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고·재난 대비하는 프레퍼(Prepper)族, 미국에만 300만명 이상
⊙ 가정과 학교, 회사에 자신만의 휴대용 생존팩(EDC) 비치하면 위기 발생시 긴요
⊙ “소방방재청의 위기 대처 안내문은 아무 도움 안 돼… 재난 발생하면
차라리 미국 정부 홈페이지 참조해야”
禹昇爗
⊙ 41세. 다음(Daum) 카페 ‘생존21c’ 운영자
⊙ 2012 보안엑스포, 2013 방재산업전, 2014 세이프서울 전시회 참가.
⊙ 저서: 《재난시대 생존법》.
⊙ 가정과 학교, 회사에 자신만의 휴대용 생존팩(EDC) 비치하면 위기 발생시 긴요
⊙ “소방방재청의 위기 대처 안내문은 아무 도움 안 돼… 재난 발생하면
차라리 미국 정부 홈페이지 참조해야”
禹昇爗
⊙ 41세. 다음(Daum) 카페 ‘생존21c’ 운영자
⊙ 2012 보안엑스포, 2013 방재산업전, 2014 세이프서울 전시회 참가.
⊙ 저서: 《재난시대 생존법》.
‘프레퍼족’의 존재를 떠올린 건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최경환노믹스’의 상당부분이 부동산 시장 불 지피기에 할애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전보다 더 자주 보이는 아파트 분양 안내 전단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부동산 투기꾼을 맨 왼쪽에 두고 일렬로 사람들을 배열한다면 제일 오른쪽, 그러니까 투기꾼의 대척점엔 어떤 사람을 둘 수 있을까. 생각의 끝에 떠오른 단어가 바로 ‘프레퍼(Prepper)족’이었다.
프레퍼족은 재난이나 사고 가능성에 대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미국에만 300만명이 있다는 추정 통계가 있지만, 사실 프레퍼족이 몇 명이나 있는지 정확히 아는 건 불가능하다. 드러난 사람들보다 자신이 프레퍼족임을 공개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프레퍼족이 주목받았다. 해외에서는 프레퍼족이 주목받은 지 꽤 오래됐다. 드라마나 영화, 게임 등의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그 영향력이 파급되기도 했다.
2010년 미국에서 방영하기 시작한 드라마 <워킹데드(Walking dead)> 시리즈는 미국 케이블방송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다. 사람이 좀비로 변하는 원인불명의 병이 창궐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지키며 살아나가는 내용의, 어찌 보면 단순한 플롯의 드라마에 미국에서만 1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열광했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Last of us)’는 전 세계적으로 800만 장 가까이 판매됐다. 역시 좀비로 넘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내용의 게임이다. 다큐멘터리 방송 채널인 ‘디스커버리’ 채널은 <인간 대 자연(Man vs Wild)>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주목을 받았다. 비슷한 맥락의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엔 <정글의 법칙>이 있다.
“어디서든 출구를 확인하라”
지난 7월 출간한 《재난시대 생존법》이라는 책은, 제목 그대로 재난에 대비해 재난 현장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저자인 ‘도시생존전문가’ 우승엽(禹昇爗)씨는 ‘생존21c’라는 인터넷동호회를 운영해 온 국내파 프레퍼다. ‘코난’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한다.
프로필 속 특전사 출신이라는 문구를 보며, 군복을 입고 목에는 망원경을 걸고, 양 허리에는 로프와 맥가이버칼이라도 차고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막상 만나 보니 호리호리한 체격에 목소리도 나직했다.
“<인간 대 자연>이나 <정글의 법칙> 같은 오지 생존은 프레퍼족이 다루는 분야 중 일부분에 불과해요. 프레퍼족들이 예상하는 재난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모임을 열어서 만나 보면 대단한 분들이 많아요. 생활 속 사건사고부터 북한의 전쟁 도발, 국제금융위기, 달러 폭락으로 인한 금본위제 부활, 기상 이변으로 인한 천재지변, 거리의 폭동까지 각자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재난에 집중해 연구를 하는 회원분이 많아요.”
우씨는 원래 회사원이었다. 취미로 프레퍼족 관련 동호회를 운영하다, 지난해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도심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정리한 원고를 썼다. 글을 들고 출판사 60여 군데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가 터진 직후 갑자기 출판사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단다. 본의 아니게 세월호 사고의 덕을 본 경우다. 말이 나온 김에 세월호 같은 사고에서 살아남는 법을 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제일 중요한 건 평소에 언제 어디서든 사고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 때도 ‘선내에 대기하라’는 선내방송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기댄 분들이 살아남으셨잖아요. 지난 8월 창원에서 사고를 당한 버스 승객분들 같은 경우도 정말 안타까운 경우예요. 단순히 ‘버스기사가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물이 점점 차오르니 버스에서 내려야겠다 판단하셨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우려되는 점이, 서비스직처럼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직업을 비롯해 많은 직업이 비정규직화됐잖아요. 그만큼 더 위험해졌다고 생각해요. 모두 그렇진 않겠지만, 그 자리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과 몇 년밖에 근무하지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위급상황에서 침착하게 대피를 지휘할 수 있을까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영화관이든 백화점이든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면 출구가 어딘지를 미리 알아두는 거예요. 사고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아는 길, 그러니까 자신이 들어온 입구로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입구 쪽으로 가면 건물 안을 뱅뱅 돌아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프레퍼족이라 밝히길 꺼려 하는 프레퍼족
—프레퍼족 하면 집안 곳곳에 잔뜩 음식물을 쌓아놓은 모습이 연상되는데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1년치 식량을 비축해 두고, 각종 생필품도 사서 두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프레퍼로서 어느 정도 등급이 올라갔다고 해야 할까요? 재난이 와도 제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예전처럼 비축해 두거나 하진 않아요.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요.”
—산속에 벙커를 만들어놓은 프레퍼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본 적이 있나요.
“동호회 회원들 중에도 따로 은신처를 마련해 놓은 분들이 꽤 계십니다. 직접 가보지는 않았어요. 친분이 있는 사이라도 은신처 같은 곳은 서로 묻거나 하지 않는 게 예의예요. 다른 사람들이 존재를 알고 있다면, 그게 어떻게 은신처인가요.
사실 프레퍼족들은 자신이 프레퍼라는 사실 자체를 공개하길 꺼려 합니다. 프레퍼라는 게 알려지면 주변에서 ‘너만 혼자 살려고 하느냐’는 비난부터, ‘재난이 나면 너희 집부터 가면 되지?’라는 반응까지 별별 말이 다 들려와요. 흥밋거리나 기인 취급은 물론이고, 무턱대고 ‘사회부적응자’나 ‘종말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방송 등 언론의 취재를 기피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재난이 발생하면 프레퍼로 알려진 사람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갈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요. 6개월 버틸 식량을 준비해 놨는데, 한 가정만 몰려와도 반으로 줄어들겠지요. 이런 경우를 알고 있어요. 친한 친구분들 몇 분이 돈을 각자 1000만원씩 모아서 지방의 모처에 땅을 사서 은신처를 마련했어요. 그런데 은신처에 대한 이견이 생겨서 결국 그 모임이 깨지더라고요. 재난이 발생하면 자신의 가족밖에 믿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재난이 발생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봅니까.
“저는 전력이 끊기는 ‘블랙아웃’을 우려합니다. 지난해 여름에도 블랙아웃 가능성이 높았잖아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재난입니다. 사실 어떤 재난이든 발생 전에 징조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징조가 보이면 비상식량을 들고 한강 이남으로 가족을 피신시키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변 프레퍼들 중에 실제로 사고 중에 스스로를 지킨 경우도 있나요?
“여러 에피소드가 있어요. 이번 추석 때 큰일을 당할 뻔한 동료를 구한 분이 계세요. 저희 카페에 응급처치법 동영상이 있거든요. 이걸 보고 하인리히 응급처치법을 익혀 놓았대요. 기도 폐쇄가 발생했을 때 처치하는 방법이에요. 추석 연휴 때 근무해야 해서 회사에 나왔는데 동료가 떡을 먹다가 목에 걸린 거예요. 이분이 얼른 달려가서 응급처치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회원 중에는 해외에 사는 교포들도 많습니다. 브라질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분은 약탈을 당할 뻔했는데 총과 방탄복을 미리 준비한 덕분에 무사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2012년에 이탈리아 콩코르디아호 침몰 사건 당시 탑승하셨던 분도 있습니다. 이분은 배가 자꾸 기우니까 이상하다 싶어서 휴대폰 어플로 선체가 기울어지는 각도를 쟀다고 하더라고요. 계속 기울어지니까 대피 준비를 했고, 결국 살아나왔어요.”
신용카드는 위기시 무용지물
—재난 대비 모임이라고 하면, 특이한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회사원, 작가, 소방관, 경찰 등등 직업군이 다양합니다. 가끔 종말론자나 독특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분들이 동호회에 가입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분들은 ‘내가 환상을 봤는데 몇 월 며칠에 북한에서 미사일을 쏠 것이다’라고 근거 없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천재지변에 대한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엄격하게 대응해요. 프레퍼는 여러 기술을 익혀 생활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사고나 재난을 대비하는 사람들이지, 단순히 재난만 생각하는 종말론자가 아니거든요.”
—일반 가정에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꼭 갖춰놓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만약 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물과 음식이겠지요. 그렇다고 거창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고 집안 구석에 생수를 한두 달치 사다 놓고, 평소 장을 보면서 통조림이나 라면 등을 몇 개씩 더 사두면 좋겠지요. 거리 폭동이 언뜻 먼 얘기 같겠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미국 미주리주에서는 지난달에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나요?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신용카드는 무용지물이라는 점도 알아둬야 합니다. 현금이 필요한 거죠. 실제로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신용카드를 들고 상점에 갔다가 빈손으로 나온 경우도 있었어요.
반대로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사고가 발생했거나 급히 이동해야 하는 경우, 이럴 때를 대비해 평소에 꼭 챙겨야 하는 물건들을 한데 모아서 비닐봉투에 담아 여행용 가방에 담아두는 편이 좋아요. 여행용 가방은 일 년에 몇 번 안 쓰잖아요. 예를 들면 중요한 문서나 사진, 기념품 등등 꼭 필요한 것들을 그 안에 넣어두고, 가족에게 위급한 상황이 오면 저 가방만 챙기면 된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회사에 다니는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평소에 잘 안 쓰는 배낭이 있다면 그 안에 편한 신발, 방한복, 크래커 같은 과자 등을 넣어서 책상 밑에 놓아두면 일단 기초적인 대비가 되겠지요. 특히 여성들은 하이힐에 치마 같은 불편한 복장으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재난에 대비해 휴대용으로 꾸려놓은 생존물품 가방을 EDC(Everyday Carry)백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런 식으로 평소에 차근차근 EDC를 꾸려놓으면 됩니다.”
재난 영화 감상도 도움
—프레퍼가 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네요.
“생존 준비가 거창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침착함을 잃지 않는 거예요. 평소에 재난 영화를 봐두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재난 영화를 보면 위기 상황에서 군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떻게 패닉 상태에 빠지는지 배울 수 있어요. 관찰해 뒀다가 위기가 닥치면 반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예를 들어 나이트클럽이나 노래방 같은 곳에서 사고가 나면 일시에 모든 사람이 출구 쪽으로 몰리잖아요. 이럴 때는 잠시 뒤로 물러서는 게 더 안전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전국 곳곳에 재난 체험관이 있어요. 주말에 가족과 나들이 삼아 놀러가서 재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익혀두는 것도 비상시에는 큰 도움이 됩니다.
아파트 사시는 분들은 완강기 사용법을 익혀두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의외로 고층에 살면서도 완강기 사용법을 모르는 분이 꽤 많아요. 저희 회원분 중에 한 분이 본인의 아이들에게 알려주려고 완강기를 들고 주말에 놀이터로 나갔대요. 거기서 연습을 하는데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몰려오더랍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알려줬더니 이제는 아파트 주민들이 몰려와서 졸지에 주민들 대상으로 완강기 사용법 강의를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한 번이라도 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쉽게 겪을 수 있는 사고에 의외로 허둥대는 경우가 많겠네요.
“재난 극복에 대해 생각하며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난에 대해 상당히 이중적인 것 같아요. ‘북한에서 핵미사일 쏘면 그냥 죽어야지 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이지리아에서 외국인이 한 명 한국에 들어왔다는 뉴스에 피를 토하며 우려의 말을 하는 걸 봤어요.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겨울마다 강원도 등의 지역에서 대설 때문에 도로에 차들이 고립됐다는 뉴스가 나오지요. 자동차 타이어에 이상이 생기는 일은 그보다 더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타이어 교체하는 방법 모르시는 분 많잖아요. 평소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타이어 교체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에볼라 바이러스나 비행기 추락을 걱정하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기대처 요령 美사이트 참조해야
—평소에 재난에 대비하는 교육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솔직히 우리나라 정부는 그런 점에서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소방방재청에서 홈페이지에 게시해 놓은 재난 발생 시 행동요령 문서는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별 도움이 안 돼요. 저희는 주변분들에게 차라리 미국의 국토안보부 산하 연방재난관리청 웹사이트(www.ready.gov)를 참고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에는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 애완동물을 대피시키는 방법도 따로 안내하고 있어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재난별로 대피 매뉴얼을 꼼꼼히 정리하고 있어요.
미국에 사는 회원의 얘기를 들어보니, 미국은 학교에서 각 가정에 ‘오늘은 아이들에게 EDC 가방을 들려서 등교시켜라’라고 안내하기도 한다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한번씩 모의로 연습을 하는 거죠.”
—아이들에게 재난대비 교육을 시키는 게 무척 중요할 것 같습니다.
“시리아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내전이 길어지면서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아이들과 여자들입니다. 아이들을 공격하고 여자들은 강간하고…. 어떤 위기든지 위기가 길어지면 아이들과 여성들이 가장 위험해집니다.
제가 재난 대비 책을 쓰면서 또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싶은 게 바로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겁니다. 진짜 위기가 일어나면, 결국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집단이 더 오래 살아남게 되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믿고 자원을 공유하고 서로 손을 잡아주는 집단과 가족 단위로만 뭉쳐서 서로를 경계하는 집단 중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까요.”
우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기자는 다급해졌다. 생각해 보니 기자의 집에는 크래커는커녕 생수도 몇 병 없었다. 고뇌하는 표정을 보며 우씨는 “심각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며 당부했다.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이것도 산다, 저것도 산다 나섰다가 중간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분들을 여러분 봤어요. 그건 재난에 대비하는 사람의 진정한 자세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준비하면 돼요. 중요한 건,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갈 것만 같은 일상 속으로 언제든 사고나 재난이 끼어들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는 겁니다.”⊙
프레퍼족은 재난이나 사고 가능성에 대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미국에만 300만명이 있다는 추정 통계가 있지만, 사실 프레퍼족이 몇 명이나 있는지 정확히 아는 건 불가능하다. 드러난 사람들보다 자신이 프레퍼족임을 공개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프레퍼족이 주목받았다. 해외에서는 프레퍼족이 주목받은 지 꽤 오래됐다. 드라마나 영화, 게임 등의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그 영향력이 파급되기도 했다.
2010년 미국에서 방영하기 시작한 드라마 <워킹데드(Walking dead)> 시리즈는 미국 케이블방송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다. 사람이 좀비로 변하는 원인불명의 병이 창궐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지키며 살아나가는 내용의, 어찌 보면 단순한 플롯의 드라마에 미국에서만 1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열광했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Last of us)’는 전 세계적으로 800만 장 가까이 판매됐다. 역시 좀비로 넘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내용의 게임이다. 다큐멘터리 방송 채널인 ‘디스커버리’ 채널은 <인간 대 자연(Man vs Wild)>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주목을 받았다. 비슷한 맥락의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엔 <정글의 법칙>이 있다.
“어디서든 출구를 확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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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래시, 주머니칼, 호루라기, 미니방독면 등을 넣은 휴대용 생존팩(EDC). 자신만의 방식으로 꾸리면 된다. |
프로필 속 특전사 출신이라는 문구를 보며, 군복을 입고 목에는 망원경을 걸고, 양 허리에는 로프와 맥가이버칼이라도 차고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막상 만나 보니 호리호리한 체격에 목소리도 나직했다.
“<인간 대 자연>이나 <정글의 법칙> 같은 오지 생존은 프레퍼족이 다루는 분야 중 일부분에 불과해요. 프레퍼족들이 예상하는 재난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모임을 열어서 만나 보면 대단한 분들이 많아요. 생활 속 사건사고부터 북한의 전쟁 도발, 국제금융위기, 달러 폭락으로 인한 금본위제 부활, 기상 이변으로 인한 천재지변, 거리의 폭동까지 각자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재난에 집중해 연구를 하는 회원분이 많아요.”
우씨는 원래 회사원이었다. 취미로 프레퍼족 관련 동호회를 운영하다, 지난해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도심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정리한 원고를 썼다. 글을 들고 출판사 60여 군데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가 터진 직후 갑자기 출판사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단다. 본의 아니게 세월호 사고의 덕을 본 경우다. 말이 나온 김에 세월호 같은 사고에서 살아남는 법을 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제일 중요한 건 평소에 언제 어디서든 사고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 때도 ‘선내에 대기하라’는 선내방송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기댄 분들이 살아남으셨잖아요. 지난 8월 창원에서 사고를 당한 버스 승객분들 같은 경우도 정말 안타까운 경우예요. 단순히 ‘버스기사가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물이 점점 차오르니 버스에서 내려야겠다 판단하셨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우려되는 점이, 서비스직처럼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직업을 비롯해 많은 직업이 비정규직화됐잖아요. 그만큼 더 위험해졌다고 생각해요. 모두 그렇진 않겠지만, 그 자리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과 몇 년밖에 근무하지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위급상황에서 침착하게 대피를 지휘할 수 있을까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영화관이든 백화점이든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면 출구가 어딘지를 미리 알아두는 거예요. 사고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아는 길, 그러니까 자신이 들어온 입구로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입구 쪽으로 가면 건물 안을 뱅뱅 돌아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프레퍼족이라 밝히길 꺼려 하는 프레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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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터에도 위기를 대비한 생존팩을 준비해 놓으면 좋다. |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1년치 식량을 비축해 두고, 각종 생필품도 사서 두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프레퍼로서 어느 정도 등급이 올라갔다고 해야 할까요? 재난이 와도 제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예전처럼 비축해 두거나 하진 않아요.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요.”
—산속에 벙커를 만들어놓은 프레퍼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본 적이 있나요.
“동호회 회원들 중에도 따로 은신처를 마련해 놓은 분들이 꽤 계십니다. 직접 가보지는 않았어요. 친분이 있는 사이라도 은신처 같은 곳은 서로 묻거나 하지 않는 게 예의예요. 다른 사람들이 존재를 알고 있다면, 그게 어떻게 은신처인가요.
사실 프레퍼족들은 자신이 프레퍼라는 사실 자체를 공개하길 꺼려 합니다. 프레퍼라는 게 알려지면 주변에서 ‘너만 혼자 살려고 하느냐’는 비난부터, ‘재난이 나면 너희 집부터 가면 되지?’라는 반응까지 별별 말이 다 들려와요. 흥밋거리나 기인 취급은 물론이고, 무턱대고 ‘사회부적응자’나 ‘종말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방송 등 언론의 취재를 기피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재난이 발생하면 프레퍼로 알려진 사람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갈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요. 6개월 버틸 식량을 준비해 놨는데, 한 가정만 몰려와도 반으로 줄어들겠지요. 이런 경우를 알고 있어요. 친한 친구분들 몇 분이 돈을 각자 1000만원씩 모아서 지방의 모처에 땅을 사서 은신처를 마련했어요. 그런데 은신처에 대한 이견이 생겨서 결국 그 모임이 깨지더라고요. 재난이 발생하면 자신의 가족밖에 믿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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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에서는 여행용 가방을 이용해 생존팩을 꾸리면 편리하다. |
“저는 전력이 끊기는 ‘블랙아웃’을 우려합니다. 지난해 여름에도 블랙아웃 가능성이 높았잖아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재난입니다. 사실 어떤 재난이든 발생 전에 징조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징조가 보이면 비상식량을 들고 한강 이남으로 가족을 피신시키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변 프레퍼들 중에 실제로 사고 중에 스스로를 지킨 경우도 있나요?
“여러 에피소드가 있어요. 이번 추석 때 큰일을 당할 뻔한 동료를 구한 분이 계세요. 저희 카페에 응급처치법 동영상이 있거든요. 이걸 보고 하인리히 응급처치법을 익혀 놓았대요. 기도 폐쇄가 발생했을 때 처치하는 방법이에요. 추석 연휴 때 근무해야 해서 회사에 나왔는데 동료가 떡을 먹다가 목에 걸린 거예요. 이분이 얼른 달려가서 응급처치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회원 중에는 해외에 사는 교포들도 많습니다. 브라질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분은 약탈을 당할 뻔했는데 총과 방탄복을 미리 준비한 덕분에 무사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2012년에 이탈리아 콩코르디아호 침몰 사건 당시 탑승하셨던 분도 있습니다. 이분은 배가 자꾸 기우니까 이상하다 싶어서 휴대폰 어플로 선체가 기울어지는 각도를 쟀다고 하더라고요. 계속 기울어지니까 대피 준비를 했고, 결국 살아나왔어요.”
신용카드는 위기시 무용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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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 발생 시 신용카드는 무용지물이다. 여분의 현금을 준비해 두는 것도 재난 대비책의 하나다. |
“회사원, 작가, 소방관, 경찰 등등 직업군이 다양합니다. 가끔 종말론자나 독특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분들이 동호회에 가입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분들은 ‘내가 환상을 봤는데 몇 월 며칠에 북한에서 미사일을 쏠 것이다’라고 근거 없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천재지변에 대한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엄격하게 대응해요. 프레퍼는 여러 기술을 익혀 생활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사고나 재난을 대비하는 사람들이지, 단순히 재난만 생각하는 종말론자가 아니거든요.”
—일반 가정에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꼭 갖춰놓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만약 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물과 음식이겠지요. 그렇다고 거창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고 집안 구석에 생수를 한두 달치 사다 놓고, 평소 장을 보면서 통조림이나 라면 등을 몇 개씩 더 사두면 좋겠지요. 거리 폭동이 언뜻 먼 얘기 같겠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미국 미주리주에서는 지난달에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나요?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신용카드는 무용지물이라는 점도 알아둬야 합니다. 현금이 필요한 거죠. 실제로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신용카드를 들고 상점에 갔다가 빈손으로 나온 경우도 있었어요.
반대로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사고가 발생했거나 급히 이동해야 하는 경우, 이럴 때를 대비해 평소에 꼭 챙겨야 하는 물건들을 한데 모아서 비닐봉투에 담아 여행용 가방에 담아두는 편이 좋아요. 여행용 가방은 일 년에 몇 번 안 쓰잖아요. 예를 들면 중요한 문서나 사진, 기념품 등등 꼭 필요한 것들을 그 안에 넣어두고, 가족에게 위급한 상황이 오면 저 가방만 챙기면 된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회사에 다니는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평소에 잘 안 쓰는 배낭이 있다면 그 안에 편한 신발, 방한복, 크래커 같은 과자 등을 넣어서 책상 밑에 놓아두면 일단 기초적인 대비가 되겠지요. 특히 여성들은 하이힐에 치마 같은 불편한 복장으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재난에 대비해 휴대용으로 꾸려놓은 생존물품 가방을 EDC(Everyday Carry)백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런 식으로 평소에 차근차근 EDC를 꾸려놓으면 됩니다.”
재난 영화 감상도 도움
—프레퍼가 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네요.
“생존 준비가 거창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침착함을 잃지 않는 거예요. 평소에 재난 영화를 봐두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재난 영화를 보면 위기 상황에서 군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떻게 패닉 상태에 빠지는지 배울 수 있어요. 관찰해 뒀다가 위기가 닥치면 반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예를 들어 나이트클럽이나 노래방 같은 곳에서 사고가 나면 일시에 모든 사람이 출구 쪽으로 몰리잖아요. 이럴 때는 잠시 뒤로 물러서는 게 더 안전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전국 곳곳에 재난 체험관이 있어요. 주말에 가족과 나들이 삼아 놀러가서 재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익혀두는 것도 비상시에는 큰 도움이 됩니다.
아파트 사시는 분들은 완강기 사용법을 익혀두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의외로 고층에 살면서도 완강기 사용법을 모르는 분이 꽤 많아요. 저희 회원분 중에 한 분이 본인의 아이들에게 알려주려고 완강기를 들고 주말에 놀이터로 나갔대요. 거기서 연습을 하는데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몰려오더랍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알려줬더니 이제는 아파트 주민들이 몰려와서 졸지에 주민들 대상으로 완강기 사용법 강의를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한 번이라도 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쉽게 겪을 수 있는 사고에 의외로 허둥대는 경우가 많겠네요.
“재난 극복에 대해 생각하며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난에 대해 상당히 이중적인 것 같아요. ‘북한에서 핵미사일 쏘면 그냥 죽어야지 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이지리아에서 외국인이 한 명 한국에 들어왔다는 뉴스에 피를 토하며 우려의 말을 하는 걸 봤어요.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겨울마다 강원도 등의 지역에서 대설 때문에 도로에 차들이 고립됐다는 뉴스가 나오지요. 자동차 타이어에 이상이 생기는 일은 그보다 더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타이어 교체하는 방법 모르시는 분 많잖아요. 평소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타이어 교체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에볼라 바이러스나 비행기 추락을 걱정하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기대처 요령 美사이트 참조해야
—평소에 재난에 대비하는 교육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솔직히 우리나라 정부는 그런 점에서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소방방재청에서 홈페이지에 게시해 놓은 재난 발생 시 행동요령 문서는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별 도움이 안 돼요. 저희는 주변분들에게 차라리 미국의 국토안보부 산하 연방재난관리청 웹사이트(www.ready.gov)를 참고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에는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 애완동물을 대피시키는 방법도 따로 안내하고 있어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재난별로 대피 매뉴얼을 꼼꼼히 정리하고 있어요.
미국에 사는 회원의 얘기를 들어보니, 미국은 학교에서 각 가정에 ‘오늘은 아이들에게 EDC 가방을 들려서 등교시켜라’라고 안내하기도 한다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한번씩 모의로 연습을 하는 거죠.”
—아이들에게 재난대비 교육을 시키는 게 무척 중요할 것 같습니다.
“시리아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내전이 길어지면서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아이들과 여자들입니다. 아이들을 공격하고 여자들은 강간하고…. 어떤 위기든지 위기가 길어지면 아이들과 여성들이 가장 위험해집니다.
제가 재난 대비 책을 쓰면서 또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싶은 게 바로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겁니다. 진짜 위기가 일어나면, 결국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집단이 더 오래 살아남게 되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믿고 자원을 공유하고 서로 손을 잡아주는 집단과 가족 단위로만 뭉쳐서 서로를 경계하는 집단 중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까요.”
우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기자는 다급해졌다. 생각해 보니 기자의 집에는 크래커는커녕 생수도 몇 병 없었다. 고뇌하는 표정을 보며 우씨는 “심각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며 당부했다.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이것도 산다, 저것도 산다 나섰다가 중간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분들을 여러분 봤어요. 그건 재난에 대비하는 사람의 진정한 자세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준비하면 돼요. 중요한 건,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갈 것만 같은 일상 속으로 언제든 사고나 재난이 끼어들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