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列傳] ‘2인자의 美學’ 鄭鎭珏 : 월간조선

그의 모습에는 근대성(近代性)이 스며 있다. 1994년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 <도라지>에서 김옥균(金玉均) 역을 맡았을 때, 평론가들은 그가 ‘구한말(舊韓末)에서 바로 현대로 걸어들어온 듯한 존재감을 보였다’고 했다. 배우 정진각(鄭鎭珏·63) 이야기다.

얼마 전 막을 내린 국립극단의 근대극 재조명 시리즈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9월 12~28일)에서도 그는 주인공 이중생 역을 맡아 광복 공간을 살아가는 출세주의자의 모습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그의 존재감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실감을 부여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러나 강렬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드러나지 않되 결국은 드러나는 것.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조연(助演)을 맡아 대사가 몇 마디 되지 않을 때에도, 그가 무대에 나올 때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후배 연기자들이 증언한다. 그는 튀지 않으면서 작품 전체의 중량감을 높여주는 배우다. 주연(主演)보다는 조연을 주로 맡아왔기에 일반인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연극인이나 관객들에게 그의 이름 석 자가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2인자의 미학(美學)’을 보여주는 배우라고 할까.

어쩌면 그의 연기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압축판인지도 모른다. 농경사회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는 변화를 단 100년 안에 달성한 아찔한 시간을 견디며 적응하고 버텨온, 근현대사를 살아낸 평균적 한국인의 적응력, 그리고 은근과 끈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잘 봤습니다. “정진각이 아니었다면 40년대 후반의 정서를 이토록 온전하게 그려내지는 못했을 것이다”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포스터도 예쁘게 나왔던데요.

“평생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함께 출연했던 동료 배우들도 ‘선배님한테 딱 맡는 역할이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일제(日帝)시대와 광복 직후,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며 재산을 모은 이중생은 경제사범으로 몰려 ‘재산 몰수’의 위기에 처하자 죽은 것처럼 가장해 ‘유산 상속’을 꾀한다. 장례식장에서 ‘살아 있는 이중생’이 문상객(問喪客)이 없을 때 수의(壽衣) 차림으로 돌아다니다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는 포인트다. 이중생의 음모는 강직한 사위에 의해 무산되고, 만사가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이중생은 수의를 입은 채 자진하며 ‘진짜로’ 생을 마감한다.

“오영진(吳泳鎭·1916~1974) 선생님이 제목을 참 잘 지으신 것 같아요. 살아 있는 이중생(李重生). ‘두 번 산다’는 뜻도 있고 한자는 다르지만 ‘이 중생들아’의 느낌도 들고…. 시대는 바뀌었지만, 지금도 주변에는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더러 계시잖아요. 정치하는 사람 중에도 있고…. 그래서 관객들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 같다고 그러시더군요. 오영진 선생님의 대표작 <맹진사댁 경사>도 좋지만, 저는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의 연극적 구성이 더 정교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설극장의 추억

정진각은 1951년 10월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꾼이셨는데 부업이랄까, 아르바이트랄까 다른 일도 하셨어요. 소(牛)의원이라고, 말하자면 무면허 수의사죠. 침도 놓고, 건강 상태도 확인해 주고, 해산하면 가서 밤도 새우시고, 소 팔고 사고 할 때는 가격산정도 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사람 고치는 의사도 없는 무의촌(無醫村)이 즐비하던 시절 아닙니까. 하물며 수의사야 말할 것도 없죠. 그나마 제 아버님이 인근 마을을 통틀어 ‘소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이런저런 의뢰가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는 농가의 가장 큰 재산이라, 동네 분들이 저희 식구들을 많이 위해 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연극이다, 혹은 굿판이다 이런 것이 참 좋았습니까?

“그럼요. 시골에서 안택(安宅)굿이라고, 보름날에도 집안 무사하라고 굿하고 세시 절기마다 집안행사에 동네행사가 일 년 내내 이어졌어요. 요즘 말로 하면 축제죠. 풍물놀이도 하고 두레도 있었고, 우리 고유의 정서가 제 몸에 남아 있다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영화는 장마당에서 포장치고 가설극장에서 상영하는 걸 많이 구경했습니다. 개구멍이라고 하죠? 몰래 들어가서 쫓겨나기도 하고…. 유성(有聲)영화가 아니라 변사(辯士)가 직접 설명하는 영화였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이 ‘마지막 변사’는 아니었을까요? 도회지 다 돌고, 시골까지 와서 다 낡은 필름 돌려가며 상영하는…. 제가 6, 7세 때 기억입니다.”

충남 바닷가 출신인 소설가 고(故) 이문구의 글에도 가설극장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 상영 중에 비가 쏟아지고, 필름 끊어지면 기사들이 즉석에서 수리를 하고, 관객들은 본전 생각에 집에 못 가고, 비에 젖어 눈물에 젖어 오돌오돌 떨어가며 영화를 봐도 흉이 아니던 시절의 기록화다.

“어린 시절 가수 흉내 많이 내”

정진각은 연극 <도라지>에서 김옥균 역을 맡았다. 일본 오가사와라섬에 유배된 김옥균이 혼자서 춤을 추는 모습.

—그때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까?

“굿이나 영화, 곡마단 공연이 너무 재미있기는 했지만, 제가 이 일을 직접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내성적인 성격이거든요. 시골에서 자라다 보니까 라디오를 많이 들었고, 그러다 보니 가수 흉내를 간혹 냈어요. 식구들 앞에서, 부모님 앞에서, 둑에다 친구들 앉혀놓고…. 옛날 노래를 지금도 많이 압니다. 신라의 달밤, 사막의 한…. 제가 소풍 때 장기자랑 시간에 부르던 노래들입니다.

그 당시 유행가 가사 중에 애리조나 카우보이,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시아 왕자, 홍콩 아가씨가 나오잖아요. 왜 그때 그런 노래가 유행했을까…. 모두들 어렵고 생활고가 극심하니까 노래를 들을 때만이라도 잠깐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지긋지긋한 가난을 잠시나마 잊어보자, 그래서 그런 노래들이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고향마을의 호암국민학교를 나와 중학교는 공주로 유학을 떠났다. 국립 사범대학이 서울대, 경북대, 공주대 단 세 곳뿐이던 시절, 사범대에 교육대까지 있었던 공주는 글자 그대로 교육도시였다.

“공주에 영화관이 두 곳 있었습니다. 길어야 한 작품을 이틀 정도 했나, 혼자서 하숙하고 외로워서 그랬는지, 거의 매일 영화관에 가서 살다시피 했어요. 당시는 극장에서 쇼를 공연하기도 했는데, 쟈니 리, 트위스트 김, 남철, 남성남 이런 분들이 공연하는 걸 열광하면서 봤습니다. 촌놈 눈에는 세상천지가 다 볼거리더라고요.”

서울로 시집간 누님을 따라 고등학교는 서울로 진학했다. 누군가가 만사가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했다. 정진각에게도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 찾아왔다. 대광고를 졸업하던 무렵이다.

緣坐制의 덫

“제가 성적이 좋았어요. 고3 때 해군사관학교 시험을 봤는데 최종시험까지 붙었다가 연좌제(緣坐制)에 걸려 떨어졌습니다. 육촌 형님 두 분이 6·25 때 부역(附逆)을 했거든요. 사상이 그쪽이어서가 아니고, 인민군이 들어오니까 집안 전체를 지키려고 말하자면 대표로 나갔던 건데, 그래도 부역은 부역이죠. 육촌이면 시골에서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같으니까요.

시험 보고 나서 제 고향마을에 보안대에서 사람이 다녀갔답니다. ‘정모라는 사람이 정진각이라는 수험생의 육촌 형님이라는데 이분이 지금 살아계시느냐’고. 같이 시험 봤던 제 친구는 붙고 저는 떨어졌습니다.”

현지신원조회는 예비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한 최종관문이었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사관학교 진학이 가능할 것 같았다. 외동아들을 향한 부모님의 기대도 채워드리고 싶었다. 이번에는 공군사관학교에 응시했다. ‘압도적으로 붙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열심히 준비했고, 성적도 좋았지만 결과는 또 불합격이었다.

“지금도 군인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지방공연 갔다가 해군 함정이 눈에 들어오면 ‘저거 내 배(船)다’ 속으로 그랬죠. 아, 군대는 76년 현역병으로 입대, 경남 마산 문선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오태석과의 40년 인연

독자(獨子)라고 서울로 올려 보냈는데, 연거푸 입시(入試)에 실패하고 나니 도무지 부모님 뵐 낯이 없었다. 우체국에서 소인을 찍으며 임시공무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 친구가 ‘소질을 살려보라’며 입학원서를 사들고 나타났다. 서울예술대학이 서울연극학교이던 시절이다.

“속으로는 배우나 가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용기를 못 낸 겁니다. 촌놈이고 문외한이라는 생각에 대학의 연극학과 지망은 언감생심이었고. 사관학교 떨어지고 비로소 이 길로 들어선 거지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연극학교는 그 당시만 해도 정식 대학이 아니고 ‘초급대학 과정’이었다. 전체 학생 120명 가운데 1학기 끝나고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먹고살기도 쉽지 않았고, 연극이 화려하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의 결과였다. 2년 과정을 마친 사람은 그래서 30~40명에 불과했다. 1년 후배가 독고영재,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출연한 하재영 등이다.

—정진각이라면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태석과 40년간 함께 작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기나긴 인연이 시작된 곳이 바로 남산 연극학교로군요?

“오 선생이 저보다 열한 살 위시죠. 희곡론 강의를 하셨는데 말을 좀 더듬으세요. 저한테는, 단어가 갑자기 너무 많이 생각나니까, 하고 싶은 말씀이 순간적으로 너무 많이 떠오르니까 선택을 못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분이 뭐가 있는 분이다’라고 생각했죠. 1학기 끝나고 오 선생님이 같이 작업할 사람을 찾아 올라왔는데 1학년 중에는 제가 유일했습니다. 그때부터 연습한 작품이 <춘풍의 처>입니다. 공식적으로는 76년이 초연(初演)이지만, 5년 전부터 <춘풍의 처>는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오사단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2004년)의 연출가 오태석(오른쪽)과 정진각(가운데).

—거장(巨匠) 오태석의 첫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오사단의 시작이로군요. 오사단은 남들이 붙여준 별명이죠?

“그렇죠. 하도 뭉쳐 다니니까. 그때는 대관(貸館) 신청이나 공연을 극단 소속원들만 할 수 있었거든요. 오사단 10명 정도가 다른 극단 이름을 빌려 공연할 수밖에 없는데 특정 극단 소속은 아니고, 그런데도 자기들 개성은 뚜렷하고. 그런 사정이 있어, 말하자면 연극계에서 외인구단식으로 ‘오사단’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겁니다.”

한 연출가와 한 배우가 거의 40년을 함께 작업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흔한 일이 아니다.

“근데 한 두세 번 떠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78년 <약장사>라는 일인극을 재공연한 직후입니다.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님이 공간사랑 소극장으로 공연을 보러 왔다가 ‘정진각 좀 빌려다오’ 부탁을 했어요. 그때 저는 조연출을 하면서 심부름도 하고 기획 일도 보고 홍보에 포스터 붙이기에 일인다역(一人多役)을 했거든요. 마침 심 선생님께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심 선생님하고 3년 정도 함께 지냈습니다. 여의도에서 열렸던 ‘국풍 81’이라는 행사에서 민속제를 기획하고 주관을 했습니다. 전국 각 대학의 탈춤반 다 초청하고, 다른 행사 하면서 우리 민속놀이도 제대로 살펴보고,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두 번째 결별은 90년대 초다. 오태석의 극단 목화가 충돌극장을 열기 직전의 일이다.

“사람마다 슬럼프라고 할까, 회의(懷疑)에 빠질 때가 있잖아요.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이 분야에 정말 소질이 있나, 없나, 고민은 산더미 같은데 도무지 답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극단을 나가면 제 문제가 객관적으로 보일 것 같았는데, 나와서도 몇 개월 못 견뎠어요. 연극을 안 하니까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바로 목화로 복귀한 건 아닙니다. 마침 잠실 롯데월드에 롯데극장이라는 뮤지컬 극장이 생겼어요. 목화에서 기획을 보던 친구가 롯데로 갔는데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겁니다. 정진수 교수가 연출이고 복진오씨가 음악 담당…. 극중 노래 두어 곡 부르고 캐스팅됐습니다. 연습까지 포함해서 한 6개월 공연했죠. 다음 작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자꾸 엇나가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마음 한편이 허전하고 영 충족이 안 된다고 할까?

롯데랑 재계약을 망설이던 시점에 극단 목화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라는 작품이 대한민국 연극제에 참가 확정되었는데, 용왕 역을 맡았던 홍원기라는 후배에게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 공연이 며칠 안 남았는데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죠. 후배들에게 납치되다시피 연습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납치를 당하면서도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죠. 다른 배우들 눈도 있고 하니 오 선생이나 나나 피차간에 살짝은 민망한 과정을 거쳐야 복귀가 되는 건데, 그 과정이 그냥 생략된 거니까요.”

가끔은 다른 극단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프라이데이>에서 치아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기를 계속해 제작자 이원승이 눈물을 흘린 이야기는 <배우열전 이원승> 편에서 자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아프리카>

정진각이 대표적으로 꼽은 연극 <아프리카>. 뒤에 보이는 인형들은 비행기 승객 대역으로 만든 소품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대표작은 무엇인지요?

“뭐니뭐니 해도 1984년 극단 목화 창단작품 <아프리카>입니다. 이 연극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중동(中東)에 파견 나갔던 근로자가 귀국 직후 정신병원으로 직행한 사건이죠. 사연인즉 비자 문제입니다. 리비아 비자가 ‘만료 후 3개월 내 재(再)입국은 자동연장’이었는데, 이 기간이 한 달로 줄어든 겁니다. 그래서 국제미아가 되고, 동료들은 다 입국을 하죠. 그런데 중간 기착지인 튀니지의 경비병이 ‘이 비행기는 리비아 트리폴리를 거쳐서 회항(回航)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이야기했는데 ‘유 고 트리폴리(You go Tripoli)’를 ‘너 유고, 그러니까 유고슬라비아로 보낸다’라고 들은 겁니다. 당시만 해도 냉전 중일 때 아닙니까. ‘공산국가 가라는 건 죽으라는 얘기다’, 이렇게 생각한 이 사람이 혼자 탈출해서 사막에서 야생인간으로 지내다 발견이 돼서 귀국을 한 겁니다.

그때 연습장이 성균관대 근처였는데, 데모가 심해서 최루탄 마셔가면서 연습했어요. 제가 주인공을 맡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제 연극 인생의 갈림길이 되었다는 점에서 저에겐 중요한 작품입니다.”

정진각의 꿈은 배우가 아니라 기획자가 되는 것이었다. 기획 전문가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연극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남기고 싶었다.

“연극이 꿈이라면 기획은 현실입니다. 포스터 어디에 붙이고 티켓은 몇 장 팔고, 이 작품은 이런 성향의 관객들과 통하니 홍보 방향을 이렇게 잡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창단공연하면서 그 방향이 틀어진 겁니다. 주인공 지씨 역을 누가 맡았으면 좋겠느냐 극단원들끼리 투표를 했는데, 제가 뽑혔어요. 선정 이유는 지씨의 ‘촌놈’ 이미지가 저하고 가장 맞아떨어진다나 뭐라나. 그런데 저는 감당을 못 하는 거죠. 공연 일주일 전까지도 물어봤어요. 진짜 제가 하냐고요. 오 선생이 누군가를 섭외해 놓고 저를 대타로 준비시키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공연 전날이 되니까 이제는 도망갈 수도 숨을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딱 하나예요. ‘웃어라. 아프리카 오지(奧地)에 버려지니까 공포가 밀려올 것 아니냐, 공포가 극에 달하면 웃음으로 변한다, 그러니 웃어봐라.’ 제가 그때 4분20초를 쉬지 않고 계속 큰소리로 웃었다는 겁니다. 지금은 숨이 차서라도 그렇게 못 하죠.”

대사가 다섯 마디에 불과했던 <비닐하우스>

1987년 오태석 작 <부자유친>에 영조 역으로 출연한 정진각. 뒤에 보이는 배우가 사도세자 역으로 나온 한명구.

연극인들은 그가 영조로 출연해 사도세자 역의 한명구와 맨몸으로 부딪히던 87년도의 화제작 <부자유친>도 잊지 못한다.

“부자(父子)는 서로 친해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요. 저희는 이 작품을 영조와 사도세자, 그러니까 왕과 세자 사이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부자관계로 풀어갔어요. 관객도 사극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질려서 박수도 못 치고 굳어버리는 관객이 많았습니다. 묵직한 에너지가 객석에서 무대로 넘어오던 추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89년 작인가 90년에 공연했던 <비닐하우스>도 저는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습니까? <비닐하우스>는 사실 제 대사가 네 마디인가 다섯 마디에 불과합니다. 제 역할이 관리인이었는데 오 선생님께 ‘이 대사,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핵심만 남긴 겁니다.”

<비닐하우스>는 전쟁, 기아, 질병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혈액이 부족하자, 국가가 ‘비닐하우스’라는 일종의 국립채혈기관을 설치하고 참석자들을 먹이고 재우며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태를 관찰한다는 내용이다.

—그때 맡으신 역할 ‘관리인’은, 어수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닐하우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꾸미고 관찰하는 숨은 실세 이거 아니었습니까?

“당초 오 선생님 의도와 제 해석이 일치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대사를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요? 실세는 가급적 몸을 감추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니까.”

“김옥균의 애매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정진각은 오태석이 번안한 <로미오와 줄리엣>(1995년 초연)에서 로렌스 신부로 출연했다.

—정진각이라는 배우가 평론가들에게 잊지 못할 배우라는 인상을 남긴 작품으로는 김옥균의 일대기 <도라지>(1994)가 있습니다.

“김옥균이 역사적으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제 결론은 ‘상당히 애매하다’입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도 사실 어떻게 보면 성급하게 일을 꾸민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왕정(王政)을 폐지하자는 주장을 한 것도 아니고, 하여간 김옥균이 주창한 개혁이라는 것이 참 애매합니다. 일본에 망명(亡命)해서도 거의 혼자 지내고. 그런 애매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일반 관객 가운데서도 제가 해석한 김옥균이 마음에 남는다고 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오태석 연출로 공연한 셰익스피어 작품, 예컨대 <템페스트>나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작품들은 외국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본고장 영국에서도 극찬을 받았고요. 문화를 뛰어넘어 관객과 공감했다는 뜻인데,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극단 목화 초연이 1995년입니다. 처음에는 원작을 발췌해서 군더더기를 들어내고 이 대사들을 우리 말 구어체로 바꾸는 정도였습니다. 원작 반 각색 반이었죠. 20년 넘게 공연을 거듭하면서 이 비중이 바뀐 겁니다. 어느새 한국화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타난 셈이죠, 숙성을 거쳐서.

영국 사람들은 ‘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그야말로 독창적이다’, 그래서 열광을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원작의 뼈대를 허물지 않고도, 말하자면 재건축을 했는데도 원작의 정취와 핵심이 살아 있으니 말이죠. 극적 논리와 일관성이 딱딱 맞아떨어지고 수백 년 동안 자기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무대에서 보여주니까요.”

—오태석은 어떤 분입니까?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 분입니다. 만약 그분이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제가 먼저 떠났을 겁니다. 지겨웠을 테니까. 그런데 항상 나아가요.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같이 저 항해에 동참해 보자, 오태석이라는 작가 겸 연출가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호기심이 생기는 겁니다. 같이 연구를 하자는 생각도 들고, 그 과정 자체가 배우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공부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서 ‘배우인 내가 할 일이 뭔가, 오 선생님의 표현에 내가 뭘 해야 하는가’를 느끼는 겁니다. 스스로 느껴서 연구를 하니 발전 속도가 빠르고, 리더가 머물러 있지 않으니 구성원들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극단 목화가 배우들의 사관학교라는 평가를 받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체 없이 모두 함께 더불어 발전하는 거죠.”

—좋은 배우란 어떤 배우입니까?

“말을 꾸미지 않고 깨끗하게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해 주는 배우입니다. 이게 쉽지 않아요. 감정이나 억양을 만들거나 꾸미지 않고 그냥 편하게 대사를 해야 하는데, 배우들은 무언가를 자기가 표현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저는 배우가 100% 감정을 다 드러내지 않고, 어느 정도 암시만 주고 나머지를 관객이 상상하며 메우는 연기가, 그런 연극이 좋은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활 자체가 연극적”

정진각은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낙안군수 신호로 출연했다.

—간단하고 단순한 연기 말고 또 어떤 연기가 좋은 연기인가요?

“뭐든지 일류가 되면 동작이 단순해집니다. 태권도 고수든지 중국무술 고수든지 배구선수든지 농구선수든지. 딱 필요한 동작만 하는 거죠. 연기도 가장 절제된 움직임과 필요한 말만 깨끗하게 전달하면 나머지는 관객이 알아서 채웁니다. 모든 관객이 각자 자기의 연극을 만들어서 극장을 나서는 거죠. 버려야 합니다. 배우가 자꾸 주려고 하면 안 받아먹어요. 버릴 때 먹습니다, 관객들은. 그러니까 어려운 겁니다. 배우는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많은 것을 전달하려고, 먹여주려고 애쓰는데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아, 그런 상황은 정말 아득하고 괴롭죠. 툭툭 버리는 맛을 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사가 ‘저놈 나쁜 놈’이라면 단어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발음하는 것이 의미전달에 유리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슬쩍 지나가듯이, 들릴락말락 하게 대사를 하는 편이 오히려 관객에게 더 잘 먹힙니다. 버리면 관객이 주워 먹습니다. 줄 때는 정확히 주고 그러나 버릴 건 버리고,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연기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정진각에게 연극은 무엇입니까?

“제 생활 자체죠, 뭐. 생활의 모든 걸 연극과 연관 짓습니다. 예컨대 지나가면서 재미있는 광경을 보잖아요. 그럼 저걸 어느 작품 어디에 활용하면 좋겠네. 저도 모르게 생각이 그렇게 가는 겁니다.

또 하나, 우리의 생활 자체가 연극적이잖아요. 예의, 에티켓이라는 게 뭡니까? 자기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 말고, 절차와 제도에 따라 표현하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렇다면 속마음과 예의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행위가 바로 연기 아닐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극이란 뭐냐?’라는 질문이 이상한 겁니다. 다들 이미 다 생활 속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데, 집에서도 다들 연극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

공자는 학즉불고(學則不固)라고 했다. 필자는 이 말을 ‘배운 사람은 고루하지 않으며 따라서 유연한 사람이다’라고 새겼다. ‘버려야 산다’는 정진각의 연기론은, 말하자면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위한 선행(先行)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든 것을 만들려 하지 말고 버릴 것은 버려서 관객과 상생하라는 체험담도 연극 외적(外的)으로 쓸모가 많을 듯했다. 버려야 산다. 그는 여전히 테이블 저편에서 하회탈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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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의 美學’ 鄭鎭珏

“버릴 건 버리는 게 좋은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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