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는 한국인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상실감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이 회복해야 할 해외문화재 가운데 첫손가락입니다.”
⊙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경기 북부지역에서 약탈했을 것”
⊙ 1950년 무렵 일본 天理敎 2대 교주가 구입… 日 天理大 도서관에 收藏 중
⊙ 약탈 문화재에 대한 韓日 간 컨센서스 필요
金瓊任
⊙ 64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 연수.
⊙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주 튀니지 대사 역임. 現 중원대 석좌교수.
⊙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경기 북부지역에서 약탈했을 것”
⊙ 1950년 무렵 일본 天理敎 2대 교주가 구입… 日 天理大 도서관에 收藏 중
⊙ 약탈 문화재에 대한 韓日 간 컨센서스 필요
金瓊任
⊙ 64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 연수.
⊙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주 튀니지 대사 역임. 現 중원대 석좌교수.
⊙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전(前) 주(駐)튀니지 대사 김경임은 외무고시 첫 번째 여성 합격자이자 두 번째 여성 대사로 유명하다. 1983년 주 일본 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첫 해외 발령을 받아 주뉴욕 총영사관 영사, 주유네스코와 주인도 대사관 참사관을 거쳤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을 역임했다. 외교부 근무 시 사실상 유일한 문화 전문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중원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가 <몽유도원도>에 빠져든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진본을 본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이 서화가 전시됐는데, 길게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린 사람들에게 30초가 허용됐다. 황홀경에 빠졌던 30초가 끝나고 “비애와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天理)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우리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인 <몽유도원도>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일까. 김 전 대사는 <몽유도원도>가 조선에서 사라지고 수백 년이 흐른 뒤 일본에서 발견된 과정을 추적하며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삶을 복원해 갔다. 그리고 <몽유도원도>가 어떤 의미를 담고 탄생했으며 어떻게 역사의 물결 속에 유랑하게 됐는지 더듬었다.
“1893년 일본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몽유도원도>는 최고의 예술품이자 귀중한 우리 문화재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일본인 누구도 이 서화를 상실한 한국인의 슬픔을 모른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슬픔이었어요.”
그는 2013년 9월 <몽유도원도>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기록한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산처럼 刊)를 펴냈다. 4년여에 걸쳐 글을 썼다고 한다.
아름다움과 신비함 속에 담긴 슬픈 조선역사
1929년 무렵 소노다 사이지(園田才治)라는 사업가는 교토 대학에서 퇴임한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교수를 찾아가 한 고서화(古書畵)를 보여주었다. 나이토 고난은 당시 한국인으로 치면 구한말(舊韓末)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에 비견될 정도로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 나이토 교수는 단번에 이 서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한 편의 논문을 쓰는데, 이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1453) 이후 안평대군(본명 李瑢·1418~1453)과 함께 사라진 <몽유도원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최초의 글이었다. 김 전 대사의 말이다.
“당시 나이토 고난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고문으로 위촉돼 있었습니다. 소노다 사이지의 방문이 있고 얼마 후에 나이토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5쪽짜리 논문을 썼어요. 이 짧지만 중요한 글은 일본 월간지 《동양미술》(1929년 9월호)에 발표됐지요.”
나이토 교수의 글을 잠시 음미하자.
<…동방의 요순이라고 전해지는 성군 세종의 치하, 조선의 황금시대로서 한글이 창제되고 문물과 예술이 절정에 달했으며, (중략) 조선 고금을 통틀어 제일의 화가 안견과 서가(書家) 안평대군 그리고 조선 제일의 문사, 충신, 명신, 명인이 모두 등장하는 이 대작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 머지않아 두 파로 나뉘어 운명이 갈리지만, 이 작품은 곧 닥칠 화란의 징후를 모르는 채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사사(賜死)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이 서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정확하게 466년 만이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31년 3월 22일 도쿄 우에노 공원에 설립된 도쿄부 미술관에서 일반인에게 <몽유도원도>가 공개됐다. 이 전시는 조선 전(全) 역사에 걸친 미술품이 고루 전시됐는데, 소노다 사이지가 <몽유도원도>를 출품한 것이다. 이 전시에서 가장 찬사를 받은 <몽유도원도>는 조선 최고의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역사적 예술품이었다.
이 전시회의 실무를 맡았던 우경(友鏡) 오봉빈(嗚鳳彬·1893~납북)은 <몽유도원도>를 보고 그 애절한 소감을 《동아일보》(1931년 4월 10일자)에 실었다.
<…이것은 조선에 있어 둘도 없는 국보입니다. 금번 명화전의 최고 호평입니다. 일본 문부성에서 국보로 내정하고 가격은 3만원가량입니다. 내 전 재산을 경주하여서라도 이것을 내 손에 넣었으면 하고 침만 삼키고 있습니다. 나는 수십 차례나 보면서 단종애사를 재독하는 감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만은 꼭 내 손에, 아니 조선 사람의 손에 넣었으면 합니다.…>
김 전 대사는 “나이토 고난이 <몽유도원도>를 처음 보고 걸작 예술품으로 평가했다면 오봉빈은 <몽유도원도>에서 조선의 슬픈 역사를 먼저 보았다”고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8년 11월부터 1929년 12월까지 1년 넘게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연재, 큰 호응을 얻었었다.
최고의 화가와 조선의 守成을 이룬 주역들
<몽유도원도>는 조선 개국 55년째가 되던 해, 즉 세종의 치세(治世)가 절정을 넘던 1447년에 그려졌다. 문화 군주였던 세종의 지휘 아래 유교 국가의 기반이 되는 각종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던 조선의 르네상스 시절이었다. 그의 말이다.
“정묘년(1437년) 4월에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소요하는 꿈을 꾸고 이를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하여 3일 만에 〈몽유도원도〉가 완성이 됩니다. 안평대군은 꿈속 박팽년과 함께 도원(桃園)의 입구에 도달해 무릉도원을 거니는데, 꿈의 배경은 1000년 전 동진(東晋)의 시인 도잠이 노래한 곳으로 음풍영월의 자연이 아니라 절의(節義)의 은거지였어요.”
김 전 대사는 “안평대군이 도원에 도달했다는 것은 도잠의 은일과 절의와 관련되어 있다”며 “왕자로서 활동해야 했던 현실정치에서 초연히 떠나겠다는 결의를 밝힌 것”이라고 했다.
왕자의 사생활이 엄격히 감시되던 당시로 볼 때, 무릉도원의 꿈을 그림과 찬문(讚文)으로 남기는 것은 세종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그림은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인 안견이 그렸다. 안견은 중국 여러 대가의 화풍에 능했고 또한 여러 화풍을 취합하여 자신만의 경지를 연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림을 완성한 뒤 안평대군은 <몽유도원기>를 썼으며 세종조 최고의 문사들을 ‘비해당’에 불러 찬문을 짓게 했다.
비해당(匪懈堂)은 안평대군의 당호(堂號), 즉 필명을 따서 지은 사저다. 1442년(세종 24년) 6월 세종이 직접 안평대군에게 당호를 내렸다. 비해는 ‘게으름 없이’라는 의미. 비해당은 지금의 인왕산 성곽 밑 수성동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비해당 대청 높이 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이 쓴 <도원기>를 보며 찬문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꿈, 그것도 무릉도원을 노닌 명망 높은 왕자의 꿈을 소재로 한 전대미문의 시제(詩題)는 문인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을 겁니다.”
유학자들의 필수 교양서였던 《열자》《장자》 등 도가(道家)의 책을 통해 꿈과 이상향은 익숙한 주제였을 것이다. 유학자들에게 꿈을 통한 선계(仙界)의 이상향은 억눌린 현실의 해방구였고 실패에 대한 현실의 도피처였을지 모른다. 찬문을 쓴 21명은 당대를 주름잡던 면면이다. 박팽년·성삼문·신숙주·박연·김종서·서거정·정인지·이현로·최항 등이 그들이다.
“<몽유도원도>에 찬문을 쓴 이는 21명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세종이 지극히 총애했던 사람들이고, 최고의 재능을 가졌으며, 조선의 수성(守成)을 이룬 주역들이라는 점입니다. 또 안평대군과 각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죠.”
계유정난과 안평대군의 죽음
세종이 세상을 뜨고 문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1450년 무렵) 우연히 창의문(彰義門·도성의 북문) 밖 소나무 숲길을 걷던 안평대군은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보게 된다. 꿈에 본 도원을 3년 만에 현실에서 만난 것이다.
“안평대군은 북악산 뒤쪽 어느 곳에 서너 칸의 작은 집을 짓고 여기다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무계란 무릉도원 계곡이란 뜻이었어요. 결국 안평대군의 꿈은 〈몽유도원도〉라는 그림과 찬문, 무계정사의 공간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도원의 꿈은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다. 1453년(단종 1년)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반역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려던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을 철퇴로 주살하고, 안평대군은 성녕대군의 저택에서 체포해 강화의 교동도로 이송했다.
“안평대군이 사사되고 그의 유체가 어떻게 됐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절해고도에서 죽었으니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을지도 몰라요. 오늘날 안평대군의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이 없으니 비석이나 묘표, 비문도 있을 수 없고, 아무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어요.”
당시 안평대군의 나이는 36세. 안평대군은 왕실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서도 삭제됐고, 직계가족은 노비가 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안평대군의 학문과 예술, 인생의 현장이었던 비해당, 무계정사도 사라졌고 그를 기억하고 추모할 길도 사라졌습니다. 서울 인왕산 수성동 계곡의 비해당은 기린교라는 천연 돌다리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고, 북악산 뒤쪽 무계정사 터에는 ‘무계동’이라는 바위만 남아 있어요. 바위 뒤에는 퇴락한 가옥 한 채가 흉물로 남아 이곳이 꿈에 본 아름다운 무릉도원 터였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어요.”
엄청난 사화를 겪으며 <몽유도원도>는 어떻게 됐을까. 이 대형 서화가 안평대군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몽유도원도>는 1893년 11월 2일 자로 일본 정부가 발급한 감사증(鑑査證·우수 예술품이라는 일본 정부의 인증서)이 첨부되어 있다. 이 증서에는 <몽유도원도>를 소장해 온 원래 소유자가 가고시마의 사쓰마번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에 발급된 것으로 돼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황실박물관을 건립하려고 소장품 확보를 위해 전국적인 보물 조사를 했어요. 이즈음, 1893년 <몽유도원도>가 일본 정부에 등록되는데, 이는 계유정난 이후 400년 만에 시마즈 가문의 비장(秘藏)을 뚫고 세상에 나온 것이었어요.”
<몽유도원도>와 시마즈 요시히로
<몽유도원도>는 상당한 크기의 대형 서화(37.8×106.5cm)다. 오늘날까지 큰 파손 없이 전해진다는 사실이 의아스럽다. 계유정난의 화를 입지 않고, 난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안전한 장소에서 귀중하게 보관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강 북쪽 경기도 고양시 부근 벽제관(중국 사신이 한성에 들어오기 전 잠시 머물던 곳)에서 동쪽으로 5리 정도 들어가면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대자산(大慈山)이 있다. 산 아래 골짜기에 태종이 요절한 막내아들 성녕대군의 능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대자암(大慈庵)이 있었다고 한다.
김 전 대사는 “대자암은 당시 상주 승려가 120명이나 될 정도로 선종(禪宗) 최대의 사찰이었으나 유교 국가의 명분 때문에 사찰이란 명칭 대신 조그만 암자라는 느낌이 들도록 조선 초에는 대자암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자암은 왕실의 원찰(願刹)과 다름없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안평대군이 직접 이 사찰에 걸린 세 개의 편액(대자암, 해장전, 백화각)의 글씨를 쓰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50년 4월 10일 문종실록)
“안평대군은 문종의 명복을 빌면서 소헌왕후와 세종의 승하 때와 마찬가지로 불경을 쓰고 불상을 조성하는 등 많은 보물을 혼전(魂殿)에 봉헌했을 것입니다. <몽유도원도>도 대자암에 봉헌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녀는 “성녕대군과 태종 부부, 세종 부부와 문종의 명복을 빌던 대자암은 문종 대에 안평대군의 감독으로 중건됐다는 기록도 있다”고 말했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와 그의 서화 소장품이 계유정난 이후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요. <몽유도원도>가 사라진 시기는 정난이 일어난 직후가 아니라 그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겁이다. 안평대군은 사직의 안녕을 위한 염원을 담은 <몽유도원도>를 대자암에 봉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몽유도원도>가 시마즈 가문의 손에 들어간 것일까. 김 전 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로 참전한 시마즈가의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가 <몽유도원도>를 약탈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임란 관련 일본 자료라 할 수 있는 《가고시마 현사》를 보면, 시마즈 요시히로가 1592년 5월 18일 ‘보천’에 주둔하다 ‘영평(현재 포천 영평에는 미2사단 사격장이 들어섰다)’으로 옮겨서 주둔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조선시대 경기지역 지도를 볼 때 ‘보천’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천이란 포천을 가리킨 것이거나 양주 부근의 천보산을 말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확인되지는 않아요.
시마즈 요시히로는 서울에서 약탈을 못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출병 총대장 우키아 히데이에가 서울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몽유도원도>를 약탈한 곳은 서울 이외의 지역이었음이 확실해요.”
그녀는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란 초기에는 경기도 영평과 강원도 김화(철원)를 거점으로 활동했고 임란 후기에는 거제도를 거점으로 남해도 일대를 약탈했다”며 “<몽유도원도>가 남쪽 해안가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했다.
대자암과 ‘대자사 앞’
대자암은 계유정난 이후에도 건재했다. 대자암은 중종 조부터는 실록에 대자사(大慈寺)로 나오고, 명종실록에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까지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자암은 임진왜란 와중에 1593년 1월 평양에서 퇴각하던 왜군과 명나라 구원병 간에 벌어진 벽제관 전투 때 불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대자암은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대로인 의주로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대형 사찰이었던 만큼 임란 초기, 북쪽으로 행군하던 왜군에게 일찍 발견되어 약탈당했을 수도 있어요.”
김 전 대사는 <몽유도원도>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가고시마 현 사료》의 <사쓰마 번 구기잡록>에 수록된 시마즈 요시히사(시마즈 가문의 맏형)의 편지 수신인이 ‘대자사 앞’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이 대자사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머물고 있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는 요시히사의 편지를 찾았을 때 희열을 느꼈어요. 독실한 불교도였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으로 출병할 때 군승(軍僧)까지 대동했다고 합니다. 약 7개월간 경기 북부를 행동반경으로 삼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대자암을 찾아내 절 안팎을 샅샅이 약탈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녀는 “이후 <몽유도원도>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장을 돌았을 것이며, 1593년 12월부터 그가 사천 왜성에 머물다 1595년 5월 일시 귀국했을 때 사쓰마로 이전됐을 것으로 보인다”며 “귀국 이후 <몽유도원도>는 시마즈 가문의 가보가 되어 깊이 수장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무사이지만 유학자이기도 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유가 경전과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해요. 그는 조선의 글자를 만든 세종과 그 시대의 문화적 위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미 세종 때 사쓰마에 많은 사람이 오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세종실록>을 보면, 사쓰마의 한 승려가 ‘대장경판을 안 준다고 단식농성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김 교수의 계속된 이야기다.
“그때 세종이 신하에게 답을 물으니 ‘귀국에서 다 가져가서 없다’고 말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게,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제가 일본 외무성을 찾아가 도쿄올림픽 관련 자료를 요청하곤 했어요. 그땐 자료 복사하는 일이 아주 중요했어요. 그런데 한번은 외무성 관계자가 우리를 모욕주려고 그랬는지 ‘귀국에서 다 가져가서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속으로 ‘세종 시절 모욕을 되돌려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 天里敎 산하 대학이 보유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대자암 터는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김 교수에 따르면, 그 일대는 소박한 가옥들과 밭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자암 터였던 대자산 깊은 골짜기에는 큰 사찰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그윽한 분위기가 아직도 느껴져서 일말의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향토학자들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성녕대군 묘역을 중심으로 대자암 터를 추정했다. 근래 연구자들은 대자암 터를 대자동 성녕대군 묘역 부근에 있는 소현세자의 3남인 경안군 묘역 일대로 비정하는데, 이 일대에서 2008년 농기개발 중에 대자암 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됐다.
한편, <몽유도원도>는 시마즈가의 분가(分家)인 히오키 시마즈가에 보관되어 오다 1920년 세계 공황 당시 소유주가 바뀌었으며 도쿄의 고미술상 류센도(龍泉堂)에게 넘어갔다. 1950년 무렵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교 2대 교주인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이 구입해 오늘날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 서화는 오늘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세종대의 상징이며 증거입니다. 세종 시대의 시서화가 하나도 없는 현실에서 <몽유도원도>의 존재는 우리에게 아주 특별해요. 빼앗긴 <몽유도원도>는 한국인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상실감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이 회복해야 할 해외문화재 가운데 첫손가락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을까.
“<몽유도원도>는 굉장한 우리의 보물이자 역사이지만 불행히도 우리 손에 없습니다. 이 서화에 관해 우리 국민의 성숙한 관심만 있어도 언젠가 일본이 반환할 겁니다. 사실,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어요. 12세기 무렵, 기치비(吉備) 대신이 당나라에 들어가는 장면을 담은 시서화 <기치비대신입당회>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일본의 서화 수집가가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팔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조야(朝野)가 경악해 문화재법을 새로 만들 정도였어요. <기치비대신입당회>는 일본인이 판 것이지만, <몽유도원도>는 우리가 빼앗긴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반환 요구를 일본인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최근 일본 쓰시마에서 도난당한 뒤 국내로 반입한 고려불상 ‘금동보살좌상’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좌상은 고려시대(1330년)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만든 국보급 문화재임이 밝혀지고 일본에 되돌려줘선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한국정부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저는 되돌려줘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굳이 우리 문화재라고 해서가 아닙니다. 부석사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불사가 아닌가요. 한일 정부 간 임란 이전 약탈당한 문화재 환수에 대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봐요. 700년 전에 일어난 약탈국과 피약탈국 사이의 약탈 문화재 분쟁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죠. 유럽의 경우 민족이란 개념이 형성되기 전에 약탈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이전에도 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가 확립돼 있었어요.
한 가지 예를 들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완성됐어요. 그땐 유럽의 국가끼리 국경이란 개념이 없었어요. 다빈치가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완성한 <모나리자>를 프랑스 왕에게 거액을 받고 팔았고, 왕이 루브르박물관에 기증했지만, 나중 이탈리아가 반환운동을 벌였습니다. 부석사의 ‘금동보살좌상’을 두고 국내에서조차 장물(贓物)이니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어요. 약탈 문화재에 대한 한일 간 컨센서스 없이 되돌려줘선 안 됩니다.”⊙
그녀가 <몽유도원도>에 빠져든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진본을 본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이 서화가 전시됐는데, 길게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린 사람들에게 30초가 허용됐다. 황홀경에 빠졌던 30초가 끝나고 “비애와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天理)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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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임 전 대사가 쓴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
“1893년 일본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몽유도원도>는 최고의 예술품이자 귀중한 우리 문화재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일본인 누구도 이 서화를 상실한 한국인의 슬픔을 모른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슬픔이었어요.”
그는 2013년 9월 <몽유도원도>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기록한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산처럼 刊)를 펴냈다. 4년여에 걸쳐 글을 썼다고 한다.
아름다움과 신비함 속에 담긴 슬픈 조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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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대에 발견된 안평대군 이용의 ‘7언 절구’. |
그리고 한 편의 논문을 쓰는데, 이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1453) 이후 안평대군(본명 李瑢·1418~1453)과 함께 사라진 <몽유도원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최초의 글이었다. 김 전 대사의 말이다.
“당시 나이토 고난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고문으로 위촉돼 있었습니다. 소노다 사이지의 방문이 있고 얼마 후에 나이토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5쪽짜리 논문을 썼어요. 이 짧지만 중요한 글은 일본 월간지 《동양미술》(1929년 9월호)에 발표됐지요.”
나이토 교수의 글을 잠시 음미하자.
<…동방의 요순이라고 전해지는 성군 세종의 치하, 조선의 황금시대로서 한글이 창제되고 문물과 예술이 절정에 달했으며, (중략) 조선 고금을 통틀어 제일의 화가 안견과 서가(書家) 안평대군 그리고 조선 제일의 문사, 충신, 명신, 명인이 모두 등장하는 이 대작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 머지않아 두 파로 나뉘어 운명이 갈리지만, 이 작품은 곧 닥칠 화란의 징후를 모르는 채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사사(賜死)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이 서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정확하게 466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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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토 고난. |
이 전시회의 실무를 맡았던 우경(友鏡) 오봉빈(嗚鳳彬·1893~납북)은 <몽유도원도>를 보고 그 애절한 소감을 《동아일보》(1931년 4월 10일자)에 실었다.
<…이것은 조선에 있어 둘도 없는 국보입니다. 금번 명화전의 최고 호평입니다. 일본 문부성에서 국보로 내정하고 가격은 3만원가량입니다. 내 전 재산을 경주하여서라도 이것을 내 손에 넣었으면 하고 침만 삼키고 있습니다. 나는 수십 차례나 보면서 단종애사를 재독하는 감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만은 꼭 내 손에, 아니 조선 사람의 손에 넣었으면 합니다.…>
김 전 대사는 “나이토 고난이 <몽유도원도>를 처음 보고 걸작 예술품으로 평가했다면 오봉빈은 <몽유도원도>에서 조선의 슬픈 역사를 먼저 보았다”고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8년 11월부터 1929년 12월까지 1년 넘게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연재, 큰 호응을 얻었었다.
최고의 화가와 조선의 守成을 이룬 주역들
<몽유도원도>는 조선 개국 55년째가 되던 해, 즉 세종의 치세(治世)가 절정을 넘던 1447년에 그려졌다. 문화 군주였던 세종의 지휘 아래 유교 국가의 기반이 되는 각종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던 조선의 르네상스 시절이었다. 그의 말이다.
“정묘년(1437년) 4월에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소요하는 꿈을 꾸고 이를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하여 3일 만에 〈몽유도원도〉가 완성이 됩니다. 안평대군은 꿈속 박팽년과 함께 도원(桃園)의 입구에 도달해 무릉도원을 거니는데, 꿈의 배경은 1000년 전 동진(東晋)의 시인 도잠이 노래한 곳으로 음풍영월의 자연이 아니라 절의(節義)의 은거지였어요.”
김 전 대사는 “안평대군이 도원에 도달했다는 것은 도잠의 은일과 절의와 관련되어 있다”며 “왕자로서 활동해야 했던 현실정치에서 초연히 떠나겠다는 결의를 밝힌 것”이라고 했다.
왕자의 사생활이 엄격히 감시되던 당시로 볼 때, 무릉도원의 꿈을 그림과 찬문(讚文)으로 남기는 것은 세종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그림은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인 안견이 그렸다. 안견은 중국 여러 대가의 화풍에 능했고 또한 여러 화풍을 취합하여 자신만의 경지를 연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림을 완성한 뒤 안평대군은 <몽유도원기>를 썼으며 세종조 최고의 문사들을 ‘비해당’에 불러 찬문을 짓게 했다.
비해당(匪懈堂)은 안평대군의 당호(堂號), 즉 필명을 따서 지은 사저다. 1442년(세종 24년) 6월 세종이 직접 안평대군에게 당호를 내렸다. 비해는 ‘게으름 없이’라는 의미. 비해당은 지금의 인왕산 성곽 밑 수성동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비해당 대청 높이 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이 쓴 <도원기>를 보며 찬문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꿈, 그것도 무릉도원을 노닌 명망 높은 왕자의 꿈을 소재로 한 전대미문의 시제(詩題)는 문인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을 겁니다.”
유학자들의 필수 교양서였던 《열자》《장자》 등 도가(道家)의 책을 통해 꿈과 이상향은 익숙한 주제였을 것이다. 유학자들에게 꿈을 통한 선계(仙界)의 이상향은 억눌린 현실의 해방구였고 실패에 대한 현실의 도피처였을지 모른다. 찬문을 쓴 21명은 당대를 주름잡던 면면이다. 박팽년·성삼문·신숙주·박연·김종서·서거정·정인지·이현로·최항 등이 그들이다.
“<몽유도원도>에 찬문을 쓴 이는 21명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세종이 지극히 총애했던 사람들이고, 최고의 재능을 가졌으며, 조선의 수성(守成)을 이룬 주역들이라는 점입니다. 또 안평대군과 각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죠.”
계유정난과 안평대군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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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평대군의 사저인 ‘비해당’ 인근으로 추정되는 인왕사 밑의 기린교. 1994년 출간된 《서울육백년(六百年)》에 실린 기린교 돌다리. |
“안평대군은 북악산 뒤쪽 어느 곳에 서너 칸의 작은 집을 짓고 여기다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무계란 무릉도원 계곡이란 뜻이었어요. 결국 안평대군의 꿈은 〈몽유도원도〉라는 그림과 찬문, 무계정사의 공간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도원의 꿈은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다. 1453년(단종 1년)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반역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려던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을 철퇴로 주살하고, 안평대군은 성녕대군의 저택에서 체포해 강화의 교동도로 이송했다.
“안평대군이 사사되고 그의 유체가 어떻게 됐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절해고도에서 죽었으니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을지도 몰라요. 오늘날 안평대군의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이 없으니 비석이나 묘표, 비문도 있을 수 없고, 아무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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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부암동 구민회관 부근 언덕 아래에 있는 바위. 옛날에는 폭포수가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에는 ‘무계동’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안평대군이 아닌 누군가가 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
“안평대군의 학문과 예술, 인생의 현장이었던 비해당, 무계정사도 사라졌고 그를 기억하고 추모할 길도 사라졌습니다. 서울 인왕산 수성동 계곡의 비해당은 기린교라는 천연 돌다리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고, 북악산 뒤쪽 무계정사 터에는 ‘무계동’이라는 바위만 남아 있어요. 바위 뒤에는 퇴락한 가옥 한 채가 흉물로 남아 이곳이 꿈에 본 아름다운 무릉도원 터였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어요.”
엄청난 사화를 겪으며 <몽유도원도>는 어떻게 됐을까. 이 대형 서화가 안평대군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몽유도원도>는 1893년 11월 2일 자로 일본 정부가 발급한 감사증(鑑査證·우수 예술품이라는 일본 정부의 인증서)이 첨부되어 있다. 이 증서에는 <몽유도원도>를 소장해 온 원래 소유자가 가고시마의 사쓰마번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에 발급된 것으로 돼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황실박물관을 건립하려고 소장품 확보를 위해 전국적인 보물 조사를 했어요. 이즈음, 1893년 <몽유도원도>가 일본 정부에 등록되는데, 이는 계유정난 이후 400년 만에 시마즈 가문의 비장(秘藏)을 뚫고 세상에 나온 것이었어요.”
<몽유도원도>와 시마즈 요시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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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유도원도〉. |
한강 북쪽 경기도 고양시 부근 벽제관(중국 사신이 한성에 들어오기 전 잠시 머물던 곳)에서 동쪽으로 5리 정도 들어가면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대자산(大慈山)이 있다. 산 아래 골짜기에 태종이 요절한 막내아들 성녕대군의 능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대자암(大慈庵)이 있었다고 한다.
김 전 대사는 “대자암은 당시 상주 승려가 120명이나 될 정도로 선종(禪宗) 최대의 사찰이었으나 유교 국가의 명분 때문에 사찰이란 명칭 대신 조그만 암자라는 느낌이 들도록 조선 초에는 대자암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자암은 왕실의 원찰(願刹)과 다름없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안평대군이 직접 이 사찰에 걸린 세 개의 편액(대자암, 해장전, 백화각)의 글씨를 쓰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50년 4월 10일 문종실록)
“안평대군은 문종의 명복을 빌면서 소헌왕후와 세종의 승하 때와 마찬가지로 불경을 쓰고 불상을 조성하는 등 많은 보물을 혼전(魂殿)에 봉헌했을 것입니다. <몽유도원도>도 대자암에 봉헌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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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즈 요시히로. |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와 그의 서화 소장품이 계유정난 이후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요. <몽유도원도>가 사라진 시기는 정난이 일어난 직후가 아니라 그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겁이다. 안평대군은 사직의 안녕을 위한 염원을 담은 <몽유도원도>를 대자암에 봉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몽유도원도>가 시마즈 가문의 손에 들어간 것일까. 김 전 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로 참전한 시마즈가의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가 <몽유도원도>를 약탈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임란 관련 일본 자료라 할 수 있는 《가고시마 현사》를 보면, 시마즈 요시히로가 1592년 5월 18일 ‘보천’에 주둔하다 ‘영평(현재 포천 영평에는 미2사단 사격장이 들어섰다)’으로 옮겨서 주둔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조선시대 경기지역 지도를 볼 때 ‘보천’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천이란 포천을 가리킨 것이거나 양주 부근의 천보산을 말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확인되지는 않아요.
시마즈 요시히로는 서울에서 약탈을 못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출병 총대장 우키아 히데이에가 서울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몽유도원도>를 약탈한 곳은 서울 이외의 지역이었음이 확실해요.”
그녀는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란 초기에는 경기도 영평과 강원도 김화(철원)를 거점으로 활동했고 임란 후기에는 거제도를 거점으로 남해도 일대를 약탈했다”며 “<몽유도원도>가 남쪽 해안가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했다.
대자암과 ‘대자사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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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자암 터로 추정되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 아래 골짜기. 경안군 묘역과 최영 장군 묘역 사이의 땅이다. |
“대자암은 임진왜란 와중에 1593년 1월 평양에서 퇴각하던 왜군과 명나라 구원병 간에 벌어진 벽제관 전투 때 불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대자암은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대로인 의주로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대형 사찰이었던 만큼 임란 초기, 북쪽으로 행군하던 왜군에게 일찍 발견되어 약탈당했을 수도 있어요.”
김 전 대사는 <몽유도원도>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가고시마 현 사료》의 <사쓰마 번 구기잡록>에 수록된 시마즈 요시히사(시마즈 가문의 맏형)의 편지 수신인이 ‘대자사 앞’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이 대자사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머물고 있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는 요시히사의 편지를 찾았을 때 희열을 느꼈어요. 독실한 불교도였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으로 출병할 때 군승(軍僧)까지 대동했다고 합니다. 약 7개월간 경기 북부를 행동반경으로 삼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대자암을 찾아내 절 안팎을 샅샅이 약탈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녀는 “이후 <몽유도원도>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장을 돌았을 것이며, 1593년 12월부터 그가 사천 왜성에 머물다 1595년 5월 일시 귀국했을 때 사쓰마로 이전됐을 것으로 보인다”며 “귀국 이후 <몽유도원도>는 시마즈 가문의 가보가 되어 깊이 수장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무사이지만 유학자이기도 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유가 경전과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해요. 그는 조선의 글자를 만든 세종과 그 시대의 문화적 위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미 세종 때 사쓰마에 많은 사람이 오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세종실록>을 보면, 사쓰마의 한 승려가 ‘대장경판을 안 준다고 단식농성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김 교수의 계속된 이야기다.
“그때 세종이 신하에게 답을 물으니 ‘귀국에서 다 가져가서 없다’고 말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게,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제가 일본 외무성을 찾아가 도쿄올림픽 관련 자료를 요청하곤 했어요. 그땐 자료 복사하는 일이 아주 중요했어요. 그런데 한번은 외무성 관계자가 우리를 모욕주려고 그랬는지 ‘귀국에서 다 가져가서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속으로 ‘세종 시절 모욕을 되돌려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 天里敎 산하 대학이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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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서 약탈된 불상으로 추정되는 금동보살좌상. |
향토학자들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성녕대군 묘역을 중심으로 대자암 터를 추정했다. 근래 연구자들은 대자암 터를 대자동 성녕대군 묘역 부근에 있는 소현세자의 3남인 경안군 묘역 일대로 비정하는데, 이 일대에서 2008년 농기개발 중에 대자암 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됐다.
한편, <몽유도원도>는 시마즈가의 분가(分家)인 히오키 시마즈가에 보관되어 오다 1920년 세계 공황 당시 소유주가 바뀌었으며 도쿄의 고미술상 류센도(龍泉堂)에게 넘어갔다. 1950년 무렵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교 2대 교주인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이 구입해 오늘날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 서화는 오늘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세종대의 상징이며 증거입니다. 세종 시대의 시서화가 하나도 없는 현실에서 <몽유도원도>의 존재는 우리에게 아주 특별해요. 빼앗긴 <몽유도원도>는 한국인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상실감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이 회복해야 할 해외문화재 가운데 첫손가락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을까.
“<몽유도원도>는 굉장한 우리의 보물이자 역사이지만 불행히도 우리 손에 없습니다. 이 서화에 관해 우리 국민의 성숙한 관심만 있어도 언젠가 일본이 반환할 겁니다. 사실,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어요. 12세기 무렵, 기치비(吉備) 대신이 당나라에 들어가는 장면을 담은 시서화 <기치비대신입당회>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일본의 서화 수집가가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팔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조야(朝野)가 경악해 문화재법을 새로 만들 정도였어요. <기치비대신입당회>는 일본인이 판 것이지만, <몽유도원도>는 우리가 빼앗긴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반환 요구를 일본인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최근 일본 쓰시마에서 도난당한 뒤 국내로 반입한 고려불상 ‘금동보살좌상’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좌상은 고려시대(1330년)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만든 국보급 문화재임이 밝혀지고 일본에 되돌려줘선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한국정부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저는 되돌려줘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굳이 우리 문화재라고 해서가 아닙니다. 부석사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불사가 아닌가요. 한일 정부 간 임란 이전 약탈당한 문화재 환수에 대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봐요. 700년 전에 일어난 약탈국과 피약탈국 사이의 약탈 문화재 분쟁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죠. 유럽의 경우 민족이란 개념이 형성되기 전에 약탈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이전에도 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가 확립돼 있었어요.
한 가지 예를 들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완성됐어요. 그땐 유럽의 국가끼리 국경이란 개념이 없었어요. 다빈치가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완성한 <모나리자>를 프랑스 왕에게 거액을 받고 팔았고, 왕이 루브르박물관에 기증했지만, 나중 이탈리아가 반환운동을 벌였습니다. 부석사의 ‘금동보살좌상’을 두고 국내에서조차 장물(贓物)이니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어요. 약탈 문화재에 대한 한일 간 컨센서스 없이 되돌려줘선 안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