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감장 다툼 崔鍾元 의원은 원래 그런 걸로 유명한 분… 연극하시는 분이니까”
⊙ “내가 10년, 15년 위인데 국회의원이 높다고 해도 (날 보고) 거만하다고 하는 건 그렇다”
⊙ 삼성자동차-대우전자간 ‘빅딜’ 반대했다가 장관직에서 물러나
⊙ “공직을 맡으면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데 이 나이에 검소하게 살기는 싫다”
⊙ 金宇中 회장 건강 회복… 가끔 만난다
裵洵勳
⊙ 69세.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미국 MIT대 공학 석사·박사.
⊙ 한국과학원 교수, 대우국민차 사장, 대우전자 사장·회장, 대우 프랑스지역본사 사장,
정보통신부 장관,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장(장관급),
한국과학기술원 부총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 “내가 10년, 15년 위인데 국회의원이 높다고 해도 (날 보고) 거만하다고 하는 건 그렇다”
⊙ 삼성자동차-대우전자간 ‘빅딜’ 반대했다가 장관직에서 물러나
⊙ “공직을 맡으면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데 이 나이에 검소하게 살기는 싫다”
⊙ 金宇中 회장 건강 회복… 가끔 만난다
裵洵勳
⊙ 69세.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미국 MIT대 공학 석사·박사.
⊙ 한국과학원 교수, 대우국민차 사장, 대우전자 사장·회장, 대우 프랑스지역본사 사장,
정보통신부 장관,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장(장관급),
한국과학기술원 부총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그의 이름에는 수많은 전직(前職)이 따라붙는다. 전직 한국과학기술원 부총장, 전직 대우전자 사장·회장, 전직 정보통신부 장관, 전직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장(장관급), 그리고 최근에 새롭게 추가된 전직이 국립현대미술관장이다.
배순훈(裵洵勳). 화려한 이력 때문에 그를 수식하는 전직으로 어떤 칭호를 붙여야 할지 주저되는 인물이다. 편의상 ‘장관’을 그에 대한 수식어로 삼는다.
배 전 장관은 사회생활을 하며 새로운 족적을 남길 때마다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0년에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 자동차 부품업체 보그 워너사(社)에서 현장 기사로 일했다. 당시 그가 받던 월급은 우리 돈으로 50만원이었다. 그 무렵 서울대에서 교수직을 제의하며 그에게 제시한 월급이 3만5000원이었다.
1972년, 그는 한국과학원 조교수로 귀국했다. 월급은 10만원이었다. 그때는 박사가 귀해 외국에서 박사 학위만 받아도 언론에 소개될 정도였다. 그가 귀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송국 기자가 “왜 미래가 보장된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당시 국내 텔레비전에서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가 <장희빈>이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그 드라마를 거론했다.
“잘사는 나라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과 함께 둘러앉아 <장희빈>을 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맛이 있어야 사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외국에서 배운 학문과 지식으로 조국 발전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식의 비장한 답을 기대했던 방송기자는 꽤나 황당해했다고 한다.
그런 식이다. 기자와 인터뷰할 때도 배 장관은 자신의 저서를 보여주며 “책을 쓰면 그 책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거나, “공직을 맡으면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데 이 나이에 검소하게 살기는 싫다”는 등 솔직히 이야기했다.
탱크주의
1976년 대우중공업 기술본부장으로 대우와 인연을 맺은 후 대우엔지니어링 부사장, 대우자동차부품 사장, 대우국민차 사장, 대우전자 사장·회장 등으로 22년간 일했다. 그가 현재까지 가장 오래 몸담았던 조직이 대우그룹이다. 여기서도 그는 또 대형 뉴스를 만들어 냈다. 대우전자 사장 시절에 만들어 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탱크주의’가 그것이다.
그가 내세운 탱크주의의 요체는 “잔 고장이 없는 튼튼한 탱크 같은 전자제품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우전자 사장으로서 ‘탱크주의’를 강조하는 광고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인기 탤런트였던 유인촌(柳仁村)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함께였다. 유 전 장관이 대우전자 TV공장을 방문해 “올해 탱크주의를 발표하셨는데 아주 강한 느낌이 들던데요”라고 하자, 넥타이 차림의 배 전 장관이 “네, 탱크주의는 오래 쓸 수 있는 튼튼하고 편리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죠”라고 답한다.
1993년부터 방영된 이 광고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배 전 장관도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고 국내 가전(家電)시장에서 삼성전자와 금성전자에 밀려 만년 3위를 기록했던 대우전자를 선두권으로 끌어올렸다. 단단하고 고장이 없는 제품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냉장고와 세탁기 등 백색가전 부문에서 3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가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제4대 정통부 장관에 임명될 때도 ‘의외성’ 때문에 화제가 됐고,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이른바 ‘빅딜(기업의 대형사업 맞교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장관직에서 물러날 때도 화제가 됐다. 장관을 지낸 사람이 정부 중앙부처로 치면 국장급(2급)에 해당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직으로 갈 때도 그 파격이 화제였다.
그랬던 그가 최근 다시 화제의 인물이 됐다. 2011년 11월 1일자로 국립현대미술관장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해 10월 7일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과 설전을 벌인 직후 사표를 냈고, 사표 제출 20여일 만에 수리됐다. 그의 사표 제출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변에서는 10월 7일 있었던 국감(國監) 현장에서 그가 겪은 수모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날 국감 현장에서 배 전 장관은 6번이나 고개를 숙여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최종원(崔鍾元) 의원이 오는 2013년 개관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름을 ‘UUL’로 정한 것을 두고 한글 사용에 앞장서야 하는 기관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질문을 하면서 언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최 의원은 배 전 장관의 답변 태도에 대해 “답변할 때 주머니에 왼손을 넣는 것은 무슨 태도냐, 웃기지도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당 간사인 민주당 김재윤(金才允) 의원도 다리를 꼬거나 목소리를 높인 배 전 장관에게 “오만불손하다”고 지적했고, 배 장관이 “언성을 높여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여기서 끝나는 듯했으나 김 의원과 배 전 장관이 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마스터플랜 등을 놓고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배 전 장관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것은 휴대전화가 울려서 그랬고, 나이 들어 엉덩이 살이 빠져 오래 앉아 있기 힘들어 다리를 꼰 것이다.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머리 숙여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국정감사장, 나쁜 일로만 계속 발전해
그 일이 있은 사나흘 뒤 그는 사표를 냈다. 주변에서 그의 사퇴 이유를 “국감장에서 겪은 수모 때문일 것”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임기가 사표 수리 시점에서 불과 80여 일밖에 남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임기는 2012년 2월 22일까지였다. 국립현대미술관장직 사퇴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그를 만났다.
―요즘은 좀 한가하시죠.
근황을 물었지만 배 전 장관은 “세상 돌아가는 게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다”는 말부터 했다.
―국회에서 있었던 일들 말인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속에 있는 생각들을 서로 솔직히 얘기하면 다 풀리는데 서로 솔직하지 않고 다른 얘기만 하니까 안 풀리는 거예요. 우리도 근사한 미술관 하나 가지면 좋은 일인데 왜들 그렇게 이론이 많은지….”
―김대중 정부 땐 정통부 장관으로서,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국정감사를 받았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던가요.
“국회에서 여야만 바뀐 거죠. 바뀐 게 있다면 국회의원들이 내세우는 정책이 국가보다는 자기 소속 정당이나 자기 개인의 이해를 대변하는 게 더 심화됐다는 점이죠. 각자 다음 선거에서 당선만 생각하는 거죠. 텔레비전 카메라가 돌면 자리 지키고 사라지면 자리 비우고, 그런 게 좀 더 심화된 것 같습니다.”
―국감에 임하는 정부 기관의 태도는요.
“예전보다 훨씬 더 기술적으로 큰소리 안 나오게 하고 안 터지고 넘어가는 것, 그런 테크닉은 굉장히 발전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국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답답해지는 거죠. 국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행정체계가 아니에요. 시끄러운 일만 터지지 않아서 자리만 잘 보전하면 되는 거죠. 그게 더 심화됐어요.”
사과하라고 해서 했지만…
―구체적인 예를 들 수 있습니까.
“국감에서 여당 의원이 ‘왜 국립현대미술관이 국정원처럼 비밀이 많으냐’고 그래요. (최광식 문화관광부)장관에게 ‘미술관 마스터 플랜을 받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그래요. 차관에게 물어보니까 역시 ‘없다’고 그랬죠. 국장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니까 이 의원이 ‘미술관이 왜 마스터 플랜을 제출하지 않는 거냐’고 하는 거예요. 저는 그때 증언대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야당 간사가 저한테 소리를 치는 거예요. 5분 동안 오만불손하니 어쩌니 하면서 저를 야단치는 거예요. 공무원들이 말을 잘못하면 자기 직업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가급적 시비에 안 걸리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예요. 미술관 마스터 플랜이 왜 없어요? 미술관 공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매일매일 공사 계정 보고가 올라가고 있는데요.”
―이번에 국회에 실망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국회가 국회의원과 행정부가 모여서 국가를 위해 무얼 할 수 있는가를 토론하는 자리가 돼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요. 공무원도 그렇지만 국회의원은 그렇게 소리 지르고 해야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잘못된 사람들끼리 평형을 유지하는 상황과 같아요.”
―사퇴는 왜 했습니까.
“잘못된 사람들끼리의 균형을 깨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해요. 그렇다면 국회의원들이 그만두겠습니까, 공무원이 그만두겠습니까? 결국 나 같은 사람이 그런 균형을 깨서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사과는요.
“소동이 일어나고 여야 간사와 위원장 등이 저를 국회 모독죄로 제소하지 않는 대신 제가 사과하는 걸로 타협을 봤대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는 사과를 못하겠다고 했죠. 그러니까 ‘사과하고 지나가면 되는데 왜 그러냐, 그런 거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냐’ 그러면서 저를 설득하는 거예요. 그래서 ‘장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하고 사과를 한 거죠. 사과를 하고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먹은 겁니다.”
―민주당 최종원 의원과는 심한 언쟁을 벌인 것으로 보도됐는데요.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회의원으로서의 위엄은 없이 미술관 명칭으로 한글을 쓰지 않고 왜 ‘UUL’이라는 영어를 썼느냐고 야유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사실 젊은 교수 일곱 분이 모여서 여섯 달 간 작업에서 만든 명칭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문자를 보낼 때 ‘나는’을 ‘난’으로 ‘내일’을 ‘낼’로 줄여서 보내잖아요. ‘울’도 ‘서울’을 그런 식으로 표기한 건데 영문으로는 ‘UL’이 돼야 하지만 디자인을 고려해서 ‘U’를 하나 더 넣어 ‘UUL’로 한 겁니다. 저도 사실 잘 모르지만 그렇게 채택됐기 때문에 보고를 했던 거고요. 젊은 교수들이 힘들게 한 작업에 대해 그렇게 야유조로 질문하니까 저도 화가 났고 그 교수들에게 미안해서 소리도 쳤던 거예요. 그랬더니 저한테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리를 꼬았다 하는 시비가 나왔던 거죠. 언론이 전후 상황은 전달 않고 그런 부분만 보도했는데, 뭐 사실 그런 장면이 뉴스거리는 됐겠죠. 최 의원은 원래 그런 걸로 유명한 분인데… 원래 연극하시는 분이니까.”
―그때 정말 바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습니까.
“사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제 버릇이에요. 다리를 꼬았다고 해서 건방지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제 앞에 앉아 있는 국회의원들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어요. 그 양반은 테이블이 가려 주니까 보이지 않을 뿐이고 나는 의자만 있으니까 훤히 보였던 거죠. 내가 그분들보다 적어도 나이가 10년, 15년 위인데 아무리 국회의원이 높다고 해도 거만하다고 하는 건 그렇지 않나요?”
장관 지낸 그가 2급으로 간 까닭
역시 2011년 10월 7일 국감장에서 있었던 일은 배 전 장관에게 유쾌한 기억일 수 없었다. 그는 “미술관 이야기나 더 하자”고 했다. 그는 현대미술관장직을 떠났지만 앞으로도 작품 기증 운동 등 미술관을 위한 일은 무보수로라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후임자가 부담을 갖지 않는다면”이 전제였다.
배 전 장관은 2009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했다. 장관을 지낸 그가 정부 2급 상당 직급인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간다니까 그 배경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혹시 주저함은 없었습니까.
“아뇨.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이 나이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게 기뻤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사실 과거에는 미술계에 평생 종사했던 분들이 해 왔죠.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 미술관이 세계적인 미술관이 되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관장에 응모했던 겁니다.”
―서양화가인 부인 신수희(申秀喜)씨와 건축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차남(裵廷浣·배정완)의 권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집사람은 반대했어요. 미술 분야는 자기 분야인데 남편이 자기 분야에 들어오는 걸 싫어했죠. 제가 3년 하고 나니까 이제야 제가 추진했던 정책적인 방향에서는 동의를 해 주는 정도죠. 둘째 아들은 아직 미술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인지 ‘아버지 일은 아버지가 결정하시라’고 했죠. 그런데 예전에 제가 텔레비전 광고에 나갈 때는 온식구가 반대했어요. 아들은 ‘아버지의 초상권은 자식의 자산’이라면서 반대했어요. 어디 나가서 누구누구 아들이라고 하면 영향을 받는다는 거였죠.”
―광고 출연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때 함께 출연했던 유인촌 전 장관과의 인연이 작용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냥 우연히 유 장관 밑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미술관장 하는 동안 전혀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제 스스로 미술관장직에 응모했고, 된 겁니다.”
―CEO 출신 미술관장은 어떤 장점이 있습니까.
“미술관은 전시, 작품 수집, 교육 이렇게 3분야로 나뉩니다. 전시는 전문적인 지식도 있어야 하지만 우선은 볼 줄 알아야 해요. 보고 느껴야 해요. 그러려면 많이 봐야죠. 저는 CEO로서 비즈니스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까 전시를 볼 기회가 많았어요. 어떤 때는 한 해의 200일을 해외에서 보내기도 했는데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시간이 비는 경우가 많아요. 그 시간에 저는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감상했습니다. 세계적인 미술관의 좋은 전시는 부자들이 기증하는 작품을 모아 놓은 곳이 많습니다. 그 분야도 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고요. 또 서울 기무사 부지에 미술관을 지으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큰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한 경험이 있거든요. 미술관 건축은 건축의 꽃입니다. 건축가들도 미술관을 한 번 지어 보는 게 꿈이죠. 제가 노먼 포스터나 장 누벨 같은 세계적인 건축가를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죠.”
―미술관장으로 오기 전 한국과학기술원으로부터는 정년이 없는 특훈교수직까지 제의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사실 한국과학기술원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과학기술원을 포기한 것은 그렇게 큰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큰 포기는 제가 그 이전까지 세계적 은행들의 컨설팅을 해 왔는데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경제적 문제였습니다.”
대통령·대통령 후보들과 나
―직접 겪어 보니 대우전자 회장과 정통부 장관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까.
“비교할 성질의 것은 아니죠. 제가 대우전자 회장 하다가 정통부 장관이 됐을 때 사람들은 굉장히 출세한 것으로 알았는데, 사실 월급도 줄어들었지 데리고 있는 직원도 줄었죠. 당시 대우는 세계 20개국에 공장이 있었어요. 정통부를 맡는다는 게 오히려 범위는 줄어든 셈이었던 거죠. 직위는 장관이 높다고 할 수 있지만 별로 좋은 게 없어 보여서 당시에는 상당히 망설였었어요. 그러다가 40여 년 동안 야당하던 분이 대통령이 됐으니까, 도와드려야지 하는 맘으로 받아들였던 거지요.”
―정통부 장관은 김우중 회장이 추천했던 겁니까.
“그건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정통부 장관직도 망설였던 분이 노무현 정부 때는 왜 또 장관급 직위를 맡았습니까.
“그때도 망설였어요. 노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 대우자동차 노사분규에 아주 역할을 많이 하셔서 골치 아팠던 기억도 있고 제가 김대중 정부 때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한 노 대통령보다 선임 장관이었거든요. 그런데 노 대통령이 10여 명의 후보를 추천받아 봤는데 저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거예요. 재산 문제나 이런 것들도 안 걸리고요. 개인적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해서 맡은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을 맡을 때처럼 대통령께도 도움 되고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맡은 거죠.”
―그렇다면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을 맡았던 것은 이명박 대통령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미술관장 자리가 뭐 그리 대단한 자리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좋은 미술관 하나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과는 과거 경쟁업체 사장으로서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이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하실 때 도와달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죠. 제가 경쟁 업체 사장들을 덜 존경하는 게 있었거든요. 대통령이 되시는 분이 누구든 국가를 위해 좋은 미술관을 짓는다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 출신 전직 대통령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쭙는데 박근혜(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와도 인연이 있다면서요.
“특별한 인연은 아니고요. 제가 정통부 장관 시절인데 박 대표가 본회의에서 저한테 ‘정보고속도로에 대해서 설명하십시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버님 대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놓더니 이 시대에는 그 따님이 정보고속도로로 세계를 앞서 가려고 하신다. 야당 의원의 질문이지만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1등 가는 정보고속도로를 놓겠다’고 답변했더니 나중에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이회창(李會昌) 자유선진당 전 총재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시절 정치 참여를 권유했는데 거절했다면서요.
“김대중 대통령 당선될 때니까 1997년도였을 거예요. 당시는 제가 광고에 출연했던 이미지도 남아 있고 하니까 이 후보의 측근이었던 서상목 의원이 찾아와서 지원해 달라는 거예요. 방송 찬조연설이었겠죠. 그때 서 의원이 ‘50만표 이상 차이 날 것’이라고 했지만 거절했어요. 아마 그래서 정통부 장관이 됐는지도 모르죠.”
빅딜 반대는 소신
정통부 장관 시절인 1998년 12월 16일, 그는 전경련 주최 조찬간담회에 참석해 “생산량의 95%를 수출하는 대우전자를 빅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던 삼성자동차-대우전자 간 빅딜을 비판했다. 같은 달 21일 그는 장관직을 떠났다.
―정통부 장관에서 물러날 때 밝힌 ‘빅딜’ 반대는 소신이었습니까.
“딜을 제가 반대했죠. 결국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은 안 됐어요. 제가 말하고자 했던 뜻은 빚의 스와프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빚을 줄여야지 그걸 바꿔치기 하는 것은 IMF에 좋은 인상을 안 준다고 한 거죠. 구조조정을 하는데 재벌기업이 빚을 바꿔치기하는 걸 반대하는 게 제 빅딜 반대였어요. 당시 대우 김우중 회장은 빅딜을 밀어붙이려 했고 이건희(李健熙) 삼성 회장은 자동차 산업을 놓지 않으려고 했어요. 대우 입장에서는 삼성자동차를 인수하면 빚이 4조원이 늘어나는데 지금도 큰돈인 그 빚을 또 대우가 떠안는 빅딜은 문제가 있다고 본 거죠.”
―그때만 해도 세간에는 대우와 김대중 정권이 밀접하다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헌재(李憲宰) 금융위원장이 대우 출신입니다. 김우중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었고요. 역시 대우 출신인 저는 정통부 장관이었고요. 김대중 대통령이 대우와 가깝다는 소문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요. 일본 닛케이(日本經濟) 신문이 제가 장관이 되니까 ‘대우 시프트다’ 하는 보도를 하기도 했죠. 문제는 IMF였어요. IMF의 요구대로 정책을 추진하면 5대 재벌 중 한두 개는 없어져야 했으니까요.”
―대우전자는 당시 어떻게 처리됐어야 한다고 봅니까.
“외국인한테 팔았으면 좋았을 겁니다. 론스타와 외환은행 얘기가 최근까지 있지만 사실 다른 기업이 외환은행을 사면 이익이 안 남는다고 생각할 때 론스타는 이익이 난다고 생각해서 투자를 한 거 아닙니까. 투자를 해서 수익을 얻어 간다면 그게 누구 돈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항상 국내 자본이 이득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재벌을 싫어한다면서도 외국 자본과 문제가 생기면 재벌 편을 드는 게 우리 정서예요. 돈에 무슨 꼬리표가 붙었어요? 그냥 돈이지. 그렇게 냉정한 평가를 했어야 하는데 대우전자를 못 팔았죠. 팔 수 있었는데 못 팔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렇다면 GM의 대우자동차 인수는 잘된 건가요.
“GM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싼값에 잘 인수한 건데 우리 경제 입장에서 보면 일자리가 중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잘못한 거라고 봐야죠. 대우자동차 채권을 핸들링하는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못 본 거죠. 일자리는 열어 놓고 투자한 것에 대해 보장해 주고 해야 하는데 일자리에 대한 생각은 덜했던 거죠.”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마켓 중심
배 전 장관이 오래 몸담았던 대우 관련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대우 창업자인 김우중 회장 이야기로 넘어갔다. ‘탱크주의’가 배 전 장관의 트레이 마크라면 김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는 ‘세계경영’이다.
“김우중 회장은 세계경영을 마켓 중심으로 본 측면이 있어요. 와이셔츠를 예로 들면 과거 독일 국민 1인당 대우가 만든 와이셔츠 석 장을 입을 만큼 독일에 와이셔츠 수출이 많았어요. 독일이 명품 소비로 가면서 시장은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동남아국가 등 후진국가로 이동했죠. 우리가 생산하는 것을 후진 국가에 가서도 얼마든지 팔 수 있었기 때문에 기술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죠. 중요한 것은 시장 개척이었죠. 다른 제품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게 대우는 아프리카에도 진출했고 동유럽에도 진출했던 거죠.”
―기술 아닌 마켓 중심의 세계경영은 1990년대 말에 그 수명을 다한 겁니까.
“아니죠. 지금 동구권 경제성장이 굉장히 빠르잖아요. 그 시장을 계속 확보했으면 우리가 꾸준히 먹고살 수 있었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 둔 거죠.”
―김우중 회장은 왜 실패한 겁니까.
“기업가가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은 캐시 플로(cash flow)상의 문제예요. 계속 적자가 나서 회사가 망하는 게 아니고 현금 흐름이 막히면 회사는 스톱할 수밖에 없는 거죠. 김 회장이 경영을 잘못해서 실패했다고 보면 안 됩니다. 다만 그 시대의 캐시 플로 매니지먼트를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갖고 있죠.”
―20년 이상 가까이서 지켜본 인간 김우중은 어떤 사람입니까.
“긴 시간 김 회장과는 해외 출장도 함께 많이 가 봤고 한 호텔방에서 묵기도 했어요. 굉장히 다정다감한 분이에요. 쇼맨십도 있고요.”
―요즘도 만납니까.
“가끔요.”
―건강이 안좋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원래 담배를 피우셨는데 심장 수술 후에는 끊으신 것 같고 골프도 열심히 치세요. 건강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의욕을 다시 찾은 건가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탱크주의는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겁니까.
“그렇죠. 기본 기능에 충실해야 해요. 그래서 제가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고요. 디자인이란 미학적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기능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름답게 보이게 마련이에요. 기능이 좋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기계도 기능이 좋아야 아름답게 보이는 겁니다. 그게 탱크주의로 이어지는 거예요.”
―앞으로 공직에는 나가지 않을 생각입니까.
“안 맡으려고 해요. 정부로부터 돈을 받는 일자리는 안 하겠다는 생각이죠.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면 안 돼요. 그러려면 골프도 치지 말고 검소하게 살아야 해요. 그런데 이 나이에 검소하게 살기 싫거든요.”
둘째 아들이 배 전 장관 회갑연에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세 가지 이유에서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첫째, 남자로서 수수한 이상을 가지고 거기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둘째, 남편으로서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했습니다. 셋째,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둘째 아드님의 글처럼 살아왔다고 자부합니까.
“아뇨. 그렇게 완벽하면 그건 사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런 노력은 해 왔던 것 같아요(웃음).”⊙
배순훈(裵洵勳). 화려한 이력 때문에 그를 수식하는 전직으로 어떤 칭호를 붙여야 할지 주저되는 인물이다. 편의상 ‘장관’을 그에 대한 수식어로 삼는다.
배 전 장관은 사회생활을 하며 새로운 족적을 남길 때마다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0년에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 자동차 부품업체 보그 워너사(社)에서 현장 기사로 일했다. 당시 그가 받던 월급은 우리 돈으로 50만원이었다. 그 무렵 서울대에서 교수직을 제의하며 그에게 제시한 월급이 3만5000원이었다.
1972년, 그는 한국과학원 조교수로 귀국했다. 월급은 10만원이었다. 그때는 박사가 귀해 외국에서 박사 학위만 받아도 언론에 소개될 정도였다. 그가 귀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송국 기자가 “왜 미래가 보장된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당시 국내 텔레비전에서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가 <장희빈>이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그 드라마를 거론했다.
“잘사는 나라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과 함께 둘러앉아 <장희빈>을 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맛이 있어야 사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외국에서 배운 학문과 지식으로 조국 발전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식의 비장한 답을 기대했던 방송기자는 꽤나 황당해했다고 한다.
그런 식이다. 기자와 인터뷰할 때도 배 장관은 자신의 저서를 보여주며 “책을 쓰면 그 책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거나, “공직을 맡으면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데 이 나이에 검소하게 살기는 싫다”는 등 솔직히 이야기했다.
탱크주의
1976년 대우중공업 기술본부장으로 대우와 인연을 맺은 후 대우엔지니어링 부사장, 대우자동차부품 사장, 대우국민차 사장, 대우전자 사장·회장 등으로 22년간 일했다. 그가 현재까지 가장 오래 몸담았던 조직이 대우그룹이다. 여기서도 그는 또 대형 뉴스를 만들어 냈다. 대우전자 사장 시절에 만들어 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탱크주의’가 그것이다.
그가 내세운 탱크주의의 요체는 “잔 고장이 없는 튼튼한 탱크 같은 전자제품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우전자 사장으로서 ‘탱크주의’를 강조하는 광고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인기 탤런트였던 유인촌(柳仁村)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함께였다. 유 전 장관이 대우전자 TV공장을 방문해 “올해 탱크주의를 발표하셨는데 아주 강한 느낌이 들던데요”라고 하자, 넥타이 차림의 배 전 장관이 “네, 탱크주의는 오래 쓸 수 있는 튼튼하고 편리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죠”라고 답한다.
1993년부터 방영된 이 광고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배 전 장관도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고 국내 가전(家電)시장에서 삼성전자와 금성전자에 밀려 만년 3위를 기록했던 대우전자를 선두권으로 끌어올렸다. 단단하고 고장이 없는 제품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냉장고와 세탁기 등 백색가전 부문에서 3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가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제4대 정통부 장관에 임명될 때도 ‘의외성’ 때문에 화제가 됐고,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이른바 ‘빅딜(기업의 대형사업 맞교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장관직에서 물러날 때도 화제가 됐다. 장관을 지낸 사람이 정부 중앙부처로 치면 국장급(2급)에 해당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직으로 갈 때도 그 파격이 화제였다.
그랬던 그가 최근 다시 화제의 인물이 됐다. 2011년 11월 1일자로 국립현대미술관장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해 10월 7일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과 설전을 벌인 직후 사표를 냈고, 사표 제출 20여일 만에 수리됐다. 그의 사표 제출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변에서는 10월 7일 있었던 국감(國監) 현장에서 그가 겪은 수모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날 국감 현장에서 배 전 장관은 6번이나 고개를 숙여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최종원(崔鍾元) 의원이 오는 2013년 개관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름을 ‘UUL’로 정한 것을 두고 한글 사용에 앞장서야 하는 기관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질문을 하면서 언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최 의원은 배 전 장관의 답변 태도에 대해 “답변할 때 주머니에 왼손을 넣는 것은 무슨 태도냐, 웃기지도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당 간사인 민주당 김재윤(金才允) 의원도 다리를 꼬거나 목소리를 높인 배 전 장관에게 “오만불손하다”고 지적했고, 배 장관이 “언성을 높여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여기서 끝나는 듯했으나 김 의원과 배 전 장관이 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마스터플랜 등을 놓고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배 전 장관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것은 휴대전화가 울려서 그랬고, 나이 들어 엉덩이 살이 빠져 오래 앉아 있기 힘들어 다리를 꼰 것이다.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머리 숙여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국정감사장, 나쁜 일로만 계속 발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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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11월 29일 앤드루 프레이저 영국투자청(IBB) 청장과 만나 투자를 논의하고 악수를 나누고 있는 당시 대우전자 배순훈 회장(왼쪽). 대우그룹이 세계경영을 캐치프레이즈로 해외시장을 활발하게 개척하던 때였다. |
―요즘은 좀 한가하시죠.
근황을 물었지만 배 전 장관은 “세상 돌아가는 게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다”는 말부터 했다.
―국회에서 있었던 일들 말인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속에 있는 생각들을 서로 솔직히 얘기하면 다 풀리는데 서로 솔직하지 않고 다른 얘기만 하니까 안 풀리는 거예요. 우리도 근사한 미술관 하나 가지면 좋은 일인데 왜들 그렇게 이론이 많은지….”
―김대중 정부 땐 정통부 장관으로서,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국정감사를 받았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던가요.
“국회에서 여야만 바뀐 거죠. 바뀐 게 있다면 국회의원들이 내세우는 정책이 국가보다는 자기 소속 정당이나 자기 개인의 이해를 대변하는 게 더 심화됐다는 점이죠. 각자 다음 선거에서 당선만 생각하는 거죠. 텔레비전 카메라가 돌면 자리 지키고 사라지면 자리 비우고, 그런 게 좀 더 심화된 것 같습니다.”
―국감에 임하는 정부 기관의 태도는요.
“예전보다 훨씬 더 기술적으로 큰소리 안 나오게 하고 안 터지고 넘어가는 것, 그런 테크닉은 굉장히 발전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국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답답해지는 거죠. 국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행정체계가 아니에요. 시끄러운 일만 터지지 않아서 자리만 잘 보전하면 되는 거죠. 그게 더 심화됐어요.”
사과하라고 해서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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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국정감사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는 배순훈 전 장관. |
“국감에서 여당 의원이 ‘왜 국립현대미술관이 국정원처럼 비밀이 많으냐’고 그래요. (최광식 문화관광부)장관에게 ‘미술관 마스터 플랜을 받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그래요. 차관에게 물어보니까 역시 ‘없다’고 그랬죠. 국장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니까 이 의원이 ‘미술관이 왜 마스터 플랜을 제출하지 않는 거냐’고 하는 거예요. 저는 그때 증언대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야당 간사가 저한테 소리를 치는 거예요. 5분 동안 오만불손하니 어쩌니 하면서 저를 야단치는 거예요. 공무원들이 말을 잘못하면 자기 직업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가급적 시비에 안 걸리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예요. 미술관 마스터 플랜이 왜 없어요? 미술관 공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매일매일 공사 계정 보고가 올라가고 있는데요.”
―이번에 국회에 실망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국회가 국회의원과 행정부가 모여서 국가를 위해 무얼 할 수 있는가를 토론하는 자리가 돼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요. 공무원도 그렇지만 국회의원은 그렇게 소리 지르고 해야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잘못된 사람들끼리 평형을 유지하는 상황과 같아요.”
―사퇴는 왜 했습니까.
“잘못된 사람들끼리의 균형을 깨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해요. 그렇다면 국회의원들이 그만두겠습니까, 공무원이 그만두겠습니까? 결국 나 같은 사람이 그런 균형을 깨서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사과는요.
“소동이 일어나고 여야 간사와 위원장 등이 저를 국회 모독죄로 제소하지 않는 대신 제가 사과하는 걸로 타협을 봤대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는 사과를 못하겠다고 했죠. 그러니까 ‘사과하고 지나가면 되는데 왜 그러냐, 그런 거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냐’ 그러면서 저를 설득하는 거예요. 그래서 ‘장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하고 사과를 한 거죠. 사과를 하고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먹은 겁니다.”
―민주당 최종원 의원과는 심한 언쟁을 벌인 것으로 보도됐는데요.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회의원으로서의 위엄은 없이 미술관 명칭으로 한글을 쓰지 않고 왜 ‘UUL’이라는 영어를 썼느냐고 야유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사실 젊은 교수 일곱 분이 모여서 여섯 달 간 작업에서 만든 명칭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문자를 보낼 때 ‘나는’을 ‘난’으로 ‘내일’을 ‘낼’로 줄여서 보내잖아요. ‘울’도 ‘서울’을 그런 식으로 표기한 건데 영문으로는 ‘UL’이 돼야 하지만 디자인을 고려해서 ‘U’를 하나 더 넣어 ‘UUL’로 한 겁니다. 저도 사실 잘 모르지만 그렇게 채택됐기 때문에 보고를 했던 거고요. 젊은 교수들이 힘들게 한 작업에 대해 그렇게 야유조로 질문하니까 저도 화가 났고 그 교수들에게 미안해서 소리도 쳤던 거예요. 그랬더니 저한테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리를 꼬았다 하는 시비가 나왔던 거죠. 언론이 전후 상황은 전달 않고 그런 부분만 보도했는데, 뭐 사실 그런 장면이 뉴스거리는 됐겠죠. 최 의원은 원래 그런 걸로 유명한 분인데… 원래 연극하시는 분이니까.”
―그때 정말 바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습니까.
“사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제 버릇이에요. 다리를 꼬았다고 해서 건방지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제 앞에 앉아 있는 국회의원들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어요. 그 양반은 테이블이 가려 주니까 보이지 않을 뿐이고 나는 의자만 있으니까 훤히 보였던 거죠. 내가 그분들보다 적어도 나이가 10년, 15년 위인데 아무리 국회의원이 높다고 해도 거만하다고 하는 건 그렇지 않나요?”
장관 지낸 그가 2급으로 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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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스트 부총장 시절 차남 배정완씨와 함께 있는 배순훈 전 장관. |
배 전 장관은 2009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했다. 장관을 지낸 그가 정부 2급 상당 직급인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간다니까 그 배경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혹시 주저함은 없었습니까.
“아뇨.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이 나이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게 기뻤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사실 과거에는 미술계에 평생 종사했던 분들이 해 왔죠.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 미술관이 세계적인 미술관이 되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관장에 응모했던 겁니다.”
―서양화가인 부인 신수희(申秀喜)씨와 건축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차남(裵廷浣·배정완)의 권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집사람은 반대했어요. 미술 분야는 자기 분야인데 남편이 자기 분야에 들어오는 걸 싫어했죠. 제가 3년 하고 나니까 이제야 제가 추진했던 정책적인 방향에서는 동의를 해 주는 정도죠. 둘째 아들은 아직 미술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인지 ‘아버지 일은 아버지가 결정하시라’고 했죠. 그런데 예전에 제가 텔레비전 광고에 나갈 때는 온식구가 반대했어요. 아들은 ‘아버지의 초상권은 자식의 자산’이라면서 반대했어요. 어디 나가서 누구누구 아들이라고 하면 영향을 받는다는 거였죠.”
―광고 출연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때 함께 출연했던 유인촌 전 장관과의 인연이 작용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냥 우연히 유 장관 밑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미술관장 하는 동안 전혀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제 스스로 미술관장직에 응모했고, 된 겁니다.”
―CEO 출신 미술관장은 어떤 장점이 있습니까.
“미술관은 전시, 작품 수집, 교육 이렇게 3분야로 나뉩니다. 전시는 전문적인 지식도 있어야 하지만 우선은 볼 줄 알아야 해요. 보고 느껴야 해요. 그러려면 많이 봐야죠. 저는 CEO로서 비즈니스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까 전시를 볼 기회가 많았어요. 어떤 때는 한 해의 200일을 해외에서 보내기도 했는데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시간이 비는 경우가 많아요. 그 시간에 저는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감상했습니다. 세계적인 미술관의 좋은 전시는 부자들이 기증하는 작품을 모아 놓은 곳이 많습니다. 그 분야도 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고요. 또 서울 기무사 부지에 미술관을 지으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큰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한 경험이 있거든요. 미술관 건축은 건축의 꽃입니다. 건축가들도 미술관을 한 번 지어 보는 게 꿈이죠. 제가 노먼 포스터나 장 누벨 같은 세계적인 건축가를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죠.”
―미술관장으로 오기 전 한국과학기술원으로부터는 정년이 없는 특훈교수직까지 제의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사실 한국과학기술원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과학기술원을 포기한 것은 그렇게 큰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큰 포기는 제가 그 이전까지 세계적 은행들의 컨설팅을 해 왔는데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경제적 문제였습니다.”
대통령·대통령 후보들과 나
―직접 겪어 보니 대우전자 회장과 정통부 장관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까.
“비교할 성질의 것은 아니죠. 제가 대우전자 회장 하다가 정통부 장관이 됐을 때 사람들은 굉장히 출세한 것으로 알았는데, 사실 월급도 줄어들었지 데리고 있는 직원도 줄었죠. 당시 대우는 세계 20개국에 공장이 있었어요. 정통부를 맡는다는 게 오히려 범위는 줄어든 셈이었던 거죠. 직위는 장관이 높다고 할 수 있지만 별로 좋은 게 없어 보여서 당시에는 상당히 망설였었어요. 그러다가 40여 년 동안 야당하던 분이 대통령이 됐으니까, 도와드려야지 하는 맘으로 받아들였던 거지요.”
―정통부 장관은 김우중 회장이 추천했던 겁니까.
“그건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정통부 장관직도 망설였던 분이 노무현 정부 때는 왜 또 장관급 직위를 맡았습니까.
“그때도 망설였어요. 노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 대우자동차 노사분규에 아주 역할을 많이 하셔서 골치 아팠던 기억도 있고 제가 김대중 정부 때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한 노 대통령보다 선임 장관이었거든요. 그런데 노 대통령이 10여 명의 후보를 추천받아 봤는데 저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거예요. 재산 문제나 이런 것들도 안 걸리고요. 개인적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해서 맡은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을 맡을 때처럼 대통령께도 도움 되고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맡은 거죠.”
―그렇다면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을 맡았던 것은 이명박 대통령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미술관장 자리가 뭐 그리 대단한 자리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좋은 미술관 하나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과는 과거 경쟁업체 사장으로서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이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하실 때 도와달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죠. 제가 경쟁 업체 사장들을 덜 존경하는 게 있었거든요. 대통령이 되시는 분이 누구든 국가를 위해 좋은 미술관을 짓는다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 출신 전직 대통령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쭙는데 박근혜(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와도 인연이 있다면서요.
“특별한 인연은 아니고요. 제가 정통부 장관 시절인데 박 대표가 본회의에서 저한테 ‘정보고속도로에 대해서 설명하십시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버님 대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놓더니 이 시대에는 그 따님이 정보고속도로로 세계를 앞서 가려고 하신다. 야당 의원의 질문이지만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1등 가는 정보고속도로를 놓겠다’고 답변했더니 나중에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이회창(李會昌) 자유선진당 전 총재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시절 정치 참여를 권유했는데 거절했다면서요.
“김대중 대통령 당선될 때니까 1997년도였을 거예요. 당시는 제가 광고에 출연했던 이미지도 남아 있고 하니까 이 후보의 측근이었던 서상목 의원이 찾아와서 지원해 달라는 거예요. 방송 찬조연설이었겠죠. 그때 서 의원이 ‘50만표 이상 차이 날 것’이라고 했지만 거절했어요. 아마 그래서 정통부 장관이 됐는지도 모르죠.”
빅딜 반대는 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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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7월 10일 청와대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국정추진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배순훈 전 장관. |
―정통부 장관에서 물러날 때 밝힌 ‘빅딜’ 반대는 소신이었습니까.
“딜을 제가 반대했죠. 결국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은 안 됐어요. 제가 말하고자 했던 뜻은 빚의 스와프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빚을 줄여야지 그걸 바꿔치기 하는 것은 IMF에 좋은 인상을 안 준다고 한 거죠. 구조조정을 하는데 재벌기업이 빚을 바꿔치기하는 걸 반대하는 게 제 빅딜 반대였어요. 당시 대우 김우중 회장은 빅딜을 밀어붙이려 했고 이건희(李健熙) 삼성 회장은 자동차 산업을 놓지 않으려고 했어요. 대우 입장에서는 삼성자동차를 인수하면 빚이 4조원이 늘어나는데 지금도 큰돈인 그 빚을 또 대우가 떠안는 빅딜은 문제가 있다고 본 거죠.”
―그때만 해도 세간에는 대우와 김대중 정권이 밀접하다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헌재(李憲宰) 금융위원장이 대우 출신입니다. 김우중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었고요. 역시 대우 출신인 저는 정통부 장관이었고요. 김대중 대통령이 대우와 가깝다는 소문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요. 일본 닛케이(日本經濟) 신문이 제가 장관이 되니까 ‘대우 시프트다’ 하는 보도를 하기도 했죠. 문제는 IMF였어요. IMF의 요구대로 정책을 추진하면 5대 재벌 중 한두 개는 없어져야 했으니까요.”
―대우전자는 당시 어떻게 처리됐어야 한다고 봅니까.
“외국인한테 팔았으면 좋았을 겁니다. 론스타와 외환은행 얘기가 최근까지 있지만 사실 다른 기업이 외환은행을 사면 이익이 안 남는다고 생각할 때 론스타는 이익이 난다고 생각해서 투자를 한 거 아닙니까. 투자를 해서 수익을 얻어 간다면 그게 누구 돈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항상 국내 자본이 이득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재벌을 싫어한다면서도 외국 자본과 문제가 생기면 재벌 편을 드는 게 우리 정서예요. 돈에 무슨 꼬리표가 붙었어요? 그냥 돈이지. 그렇게 냉정한 평가를 했어야 하는데 대우전자를 못 팔았죠. 팔 수 있었는데 못 팔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렇다면 GM의 대우자동차 인수는 잘된 건가요.
“GM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싼값에 잘 인수한 건데 우리 경제 입장에서 보면 일자리가 중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잘못한 거라고 봐야죠. 대우자동차 채권을 핸들링하는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못 본 거죠. 일자리는 열어 놓고 투자한 것에 대해 보장해 주고 해야 하는데 일자리에 대한 생각은 덜했던 거죠.”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마켓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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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현대미술관장 임명 직후의 배순훈 전 장관 모습. |
“김우중 회장은 세계경영을 마켓 중심으로 본 측면이 있어요. 와이셔츠를 예로 들면 과거 독일 국민 1인당 대우가 만든 와이셔츠 석 장을 입을 만큼 독일에 와이셔츠 수출이 많았어요. 독일이 명품 소비로 가면서 시장은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동남아국가 등 후진국가로 이동했죠. 우리가 생산하는 것을 후진 국가에 가서도 얼마든지 팔 수 있었기 때문에 기술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죠. 중요한 것은 시장 개척이었죠. 다른 제품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게 대우는 아프리카에도 진출했고 동유럽에도 진출했던 거죠.”
―기술 아닌 마켓 중심의 세계경영은 1990년대 말에 그 수명을 다한 겁니까.
“아니죠. 지금 동구권 경제성장이 굉장히 빠르잖아요. 그 시장을 계속 확보했으면 우리가 꾸준히 먹고살 수 있었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 둔 거죠.”
―김우중 회장은 왜 실패한 겁니까.
“기업가가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은 캐시 플로(cash flow)상의 문제예요. 계속 적자가 나서 회사가 망하는 게 아니고 현금 흐름이 막히면 회사는 스톱할 수밖에 없는 거죠. 김 회장이 경영을 잘못해서 실패했다고 보면 안 됩니다. 다만 그 시대의 캐시 플로 매니지먼트를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갖고 있죠.”
―20년 이상 가까이서 지켜본 인간 김우중은 어떤 사람입니까.
“긴 시간 김 회장과는 해외 출장도 함께 많이 가 봤고 한 호텔방에서 묵기도 했어요. 굉장히 다정다감한 분이에요. 쇼맨십도 있고요.”
―요즘도 만납니까.
“가끔요.”
―건강이 안좋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원래 담배를 피우셨는데 심장 수술 후에는 끊으신 것 같고 골프도 열심히 치세요. 건강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의욕을 다시 찾은 건가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탱크주의는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겁니까.
“그렇죠. 기본 기능에 충실해야 해요. 그래서 제가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고요. 디자인이란 미학적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기능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름답게 보이게 마련이에요. 기능이 좋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기계도 기능이 좋아야 아름답게 보이는 겁니다. 그게 탱크주의로 이어지는 거예요.”
―앞으로 공직에는 나가지 않을 생각입니까.
“안 맡으려고 해요. 정부로부터 돈을 받는 일자리는 안 하겠다는 생각이죠.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면 안 돼요. 그러려면 골프도 치지 말고 검소하게 살아야 해요. 그런데 이 나이에 검소하게 살기 싫거든요.”
둘째 아들이 배 전 장관 회갑연에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세 가지 이유에서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첫째, 남자로서 수수한 이상을 가지고 거기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둘째, 남편으로서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했습니다. 셋째,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둘째 아드님의 글처럼 살아왔다고 자부합니까.
“아뇨. 그렇게 완벽하면 그건 사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런 노력은 해 왔던 것 같아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