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인규 감독의 문하생으로 입문해 연출생활 4년 만에 <유혹의 거리> 만들어
⊙ 한중합작 <순간은 영원히>로 홍콩 영화계에 스카우트돼
⊙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 요청으로 귀국했다 전두환 정권때 가혹한 검열에 환멸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한중합작 <순간은 영원히>로 홍콩 영화계에 스카우트돼
⊙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 요청으로 귀국했다 전두환 정권때 가혹한 검열에 환멸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정창화(82) 감독은 요즘 한국 영화팬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한국영화사에서 그의 이름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아직 건재해 한국영화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그런 전설적 존재이다.
광복 후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의 거장 감독이었던 최인규의 문하생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1950년대 초 본격적인 액션영화를 만들며 장르영화를 이끈 주요 감독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 말 아시아영화의 중심지였던 홍콩 쇼브러더스에 스카우트된 이후 만든 영화 중 한 편인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 1972)은 당시 미국으로 수출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사운드 오브 뮤직>과 동시에 개봉돼 이룬 쾌거이니 흥행의 규모를 알 만하다.
세계 최대의 영화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IMDB는 이 작품을 ‘미국 쿵푸영화 열기에 불을 지핀 작품’으로 평가해 놓고 있다. 2003년에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48) 감독의 <킬 빌>은 이 영화에 대한 오마주(hommage·특정영화에 대한 존경심으로 만든 재현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 안에 꼽는다. 2004년 박찬욱 감독이 <올드 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을 때 타란티노 감독이 심사위원장이었던 것을 보면, 정 감독의 그늘이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계에 적지 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
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또 2005년 칸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선정, 초대됐다. 명실공히 세계적인 ‘고전영화’로 인정받는 일인 칸의 클래식 부문 초청은 영화감독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런 정 감독을 재조명하는 일은 어쩌면 한국영화의 잊혀진 중요한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1950년에 데뷔작을 만든 뒤 1977년까지 한국과 홍콩을 넘나들며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1996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까지 영화사인 화풍흥업을 이끌면서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렇게 자신의 생애를 영화에 바쳤으며, 세계적인 반열에 올라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낸 자랑스러운 한국감독 1호인 그가 왜 영영 한국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그 격동을 세월을 거치고 난 뒤 이제 전설로만 남아야 했던 숨은 이야기 속에는 한국영화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가 만든 영화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국내 초기 장르영화를 만들던 1968년까지 기간과 1968년 홍콩으로 떠난 이후 쇼브러더사와 골든 하베스트사의 전속감독으로 스카우트돼 액션·무협영화에 매진하던 시절이다. 그 시기 한국과 홍콩의 영화산업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쇼브러더스는 세계 각국에 영화를 배급할 수 있는 1200여 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동시녹음 시설이 있는 스튜디오가 10개에 명나라, 청나라 등을 배경으로 한 사극부터 현대물까지 모두 촬영할 수 있는 무비타운 내의 대형 오픈세트가 엄청난 규모로 들어 있었다. 쇼 무비타운이라는 영화마을에는 배우와 스태프가 함께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여러 채 지어져 있었다. 감독이 실력만 있다면 이 모든 자산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으니 전후 궁핍했던 한국의 영화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분위기 속에서 이소룡(李小龍·리샤오룽)과 성룡(成龍·청룽)이라는 세계적인 무술배우가 등장하던 시점의 이야기다.
[ 제1기 ]
1950년 데뷔작 <유혹의 거리>에서 1968년 작 <허무한 마음>까지 국내 영화 시절
정 감독은 1928년 서울에서 영흥실업주식회사라는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부친 정위영씨의 2남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기 때문에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예술을 향한 열정을 삭히지 못해 서울음악학교(지금으로 말하면 예술대학교)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하던 중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를 보고 영화에 매료됐다. 그는 2학년 재학 중 최 감독의 형과 절친한 사이였던 아버지를 졸라 최 감독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연출수업 4년 만에 아버지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아 데뷔작 <유혹의 거 리>(1950)를 만들었지만 때마침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녹음만 남겨 놓은 채 필름이 전소됐다. 이 영화에는 요즘 방송인으로 더 인기를 끄는 탤런트 조형기의 아버지 조항, 그리고 구봉서 등 한창 잘나가는 배우는 모두 출연한 야심작이었다.
죽음을 넘나드는 전쟁터를 체험한 후 그가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때는 1953년. 그는 당대의 문화 예술인의 모임터였던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을 둥지 삼아 다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나라자 다방은 김지미씨가 이곳에서 차 나르는 일을 하다가 감독들의 눈에 띄어 영화배우로 픽업된 장소이기도 하다.
정 감독 역시 1959년에 김지미씨를 기용해 <사랑이 가기 전에>라는 애정물을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은 시인 조병화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박춘석씨가 영화음악을 맡아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이다. 당시 조병화 시인의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가 전후 국내 출판계에서 최초로 베스트셀러를 기록할 만큼 인기를 구가한 영향으로 만든 시적 영화였다.
정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촬영 중 오토바이가 전차 레일에 미끌어지며 뒷좌석에 타고 있던 김지미씨가 얼굴을 아스팔트에 깔고 15m 이상 미끌어진 일이다. 이 사고로 김씨는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상처인 얼굴 전면과 코가 거의 갈려 버렸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정 감독이 즉시 병원으로 후송해 응급실에 가서 다섯 시간 이상을 수술 받았지만 당시 국내 성형수술 기술로는 얼굴 복원이 어려웠다. 3개월간 입원하면서 기초 복원수술을 한 뒤 일본으로 떠나 유명한 성형외과에서 재수술을 받고 천신만고 끝에 영화를 재촬영해 마무리했다. 당시 정 감독은 병원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김씨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이들의 우정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화홍련전>의 특수효과 담당은 임권택
정 감독은 김지미씨와 다시 <장희빈>(1961)에서 호흡을 맞췄다. 이 영화는 장희빈이라는 역사 속 인물을 최초로 영상으로 끌어낸 작품으로, 그 이후 영화와 TV사극의 단골 주제로 유명 여배우들이 타이틀롤을 맡았다. 김씨는 독기 있고 아름다운 팜므파탈 장희빈의 역할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장희빈>처럼, 정 감독이 영화를 통해 ‘첫 시도’의 기록을 세운 부분은 적지 않다. 1956년 작 <장화홍련전>을 촬영할 때는 현재의 CG(computer graphic) 효과에 필적할 만한 각종 수동 특수효과를 만들어 내 공포물의 특징을 화면에 잘 살려 냈다. 유령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배우 대신 배경그림이 그려진 대형 원통을 돌리면서, 선풍기로 귀신의 머리카락을 날려 효과를 배가시키는 등 기발한 화면구성으로 관중을 사로잡았다.
이때 특수효과를 만들어 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을 한 스태프가 바로 임권택 감독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지만, 당시 그의 연출부에 들어왔을 때는 “아무 일이나 시키면 다 하겠다”는 10대 후반의 가출 청소년이었던 것으로 정 감독은 기억하고 있다.
연출부에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임 감독은 그 시절부터 눈에 띌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만 불리면 바로 사무실로 어김없이 나와서 묵묵히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해내는 걸 보고 정 감독은 그를 키워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임 감독은 정 감독 휘하의 연출부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임 감독 이외에 <첩혈쌍웅>과 <영웅본색>의 오우삼 감독도 홍콩 시절 그의 연출부를 통해 데뷔한 대감독이다.
정 감독이 이들에게 전수한 가장 큰 연출수업은 바로 정확한 콘티(continuity)를 바탕으로 촬영하는 일이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정확한 콘티로 영화를 찍는 감독은 많지 않다. 그의 연출부였던 전우열 감독은 얼마전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정 감독의 연출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창화 감독님의 콘티는 정확하고 그림의 완성도가 높아 콘티만 봐도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술회했다.
1953년 개봉된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서부극 <셰인>은 그의 영화에 일대 변화를 일으키는 자극제가 됐다. 이 영화를 보고 그는 ‘빠른 전개와 흥미로운 상황설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몽타주 기법(각각의 쇼트와 쇼트를 연결해 제3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편집기법)을 공부했고, 그 리듬을 살려 액션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영화가 바로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과 <지평선>(1961)이다. 이 두 영화는 지금까지도 정 감독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은 전쟁 중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일곱 살 짜리 어린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암투를 그린 작품으로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받고 해외에 수출까지 됐지만, 원본을 보내는 바람에 아깝게 유실됐다. <지평선>은 청춘을 바친 독립군의 회한을 그린 작품으로 우리나라 영화 중 첫 대형 전투신으로 엄청한 제작비를 투자한 작품이다.
정 감독은 매 영화에 새로운 시도로 한국영화계를 흔들고 있었지만, 당시 영화계는 암울한 상황에 접어들어 있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다음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전격적으로 발표한 영화법에 의해 영화계가 하루아침에 재편돼 71개사에 이르던 영화사가 17개사로 통합되었고, 신규 영화사 등록은 거의 불가능했다. 시나리오는 사전심의를 받았고, 작품이 나오고 난 뒤 검열도 강화됐다. 한국영화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제작된 <순간은 영원히> (1966)가 그에게는 홍콩영화계로 스카우트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한국과 홍콩의 합작품인 이 작품은 홍콩 번화가에서 촬영됐다. 총격전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시내 모습을 현실감 있게 담아 내기 위해 정 감독은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는 주연배우들을 풀어 놨다. 경찰이나 관공서에는 미리 연락을 해 놓았지만 시민들은 몰랐다. 배우들의 클로즈업은 뒷골목에서 담아 냈다. 난데없는 총격전에 거리는 원하던 대로 곧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이 모습을 지켜본 쇼브러더스의 란란쇼 사장은 그를 극찬하면서 1년에 세 작품씩 5년 계약을 제의해 왔다. 그는 <허무한 마음>(1968)을 마지막으로 한국영화계를 떠났다.
[ 제2기 ]
1969년 <천면마녀>에서 1977년 <파계>까지 홍콩영화 시절
액션물 감독으로 홍콩에 스카우트된 정 감독은 란란쇼 사장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 무협영화에 도전했다. <여협 매인두>(1970)가 그 첫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역은 홍콩 여배우 초교였고, 열아홉 살이던 성룡이 그녀의 스턴트맨이 되었다. 외국감독이 중국 무협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견제를 하던 중국감독들도 이 작품을 본 후 인식을 모두 새롭게 갖게 됐다.
이 작품 이후 란란쇼 사장은 그에게 거꾸로 무협영화를 부탁하는 처지가 됐다.
그렇게 해서 만든 작품이 그의 대표작인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이다. 이 영화를 놓고 처음에 미국 컬럼비아와 워너브러더스가 배급권을 놓고 경합했다. 결과는 워너브러더스의 승리로 미국 전역에 개봉해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홍콩영화가 미국에 상륙하는 계기가 됐다. 영국 등 유럽에서는 <킹 복서>로, 홍콩에서는 란란쇼 사장의 제의로 <천하제일권>이라는 타이틀로 각각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당시 신필름의 사장이었던 신상옥 감독이 한중합작품 <철인>이라는 타이틀로 극장에 걸었는데, 그때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재편집을 한 상황이라 그는 이 영화를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영화산업은 외화수입 판권경쟁터와도 같았다. 한 편 수입에 3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합작영화로 둔갑하면 이런 경비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국배우 3명이 출연하면 합작으로 인정되므로 이런 방법을 통해 위장 합작되는 수입영화가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작품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됐던 주연배우 로레는 2002년 11월 중국의 어느 빈민굴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쇼브러더스와의 행복한 시절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란란쇼 사장이 그의 후처인 가수 모나팡에게 경영권을 넘긴 뒤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영화에 대해 잘 몰랐던 그녀는 제작비를 절감하겠다며 의상까지 짧게 제작하라고 주문할 정도의 문외한이었다. 이런 그녀로부터 그는 떠났다. 모나팡은 현재 홍콩 최대의 방송사인 펄 TV의 사주이다.
모나팡의 출현으로 쇼브러더스를 떠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란란쇼의 오른팔 격이었던 레이먼드 초가 골든하베스트 영화사를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는 <정무문>의 로웨이 감독, 황풍 감독, 그리고 정 감독과 함께 회사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의기투합했다. <흑야괴객>(1973)이 그가 골든하베스트에서 처음으로 만든 작품이다. 당시 골든하베스트는 신생회사라 조건이 열악했다. 촬영소가 없어 야외촬영에 더 의존하다 보니 화면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평을 받아 아시아 지역에서 흥행에 피치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최은희, 납북 직전 전화로 만나자고 졸라
그즈음 세 명의 감독이 초와 회의를 할 때, 그는 무술 전문배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때 추천된 사람이 이소룡이었다. 그는 당시 미국 TV 시리즈 <그린 호넷>에서 주인공 보디가드로 출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골든하베스트와 이소룡의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로웨이 감독은 전속 촬영소가 없는 홍콩을 떠나 방콕에서 이소룡을 만나 올로케이션으로 <당산대형>을 찍었다. 이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며 골든하베스트는 기반을 다졌다. 다음에는 <취권>으로 스타가 된 성룡을 스카우트해서 전속배우로 만들었다.
회사 재정이 좋아지면서 촬영소를 빌릴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정무문> <용쟁호투> <사망유희> 등을 만들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의 히트행진을 이어 갔다. 그의 마지막 작품 <파계>(1977)도 그곳에서 촬영했다.
그 역시 골든하베스트의 다른 감독처럼 이소룡과 영화를 계획하고 있었다. 무술배우로서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줄 데가 없다는 데 한계를 느낀 이소룡이 그에게 제안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소룡은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서 로레와 같은 역할을 해 보고 싶어했다. 둘은 뜻을 합했다.
하지만 기획단계에서 이소룡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인은 ‘마약과용 쇼크사’였다. 그즈음 이소룡과 골든하베스트사의 계약이 만료되던 시점이라 소문은 흉흉했다. 골든하베스트가 이소룡을 잡기 위해 딤페이라는 여배우를 연인이 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소룡이 그녀의 집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골든하베스트의 수족인 그녀는 그에게 마약을 권했고 과다복용으로 이끌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을 뒤로 하면서 그는 1973년 7월 20일 사망했다. 정 감독 역시 쇼브러더스 소속 감독 시절 회사에서 그를 잡아 두기 위해 연결해 준 여배우를 거절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소문이 실체에 가까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정 감독이 홍콩에서 골든하베스트 소속 감독으로 지내던 시절,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월북과정에 연루됐던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1978년 1월 14일 새벽 최은희씨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급히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촬영스케줄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고 저녁에 보자고 했지만 과하게 졸랐다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저녁으로 약속을 미루고 일이 끝난 뒤에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최은희씨가 나타나질 않았다.
며칠 후 그는 한국에 있는 한 일간지 정치부 기자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최은희씨가 북한에서 대남방송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 일 이후 그는 홍콩 경시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최은희씨와 마지막까지 통화를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씨가 그를 애타게 찾았던 것이 함께 월북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후 다시 남쪽으로 넘어온 최은희씨는 그에게 당시 일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신상옥 ‘월북’ 이후 정부 요청으로 귀국
최은희씨가 월북한 후 6개월 만인 1978년 7월,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나타났다. 전처였던(당시 신 감독은 배우 오수미씨와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최은희씨가 월북한 이후 영화사 허가가 취소되고 활동에 제약을 받던 시점이었다. 신 감독은 정 감독에게 영사관의 지인을 통해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여권의 기간연장을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신 감독의 행동반경을 주시하고 있었던 듯 귀국을 종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분위기를 전하자, 신 감독은 “은희에게 가겠다”는 말을 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정 감독은 며칠 후 신 감독이 이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8년 후, 이들 부부는 북한 김정일의 돈 250만 달러를 챙겨 들고 다시 탈출했다. 정 감독의 증언대로라면 당시 정부 측에서 이들 부부가 강제 납북됐다고 발표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홍콩에서 탄탄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에게 귀국 제안이 왔다. 당시 홍콩을 방문한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지원을 해 줄 테니 돌아오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신 감독의 월북으로 빈 국내 영화계를 이끌 사람이 필요했던 탓이다.
그는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화풍흥업’이라는 영화사를 차렸다. 홍콩에서 번 돈을 가지고 당시 영화사 허가규정에 따라 200평 규모의 촬영소와 촬영기 두 대를 구입했다. 또 영화발전기금 5000만원을 기탁금으로 냈다.
한 해에 3편이라는 의무제작 편수를 채우면서 화풍흥업을 이끌어 가는 일은 버거웠지만 정부의 협조로 탄탄하게 꾸려 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갔다. 이영희 공연윤리위원장의 가혹한 심의를 견뎌 내지 못하고 회사가 도산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시스템과 자본의 벽에 부딪히면서 그는 결국 1996년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한국영화계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생활을 하면서 TV도 보지 않을 정도로 영화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의 딸조차 그가 감독이었던 것을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칩거하던 중인 2003년, 제8회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초대돼 모처럼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영화인들의 환대에 그간 억눌렸던 가슴이 한순간 터지는 것 같은 감동을 맛보았다고 한다.
그 행사를 계기로, 그 다음해 7월에는 파리시장이 주최하는 파리 시네마 인터내셔널 회고전에도 초청받아 파리를 방문했다. 12월에는 홍콩 필름아카이브 회고전이 있었다. 1977년 홍콩을 떠난 이후 첫 공식방문이라 그에겐 감회가 깊은 여행이었다. 2004년은 이렇게 뜻깊은 해였다. 그러고는 2005년 칸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초청되며 정 감독 생애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한때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상처를 받았던 영화계에서 뒤늦게 명예를 회복한 그는 이제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남은 인생을 걸고 있다. 지난해부터 세계 영화시장인 LA에서 ‘한국국제영화제’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한국 정부의 지원은 미약하지만, 그는 이 영화제를 키워 한국영화 수출의 베이스캠프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대단하다. 한때 그를 몰라주는 한국영화계에 애증이 깊었지만,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듯, 한 번 영화인은 끝까지 영화인인 게다.⊙
▣ 정창화 인터뷰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라. 그리고 도전하라”
정창화 감독은 9월 15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한 전작전(全作展)을 치르기 위해 9월 1일 한국에 도착했다. 시차 때문에 피곤하다지만, 건강함을 보여주는 팽팽한 피부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60대로 보이는 동안 외모’라는 말을 뒷받침해주듯 그를 한결 젊어 보이게 했다.
―외국에선 여러 차례 전작전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고전영화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편이지요?
“고전영화는 족보와도 같은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관심이 없어요. 프랑스에서는 제 회고전 때 50년 전 영화인데도 1300 객석이 꽉 차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 먹으면 영화보다는 골프를 치겠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슬퍼져요.”
―전작전을 하면서 지난 작품을 볼 기회가 많을 것 같은데, 가장 아끼는 작품은요?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이전에 제가 스피디한 액션영화로 전환해서 만든 <햇빛 쏟아지는 벌판>과 <지평선>이에요. 이전에는 한국영화가 전부 대사 위주의 일본영화 영향을 많이 받아서 템포가 느렸거든요. 이것 말고는 제가 국내에서 만든 건 내세울 게 없어요.”(웃음)
―그 작품은 원판을 수출하는 바람에 분실했다고 하는데, 찾아봤습니까.
“김시현 조감독을 홍콩으로 보내서 찾아봤어요. 그런데 못 찾는 겁니다. 벌써 오래전 얘기죠. 한 30년 전쯤 될 거예요. 이 작품들을 잃어버리면서 정창화 감독 하면 국내에서 대표작품이 없으니까 참 애석한 거죠.”
―두 작품이 흥행에는 성공을 했었나요.
“물론이죠. 왜냐면 외국영화에 휩쓸렸던 관객들이 그때부터 돌아온 거예요. 그러면서 제작활동이 활발해졌죠. 그때 한국영화는 관객을 뺏겨서 고사 직전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그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니까 관객이 되돌아오고 투자자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어요.”
―한국영화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의미있는 작품이었겠네요. 최인규 감독 밑에서 4년간 연출부 생활을 하고 1953년 <최후의 유혹>으로 데뷔를 했죠. 데뷔작이 작품성은 영화계에서 인정을 받았는데 당시 흥행에는 실패를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왜 그랬나요.
“6·25 한국전 얘기거든요. 부산으로 피란 가서 그때는 아무도 영화제작을 꿈도 못 꾸고, 당장 먹고살기 힘들 때였거든요. 당시 제 부모님이 해상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유산이 나왔어요. 그 유산을 가지고 데뷔작을 만든 거예요. 부산 우민관에서 개봉했어요. 그렇게 만들었지만, 피란 와중에 누가 돈이 있어서 극장에 옵니까. 그러니까 뭐, 그 돈 전부 날아간 거죠.”
깡통 두개에 설렁탕과 밥 빌어 오는 훈련받아
―정 감독 연출부 출신인 임권택 감독 회고 인터뷰 보니깐요, 감독님한테 예술적인 깨달음보다는 필사의 생존비결을 더 배웠다고 얘기했어요. 당시에 영화계 분위기로 봐서 이런 말을 했던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의미인가요.
“그게 나도 최인규 감독 밑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자격이 갖춰지는 거예요. 영화라는 게 기복이 심하잖아요. 저는 출근하면 명동 한복판에서 걸인들이 들고 다니던 깡통 두 개에 설렁탕과 밥을 받아 오는 일로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정신병자처럼 쳐다보는 시선을 견디는 일종의 특별훈련이었죠. 그렇게 배웠으니까 권택이한테도 그렇게 했어요.”
―옆에서 지켜보기에 임권택 감독은 어떤 조감독이었어요?
“노력파라고 할 수 있죠. 그때는 통행금지가 4시에 해제가 되거든요. 근데 다섯 시만 되면 사무실에 나와서 현장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체크해요. 그래서 걔를 믿기 시작한 거예요. 다른 아이들은 뭐 ‘7시 집합’ 하면 6시40분이나 돼야 나오죠. 그래서 내가 키워 주면 물건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정 감독은 작품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연구를 통해서 콘티작업을 완성한 다음에 촬영에 들어가는 분으로 유명한데, 그런 습관도 최인규 감독한테 배운 건가요.
“그분한테 아쉽다고 느낀 게 콘티를 절대로 공개를 안 하는 겁니다. 조감독이라는 게 콘티를 봐야 준비를 어떻게 한다는 것을 알고 역할을 하잖아요. 준비가 안되면, 그 양반 성질이 좀 나빠서 발길로 걷어차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 양반이 화장실에 가거나 배우들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얼른 그걸 봐야 했어요. 저는 조감독한테 콘티를 완벽하게 만들어서 복사를 해서 다 나눠줘요, 그림까지 그려서. 그거 보면 자기가 나가서 감독도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거느리고 있던 조감독들은 잘 배워서 감독이 쉽게 됐어요. 기본적으로 콘티는 건축설계도니까 소홀히 할 수 없죠.”
―쓰신 글 속에 가장 큰 영감을 줬던 영화로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명작 <세인> 얘기가 여러 군데서 나오던데요, 무엇을 배웠나요.
“그 작품이 저예산에 굉장히 템포도 빠르고 우리나라 시장여건에 맞는 걸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봤죠. 지금 같으면 DVD나 비디오테이프가 있어서 몇 번이고 다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엔 극장밖에 영화를 볼 곳이 없었어요. 거기에 몽타주 기법을 공부해야 되는데 눈으로 자꾸 봐야 알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단성사 사장을 찾아가 가지고 몇 군데 중요한 대목만 빌려달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상영하는 영화를 빌려줄 리가 없죠. 처음엔 미친놈 취급하더라고요. 몇 번 더 찾아갔어요. 영화상영이 끝난 밤 시간에 몇 장면만 편집기에 걸어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졸랐어요. 하도 여러 번 조르니까 단성사 사장이 결국 졌어요. 그래서 세 번을 빌려다가 편집실에서 프레임을 재면서 몽타주 방법을 찾아냈어요.”
―프레임 길이를 다 재 보신 거예요?
“네. 거기서 어떻게 몽타주가 템포 빠른 신을 만들 수 있는가 연구를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액션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세인>에서부터 됩니다.”
액션감독에서 무협영화 감독으로 바꾼 이유
―당시 홍콩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국영화의 병폐가 무엇이었나요.
“제일 심각한 건 영세성이었어요. 거기에다 배우들이 더블 플레이를 하니까 촬영을 한 달에 네 번밖에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 제가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거는 제작자들 때문이었어요. 당시 제작자들은 감독 이름을 팔아서 투자자들을 모집했는데, 대박 내서 팔자 고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이라 감독들을 충전할 기회도 없이 돌렸어요. 전 도전정신이 다른 감독들에 비해서 강했어요. 항상 새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나도 외국으로 뻗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홍콩영화계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때 일본에서도 유명한 감독들이 와 있었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재계약이 안됐죠. 그래도 용케 저는 우선 액션감독으로 스카우트돼서 5년 계약을 했는데, 이 사람들이 저를 부른 것은 그때 홍콩에 무협영화가 한창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거든요. 저같이 액션영화를 하는 감독이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제가 처음으로 <천면마녀>(1969)를 만드니까 란란쇼가 홍콩에 있는 쇼브러더스 전속 감독들한테 보여주고 콘티라든가 몽타주 이런 것을 연구해 보라고 지시를 하더군요. 저는 그때 ‘어느 때고 얘네들이 액션영화를 배우면 정창화는 별 볼이 없는 사람이 되겠구나’라는 위기의식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중국 감독의 전유물인 무협영화에 도전했어요.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지요. 100편 이상이 되는 중국감독들의 작품을 하루에 3시간 잡아서 전부 봤어요. 적을 알아야 내가 이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 신비스러운 게 참 많아요. 중국사람이 보는 것하고 외국감독인 내가 보는 건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 영화를 작품화하면 이건 외국사람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에서 도전했어요.
―그렇게 만든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감독님의 대표작품으로 꼽히는데, 이 작품을 다시 볼 때는 어떤 생각이 드나요.
“감독이라는 게 자기가 만들어 놓고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 작품이 세운 기록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제2외국어를 이상하게 중국어를 했어요. 그 덕에 회화는 좀 힘들어도 책은 읽을 수 있으니까 <죽음의 다섯 손가락> 만들기 전에 많은 서적을 갖다 놓고 연구를 했어요. 장고 끝에 무협영화 시대하고 현대물 액션영화의 중간 지점으로 영화를 갖다 놓고 그 공간을 청나라로 만들면 재밌는 얘기가 될 것이다 해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탄생한 거예요.”
“난 외국에서 늘 먼저 알아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미국에서 히트를 친 후 이 영화를 배급했던 워너브러더스사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걸로 아는데, 홍콩행은 쉽게 받아들였으면서 더 큰 시장인 미국행은 왜 거절했나요.
“제가 영어를 압니까? 또 미국의 문화도 모르잖아요. 중국사람은 피부색도 같고 문화도 비슷해서 뭘 해도 제가 편하게 할 수 있거든요. 근데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미국영화를 만든다? 의욕은 하고 싶었죠. 아니,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부르는데 왜 안가요? 근데 제가 성공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차라리 홍콩에 있으면 나는 얼마든지 뻗어 나갈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으로 거절했어요.”
―1977년에 <파계>를 끝으로 10년 만에 귀향을 하거든요. 그때 홍콩을 통해서 세계 영화시장에서 승부를 내지 왜 귀국했나요.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 특사로 순방을 하고 돌아오다가 총영사를 시켜서 나를 만나자고 했어요. 아침을 먹으면서 지나간 얘기 하고 했는데, 한국에 와서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신필름이 군사정권에 의해서 취소됐거든요. 그때는 허가제니까 영화를 아무나 못했어요. 정부가 돕겠다니까 제가 향수병에 걸리기 시작한 거죠.”
―신필름은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월북사건으로 취소됐지요? 당시 신 감독은 왜 북으로 떠났고, 또 8년 만에 다시 돌아왔을까요.
“1978년 당시 신 감독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어요. 그 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월북했다고 봐요. 하지만 막상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자신의 뜻을 펴기에는 녹록하지 않았으니까 8년 만에 신상옥답게 그 무서운 북한의 김정일 돈을 챙겨 들고 탈출한 거지요. 신 감독은 하고 싶은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진해 왔어요.”
―‘신상옥답게’라는 말을 들으니까 신 감독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봐요.
“5·16군사혁명이 난 지 몇 달 만인 9월에 주체세력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나가 보니 저와 신상옥, 유현목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김강윤씨가 불려 왔더군요. 이들은 우리에게 군사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영화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빨리 한다고 해도 11월에 촬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혁명의 모습을 촬영소에서 찍을 수는 없지 않냐고 했어요. 그런데 신 감독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지켜보다가 ‘정창화 감독 말이 맞습니다’ 하고 나가 버리더라고요. 제가 재를 뿌린 거지요. 신상옥 감독은 그 기회를 안 놓친 거죠. 거기서 신필름이 탄생했어요.”
―2005년 칸 영화제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초청이 되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베스트 영화로 감독님 영화를 지목하는 등 후대에 의해서 자신의 영화가 재평가되면서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인정받을 때 소회가 남달랐겠어요.
“저는 외국에서 늘 먼저 알아주는 거 같아요. 쇼브러더스 전속감독으로 저를 끌어들인 것도 홍콩이고 칸, 타란티노도 전부 해외잖아요. 우리 한국에서 손을 뻗어 준 것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게 정말 아쉬워요. 국내에서 저를 좀 미리 평가해 줬으면 나라는 존재가 미국까지 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에요.”
LA한국국제영화제를 정부가 맡아서 해야
―우리나라 감독 중 1호로 해외에서 성공한 분으로서 해외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한국감독들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
“지피지기하라는 거지요. 시장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그쪽에서 원하는 것이 뭐냐, 또 새롭게 도전하면서 시도를 해야 하는 거죠.”
―해외에 부지런히 다녀야겠네요.
“물론 다녀야 하고, 그쪽하고 합작 같은 걸 많이 해 봐야 자연히 배우게 돼요. 그런데 아쉬운 건 지금 필리핀, 베트남, 대만, 일본, 태국이 모두 미국과 합작을 많이 해요. 그런데 한국은 인천상륙작전 후에 들여다보지를 않아요. 한국은 껄끄럽다고 얘길 해요. 자연스럽게 양보를 하면서 해야 하는데.”
―껄끄럽다는 건 우리나라 영화계 사람들 태도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정부 인허가 문제인가요.
“정부가 아니라 파트너들이 그렇다는 거예요.”
―요즘 액션감독으로 꼽히는 류승완 감독 작품 많이 봤습니까. 감독님 후배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가요.
“후배다운 모습보다는 그 세대에 젊은 감독으로서 많이 뻗어 나갈 수 있는 저력이 있잖아요.”
―앞으로 한국 영화시장은 어떨 것 같은가요. 르네상스기라고 보는 분도 계시고 비관적으로 보는 분도 있는데.
“미국에서도 할리우드가 고전하고 있어요. DVD 판매수입이 굉장히 컸었는데, 이제는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고 보급하는 데가 굉장히 많이 생겨서 그래요. 우리 시장도 앞으로 낙관할 수는 없는 거죠.”
―아시아 영화시장은 어떨까요.
“아시아 영화시장도 뭐 그렇게 낙관할 수 없는 거고요. 중국에는 DVD를 해적판으로 만들어 파는데 근으로 달아서 판답니다(웃음). 그렇게 되면 어렵죠.”
―영화시장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작권문제가 먼저 해결이 돼야겠네요?
“중요한 문제죠. LA에서 제 주변에 보면 극장 가서 영화 봤다는 사람 없어요. 전부 인터넷으로 봤대요. 심각한 얘기예요.”
―완전히 들어오지는 않을 건가요.
“모르겠어요. 영화 후배들도 그렇고, 거기서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느냐고 해요. 지금 저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길을 열어 줄 수 있나를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해 ‘LA한국국제영화제’를 주관한 것도 후배들한테 어떻게 길을 열어 줄 수 있는가 고민 끝에 마련한 거예요. 미국에서 한국감독들의 작품을 실제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아야 해요. 저는 이 영화제가 정부에서 맡아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사재를 털어서 진행하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하고요.”
―앞으로 감독으로서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LA한국국제영화제를 키워 놓는 일이에요.”⊙
광복 후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의 거장 감독이었던 최인규의 문하생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1950년대 초 본격적인 액션영화를 만들며 장르영화를 이끈 주요 감독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 말 아시아영화의 중심지였던 홍콩 쇼브러더스에 스카우트된 이후 만든 영화 중 한 편인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 1972)은 당시 미국으로 수출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사운드 오브 뮤직>과 동시에 개봉돼 이룬 쾌거이니 흥행의 규모를 알 만하다.
세계 최대의 영화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IMDB는 이 작품을 ‘미국 쿵푸영화 열기에 불을 지핀 작품’으로 평가해 놓고 있다. 2003년에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48) 감독의 <킬 빌>은 이 영화에 대한 오마주(hommage·특정영화에 대한 존경심으로 만든 재현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 안에 꼽는다. 2004년 박찬욱 감독이 <올드 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을 때 타란티노 감독이 심사위원장이었던 것을 보면, 정 감독의 그늘이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계에 적지 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
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또 2005년 칸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선정, 초대됐다. 명실공히 세계적인 ‘고전영화’로 인정받는 일인 칸의 클래식 부문 초청은 영화감독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런 정 감독을 재조명하는 일은 어쩌면 한국영화의 잊혀진 중요한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1950년에 데뷔작을 만든 뒤 1977년까지 한국과 홍콩을 넘나들며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1996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까지 영화사인 화풍흥업을 이끌면서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렇게 자신의 생애를 영화에 바쳤으며, 세계적인 반열에 올라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낸 자랑스러운 한국감독 1호인 그가 왜 영영 한국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그 격동을 세월을 거치고 난 뒤 이제 전설로만 남아야 했던 숨은 이야기 속에는 한국영화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가 만든 영화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국내 초기 장르영화를 만들던 1968년까지 기간과 1968년 홍콩으로 떠난 이후 쇼브러더사와 골든 하베스트사의 전속감독으로 스카우트돼 액션·무협영화에 매진하던 시절이다. 그 시기 한국과 홍콩의 영화산업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쇼브러더스는 세계 각국에 영화를 배급할 수 있는 1200여 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동시녹음 시설이 있는 스튜디오가 10개에 명나라, 청나라 등을 배경으로 한 사극부터 현대물까지 모두 촬영할 수 있는 무비타운 내의 대형 오픈세트가 엄청난 규모로 들어 있었다. 쇼 무비타운이라는 영화마을에는 배우와 스태프가 함께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여러 채 지어져 있었다. 감독이 실력만 있다면 이 모든 자산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으니 전후 궁핍했던 한국의 영화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분위기 속에서 이소룡(李小龍·리샤오룽)과 성룡(成龍·청룽)이라는 세계적인 무술배우가 등장하던 시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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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에 제작된 영화 <노다지>. |
[ 제1기 ]
1950년 데뷔작 <유혹의 거리>에서 1968년 작 <허무한 마음>까지 국내 영화 시절
정 감독은 1928년 서울에서 영흥실업주식회사라는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부친 정위영씨의 2남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기 때문에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예술을 향한 열정을 삭히지 못해 서울음악학교(지금으로 말하면 예술대학교)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하던 중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를 보고 영화에 매료됐다. 그는 2학년 재학 중 최 감독의 형과 절친한 사이였던 아버지를 졸라 최 감독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연출수업 4년 만에 아버지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아 데뷔작 <유혹의 거 리>(1950)를 만들었지만 때마침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녹음만 남겨 놓은 채 필름이 전소됐다. 이 영화에는 요즘 방송인으로 더 인기를 끄는 탤런트 조형기의 아버지 조항, 그리고 구봉서 등 한창 잘나가는 배우는 모두 출연한 야심작이었다.
죽음을 넘나드는 전쟁터를 체험한 후 그가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때는 1953년. 그는 당대의 문화 예술인의 모임터였던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을 둥지 삼아 다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나라자 다방은 김지미씨가 이곳에서 차 나르는 일을 하다가 감독들의 눈에 띄어 영화배우로 픽업된 장소이기도 하다.
정 감독 역시 1959년에 김지미씨를 기용해 <사랑이 가기 전에>라는 애정물을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은 시인 조병화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박춘석씨가 영화음악을 맡아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이다. 당시 조병화 시인의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가 전후 국내 출판계에서 최초로 베스트셀러를 기록할 만큼 인기를 구가한 영향으로 만든 시적 영화였다.
정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촬영 중 오토바이가 전차 레일에 미끌어지며 뒷좌석에 타고 있던 김지미씨가 얼굴을 아스팔트에 깔고 15m 이상 미끌어진 일이다. 이 사고로 김씨는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상처인 얼굴 전면과 코가 거의 갈려 버렸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정 감독이 즉시 병원으로 후송해 응급실에 가서 다섯 시간 이상을 수술 받았지만 당시 국내 성형수술 기술로는 얼굴 복원이 어려웠다. 3개월간 입원하면서 기초 복원수술을 한 뒤 일본으로 떠나 유명한 성형외과에서 재수술을 받고 천신만고 끝에 영화를 재촬영해 마무리했다. 당시 정 감독은 병원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김씨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이들의 우정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화홍련전>의 특수효과 담당은 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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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에 제작된 영화 <장희빈>. |
<장희빈>처럼, 정 감독이 영화를 통해 ‘첫 시도’의 기록을 세운 부분은 적지 않다. 1956년 작 <장화홍련전>을 촬영할 때는 현재의 CG(computer graphic) 효과에 필적할 만한 각종 수동 특수효과를 만들어 내 공포물의 특징을 화면에 잘 살려 냈다. 유령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배우 대신 배경그림이 그려진 대형 원통을 돌리면서, 선풍기로 귀신의 머리카락을 날려 효과를 배가시키는 등 기발한 화면구성으로 관중을 사로잡았다.
이때 특수효과를 만들어 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을 한 스태프가 바로 임권택 감독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지만, 당시 그의 연출부에 들어왔을 때는 “아무 일이나 시키면 다 하겠다”는 10대 후반의 가출 청소년이었던 것으로 정 감독은 기억하고 있다.
연출부에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임 감독은 그 시절부터 눈에 띌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만 불리면 바로 사무실로 어김없이 나와서 묵묵히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해내는 걸 보고 정 감독은 그를 키워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임 감독은 정 감독 휘하의 연출부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임 감독 이외에 <첩혈쌍웅>과 <영웅본색>의 오우삼 감독도 홍콩 시절 그의 연출부를 통해 데뷔한 대감독이다.
정 감독이 이들에게 전수한 가장 큰 연출수업은 바로 정확한 콘티(continuity)를 바탕으로 촬영하는 일이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정확한 콘티로 영화를 찍는 감독은 많지 않다. 그의 연출부였던 전우열 감독은 얼마전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정 감독의 연출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창화 감독님의 콘티는 정확하고 그림의 완성도가 높아 콘티만 봐도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술회했다.
1953년 개봉된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서부극 <셰인>은 그의 영화에 일대 변화를 일으키는 자극제가 됐다. 이 영화를 보고 그는 ‘빠른 전개와 흥미로운 상황설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몽타주 기법(각각의 쇼트와 쇼트를 연결해 제3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편집기법)을 공부했고, 그 리듬을 살려 액션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영화가 바로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과 <지평선>(1961)이다. 이 두 영화는 지금까지도 정 감독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은 전쟁 중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일곱 살 짜리 어린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암투를 그린 작품으로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받고 해외에 수출까지 됐지만, 원본을 보내는 바람에 아깝게 유실됐다. <지평선>은 청춘을 바친 독립군의 회한을 그린 작품으로 우리나라 영화 중 첫 대형 전투신으로 엄청한 제작비를 투자한 작품이다.
정 감독은 매 영화에 새로운 시도로 한국영화계를 흔들고 있었지만, 당시 영화계는 암울한 상황에 접어들어 있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다음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전격적으로 발표한 영화법에 의해 영화계가 하루아침에 재편돼 71개사에 이르던 영화사가 17개사로 통합되었고, 신규 영화사 등록은 거의 불가능했다. 시나리오는 사전심의를 받았고, 작품이 나오고 난 뒤 검열도 강화됐다. 한국영화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제작된 <순간은 영원히> (1966)가 그에게는 홍콩영화계로 스카우트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한국과 홍콩의 합작품인 이 작품은 홍콩 번화가에서 촬영됐다. 총격전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시내 모습을 현실감 있게 담아 내기 위해 정 감독은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는 주연배우들을 풀어 놨다. 경찰이나 관공서에는 미리 연락을 해 놓았지만 시민들은 몰랐다. 배우들의 클로즈업은 뒷골목에서 담아 냈다. 난데없는 총격전에 거리는 원하던 대로 곧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이 모습을 지켜본 쇼브러더스의 란란쇼 사장은 그를 극찬하면서 1년에 세 작품씩 5년 계약을 제의해 왔다. 그는 <허무한 마음>(1968)을 마지막으로 한국영화계를 떠났다.
[ 제2기 ]
1969년 <천면마녀>에서 1977년 <파계>까지 홍콩영화 시절
액션물 감독으로 홍콩에 스카우트된 정 감독은 란란쇼 사장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 무협영화에 도전했다. <여협 매인두>(1970)가 그 첫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역은 홍콩 여배우 초교였고, 열아홉 살이던 성룡이 그녀의 스턴트맨이 되었다. 외국감독이 중국 무협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견제를 하던 중국감독들도 이 작품을 본 후 인식을 모두 새롭게 갖게 됐다.
이 작품 이후 란란쇼 사장은 그에게 거꾸로 무협영화를 부탁하는 처지가 됐다.
그렇게 해서 만든 작품이 그의 대표작인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이다. 이 영화를 놓고 처음에 미국 컬럼비아와 워너브러더스가 배급권을 놓고 경합했다. 결과는 워너브러더스의 승리로 미국 전역에 개봉해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홍콩영화가 미국에 상륙하는 계기가 됐다. 영국 등 유럽에서는 <킹 복서>로, 홍콩에서는 란란쇼 사장의 제의로 <천하제일권>이라는 타이틀로 각각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당시 신필름의 사장이었던 신상옥 감독이 한중합작품 <철인>이라는 타이틀로 극장에 걸었는데, 그때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재편집을 한 상황이라 그는 이 영화를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영화산업은 외화수입 판권경쟁터와도 같았다. 한 편 수입에 3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합작영화로 둔갑하면 이런 경비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국배우 3명이 출연하면 합작으로 인정되므로 이런 방법을 통해 위장 합작되는 수입영화가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작품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됐던 주연배우 로레는 2002년 11월 중국의 어느 빈민굴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쇼브러더스와의 행복한 시절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란란쇼 사장이 그의 후처인 가수 모나팡에게 경영권을 넘긴 뒤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영화에 대해 잘 몰랐던 그녀는 제작비를 절감하겠다며 의상까지 짧게 제작하라고 주문할 정도의 문외한이었다. 이런 그녀로부터 그는 떠났다. 모나팡은 현재 홍콩 최대의 방송사인 펄 TV의 사주이다.
모나팡의 출현으로 쇼브러더스를 떠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란란쇼의 오른팔 격이었던 레이먼드 초가 골든하베스트 영화사를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는 <정무문>의 로웨이 감독, 황풍 감독, 그리고 정 감독과 함께 회사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의기투합했다. <흑야괴객>(1973)이 그가 골든하베스트에서 처음으로 만든 작품이다. 당시 골든하베스트는 신생회사라 조건이 열악했다. 촬영소가 없어 야외촬영에 더 의존하다 보니 화면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평을 받아 아시아 지역에서 흥행에 피치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최은희, 납북 직전 전화로 만나자고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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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여풍> 포스터. |
로웨이 감독은 전속 촬영소가 없는 홍콩을 떠나 방콕에서 이소룡을 만나 올로케이션으로 <당산대형>을 찍었다. 이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며 골든하베스트는 기반을 다졌다. 다음에는 <취권>으로 스타가 된 성룡을 스카우트해서 전속배우로 만들었다.
회사 재정이 좋아지면서 촬영소를 빌릴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정무문> <용쟁호투> <사망유희> 등을 만들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의 히트행진을 이어 갔다. 그의 마지막 작품 <파계>(1977)도 그곳에서 촬영했다.
그 역시 골든하베스트의 다른 감독처럼 이소룡과 영화를 계획하고 있었다. 무술배우로서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줄 데가 없다는 데 한계를 느낀 이소룡이 그에게 제안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소룡은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서 로레와 같은 역할을 해 보고 싶어했다. 둘은 뜻을 합했다.
하지만 기획단계에서 이소룡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인은 ‘마약과용 쇼크사’였다. 그즈음 이소룡과 골든하베스트사의 계약이 만료되던 시점이라 소문은 흉흉했다. 골든하베스트가 이소룡을 잡기 위해 딤페이라는 여배우를 연인이 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소룡이 그녀의 집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골든하베스트의 수족인 그녀는 그에게 마약을 권했고 과다복용으로 이끌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을 뒤로 하면서 그는 1973년 7월 20일 사망했다. 정 감독 역시 쇼브러더스 소속 감독 시절 회사에서 그를 잡아 두기 위해 연결해 준 여배우를 거절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소문이 실체에 가까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정 감독이 홍콩에서 골든하베스트 소속 감독으로 지내던 시절,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월북과정에 연루됐던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1978년 1월 14일 새벽 최은희씨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급히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촬영스케줄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고 저녁에 보자고 했지만 과하게 졸랐다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저녁으로 약속을 미루고 일이 끝난 뒤에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최은희씨가 나타나질 않았다.
며칠 후 그는 한국에 있는 한 일간지 정치부 기자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최은희씨가 북한에서 대남방송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 일 이후 그는 홍콩 경시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최은희씨와 마지막까지 통화를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씨가 그를 애타게 찾았던 것이 함께 월북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후 다시 남쪽으로 넘어온 최은희씨는 그에게 당시 일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신상옥 ‘월북’ 이후 정부 요청으로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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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다섯손가락>의 포스터. |
이 분위기를 전하자, 신 감독은 “은희에게 가겠다”는 말을 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정 감독은 며칠 후 신 감독이 이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8년 후, 이들 부부는 북한 김정일의 돈 250만 달러를 챙겨 들고 다시 탈출했다. 정 감독의 증언대로라면 당시 정부 측에서 이들 부부가 강제 납북됐다고 발표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홍콩에서 탄탄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에게 귀국 제안이 왔다. 당시 홍콩을 방문한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지원을 해 줄 테니 돌아오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신 감독의 월북으로 빈 국내 영화계를 이끌 사람이 필요했던 탓이다.
그는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화풍흥업’이라는 영화사를 차렸다. 홍콩에서 번 돈을 가지고 당시 영화사 허가규정에 따라 200평 규모의 촬영소와 촬영기 두 대를 구입했다. 또 영화발전기금 5000만원을 기탁금으로 냈다.
한 해에 3편이라는 의무제작 편수를 채우면서 화풍흥업을 이끌어 가는 일은 버거웠지만 정부의 협조로 탄탄하게 꾸려 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갔다. 이영희 공연윤리위원장의 가혹한 심의를 견뎌 내지 못하고 회사가 도산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시스템과 자본의 벽에 부딪히면서 그는 결국 1996년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한국영화계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생활을 하면서 TV도 보지 않을 정도로 영화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의 딸조차 그가 감독이었던 것을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칩거하던 중인 2003년, 제8회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초대돼 모처럼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영화인들의 환대에 그간 억눌렸던 가슴이 한순간 터지는 것 같은 감동을 맛보았다고 한다.
그 행사를 계기로, 그 다음해 7월에는 파리시장이 주최하는 파리 시네마 인터내셔널 회고전에도 초청받아 파리를 방문했다. 12월에는 홍콩 필름아카이브 회고전이 있었다. 1977년 홍콩을 떠난 이후 첫 공식방문이라 그에겐 감회가 깊은 여행이었다. 2004년은 이렇게 뜻깊은 해였다. 그러고는 2005년 칸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초청되며 정 감독 생애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한때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상처를 받았던 영화계에서 뒤늦게 명예를 회복한 그는 이제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남은 인생을 걸고 있다. 지난해부터 세계 영화시장인 LA에서 ‘한국국제영화제’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한국 정부의 지원은 미약하지만, 그는 이 영화제를 키워 한국영화 수출의 베이스캠프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대단하다. 한때 그를 몰라주는 한국영화계에 애증이 깊었지만,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듯, 한 번 영화인은 끝까지 영화인인 게다.⊙
▣ 정창화 인터뷰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라. 그리고 도전하라”
정창화 감독은 9월 15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한 전작전(全作展)을 치르기 위해 9월 1일 한국에 도착했다. 시차 때문에 피곤하다지만, 건강함을 보여주는 팽팽한 피부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60대로 보이는 동안 외모’라는 말을 뒷받침해주듯 그를 한결 젊어 보이게 했다.―외국에선 여러 차례 전작전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고전영화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편이지요?
“고전영화는 족보와도 같은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관심이 없어요. 프랑스에서는 제 회고전 때 50년 전 영화인데도 1300 객석이 꽉 차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 먹으면 영화보다는 골프를 치겠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슬퍼져요.”
―전작전을 하면서 지난 작품을 볼 기회가 많을 것 같은데, 가장 아끼는 작품은요?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이전에 제가 스피디한 액션영화로 전환해서 만든 <햇빛 쏟아지는 벌판>과 <지평선>이에요. 이전에는 한국영화가 전부 대사 위주의 일본영화 영향을 많이 받아서 템포가 느렸거든요. 이것 말고는 제가 국내에서 만든 건 내세울 게 없어요.”(웃음)
―그 작품은 원판을 수출하는 바람에 분실했다고 하는데, 찾아봤습니까.
“김시현 조감독을 홍콩으로 보내서 찾아봤어요. 그런데 못 찾는 겁니다. 벌써 오래전 얘기죠. 한 30년 전쯤 될 거예요. 이 작품들을 잃어버리면서 정창화 감독 하면 국내에서 대표작품이 없으니까 참 애석한 거죠.”
―두 작품이 흥행에는 성공을 했었나요.
“물론이죠. 왜냐면 외국영화에 휩쓸렸던 관객들이 그때부터 돌아온 거예요. 그러면서 제작활동이 활발해졌죠. 그때 한국영화는 관객을 뺏겨서 고사 직전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그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니까 관객이 되돌아오고 투자자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어요.”
―한국영화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의미있는 작품이었겠네요. 최인규 감독 밑에서 4년간 연출부 생활을 하고 1953년 <최후의 유혹>으로 데뷔를 했죠. 데뷔작이 작품성은 영화계에서 인정을 받았는데 당시 흥행에는 실패를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왜 그랬나요.
“6·25 한국전 얘기거든요. 부산으로 피란 가서 그때는 아무도 영화제작을 꿈도 못 꾸고, 당장 먹고살기 힘들 때였거든요. 당시 제 부모님이 해상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유산이 나왔어요. 그 유산을 가지고 데뷔작을 만든 거예요. 부산 우민관에서 개봉했어요. 그렇게 만들었지만, 피란 와중에 누가 돈이 있어서 극장에 옵니까. 그러니까 뭐, 그 돈 전부 날아간 거죠.”
깡통 두개에 설렁탕과 밥 빌어 오는 훈련받아
―정 감독 연출부 출신인 임권택 감독 회고 인터뷰 보니깐요, 감독님한테 예술적인 깨달음보다는 필사의 생존비결을 더 배웠다고 얘기했어요. 당시에 영화계 분위기로 봐서 이런 말을 했던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의미인가요.
“그게 나도 최인규 감독 밑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자격이 갖춰지는 거예요. 영화라는 게 기복이 심하잖아요. 저는 출근하면 명동 한복판에서 걸인들이 들고 다니던 깡통 두 개에 설렁탕과 밥을 받아 오는 일로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정신병자처럼 쳐다보는 시선을 견디는 일종의 특별훈련이었죠. 그렇게 배웠으니까 권택이한테도 그렇게 했어요.”
―옆에서 지켜보기에 임권택 감독은 어떤 조감독이었어요?
“노력파라고 할 수 있죠. 그때는 통행금지가 4시에 해제가 되거든요. 근데 다섯 시만 되면 사무실에 나와서 현장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체크해요. 그래서 걔를 믿기 시작한 거예요. 다른 아이들은 뭐 ‘7시 집합’ 하면 6시40분이나 돼야 나오죠. 그래서 내가 키워 주면 물건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정 감독은 작품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연구를 통해서 콘티작업을 완성한 다음에 촬영에 들어가는 분으로 유명한데, 그런 습관도 최인규 감독한테 배운 건가요.
“그분한테 아쉽다고 느낀 게 콘티를 절대로 공개를 안 하는 겁니다. 조감독이라는 게 콘티를 봐야 준비를 어떻게 한다는 것을 알고 역할을 하잖아요. 준비가 안되면, 그 양반 성질이 좀 나빠서 발길로 걷어차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 양반이 화장실에 가거나 배우들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얼른 그걸 봐야 했어요. 저는 조감독한테 콘티를 완벽하게 만들어서 복사를 해서 다 나눠줘요, 그림까지 그려서. 그거 보면 자기가 나가서 감독도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거느리고 있던 조감독들은 잘 배워서 감독이 쉽게 됐어요. 기본적으로 콘티는 건축설계도니까 소홀히 할 수 없죠.”
―쓰신 글 속에 가장 큰 영감을 줬던 영화로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명작 <세인> 얘기가 여러 군데서 나오던데요, 무엇을 배웠나요.
“그 작품이 저예산에 굉장히 템포도 빠르고 우리나라 시장여건에 맞는 걸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봤죠. 지금 같으면 DVD나 비디오테이프가 있어서 몇 번이고 다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엔 극장밖에 영화를 볼 곳이 없었어요. 거기에 몽타주 기법을 공부해야 되는데 눈으로 자꾸 봐야 알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단성사 사장을 찾아가 가지고 몇 군데 중요한 대목만 빌려달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상영하는 영화를 빌려줄 리가 없죠. 처음엔 미친놈 취급하더라고요. 몇 번 더 찾아갔어요. 영화상영이 끝난 밤 시간에 몇 장면만 편집기에 걸어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졸랐어요. 하도 여러 번 조르니까 단성사 사장이 결국 졌어요. 그래서 세 번을 빌려다가 편집실에서 프레임을 재면서 몽타주 방법을 찾아냈어요.”
―프레임 길이를 다 재 보신 거예요?
“네. 거기서 어떻게 몽타주가 템포 빠른 신을 만들 수 있는가 연구를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액션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세인>에서부터 됩니다.”
액션감독에서 무협영화 감독으로 바꾼 이유
―당시 홍콩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국영화의 병폐가 무엇이었나요.
“제일 심각한 건 영세성이었어요. 거기에다 배우들이 더블 플레이를 하니까 촬영을 한 달에 네 번밖에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 제가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거는 제작자들 때문이었어요. 당시 제작자들은 감독 이름을 팔아서 투자자들을 모집했는데, 대박 내서 팔자 고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이라 감독들을 충전할 기회도 없이 돌렸어요. 전 도전정신이 다른 감독들에 비해서 강했어요. 항상 새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나도 외국으로 뻗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홍콩영화계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때 일본에서도 유명한 감독들이 와 있었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재계약이 안됐죠. 그래도 용케 저는 우선 액션감독으로 스카우트돼서 5년 계약을 했는데, 이 사람들이 저를 부른 것은 그때 홍콩에 무협영화가 한창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거든요. 저같이 액션영화를 하는 감독이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제가 처음으로 <천면마녀>(1969)를 만드니까 란란쇼가 홍콩에 있는 쇼브러더스 전속 감독들한테 보여주고 콘티라든가 몽타주 이런 것을 연구해 보라고 지시를 하더군요. 저는 그때 ‘어느 때고 얘네들이 액션영화를 배우면 정창화는 별 볼이 없는 사람이 되겠구나’라는 위기의식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중국 감독의 전유물인 무협영화에 도전했어요.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지요. 100편 이상이 되는 중국감독들의 작품을 하루에 3시간 잡아서 전부 봤어요. 적을 알아야 내가 이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 신비스러운 게 참 많아요. 중국사람이 보는 것하고 외국감독인 내가 보는 건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 영화를 작품화하면 이건 외국사람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에서 도전했어요.
―그렇게 만든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감독님의 대표작품으로 꼽히는데, 이 작품을 다시 볼 때는 어떤 생각이 드나요.
“감독이라는 게 자기가 만들어 놓고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 작품이 세운 기록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제2외국어를 이상하게 중국어를 했어요. 그 덕에 회화는 좀 힘들어도 책은 읽을 수 있으니까 <죽음의 다섯 손가락> 만들기 전에 많은 서적을 갖다 놓고 연구를 했어요. 장고 끝에 무협영화 시대하고 현대물 액션영화의 중간 지점으로 영화를 갖다 놓고 그 공간을 청나라로 만들면 재밌는 얘기가 될 것이다 해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탄생한 거예요.”
“난 외국에서 늘 먼저 알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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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면마녀>의 정창화(좌), 성훙(중), 진피(우). |
“제가 영어를 압니까? 또 미국의 문화도 모르잖아요. 중국사람은 피부색도 같고 문화도 비슷해서 뭘 해도 제가 편하게 할 수 있거든요. 근데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미국영화를 만든다? 의욕은 하고 싶었죠. 아니,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부르는데 왜 안가요? 근데 제가 성공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차라리 홍콩에 있으면 나는 얼마든지 뻗어 나갈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으로 거절했어요.”
―1977년에 <파계>를 끝으로 10년 만에 귀향을 하거든요. 그때 홍콩을 통해서 세계 영화시장에서 승부를 내지 왜 귀국했나요.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 특사로 순방을 하고 돌아오다가 총영사를 시켜서 나를 만나자고 했어요. 아침을 먹으면서 지나간 얘기 하고 했는데, 한국에 와서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신필름이 군사정권에 의해서 취소됐거든요. 그때는 허가제니까 영화를 아무나 못했어요. 정부가 돕겠다니까 제가 향수병에 걸리기 시작한 거죠.”
―신필름은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월북사건으로 취소됐지요? 당시 신 감독은 왜 북으로 떠났고, 또 8년 만에 다시 돌아왔을까요.
“1978년 당시 신 감독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어요. 그 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월북했다고 봐요. 하지만 막상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자신의 뜻을 펴기에는 녹록하지 않았으니까 8년 만에 신상옥답게 그 무서운 북한의 김정일 돈을 챙겨 들고 탈출한 거지요. 신 감독은 하고 싶은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진해 왔어요.”
―‘신상옥답게’라는 말을 들으니까 신 감독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봐요.
“5·16군사혁명이 난 지 몇 달 만인 9월에 주체세력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나가 보니 저와 신상옥, 유현목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김강윤씨가 불려 왔더군요. 이들은 우리에게 군사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영화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빨리 한다고 해도 11월에 촬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혁명의 모습을 촬영소에서 찍을 수는 없지 않냐고 했어요. 그런데 신 감독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지켜보다가 ‘정창화 감독 말이 맞습니다’ 하고 나가 버리더라고요. 제가 재를 뿌린 거지요. 신상옥 감독은 그 기회를 안 놓친 거죠. 거기서 신필름이 탄생했어요.”
―2005년 칸 영화제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초청이 되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베스트 영화로 감독님 영화를 지목하는 등 후대에 의해서 자신의 영화가 재평가되면서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인정받을 때 소회가 남달랐겠어요.
“저는 외국에서 늘 먼저 알아주는 거 같아요. 쇼브러더스 전속감독으로 저를 끌어들인 것도 홍콩이고 칸, 타란티노도 전부 해외잖아요. 우리 한국에서 손을 뻗어 준 것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게 정말 아쉬워요. 국내에서 저를 좀 미리 평가해 줬으면 나라는 존재가 미국까지 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에요.”
LA한국국제영화제를 정부가 맡아서 해야
―우리나라 감독 중 1호로 해외에서 성공한 분으로서 해외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한국감독들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
“지피지기하라는 거지요. 시장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그쪽에서 원하는 것이 뭐냐, 또 새롭게 도전하면서 시도를 해야 하는 거죠.”
―해외에 부지런히 다녀야겠네요.
“물론 다녀야 하고, 그쪽하고 합작 같은 걸 많이 해 봐야 자연히 배우게 돼요. 그런데 아쉬운 건 지금 필리핀, 베트남, 대만, 일본, 태국이 모두 미국과 합작을 많이 해요. 그런데 한국은 인천상륙작전 후에 들여다보지를 않아요. 한국은 껄끄럽다고 얘길 해요. 자연스럽게 양보를 하면서 해야 하는데.”
―껄끄럽다는 건 우리나라 영화계 사람들 태도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정부 인허가 문제인가요.
“정부가 아니라 파트너들이 그렇다는 거예요.”
―요즘 액션감독으로 꼽히는 류승완 감독 작품 많이 봤습니까. 감독님 후배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가요.
“후배다운 모습보다는 그 세대에 젊은 감독으로서 많이 뻗어 나갈 수 있는 저력이 있잖아요.”
―앞으로 한국 영화시장은 어떨 것 같은가요. 르네상스기라고 보는 분도 계시고 비관적으로 보는 분도 있는데.
“미국에서도 할리우드가 고전하고 있어요. DVD 판매수입이 굉장히 컸었는데, 이제는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고 보급하는 데가 굉장히 많이 생겨서 그래요. 우리 시장도 앞으로 낙관할 수는 없는 거죠.”
―아시아 영화시장은 어떨까요.
“아시아 영화시장도 뭐 그렇게 낙관할 수 없는 거고요. 중국에는 DVD를 해적판으로 만들어 파는데 근으로 달아서 판답니다(웃음). 그렇게 되면 어렵죠.”
―영화시장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작권문제가 먼저 해결이 돼야겠네요?
“중요한 문제죠. LA에서 제 주변에 보면 극장 가서 영화 봤다는 사람 없어요. 전부 인터넷으로 봤대요. 심각한 얘기예요.”
―완전히 들어오지는 않을 건가요.
“모르겠어요. 영화 후배들도 그렇고, 거기서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느냐고 해요. 지금 저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길을 열어 줄 수 있나를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해 ‘LA한국국제영화제’를 주관한 것도 후배들한테 어떻게 길을 열어 줄 수 있는가 고민 끝에 마련한 거예요. 미국에서 한국감독들의 작품을 실제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아야 해요. 저는 이 영화제가 정부에서 맡아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사재를 털어서 진행하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하고요.”
―앞으로 감독으로서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LA한국국제영화제를 키워 놓는 일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