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김국헌의 대한민국 장군 評傳〈下〉 軍의 ‘정치 중립’ 정립한 이종찬,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공군의 건설자’ 장지량

軍人의 문화를 세운 사람들… 생도문화 건설 장창국, 신사의 전형 강영훈, 충절의 화신 이대용

글 : 김국헌  前 국방부 군비통제관·예비역 육군 소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金國憲
⊙ 66세. 육군사관학교(28기)·서울대 철학과 졸업. 오하이오주립대 석사,
    런던대 킹스칼리지 군사학 박사.
⊙ 국방부차관 보좌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21세기 국방개혁 연구위원,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참석,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역임.
⊙ 저서: 《국가전략의 이해》 《한 군인 40년의 지향》
    《헌팅턴의 군인과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역서).
  李鐘贊, 軍의 정치 중립을 정립한 ‘참 군인’
 
   이종찬(李鐘贊·1916~1983)은 한일합방에서의 역할로 자작을 받은 이하영(李夏榮)의 손자로 태어나 일본 육사 49기로 임관, 공병 소좌로 해방을 맞았다. 동기생으로 채병덕(蔡秉德)이 있다. 이응준(李應俊), 김석원(金錫源) 등의 대좌들은 대한제국 군대에 들어왔다가 한일합방 후에 일본군에 편입한 경우이고,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육사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구 왕실 등에 극히 제한되었다. 이종찬은 대표적 친일파의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나,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작위도 세습하지 않는 등, 깊은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종찬은 김석원 등 원로들과 마찬가지로 군에 바로 들어오지 않고 근신하다가 늦게 군에 들어왔다. 국방부 장관 이범석(李範奭)은 이종찬의 인품과 경력을 높이 사서 국방부 차관이나 참모총장으로 발탁하려 했으나 고사하고 있다가, 1949년에 국방부 제1국장으로 발탁하였다.
 
  이종찬이 백선엽(白善燁)과 같이 박정희(朴正熙)를 구제한 것도 이때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종찬은 김석원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 3사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51년 이종찬은 정일권(丁一權)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2년 5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려 무리수를 쓰는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대통령중심제이면서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하는 제헌헌법이 초래한 문제이기는 하였으나, 이승만의 독재 성향을 보여준 헌정의 일대 비극이었다.
 
  이승만은 이종찬에게 병력 출동을 명했으나 이종찬은 이를 거부하였다.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휘권하에 있었다 해도 계엄령에 필요한 병력이라고 구실을 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종찬은 대통령의 명령을 수용하지 않고 군의 정치 개입을 금하는 훈령 217호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이종찬을 해임하였다. 이종찬은 참모총장을 백선엽에게 물려주고 육군대학으로 가게 된다. 참모총장을 했던 장군이 교장으로 내려왔으니 교장이라 부르기도 어색하여 총장이라고 불렀다. 이래로 육대 교장은 육대 총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1년 7월 4일 이종찬 주이태리대사, 신응균 주서독대사, 최용덕 자유중국주재대사 임명 발령식 모습.
  박정희는 군의 대부로서 이종찬을 흠모했다. 대체로 만주군 출신은 일본 육사 출신을 위로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부산 정치파동에서의 당당한 처신으로 군내의 이종찬의 권위는 높았다. 박정희는 이종찬의 권위를 이용, 4·19 이전 혁명의 지도자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이종찬은 거절했다. 이종찬은 군의 정치 개입 반대에 대한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30년대의 일본군이 2·26 사건 등으로 정치에 개입하였다가 결국 패망으로 치달은 역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이종찬은 4·19혁명으로 수립된 허정(許政) 과도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맡는다. 제2공화국 장면(張勉)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많은 사람이 이종찬을 추천하였지만, 장면 총리는 군을 모르는 현석호(玄錫虎)를 썼다가 5·16을 만나 헌정의 파탄을 초래한다. 박정희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이종찬을 모시지만, 이종찬은 국회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다.
 
  한신(韓信)이 ‘면도날’ 같은 참 군인이었다면, 이종찬은 ‘난초’와 같은 참 군인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를 흠모하는 군인, 언론인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종찬 장군은 군의 ‘정치적 중립’의 원칙을 정립한 ‘참 군인’이었다.
 

  李翰林, 박정희 일본 육사 동기로 육사 중흥의 기수
 
   이한림(李翰林·1921~2012)은 1921년생으로 1917년생인 박정희와 만주군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동기였다. 이한림은 함경남도 안변, 박정희는 경상북도 선산이 고향이다. 두 사람은 휴가 때 일본과 조선을 같이 여행하면서 조선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를 뼈저리게 공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군에서 두 사람은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박정희가 고전하고 있을 때, 이한림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육사 2기인 박정희보다 먼저 임관하였고, 자유당 정권에서도 승승장구하였다. 장면 정부에서는 제1야전군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5·16이 터졌을 때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이 “올 것이 왔군”이라고 했는데, 이는 당시 사회와 군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다. 5·16은 민초들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절규하듯, 일본과 미국 군대의 경영을 익힌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한림은 윤보선의 “자중하라”는 편지를 받고 행동에 나서지 않다가 1군사령부 내의 혁명군 측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권총을 달라는 장교에 “1군사령부 마크를 단 장교는 감히 나에게 이럴 수 없다”고 호통치자 그 장교가 1군사 마크를 떼고 요구하였다는 것은 이한림의 강직한 군인관을 보여주는 실화다. 이한림의 흉중에도 5·16은 필지(必至)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앞장서 나서지는 않았지만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로 동조했을 것이다. 이것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수락한 장도영(張都暎)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한림은 육사 교장 시절 진시황(秦始皇)이란 별명을 들었다. 1950년대에 지금 보아도 장대 웅혼한 화랑연병장을 건설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으나 사관생도의 기상을 담고 키우기에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한림은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일본 육사 진무대(振武臺)에서 경험한 사관학교의 터전에 대한 나름의 원형(Prototype)이 있었던 것이다. 화랑연병장을 만들기 위해 투입된 인력과 장비는 엄청났다. 생도들도 일과 후 조경공사에 힘을 보탰다. 그러면서도 교육과정은 엄격히 지켜졌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맨 왼쪽),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맨 오른쪽)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미 고문관들이 우리 군을 조언하던 시절에 POI(Program of Instruction)는 ‘명령’이었다. 이한림은 공사에 투입된 미군들에게서 자동차 엔진을 제공받아 기계공학 실습장비를 갖추기도 하였는데, 당시 국내 어느 대학도 갖추지 못한 최고 수준이었다. 이한림이 후일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건설부 장관을 지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박정희와 이한림, 정주영(鄭周永)은 다 같이 하나의 목표로 돌진해 나갔다.
 
  이한림 교장이 교수부를 순시하였을 때의 일화다. 어느 중위가 교장이 들어왔는데도 발을 책상 위에 턱 올려놓고 책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어 “귀관은 어느 대학을 나왔나”라고 힐문하니, 힐끗 보더니 “나요? 서울사대 나왔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한림은 그 길로 순시를 그만두고 그 후로는 교수부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교수의 패기를 존중하는 신화 같은 이야기다.
 
  이한림은 11기 이래 각 기의 대표적인 인재를 골라 각별히 키웠다. 육사 출신이 초심을 잃지 않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도록 ‘북극성 동창회’의 설립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 가장 큰 투자라는 것을 보여준 이한림이었다. 이한림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중흥의 공로자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張昌國, 창군 핵심으로 작전국장 거쳐 육사 교장으로 學制 정비
 
   장창국(張昌國·1924~1996)은 경기중을 나와 의사가 되라는 부친의 권유를 마다하고 일본 육사 59기로 입교하였다. 태평양전쟁 말엽에는 1930년대의 이종찬과 같은 구 왕실 자제 말고도 상당수 민간 명문의 자제들이 육사에 지원하였다. 장창국이 그런 경우다. 광주서중을 나온 58기의 정래혁(丁來赫)도 마찬가지다.
 
  해방 후 장창국은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창군의 핵심이 되었다. 남조선경비사관학교의 생도대장을 맡았고, 경비대 작전교육국장, 통위부 작전처장을 맡았다. 미국 유학 후에 김홍일(金弘壹) 밑에서 참모학교의 부교장으로 일했다. 경기중, 일본 육사를 나왔다는 것이 그가 주로 작전 교육 분야에 발탁된 배경이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장창국은 작전국장이었다. 정보국장은 장도영이었다. 5·16 때에는 장도영 참모총장 밑의 참모차장이었다. 장창국은 휴전 후 2군단장, 1군단장, 육사 교장을 거치고, 5·16 후에는 2군사령관, 1군사령관을 거쳐 합참의장까지 오르는 등 군의 고위직을 순탄히 올랐다. 이승만 정부에서 백선엽, 정일권 등의 이북 출신이 군 인맥의 중심이었다고 하면, 박정희 시대에는 김종오(金鍾五), 김용배(金容培), 장창국 등의 경기·충청 출신이, 다음에는 서종철(徐鐘喆), 노재현(盧載鉉), 정승화(鄭昇和) 등의 영남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군의 영남색은 3선 개헌, 10월 유신 등에 따라 강화되는데, 그 극단이 윤필용(尹必鏞)과 전두환(全斗煥) 등의 하나회다. 박정희가 유독 일본 육사 출신을 중용한 것도 있지만, 장창국은 박정희 정권이 제정신일 때 거의 마지막으로 요직에 발탁된 케이스다.
 
  전공(戰功)이 우선되는 군에서 주로 작전·교육 분야의 참모로서 활약한 장창국은 장도영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의 역할과 기여는 이 분야에 근무했던 제한된 사람만이 안다. 육군사관학교가 진해에서 화랑대로 이전한 후 1955년 12대 육사 교장으로 부임한 장창국 교장 때 ‘사관학교설치법’이 공포, 졸업생은 이학사의 학위를 받게 되었다. 장창국은 이학사의 자격을 줄 수 있도록 학제를 정비하였다.
 
  이를 위해 장창국은 이기백(李基白) 등 후에 학계의 거목이 되는 일류의 교수를 모아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기 위해 진력하였다. 서울고등학교 김원규(金元圭) 교장은 육사를 돌아보고 “대한민국에서 대학다운 대학은 육사 하나뿐이다”고 극찬하고 졸업생들에게 육사에 진학하도록 적극 유도하였다. 1956년 16기가 입교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李康石), ‘불굴의 육사혼의 표상’ 강재구(姜在求) 등이 이들이다.
 
  장창국 교장의 지도로 사관생도의 신조, 즉 “하나,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하나, 우리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하나,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가 제정되는 등, 육사의 정신적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훈으로 지인용(智仁勇) 휘호를 내렸다.
 
  1955년 10월 이승만 대통령 임석하에 11기생이 졸업하였다. 이후 사관학교 졸업 시에 대통령이 임석하여 졸업생 하나하나와 악수하고 격려하는 것은 전통이 되었다.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의 이명박 이전까지는! 경기중, 일본 육사 출신의 엘리트 장창국은 제대로 된 사관학교(Military academy)로서 육사를 창조하였다. 장창국 장군은 군은 전공에 못지않게 군인을 길러내는 것 또한 중요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孫元一, 해군을 ‘창조’한 인물… 해군가 ‘바다로 가자’ 작사
 
   1950년 6월 26일 부산과 남해안에 상륙하려던 북한군 766부대를 태운 무장수송선을 격파한 대한해협 전투는 육군의 한강선 방어에 비견되는 해군의 장거(壯擧)다. 이때 부산항이 교란되었다면 미군 투입이 초기부터 지장을 받았을 것이다. 이만큼 대한해협 전투는 대단히 큰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다.
 
  해군은 손원일(孫元一·1909~1980)이 중심이 된 해방병단(海防兵團)이 뿌리가 되었다. 가고시마현 사쓰마(薩摩) 중심의 순수혈통을 고집하던 일본 해군은 조선인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중국에서 해양대학을 나와 항해사의 경력을 가진 손원일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해방병단이 해군의 모체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선장 출신의 신성모(申性模)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잘못된 인사지만, 손원일을 해군의 수장으로 선임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손원일은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영식(令息)이었다. 손정도 목사는 김성주(김일성의 본명)의 모친 강반석의 친척인 강양욱(康良煜)과 같이 평양에서 목사 생활을 했다.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 했던 이승만에게 손원일은 가족과 같은 친근한 존재였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이승만은 해군의 중요성을 잘 알아 꼭 육해공군이 아니라 ‘해륙공군’이라 불렀다.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문자 그대로 해군을 창조하였다. 대한해협 전투에서 활약한 701함이 국민성금으로 구입한 함선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해군의 조직, 인력, 함선을 중심이 되어 만들어 내었다.
 
1946년 9월 진해 조선해안경비대를 방문한 백범 김구.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손원일 제독. 백범기념관 제공
  손원일은 육군에서 백선엽, 정일권, 이형근(李亨根) 등의 대장이 나올 때 “함선이 없는 해군의 수장이 대장(大將)이라면 외국 사람이 웃는다”며 대장 진급을 고사하였다. 해군은 어느 나라나 영국 해군에 뿌리를 두었는데, 이런 영국 해군의 문화를 잘 알아 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해군에서 제독(Admiral)은 격에 맞지 않는다 한 것이었다.
 
  손원일이 작사하고 부인 홍은혜(洪恩惠) 여사가 작곡한 군가 ‘바다로 가자’는 피를 끓게 만드는 군가이다. 해군의 기상을 이만큼 장쾌하게 뿜어낼 수가 없다.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쪽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해군사관학교 교훈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도 손원일 제독이 제정한 것인데, 김홍일 장군의 ‘절대로 명예를 지키라’와 맥이 닿는 고결한 가르침이요 다짐이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한 해군이 분발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張志良, F–4팬텀기 도입 등 공군 현대화 주도
 
   해인사(海印寺)는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 불보사찰 통도사(通度寺)와 함께 3보(寶) 사찰인 법보사찰인데, 이는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휩쓸던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가 불법의 힘으로 침략을 물리치고자 만들어낸 불심의 정화(精華)요 결실이다. 유럽이나 중국, 인도의 사원들이 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신앙이 아니고서는 될 일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에 의하여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민족문화의 보고요, 인류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일시에 사라질 뻔한 때가 있었다. 1951년 8월 유엔군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벌이면서 당시 해인사로 숨어든 북괴군을 폭격으로 제압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때 이를 막은 것이 당시 1전투비행단 작전참모 장지량(張志良·1924~2015)이다. 그는 “어떠한 엄벌을 받더라도 1400년 된 문화재를 한 줌의 재로 만들 수 없다”며 미군 측을 설득하면서 출격을 거부했다. 그의 노력에 감동을 받은 미군의 결정으로 공격이 취소돼 팔만대장경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식 기록에는 김영환(金英煥) 편대장이 명령을 받았는데도 이를 거부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군인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좀 어렵다. 혹시 장지량 장군이 김영환 장군의 형인 김정렬(金貞烈) 장군의 체면과 이미 고인이 된 김영환의 영예를 존중하여 그에게 영예를 돌린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아무튼 팔만대장경을 구한 것이 우리 공군인 것만은 틀림없다.)
 
공군참모총장 재임시절 도입한 F–4 팬텀 앞에 선 장지량 장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독일의 하노버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는 영국 왕실이 본래 하노버에서 왔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하노버가 미 공군의 작전 지역이었다면, 그러한 배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교토(京都)는 폭격하지 않았다. 공군 수뇌부에 교토가 일본 역사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아는 장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만대장경이 보존된 연유도 이와 같다. 장지량 장군은 호남의 명문 광주고보(서중) 출신으로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어려운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장지량은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뒤 김정렬, 김신(金信) 등과 함께 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육군 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되자 작전국장으로 F-51 무스탕 전투기 도입과 10개 비행장 확보 계획을 수립해 공군의 초석을 다졌다. 그 후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제9대 공군참모총장(1966~1968)으로 재직하면서 F-4팬텀기 도입 등 공군의 현대화를 주도하고 10개 전투비행단 기지를 확정하였다. 고속도로에 비상활주로를 설치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일본 육사 57기인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를 나온 장지량의 기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활용한 것이다.
 
  장지량은 예편 후 외교관으로서 주 에티오피아, 필리핀, 덴마크 대사를 역임하였는데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를 설득하여 1972년 유엔 총회 한국 문제 표결에서 기권을 지지로 바꾸어놓은 것은 당시로서는 큰 외교적 업적이었다. 장지량 장군은 실질적으로 공군을 만든 지도자였다.
 

  姜英勳, 육사생도 5·16 지지행진 반대하다 예편… 독실한 가톨릭 ‘紳士’
 
   강영훈(姜英勳・1922~현재)은 1922년 평안북도 영변 출신으로, 만주 건국대학교를 다니다 학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임관하였으며, 1950년 7월 초 한강선 방어의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의 비서실장으로서 그 옆에 있었다. 이승만 정부에서 순탄하 게 진급하였으며 5·16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었다.
 
  강영훈이 육사 교장 시절 사관생도의 도덕률이 제정되었는데, 참 군인과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강영훈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나, 사관생도는 진실만을 말한다. 하나, 사관생도의 행동은 언제나 공명정대하다. 하나, 사관생도의 언행은 언제나 일치한다. 하나, 사관생도는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 하나, 사관생도는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강영훈은 1961년 5·16 당시, 육사생도의 혁명 지지에 반대하다 예편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정치학 박사를 획득한다. 학병 출신이라 학문의 길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영훈은 1976년에 박정희의 권유로 귀국, 외교안보연구원장을 맡다가 대사와 국무총리를 지내고 적십자사 총재도 지냈다. 심지어 김대중(金大中)의 장자방(張子房) 임동원(林東源)이 각별한 존경을 보낼 정도로 두루두루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강영훈 국무총리가 1990년 12월 11일 저녁 제3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을 위해 쉐라톤 호텔에서 베푼 만찬회장에서 북한 연형묵 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다.
  강영훈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주 바티칸 대사를 지내고, 외교관의 꽃이라 하는 주영대사도 지냈다. 강 대사는 지금도 당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꼭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써서 보낸다. 주영한국대사관의 영국인 직원이 이 에피소드를 전하며 강 대사의 안부를 묻던 것이 생각난다.
 
  강영훈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2년 동안 총리를 지냈다. 노태우가 전쟁기념관을 이병형(李秉衡) 장군에게 맡겼듯이 강영훈도 육사 후배들에게 들은 바가 있어 등용했을 것이다. 강영훈은 노 대통령을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게 보좌하였는데, 대통령-총리 관계의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김영삼(金泳三)-이회창(李會昌)은 최악이라 하기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엉망이었다.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고를 때는 강영훈 총리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강영훈 총리의 인품에 감동한 후배들에 의해 노태우의 후임군으로 일시 거론된 적도 있었으나, 본인은 이북 출신이라 그런 것은 꿈도 안 꾼다고 사양하였다. 한국 정치의 병폐면서 어쩔 수 없는 상수(常數)인 지역감정을 꿰뚫어 본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 내각책임제가 된다면 강영훈 총리 같은 분이 대통령으로서 적합할 것이다. 누가 강영훈 장군에 대해 묻는다면 “그분은 신사(紳士)”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朴蒼巖, 고구려 고토 회복 관심 가진 시대의 혁명가… 글과 글씨, 언변 탁월
 
   박창암(朴蒼巖·1923~2003)은 1921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이병형 장군이 태어난 곳도 북청인데, 물장사를 하여서라도 자녀를 공부시키는 북청인의 생활력은 예부터 유명하다. 박창암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였다. 관동군에 있다가 귀국, 특수공작차 북행, 인민군 수뇌부에 침투 활동 중 탄로되어 수감 중 탈출, 중위로 임관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1군단 정찰대장, 8사단 수색대대장, 동해유격대장, 육군특수부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심리첩보전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수색대대라 하나 2000명의 월남 청년을 거느린 당당한 부대장이었고, 사단 예비대 역할도 하였음을 당시 8사단장 최영희(崔榮喜) 장군은 증언하고 있다. 중공군에 포위되었다가 탈출하는 과정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박창암의 군 경력은 특이하고 다채롭다.
 
  박창암은 혁명가였다. 그의 글과 글씨, 언변은 가히 영웅호걸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박창암이 5·16에 참여한 목적과 명분은 국민혁명이었다. 그는 군사정부에서 혁명검찰부장이 되었다. 부정축재자 척결 등 구악(舊惡)을 쓸어내는 그의 기상은 서릿발 같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반혁명으로 제거된다. 어차피 닥쳐올 혁명주체 간의 권력투쟁 과정이었다.
 
  박창암은 김종필(金鍾泌)을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김모군(金某君)’이라고 불렀다. 혁명가 박창암은 정치인 김종필과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김종필의 회고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보면 김종필은 대개 박정희를 대신해 악역을 맡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의 의혹사건 등을 박창암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박창암 대령이 청와대서 혁명검찰부장 임명장을 수여받고 있다. 오른쪽은 윤보선 당시 대통령.
  정치에서 물러난 박창암은 경기도 의정부에서 농장을 개척한다. 1968년 불의(不義), 비정(秕政), 비굴(卑屈), 오도(誤導), 비리(非理)를 참지 못하는 박창암은 야(野)에서 뛰쳐나와, 《자유》를 창간한다. 이를 통해 그는 국민정신혁명의 기본인 민족사관, 국사 찾기, 민족성 복원에 대해 정론(正論)으로 비론(非論)을 잠재웠으며, 직필(直筆)을 통해 권력자들을 떨게 하였다. 그의 저작은 1000페이지 가까운 《창암 만주 박창암장군 논설집(蒼巖 滿洲 朴蒼巖將軍 論說集)》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국한문 혼용인 이 거질(巨帙·매우 많은 권수로 이뤄진 책의 한 벌)은 젊은 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박창암은 호가 만주(滿洲)였다. 만주는 한민족의 본향이며, 박창암에게 있어 만주는 반드시 수복해야 할 구강(舊疆)이었다. 1976년 새해 ‘새 국민상과 광복사관’이라는 주장에서 박창암은 이렇게 포효하고 있다.
 
  〈새해는 국사광복의 해! 그 신천지를 개척하는, 아니 위대한 歷史疆域의 그 영광의 근원에서 미래의 生存 永昌法則을 발굴하는 國民史觀 부활의 해! 國民像을 民族史觀으로서 革命하는 史統中興의 계기의 해여야 한다.〉 박창암 장군은 이 시대의 마지막 혁명가였다.
 

  李大鎔, 최선두 북진해 압록강물 李 대통령께 전달…
 
   이대용(李大鎔・1925~현재)은 1925년 황해도 금천 출신으로 월남하여 육사 7기생으로 임관하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이대용은 6사단 7연대 중대장으로 춘천회전을 비롯, 20여 차례 전투에 참가하였고, 북진 중에는 최선두로 압록강에 도달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통에 압록강 물을 떠 바쳤다. 7연대장은 임부택(林富澤) 중령이었는데 임부택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이병형 장군과 함께 6·25전쟁 중 가장 전투를 잘한 장교로 꼽힌다.
 
  이대용은 대령 3차 마지막에 장군 진급이 되었다. 심사위원 장우주(張禹疇) 장군이 심사위원장 반대를 무릅쓰고 이대용을 강력히 추천하자 심사위원장은 이대용을 예비로 기재, 박정희 대통령이 고른 덕분이었다. 박정희는 이대용을 바로 알아보고 진급을 시켰다. 박정희가 6관구사령관일 때 이대용은 작전참모였다.
 
  박정희는 그 후에도 관구부사령관이라는 한직-사실상 무보직 상태-인 이대용을 소장으로 특진시킨 후 예편시켜 베트남에 공사로 보냈다. 인재를 중히 여긴 장우주 장군에 대한 일화는 많다. 특히 육사발전기금 이사장으로 있으며 해놓은 업적은 누구도 따라가기 어렵다.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전 주월공사.
  이대용은 1975년 월남 패망 시 주월한국대사관 공사로서 교민 구출에 최선을 다하다 월맹군에 포로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대용을 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유대계 미국인 사업가인 아이젠버그의 주선 등으로 이대용은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 시절 교섭이 진행되어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때 조국으로 돌아왔다. 298일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이대용은, 76kg이던 건장한 체격이 49kg으로 줄어 있었다.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한 박영수 등이 월맹과 협의, 장군인 이대용을 전향시켜 선전에 이용하려 하였으나 이대용은 끝내 거부하였다. 이대용의 애국충절은 한결같았다. 당시 이대용의 애국심과 의지에 감격한 월맹군 심문관이 후일 한국에 대사로 왔을 때 진정으로 이대용을 존경한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대용 장군은 ‘자랑스러운 육사인’으로 상을 받았다. 동창회에서 이런 상을 주는 취지는 좋으나, 선정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대용 장군과 같이 전혀 이의가 없는 동창이 선정되도록 하여야 한다. 다수결로 할 것도 아니요, 국회선진화법같이 60% 이상으로 할 것도 아니다. 신라의 화백제도, 또는 로마 교황의 선출같이 이론(異論)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년 꼭 선정하려고 무리를 해선 안 된다.
 
  요즈음 ‘자랑스러운 육사인’으로 선정된 사람 가운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추태를 부리는 사람도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특히 명예직, 봉사직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공사(公私)를 가리지 않고 온갖 수뢰와 횡령이 판을 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재향군인회가 복마전’이라는 투서가 들어와 보훈처에서 감사를 해보니 실태는 그 이상이라고 한다. 1군사령관 출신의 조남풍(趙南豊) 회장의 청렴(Integrity)이 의심받고 있다. 재향군인회는 구조적으로 각 회장들이 데려온 심복들이 저마다 밥그릇을 챙기는 봉건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재향군인회에 전혀 인연이 없고 개혁의 요처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 와서 개혁해야 한다. 이대용 장군같이 조국에 충성과 절개를 다 바친 분들께 부끄럽지도 않은가?
 

  李炯錫, 《한국전쟁사》 11권 완성한 최초의 ‘군인 史官’
 
   이형석(李炯錫·1915~1991)은 고종의 손자 이우(李鍝) 공과 같이 일본 육사 54기로 졸업, 해방 후 1948년 특임 5기로 임관하였다. 1951년 2군단을 만들 때 백선엽 군단장의 참모장이었다. 이형석은 백선엽보다 연배로 보나 군 경력으로 보나 상당히 선배였으나 부군단장 원용덕(元容德)과 함께 충실히 보좌하였다.
 
  이형석은 27사단장을 마지막으로 예편하여 전사편찬위원장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전사 편찬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 일본 육사를 나온 엘리트 이형석에게 이 과제를 맡겼다. 당시 전사편찬위원회는 국방부의 정식 편제가 아니어서 인원, 예산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전편위가 법적인 뒷받침을 받은 것은 노태우 정부에서 전쟁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형석은 《한국전쟁사》 편찬에 진력하여 각각 1000페이지가 넘는 11권의 《한국전쟁사》를 완성해 내었다. 부도 역시 11권, 증언도 5000명에 달했다. 전쟁기념사업회에서 나온 《한국전쟁사》를 비롯하여 합참, 육군본부,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출간한 6·25전쟁 관련 책자와 저술은 모두 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전편위는 조선의 실록, 현재의 국사편찬위원회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공식 기관에서 사료가 잘 정리되어 나와야 학자에 의한 심층 연구가 가능하다. 《한국전쟁사》는 국가 기관에서 편찬한 공식 기록으로 충분한 폭과 깊이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철저한 사학방법론(Historiography)에 입각하고 있다.
 
  이형석은 이를 위해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이병도(李丙燾) 박사에게 배웠다. 정치학자 등 사회과학자는 기초 연구가 잘 되어 있는 인문학-사학의 바탕에 의존하게 된다. 자전(字典)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일본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은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가 명치 때 자료를 모으고, 대정 때 자료를 정리하여, 소화 시대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역사를 편찬하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역사 편찬은 여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의 노고의 결정이다. 전문 분야 학자들의 논문을 모아 편집을 하는 것은 역사 편찬이 아니다. 이형석은 역사 편찬자의 역할과 책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형석을 전사편찬위원장으로 발탁한 박정희 대통령의 안목이 빛을 보는 대목이다.
 
  일본은 패전 후 방위청 전사실이 주가 되어 수십 년에 걸쳐 70여 권이 넘는 《대동아전쟁전사》를 발간하였다. 이 작업은 대본영의 마지막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服部卓四郞)가 주관하였다. 전사실은 일본군을 계승하여 장차에 대비하는, 말하자면 제1차 세계대전 후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가 참모본부를 온존시키기 위해 조직한 조직과 같았다.
 
  미국은 미 육군 전사실이 주가 되어 역시 방대한 수십 권의 《U.S. Army in the Pacific War》를 만들었고,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전 5권의 《U.S. Army in the Korean War》를 만들었다. 이형석이 주관한 《한국전쟁사》는 이들 강대국의 전사에 비견되며 넓이와 깊이에서 뒤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사》 11권을 편찬한 이형석의 노고에 대해서는 전공으로 빛난 여러 장군에 못지않게 기억하고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장군의 영광은 수많은 장교, 하사관의 노고와 희생의 결정체다.
 

  낙루장관 申性模, 영국상선 선장으로 英語는 능통했으나
 
   한강교 조기 폭파는 채병덕의 책임이지만, 여기에는 신성모(申性模· 1891~1960)의 독촉이 심했다. 장관의 명령은 정무적 명령이고 이를 집행하는 데 있어서는 군인으로서 채병덕의 판단이 필요했다. 장관이 시킨다고 이를 현장 책임자에게 그대로 전달만 해서야 어찌 참모총장이라고 할 것인가?
 
  신성모는 낙루장관(落淚長官)으로 불린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할 때마다 울어서다. 존경의 염이 과해선지, 정서를 억제하지 못해선지 자기 주체를 못 하는 인간이었다. 북한이 침공하면 바로 반공(反攻)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신성모의 허풍은 공연히 미군들의 한국군에 대한 무기 공급만 제한하게 만들었다. 1950년 애치슨 장관 방한 시 채병덕과 함께 38선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사진은 한때 북한이 국군의 북침설을 뒷받침하는 선전자료로 이용되었다. 신성모는 전략적 정무적 판단력이 ‘제로(0)’였다.
 
  영국에서 오래 생활한 신성모는 일요일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 고급 취향(?)을 가졌다. 1950년 6월 25일도 일요일이었다. 북괴군 남침을 보고하는 육군본부 전화를 신성모는 받지 않았다. 부관 왈 “장관님은 일요일에는 아무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였다. 상선(商船) 선장으로서 전화를 받지 않는 것도 마땅치 않을진대, 국방부 장관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장창국 작전국장의 집에는 전화가 가설되어 있지 않았는데, 시가지를 돌며 부대 출동을 독려하는 방송을 듣고 육본에 들어왔다고 한다.
 
  모든 문제의 시발은 신성모를 국방부 장관으로 쓴 이승만의 판단력이다. 신성모는 영국 상선에서 오래 근무해서 영어는 잘했다. 그 외에 무슨 장점이 있는가? 군사에 대해 아는가? 군 인맥에 정통한가?
 
1950년 6·25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이 신성모 국방장관).
  ‘낙루장관’ 신성모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데, 그러나 그의 이력은 간단하지 않다. 그는 1891년생으로 경남 의령 산이다. 1910년에 보성법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국치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안희제(安熙濟) 등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오송상선학교와 남경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해군 소위로 해군원수부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영국에서 항해학교를 나오고 1930년대에는 영국과 인도를 오가는 정기 여객선의 선장으로 근무, 1940년 임시정부 군사위원이 되었다. 즉 그는 ‘낙루장관’ 한마디로 폄하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시기에 국방부 장관이라는 자리가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신성모 장관을 설명하는 ‘다음’ 블로그에는 “신성모의 보고를 들은 이승만은 6월 28일 대전으로 튀어버렸다”고 나온다. 대단히 재미있는 말투다. 판단과 준비를 잘못하여 북괴군의 기습남침을 받고 정부를 천도하는 대통령의 처참한 심경을 헤아려보는 심경은 눈곱만큼도 없다. 마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대첩을 들을 때 어린애들이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어법이다. 그것이 그리도 신이 나는가? 이것이 386세대의 수준이고 취향인가? 신성모, 채병덕은 최악의 조합이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영명한 지도자인 이승만이 왜 이런 판단밖에 못 하였는가? 국운이 그밖에 되지 않았던가? 애통, 분통, 절통할 뿐이다.
 

  부적절한 인사의 전형, 일본군 병기 소좌 출신의 참모총장 蔡秉德
 
   6·25전쟁에서 초기에 기습남침을 당한 것은 북한군의 준비가 국군과 비교해 크게 우수했던 점도 있으나, 채병덕(蔡秉德·1916~1950) 참모총장의 졸렬한 작전지도가 치명적이었다. 채병덕은 남침을 경고한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등 정보국의 보고를 무시, 비상을 해제하고 중기관총을 입고시켰다. 이에 대해 상당수 간부들은 채병덕이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6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유동열(柳東說), 지청천(池靑天), 김홍일, 김석원 등 군사 경력자를 소집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의정부 정면에서의 공세이전(攻勢移轉)을 위험시, 한강 이남에서의 결전을 주장했고, 이범석 전 총리와 김석원 장군도 한강 방어선 이외에는 승산이 없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에서 건의된 대로 했어야 하는데 ‘뚱보’ 채병덕은 후방에서 올라온 병력을 대대 단위로 축차 투입시켜 전력만 소진, 전선은 붕괴되었다.
 
  치명적인 것은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었던 한강교의 폭파였다. 후에 실행을 맡은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은 사형당하고 이승만은 국민을 남겨두고 간 대통령으로 비난받았지만, 병력을 전방에 남겨둔 채 서둘러 폭파를 명령하고 후퇴한 채병덕이야말로 크나큰 죄인이다.
 
  정인보(鄭寅普) 등 수많은 인재가 서울에 남았다가 북괴군에 납북되었다. 6월 28일 서울에 비래한 맥아더는 채병덕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역전의 맥아더가 보기에 채병덕의 답변은 ‘빵점’이었다.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즉각 채병덕을 해임할 것을 건의하였다. 6월 30일 이승만은 채병덕을 해임하고 미국에서 급히 돌아온 정일권으로 교체하였다.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이 1950년 6월 의정부 지구에서 장병들에게 북한의 남침에 맞선 전투를 독려하고 있다.
  채병덕은 이종찬과 일본 육사 49기 동기였다. 건군 과정에서 일본 육사 출신은 만주군이나 중국군 출신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일본 육사 출신 가운데 채병덕 같은 유가 있었다는 것은 놀랍다. 그보다도 채병덕이 참모총장에 임명될 위인이 되지 못하였다는 가장 큰 이유는 그는 본래 병기 소좌였다는 점이다.
 
  전투병과가 아닌 병기병과 출신을 참모총장으로 앉힌 이승만은 군에 대한 상식이 너무도 부족한 문민 대통령이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외교에 집중한 이승만은 외교에는 천재였으나, 군사에는 어두웠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방장관 신성모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이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홍일, 김석원 중에 누구라도 참모총장을 시켰더라면 초기의 어이없는 실패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북 물자교류 사건으로 1사단장 김석원과 채병덕 참모총장이 다투자 이승만은 김석원은 예편시키고 채병덕은 그대로 둔다. 강기(剛氣)의 김석원은 대통령에게 대들다시피 하였다. 김석원이 중용되지 못한 것은 일본군 대좌로서 용명을 날렸던 김석원이 미군 고문관들에게는 버거웠던 때문이기도 하였다.
 
  채병덕이 그 시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국가적 비극이었다. 통수권자로서 가장 중요한 책임은 국방부 장관을 잘 고르고 그와 함께 군의 지휘부를 잘 구성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스벨트는 마셜을 참모총장으로 잘 골랐고, 마셜은 아이젠하워 등 지휘부를 능숙하게 통어하였다. 통수권자로서 이승만의 비극은 부적절한 인사에 있었다. 채병덕의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조명되어야 한다.
 

  丁一權 대장, 처신과 외교의 달인
 
   이승만 대통령이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丁一權·1917~1994) 세 분을 대장으로 만들었는데, 국민들의 기억 속에는 정일권 장군보다는 정일권 국무총리로 더 남아 있다. 정일권은 채병덕이 물러난 이후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듣도 보도 못한 이 직함은 이승만의 고안이었다. 이렇게 엄청나야 북괴군이 “정일권이 누군가”하고 겁을 집어먹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참 짓궂은 75세의 노인이었다.
 
  육해공군 총사령관의 직함은 허명(虛名)이었다.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였다. 국군이 후퇴를 연속하는 가운데 정일권의 참모총장으로서 역할과 기능은 별로 없었다.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상대하였고 지상전은 8군사령관이 지휘하였으므로, 육군참모총장은 동원업무나 챙기는 실정이었다.
 
  맥스웰 테일러 미 8군사령관은 대부대 지휘경험이 별로 없는 정일권을 보완하기 위해 잠시 사단장, 군단장을 시켰는데, 금성전투에서 2군단이 위기에 처할 때는 백선엽을 투입하여 막았다. 정일권은 이승만 대통령을 지성으로 보좌하면서 미군들과의 관계도 무척 좋았다. 뒤에 박정희를 모셔 7년 가까이 국무총리를 한 것도 이처럼 몸에 밴 탁월한 처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일권은 봉천군관학교 5기생이었다. 칼을 차고 말을 탄 정일권을 보고 매력을 느껴 군관학교에 들어갔다고 하는 후배들이 많을 정도로 정일권은 식민지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917년생으로 박정희와 동갑인 정일권은 만주군 출신 가운데 선배였다. 명목상으로는 원용덕이 최선임이었으나 그는 세브란스 의전 출신의 군의(軍醫) 중좌였기 때문에 만주군 출신의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다. 정일권은 함북 출신으로 평양 출신의 백선엽과 함께 자유당 시절 군의 양대 산맥이었다.
 
1956년 6월 29일 이형근 신임 육군참모총장(오른쪽)이 전임자인 정일권 대장과 이·취임식 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정일권을 관동군 헌병 대위 출신이라고 하나 이는 일본군 군제를 제대로 모르는 데서 나오는 이야기다. 관동군은 대일본제국 총군(總軍)이고 만주군은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僞滿)의 군대였다. 둘은 전혀 다르다. 어느 나라의 군대든 군관학교 수석 졸업자를 헌병장교로 만들지는 않는다. 진짜 관동군 헌병 오장(伍長)은 자유당 시절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이었다(7·4남북공동성명 당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을 지낸 김일성, 일명 김성주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통역 출신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막상 이것은 잘 모르는 모양이다.
 
  박정희는 제3공화국의 초대 총리로는 최두선(崔斗善)을 방탄총리로 내세웠지만 민정이 본격화되는 시기에는 정일권의 돌격내각을 내세웠다. 박정희는 세밀한 부분까지 직접 챙겼고 악역은 중앙정보부를 시켰다. 따라서 정일권의 역할은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정일권은 6년 7개월이나 국무총리에 있었는데, 이승만을 모셨듯 박정희를 깍듯이 잘 모셨기 때문일 것이다. 정일권은 드물게 외교에 능한 군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후, 정일권을 주 터키 대사로 발령을 냈고 후에 주불대사도 시켰다. 5·16 당시에는 주미대사였다. 정일권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국무총리로 외무부 장관도 겸했다. 정일권은 이승만, 박정희가 잘 활용하여, 충분히 ‘한 역할’을 한 군인이었다.
 

  徐生鉉 合參指揮統制通信局長,
  ‘청렴 강의’ 1000회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한 ‘청렴 전도사’

 
   서생현(徐生鉉·1935~현재)은 육사 14기로 임관해 합참지휘통제통신국장(소장)을 끝으로 예편한 뒤 석탄공사와 광업진흥공사 사장, 마사회 회장을 거쳐 대통령 직속 반부패특별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그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마사회 개혁을 하는데 서생현이 가장 적임자로 판단하고 광업진흥공사 사장을 하고 있는 서생현을 마사회장으로 보냈다. 서생현은 이 기대에 맞게 ‘복마전’의 불명예 꼬리표가 붙던 마사회에 강도 높은 개혁을 펼쳐 부정부패 추방 우수기관으로 만들었다.
 
  전두환의 문제는 퇴임 후 상왕 노릇을 하려 챙긴 권력형 비리였다. 자유당과 공화당은 돈으로 정치를 했다. 정치는 표를 얻는 것, 표를 얻으려면 조직이 필요하고, 조직을 움직이려면 돈이 들어간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었다.
 
  서생현은 “조직에서 ‘비리’라는 전염병을 예방해 주는 백신은 인사(人事)”라며 “능력 있고 정직한 사람을 요직에 임명하면 조직이 살아난다”고 했다. 그는 “윗사람부터 정신 차려야 한다”며 “청렴은 물 같아서 위가 더러우면 반드시 아래가 더러워진다”고도 했다. 대통령은 장관, 총장을 잘 골라야 된다. 특히 작은 조직에서 인사권자는 거의 전권을 휘두른다. 육군보다는 해·공군, 보병보다는 공병, 통신, 병참의 병과장 영향력이 큰 이유다.
 
  서생현은 집 주소를 비밀에 부쳐 명절에도 선물 하나 받지 않았다. 고급 관용차는 중형차로 바꿨고, 해외출장을 가도 1등석이 아닌 이코노미석에 앉았다. 공인의 청렴은 일상적인 것에서 엿볼 수 있다.
 
공직자 대상으로 ‘청렴’ 강의만 1000회를 넘긴 서생현 전 한국마사회 회장.(사진 이덕훈 기자)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통신병과 장교들이 국가적으로 통신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육군에서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우수한 장교들이 통신병과로 많이 갔던 때가 있었다. 서생현도 그중 하나다. 후배들로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같다”는 칭송을 받은 16기 박윤종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권이나 초기에는 개혁을 한다고 수선을 떤다. 의지는 분명하지만, 막연한 부패추방, 공직자 개혁으로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요점은 실천을 위한 방법과 수단이다. 스웨덴은 30만원짜리 선물을 공공카드로 산 부총리를 쫓아낸 나라다. 1등 국가는 이런 데서부터 확실한 나라다. 우리도 이런 부분부터 철저히 챙겨야 한다.
 
  공무원이 청렴해야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려면 사회 모든 부문이 청렴하게 움직여져야 한다. 사단법인 연구소나 동창회를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봉사로 생각하고 “어련히 잘 하겠지” 한다. 그런데 이런 데서도 불쾌한 일들이 벌어진다. 주머닛돈과 쌈짓돈을 분별하지 않고 쓴다. 이래서 정의감이 반듯한 장교가 도저히 참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서 장군은 “사회가 청렴하면 내 강의가 필요 없을 것 아닙니까? 1000번이나 강의했다는 것이 부끄럽다”라고 한다. 사관학교 출신만이라도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서생현 장군은 사관학교 출신도 간혹 잊고 있는 청렴이 제1의 덕이라는 것을 깨우쳐준다.
 

  趙成台, 유능한 전술교관이자 명민한 야전군사령관
 
   대침투작전은 평시작전의 대표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1995년의 홍성작전이다. 실패한 작전은 1996년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최근 NLL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북한 해군의 도발이 지속되고 있어 합참과 해군의 관심이 서해안에 집중되고 있지만, 언제고 내부로 침투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공격이 있을 것에 대비해야 한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작전에서의 작전지휘는 문민이 통수권자가 되었을 때 주의하고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민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작전을 조기 종결할 것을 지휘부에 독촉하면서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작전상황을 물었다. 작전에 집중해야 될 군사지휘부는 대통령의 질문에 답변하는 데에 온갖 신경을 집중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양호)은 공군참모총장 출신이었다. 합참의장(김동진)은 한미연합사령관 출신으로 영어로 유명하였지만, 다 갔다 오는 베트남전에 참여한 바가 없었다. 육군참모총장(윤용남)은 전술의 대가로 정평이 있었지만, 8·18체제에 따라 작전계선에 있지 않았다. 대침투작전은 육해공 합동작전이기보다 대부분 육군작전이다. 합참의장이 여기에 온 정신이 팔려 있다가 한반도 전쟁억제라는 큰 그림에 소홀할 수가 있는데, 이는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과제다.
 
  대침투작전은 기본적으로 향토사단장 책임하의 통합방위작전이다. 책임지역을 벗어난 작전 협조와 통제는 2군사령관의 책임이다. 조성태(趙成台·1942~현재) 2군사령관은 이를 명확히 하였다. “모든 보고는 나에게만 하라. 그 위는 내가 책임진다”고 하여 사단장이 오로지 작전지휘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성태는 장관으로서 빈틈없고 간명한 국회 답변과 연평해전의 승리로도 유명하지만 육군대학에서 유명한 전술교관이었다.
 
1999년 6월 1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조성태 국방장관이 참모들의 도움을 받으며 서해 교전사태와 관련한 답변자료를 챙기고 있다.
  대침투작전에서의 핵심은 위임과 집중이다. 어차피 현장의 성과는 지휘관의 전투감각에서 결정된다. 장군은 장교들의 전투감각을 키우는 데 집중하되 작전이 벌어지면 예하에 위임할 수밖에 없다. 조성태는 이 원칙을 분명히 체득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에서 철군이 진행되는 시점에서의 안케 패스 작전은 장군으로서 이세호(李世鎬)의 역량을 드러내었다. 이세호는 3군사령부를 창설하였는데, 3군사령부는 상당히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백선엽이 창설한 1군사령부에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6·25전쟁 지도는 결정적 위치에 인사를 잘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데서 보듯이 그의 대전략은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작전은 리지웨이, 밴 플리트 등 일류의 장군들이 잘 이끌었고, 전투지휘는 충용한 청년장군들이 빠르게 배워가며 잘 했다. 박정희는 탁월한 장군이었지만, 통수권자는 인사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기에 놓쳤다.
 
  문민 대통령이 통수권자로서 할 일은 장관, 합참의장, 참모총장을 잘 선택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특히 동맹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투는 장군이 전문가이다. 한나라의 장수 한신(韓信)이 황제 유방(劉邦)의 지도력의 비결에 대하여 물었을 때 ‘여(汝)는 병지장(兵之將)이나 짐(朕)은 장지장(將之將)’이라 하였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독일 장군들은 작전 전문가였다. 그런데 전쟁을 잘못하는 히틀러가 모든 것을 흩트려놓았다. 조성태 장군은 명민한 야전군사령관이었다.⊙
조회 : 16945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905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건강 길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