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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낙동강 전선 북한군 총공격설 제보한 홍윤희씨의 절규

“정부로부터 ‘북한군 총공격 제보자’ 공인받고 눈감고 싶다”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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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陸士) 합격 후 후퇴 과정에서 북한군 위장 입대… 위생병 근무 중 첩보 듣고 탈출
⊙ 워커 사령관, 미 해병 1연대 투입해 북한군 유인작전 저지… 인천상륙작전 기틀을 마련
⊙ 1950년 간첩죄로 사형선고…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해 65년간 소명 자료 수집에 평생 바쳐
⊙ 2013년 애플먼 메모 발견으로 재심에서 간첩죄 무죄 판결… “훈장은 못 줄망정 간첩이라니…”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열기 속에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노인이 있다. 6·25전쟁 낙동강 전투 때 인민군 총공격을 제보했다가 오히려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홍윤희(洪允憙·86)씨는 “나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인천상륙작전〉이란 영화도 없었을 것”이라며 헛헛하게 웃었다.
 
  지난 8월 2일 서울 시내 커피숍에 그가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침략으로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 20세 북한 군인이었던 그는 북한군을 탈출해 유엔군에 결정적 제보를 했고 그의 제보에 의해 워커 8군사령관은 병력을 재배치해 벼랑 끝 전세를 역전하고 수십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도리어 간첩 혐의로 체포돼 갖은 고문 끝에 사형선고까지 받고 무기수로 있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고,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좌익경력자 예비검속을 위한 ‘사회안전법’을 시행하려 하자 1973년 가족과 함께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육사에 입교했으나 전쟁 발발로 북한군 위장 입대
 
  홍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1950년 6월 1일 홍윤희씨는 처음 도입한 4년제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육사 10기)에 합격해 입교했다가, 보병학교로 전교해 간부후보생 과정에 입소하기로 했다. 장남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 때문이었다. 이미 2년 동안 육군본부 감찰실 조사과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한 경력 덕분에 간부후보생 과정 입교엔 문제가 없었다.
 
  7월 1일 입교를 일주일 앞두고 전쟁이 발발했고, 북한군이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그는 고립됐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낙오한 그는 산에서 은신하다 7월 1일 신당동에 있는 고향(경북 문경) 친구 박철순(朴哲淳)의 집에 숨어들었다. 박철순은 공산당원이었다.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홍씨는 친구인 박철순의 권유도 있고 “일단 의용군에 입대한 후 기회를 봐서 탈출해 원대 복귀하겠다”라고 생각했다. 7월 10일 공산당 간부인 친구 형이 보증해 의용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친구의 형은 홍씨가 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洪命憙) 선생의 친척이라는 내용의 추천서를 써줬다.
 
  홍씨는 “신분은 ‘서울대학교 학생’으로 속이고, 이름은 ‘홍관희’라는 가명으로 7월 10일 인민군에 입대했다”며 “북한군 점령 지역 후방 행정을 담당하는 경남행정단체(경남부대)에 배속돼 60여 명의 부대원과 부산을 목적지로 의용군을 따라 계속 남하했다”고 했다.
 
  홍씨는 8월 17일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져 남행이 지체되면서 경남부대가 해산되자 8월 24일 대구 근처의 전선에서 인민군 제1사단에 편입돼 ‘위생병’으로 배치받고 탈출 기회를 엿보게 됐다.
 
  당시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씨는 위생병 편입 이튿날인 8월 25일 그곳에서 극비 정보인 인민군의 부산 점령을 위한 ‘9월 총공격 계획’을 접한다. ‘9월 1일 0시를 기해 전장 서쪽에 위치한 인민군 제1군이 먼저 진격해 국군을 유인하고, 48시간 후 북쪽에 있는 인민군 제2군이 총공세를 펼친다’는 내용이었다. 위생반장의 발설로 고급 정보를 안 홍씨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만일 국군과 연합군이 미리 알면 불리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목숨 건 탈출로 ‘북한군 낙동강 총공세’ 제보
 
1950년 8월 23일 백선엽 1사단장(오른쪽)이 사령부를 방문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가운데)과 워커 8군사령관(왼쪽 끝)에게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백선엽 장군 제공
  8월 31일 밤 10시경에 기회가 찾아왔다. 보초가 잠시 자리를 뜨면서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홍씨는 옆에 자고 있던 인민군의 총을 집어들고 남쪽으로 뛰었다. 그는 다음날 새벽 4시쯤 가산(架山) 근방에서 국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홍씨는 즉시 국군에게 북한군이 서부 지역에서 ‘유인전술’을 쓴 다음 북부 지역에서 ‘총공세’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줬다. 9월 1일 오후 5시에는 대구 미 8군사령부로 가 5시간 정도 디브리핑까지 했다. 홍씨는 “동경의 극동군사령부는 그날 오후 정보관을 급파해 북한군의 총공격 임박과 북한군의 위치, 탱크와 중장비의 위치와 은닉상황 등에 대해 물었다”고 했다.
 
  당시의 전황은 이랬다. 7월 31일 워커 장군은 낙동강 Y라인(왜관 작오산 303고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 라인)을 마지노선으로 설정해 유엔군의 전열을 정비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다. 9월 1일 북한군이 서부에서 강공으로 나와 전선이 붕괴할 조짐을 보이자, 워커 장군은 북부를 방어하는 유엔군 병력을 빼내 서부전선의 방어를 시도하려 했다.
 
  이때 홍씨가 탈출해 “서부의 북한군 공격은 유인전술에 불과하고, 북부의 북한군 제2군이 10일 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할 것”이라 제보했던 것이다. 홍씨의 제보대로 북한군은 9월 3일부터 9일까지 총공격을 감행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6·25전쟁사 전문가인 로이 애플먼. 그는 그의 저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에 홍윤희씨의 총공격 제보 사실을 메모로 남겼다. 애플먼은 한국전쟁사를 집필할 당시 홍윤희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홍윤희 관련 메모만을 남긴 채 김성준의 기록을 인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진=구글이미지
  — 홍 선생님의 제보에 유엔군사령부는 어떻게 군사적으로 대응을 했습니까.
 
  “워커 8군사령관은 북부의 유엔군의 서부전선 지원을 중단하고, 부산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승선 대기 중인 미 해병 1여단을 그날 오후 1시 맥아더 원수의 승인 없이 서부전선에 긴급 투입했습니다. 워커 사령관의 변칙적 조치로 부산 교두보 방어에 성공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진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북부 유엔군을 서부로 이동했더라면, 그 틈을 이용해 북부의 북한군이 총공세에 나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점령했을 것입니다. 워커 장군의 해병대 투입은 ‘신의 한 수’에 해당하는 전술이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 6·25전쟁사 전문가인 로이 애플먼(Roy E. Appleman)은 6·25전쟁의 초반에 관한 공식적 전사기록인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1961년 간행)를 집필하면서 ‘홍윤희씨의 디브리핑 정보는 그날 밤 동경 극동군총사령부에 보고됐고, 9월 1일 워커 사령관이 해병대 서부전선 재투입을 제기하자 해군 측이 강하게 반발했었다’며 홍씨의 제보 내용을 참고했다.
 
 
  영웅에서 반역자로 추락
 
  대구 달성군청에 주둔한 육군정보국은 홍씨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를 육사 입교 전 소속인 육군 감찰관실로 원대 복귀시켰다. 9월 5일 홍씨는 육군본부에서 10월 1일자로 육군종합학교 입교를 통보받는다. 하지만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9월 11일 아침 헌병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홍씨를 연행해 갔다. 부산소년원에서 모진 구타와 고문, 협박이 시작됐다.
 
  헌병대는 홍씨가 북한군에 입대한 사실을 문제 삼아 간첩 혐의를 씌웠다. 군 검찰은 “9월 3일 군위에서 아군과 교전하였다”고 가짜 신문조서를 작성했다. 탈출한 후에 국군과 교전이라니! 결국 그는 이적행위(국방경비법 제32조)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1950년 9월 20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씨는 1950년 군사법원에서 7사단 감찰관실에서 함께 근무했던 허향(許香)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최종 10년형을 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 나중에 다시 5년형으로 형기가 줄어 1955년 9월에 가석방됐다. 애국자는 하루아침에 전과자로 전락했다.
 
  홍씨에게 사회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홍씨는 “‘이적 행위자’라는 주홍글씨를 숨기고 시멘트공장과 석산에서 일을 했다”면서 “1956년 재심탄원서를 육본에 제출했고 1973년 허향 변호사 도움으로 재심 작업에 착수했으나 군법회의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재심을 청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1973년 12월 박정희 정부가 좌익경력자 예비 검속을 위한 ‘사회안전법’을 제정해 홍씨를 예비검속 대상자로 분류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쫓기듯 미국으로 떠났다. 홍씨는 “이민이 아니라 망명이었다”고 말했다. 홍씨는 미국 정부가 6·25전쟁 기록을 비밀해제 하기만을 기다리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식료품점과 식당 등을 운영하며 정착했다. 나중엔 버클리대학 체육지도사(피라미드볼 프로그램)로 생계를 이어갔다.
 
 
  ‘김성준 소좌 총공세 제보설’의 오류를 규명
 
2000년 워싱턴의 미 육군군사연구소(CMH)에서 만난 리처드 고렐 박사(오른쪽)와 홍윤희씨. 고렐 박사는 홍씨가 ‘애플먼 메모’를 발견할 수 있도록 홍씨에게 문서목록을 제공했다. 사진=홍윤희
  홍씨는 1989년 버클리대 도서관에서 6·25전쟁 기록을 보다가 경악했다. 일본 사학자 고지마 노보루(兒島襄)가 1952년 발간한 《조선전쟁》(문예춘추 간행)이라는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북한군 총공격 계획을 제보한 것이 자신이 아닌 ‘북한군 제13사단 제19연대 작전참모 소좌 김성준(金成俊)’이라고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 외에도 제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홍씨는 미국의 로이 애플먼 전사, 일본 고지마 전사,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와 부산 용호동 문서보관소 등 방대한 자료를 뒤졌다. 홍씨는 한국 국방부 및 미국 육군 군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에도 북한군 총공격 계획을 제보한 사람이 ‘김성준 소좌’로 기록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홍씨는 “조국에 대한 배신감이 끓어올랐고, 내 명예를 찾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홍씨는 이때부터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홍씨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미군 제1기병사단이 작성한 포로심문 보고서를 뒤졌다. 2000명 이상의 포로와 귀순자 심문조서 가운데 김성준의 심문 기록을 발견했다. 북한군 장교 포로 명단에는 김성준이 1953년 8월 7일 북한으로 송환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총공격 정보를 제보한 사실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홍씨는 계룡대 육군본부 법무감실에 의뢰해 자신에 대한 재판기록을 찾아 나섰고, 1999년 6월 부산 용호동 육군문서보존소에서 1950년 9월 20일자 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기록을 찾아냈다.
 
  홍씨는 “제9사단 파일에서 붉은 인주와 푸른 잉크색이 선명한 ‘홍윤희 적전비행 이적행위 계엄고등군법회의 소송 기록’을 확인한 순간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며 “대부분 군법회의 기록이 소각 폐기됐음에도 내 기록이 9사단 파일 내에 남아 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그곳에는 홍씨가 ‘북한군 총공격 정보를 보고하기 위해, 단기 4283년(1950년) 9월 2일 오전 6시에 귀순하였다’고 날짜의 오류가 있었다. 홍씨는 “2011년 5월 30일 애플먼 메모를 발견해 보니 내 기억대로 탈출날짜가 1950년 9월 1일 새벽으로 제대로 돼 있었다”며 “전사의 김성준의 귀순일자는 9월 2일 새벽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2011년 5월 30일 홍윤희씨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찾아낸 로이 애플먼의 메모. 애플먼은 이 메모에서 “홍윤희씨가 처형된 것으로 생각해 출판마감에 쫓겨 대신 김성준 소좌를 인용했다”고 언급했다. 이 메모는 2014년 열린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리는 데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 사진=홍윤희
  홍씨는 재심을 위해서는 군법회의 기록 외에 전쟁 기록이 필요했다. 홍씨는 1999년 9월 대니얼 페트로스키(Daniel Petrosky) 미8군사령관에게 1950년 9월 1일 저녁 제2차 유엔군사령부 정보팀의 심문관 면담과 심문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군 측은 “1951년 동경의 극동군사령부의 화재로 문서가 소실됐다”는 답변만 주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매케인(MaCain) 상원의원을 통해 유엔군과 극동군사령부 극비문서 해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홍씨는 “2001년 다시 워싱턴의 미 국립문서보관소를 방문했으나 기록은 찾지 못했다”면서 “대신 김성준이 포로수용소에서 다른 포로들로부터 총공세설을 들었을 뿐 총공세 제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1950년 2차 심문에서 김성준은 심문관의 질문에 “총공격이 시작됐다고는 들었으나 내용은 모른다”고 답해 사실상 9월 1일 저녁 8시20분에 귀순한 김성준이 총공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씨는 “작전 실패로 귀순했다는 김성준이 대한민국의 명운을 가른 북한군 총공격설을 제보한 인물이라면 한국군에 편입돼야지 왜 북으로 돌아갔겠느냐”며 “1999년 10월 김성준의 상관인 제13사단 포병연대장 정봉욱(鄭鳳旭) 중좌(1950년 8월 22일 귀순, 예비역 육군소장), 19연대 장교인 안정일(安鼎一)씨(반공연맹 총무 역임) 등 같은 사단에서 근무한 인물들이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 수상쩍었다”고 했다.
 
  NARA 기록에 의하면, 김성준은 1953년 8월 7일 포로교환 때 북한으로 넘어갔다. 김성준은 위장 귀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 육군 군사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고렐(Gorell) 박사는 “김성준 관련 한국전쟁사의 역사 오류는 중대한 사건”이라며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임으로 한국에서 기초조사로 관계증인과 문건을 찾아 홍윤희 관련 사실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 북한 쪽으로 홍 선생님의 병적조회를 해보시지는 않았습니까.
 
  “1994년 7월 북한 유엔대표부에 1950년 8월 하순 인민군 제1사단 직할위생반 홍관희(洪寬憙)의 기록유무 확인을 수차 요청했으나 1995년 8월 미군 폭격으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황봉수 영사의 회신을 한 차례 받았을 뿐입니다. 6·25전쟁사 관련 문건을 검토하면서 9월 총공세가 대한민국 운명의 분수령이었다는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보고 당시의 제 역할에 대해 전율했습니다.”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의 사실 왜곡
 
홍윤희씨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에서 자신의 학생시절과 육사생도시절 사진을 테이블 위에 놓고 회상에 잠겨있다. 사진=홍윤희
  홍씨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에게 관련된 자료를 첨부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는 처음에는 홍씨의 청원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2000년 9월 16일 홍씨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와 배석한 가운데 청와대에서 관계부처 연석회의까지 열렸다.
 
  홍씨는 “그날 그 자리에서는 내가 ‘최초 제보자’라는 증명을 찾는 데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다”면서 “그런데 그 후 공보비서실과 민정비서실은 ‘적화통일을 저지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이 사건에 대한 텔레비전 방영과 신문보도는 남북대화에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있다’며 지원을 중단했다”고 했다. 정연주(鄭淵珠) 사장의 KBS도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가 난색을 표하며 접었다고 한다.
 
  홍씨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의 태도도 석연치 않았다”고 했다. 청와대 비서관은 군사편찬연구소의 기초조사 과정을 확실하게 감독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군사편찬연구소 Y모 연구원은 홍씨가 그동안 한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수집한 모든 기초조사 자료를 제공하면서까지 진상규명을 간청했으나 심드렁해 했다고 한다.
 
  — 왜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가 홍 선생님을 믿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성준 소좌의 계급이 주는 무게감도 클 겁니다. 홍윤희는 육사생도였지만, 북한군에선 계급도 없는 졸병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개 졸병이 사단과 군단이 움직이는 그 어마어마한 작전을 어떻게 알겠어’라는 생각으로 기존의 전사를 손대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 군사편찬연구소는 홍 선생님의 자료 제공에 대해 추가 조사를 했습니까.
 
  “추가 조사는커녕 제 자료를 왜곡했습니다. 군사편찬연구소는 제게 준 공문서에서 ‘당시 아군의 적정판단은 민원인(홍윤희)의 주장처럼 본인의 정보 제공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각 부대의 정보(G2) 판단을 종합해 이뤄진 것’이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홍씨는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는 또 다른 총공세 정보를 예를 들며 ‘낙동강선 중앙의 적은 낙동강선을 강력하게 도하공격 하였으며, 북부와 남부전선에서도 총공세를 감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며 “제가 제보를 하지 않아도 이미 미군들은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저의 제보를 물타기 하려는 것이었다”고 했다. 홍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은 CIA의 6·25전쟁 상황보고(1950년 9월 1일자)를 예로 들며 제보 가치를 격하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는 ‘미 제1기병사단과 한국군 제1, 6사단이 전개하는 왜관 동쪽에서 의흥에 이르는 전선은 적과 경미한 접촉 외에는 정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remained static with only light contacts with the enemy)’로, 오히려 저의 제보(북한군의 북부 유엔군의 서부 유인작전)를 뒷받침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담당자는 황당하게도 ‘북부와 남부에서도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의 심각한 사실(史實) 왜곡입니다.”
 
 
  법원, 재심에서 홍씨 주장 받아들여
 
  2003년 11월 홍씨는 법원에 ‘총공격 제보자’라는 기록을 제출하며 국방경비법 위반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홍씨는 정부 차원의 기초조사 기대를 단념했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위한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미 육군 군사연구소 고렐 박사는 홍씨에게 자신들이 추천한 파일을 검색해 보라고 알려줬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때 돌파구가 마련됐다. 홍씨는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0여 년 전부터 NARA에서 한국전쟁 관련 기록을 복사 수집하는 데 착안, 청와대 김병기(金炳箕) 국방비서관에게 “NARA 파견관에게 지시해 파일을 복사해 오면 검색해 보겠다”고 했다. 2010년 9월 청와대는 국사편찬위원회에 파일 복사를 지시했다.
 
  2011년 5월 30일 저녁 무렵 국사편찬위원회 열람실에서 NARA 문서파일을 검색하던 홍씨는 ‘Hong’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실신하고 만다. 6·25전쟁 공간사 집필자인 로이 애플먼 중령이 1954년 《한국전쟁사》를 집필하면서 ‘미 정보국이 1950년 9월 1일 홍씨가 귀순해 북한군 총공세 정보를 제공해 도쿄의 극동사령부에 전달했다’라고 적은 메모를 발견했던 것이다.
 
  ‘홍의 정보’라는 메모에서 애플먼 중령은 ‘더 이상 홍윤희의 기록을 찾지 못해 처형된 것으로 생각했다. 홍씨의 역할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출판마감에 쫓겨 대신 김성준 소좌를 인용했다’고 언급했다. 모든 의문이 해소된 것이다. 홍씨는 용기를 얻어 2011년 6월 17일 변호사 없이 재심을 청구했다. 2012년 6월 8일 법원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며 재심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오랜 세월 동안 6·25전쟁의 실상과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피고인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애플먼 중령의 메모가 명예회복의 결정적 증거가 된 것이다.
 
  홍씨가 그렇게 꿈에 그리던 명예회복은 일 년 뒤에 이뤄지게 된다. 검찰에서 ‘즉시 항고장’을 제출하면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4년 6월 24일 열린 재심에서 법원은 ‘간첩죄’에 대해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84세의 노인은 63년 만에 자신에게 씌워졌던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울 수 있게 됐다. 홍씨는 “애플먼의 메모는 재심을 청구하는 데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법원은 홍씨에게 위자료 4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홍씨는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2014년 1월 4일 ‘한때 반역자로 몰렸던 사람이 이제라도 영웅의 지위를 얻고 싶어 한다’는 제목의 기사로 홍씨의 사연을 상세히 보도했다.
 
 
  “생전에 인민군 총공격 제보자 공인받고 싶어”
 
2001년 5월 1일자 《성조지(Stars & Stripes)》는 홍윤희씨가 1950년 9월 1일 북한군 총공격설을 제보한 지 50주년을 맞아 특집으로 소개했다. 사진=홍윤희
  홍씨는 “군사편찬연구소는 북한군 9월 총공세에 대한 한미합동토론회 개최를 위한 비용을 대겠다는 것도 거절했다”며 “심지어 재심 무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애플먼 메모’를 전달해도 사실을 바로잡지 않고 깔아뭉갰다”고 했다. 홍씨는 “국가존망 위기에 관한 정보제공 사건 기초조사는 당연히 국가가 솔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번복, 거절, 기피, 묵살, 궤변, 변질 등으로 진실규명을 방해하는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를 대할 때면 분노를 넘어 절망하게 된다”고 했다.
 
  — 총공격설 제보로부터 6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우리 군은 왜 핵심적 첩보를 제공한 사람을 체포했을까요.
 
  “부산 감찰실 직원들과 회식하며 북한군 총공격설을 이야기했는데, 유엔군사령부에서 디브리핑을 할 때 약속한 함구령(gag order)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950년 9월 5일 한반도 상황은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한국 정부와 육군본부, 유엔군사령부가 부산으로 후퇴하고, 돈깨나 있는 사람들은 배편으로 부산을 떠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김일성이 10일 이내에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가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정부 입장에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 재심에서 무죄 결정을 받았는데, 계속 문제 제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육사에 합격해 장래가 촉망되던 아들이 졸지에 사형수로 변한 모습에 아버지는 충격을 받고 돌아가셨어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음으로써 ‘이적행위자’라는 낙인은 벗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북한군 총공격 제보자’라는 것을 공인받고 눈을 감는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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