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의 인간탐험]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펴낸 김형오(金炯旿) 전(前) 국회의장 : 월간조선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당한 이날은 1400년간 지속한 로마제국 최후의 날이다. 동양의 이슬람 문명에 서양의 기독교 문명이 점령당한 날이기도 하다. 중세에서 근세로 시대가 바뀌는 전환점이 마련된 것도 이 전쟁을 통해서다.

비잔틴제국 최후의 날에는 두 리더십이 충돌한다. 점령자 오스만튀르크의 술탄(이슬람 국가의 왕) 메메트 2세와 패배자 비잔틴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충돌이다. 두 지도자는 지상전, 해전, 공성전, 첩보전 등 당시 전쟁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50여 일간 전투를 벌인다.

콘스탄티노플은 수많은 침략자의 공격에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요새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접근하면 깊이 10m, 넓이 20m의 해자와 3중 성벽이 가로막고 있었고 바다로 다가가면 빠른 해류와 쇠사슬이 막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의 군사 7000명이 압도적인 전력의 메메트 2세를 50여 일간 막아낸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표지.
제목 그대로 《술탄과 황제》의 전면 개정판이다.

메메트 2세는 해발 60m의 산에 통나무를 깔고 기름을 부어 마찰을 없앤 뒤 배를 옮겼다. 비잔틴제국의 배들은 갑자기 육지 쪽에서 나타난 엄청난 수의 배에 제압당하면서 전쟁의 승부는 기운다. 그렇게 해서 술탄은 정복자로 살아남아 지배자가 되고 황제는 비잔틴제국 최후의 황제로서 죽음을 맞는다.

2012년 11월, 이 50여 일간의 전투는 일기와 비망록의 형식을 빌려 동양의 한 사내에 의해 재현된다. 《술탄과 황제》라는 책이다. 스테디셀러였던 이 책은 38쇄를 끝으로 절판된다. 1년6개월 후 이 책은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간된다. 462쪽이었던 책이 504쪽으로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 새 자료들이 보충됐다. 저자는 “전면 개작”이라고까지 말한다.

책이 22쇄를 찍을 때까지 저자는 자신이 국회의장 출신 김형오(金炯旿)인 것을 철저히 숨겼다. 자기 사진도 넣지 않았다. 김 전 의장은 “‘국회의장 출신 아무개가 역사서를 냈다’는 흥밋거리로 취급받기보다는 당당하게 역사 저술로 평가받고 싶었고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전 의장과는 10월 24일 개정, 출간한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때문에 인터뷰 시간을 잡았다. 우리가 만난 날은 ‘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시끄러워진 11월 1일이었다. 그의 양해를 구해 책 이야기와 함께 정치 원로로서 그가 보는 시국 전반에 대한 견해도 들었다.

일기와 비망록에 상상력을 더하다

현장 취재를 위해 테오도시우스 성을 찾은 김형오 전 국회의장.

― 38쇄까지 낸 책을 굳이 완전 개정판으로 냈는데 보완할 게 많았습니까.

“기본적인 사실이 뒤바뀐 것은 아니고 더 깊이 있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치밀하게 증보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완전히 새롭게 쓰게 된 것이지요. 흥미진진한 세계사적 사건을 동양의 한 사람이 다룬다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완결판을 내고 싶은 생각도 강했고요. 이 책을 준비하고 개정판까지 내는 데는 8년이란 시간이 들었습니다. 제 나이를 생각하면 무리였는데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고 자부합니다.”

― 책 출간 후 역사학계나 이런 곳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분들은 없었습니까.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 책에 대해 시비를 걸 사람은 없잖아요. 이 사건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드무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고증을 소홀하게 했다는 뜻은 아니고요. 책이 나온 다음에 이스탄불에 다시 가고 하면서 책에 이러한 점이 보완이 됐으면, 좀 더 강조가 됐으면 하는 점이 생기더군요. 이 사건과 관련해 서양에 수많은 책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려면 좀 더 역사적인 사료와 근거와 그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넣어서 하되 재미가 없으면 안 되고, 박진감 넘쳐야 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종합적 인식도 갖춰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공부를 해야 했죠.”

― 영문판도 낼 생각입니까.

“마침 제안이 와서 접촉 중이에요.”

― 내년에는 영문판도 만날 수 있겠네요.

“내년에 낸다고 확답은 할 수 없고요. 지금 접촉 중인데 영문판으로도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죠.”

― 역사서이지만 일기와 비망록, 소설이 섞인 독특한 서술 방식 때문인지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미도 주고 그러면서 품격과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고심을 좀 했습니다. 국내에 비잔틴제국의 멸망과 관련한 번역서가 두 권이 있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스티븐 런치만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라는 책이 있어요.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대중적으로 쉽게 쓴 책이고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어렵지만 고증이 잘 된 책이죠. 스티븐 런치만의 책은 어려워서인지 많이 읽히지 않았어요. 저는 스티븐 런치만이 책에서 제시한 근거 이상을 제시하되 좀 더 쉽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을 쓰자고 생각했죠. 스티븐 런치만의 책은 1965년에 나온 거니까 그 이후의 자료들까지 수집해서 넣은 제 책이 더 고증이 잘 된 책이라고 자부합니다.”

―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술탄과 황제》의 일기와 비망록에는 작가로서의 상상력도 가미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최고 리더들이 성을 놓고 한쪽은 공격, 한쪽은 수비하는 상반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 번은 수비군 총사령관이 된 심정으로, 한 번은 공격군 총사령관이 된 심정으로, 일기와 비망록을 썼습니다. 제가 국회의장으로 있으면서 최고의 위치에서 고뇌와 결단의 시간도 보내봤고 협상과 타협을 하면서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고 하던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계 은퇴까지 선언하며 책 준비

― 책의 저술을 위해 8년 이상의 긴 시간을 투자했는데.

“처음에는 책을 내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재미있고 흥미 있는 사건으로만 접했어요. 배를 끌고 산을 넘어가서 항구를 점령하고 그 결과로 세계사의 물길을 바꾸고… 생각만 해도 재미있잖아요? 우리나라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도 있는데 술탄의 선택은 거꾸로였죠. 발상의 대전환이라고 할까요? 이 사건을 기록한 자료나 책들을 읽으면서 그냥 빠져들었어요. 또 제가 의장 할 때(2008년 7월~2010년 5월) 정치상황이나 국회가 얼마나 복잡했어요. 그걸 잊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여기에 빠져들었죠. 시오노 나나미가 쓴 책을 읽다가 이런 사건을 이렇게 가볍게 써도 되나, 내가 직접 써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애초 쓸 마음은 없었어요. 제 나이도 있고 정치라는 현업도 있고 해서요.”

― 국회의장에서 물러난 후에 저술을 결심한 겁니까.

“시기적으로는 그렇죠. 2010년도 하반기에 제가 이집트 여행을 하게 됐어요. 그곳에 가서 피라미드를 방문하면서 제가 깨우쳤죠. 피라미드 속 왕의 ‘사자(死者)의 서(書)’를 보게 됐는데, 심장이 타조의 깃털처럼 가벼워야 영생을 누린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그 글귀를 접하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안 되겠다. 책을 쓸 것인가 정치를 할 것인가, 두 길 중 한 길로 가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죠. 귀국해서 아내에게 ‘내가 이집트에 가서 크게 깨우쳤다. 정치를 끝내겠다’고 선언했죠. 그러고는 집필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거예요. 다음 총선 불출마도 선언했던 거고요.”

― 출간하기 전부터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울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까.

“어느 정도는 예상했죠. 제가 재주가 둔한 탓도 있지만 이 책의 초판을 내기까지 4년 이상을 올인했어요. 아마 책을 쓰기 위해 한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오랜 기간 파고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열정과 노력에 대한 보답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죠.”

― 관련 자료는 주로 어디서 수집했습니까.

“이스탄불에 있는 보스포루스 대학 등을 직접 찾아가서 자료를 수집했어요. 거기에 있는 대학 도서관에서 자료를 열람한 후 아마존 등을 통해 그 책을 구입하고 구입이 불가능한 책은 스캔도 뜨고 하면서 자료를 모았죠. 국내에는 자료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뭡니까.

“이 전쟁이 주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비잔틴제국은 당시 종교갈등으로 국론이 심하게 분열된 상태였죠. 콘스탄티누스 11세에 맞서는 세력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만 급급한 상황이었고요. 국내의 이런 상황들이 제국의 멸망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반면 정복자 메메트 2세는 어땠나요. 그는 인종, 종교, 국적 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인재를 능력 위주로 등용한 술탄이었어요. 정복 후 그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지 않았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포용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용의 리더십이다?

“역사를 보면 정복자 중에는 알렉산더도 있었고 히틀러도 있었고 별의별 정복자들이 다 있었는데 다 당대에 망했어요. 오스만튀르크는 200년 이상 유럽의 최강자였어요. 인종과 문화, 종교가 다른데도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했어요. 제가 책 속에 이스탄티노플이라고 작명을 한 게 있어요.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의 합성어죠. 이슬람과 기독교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뜻이에요. 이슬람인 메메트 2세는 그렇게 기독교까지 포용을 했던 겁니다. 그런 포용이 없었다면 오스만튀르크는 절대 건설되지도, 강국이 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싶었어요. 지금 대한민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죠.”

― 거대한 기독교 문명을 이슬람이 정복했는데도 세계사 속에서 보면 결국은 이슬람 문명의 영향력이 기독교 문명에 비해 덜한 것도 사실인데 왜 그렇게 됐을까요.

“이슬람은 1453년을 기점으로 한 200년간 유럽 최강자로 있으면서 과학 기술 문명에서 엄청난 일을 했어요. 그 후 추락한 이유는 자만했기 때문이죠. 반면 유럽에서는 ‘우리가 왜 이슬람에 뒤져야 하는가’ 하는 자성이 일어났죠. 그래서 유럽도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던 거죠.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오스만이 유럽의 동쪽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니까 유럽 사람들이 오스만이 겁나서 동쪽으로 못 가고 인도양 등을 통해 신대륙으로 나아가면서 세계 경제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회를 맞았던 거죠.”

― 결과적으로 이슬람과의 전쟁에서의 패배가 도움을 준 거네요.

“저는 절망적인 시기라 해도 위기의 본질을 찾아내면 기회가 온다 믿어요. 서유럽이 붕괴 직전에, 멸망 직전에 희망을 품고 새로운 통로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찾아낸 것처럼 말이죠. 그러지 못한 나라들을 보세요. 발칸에 있는 나라들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다가 1차 대전 이후나 돼서야 독립을 했잖아요. 이 냉혹하고 냉엄한 현실을 잘 알아야 해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절망의 시기에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는 지혜가 국민과 국가에 필요한 시점입니다.”

칭기즈칸도 쓰고는 싶지만…

국회의장 시절인 2009년 12월 29일 새해 예산안과 관련해 본회의장 의장석을 찾은 정운찬 당시 국무총리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김 전 의장.

― 술탄 메메트 2세가 가진 리더십은 뭐였습니까.

“서양의 관점에서 그는 무뢰한이고 폭도로 그려지지만 그는 배를 끌고 산을 넘겠다는 역발상과 그것을 실현하는 힘, 즉 실현력을 갖춘 지도자였습니다. 신상필벌로 병사들을 일사불란하게 이끌고 진두지휘하며 보여주는 솔선수범도 높이 살 만한 리더십이고요. 역동적인 지도자였어요.”

― 그런 리더십을 우리 역대 지도자 중에서 찾아본다면 누가 있을까요.

“한국에요? 없는 것 같은데요. 제가 즐겨 말하는 르네상스형 리더십이라고 할까요? 메메트 2세는 역사, 산문, 지리, 문학에 달통한 사람이었어요. 시도 수십 편을 남겼을 정도로요.”

― 패자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리더십은요.

“역사는 그를 우유부단하고 세심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많이 묘사를 합니다. 그는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데도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를 하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아요. 저는 그의 리더십을 ‘눈물의 리더십’이라고 붙여주고 싶어요. 그가 죽을 때 수천 명이 같이 죽습니다. 이거는 리더십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 남의 아픔 속에 들어가서 함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부하들이 도망가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황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겁니다.”

― 눈물이 많았나 보죠.

“그가 성소피아 성당에서 마지막 연설을 할 때 실제로 눈물을 흘리죠. ‘네 가지 이유로 싸우자. 하나님과 신앙을 위해, 조국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황제를 위해 여기에 한 개라도 이유가 해당하면 목숨을 던지자’고 연설하고는 부둥켜안고 울죠.”

― 그런 ‘눈물의 리더십’을 가진 국내 지도자는 누굽니까.

“아쉬운 게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리더십을 유약함이라고 봅니다. 한국 같은 데서는 절대 성공 못 하죠. 그런데 저는 한국에 필요한 게 ‘눈물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상되는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서민과 약자에 대해 긍휼하는 마음이 있었고 한국 정치사에서 이런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하는 점에서는 참 좋은 의미였죠. 그런데 서민과 약자에 대한 그런 마음이 기존의 한국 주류사회의 폭을 확장하는 데 기여를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분열시켰죠. 그런 마음을 주류사회를 확장하는 데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그에게 극렬하게 저항한 주류사회도 문제는 있죠.”

― 메메트 2세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내면세계를 다 들여다봤는데 누가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던가요?

“콘스탄티누스죠. 그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음밖에 없었으니까요.”

― 책을 보고 영화화하자는 제안은 없었나요?

“아직 영문판이 안 나와 해외에서는 없지만 국내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 내친김에 혹시 세기의 두 정복자 메메트 2세와 칭기즈칸을 비교하는 작업을 할 생각은 없나요?

“역사에 관심이 많아 칭기즈칸에 대한 관련 책도 읽고 그랬는데 《술탄과 황제》를 내고 난 뒤 포기했어요. 이 작업도 이렇게 힘든데 칭기즈칸을 쓰려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개정판 원고를 끝내고 제가 일주일 동안 아팠어요. 링거도 맞고 그랬죠.”

현 시국을 보는 생각

2009년 12월 22일 김형오 국회의장 주재로 안상수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이강래 전 민주당 원내대표가 양당 원내대표 회담을 가졌다.

― 올 3월에는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라는 책도 냈는데 시절이 그래서인지 ‘갈 곳 잃은 민심, 표류 중인 국가에 던지는 통렬한 메시지’라는 부제가 눈에 띄더군요. 5선 국회의원으로서 전직 국회의장으로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먼저 이 상황에 대한 철두철미한 인식의 공감대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요. 너무 위중한 상황이고 위기의 국면인데 대통령, 여야 정치 지도자들 모두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 국민이 탄 배가 침몰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 배 안에 있는 모두가 힘을 합쳐 배를 끌고 인천항이든 부산항이든 입항해야 할 상황인데 벌써부터 부산항에 입항 후 KTX를 탄 것 같은 상황 인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배가 침몰하면 다 죽는 건데 말이죠.”

― 거국중립내각도 한 해법으로 제시됐는데요.

“당연하게 밟아야 하는 수순이에요. 야당이 거국중립내각에 참여했다 덤터기를 쓰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를 가지고 망설이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쓰레기를 누가 치울 거냐, 네가 먹다 버린 거니까 네가 치워라 하는 식이죠. 같이 치워야 해요. 쓰레기를 치우고 난 뒤 밥상 차릴 생각 먼저들 하고 있는데, 안 됩니다. 배가 침몰하면 밥상을 어떻게 차립니까. 네 쓰레기 내 쓰레기가 어디 있어요. 대통령 선거 전에 배가 빠져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입니다.”

― 대통령이 하야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은데요.

“감정적 차원이 아닌 큰 차원에서 하야했을 때 생기는 당면적 문제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법적인 절차 등을 들 수 있는데, 새로운 대통령을 뽑으려면 몇 가지 걸림돌이 있어요. 하야 후 불과 두 달 안에 뽑아야 하는데 갑자기 두 달 안에 뽑으려면 준비된 대통령과 그 정부를 만드는 게 쉽지가 않아요. 또 하나는 지금 5년 단임제의 문제가 엄청나게 많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가면 중간에 또 바꿔야 해요. 그러면 국가와 국민, 경제적으로도 안 좋고 정치적으로도 안 좋아요. 하야는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후퇴를 맛보게 할 겁니다.”

― 그럼 대통령을 어찌해야 합니까.

“제 생각은 대통령이 영국 여왕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존재는 하되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전부고 어떤 행위도 없다. 외국에 대해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외교사절 접수나 받고 극히 의례적인 일만 해야 한다. 내치와 외교를 분리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그거는 안 된다. 외교와 국방이 얼마나 중요한데 지금 신뢰를 잃어버린 대통령이 외교를 어떻게 하느냐’ 이게 제 생각입니다.”

― 혹시 총리 제의가 온다면 맡을 생각은요?

“(웃음) 고맙지만 저는 《술탄과 황제》를 쓰면서 정치에서 손을 뗀 사람이에요. 손을 떼니까 잘 보이긴 하더군요.”

떠나니 정치가 잘 보이더라

김 전 의장이 한나라당 사무총장 시절인 2004년 9월 6일 상임운영위 회의를 마친 당시 박근혜 대표와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서고 있다.

― 잘 보이니까 다시 정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축구 해설하는 사람이 해설 잘한다고 명 플레이어 되나요? 마음을 비우면 잘 보이죠. 저는 마지막 목표가 한국 정치인이 욕을 많이 먹는데 저는 그런 정치 현실에서 정치 인생을 명예롭게 마감하는 겁니다. 저 같은 사람이 명예롭게 정치를 마감하는 것도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 그래도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제3지대론에 이름이 거명되곤 하는데요.

“저는 제3지대론이든 제4지대론이든 참여 안 한다고 했어요. 전직 국회의장 등 몇몇 분이 저한테 제3지대 논의에 참여하라고 권했는데 저는 안 한다고 했어요.”

― 정치를 떠나니까 더 잘 보인다고 했는데 제3지대론이 다음 대선에서 힘을 얻을까요.

“그럼요. 한국은 빠르게 변하는 사회입니다. 오죽했으면 다른 나라의 10년이 우리의 1년에 해당한다고 그럴까요. 우리는 속도감 있는 국민들인데, 그래서 지금 제3지대든 제4지대든 자기의 이해관계에 의한 이합집산이 아니고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중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어젠다 세팅을 한다면 가능하다고 보죠. 그런데 현재까지 전 그런 모습을 못 읽고 있어요. 우리 국민들 수준 높아요. 다 알아요. 그런 걸 초월해야죠.”

― 새누리당이 해체되지 않을까요.

“새누리는 쉽게 두 동강 나거나 세 동강 나지는 않을 겁니다. 않을 텐데 지금 하나의 충격파가 왔어요. 또 하나는 제3지대가 온 거예요. 이 두 가지 충격파 속에서 제3지대라는 새로운 필드가 주도적 내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새누리는 분열해서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겠죠. 지금 당장은 어려워요. 정치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데 영구불변은 없죠.”

― 지금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권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죠?

“제 정치적 신념 중의 하나가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거예요. 난세에 영웅 난다고 정치적인 위기에 온 마음을 집중해서 몸을 던지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저는 봐요. 혹시 승리하지 못하고 산화하더라도 명예로운 이름은 남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그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데 조금 서투르다고 할까, 활용에 실패했다고 할까요? 자기의 투철한 고뇌와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안 보여서 안타까워요.”

― 다음 대선에서 보수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고 보세요?

“좀 전 얘기도 그래서 한 겁니다. 이런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건데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어요.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려는 몸과 마음의 열정을 쏟아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한 게 현재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 그게 보수 지도자들의 모습이라는 거죠?

“네. 항상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입으로만 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그러고 있으면 안 되거든요.”

― 대표적 개헌론자인데 박근혜 정부 임기 내에 개헌이 될 거라고 보십니까.

“박 대통령이 개헌을 얘기한 그날 저는 ‘개헌이 어렵겠구나’ 생각했어요. 개헌을 이루려면 대통령이 손을 떼고 국회에 모든 걸 맡겨야 해요. 어쨌든 지금 상황은 청와대 주도 개헌은 어려워졌고 이제는 어느 정당 어느 정파가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지 완전히 미지수가 됐어요.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개헌의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죠. 물론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차기 대권 도전자들의 생각은 개헌을 안 하는 쪽으로 하고 싶겠죠.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독식하는 걸 엄청 싫어하고 용납을 안 해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반사이익을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독식과 독선으로 비치면 오래 못 갑니다.”

― 왜 개헌을 해야 합니까.

“국민 누구나 공감하고 있듯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이자는 것이죠. 여기서 자주 간과되는 것이 국회 문제예요. 현재와 같은 국회라면 국민들의 불신과 불만은 팽배할 수밖에 없어요. 국회의 책임성이 강조되고 강화되는 그런 개헌도 돼야 해요. 자기는 책임 안 지고 남만 맨날 책임지라고 하는 모습은 아니죠.”

― 양원제를 생각하는 겁니까.

“양원제도 그중의 한 방법은 되겠죠. 하지만 양원제는 책임성 강화보다는 심사숙고를 할 수 있는 토의과정과 절차에 더 무게가 있다고 봅니다.”

― 개인적으로 개헌이 된다면 어떤 권력구조를 생각하고 있는지요.

“개인적으로는 내각제가 좋은데 내각제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소극적이죠. 국정 운영에 있어서 다양성과 토론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제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정치 여건상 개헌이 된다면 분권형으로 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