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통일 직전 시기를 다룬 역사소설 《왕경》 펴내
⊙ “단군은 실재했던 존재로 인본주의와 평화를 추구했다”
⊙ “소설 쓰고 싶은 직장인, 일단 단편 한 편만 완성해 보라”
孫楨美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英 카디프대 저널리즘 석사.
⊙ 前 《조선일보》 사회부·문화부·정치부·산업부·국제부 기자, 現 《샘터》 편집장.
⊙ “단군은 실재했던 존재로 인본주의와 평화를 추구했다”
⊙ “소설 쓰고 싶은 직장인, 일단 단편 한 편만 완성해 보라”
孫楨美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英 카디프대 저널리즘 석사.
⊙ 前 《조선일보》 사회부·문화부·정치부·산업부·국제부 기자, 現 《샘터》 편집장.
- 손정미 《샘터》 편집장.
가을의 문턱을 지난 혜화동 거리는 낙엽과 젊은이들로 잔잔히 북적였다. 대학로는 이렇다 할 상업시설이 없어서인지 중국인 관광객들이 거의 없는 몇 안 되는 번화가 중 한 곳이다.
월간지 《샘터》의 사옥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부근에 있다. 최근에 소설 《왕경(王京)》을 낸 손정미씨는 월간 《샘터》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거리공연을 하는 이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그 근방에는 젊은이들이 뭐가 좋은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웃고 있었다. 문득 《왕경》의 주인공들이 생각났다. 주인공 김유, 진수, 정이를 현실에 그린다면 딱 저들쯤 되리라.
화랑도는 靈的인 집단
조용하고 밝은 《샘터》 사무실 한 편에서 손 편집장의 모습이 보였다. 손 편집장은 잡지사에서 일하기 전 기자로 근무했던 이력이 있다. 《조선일보》에서 사회부, 문화부, 정치부, 산업부 등을 거치며 22년간 일했다. 손 편집장의 책에 주목한 것은 그의 기자 이력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 기자라는 직종은 교수와 함께 책을 가장 많이 출판하는 직종 중 하나일 터다. 재직 중이나 심지어 퇴직 후에도 많은 책을 내지만 기사나 칼럼 모음집, 혹은 취재 후일담을 풀어놓은 책, 그도저도 아니면 일기 비슷하게 사담을 모아놓은 책이 대부분이다.
손 편집장의 경우는 다르다. 《왕경》은 본격적인 역사 소설이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싸워 삼국 통일을 이루기 직전의 어느 순간들을 소설로 그렸다. 왕경, 즉 경주가 그 무대다. 쉽게 읽히는 말랑말랑한 소설을 써도 될 텐데, 왜 하필 역사인지 물었다. 손 편집장은 ‘정체성(正體性)’이라는 말을 꺼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또 기자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 준비를 하면서 든 생각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어요. 여러 동양 고전(古典)을 읽고 시대를 더듬어 올라가면서 그 생각은 더 짙어졌어요.
특히 ‘단군’이라는 존재에 대해 주목하게 됐습니다. 해를 표기하며 ‘단기(檀紀)’라는 말을 쓰고 홍익인간이니 하는 얘기를 배웠지만 사실 단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더라고요.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단군이 실재했던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의 저변에 단군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우리가 단군에 대해 얼마나 아나요?
중국 같은 경우는 좀 다르지요. 동북공정(東北工程) 같은 예에서 알 수 있듯 역사를 계속 파헤치고 있어요. 앞으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사이에 정신사와 문명사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리라 생각해요. 이 싸움에서 단군 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겁니다.”
—삼국 통일을 소재로 잡은 이유는 뭔가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화랑들의 역할이 컸지요. 화랑도라는 집단을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단군과 맥이 닿아 있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저 물리적인 힘을 쓰는 집단이 아니라 어떤 영적(靈的)인 힘을 갖고 있는,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까요. 단군신화를 살펴보면, 단군은 상당히 영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 안에는 인본주의가 있고 평화에 대한 메시지가 있지요.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삼국 통일 직전의 시기와 현재 한반도의 정세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분명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자매라는 걸 알면서도 서로 총을 겨누고 있지요. 신라는 당(唐)과 손을 잡고 나당(羅唐) 연합군의 형태로 삼국을 통일했어요.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주도했으면 어땠을까, 지금과 많이 달랐겠지요. 한민족의 활동 범위가 지금보다 더 넓어졌을지도 모르지요. 역사의 교훈을 되짚어보면서, 현재의 남북한 정세를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당히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어요.”
참고한 서적만 220여 권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
“2012년 3월부터 소설을 준비했어요. 출판까지 2년 반가량 걸렸네요. 회사를 그만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등의 역사서를 원전으로 읽었어요. 특히 신채호(申菜浩) 선생님이 쓰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3번을 읽었어요. 기본적인 줄거리뿐 아니라 복장이나 다른 부차적인 묘사에서도 허투루 넘어가고 싶지 않아서 하나하나 자료를 확인하기도 했고요. 참고한 자료 서적만 220여 권쯤 돼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경주도 가보고 이란, 중국의 지안, 백두산, 시안, 우루무치도 가봤고요.”
—고전을 읽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요?
“몇 명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일종의 과외 수업을 받았지요. 《중용(中庸)》 《대학(大學)》 《십팔사략(十八史略)》 같은 고전부터 꾸준히 읽었어요.”
—신문 기자 생활을 22년간 했는데, 기자 생활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되던가요?
“사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어릴 적부터 마음속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면서 하루하루 바쁜 일상에 치여서 살았지요. 기자를 하면서 간접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어요. 정치부에 3년 있으면서는, 한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간의 권력욕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바꿔놓는지 가까이서 볼 수 있었어요.
산업부를 취재하면서는, 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인들이 어떻게,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었어요. 사회부 경찰 취재 기자를 하면서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관찰할 수 있었지요.”
박경리와의 인연
손 편집장은 특종을 여러 번 한 기자였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를 ‘출입 금지 대상’으로 여겼던 전교조에 관한 특종을 했고, 조순 전 서울시장 대선 후보 출마 선언 등의 굵직한 기사를 썼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단독 기사도 여러 번 썼다면서요.
“기자 생활을 참 열심히 했어요. 몇 가지 기사가 있지만, 제 기억에 남는 기사로 신세계 이명희(李明熙) 회장 인터뷰가 있어요. 이명희 회장은 인터뷰를 절대 안 하시는 경제계 인사 중 한 분이에요. 제가 한 인터뷰가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인터뷰였지요. 만나보니 역시 카리스마가 대단하시더라고요.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연락을 드려요.
풍수 연구하시는 최창조(崔昌祚) 선생님을 취재했던 것도 기억에 남네요.”
—그 두 분 말고도 기억에 남는 취재원이 있나요?
“저에게는 사실 박경리(朴景利) 선생님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취재원이에요. 입사하고 몇 년 안 돼서 문화부 관련 취재를 하게 됐어요. 이때 박경리 선생님을 처음 만났죠. 1994년의 일이에요. 어째서인지 박경리 선생님이 저를 참 예뻐해 주셨어요. 선생님 원주 사실 때 집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하룻밤 자고 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마 여기자였으니까 가능했겠지요. 무슨 강연이 있어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실 때는 스카프를 사다주시기도 했어요.
한번은 박경리 선생님께 ‘선생님 저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말씀드리고 제가 쓴 소설을 가져다 보여드렸어요. 선생님께서는 열심히 써보라고 격려를 해주셨어요. 보통 소설을 처음 쓰면 인물 간의 대화가 어색하기 마련인데 대화가 자연스럽다는 평도 해주시면서요.”
—박경리 선생님도 기자를 하다가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지 않았나요?
“《서울신문》에서 기자를 하셨어요. 그때 얘기를 저에게 해주신 게 기억나요. 기자 생활을 하시다가 ‘아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다’ 싶은 날이 오자, 사표를 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곤 전업작가가 되신 거죠. 그 말씀을 들은 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제 마음속 한 편에 항상 그 생각이 있었어요. 나의 디데이(D-day)는 언제일까, 언제 그만두어야 할까 마음 깊은 곳에서 고민하고 있었다고 할까요.
박경리 선생님을 보면서 한편 느낀 점은, 작가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형극(荊棘)의 길이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어디를 가려고 기차를 타셨는데, 기차 안에서 중국 청나라 시대 무역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거예요. 그런 책까지 읽으시는구나 싶어 깜짝 놀랐어요. 그런 치밀한 연구가 쌓여서 《토지》 같은 작품이 탄생했겠지요.”
박경리 외에도 기자 출신 작가로는 이병주(李炳注), 김훈(金薰), 정호승(鄭浩承) 등이 있다. 외국 작가의 경우엔,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이 신문 기자 출신이다. 최근 인물로는 베스트셀러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쓴 스웨덴 출신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과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쓴 스티그 라르손 등이 있다.
일상을 벗어나 몰입해 보라
—기자 생활을 하면서 따로 소설 쓰기 공부를 한 건가요?
“기자라는 직종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직업이다 보니 따로 공부를 하진 못했어요. 그저 여유가 있을 때 조금씩 써보는 정도였어요. 어렵게 어렵게 단편을 완성하고 그런 식이었지요. 그런데 그 양이 무시할 수 없더라고요. 이사를 하느라 책상 정리를 해보니 습작 원고가 꽤 많이 나왔어요. 내가 정말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거구나, 생각했지요.
회사를 그만두고 고전을 읽고 명상도 배웠어요. 소설 작법을 따로 공부하진 않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여러 번 읽었어요. 박경리 선생님이나 오르한 파묵 같은 작가의 책을 읽었지요.”
생업에 종사하면서 글을 쓴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군요.
“일단 장시간 몰입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직장에 다니면서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한 편을 완성해 보시라고 하고 싶어요. 휴가를 내서 일상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족과 잠시 떨어져 몰입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가회동에 따로 작업실을 얻어 썼어요.”
손 편집장이 낳은 소설 《왕경》은 새로운 인연과 연결해 주었다. 바로 월간지 《샘터》다. 《샘터》의 편집장을 맡게 된 계기가 《왕경》이었다.
“소설을 내려고 《샘터》사를 찾았어요. 그런데 《샘터》사에서는 마침 《샘터》의 편집장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던 참이었어요.”
1970년에 창간된 《샘터》는 이름 그대로 명문의 ‘샘터’ 역할을 해왔다. 피천득부터 장영희, 최인호, 이해인까지 수많은 글쟁이가, 미려한 문장과 따뜻한 생각을 《샘터》를 통해 길어올렸다.
사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쳐간 편집장의 면면도 만만치 않다. 소설가 김승옥, 동화작가 정채봉 등이 대표적이다. 손 편집장과 이야기를 나눈 회의실 한쪽 벽에는 《샘터》가 펴낸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신문을 만들다 잡지로 오니 어떠냐”라고 묻자 《샘터》는 얇긴 하지만 품이 참 많이 들어가는 책”이라고 했다.
“신문 기자로 있을 때는 그저 기사를 써서 내면 그만이었는데 잡지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더라고요. 게다가 《샘터》는 분량이 다소 짧은 글들이 여러 편 들어가잖아요. 매달 삼십여 꼭지가량 실어요. 기자의 글도 들어가고, 전문적인 작가의 글도 들어가지만 일반 독자들의 투고도 매달 실리지요. 얇지만 참 많은 글을 품은 책이라고 할까요.”
손 편집장은 “앞으로 9편의 소설을 더 쓰고 싶다”고 말했다. 왜 하필 10편의 소설을 쓰기로 한 걸까 궁금했다.
“단순해요. 제가 작가로 데뷔를 늦게 했잖아요. 48세의 나이에 했으니 제대로 몰입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은 20년 정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왕경》을 써보니 저는 2년 정도를 들여야 한 편을 쓰겠더라고요. 그래서 10편을 생각했어요. 우리 역사를 계속 되짚어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중국에 가면 우리 역사를 담았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원전이 많을 거예요. 이런 책을 살펴보는 게 후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손 편집장은 “다음 작품도 역사소설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샘터》의 편집장 자리는 ‘소설가 손정미’를 위한 안성맞춤의 자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흐름을 지탱하는 건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하루이니 말이다.⊙
월간지 《샘터》의 사옥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부근에 있다. 최근에 소설 《왕경(王京)》을 낸 손정미씨는 월간 《샘터》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거리공연을 하는 이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그 근방에는 젊은이들이 뭐가 좋은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웃고 있었다. 문득 《왕경》의 주인공들이 생각났다. 주인공 김유, 진수, 정이를 현실에 그린다면 딱 저들쯤 되리라.
화랑도는 靈的인 집단
조용하고 밝은 《샘터》 사무실 한 편에서 손 편집장의 모습이 보였다. 손 편집장은 잡지사에서 일하기 전 기자로 근무했던 이력이 있다. 《조선일보》에서 사회부, 문화부, 정치부, 산업부 등을 거치며 22년간 일했다. 손 편집장의 책에 주목한 것은 그의 기자 이력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 기자라는 직종은 교수와 함께 책을 가장 많이 출판하는 직종 중 하나일 터다. 재직 중이나 심지어 퇴직 후에도 많은 책을 내지만 기사나 칼럼 모음집, 혹은 취재 후일담을 풀어놓은 책, 그도저도 아니면 일기 비슷하게 사담을 모아놓은 책이 대부분이다.
손 편집장의 경우는 다르다. 《왕경》은 본격적인 역사 소설이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싸워 삼국 통일을 이루기 직전의 어느 순간들을 소설로 그렸다. 왕경, 즉 경주가 그 무대다. 쉽게 읽히는 말랑말랑한 소설을 써도 될 텐데, 왜 하필 역사인지 물었다. 손 편집장은 ‘정체성(正體性)’이라는 말을 꺼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또 기자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 준비를 하면서 든 생각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어요. 여러 동양 고전(古典)을 읽고 시대를 더듬어 올라가면서 그 생각은 더 짙어졌어요.
특히 ‘단군’이라는 존재에 대해 주목하게 됐습니다. 해를 표기하며 ‘단기(檀紀)’라는 말을 쓰고 홍익인간이니 하는 얘기를 배웠지만 사실 단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더라고요.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단군이 실재했던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의 저변에 단군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우리가 단군에 대해 얼마나 아나요?
중국 같은 경우는 좀 다르지요. 동북공정(東北工程) 같은 예에서 알 수 있듯 역사를 계속 파헤치고 있어요. 앞으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사이에 정신사와 문명사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리라 생각해요. 이 싸움에서 단군 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겁니다.”
—삼국 통일을 소재로 잡은 이유는 뭔가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화랑들의 역할이 컸지요. 화랑도라는 집단을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단군과 맥이 닿아 있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저 물리적인 힘을 쓰는 집단이 아니라 어떤 영적(靈的)인 힘을 갖고 있는,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까요. 단군신화를 살펴보면, 단군은 상당히 영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 안에는 인본주의가 있고 평화에 대한 메시지가 있지요.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삼국 통일 직전의 시기와 현재 한반도의 정세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분명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자매라는 걸 알면서도 서로 총을 겨누고 있지요. 신라는 당(唐)과 손을 잡고 나당(羅唐) 연합군의 형태로 삼국을 통일했어요.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주도했으면 어땠을까, 지금과 많이 달랐겠지요. 한민족의 활동 범위가 지금보다 더 넓어졌을지도 모르지요. 역사의 교훈을 되짚어보면서, 현재의 남북한 정세를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당히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어요.”
참고한 서적만 22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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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2년 소설의 자료 조사를 위해 백두산을 오른 손 편집장. |
“2012년 3월부터 소설을 준비했어요. 출판까지 2년 반가량 걸렸네요. 회사를 그만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등의 역사서를 원전으로 읽었어요. 특히 신채호(申菜浩) 선생님이 쓰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3번을 읽었어요. 기본적인 줄거리뿐 아니라 복장이나 다른 부차적인 묘사에서도 허투루 넘어가고 싶지 않아서 하나하나 자료를 확인하기도 했고요. 참고한 자료 서적만 220여 권쯤 돼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경주도 가보고 이란, 중국의 지안, 백두산, 시안, 우루무치도 가봤고요.”
—고전을 읽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요?
“몇 명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일종의 과외 수업을 받았지요. 《중용(中庸)》 《대학(大學)》 《십팔사략(十八史略)》 같은 고전부터 꾸준히 읽었어요.”
—신문 기자 생활을 22년간 했는데, 기자 생활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되던가요?
“사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어릴 적부터 마음속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면서 하루하루 바쁜 일상에 치여서 살았지요. 기자를 하면서 간접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어요. 정치부에 3년 있으면서는, 한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간의 권력욕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바꿔놓는지 가까이서 볼 수 있었어요.
산업부를 취재하면서는, 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인들이 어떻게,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었어요. 사회부 경찰 취재 기자를 하면서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관찰할 수 있었지요.”
박경리와의 인연
손 편집장은 특종을 여러 번 한 기자였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를 ‘출입 금지 대상’으로 여겼던 전교조에 관한 특종을 했고, 조순 전 서울시장 대선 후보 출마 선언 등의 굵직한 기사를 썼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단독 기사도 여러 번 썼다면서요.
“기자 생활을 참 열심히 했어요. 몇 가지 기사가 있지만, 제 기억에 남는 기사로 신세계 이명희(李明熙) 회장 인터뷰가 있어요. 이명희 회장은 인터뷰를 절대 안 하시는 경제계 인사 중 한 분이에요. 제가 한 인터뷰가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인터뷰였지요. 만나보니 역시 카리스마가 대단하시더라고요.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연락을 드려요.
풍수 연구하시는 최창조(崔昌祚) 선생님을 취재했던 것도 기억에 남네요.”
—그 두 분 말고도 기억에 남는 취재원이 있나요?
“저에게는 사실 박경리(朴景利) 선생님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취재원이에요. 입사하고 몇 년 안 돼서 문화부 관련 취재를 하게 됐어요. 이때 박경리 선생님을 처음 만났죠. 1994년의 일이에요. 어째서인지 박경리 선생님이 저를 참 예뻐해 주셨어요. 선생님 원주 사실 때 집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하룻밤 자고 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마 여기자였으니까 가능했겠지요. 무슨 강연이 있어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실 때는 스카프를 사다주시기도 했어요.
한번은 박경리 선생님께 ‘선생님 저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말씀드리고 제가 쓴 소설을 가져다 보여드렸어요. 선생님께서는 열심히 써보라고 격려를 해주셨어요. 보통 소설을 처음 쓰면 인물 간의 대화가 어색하기 마련인데 대화가 자연스럽다는 평도 해주시면서요.”
—박경리 선생님도 기자를 하다가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지 않았나요?
“《서울신문》에서 기자를 하셨어요. 그때 얘기를 저에게 해주신 게 기억나요. 기자 생활을 하시다가 ‘아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다’ 싶은 날이 오자, 사표를 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곤 전업작가가 되신 거죠. 그 말씀을 들은 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제 마음속 한 편에 항상 그 생각이 있었어요. 나의 디데이(D-day)는 언제일까, 언제 그만두어야 할까 마음 깊은 곳에서 고민하고 있었다고 할까요.
박경리 선생님을 보면서 한편 느낀 점은, 작가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형극(荊棘)의 길이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어디를 가려고 기차를 타셨는데, 기차 안에서 중국 청나라 시대 무역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거예요. 그런 책까지 읽으시는구나 싶어 깜짝 놀랐어요. 그런 치밀한 연구가 쌓여서 《토지》 같은 작품이 탄생했겠지요.”
박경리 외에도 기자 출신 작가로는 이병주(李炳注), 김훈(金薰), 정호승(鄭浩承) 등이 있다. 외국 작가의 경우엔,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이 신문 기자 출신이다. 최근 인물로는 베스트셀러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쓴 스웨덴 출신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과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쓴 스티그 라르손 등이 있다.
일상을 벗어나 몰입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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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편집장이 중국 지안에 있는 고구려의 왕성 ‘환도산성’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
“기자라는 직종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직업이다 보니 따로 공부를 하진 못했어요. 그저 여유가 있을 때 조금씩 써보는 정도였어요. 어렵게 어렵게 단편을 완성하고 그런 식이었지요. 그런데 그 양이 무시할 수 없더라고요. 이사를 하느라 책상 정리를 해보니 습작 원고가 꽤 많이 나왔어요. 내가 정말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거구나, 생각했지요.
회사를 그만두고 고전을 읽고 명상도 배웠어요. 소설 작법을 따로 공부하진 않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여러 번 읽었어요. 박경리 선생님이나 오르한 파묵 같은 작가의 책을 읽었지요.”
생업에 종사하면서 글을 쓴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군요.
“일단 장시간 몰입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직장에 다니면서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한 편을 완성해 보시라고 하고 싶어요. 휴가를 내서 일상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족과 잠시 떨어져 몰입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가회동에 따로 작업실을 얻어 썼어요.”
손 편집장이 낳은 소설 《왕경》은 새로운 인연과 연결해 주었다. 바로 월간지 《샘터》다. 《샘터》의 편집장을 맡게 된 계기가 《왕경》이었다.
“소설을 내려고 《샘터》사를 찾았어요. 그런데 《샘터》사에서는 마침 《샘터》의 편집장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던 참이었어요.”
1970년에 창간된 《샘터》는 이름 그대로 명문의 ‘샘터’ 역할을 해왔다. 피천득부터 장영희, 최인호, 이해인까지 수많은 글쟁이가, 미려한 문장과 따뜻한 생각을 《샘터》를 통해 길어올렸다.
사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쳐간 편집장의 면면도 만만치 않다. 소설가 김승옥, 동화작가 정채봉 등이 대표적이다. 손 편집장과 이야기를 나눈 회의실 한쪽 벽에는 《샘터》가 펴낸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신문을 만들다 잡지로 오니 어떠냐”라고 묻자 《샘터》는 얇긴 하지만 품이 참 많이 들어가는 책”이라고 했다.
“신문 기자로 있을 때는 그저 기사를 써서 내면 그만이었는데 잡지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더라고요. 게다가 《샘터》는 분량이 다소 짧은 글들이 여러 편 들어가잖아요. 매달 삼십여 꼭지가량 실어요. 기자의 글도 들어가고, 전문적인 작가의 글도 들어가지만 일반 독자들의 투고도 매달 실리지요. 얇지만 참 많은 글을 품은 책이라고 할까요.”
손 편집장은 “앞으로 9편의 소설을 더 쓰고 싶다”고 말했다. 왜 하필 10편의 소설을 쓰기로 한 걸까 궁금했다.
“단순해요. 제가 작가로 데뷔를 늦게 했잖아요. 48세의 나이에 했으니 제대로 몰입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은 20년 정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왕경》을 써보니 저는 2년 정도를 들여야 한 편을 쓰겠더라고요. 그래서 10편을 생각했어요. 우리 역사를 계속 되짚어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중국에 가면 우리 역사를 담았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원전이 많을 거예요. 이런 책을 살펴보는 게 후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손 편집장은 “다음 작품도 역사소설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샘터》의 편집장 자리는 ‘소설가 손정미’를 위한 안성맞춤의 자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흐름을 지탱하는 건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하루이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