸 조지 부시 당시 CIA 국장이었다. 2002년 2월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는 CIA에서 26년간 근무했다.
 
  CIA에서도 그는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일을 맡았다. 이를 위해 유럽 등 전 세계 24개국에서 파견 근무를 했는데 그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긴 기간인 84년부터 95년까지 근무했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신상옥·최은희 부부, KAL858기 폭파범 김현희 등을 직접 조사했고 한국을 떠난 후인 97년에 발생한 황장엽 망명 사건 때도 미국 정부 조사단으로 한국에 와서 황장엽씨 일행을 직접 조사했다.
 
  CIA를 떠난 이후에도 그는 이명산(李明山)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간혹 한국을 방문한다. 그때마다 그는 새로운 정보와 분석으로 북한을 보는 기자의 시각을 넓혀주었다. 그는 김정남 암살 사건이 발생한 직후 기자에게 ‘김정남 암살’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해왔다. 그의 집필실이 있는 알래스카에서 쓴 글이었다.
 
  그의 글이 도착한 때는 《월간조선(月刊朝鮮)》 3월호가 막 마감을 한 참이었기에 그의 글을 게재할 수는 없었다. 기자는 그 글을 좀 더 보강해서 기자와 인터뷰할 것을 그에게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다.
 
  마이클 리가 보내온 글의 서두는 이랬다.
 
  〈지난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북한 김정남이 피살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전 세계가 또 한 번 북한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 사건은 가뜩이나 대북정책에 적극적이고 강도 높은 대응을 표방한 미국 트럼프 정부의 출범 직후에, 미국을 겨냥한 대륙 간 탄도미사일(ICBM) 개발의 직전 단계라고 믿어지는 ‘북극성 2호’를 시험 발사한 바로 다음날 발생했다는 점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게 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으나 필자는 이 사건이 북한 김정은의 지시에 의한 공작이라고 확신한다.〉
 
북한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여성 2명의 공격을 받은 후 공항 의무실로 향하는 모습.
사진=유튜브 캡처
  ― 김정남 암살이 북한에 의한 테러라고 확신하는 근거는 뭡니까.
 
  “김정남을 암살해야 할 주체가 북한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북한이 아닌 제3국의 테러집단이나 개인이 저지른 범행이었다면 살인무기를 사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독극물질을 사용했다는 것은 전형적인 북한 방식입니다. 저는 지난 수십 년간 북한을 지켜봐 온 전문가로서 김정남 살해에 극독물질을 사용했다고 했을 때 직감적으로 그것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말레이시아 정부가 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공작원 4명이 북한 국적이라고 판명했지 않습니까.”
 
  ― 북한에서 김정은 체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용어인 백두혈통이라는 말은 언제 만들어졌습니까.
 
  “백두혈통이란 용어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그 일족의 3대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우상화 수식어입니다. 이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김정은 후계를 확정한 때부터죠. 잡음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백두산에서 항일투쟁했다는 김일성의 직계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김정은은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김정일의 자식이므로 그 혈통이 우월하다는 것으로 백두혈통만이 가능하고 아닌 사람은 통치 세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죠. 그러나 엉성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은 북한만 빼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진짜 김일성’은 누구입니까.
 
  “그분의 본명은 김광서(金光瑞)이고 별호는 김경천(金擎天)입니다.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 해안 승평에서 출생했는데 호적상의 본적지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 166번지입니다. 그분은 구한말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해 1911년에 기병과 제23기생으로 졸업한 후 1915년에 기병 중위가 됐습니다. 당시 일본 육사 출신 한인들은 김광서 외에도 제26기생 홍사익(洪思翊)과 이응준(李應俊) 등 13명과 제27기생 김석원(金錫源)과 김인욱(金仁旭) 등 20명 등 총 33명이 더 있었습니다. 1919년 2월 20일에 병가를 얻어 서울의 사직동 166번지 자택에 와 있는 동안에 3·1운동을 맞았고, 일본군을 떠나 해외로 도피해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그해 6월에 일본 육사 3년 후배인 지대형(池大亨)(다른 이름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한 분이 진짜 김일성입니다.”
 
 
  김정남의 탄생
 
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북한 공작원 홍송학 등 3인이 자카르타 공항에서 여행가방을 끌고 출국하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 이들은 티케팅을 하면서 여유 있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도 보였다. 사진=KBS 화면
  김정남 탄생의 배경이 된 김정일과 성혜림(成蕙琳)이 만나게 된 과정과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결정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상세하게 기술했다.
 
  〈독재자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는 장남 김정일은 영화광으로 1967년부터 영화 부문 업무를 전담하게 되는데 당시 김정일은 거의 매일같이 조선예술영화 촬영소에서 젊고 예쁜 배우들을 접촉한다. 그때 그는 성혜림이란 미모 출중한 여배우를 만나게 된다.
 
  성혜림은 그 당시 김정일보다 4년 연상이고 벌써 11세 된 딸(이옥돌)이 있는 30세의 유부녀였다. 그는 1937년 1월 24일에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부 성유경(1906~1982)의 딸로 출생했다. 성유경은 1945년 12월에 남로당에 가입하고 월북하여 초기에 박헌영, 허헌 등과 친하게 지내며 권력 중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50년 6·25사변 발발 직후인 9월에 성혜림은 모친 김원주(1907~1994)와 함께 서울에서 월북하여 평양에서 성유경과 합류했다. 성혜림은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인 18세 되던 해에 월북작가 이기영(李箕永)의 큰아들인 이평(李平)과 결혼했다. 김정일은 그의 고교 동창이자 이평의 동생인 이종혁(李鐘赫)을 만나러 자주 그 집에 접근하였는데 사실은 그의 형수인 성혜림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평과 이종혁 형제의 아버지 이기영은 1930년대 서울에서 활약하던 프롤레타리아 경향문학(傾向文學), 소위 KAPF 문학 계열의 대표적인 작가였다 .
 
  성혜림에게 반한 김정일은 이평과 성혜림을 강제로 이혼시키고 1969년부터 그녀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권력 후계자로서의 위상에 손상이 갈까 염려하여 그와 같은 불륜관계를 비밀에 부치고 특히 아버지 김일성에게는 철저하게 숨기고 살았다. 그러다가 1971년 5월 10일에 그들 사이에서 김정남이 출생했다.
 
  김정남은 숨겨 놓은 자식이었기 때문에 아비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세상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그가 어렸을 때에는 주로 외조모 김원주와 이모 성혜랑(成蕙琅) 품에서 자랐다. 이런 부자연스런 사생활에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성혜림에게는 정서불안의 신드롬이 시작되었고 1973년 말에 김정일이 후계자 책봉의 입지를 다지기 위하여 김영숙(金英淑)과 정식 결혼을 한 이후에는 그 병세가 악화되어 특별 치료를 받기 위하여 모스크바에 가게 된다.
 
  1974년 12월에 김영숙에게서 딸 김설송(金雪松)이 태어나고 그때까지도 장손 김정남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김일성과 가족이 설송에 대한 애정으로 법석을 떨고 있을 때 김정일마저도 내연녀 성혜림과 김정남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갔다. 그 결과로 성혜림은 시름시름 앓다가 한 번도 절대 권력자의 가족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2002년 5월 18일 사망, 모스크바의 한적한 묘지에 매장됐다. 그의 비문에는 오순희라는 가명이 적혀 있다.
 
  김정일의 여성편력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1971년부터 이미 만수대예술단의 무용수 고용희(1953년 6월 16일 출생)와 은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 고경택(高京澤)은 제주도 출신으로 1929년에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1962년도 고용희가 10세 되던 해에 북송교포로 북한에 들어갔다.
 
 
  김정남과 김정은의 암투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출생한 김정남과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에서 출생한 김정은.
  그녀는 출중한 미모와 무용 실력으로 후에 만수대 예술단원이 되고 이어서 김정일의 비밀파티 기쁨조의 대원이 됐다. 1976년도부터는 기쁨조에서 김정일의 고정 파트너가 된다. 그들은 결국 동거를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서 김정철(金正哲·1981. 9. 25), 김정은(金正恩·1983. 1. 8), 김여정(金與正·1987. 9. 26)이 태어난다. 고용희는 김정일과 동거한 여자들 중에서 김정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자로 알려져 있고 김정일의 후광을 업고 권력 내부에 가장 많이 관여한 여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1991년경부터 김정일의 후계자로 자기 소생을 옹립할 것을 구상하고 권력 실세들을 선물 공세로 포섭하며 표가 날 정도로 설쳐댔다. 그의 공략에 같이 놀아난 인물들은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김용순, 당 조직지도부 제1 부부장 이제강, 인민무력부 총참모장 김영춘 등이었다.
 
  그러나 그녀 앞에는 만만치 않은 적수가 있었다. 당시 벌써 20세가 된 김정일의 엄연한 장남인 김정남의 존재와 권력 실세 중에 김정남을 감싸고 도는 막강한 조직이 그들이다. 김정남의 뒤에 줄을 선 간부들은 군부에서는 이을설을 중심으로 하는 고위직 지휘관들이고 당에서는 고모부 장성택이 요지부동한 후견자였다.
 
  이 두 세력 사이에 김정일의 후계자 문제로 암투가 진행되고 있을 때 김정일은 당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의 후계자 문제로 왈가왈부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하여 그 후로 그 싸움이 잠잠한 듯하였고, 2004년 8월 13일에 고용희가 사망한 이후로는 그들의 암투가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2004년 12월, 김정남이 오스트리아 빈에 체류하고 있을 때 죽은 고용희 잔당 세력의 소행으로 보이는 김정남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의 압력으로 이 일은 없었던 일처럼 처리되었다.
 
  김정남은 스위스와 러시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 후로는 자유롭게 해외출입을 하다가 2001년에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갔다가 적발된 사건 이후 후계자 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하고 여생을 해외에서 떠도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맘 놓고 신변안전을 지킬 수 있는 곳이 없었고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중국, 마카오,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동안 고모부 장성택이 은밀히 그의 생활비를 조달해 주었다.
 
  2006년 12월 24일에 고용희 소생 김정은이 김일성대학교를 졸업하고 김정일의 후계자로 결정되었고, 김정일이 건강 악화로 병원에 누워 있을 때에는 김정은과 여동생 김여정이 매일같이 그를 간병했다. 장남 김정남과 큰딸 김설송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2009년 1월 8일 김정은 생일날, 김정일은 당내에 공식적으로 김정은 후계 결정을 공표했다. 이때 이후 김정남은 해외에서 떠돌며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언동을 하다가 평양으로부터 경고를 받았고 그의 생명을 노리는 암살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김정은에게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애원을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2011년 12월 17일(사실은 16일) 김정일이 사망하고, 어린 김정은의 후견인으로서 실질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고모부 장성택이 김일성 일가를 위한 수령경제를 내각 중심의 민생경제로 전환하려는 경제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39호실 비자금 관리 기득권을 시기하고 그의 체제변조계획을 반대하는 수령절대주의 세력에 의해 그는 2013년 12월 12일에 처참하게 처형을 당하는데,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숨은 이유가 있었다.〉
 
 
  김정철이 후계에서 밀려난 이유
 
2017년 2월 15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보고 있다.
  ― 김정남의 어머니인 성혜림이 모스크바 체류 중 한국 망명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성혜림은 정말 한국 망명을 생각했습니까.
 
  “저는 성혜림이 한국 망명을 생각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 성혜림이 전 남편 이평과 사이에서 낳은 딸 이옥돌은 그 후 어떻게 됐습니까.
 
  “엄마 성혜림이 이혼하고 김정일과 동거할 때 두 모녀는 생이별을 했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살았고 엄마를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 후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자료가 없고, 다만 그가 후에 왕송림과 결혼했고, 왕송림은 한때 네팔과 스웨덴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송림이 스웨덴 근무 시 스위스에서 실종된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본명 이일남·1960~1997)을 찾기 위해 당시 북한의 UN대사 진충국과 함께 맹활약한 일이 있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이옥돌이 이옥순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요. 이 이상 이옥돌에 관한 자료는 없습니다.”
 
  ― 월북하기 전 성혜림의 가계(家系)를 보면 인텔리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성혜림이 경남 창녕에서 출생했다고 돼 있는데 그건 오보입니다. 그의 오빠 성일기씨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와 여동생 성혜랑, 성혜림은 서울 종로구 계동, 즉 과거 현대그룹 사옥 뒤편에 옛날 여운형이 살던 집 옆집에서 출생했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습니다. 성혜랑과 성혜림이 서울에서 학생 때 창녕 큰아버지 집에 자주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성유경은 고향인 경남 창녕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갑부의 자식이었으나 보성 고보 16회를 졸업하고 좌익 활동에 가담했습니다. 1945년 12월에 남로당 가입,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때에는 남로당 중앙위원회 재정부장을 역임했죠.”
 
  ― 성혜림의 어머니도 좌익 인텔리였다면서요.
 
  “어머니 김원주씨는 진남포 출생입니다.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여기자로 활약했죠. 역시 좌익 활동에 가담하면서 남조선 민주여성동맹 문화부장을 역임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6·25사변 발발 직후 9월에 두 딸 성혜랑과 성혜림을 데리고 월북해 미리 가 있던 성유경과 합류했습니다.”
 
  ― 성혜림의 오빠 성일기씨는 남한에서 생활하고 있는데요.
 
  “성혜림의 오빠 성일기씨는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3년 12월 31일에 체포된 후 소속 빨치산 부대장 남도부의 은신처를 폭로한 공로로 석방되었습니다. 6·25사변이 휴전된 이후에 북한에서는 과거 남로당 출신들이 대거 숙청됐는데 지도부 인사들은 모두 사형에 처했으나 성유경 부부는 중형은 면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김정일의 장인·장모라 할지라도 과거 남한에서 지주 출신이며 아들 성일기의 배신행위 때문에 모든 요직에서 축출되고 노동자 수준의 여생을 살았다고 하죠. 성혜림이 모스크바에서 병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언니 성혜랑과 혜랑씨의 딸 이남옥이 같이 있었죠. 알려진 대로 혜랑씨의 아들 이한영은 1982년에 남한으로 망명했고 성혜랑은 1996년에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리고 이한영도 죽고 김정남도 죽었습니다. 북한 공작원에 의해서 말이죠. 인간적으로 보면 그 집안의 비극이 안타깝습니다.”
 
  ―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이 권력 후계에서 밀려난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장남 김정남 그리고 고용희 소생 김정철은 정치나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도전정신이 없는 그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이고 실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김정남은 사실 초기에 권력에 대한 야망이 있었고 또 그를 옹립하려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용희의 공략에 패배했습니다. 또 김정철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인 적도 있었으나 2005년도에 김정철의 건강에 이상이 발견됐습니다. 체내 호르몬 분비가 비정상적이었고 여성다운 성격이 나타나며 매사에 소극적이고 유약한 기질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죠. 김정일의 생각이 김정은으로 옮아간 것은 그때부터입니다. 그리고 김정은은 자식들 중에 야심이 가장 많았고, 2006년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점찍었을 때 김정일의 절대적인 이유는 그가 조부 김일성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에 카리스마 계승을 위해서는 김정은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김정남 암살 시도 항의
 
김정남 피살 후인 지난 2월 2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귀빈실 입구에서 탄 스리 칼리드 아부 바카르(가운데)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김정남 시신에서 검출한 시료를 분석한 결과, VX로 불리는 신경작용제 ‘N-2-디이소프로필아미노에틸 메틸포스포노티올레트’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 글에서 김정은 지지 세력과 김정남 지지 세력의 암투를 언급했는데 실제 겉으로 드러난 사례가 있는지요.
 
  “김정남이냐, 김정은이냐를 놓고 벌어진 암투는 주로 당시 노동당 행정부장이며 국방위원회 위원인 장성택과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인 이제강과의 기 싸움으로 집약됩니다. 개혁파인 장성택은 김일성의 사위일 뿐만 아니라 모든 보안기구,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를 휘두르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김정남의 고모부라는 확실한 카드를 쥐고 있었고, 경제 개혁개방을 꿈꾸는 모사였습니다. 반면에 수구파 이제강은 당 조직과 간부들을 좌지우지하는 김정일 다음의 최고 권력 실세였습니다. 장성택은 개혁 성향이 있는 김정남 편이고 이제강은 수구 성향이 있는 김정은 편이었습니다.”
 
  이어지는 김정일 후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장성택과 이제강의 기 싸움 이야기다.
 
  “2002년에 개혁개방의 일단으로 장성택이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선포했을 때 많은 당 간부가 그에 호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강이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장성택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죠. 당의 총체적 조직과 활동을 장악하는 이제강이 장성택의 호화 방탕한 사생활을 고발한 겁니다. 결국 장성택은 2004년에 숙청되고 〈혁명화 교양〉이라고 지방기업소에서 3년간 고생을 하게 됩니다. 2007년에 처 김경희의 탄원으로 풀려나와 권력에 복귀한 장성택은 당시 철도성 조직비서이던 이용순의 비리를 적발합니다. 그때 이제강이 이용순을 감싸고 돌았지만 2008년 2월에 이용순이 공개 처형되고 그를 옹호한 이제강 계열의 간부 40여 명이 해임되는 일이 벌어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성택과 이제강의 싸움에서 이제강이 승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장성택, 이제강의 싸움이 김정남, 김정은 권력후계 싸움과 복합성이 있고 최종결심을 해야 하는 김정일이 개혁개방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 간부 대부분이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절대로 인식하고 있으나 수령절대주의와 그 세력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이 북한의 비극인 것입니다.”
 
  ― 2004년 김정남의 빈 체류 당시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첫 암살 시도인지요. 구체적인 정황을 말씀해 주시죠.
 
  “지금까지 알려진 사건을 말해 보죠. 2004년 12월에 김정남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종사촌 누이 김옥순의 집에 체류하고 있을 때 죽은 고용희 측근, 즉 김정은 옹립 세력이 김정남을 암살하려는 공작을 하고 있는 것을 오스트리아 정보당국이 탐지하고 외교채널을 통해 북한에 강력히 항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2009년 4월에는 평양 중구역에 있는 특각 ‘우암각’ 기습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신상옥과 최은희가 한때 거처로 사용하기도 한 곳인데 김일성 사망 후 1997년부터 주로 김정남이 사용을 했죠. 김정남이 해외에서 돌아오면 이곳에 머물고 그의 측근들이 이따금 파티도 열곤 했습니다. 2009년 4월 초에 김정남 측근들이 이곳에서 연회를 열고 있었는데 무장한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기습했습니다. 김정남을 사살하려고 했으나 마침 그가 그 자리에 없어서 변을 모면했고 참석한 요인들은 모두 체포되고 김정남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서둘러 싱가포르로 도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속조치로 그해에 평양에서는 국가보위부를 장악한 김정은의 지시로 김정남 측근들이 대거 체포됐습니다.”
 
  ― 알려진 이야기입니까.
 
  “주의 깊게들 안 봐서 그렇지 일부 알려진 사실들입니다. 《월간조선》이 보도한 김정남 암살 미수 사건도 있지 않습니까.”
 
  마이클 리가 말하는 《월간조선》이 보도한 김정남 암살 미수 사건이란 2013년 3월호에 보도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2010년 6월 하순, 북한 보위부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해외반탐처 공작원 김영수에게 ‘김정남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해 9월경 베이징에서 교통사고로 위장한 김정남 암살계획을 세우고 현지 택시기사를 매수하여 대기하고 있었으나 김정남이 나타나지 않아서 계획이 무산됐다. 이 사실은 2012년 9월 12일에 위장탈북자로 국내에 잠입한 김영수가 체포된 후 2013년 2월 초에 서울구치소에서 《월간조선》 기자에게 실토한 것이다.
 
  ― 또 다른 암살 시도는 없었습니까.
 
  “정확한 일자는 모르지만 2011년에도 있었습니다. 김정남이 마카오에 머물고 있을 때 북한 국가보위부 요원들이 그곳에 나타나 김정남의 경호원들과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다행히 그때는 김정남이 다치지 않고 도피했습니다.”
 
 
  장성택이 처형당한 진짜 이유
 
2013년 12월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 처형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 시민들.
  ― 장성택은 김정남이 후계 구도에서 탈락한 이후에도 왜 은밀히 도운 것 같습니까.
 
  “김정일이 김영숙과 정식 결혼을 한 후 성혜림과 김정남에 대한 애정이 식고 그들 모자가 숨어서 살고 있는 동안 장성택은 고모부의 입장에서 인간적으로 김정남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습니다. 그처럼 측은한 처조카에 대한 연민의 정이 그들의 관계를 그렇게 묶어주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성택은 고단수의 정치적 모사로서 철없고 못마땅한 김정은에 대한 숨겨놓은 대안으로 김정남을 지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 김정남은 아들 김한솔을 북한 망명정부의 지도자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데요.
 
  “김한솔을 북한의 망명정부 지도자로 세우려 했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 어린아이에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아마 낭설이었을 겁니다.”
 
  ― 장성택이 북한 경제를 수령경제에서 민생경제로 바꾸려고 한 경제개혁은 왜 실패했다고 봅니까.
 
  “장성택의 경제개혁 시도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좌절된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겁니다. 그는 경제개혁뿐만 아니라 북한의 체제를 개혁할 수 있는 능력자로 보였고 많은 북한 분석가가 그가 북한의 고르바초프가 되어주기를 기대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김일성 일가와의 관계, 그가 행사하고 있던 기득권을 너무 믿었고 방심하면서 적에 대한 방어가 너무 허술했습니다. 제가 지적한 바 있지만, 그는 수령절대주의 세력에게 먼저 칼을 뽑았어야 했습니다. 한발 늦었어요. 적이 그보다 먼저 칼을 뽑은 것입니다.”
 
  마이클 리가 보내준 글에는 장성택의 처형과 관련한 비화도 있었다. 김정은이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해야 했던 분석도 있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김정일 생존 시부터 누적되어 온 경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장성택은 중국을 설득하여 북한 경제의 활성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추진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는 2012년 8월에 50명이 넘는 경제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경제특구 공동개발 추진과 10억 달러의 긴급차관 요청을 위해서였다.
 
  중국 측에서는 장성택을 북한의 권력 실세로 인식하고 과거 김일성, 김정일과 동일한 수준으로 그를 예우했다. 통역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한 시간 이상의 밀담에서 장성택은 당시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수상에게 10억 달러의 긴급차관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원자바오는 “북한이 지금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어 국제사회가 주시하고 있는데 중국이 차관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 정당성을 합리화해야 하는 법적 절차가 선행돼야 한다”면서 즉답을 피했다. 그때 장성택은 “필요하다면 우리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것은 장성택 개인의 의사이지 북한 체제와 당의 전략은 아니었다. 그 말끝에 장성택은 세상 물정 모르고 철없는 새 지도자 김정은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했다. 후진타오가 장성택에게 “혹시 김정은에 대한 대안은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했을 때 장성택은 서슴지 않고 “예, 있습니다. 김정남입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극비의 회담내용이 어떻게 해서 중국공산당 최고 권력기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원인 저우융캉(周永康)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중국의 지도부 모르게 그동안 북한과 내통하는 세작(細作)이었다. 그가 위에서 언급한 극비회담 내용을 북한의 모 비밀기관에 누설한 것이다. 저우융캉은 훗날 이 일이 발각돼 국가기밀 누설죄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북한에서도 김정은과 주요 실세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극비로 취급되었고, 김정은은 장성택이 귀국한 후 그와 완전히 접촉을 금하고 그가 처형될 때까지 정책 상담을 하지 않았다. 장성택은 김정은의 최고 보호자의 위치에서 최고로 위험한 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장성택이 그토록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그해 12월에 장거리유도탄 발사시험을 했고 2013년 2월 12일에는 3 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그리고 김정은은 이복형 김정남을 제거하기 위한 암살계획을 하부기관에 지시하고 수시로 김정남의 동향을 파악했다.
 
  언론에서 말하는 소위 ‘Standing Order(스탠딩 오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사실들에 비춰 다시 풀어서 말하면 김정은은 김정남 개인을 무섭거나 위험인물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그의 배후를 두려워한 것이다. 김정남은 정권에 야욕이 없고, 국내에 배후 조직도 없고, 자금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장성택 처형 이후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옛날 같지 않았고 북한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중국이 ‘김정남 카드’를 만지작거린 것만은 사실이다.〉
 
 
  중국과 북한 관계 험악해질 것
 
  ― 장성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원자바오와 나눴다는 밀담은 정말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2012년 8월에 장성택이 중국에 가서 중국 최고 지도자들과 회담한 것은 공개된 사실입니다. 문제가 된 그 밀담 내용 역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 저우융캉이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부패 혐의 때문 아닌가요.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어떤 정치범의 범죄가 국가안위에 악영향을 미칠 만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엉뚱하지만 그럴듯한 다른 죄목을 뒤집어씌우는 것이 상례입니다. 북한에서 장성택을 처형할 때에도 그랬잖습니까.”
 
  ― 북한 전문가로서 북한과 중국 관계를 전망한다면?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지금 취하고 있는 전략은 북한을 조이기 위하여 중국을 압박하는 것인지 중국을 조이기 위하여 북한을 압박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애매하면서 신중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미국은 절대로 북한 문제와 남중국해에 대하여 중국에 양보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이번에 북한이 북극성 2호를 발사할 때 중국이 극력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발사를 감행했고 바로 그 다음날 김정남 암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중국에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한미 연합훈련이 시작됐고 한반도의 긴장은 일촉즉발의 상태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제 중국은 미국의 입김을 마시며 최고로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 결과 중국이 이제부터는 북한을 과거처럼 어설프게 다루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험악해질 것입니다.”
 
  ― 트럼프의 대북 정책 전망은?
 
  “제가 믿고 판단하기로는 트럼프 정부가 머지않아 한반도 문제를 정리할 것 같습니다. 그의 정책이나 인간적인 기질을 분석하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트럼프는 첫째, 배타적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정책에 거스르면 상대방과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죠. 밀어붙이는 성격입니다. 둘째로 다혈질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안 되거나 처리가 안 되면 시간을 끌며 따지고 분석하고 숙고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즉시 강행 처리할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죠.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그는 분명히 자기가 취임하면 한반도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최강도로(Highest priority and strongly) 처리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습니다.”
 
  마이클 리는 2년 전에 출판한 그의 회고록 《CIA 요원 마이클 리》에서 “한반도 유사시에 미국이 동원할 전략 자산은 핵추진 항공모함, 핵잠수함, B-2 전략폭격기, F-22 랩터 전투기”라고 한 바 있다.
 
  ― 미국이 그런 전략 자산들을 한국에 배치할 가능성이 높습니까.
 
  “지금 그런 가공할 만한 무기들이 한국 배치를 준비하거나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밀도 아닙니다. TV나 신문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 이 외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지만 지금은 조심스러워 말을 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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