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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대선(大選)

안희정 傳奇 - 53장면으로 본 그의 삶 53년 (3/3)

16세 때 사회주의 혁명 꿈꿨던 소년, 대권(大權) 두 발자국 앞까지 왔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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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스스로를 정치인이라고 칭한 것은 1994년 노무현과 일하면서부터
⊙ 박정희 대통령 존경한 아버지, 이름을 정희와 똑같은 희정으로 짓고 육사(陸士) 진학 권해
⊙ 중3 때 박정희 죽음으로 환상에서 깨어나
⊙ 고1 때 혁명가 꿈꾸다 제적당해… 검정고시 거쳐 ‘운동권’ 되려 고려대 입학
⊙ 전대협의 대부… 1986년 건국대 사태와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두 차례 수감,
    고려대 제적당해
⊙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사관들에게 고문받으며 받은 질문에 허물어져 내려
⊙ 1989년 김덕룡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 입문… 3당 합당에 실망해 출판사 영업부장으로 변신
⊙ 1994년 노무현 의원의 제안으로 정계 복귀
⊙ 장수천-나라종금 사건으로 수감
⊙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은 단물만 빼먹고 노무현의 젊은 동업자 안희정은 뒤치다꺼리만 했다
⊙ 나는 김대중과 노무현의 뒤를 잇는 장자(長子)
⊙ 북한과 교류하되 한미 동맹 더 굳건해져야… 자주국방도 강조
안희정 지사는 “노무현, 그는 정말 나랑 피 맛도 똑같은 것 같다”고 말한다.
  41. 안희정이 말하는 ‘노무현과 나’ 그리고 대연정(大聯政)
 
  “‘노무현, 그는 정말 나랑 피 맛도 똑같은 것 같다. 정말 좋다.’ 좌절과 고민, 도전을 거듭하던 그의 곁에서 나는 어느 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지낸 물리적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내 삶에서 노무현을 지우면 여백만 가득한 도화지가 될 것이다.”
 
  “만일 노무현이 없었더라면 나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논리를 동원해 줏대 없고 무원칙한 정파의 이익만 대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89년 김덕룡 의원 비서관으로 처음 제도권 정치를 시작했을 때 의원실에는 지지자나 친구들이 항상 찾아왔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보좌진에게 밥도 사주고 용돈도 쥐여주곤 했다. 김덕룡 의원이 서울대를 나와서인지 아니면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비서실장을 지내서인지 지인들이 그렇게 찾아왔고 보좌관에겐 어떤 달엔 거의 월급에 육박하는 부수입이 생겼다.
 
  1990년 3당 합당 뒤에는 이철 꼬마민주당 사무총장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덕룡 의원실만큼은 아니지만 항상 누군가 와서 밥을 사주고 용돈을 줬다. 이철 사무총장은 무소속이었지만 서울대 출신이라는 게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1994년부터 함께한 노무현 전 의원에게는 이렇게 찾아오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부자 친구가 없어서인지 상고(商高)를 나와서인지 혹은 본인이 이런 ‘호의’를 거부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보 진영에도 재야에도 기득권은 존재한다. 우리 때는 소위 스카이(서울대, 연대, 고대) 중심의 운동권 질서가 있었다. 이들 학교에서 NL(민족해방) 그룹이 만들어지면 지방의 학교들에도 NL 그룹이 쫙 형성되었다. 서울에 CA(제헌의회)가 생기면 또 지방으로 CA가 확산됐다. 스카이가 NL에서 손을 떼고 소위 비명문대라 불리는 학교가 이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한 때부터 학생운동은 급격히 쇠퇴했다. 재야에도 이런 분위기는 분명히 존재했다. 명문대 중심의 질서에 짓밟힌 노무현의 현실을 비서인 나도 똑같이 느꼈다. 유시민 전 장관이 어느 인터뷰에서 노무현의 이런 현실을 두고 한 말이 기억난다.
 
  ‘재야 출신 선배들이 노무현을 우습게 아는 게 나는 우스웠다. 노무현을 평가해 주지 않는 게 너무 서운하다. 솔직히 대학 안 나왔다고 차별한 것이라고 본다. 이른바 서울대 출신 중에서 나도 좀 잘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이런 내가 노무현 밑에 들어가 그 사람을 위해 일할 의사가 있다. 노무현은 그럴 만한 자질과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동교동계도 아니고 상도동계도 아니다. 운동권인 것도 아니고 운동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인텔리인 것도 아니고 인텔리가 아닌 것도 아니다. 출세한 것도 아니고 출세를 안 한 것도 아니다. 노무현은 언제나 경계에 서 있었다.”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바로 다음날 출근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사면(四面)이 구가(舊歌)다.’ 새로운 정치를 얘기하고 후보가 됐지만 새로운 정치를 이끌어야 될 정치인으로서 딛고 서 있는 현실은 온통 옛날 노래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일 때 한 사우나에서 우연히 만났다. 목욕을 마친 뒤 노 대통령에게 나는 취임식에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나라종금 사건으로 화살을 맞은 내가 대통령의 첫걸음에 함께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려. 사람들이 나 축하해 준다고 호남선 타고 경부선 타고 올라오겠지. 호남선에서는 ‘저거 영남 사람 아닌가’ 그러고, 경부선에서는 ‘저놈, 호남으로 양자 간 사람 아니냐’ 이러면 나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런 현실은 이어졌다. 새롭게 시작해야 될 모든 살림살이가 다 헌 그릇이니 얼마나 난감했을까. 사람들은 그가 너무 앞서간다는 말을 많이 했지만 그는 늘 시대와 국민에게 등 떠밀려 가고 있다고 했다.”
 
  “그의 죽음이 슬펐던 이유는 그와 나의 육신이 영영 이별한 데에 그치지 않는다. 특권과 반칙을 특권과 반칙이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연고주의 질서, 실력에 기초한 공정한 기회와 도전을 어렵게 하는 기득권 질서에 도전했던 노무현이다. 그도 출세한 사람이었지만 이 질서에 도전했다. 한 사회의 기득권 질서를 바꾸고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저항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의 도전과 죽음은 이 변화를 위한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절실함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도전의 역사가 중단될까 두렵고 슬프다. 이대로 가다간 조선왕조가 무너지듯이 대한민국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때때로 엄습한다.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며 그것이 더욱 현실화되고 있는 것 같아 절망스럽다.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또다시 여성과 아이들을 비롯한 약자, 그리고 평범한 서민들인데…”
 
  안희정 지사는 연정 제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연정 제안은 박근혜·최순실과 새누리당을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연정은 어떠한 선거공학적 접근도 고려하지 않은 분명한 자신의 소신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지금의 정쟁구도에서 벗어나) 촛불광장의 민심이 요구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놓고 의회와 협력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협치 형태가 대연정이 될지 소연정이 될지는 국가개혁과제를 놓고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연정에 대한 비판은 앞으로 있을 많은 토론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
 
 
  42. 안희정이 말하는 ‘민주 양아치’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시절에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오셔서 우리 연구원들에게 밥을 사주신 적이 있다. 그때 김 의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즘 재야 학생운동 하던 친구들이 정치권에 많이 들어와. 여기 정치권에서는 줏대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정치권 양아치’라고 불렀는데 가만 보니까 이 정치권 양아치보다 한 수 위가 있어. 그게 ‘민주 양아치’라고 하더군. 민주주의 운동의 논리로 정치판 양아치 짓을 하니 ‘배운 도둑질이 더 심하다’고. 옛날 정치판 양아치는 양아치라고 낙인이라도 찍을 수 있었는데 민주 양아치들은 배운 게 있어서 논리로 잘 포장을 하니 양아치라고 찍히지는 않지만 사실 행태는 양아치나 마찬가지야.’
 
  엄청나게 부끄러웠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나의 논리가 정의’라는 폭력적 태도가 아직 내게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43. 안희정이 청춘들에게
 
2017년 2월 6일 안희정 지사가 충남도청에서 아르바이트 대학생들과 간담회를 가진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누군가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도, 내 인격과 권리를 무시하는 것도 싫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내 권리를 침범하는 간섭을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5, 6학년 때는 가출을 하는 것이 소원인 때도 있었다.
 
  작은아들도 나를 꼭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저항정신’이 충만했다. 둘째가 중학생이 되고 어느 날이었다. 혼낼 일이 생겨서 앉혀놓고 말하는데 꼬박꼬박 말대꾸다. 말대꾸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더니 조목조목 따지고 든다.
 
  ‘아버지, 뭐가 말대꾸고 뭐가 대화예요? 이야기하자고 해놓고 제가 말하면 말대꾸라고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시만 해도 나는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였다. 더군다나 사내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나는 아이들이 버릇없게 군다 싶으면 손을 대기도 했다. 아이들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서로 부딪칠 때면 육탄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거나 객기를 부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 이야기가 3분을 넘어가면 나는 안 들려요. 그래서 다른 짓을 하면 아버지는 화를 내고 나는 거기에 반항하게 되고 아버지는 더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3분 안에만 끝내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을게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한참 방황을 하고 그 후에는 게임이며 드럼에 빠져 걱정만 시키던 놈이 어느새 이만큼이나 컸나 싶었다. 별수 있나, ‘오냐’ 하고 말았다.
 
  아들이 나에게 맞서는 것이 왜 당황스럽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나는 고뇌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개겨라. 위험을 감수하고 개겨야 한다.’
 
  부모 세대의 권위에 도전하고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길 기다리며 눈치 보는 한 영원한 소년일 뿐 미래를 향한 지평선을 넘을 수 없다.
 
  N포세대란 말을 거침없이 입에 올리지만 세상에 자기 인생을 쉽게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N포세대와 같은 말은 나와 같은 아버지 세대들이 자식들에게 붙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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