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金重權前 대통령비서실장 (下) : 월간조선

김영삼(金泳三·YS) 정권이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지구당 위원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민주자유당에서 통일국민당 소속 이학원(李學源) 의원을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서운했다. 노태우 정권의 마지막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어려운 정국 상황을 잘 조율하면서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일조(一助)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YS 측에서는 내가 좀 더 팔을 걷어붙이고 자기들을 도와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될 일이 아니었다. 민자당 경선(競選) 과정에서 이종찬(李鍾贊) 후보 측에서 당시 손주환(孫柱煥) 정무수석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문제를 삼았었고, 가을에 접어들면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하고 중립내각을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대선 기간 중에는 YS나 최형우(崔炯佑) 의원이 도와달라는 말을 많이 했다. YS부인 손명순 여사가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YS는 집권하자마자 내 지역구를 박탈해 버린 것이다.

미국 LA교민회장을 지낸 대학 친구인 L은 최형우 의원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내게 “안기부 파일에 네가 대권(大權)에 도전할 유망주(有望株)로 되어 있어서 견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비서실장이 된 후, 나는 그 파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도 후일 내가 김대중(金大中·DJ) 정권의 비서실장이 되어 인사를 갔을 때, “김 의원은 당시 민정당 젊은 의원들 가운데 주목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지역구를 빼앗긴 나는 단국대와 일본 도쿄(東京)대에서 후학(後學)들을 기르면서 재기(再起)를 노렸다. 하지만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울진·봉화 지역구는 최형우 의원이 내무부장관 시절 감사관으로 데리고 있던 김광원(金光元·15~17대 의원)씨에게 넘어갔다. 나는 무소속으로 출마를 강행했지만, 그곳은 무소속 간판으로는 당선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DJ와의 만남

DJ는 비서실장인 내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1997년 10월 말경이었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와는 정무수석 시절 일 때문에 만나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는 연락을 주고받은 일이 없었다. 서울 마포 서교호텔에서 DJ를 만났다. 류재건(柳在乾) 국민회의 총재 비서실장이 배석했다. DJ가 “도와달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저는 총재님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대선(大選)에서 DJ를 지지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YS 정권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는 호남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사정을 얘기하자 DJ는 반색을 하면서 “국민회의에 입당(入黨)해서 도와달라”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지역감정이 엄존하는 상황 아래서 DJ당으로 가는 것은 정치적 재기의 가능성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DJ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선 지역구에 내려가서 그동안 저를 지지했던 분들의 동의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셨던 노태우 전 대통령께도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다음 날 나는 울진으로 내려갔다. 차가 대관령을 넘을 즈음, 카폰이 울렸다. 안기부 모(某) 간부였다. 그는 “DJ를 돕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 안 그러면 정치생명이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역구에 내려가 지지자들에게 DJ의 제안을 설명했다. 모두 반대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DJ를 지지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이틀 후, 수감 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노 전 대통령을 만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의 행보가 그분의 종용에 의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大選전략자문회의

1997년 12월 대선 직후 대통령 당선자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사실상 대통령비서실장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1998년 2월 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내정자를 발표하는 모습.

DJ는 조선호텔 식당에 국민회의 수뇌부가 모인 자리에서 나를 인사시켰다. 조세형(趙世衡) 총재권한대행, 박상천(朴相千) 의원, 정동영(鄭東泳) 대변인, 이강래(李康來, 전 정무수석비서관·16~18대 의원) 기획특보 등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DJ는 내게 대선전략자문회의(일명 마포회의) 의장 자리를 맡겼다. 이미 국민회의에서는 대선기획본부(본부장 이종찬)가 한창 가동 중이었다. 자칫하면 옥상옥(屋上屋)이 될 우려가 있었다. DJ는 “대선기획본부 차원을 넘어서는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아달라”면서 당장 그날 회의부터 주재하라고 했다. 나는 “오늘은 첫날인데, 제가 어떻게 회의 진행을 하느냐. 조세형 권한대행께서 하는 게 좋겠다”고 사양했다.

대선전략자문회의는 마포 가든호텔(현 홀리데이인 서울) 14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강래 특보가 간사 역할을 했다. DJ는 회의 중에 나를 찾는 전화를 자주 걸어왔다. 막상 전화를 받아보면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나를 자주 찾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캠프 신참자(新參者)인 내게 힘을 실어주려는 세심한 배려였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선에서 DJ는 이회창(李會昌) 신한국당 후보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나는 그걸로 내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DJ캠프에 몸을 담기 전에 이미 충북 제천에 있는 세명대학교에서 총장직을 제안해 와서, 1998년 3월부터 총장직을 맡기로 약속을 해둔 터였다. 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도 나는 대선이 끝나면 대학으로 가겠다는 뜻을 표시했었다. 때문에 당(국민회의)과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서 당사에 나가지 않았다. DJ 당선 소식도 TV를 통해 접했다.

大選 다음 날 “비서실장 맡으라”

김대중 정권의 첫 청와대 비서진. 사진 왼쪽에서부터 조규향 사회복지수석, 문희상 정무수석, 강봉균 정책기획수석, 김중권 비서실장, 임동원 외교안보수석, 김태동 경제수석, 박지원 공보수석 내정자.

그런데 12월 20일 DJ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고생했다”면서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보자”고 말했다. 일산에 있는 DJ집으로 갔다. DJ는 대뜸 “새 정부의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는 “영호남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영남 출신 실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청와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다”면서, 이런 조건에 맞는 사람으로는 나만 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나는 사양했다.

“아직 대통령 취임까지 두 달이 남았는데, 제 경험상 인사(人事)는 유동적(流動的)인 것입니다. 오늘은 갑(甲)이라는 사람이 가장 적당해 보이더라도, 내일은 을(乙)이 적당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인사는 정치 상황을 보면서 해야 합니다. 또 노태우 정권의 정무수석을 한 제가 새 정부의 비서실장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DJ는 이틀 후에 또 불러서 실장직을 권유했다. 거듭 사양하자 12월 25일 다시 불러 “이미 결심했으니 더 이상 거절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12월 27일 당선자 비서실장으로 나를 임명했다고 공표했다. 당선자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언론에도 그렇게 보도됐다. 아마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 중에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결정된 것이 아닌가 싶다.

DJ는 나와 함께 일할 사람으로 이강래, 장성민(張誠珉, 전 국정상황실장·제16대 국회의원), 최규선(崔圭先), 박금옥(朴琴玉,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전 국회의장비서실장)씨 등을 지명했다.

최규선의 호소

이강래·박금옥·장성민씨 등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최규선씨의 경우가 문제였다. 본인은 조지 소로스와의 친분을 강조하고, 학력도 대단한 것처럼 주장했는데, 알아보니 문제가 있었다. 가정 사정이 복잡하고 학력도 불투명했다. 그래서 최규선씨를 플라자호텔로 불러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단 하루라도 청와대 경력을 쌓고 싶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DJ도 내 얘기를 듣고는 더 이상 그를 쓰라고 고집하지 않았다. 나중에 최규선씨가 DJ-노무현 정권 시절에 여러 의혹사건을 만들고 다닌 걸 상기하면 그때 그를 안 쓰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 DJ가 관저에서 점심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영부인 이희호 여사도 동석했다. 식사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말씀 드리겠다”고 했다.

“저는 오늘 어떻게 해서 제가 이 자리에 와 있는지 잘 모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마지막 공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욕심이 없습니다. 정열을 다해 대통령님을 돕겠습니다. 그리고 제게 피로감을 느끼신다면 언제든지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나는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으로 들어가면서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도록 집을 비워두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힘센 비서실장’

IMF사태 와중에 출범한 DJ 정부는 ‘작은 정부’ ‘작은 청와대’를 표방했다. 종전에 차관급이었던 민정수석비서관과 총무수석비서관이 각각 민정비서관, 총무비서관으로 직급이 낮추어져 비서실장 직속이 됐다. 종전의 사정(司正)비서관도 법무비서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실장 직속이 됐다. ‘힘센 비서실장’이라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YS 정권 시절에는 가신(家臣) 출신들이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 등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었다. 관료적 전문성이 필요한 자리도 그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랫동안 DJ를 따라다니면서 고생하던 동교동 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투어서 자기 사람들을 청와대에 밀어넣으려 했다. 나는 정무 파트는 국민회의에서 추천하는 사람들로 충원하되, 그 밖에 국정운영과 관련되는 부분들은 전문관료 출신들로 채웠다.

당시는 DJP 공동정부 시절이었다. 강창희(姜昌熙, 현 국회의장)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사무총장은 “공동정부 정신에 맞게 자민련 출신도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나는 “청와대에는 대통령과 혼(魂)이 같은 사람만 들어와야 한다”면서 거절했다. DJ에게도 그렇게 보고했다.

나는 YS 시절에 일부 직원들이 청와대 내에서 슬리퍼를 끌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청와대 기강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DJ도 실장인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우선 종전에 각 수석비서관이 언제든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었던 것을 반드시 나를 경유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수석비서관이 긴급한 상황에서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한 경우에는 사후(事後)에라도 반드시 내게 보고하라고 했다.

박지원 공보수석비서관의 경우 소관 업무에 관해 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보하거나, 청와대 돌아가는 이야기를 권노갑씨에게 전하기도 했다. 전날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를 여과 없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DJ가 내게 힘을 실어주자 어느 날 나를 찾아와서는 “청와대에서 근무하려면 실장님 뜻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DJ는 권노갑(權魯甲) 고문 등 동교동 가신들을 청와대로 불러서 “김 실장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잘 하고 있다”면서 나를 지원해 주라고 당부했다. 권 고문 등은 플라자호텔에서 나와 만나서 “대통령님의 뜻에 따라 돕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국정원장보다 먼저 대통령에게 보고

1998년 2월 22일 JP의 청구동 자택으로 찾아가 組閣人選 문제를 의논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총리, 감사원장,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배석하게 되어 있었다. 나도 그런 자리에 배석했는데, ‘DJP 공동정부 아래서 총리인 JP가 DJ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내가 있으면 두 분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또 두 분만이 나누어야 할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분이 만나는 자리에는 배석하지 않았다. 그러면 JP는 DJ를 만나고 나가는 길에 내 방에 들러 두 분이 나눈 이야기를 해주고 가곤 했다. DJ가 두 분 회동에 대해 내게 얘기해 주기도 했다.

전에는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보고하던 것도, 비서실장이 가장 먼저 보고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 다시 지은 지금의 청와대 건물은 단점이 하나 있다.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들이 본관이 아닌 별관에서 근무한다는 게 그것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수시로 참모들의 방에 들어가 그들의 등을 두드리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게 대통령과 참모들 간의 소통(疏通)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관에 실장과 수석비서관들이 근무할 공간을 만들 수 없을까 궁리했는데,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비서실장 방만이라도 본관에 마련하는 방안을 마련해 DJ에게 건의했다. 그러자 DJ는 가만히 말했다.

“그러면 실장을 두고 ‘부통령’ 소리가 나오지 않겠어요?”

잘못하면 큰 오해를 받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생각을 접었다.

정권을 빼앗긴 한나라당은 JP에 대한 총리 인준을 6개월이나 거부했다. IMF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정국이 표류했다. 나는 정국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나라당 국회의원들과 접촉했다. 그들에게 내가 아는 DJ의 진면목을 얘기해 주었다.

“나도 영남 출신이고, DJ에 대해 전투적이다, 신뢰할 수 없다,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모셔보니 참 합리적이고 귀가 열려 있는 분입니다. 도와주세요.”

그들은 나에 대한 개인적 신뢰 때문에 만남에 응하기는 했지만 쉽게 설득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면 DJ와의 식사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이들 가운데서 나중에 서정화(徐廷華, 12~15대 국회의원), 이강희(李康熙, 13·15대 국회의원), 이성호(李聖浩, 12~15대 국회의원·보건복지부 장관) 등은 국민회의로 옮겨갔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에서는 “총선 민의(民意)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총선 민의’라는 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정치인은 국정운영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서는 유연하게 변화하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DJ를 돕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동서화합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DJ의 의지도 확고했다. DJ의 이런 의지를 전하기 위해 나는 TK나 PK 지역으로 자주 강연을 나갔다. 물론 DJ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도 동서화합을 위한 것이었다. 1998년 4월, 박근혜 현 대통령이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직전이었다. DJ가 나를 불렀다.

“피해자인 살아 있는 대통령이 가해자인 돌아가신 대통령을 용서한다면, 동서화합의 징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나는 신현확(申鉉確) 전 총리, 김준성(金埈成) 전 부총리, 이원경(李源京) 전 외무장관, 정수창(鄭壽昌) 전 대한상공회의소 의장 등 TK원로들을 찾아가 DJ의 뜻을 전했다. 모두 선뜻 믿지 않았다. “DJ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쇼”라는 반응이었다. DJ는 이분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같이하면서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이들은 비로소 DJ의 진심을 믿게 되었다. 그해 5월 DJ는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나는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의원을 만나 DJ의 뜻을 전했다. 박근혜 의원도 고마워했다.

DJ, 총선 출마 권유

친인척 관리 담당 비서관을 통해 DJ의 아들들, 특히 2남 김홍업(金弘業, 제17대 국회의원)씨와 관련된 얘기들이 올라왔다. 박주선(朴柱宣, 16·18·19대 국회의원) 법무비서관이 “김홍업씨가 정부에 인사 관련 청탁을 한다는데,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박 비서관에게 “김홍업씨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면 다른 데 얘기하지 말고 내게 직접 얘기하라고 전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홍업씨가 직접 내게 그런 청탁을 해온 적은 없었다. 내가 실장으로 있는 동안은 친인척 비리가 특별히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호남 출신 인사가 후임 비서실장이 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졌고 결국 현직 대통령의 아들들이 구속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1999년 여름이 지나면서 DJ는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했다.

“김 실장, 꿈을 가지시오.”

“동서화합을 위해 더 큰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소?”

어느 날 DJ는 직설적으로 얘기했다. “김 실장, 국회의원을 하시오, 단 영남에서 당선되어야 합니다.”

내가 영남에서 당선되어 ‘영남 대표성’을 갖게 되면, 거기에 호남표를 더할 경우 대권 도전도 가능하다는 시사(示唆)로 받아들였다.

16표 차이로 惜敗

김상현 의원(왼쪽), 권노갑 국민회의 고문(가운데)과의 골프회동. 비서실장 시절 오랫동안 DJ를 모셨던 동교동 가신들과 유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래서 나는 1999년 12월 비서실장직을 사임하고 16대 총선에 나섰다. 대구 중구, 영덕-청송, 울진-봉화를 저울질해 보았는데, 영덕-청송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내가 출마하는 영덕-청송뿐 아니라, 안동, 영주, 울진-봉화를 잇는 경북 동북벨트에서 민주당(새천년민주당) 당선자를 내겠다는 욕심을 부렸다. 이를 위해 안동에서는 권정달(權正達)씨, 영주에서는 김진영 영주시장, 울진-봉화에서는 신정 울진군수에게 출마를 종용했다. 하지만 김진영 시장과 신정 군수는 출마를 고사했다.

나는 울진-봉화에 출마했는데, 결국 16표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기도 했지만, 운도 안 좋았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상대 후보를 15% 이상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일을 앞두고 동해안에 산불이 크게 났다. 산불이 확산되자 언론에서는 “울진 원전(原電)이 위험하다”고 대서특필(大書特筆)했다. 그 바람에 선거 당일에도 공무원들은 산불 진화(鎭火)에 동원됐다. 나중에 지역구에서는 “산불 때문에 2000~3000표는 기권표가 생겼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나는 16표 차이로 김광원 한나라당 의원에게 석패(惜敗)하고 말았다. 만일 그때 내가 민주당 깃발을 들고 영남권에서 당선됐다면, ‘노무현(盧武鉉) 시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선거 결과가 나온 후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DJ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DJ도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었다. DJ는 “더 큰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아쉽다. 실망 마라”고 했다. 16대 총선이 끝난 후 나는 정치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8·30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기재(金杞載, 총무처·행정자치부 장관·15·16대 국회의원) 의원이 찾아왔다. 최고위원 경선에 영남 몫 최고위원으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지지를 약속했다. 그런데 며칠 후 DJ가 전화를 걸어왔다. 영남 몫 최고위원으로 출마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김기재 의원을 지지하기로 했다면서 사양했지만, DJ는 “김기재 의원으로는 영남을 대변할 수 없다”면서 출마를 강권했다.

결국 나는 거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최고위원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1위는 한화갑(韓和甲, 14~17대 국회의원) 의원, 2위는 이인제(李仁濟) 의원이었다. 임명직인 대표최고위원은 서영훈(徐英勳) 선생이 맡았다.

그해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아세안+3’ 회의가 열렸다. 청와대에서 나도 그 회의에 동행하라는 연락이 왔다. 대통령의 정상(頂上)외교에 당 최고위원이 동행하는 것은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었다.

11월 25일은 내 생일이었다. 내 방에 대통령 이름으로 축하화환이 왔다. 후일 DJ가 서거한 후 빈소에서 만난 이정빈(李廷彬) 당시 외교통상부장관은 “그때 화환은 DJ가 직접 지시해서 보낸 것이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 DJ와 단둘이 식사를 했다. DJ는 정국 현황에 대해 일반적인 얘기를 하다가 “힘을 내서 당을 맡으라”고 했다. 순간 ‘아, 나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盧武鉉의 도전

2000년 12월 서영훈 대표의 뒤를 이어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됐다.

DJ는 귀국 직후인 2000년 12월 나를 당 대표에 임명했다. 나는 아직도 야생마 같은 야당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민주당을 ‘여당다운 여당’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DJ는 비서실장 시절과 마찬가지로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김 대표는 항상 당보다 앞서 생각한다”면서 나를 격려해 주었다.

2001년 5월 중국을 방문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나를 거의 국빈(國賓)에 준해 예우해 주었다. 아마 당내에서 차기 지도자를 배출하는 자기들 시스템에 비추어 나를 DJ의 후계자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내가 DJ의 후계자가 되는 일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우선 당내에서 반발이 있었다. 내가 대표가 되고 2~3일쯤 지났을 때,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이 기자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를 비판했다. 한마디로 내가 민자당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일개 장관이 당 대표를 비난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기자들에게 “노 장관이 취중(醉中)에 한 얘긴데,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노 장관은 “취중실수가 아니다”라고 반격을 가해왔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노 장관의 사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럼 노 장관이 사과를 하는 모양새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후 청와대에서 열린 회의에서 만난 노 장관은 절을 꾸벅하면서 “죄송하다”고 했다.

몇 달 후 노무현 장관은 지명직 최고위원이 됐다. 최고위원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노 최고위원은 다시 한 번 그때의 일을 사과했다. 나는 “다 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가 노 최고위원이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부산에 가서 강연을 하다 대선 도전 의사를 밝혔더니, 한 아주머니가 ‘지가 뭔데 대통령을 해’라면서 핀잔을 놓더군요. 하하하.”

그건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이었다.

黨務거부

10시간 당무거부 시위를 벌인 다음 날인 2001년 8월 28일 당4역회의에 참석,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01년 8월 8일, 주례보고차 청와대에 들어갔다. DJ는 보고를 받은 후 “10·25 재·보선 때 구로을(乙)에서 출마하라”고 권했다. 그 자리에는 한광옥(韓光玉) 비서실장도 있었다. DJ 앞에서 물러나온 후 한 실장은 “김 선배님, 대통령님의 뜻을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구로을에 출마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청와대 일각에서 “당 대표가 재·보선에 나섰다가 패하면 타격이 크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후 한광옥 실장이 만나자고 해서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만났다. 한 실장은 “여론조사를 해보니 (김 대표가) 뜨지를 않고 있다”면서 “다시 생각해 보시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누가 장난을 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런 장난을 치는지도 짐작이 갔다.

그해 3월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복귀한 후 당에서는 “대통령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할 사람”이라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당 소속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김근태(金槿泰) 의원은 “박 수석은 정국의 장애요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의원은 연찬회 다음 날에는 내게 연찬회에서 발언한 내용이 담겨 있는 녹음테이프를 쥐여 주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대통령께 제대로 보고해 달라”고 했다.

나는 당내에서 나오는 박지원 수석에 대한 비판을 DJ에게 상세히 보고하고, 청와대 인적쇄신을 건의했다. DJ는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더 이상 뭐라고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내 생각에도 박지원 수석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다음 주 주례보고에서 나는 대표직 사의(辭意)를 표했다.

“대통령님, 일에 몰두해서 성과를 내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DJ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나는 8월 27일 당무거부를 통해 내 뜻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해 9월 11일, 나는 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민참여경선’이라는 伏兵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을 하루 앞둔 2002년 3월 15일 TV토론에 앞서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김중권, 노무현, 정동영, 이인제, 한화갑.

그로부터 두 달여 후인 11월 15일 나는 대구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 출정식(出征式)을 가졌다. 내가 출마를 결심한 것은 그동안의 국정경험을 살려 동서화합을 실천해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DJ를 충실히 보필하면서 동서화합을 위해 노력했던 것, 당 대표로 있으면서 ‘여당다운 여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당원들이 평가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대중연설에도 자신이 있었다. 대구 출정식에는 3만여 명이 운집해 내게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막상 경선이 시작되자 상황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복병(伏兵)은 ‘국민참여경선’이었다. 경선 과정에 국민참여의 폭을 확대한다는 명분 아래 10만명의 비(非)당원을 경선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경선에 참여할 ‘국민’은 각 후보에게 모집해 오라고 했다. 예를 들어 제주 지역의 국민참여경선 대상자가 150명이라면, 경선 후보들에게 1000명을 모집해 오게 한 후 이들 중에서 추첨으로 경선참여자를 뽑는다는 것이었다. 나나 이인제 의원이 아날로그식으로 경선참여자를 모집하고 있을 때 노무현 후보는 노사모를 통해 디지털식으로 지지자들을 모아 경선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경선은 제주에서부터 시작해 울산, 대구 등을 거친 후,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치르게 되어 있었다. 지방에서부터 시작해 경선 열기를 전국으로 확대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2번째 경선지였던 울산에서 노무현 후보가 1등, 내가 2등을 했다. 노 후보와 나의 표차는 24표에 불과했다. 과거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렸던 노 후보는 울산에서 훨씬 압도적인 승리를 기대했었는지, 실망하는 듯했다. 나는 사실상 내가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 여세를 몰아 대구에서 승리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光州의 ‘보이지 않는 손’

그런데 갑자기 세 번째 경선 장소가 광주(光州)로 바뀌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노무현 후보는 광주에서 그 지역에 연고가 있는 한화갑 후보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하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광주에서 일약 스타가 된 노무현 후보는 이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민주당 후보가 되고, 더 나아가 제16대 대통령까지 됐다.

광주 경선이 있기 전날, 광주 지역의 민주화운동그룹은 노무현 지지를 선언했다. 광주에서 내가 연설을 할 때는 연설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올라갈 때 갑자기 마이크가 꺼졌다. 당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다른 후보들의 연설이 모두 끝난 후에 “연설을 하지 못한 부분을 마저 하겠느냐?”고 물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었을까?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믿는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DJ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신뢰하고, 내게 대권의 꿈을 갖게 했던 분이 DJ였다. 만일 그가 노무현 지지를 생각했다면 나를 불러서 “꿈을 접으라”고 말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대표 시절 민주당에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노무현 후보를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정치를 접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민주당 내에서 나는 결국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로서는 동교동계와 잘 지낸다고 생각했지만,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권노갑 고문 등이 이인제 후보를 지지했던 것을 상기하면 그것도 나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취재후기
‘정치’보다는 ‘일’에 더 자신있는 것 같은 관료 스타일 정치인

김중권 전 비서실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1월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두고서였다. 전직 ‘실세(實勢)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새 정부의 청와대 구성과 조각(組閣)에 관한 지상조언(紙上助言)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 전 비서실장은 전두환 정권에서부터 노태우 정권을 거쳐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무 관련 요직을 거쳤지만,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관료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가 자신있게 얘기하는 부분도 민정당 사무차장, 김대중 정권의 비서실장으로서 어떻게 조직을 장악하고 성과를 냈는가 하는 부분에서였다. 반면에 노태우 정권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의 역할, 김대중 정권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새천년민주당 대표 시절 동교동계와의 관계 등 ‘정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기자의 관심을 끌 만한 ‘화끈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 시절 정대철(鄭大哲) 전 국회의원의 구속에 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얘기가 있어 사실 여부를 묻자 그는 펄쩍 뛰었다. 자신은 그 시절에 정대철 전 의원이 구속된 일이 있는지조차 기억에 없다는 것이었다.

김중권 전 실장은 “개인적으로는 내각책임제를 지지한다”고 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그는 대선 때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내야 하는 대통령제하에서 빛을 볼 수 있는 스타일 같지는 않았다. 대신 내각책임제하에서라면,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정적으로 국정을 관리하면서 성과를 내는 ‘관료 출신 정치인 총리’ 같은 역할을 기대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