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스키나 소주는 석 잔, 와인은 두 잔, 맥주는 1병이 정량
⊙ 전자오르간 연주로 쌓인 스트레스 해소
⊙ 난 CEO라는 체면 때문에 비싼 음식 찾는 일 없어
李鍾煥
⊙ 90세.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 2년 수료.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남대 명예경영학 박사.
⊙ 삼영화학공업·국제통신공업·한국퓨어책·고려애자공업 대표이사, 現 삼영화학그룹 회장,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사장.
⊙ 상훈: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 전자오르간 연주로 쌓인 스트레스 해소
⊙ 난 CEO라는 체면 때문에 비싼 음식 찾는 일 없어
李鍾煥
⊙ 90세.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 2년 수료.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남대 명예경영학 박사.
⊙ 삼영화학공업·국제통신공업·한국퓨어책·고려애자공업 대표이사, 現 삼영화학그룹 회장,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사장.
⊙ 상훈: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나는 작년 말 기준 정확히 여든아홉이다. 2012년이 밝은 지금 난 이제 90세로 접어든다. 정말 살 만큼 산 나이다. 옛날로 치면 주어진 수명(壽命)의 문을 지나, 그것도 덤으로 얻는 세월의 길을 살얼음 걷듯 조심조심 내딛고 있는 셈이다.
언뜻 주변을 돌아봐도 내 나이 또래가 흔치 않다. 90세에 이르도록 기업을 경영하는 CEO는 더욱이나 그러하다. 동(同)시대의 산업사회를 살아온 기업인이라면 대개가 창업 1세대이기 마련이다. 창업 1세대 중에 아직까지 생존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해도 하나같이 건강 문제로 요양 중인 분이 대부분이다.
꼭 기업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설사 생존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운신이 불편하여 외출을 삼가거나, 와병(臥病)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한데 나는 지금도 기업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다. 그것도 뒷전에 앉아 웬만한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중요한 것만 보고받는 식이 아니다. 매일매일 기업 전반을 체크하고, 지시하고, 계산하고, 최종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상 자체가 여간 바쁘지 않다. 쉴 틈이 없다. 사람들은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일을 다 처리할 수 있느냐, 그 비결이 뭐냐”고 정색을 하며 묻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냥 씩 웃고 말거나, 질문하는 사람의 진지함을 거스를 수 없을 때, 몇 가지 건강 비결을 공개하기도 한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나의 건강 습관이랄까, 내가 꾸준히 지켜온 생활 철학이랄까, 분주한 중에서도 여유로움을 추구하는 나름의 노력이랄까, 아무튼 그 모든 것을 공개하려고 한다.
직원들 휴대폰으로 새벽 1시에 직접 전화
남녀를 불문코 80세로 접어들면 우선 기억력이 감퇴되고 반사신경줄이 늘어져 제 구실을 못 하므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나라고 해서 그런 의학적인 통계에서 벗어난 특수체질일 수 없다. 다만 있다면 인위적인 내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기억력을 도맡은 뇌신경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매일 밤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는 장병처럼 피나는 훈련을 감행한다. 다름 아닌 전화번호 암기가 그것이다. 자랑 같지만 20년 전인 70대 후반만 해도 나는 100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줄줄 외우고 있었다. 그때는 굳이 암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절실했으므로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입력되었다고나 할까.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24시간 쉬지 않고 기계를 돌려 제품을 생산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매우 단순 작업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긴장을 늦추고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는 원하는 제품은커녕, 엄청난 손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최일선에서 기계작동을 책임진 공장근로자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제품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가, 기계에 무슨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나를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그것도 공장에 설치된 유선 전화가 아니라, 개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휴대폰으로 했다. 그래서 직원들은 더 긴장하는 상태로 전화를 받는 것 같다. 기계 가동을 책임진 공장 기술자치고 하루 한번꼴로 내 확인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회사 최고 경영자인 회장이 세상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더 정확히 새벽 한 시에 직접 휴대폰 벨을 울리게 하여, 흡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부하는 어조로 꼬치꼬치 상황을 점검하는 판이니, 그들 역시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어떻게 왕회장님이 개인 휴대폰 번호까지 기억할 수 있는가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지만, 이내 선배들을 통해 원래가 그처럼 유별난 회장이란 평판을 전해들은 다음부터 담당자들이 하나같이 옷깃을 여미곤 하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껏 기계 가동을 잘못하여 불량품을 만든 적도, 기계 결함 때문에 제때 제품을 생산하지 못해 낭패를 당한 기억도 별로 없는 편이다.
나의 보물 1호는 수첩
그러다 보니 비서를 여러 명 두고서도 나는 모든 전화를 내 손으로 직접 걸지 않으면 안 된다. 한밤중의 전화연결도 그러하고, 밥을 먹다가도, 운동을 하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시간 허비 없이 그때그때 전달하는 방법이 그것 외에는 따로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창때에는 100개의 전화번호뿐 아니라, 직원 100명의 이름까지 다 기억했다. 어쩌다 뒷모습만 보고 아무개 팀장이라고 불러주면, ‘어이쿠, 회장님이 내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구나’하고 긴장하여 더 열심히 기계를 조이고, 기름칠하고 닦는 것이었다.
초창기만 해도 전화번호가 일곱 자리 수였던 것이 휴대폰이 보급되고부터 11자리 수로 늘어난 탓일까. 이제 내 기억 세포 속에 입력된 전화번호는 50개쯤으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나이에 따라 그만큼 기억세포가 훼손되지 않을 수 없을 터이지만, 나는 그런 자연현상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해 잠들기 전에 흡사 중학생 영어단어 외우듯 전화번호를 열심히 암기하고 또 암기하는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다.
작고한 시인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선생은 기억력 감퇴를 막는 방법으로 세계 여러 나라 수도 이름과 유명 산맥 이름, 강 이름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풍류(風流)를 느끼게 하는 멋진 방안 같아 나도 흉내를 내고 싶었지만, 우선 발등의 불이 생산 현장 점검인지라 그 같은 풍류를 누릴 수는 없었다. 다만 여유를 조금 부렸다면 전화번호 외에 내가 자주 쓰는 ‘사자성어(四字成語)’며 짧은 영어문장을 외우는 것이 고작이다.
나는 내게 필요한 전화번호와 ‘사자성어’, 영어문장이 또박또박 적힌 오래된 수첩을 보물처럼 소지하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수첩이 없으면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그렇게 암기하는 훈련을 단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음주 후에는 3일 지나야 다시 마셔
두 번째로, 나는 술과 담배를 지나치게 즐기지 않는다. 한참 젊은 날, 기대했던 대로 사업이 풀리지 않을 때, 애꿎은 담배만 줄줄이 피운 적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담배 개비를 손가락에 끼워본 적이 없다.
하지만 술은 다르다.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 축하 받을 만큼의 큰 성취감을 맛보았을 때, 혹은 어떤 목표를 위해 관계자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분투했는데 그 일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었을 때 꼭 필요한 것이 술이다.
나는 그럴 때 즐겁게 술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까지 어떤 술자리건 간에 세 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는 철칙(鐵則)을 정해놓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술을 더 마시면 지나치게 얼굴이 붉어진다든가, 알코올 흡수를 잘 못 하는 체질을 갖고 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체질적으로는 술이 그렇게 잘 받을 수가 없다. 하지만 뒷날 업무에 큰 지장을 주는 것이 술이라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너무나 확실히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내가 스스로 정한 원칙이 언제부터 지켜졌는지 기억해 보면 1960년대 초반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유학파다. 도쿄(東京) 유학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는데, 내가 특별히 선호했던 술이 일본 기린맥주다. 그 무렵에는 학생 신분이어서 맥줏값이 비싸게 느껴져 한 병 이상 주문하기가 부담스러운 편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큰 결단을 내리고 벌떡 일어서며, 대신 내 힘으로 돈을 벌게 되면 마시고 싶은 대로 실컷 즐기리라 스스로 위안을 하곤 했다.
내가 정말 사업가가 되어 일본을 첫 방문하게 된 것이 그로부터 15년 후인 1964년 가을이다. 업무를 대충 끝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학생 때 자주 다녔던 도쿄 신주쿠 술집을 찾아나섰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옛날 상호가 그대로 붙어 있던 단골집을 발견하고, 허리띠를 풀고 앉았다.
내 지갑은 두둑했다. 기분 같아서는 아무나 붙들고 실컷 마시고 싶었다. 술값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서야 했던 그 어려웠던 시절을 안주 삼아 양껏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기린맥주를 여러 병 주문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이상하게 한 병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중요한 사업 업무를 가지고 어렵사리 일본까지 왔는데, 그리고 내일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과의 면담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나의 그런 호기 때문에 차질을 빚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텔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후 지금까지 술을 양껏, 아니 2차, 3차로 부어라 마셔라 한 적이 없다. 위스키나 소주는 3잔이 고작이고, 포도주는 2잔, 맥주는 한 병이 나의 정량이 된 것이다.
거기다가 일단 술자리를 가졌다 하면 세상없는 일이 있어도 3일을 쉬었다가 다시 술을 하는 것을 내 철칙으로 삼고 있다. 술 때문에 건강을 상하거나 고통을 받거나, 술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 기억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좋은 음식 찾는 시간이 아깝다
기왕 먹는 얘기가 나왔으니, 세 번째로 음식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음식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관해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별로 곱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체질적으로 길든 내 구두쇠 정신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먹거리에 큰 욕심이 없다. 아니, 귀족처럼 호사스런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다. 말 그대로 내 음식 취향은 밑바닥 서민형이다. 음식점에서 기다리지 않고 금세 나오는 국밥 아니면 시래깃국 그리고 소문난 중국집 자장면이 내가 즐겨 찾는 메뉴다.
생각해 보라. 우선 먹는 데 터무니없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서 좋고, 값이 싸서 좋고, 영양 또한 크게 뒤떨어지지 않아서 좋다. 나같이 늘 시간에 쫓기는 사람에게는 더더구나 그러하다.
지금까지 나는 먹는 문제를 놓고 ‘이럴까, 저럴까’ 하며 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먹으면 입맛이 살아날까 따위의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소문에 의하면 일본 스시를 비행기로 배달해 드시는 분도 있고, 식사를 하기 위해 두 시간 세 시간 달려가 이름난 레스토랑을 찾는 미식가도 많다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한 끼 때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본 적이 없다.
물론 명성 높은 포도주와 잘 구운 스테이크 같은 것을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고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나도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최고급 식도락을 서슴지 않고 즐긴다. 나도 맛있는 것을 알고, 품위도 알고, 위생적으로나 영양학적으로나 비싼 음식이 비싼 값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체면치레 때문에 혹은 권위의식 때문에 그처럼 터무니없이 비싼 음식값을 지불하지 않을 뿐이다. ‘먹는 자유’를 누린다고나 할까. 그렇다. 나는 닥치는 대로, 주어진 대로 먹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공장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다.
나한테 갈비 얻어먹어 본 사람 없을 것
그럴 수밖에 없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회장 집무실에 앉아 손님을 맞아들이는 일보다 기계 설치며, 작동 때문에 공장에서 기름장갑을 끼고 보낸 시간이 훨씬 많았다.
물론 구내식당에서도 경영주라고 해서 특식(特食)을 만들어놓지 않는다. 내가 극구 말리기 때문이다. 나는 먹는 음식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자주 한다. 대신 나도 근로자들도 똑같이 먹는 탓에 음식의 수준이 지나치게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우리 회사 점심이 꽤나 먹을 만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터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끼니를 때워야 하는 때에도, 나는 되도록 공장에서 먹던 수준을 지키려고 신경을 많이 쓴다. 앞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나는 고급 레스토랑보다 전통 있는 국밥집을 더 즐겨 찾는다. 이제 직원들도 이골이 나서, 내가 그쪽으로 출장이라도 나서면 먼저 국밥집을 알아내는 일부터 서둘기 마련이다.
회장 체면에 조금은 쩨쩨한 이야기지만 어쩌다 국밥집이 아닌 여름철 냉면집으로 바뀌는 경우, 담당직원이 ‘회장님, 이 집 갈비가 유명한데 드시지 않겠습니까?’하고 권해도 나는 도리질을 한다. 혼자도 아니고 함께 간 직원 모두 배불리 먹으려면 웬만큼 주문해서는 양도 차지 않기도 하지만, 회사 돈이라고 해서 함부로 낭비하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나는 묵묵히 ‘갈비는 무슨… 먹고 싶으면 불고기나 시키지’라고 대꾸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주어진 대로, 되도록 적은 양의 식사를 거르지 않고 시간에 맞춰 꼭꼭 찾아 먹는 것이 나의 생활 철학이다. 다행히 나는 젊어서부터 정기적으로 치과 출입을 한 편이라 아직도 제 이를 모두 그대로 갖고 있어서, 음식 먹는 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잘 관리했다기보다, 튼튼한 이를 전수해 준 조상님의 은덕이 더 큰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같은 건강을 그대로 유지하는지도 모르겠다.
잠옷 입고 전자오르간 연주하는 버릇
네 번째로, 내 유일한 취미인 전자오르간 연주를 소개하고 싶다. 나는 광복 전 고향에서 잠시 소학교(초등학교) 교사 노릇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초등학교 교사는 예능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림 그리기와 노래 부르기를 지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풍금 연주다. 내가 풍금에 처음 손을 댄 것도 그 때문인데, 그러니까 그즈음 아이들 교습용으로 잠시 배우고 익혔던 솜씨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마냥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그때의 풍금이 지금의 전자오르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기업 경영에 올인하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웬 전자오르간이냐’라고 스스로 반문할 때가 많다. 그 답은 ‘나 역시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내 일상과 잘 어울리는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일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권유하는 것도 아닌데, 어느 틈에 전자오르간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연주 시간을 특별히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모두가 잠든 야밤일 수도 있고, 초저녁일 수도 있다. 하루 일을 마감하고 막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빠트리지 않고 전자오르간 건반 뚜껑을 여는 것이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전자오르간을 연주할 때의 내 복장이 늘 잠옷 바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악보를 준비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곡을 그냥 쳐대는 것이다. 나는 열 손가락을 다 사용하는 연습을 처음부터 시도했으므로 곡이 틀리든, 늘어지든, 끊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주저 없이 열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내가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아일랜드, 이탈리아 민요도 치고, 일본 가요도 치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며 전선야곡도 순서 없이 쉬지 않고 열 곡, 스무 곡을 연이어 연주한다. 그렇게 열 곡쯤 소화하고 나면 반 시간이 족히 지나가고 만다.
출근 땐 일본 해군행진곡 연주하고 나와
그제야 손끝에서부터 피로가 파르르 전해진다. 하루 동안 덕지덕지 쌓인 피로감이다. 회사를 경영하는 데 정신적, 육체적 부담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이 잘 풀리기보다 실타래처럼 엉키는 경우가 더 많기 십상이므로 반갑지 않은 스트레스가 자동적으로 진득진득 눌어붙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주로 음주가무(飮酒歌舞)로 그것을 푼다고 하는데, 나는 잠옷차림에 치는 전자오르간으로 그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버리는 것이다.
아침 출근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웬만큼 바쁘지 않다면 마지막 넥타이를 매자마자 또 한 차례 전자오르간 앞에 앉는다. 그러나 어젯밤처럼 많은 곡을 연주하지 않는다. 딱 한 곡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경쾌한 행진곡이다. 다름 아닌 일본 해군행진곡이다. 까다롭고 어려운 곡이지만, 그 역시 나는 손가락이 닳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으므로 악보 없이 이제는 나름의 기교까지 부려가며 거뜬히 연주를 끝낼 수 있다. 그렇게 한 곡 치고 나면, 갑자기 오늘 하루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한 의욕이 분수마냥 치솟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갖고 있는 전자오르간이 한 대, 두 대 늘어나다가 마침내 도합 일곱 대가 되고 말았다. 내가 잠자리에 들어야 할 곳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 내 행동반경이 넓혀진 것이다. 서울 집은 물론이고, 청주 공장, 마산 공장, 밀양 공장, 여주 공장, 중국 공장, 별장 등등이 그곳이다.
어쨌거나 처음에는 아무 계획이나 계산 없는 내 개인 취향에서 시작한 일이지만, 지내놓고 보니, 악보 없이 곡을 치는 일이 너무 적절한 두뇌운동이며, 신경운동이라고 가깝게 지내는 의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마도 90세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평형감각과 순발력을 잃지 않고, 젊은 사람 못지않게 그때그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열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건반을 두들겼던 그 연주 덕분이 아닌가 싶을 것이다.
공장 돌아보는 것도 운동
마지막으로 내가 개발한 운동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경영주이기 이전에 공장장이기를 원했고, 그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자부한다.
공장장은 기계를 잘 알아야 한다. 아니,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 원리에서부터 성능, 결함은 물론이고 예방, 수리 방법까지 완벽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나는 반백 년을 그 일에 소일했고 더 좋은 성능, 더 생산성 높은 기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야말로 내 인생의 전부를 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외국 출장을 나가면 눈에 보이는 것이 고장이 잦은 기계의 부속품들이다. 그것도 한꺼번에 많이 구입하여 화물로 부치기보다 이것저것 꼭 필요한 것만 골라 휴대용 가방에 넣어 오기 일쑤다. 작은 부품이라고 해도 열 개 스무 개 모아 놓으면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어떤 때는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80㎏이 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중 나온 직원들이 내 짐을 무심코 받아들었다가 풀썩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실제로 나 역시 나에게 꼭 필요한, 어쩌면 내 몸의 한 부분일 수도 있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닌, 다른 물건을 그만큼 들어올리라면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현장 일에 집중하다 보니, 공장을 이 잡듯이 하나하나 챙기며 온종일 헤집고 다닐 수밖에 없다. 기계와 기계를 점검하기도 하고, 직접 관리하는 생산근로자들과 이것저것 따지기도 하고, 기계 부품들을 풀었다가 조이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앉았다 섰다와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버리고 만다.
어떤 때는 하루에 공장 라인을 세 번씩 왕복하는 경우도 많다. 정확히 따져보지 않았지만, 대충 눈짐작으로 3km는 족히 될 거리다.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흡사 기계체조 선수처럼 오만 가지 몸짓을 구사해 가며 걷는다. 그것도 어디 공장 라인이 한두 개인가. 청주 공장, 마산 공장, 밀양 공장, 구미 공장 등등….
정말 땀인지, 기름인지 온몸이 축축해질 정도다. 그렇게 오래오래 단련된 탓일까. 나는 특별히 마라톤을 하거나, 요가를 하는 등 별난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직까지 뼈가 쑤시거나, 심하게 다리가 저리거나 하는 증상이 없다.
89세의 홀인원
내가 좋아하는 골프 또한 마찬가지다. 뭐니뭐니해도 문제는 체력이다. 심하게 미치지 않고, 연습에 열을 올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대등한 유연성으로 골프채를 맘껏 휘두를 수 있는 사실이 여간 뿌듯하지 않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야기지만, 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제주도 골프장을 방문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일단 필드에 들어서면 모든 잡다한 것들은 깡그리 내려놓고 오로지 골프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완전히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경지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다 보니, 생각 외로 공도 잘 맞는 것 같다. 한 번도 마음먹은 대로 공이 나가지 않는다고 투덜거려 본 적이 없다. 그냥 열린 마음으로 마냥 즐겁게 공을 때리곤 한다.
지난해 4월 25일에 기록한 홀인원 경험도 그런 경지에서 얻어낸 실적이다. 왕년의 프로 골퍼도 아니고, 매양 골프장에서 사는 마니아도 아닌, 90을 바라보는 89세의 늙은 CEO가 홀인원을 이뤄냈다. 골프장이 떠나갈 정도로 많은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으며, 어떤 이는 그 나이의 홀인원은 아마도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세계적인 대기록인지도 모른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홀인원 기념패를 집에 가져가지 않고, 내 집무실에 비치해 두고 매일매일 그쪽을 흘끔흘끔 바라보곤 한다. ‘나도 하려고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혼자 속으로 다짐하면서.⊙
언뜻 주변을 돌아봐도 내 나이 또래가 흔치 않다. 90세에 이르도록 기업을 경영하는 CEO는 더욱이나 그러하다. 동(同)시대의 산업사회를 살아온 기업인이라면 대개가 창업 1세대이기 마련이다. 창업 1세대 중에 아직까지 생존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해도 하나같이 건강 문제로 요양 중인 분이 대부분이다.
꼭 기업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설사 생존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운신이 불편하여 외출을 삼가거나, 와병(臥病)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한데 나는 지금도 기업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다. 그것도 뒷전에 앉아 웬만한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중요한 것만 보고받는 식이 아니다. 매일매일 기업 전반을 체크하고, 지시하고, 계산하고, 최종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상 자체가 여간 바쁘지 않다. 쉴 틈이 없다. 사람들은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일을 다 처리할 수 있느냐, 그 비결이 뭐냐”고 정색을 하며 묻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냥 씩 웃고 말거나, 질문하는 사람의 진지함을 거스를 수 없을 때, 몇 가지 건강 비결을 공개하기도 한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나의 건강 습관이랄까, 내가 꾸준히 지켜온 생활 철학이랄까, 분주한 중에서도 여유로움을 추구하는 나름의 노력이랄까, 아무튼 그 모든 것을 공개하려고 한다.
직원들 휴대폰으로 새벽 1시에 직접 전화
남녀를 불문코 80세로 접어들면 우선 기억력이 감퇴되고 반사신경줄이 늘어져 제 구실을 못 하므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나라고 해서 그런 의학적인 통계에서 벗어난 특수체질일 수 없다. 다만 있다면 인위적인 내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기억력을 도맡은 뇌신경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매일 밤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는 장병처럼 피나는 훈련을 감행한다. 다름 아닌 전화번호 암기가 그것이다. 자랑 같지만 20년 전인 70대 후반만 해도 나는 100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줄줄 외우고 있었다. 그때는 굳이 암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절실했으므로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입력되었다고나 할까.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24시간 쉬지 않고 기계를 돌려 제품을 생산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매우 단순 작업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긴장을 늦추고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는 원하는 제품은커녕, 엄청난 손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최일선에서 기계작동을 책임진 공장근로자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제품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가, 기계에 무슨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나를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그것도 공장에 설치된 유선 전화가 아니라, 개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휴대폰으로 했다. 그래서 직원들은 더 긴장하는 상태로 전화를 받는 것 같다. 기계 가동을 책임진 공장 기술자치고 하루 한번꼴로 내 확인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회사 최고 경영자인 회장이 세상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더 정확히 새벽 한 시에 직접 휴대폰 벨을 울리게 하여, 흡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부하는 어조로 꼬치꼬치 상황을 점검하는 판이니, 그들 역시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어떻게 왕회장님이 개인 휴대폰 번호까지 기억할 수 있는가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지만, 이내 선배들을 통해 원래가 그처럼 유별난 회장이란 평판을 전해들은 다음부터 담당자들이 하나같이 옷깃을 여미곤 하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껏 기계 가동을 잘못하여 불량품을 만든 적도, 기계 결함 때문에 제때 제품을 생산하지 못해 낭패를 당한 기억도 별로 없는 편이다.
나의 보물 1호는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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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번호와 사자성어, 영어문장이 적힌 수첩을 들여다보는 필자. 이 수첩은 필자에게는 보물이다. |
실제로 한창때에는 100개의 전화번호뿐 아니라, 직원 100명의 이름까지 다 기억했다. 어쩌다 뒷모습만 보고 아무개 팀장이라고 불러주면, ‘어이쿠, 회장님이 내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구나’하고 긴장하여 더 열심히 기계를 조이고, 기름칠하고 닦는 것이었다.
초창기만 해도 전화번호가 일곱 자리 수였던 것이 휴대폰이 보급되고부터 11자리 수로 늘어난 탓일까. 이제 내 기억 세포 속에 입력된 전화번호는 50개쯤으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나이에 따라 그만큼 기억세포가 훼손되지 않을 수 없을 터이지만, 나는 그런 자연현상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해 잠들기 전에 흡사 중학생 영어단어 외우듯 전화번호를 열심히 암기하고 또 암기하는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다.
작고한 시인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선생은 기억력 감퇴를 막는 방법으로 세계 여러 나라 수도 이름과 유명 산맥 이름, 강 이름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풍류(風流)를 느끼게 하는 멋진 방안 같아 나도 흉내를 내고 싶었지만, 우선 발등의 불이 생산 현장 점검인지라 그 같은 풍류를 누릴 수는 없었다. 다만 여유를 조금 부렸다면 전화번호 외에 내가 자주 쓰는 ‘사자성어(四字成語)’며 짧은 영어문장을 외우는 것이 고작이다.
나는 내게 필요한 전화번호와 ‘사자성어’, 영어문장이 또박또박 적힌 오래된 수첩을 보물처럼 소지하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수첩이 없으면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그렇게 암기하는 훈련을 단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음주 후에는 3일 지나야 다시 마셔
두 번째로, 나는 술과 담배를 지나치게 즐기지 않는다. 한참 젊은 날, 기대했던 대로 사업이 풀리지 않을 때, 애꿎은 담배만 줄줄이 피운 적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담배 개비를 손가락에 끼워본 적이 없다.
하지만 술은 다르다.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 축하 받을 만큼의 큰 성취감을 맛보았을 때, 혹은 어떤 목표를 위해 관계자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분투했는데 그 일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었을 때 꼭 필요한 것이 술이다.
나는 그럴 때 즐겁게 술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까지 어떤 술자리건 간에 세 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는 철칙(鐵則)을 정해놓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술을 더 마시면 지나치게 얼굴이 붉어진다든가, 알코올 흡수를 잘 못 하는 체질을 갖고 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체질적으로는 술이 그렇게 잘 받을 수가 없다. 하지만 뒷날 업무에 큰 지장을 주는 것이 술이라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너무나 확실히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내가 스스로 정한 원칙이 언제부터 지켜졌는지 기억해 보면 1960년대 초반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유학파다. 도쿄(東京) 유학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는데, 내가 특별히 선호했던 술이 일본 기린맥주다. 그 무렵에는 학생 신분이어서 맥줏값이 비싸게 느껴져 한 병 이상 주문하기가 부담스러운 편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큰 결단을 내리고 벌떡 일어서며, 대신 내 힘으로 돈을 벌게 되면 마시고 싶은 대로 실컷 즐기리라 스스로 위안을 하곤 했다.
내가 정말 사업가가 되어 일본을 첫 방문하게 된 것이 그로부터 15년 후인 1964년 가을이다. 업무를 대충 끝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학생 때 자주 다녔던 도쿄 신주쿠 술집을 찾아나섰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옛날 상호가 그대로 붙어 있던 단골집을 발견하고, 허리띠를 풀고 앉았다.
내 지갑은 두둑했다. 기분 같아서는 아무나 붙들고 실컷 마시고 싶었다. 술값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서야 했던 그 어려웠던 시절을 안주 삼아 양껏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기린맥주를 여러 병 주문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이상하게 한 병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중요한 사업 업무를 가지고 어렵사리 일본까지 왔는데, 그리고 내일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과의 면담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나의 그런 호기 때문에 차질을 빚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텔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후 지금까지 술을 양껏, 아니 2차, 3차로 부어라 마셔라 한 적이 없다. 위스키나 소주는 3잔이 고작이고, 포도주는 2잔, 맥주는 한 병이 나의 정량이 된 것이다.
거기다가 일단 술자리를 가졌다 하면 세상없는 일이 있어도 3일을 쉬었다가 다시 술을 하는 것을 내 철칙으로 삼고 있다. 술 때문에 건강을 상하거나 고통을 받거나, 술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 기억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좋은 음식 찾는 시간이 아깝다
기왕 먹는 얘기가 나왔으니, 세 번째로 음식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음식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관해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별로 곱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체질적으로 길든 내 구두쇠 정신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먹거리에 큰 욕심이 없다. 아니, 귀족처럼 호사스런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다. 말 그대로 내 음식 취향은 밑바닥 서민형이다. 음식점에서 기다리지 않고 금세 나오는 국밥 아니면 시래깃국 그리고 소문난 중국집 자장면이 내가 즐겨 찾는 메뉴다.
생각해 보라. 우선 먹는 데 터무니없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서 좋고, 값이 싸서 좋고, 영양 또한 크게 뒤떨어지지 않아서 좋다. 나같이 늘 시간에 쫓기는 사람에게는 더더구나 그러하다.
지금까지 나는 먹는 문제를 놓고 ‘이럴까, 저럴까’ 하며 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먹으면 입맛이 살아날까 따위의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소문에 의하면 일본 스시를 비행기로 배달해 드시는 분도 있고, 식사를 하기 위해 두 시간 세 시간 달려가 이름난 레스토랑을 찾는 미식가도 많다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한 끼 때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본 적이 없다.
물론 명성 높은 포도주와 잘 구운 스테이크 같은 것을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고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나도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최고급 식도락을 서슴지 않고 즐긴다. 나도 맛있는 것을 알고, 품위도 알고, 위생적으로나 영양학적으로나 비싼 음식이 비싼 값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체면치레 때문에 혹은 권위의식 때문에 그처럼 터무니없이 비싼 음식값을 지불하지 않을 뿐이다. ‘먹는 자유’를 누린다고나 할까. 그렇다. 나는 닥치는 대로, 주어진 대로 먹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공장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다.
나한테 갈비 얻어먹어 본 사람 없을 것
그럴 수밖에 없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회장 집무실에 앉아 손님을 맞아들이는 일보다 기계 설치며, 작동 때문에 공장에서 기름장갑을 끼고 보낸 시간이 훨씬 많았다.
물론 구내식당에서도 경영주라고 해서 특식(特食)을 만들어놓지 않는다. 내가 극구 말리기 때문이다. 나는 먹는 음식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자주 한다. 대신 나도 근로자들도 똑같이 먹는 탓에 음식의 수준이 지나치게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우리 회사 점심이 꽤나 먹을 만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터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끼니를 때워야 하는 때에도, 나는 되도록 공장에서 먹던 수준을 지키려고 신경을 많이 쓴다. 앞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나는 고급 레스토랑보다 전통 있는 국밥집을 더 즐겨 찾는다. 이제 직원들도 이골이 나서, 내가 그쪽으로 출장이라도 나서면 먼저 국밥집을 알아내는 일부터 서둘기 마련이다.
회장 체면에 조금은 쩨쩨한 이야기지만 어쩌다 국밥집이 아닌 여름철 냉면집으로 바뀌는 경우, 담당직원이 ‘회장님, 이 집 갈비가 유명한데 드시지 않겠습니까?’하고 권해도 나는 도리질을 한다. 혼자도 아니고 함께 간 직원 모두 배불리 먹으려면 웬만큼 주문해서는 양도 차지 않기도 하지만, 회사 돈이라고 해서 함부로 낭비하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나는 묵묵히 ‘갈비는 무슨… 먹고 싶으면 불고기나 시키지’라고 대꾸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주어진 대로, 되도록 적은 양의 식사를 거르지 않고 시간에 맞춰 꼭꼭 찾아 먹는 것이 나의 생활 철학이다. 다행히 나는 젊어서부터 정기적으로 치과 출입을 한 편이라 아직도 제 이를 모두 그대로 갖고 있어서, 음식 먹는 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잘 관리했다기보다, 튼튼한 이를 전수해 준 조상님의 은덕이 더 큰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같은 건강을 그대로 유지하는지도 모르겠다.
잠옷 입고 전자오르간 연주하는 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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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는 필자. 악보를 보지 않고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은 필자에게 일종의 두뇌훈련이다. |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초등학교 교사는 예능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림 그리기와 노래 부르기를 지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풍금 연주다. 내가 풍금에 처음 손을 댄 것도 그 때문인데, 그러니까 그즈음 아이들 교습용으로 잠시 배우고 익혔던 솜씨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마냥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그때의 풍금이 지금의 전자오르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기업 경영에 올인하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웬 전자오르간이냐’라고 스스로 반문할 때가 많다. 그 답은 ‘나 역시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내 일상과 잘 어울리는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일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권유하는 것도 아닌데, 어느 틈에 전자오르간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연주 시간을 특별히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모두가 잠든 야밤일 수도 있고, 초저녁일 수도 있다. 하루 일을 마감하고 막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빠트리지 않고 전자오르간 건반 뚜껑을 여는 것이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전자오르간을 연주할 때의 내 복장이 늘 잠옷 바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악보를 준비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곡을 그냥 쳐대는 것이다. 나는 열 손가락을 다 사용하는 연습을 처음부터 시도했으므로 곡이 틀리든, 늘어지든, 끊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주저 없이 열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내가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아일랜드, 이탈리아 민요도 치고, 일본 가요도 치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며 전선야곡도 순서 없이 쉬지 않고 열 곡, 스무 곡을 연이어 연주한다. 그렇게 열 곡쯤 소화하고 나면 반 시간이 족히 지나가고 만다.
출근 땐 일본 해군행진곡 연주하고 나와
그제야 손끝에서부터 피로가 파르르 전해진다. 하루 동안 덕지덕지 쌓인 피로감이다. 회사를 경영하는 데 정신적, 육체적 부담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이 잘 풀리기보다 실타래처럼 엉키는 경우가 더 많기 십상이므로 반갑지 않은 스트레스가 자동적으로 진득진득 눌어붙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주로 음주가무(飮酒歌舞)로 그것을 푼다고 하는데, 나는 잠옷차림에 치는 전자오르간으로 그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버리는 것이다.
아침 출근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웬만큼 바쁘지 않다면 마지막 넥타이를 매자마자 또 한 차례 전자오르간 앞에 앉는다. 그러나 어젯밤처럼 많은 곡을 연주하지 않는다. 딱 한 곡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경쾌한 행진곡이다. 다름 아닌 일본 해군행진곡이다. 까다롭고 어려운 곡이지만, 그 역시 나는 손가락이 닳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으므로 악보 없이 이제는 나름의 기교까지 부려가며 거뜬히 연주를 끝낼 수 있다. 그렇게 한 곡 치고 나면, 갑자기 오늘 하루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한 의욕이 분수마냥 치솟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갖고 있는 전자오르간이 한 대, 두 대 늘어나다가 마침내 도합 일곱 대가 되고 말았다. 내가 잠자리에 들어야 할 곳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 내 행동반경이 넓혀진 것이다. 서울 집은 물론이고, 청주 공장, 마산 공장, 밀양 공장, 여주 공장, 중국 공장, 별장 등등이 그곳이다.
어쨌거나 처음에는 아무 계획이나 계산 없는 내 개인 취향에서 시작한 일이지만, 지내놓고 보니, 악보 없이 곡을 치는 일이 너무 적절한 두뇌운동이며, 신경운동이라고 가깝게 지내는 의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마도 90세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평형감각과 순발력을 잃지 않고, 젊은 사람 못지않게 그때그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열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건반을 두들겼던 그 연주 덕분이 아닌가 싶을 것이다.
공장 돌아보는 것도 운동
마지막으로 내가 개발한 운동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경영주이기 이전에 공장장이기를 원했고, 그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자부한다.
공장장은 기계를 잘 알아야 한다. 아니,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 원리에서부터 성능, 결함은 물론이고 예방, 수리 방법까지 완벽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나는 반백 년을 그 일에 소일했고 더 좋은 성능, 더 생산성 높은 기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야말로 내 인생의 전부를 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외국 출장을 나가면 눈에 보이는 것이 고장이 잦은 기계의 부속품들이다. 그것도 한꺼번에 많이 구입하여 화물로 부치기보다 이것저것 꼭 필요한 것만 골라 휴대용 가방에 넣어 오기 일쑤다. 작은 부품이라고 해도 열 개 스무 개 모아 놓으면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어떤 때는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80㎏이 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중 나온 직원들이 내 짐을 무심코 받아들었다가 풀썩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실제로 나 역시 나에게 꼭 필요한, 어쩌면 내 몸의 한 부분일 수도 있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닌, 다른 물건을 그만큼 들어올리라면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현장 일에 집중하다 보니, 공장을 이 잡듯이 하나하나 챙기며 온종일 헤집고 다닐 수밖에 없다. 기계와 기계를 점검하기도 하고, 직접 관리하는 생산근로자들과 이것저것 따지기도 하고, 기계 부품들을 풀었다가 조이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앉았다 섰다와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버리고 만다.
어떤 때는 하루에 공장 라인을 세 번씩 왕복하는 경우도 많다. 정확히 따져보지 않았지만, 대충 눈짐작으로 3km는 족히 될 거리다.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흡사 기계체조 선수처럼 오만 가지 몸짓을 구사해 가며 걷는다. 그것도 어디 공장 라인이 한두 개인가. 청주 공장, 마산 공장, 밀양 공장, 구미 공장 등등….
정말 땀인지, 기름인지 온몸이 축축해질 정도다. 그렇게 오래오래 단련된 탓일까. 나는 특별히 마라톤을 하거나, 요가를 하는 등 별난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직까지 뼈가 쑤시거나, 심하게 다리가 저리거나 하는 증상이 없다.
89세의 홀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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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크라운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즐기는 필자. 지난해 4월에는 홀인원을 기록했다. |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야기지만, 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제주도 골프장을 방문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일단 필드에 들어서면 모든 잡다한 것들은 깡그리 내려놓고 오로지 골프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완전히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경지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다 보니, 생각 외로 공도 잘 맞는 것 같다. 한 번도 마음먹은 대로 공이 나가지 않는다고 투덜거려 본 적이 없다. 그냥 열린 마음으로 마냥 즐겁게 공을 때리곤 한다.
지난해 4월 25일에 기록한 홀인원 경험도 그런 경지에서 얻어낸 실적이다. 왕년의 프로 골퍼도 아니고, 매양 골프장에서 사는 마니아도 아닌, 90을 바라보는 89세의 늙은 CEO가 홀인원을 이뤄냈다. 골프장이 떠나갈 정도로 많은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으며, 어떤 이는 그 나이의 홀인원은 아마도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세계적인 대기록인지도 모른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홀인원 기념패를 집에 가져가지 않고, 내 집무실에 비치해 두고 매일매일 그쪽을 흘끔흘끔 바라보곤 한다. ‘나도 하려고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혼자 속으로 다짐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