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⑦ 유럽의 ‘극우’ 돌풍, 어떻게 볼 것인가

문제는 경제보다 문화와 정체성

글 : 임명묵  작가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2000년대 들어 초국적 영주 - 지역사회의 농노로 구성된 ‘新中世의 도래’
⊙ 한국의 보수, ‘세련된 보수’ 주장하기 위해 실패한 미국·서구 모델에 매달려
⊙ ‘중도 우익 對 중도 좌익’에서 ‘중도 연합 對 좌우익 포퓰리즘’으로
⊙ 푸틴, ‘전통 기독교 문명의 가치를 수호하는 문명 제국’이라는 정체성 내세워 유럽·미국 침투
⊙ 이탈리아의 멜로니, 이민과 가족 문제에서는 국민 불만 수용… 지정학적 차원에서는 러시아에 강경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유럽의회 선거를 앞둔 지난 5월 24일 열린 회의에서 국가를 부르는 프랑스 국민연합 지도자 마린 르 펜(가운데)과 당대표 조르당 바르델라. 국민연합은 유럽의회 선거와 프랑스 총선에서 약진했다. 사진=AP/뉴시스
  지난 6월 6일부터 9일까지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는 그야말로 정치적 돌풍이나 다름없었다. 이 선거를 통해서 인구 4억4000만 명 이상, GDP 약 19조 달러를 자랑하는 거대한 유럽연합의 정치적 향방이 점쳐지기 때문이다. 유럽의회에서는 27개 회원국에서 선출된 의원들이 이념적 성향에 따라 구성한 교섭단체가 실질적으로 정당의 역할을 하는데, 우파 성향의 ‘유럽 보수와 개혁’ 그룹, 극우(極右) 성향에 가까운 ‘정체성(正體性)과 민주주의’ 그룹이 각각 10%와 8%를 득표하여 크게 선전(善戰)했다. 이들이 확보한 총합 의석 141석은 중도우파 연합인 유럽인민당의 188석보다는 적지만, 중도좌파 연합 사회민주진보동맹의 136석보다는 많은 숫자다.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경쟁이라는 고전적 구도에 거대한 균열이 났으며, 좌파 지지자들의 이탈을 극우 계열 정당들이 흡수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이 된 것이다.
 
 
  당당한 멜로니, 위축된 마크롱
 
지난 6월 13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서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지지율 하락으로 고민하는 다른 G7 정상들과는 달리 존재감을 뽐냈다. 사진=AP/뉴시스
  유럽의회 선거 직후인 6월 13일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주요 7개국 정상회의)는 선거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개최국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당당했다. 그가 속한 정당인 ‘이탈리아의 형제들’이 이탈리아 유럽의회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해 멜로니 내각이 국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반면 젊은 대통령으로서 늘 당당했던 프랑스의 마크롱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극우 정치의 대명사인 마린 르 펜의 국민연합이 프랑스 유럽의회 선거에서 31%를 득표하며 1위를 기록하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속한 여당 앙상블(구 르네상스)은 14% 득표에 그쳐 그야말로 참패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도 역시 극우로 평가받는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약 16%를 득표해 2위를 기록했기 때문에, 올라프 숄츠 총리도 여유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유럽연합을 언제나 주도해온 독일과 프랑스가 풀이 죽고, 반면 ‘유럽의 병자(病者)’ 취급을 받던 이탈리아가 나머지 국가들을 리드하는 정치적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중에서 멜로니 총리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극우의 약진이 독일과 프랑스의 중도 정치를 위협한 반면, 이탈리아의 멜로니 내각은 바로 그 극우 정치의 성장이라는 흐름을 타고 집권한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유럽 대륙 전체에 걸쳐 극우가 성장하는 가운데, 극우 정치의 의제를 흡수한 멜로니가 ‘새로운 바람’이 되는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의 중심 중 하나인 유럽에서 일어나는 극우의 성장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늘어나고 있다.
 
 
  우익의 위기
 
  그런데 ‘진보주의자들의 낙원’과도 같았던 유럽에서 왜 극우 돌풍이 갑작스럽게 불게 되었을까? 정말로 1930년대 유럽의 악몽(惡夢)이었던 파시즘의 유령이 깨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현대 유럽의 역사는 언제나 전 유럽이 세계대전의 참화로 폐허가 된 1945년에서 시작한다. 제국주의 시대 세계를 지배했던 유럽 대륙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야만과 잔인함을 폭발시켰다. 중세부터 내려오던 아름다운 도시들이 미군 폭격기, 나치의 전차, 소련군의 포탄에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유럽은 핵무기를 쌓아둔 유럽 바깥의 양대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기에 이르렀다. 고향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정착할 곳을 찾아 곳곳을 떠돌고 있었고, 산업 생산은 정지되었다. 그래도 유럽에 희망이 있었다면 전쟁의 주범인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이 연합군에 의하여 철저히 분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서유럽의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마지막 희망도 온전히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몰락은 유럽에서 우익(右翼)의 위기를 불러왔다. 히틀러의 군대가 신화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독일 제국에 부역(附逆)했다. 많은 이들이 이전 나치 협력 과거를 숨기고 복귀하기도 했으나, 어쨌든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우익 세력의 도덕적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대신에 소련의 모스크바와 연계된 공산당은 소련군이 닿지 못한 서유럽에서도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간기(戰間期·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1918~1939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더욱 크게 성장한 공산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기 반(反)나치 투쟁의 주역을 맡았고, 목숨을 걸고 나치와 싸운 그들은 히틀러가 패망한 유럽에서 영웅과 같은 위상을 얻었다. 붉은 군대를 만난 동유럽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몰랐던 서유럽인들은 폐허가 된 대륙을 일으킬 새로운 비전으로 공산주의에 호감을 느꼈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이 무렵 발표한 대규모 유럽 원조 프로그램인 마셜 플랜이 서유럽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기획이었음은 매우 유명하다. 미국은 서유럽 경제를 빠르게 부흥시켜 친소(親蘇) 좌익 세력의 발호를 막고 유럽 정치를 안정화하기를 원했다.
 
 
  새로운 합의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의 원조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유럽의 중도파 정치인들이 세웠던 새로운 합의였다. 중도우파 진영은 나치에 맞서 싸웠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서독의 콘라드 아데나워나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중도좌파는 친소 공산당과 결별하고, 서유럽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온건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승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을 이기고 등장한 클레멘트 애틀리의 영국 노동당 내각은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 자유 진영 결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소련과 선을 그었다. 전쟁을 일으킨 극우와 동유럽을 점거한 극좌를 배제하면서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라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탄생하고 있었다.
 
  전간기의 극심한 계급 갈등과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사회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동시에 잡을 방안을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 기획, 국제 사회 세력의 협동에 초점을 맞춘 나치 독일의 유산은 전후 유럽에도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드골의 주도로 디리지즘(dirigisme·지도주의)이라고 불리는 국가 관료의 선도적 기획이 등장했다. 나치 청산이 중요했던 서독에서는 국가의 강력한 지도력을 외칠 수는 없었다. 대신 그 타협의 산물로 사회적 규율을 중시하는 아데나워의 질서자유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이 강력한 국가들은 자본과 노동의 타협을 주재했다. 기업은 국가의 지시에 따라 고부가가치 산업에 계속 투자를 해야만 했고, 노동자들이 만족할 만한 임금을 지급해야 했다. 노동조합 또한 국가 및 자본과 협동하여 경제 재건에 최대한 참여해야만 했다.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노동자들을 포섭하기 위한 광범위한 사회 부조(扶助) 프로그램들도 뒤따라 등장했다.
 
 
  ‘영광의 30년’의 종언
 
  유럽이 본격적으로 재건되기 시작하면서 이 사회민주주의 합의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프랑스에서는 1949년부터 1979년을 일컫는 ‘영광의 30년’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초토화가 된 유럽은 과거 비효율적 경제와 단절하여 신기술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미국의 안보 우산 속에서 지정학적으로 안정된 유럽은 상호 간 무역을 통해 단단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서독의 성공은 가장 발군(拔群)이었다. 유럽에서 현대적 중산층의 삶이 보편화된 것도 이때였다. 승용차가 국민적으로 보급되면서, 지중해의 해변에서 장기간의 여름 휴가를 누리고, 은퇴 후 연금을 수령하며 편안히 말년을 보내는 것이 유럽적 삶이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가 되었을 때 이 전형적인 유럽적 모델에 위기가 찾아왔다. 경제 재건이 마무리되자 성장률이 떨어졌다. 미국의 변동환율제 시행과 중동발(發) 석유 파동으로 국가 관료들의 경제 관리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유럽 산업은 이제 더욱 근면하게 일하는 아시아 신흥 공업국들과의 경쟁에 직면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대규모 노동자를 고용하며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제공하던 유럽 제조업은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문화적인 변화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영광의 30년’간 번영을 이끈 이들은 유럽의 전통 기독교 가치를 내면화한 이들이었다. 신(神), 가부장(家父長), 국가, 정당, 무엇이 되었든 이들은 권위를 존중하고 집단적 가치를 중시했다. 하지만 전후(戰後)의 번영 속에서 성장한 새로운 베이비붐 세대는 다른 가치를 추구했다. 이들은 권위로부터의 해방, 성(性)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며 기존의 노동조합 중심의 좌파와는 다른 문화 자유화 의제를 내걸었다. 1968년에 전 유럽을 학생 시위가 휩쓸면서 기성세대의 저항은 더는 지속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1970년대에 여전히 유럽적 복지국가는 작동하고 있었지만,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기존의 모델이 지속될 수 없음은 명백했다.
 
 
  ‘유럽 최고의 순간’
 
신자유주의 시대를 연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
  1980년대부터 유럽에 새로운 정치를 주창하는 세력들이 등장했다. 1979년 집권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그 신호탄을 쏘았다. 대처 총리는 광부 파업을 철저하게 진압하고, 대규모 공공 부문 구조조정을 이끌며 영국 경제의 부흥을 주도했다. 대규모 제조업은 사라졌고, 그들에게 제공되던 복지는 축소되었다. 하지만 자유화된 경제는 금융과 서비스업이 주도하는 새로운 경제 영역을 창출했다. 프랑스와 서독도 대처 총리의 길을 따라가며 변화된 경제 환경에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중도 우익이 전후 사민주의 합의를 깨고 자유경제 노선을 본격화하자 심지어 중도 좌익도 이에 반응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노동시장 자유화를 이끈 이들은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과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사회민주당 정권이었다. 영국의 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중도 좌익이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채택해야 하는 지침으로 ‘제3의 길’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전후 유럽이 중도 좌익이 주도하는 복지국가에서 합의점을 찾았다면, 새천년의 유럽은 중도 우익이 주도하는 시장 자유화를 합의하고 있었다. 물론 중도 우익 진영 또한 진보 세력에서 주장하는 여성주의, 다문화주의, 환경주의 등의 의제를 어느 정도 수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이 만들어낸 ‘극우와 극좌의 배제와 중도 수렴(收斂)’의 정치는 완벽하게 기능하는 것처럼 보였다.
 
  2000년대는 제3의 길을 통해 자유경제의 활력과 복지국가의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유럽의 ‘최고의 순간’처럼 여겨졌다. 전후에 이루어진 유럽 통합은 더욱 가속화되어 1993년에는 본격적인 유럽 통합 기구인 유럽연합(EU)이 등장했고, 2002년에는 유럽 공통 화폐인 유로화까지 통용되기 시작했다. 1989년 동유럽 공산 정권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면서, ‘잃어버렸던 반쪽’인 동유럽이 다시 서유럽으로 복귀하며 그 감동은 절정에 달했다. 그렇게 당시 미국을 뛰어넘는 최대의 경제 연합체로서, 유럽연합은 미국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구현하고, 민족주의의 앙금을 해소한 열린 대륙으로서 세계인의 선망(羨望)을 받았다. 경제적 자유화로 유럽 시민들은 유럽연합 어디서든 기회를 찾아 이주하여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고, 계속되는 문화적 자유화는 여성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이끌었으며, 유럽으로 향하는 이민자들과 공존하는 다문화주의 정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제 유럽은 경쟁 지상주의와 인종 갈등이 가득한 미국이나, 집단주의가 여전한 동아시아 모두와 구별되는 삶의 양식을 개발해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민족국가 정체성’의 부활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2010년대부터 유럽은 위기의 대륙이 되었다. 시작은 유로존 위기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고, 유럽은 다시 한 번 복지국가를 구조조정해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 부유한 서북유럽과 취약한 남유럽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남유럽은 구조조정을 해야만 했고 서북유럽은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했는데, 바로 이때 유럽인의 정체성이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과 같은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뛰어넘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독일인 납세자들은 자신의 세금을 방탕한 남유럽에 제공하기를 꺼려했고, 남유럽인들은 유로화를 통해 독일이 얻는 이득에 불만을 토로하며 구조조정을 거부했다. 두 지역의 간극은 유럽연합의 경제적 위기를 만성화하여 2010년대를 관통하는 지루한 유로존 위기로 이어졌다.
 
  유럽 안에서도 정체성의 긴장이 여전했는데, 유럽 바깥의 존재를 감당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2011년 아랍 봉기로 이슬람 세계 전체가 격변을 겪으면서 유럽의 이민자 위기가 극대화되었다. 이미 유럽에는 전후 번영의 시대에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초청한 구(舊) 식민지 출신 아랍인, 서아프리카인, 혹은 튀르키예(터키) 출신 초청 노동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이민 2세대와 3세대 중 유럽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이가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는 유럽에 증오를 품어 극단주의 이슬람을 수용할 때가 많았다.
 
  2000년대에 알카에다 테러로 본격화된 무슬림 이민자 문제는 2010년대가 되자 통제가 힘들 정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시리아 내전(內戰)이 장기화되며 시리아 내륙 지역에서 ‘이슬람 국가’를 자처하는 글로벌 지하드(성전) 조직인 IS가 창설되었다. IS는 소셜미디어(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유럽에 불만을 품은 현지 청소년과 청년들을 포섭했고, IS발 유럽 테러가 각지에서 넘실거리며 유럽에서는 반(反)이민자 정서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新中世’의 도래
 
  하지만 2015년에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중동발 난민을 대거 수용하는 결정을 내리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직은 여전했던 유럽주의자들은 다양성의 가치를 믿는 유럽이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민자들을 포용하고 공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민자 수용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유럽인들의 기억에 생생한 나치의 망령을 떠올리게 했고, 유럽의 ‘합리적 중도파들’은 이민에 대한 문제 제기를 극우로 규정하며 다문화(多文化)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유입된 이민자의 물결은 원주민과 이주민의 갈등을 한층 더 끌어올렸을 따름이었다.
 
  메르켈을 비롯한 당대 위정자들의 정책은 유럽 엘리트에 대한 일반 국민의 대대적인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문제의 원인은 유럽의 강력한 중도 정치와 그 기반인 유럽연합 시스템 그 자체에 있었다. 국민들은 여전히 자국(自國)의 대통령이나 총리를 선출했으나, 일국(一國) 지도자들의 기획은 실제 국민의 삶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일국의 정책보다 중요한 것은 프랑크푸르트의 유럽중앙은행이나 브뤼셀의 유럽연합 본부의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의 합의였다.
 
  문제는 이 관료들이 전후 유럽의 일국 단위 엘리트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전후 유럽의 지도자들은 지역사회, 교회, 노동조합 등 자신이 뿌리박은 국가의 확고한 기반 위에서 정치를 했다. 정당 조직은 전국의 유권자들과 각종 사회단체를 매개하는 통로였다. 따라서 복지국가 건설이나 경제 자유화와 같은 국가적 의제가 신속하게 정당 지도자들을 향하여 전달될 수 있었고,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실제 삶의 경험 및 정서와 공명(共鳴)하는 언어를 구사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제조업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유럽 경제가 대륙 전체를 관할하는 금융과 서비스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유럽의 엘리트들은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밀라노 등의 최고의 중심지에서 성장하고, 능숙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다른 중심지로 언제든지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초국적(超國籍) 엘리트로 충원되고 있다. 경제와 문화 자유화의 결과로 노동조합, 교회와 같은 기존의 사회적 연대체가 붕괴한 이상 이 초국적 엘리트들은 일반 국민과 마주칠 일 없이 자신들끼리 소통하는 새로운 경제, 문화 계급을 구성하게 되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초국적 영주와 지역사회의 농노(農奴)로 구성된 ‘신중세(新中世)’의 도래라고 평하기도 했다. 전통의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를 계승한 이 초국적 엘리트들은 여성주의, 녹색경제, 다문화 사회 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고수한 채 총론에서 논쟁을 하지 않고 각론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럽 포퓰리즘의 등장
 
  일반 국민들의 생각은 이제 전혀 달라졌다. 그들은 과거 안정된 삶의 기반이었던 복지국가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남성 가부장이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이 가정을 담당하는 전통적 가족 형태에 애착을 갖는 사람도 많다. 문화가 자유화된다고 해도 민족정신에서 교회를 분리할 수 없다고 믿는 이들도 상당하다. 자신의 지역사회에 언어가 통하지 않고 피부색이 다른 이민자들이 갑작스럽게 유입되며 이해할 수 없는 문자로 식당과 잡화점을 여는 것을 보며 불안해하고 있다.
 
  요컨대 그들이 상상한 유럽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런던과 파리와 밀라노를 바쁘게 오갈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커리어를 위해 가족을 희생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구태여 난민을 지원하는 데 내 세금이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신 조부모와 부모가 살던 곳에서 가족을 꾸리고 교회에 나가며 믿을 수 있는 복지 시스템에 의존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치 엘리트들은 더는 이런 불만을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오히려 이런 불만을 들어주는 정치인들을 향해 ‘극우’나 ‘파시즘’과 같은 딱지를 붙이며 비난하고 있었다. 기껏 투표를 통해 의사를 표시해봤자, 새로운 정책 의제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브뤼셀의 관료들에 의해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유럽의 포퓰리즘은 일반 국민들의 이러한 불만을 흡수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포퓰리즘은 199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유로존 위기와 난민 위기, 문화와 가치의 충돌이 이어지며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골이 완연하게 깊어지자 폭발했다. 시작은 남유럽의 좌파 포퓰리즘 정당의 등장이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나 그리스의 시리자는 유럽연합의 자본가들이 강요하는 부채 상환과 구조조정을 거부하겠다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들이 고도로 통합된 유럽 경제 구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었고, 화려한 수사(修辭)로 집권하여 온건한 정책을 추진한 결과 정치적으로 금세 몰락했다.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자기들이 영국의 주인인 국민(people)임을 내세웠다. 사진=AP/뉴시스
  그리고 사실 진짜 문제는 경제보다 문화와 정체성이었다. 유럽의 중도 좌익 정당은 경제 정책에서 다시 좌클릭을 할 때가 있었지만, 여성주의나 다문화주의 같은 문화 신좌파 의제에서는 타협을 거의 하지 않았다. 문화 면에서 중도 우익보다 중도 좌익이 일반 국민의 정서와 유리된 정도가 훨씬 커진 결과, 중도 좌익 정당을 지지하는 노동 계급의 표가 반세계화와 유럽회의주의를 내건 우익 포퓰리즘으로 대거 이탈했다. ‘중도 우익 대(對) 중도 좌익’의 양당제(兩黨制) 모델은 이제 ‘중도 연합 대 좌우익 포퓰리즘’이라는 전례 없는 새로운 구도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 투표인 ‘브렉시트(brexit) 투표’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브렉시트는 유럽연합과 연계된 엘리트들에 영국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를 보여주겠다는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래도 브렉시트로 인하여 영국이 겪은 정국 혼란을 보며 유럽의 중도 엘리트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포퓰리즘이 정말로 ‘한 방 먹였을 때’ 나타나는 혼란상이 나머지 유럽연합의 유권자들에게 백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브렉시트 직후 유럽의 포퓰리즘 물결은 다소 잠잠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2017년에는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혁신적인 중도 정치를 표방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기존의 중도 정치를 혁신하여 프랑스를 전면적으로 개조하고, 세계 무대에서 유럽과 프랑스의 역할을 확대하겠다는 젊은 대통령의 포부에 세계가 환호했다. 그러나 마크롱의 경제 활성화 정책이 초래한 불만이 좌우익의 양극단 세력을 자극했고, 2018년에 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노란 조끼 운동이 일어나며 마크롱의 정국 장악력도 약해졌다.
 
  독일에서는 통일 이후 황폐화된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보수적 가족 정책과 무엇보다 이민 반대 정책을 구호로 내건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꾸준히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들은 1989년 동유럽 혁명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구호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를 내걸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인민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독재를 자행하는 동독 공산주의 정권만큼이나 지금의 유럽 엘리트들이 일반 국민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통렬한 비난이었다.
 
 
  푸틴과 오르반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왼쪽)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7월 5일 양국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AP/뉴시스
  유럽 정치의 급변을 보며 미소를 지은 이가 있다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위기 이후 러시아는 ‘전통 기독교 문명의 가치를 수호하는 문명 제국’이라는 정체성을 새로 정립하며 자유주의 세력에 적대하는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새로운 극우 사상가들은 유럽 극우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유럽회의주의와 반이민, 보수적 가족주의를 선전하고 있었다. 유럽 문명의 진짜 적은 가족과 교회를 해체시키는 미국이며, 러시아가 오히려 진짜 유럽 문명을 수호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서사(敍事)가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었다. 그렇게 유럽연합을 약화시키고, 유럽을 미국과 떼어놓는 데 성공한다면 러시아는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훨씬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할 수 있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유럽 각국의 선거를 둘러싸고 러시아 정보부대와 사상가들이 배후에서 극우를 지원하고 있다는 가설(假說)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 결과 동유럽의 헝가리는 유럽연합 내부에서 러시아와 함께하는 우방국으로 부상(浮上)했다.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서유럽과 긴밀히 연계된 부다페스트의 자유주의 지식인과 엘리트 계급에 대한 교외(郊外) 지역의 불만을 동원하여 막강한 권력을 구축했다. 실제 헝가리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능력 있는 젊은 인구가 서유럽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대거 이탈하자, 헝가리 국민들은 유럽연합이 헝가리에 준 것은 노인만 남은 텅 빈 마을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르반은 유럽연합이 강조하는 인권 논의가 다문화 사회나 여성주의에 치중되어 헝가리의 전통 가치에 과도하게 간섭한다고 비판하고, 헝가리는 난민을 결코 수용하지 않으며 출산 진작을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르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진짜 국민’의 의사를 더 잘 반영하는 길은 러시아의 푸틴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라 여기며 외교적인 모험도 강행했다. 유럽연합은 경제적 수단을 통해 헝가리를 압박했으나 오르반은 능수능란하게 협상을 주도하며 자신의 지위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포퓰리즘 되살린 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에는 오르반과 유사한 성향의 로베르트 피초가 인접한 슬로바키아에서 당선되면서 동유럽 포퓰리즘의 건재함을 입증했다. 폴란드에서도 지정학적 입장은 친미(親美)-반러로 헝가리와 달랐지만 국내 정책이나 대유럽연합 정책에서는 오르반과 매우 유사한 ‘법과 정의당’이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원내 1당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2022년 2월 푸틴이 개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포퓰리즘에 위기를 초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의 침략이 극우 사상에 대한 유럽인들의 경계심을 일깨우고, 러시아가 후원하는 극우 정당들이 국민의 신뢰를 상실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평화의 단잠에 빠졌던 유럽이 러시아의 위협을 계기로 각성하여 자유 진영 수호에 다시금 적극적으로 일익을 담당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왔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이 의지하던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 공급이 끊기자, 안 그래도 미국 및 동아시아와 힘겹게 경쟁하던 유럽 제조업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경제적 곤경이 지속되면서 중도 성향 집권당들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문화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분열도 여전히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 무솔리니’ 멜로니
 
  바로 이런 시점에서 조르자 멜로니가 이탈리아 총리로 당선되었다. 집권 전만 하더라도 ‘여자 무솔리니’라는 말을 들었던 멜로니는 가족 가치의 강화와 가톨릭교 존중이라는 문화적 보수주의를 구호로 선거에 임했다. 전형적인 우익 포퓰리즘 지도자로서 멜로니의 집권은 유럽 지도자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이탈리아는 이전부터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좌우 포퓰리즘의 도전이 가장 거셌던 유럽의 ‘약한 고리’로 간주되고 있었다. 멜로니가 만약에 유럽회의주의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무엇보다 헝가리의 오르반처럼 친푸틴 노선을 택한다면 서방 진영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고 유럽연합 전체가 통제 불능의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멜로니가 선택한 정체성은 중재자였다. 요컨대 이민과 가족 문제라는 유럽 일반 국민들의 불만을 들어주는 새로운 정책들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서는 ‘극우’라는 비난을 듣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동시에 지정학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위협에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며 서방 진영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오히려 멜로니는 유럽의 기존 중도 정치가들과 새로 발흥하는 포퓰리즘 세력 사이에 대화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는 중간 다리로서 자신의 지위를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요컨대 마크롱이나 숄츠와 같은 주류 중도파들에게는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메시지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조언할 수 있고, 극우 포퓰리스트들에게는 유럽의 주류 정치 문법에 적응하도록 온건화를 설득할 수 있는 인물로서 주가(株價)를 띄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럽의회 선거 이후 G7 정상회담에서 ‘멜로니 독무대’가 연출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유럽 포퓰리즘의 거친 공세가 멜로니의 중재로 수렴되는 결말을 맞이한 것은 전혀 아니다. 마크롱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참패하고 의회를 해산한 뒤 6월 30일과 7월 7일에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국민연합은 지난 6월 30일 1차 투표에서 33.2% 득표로 1위에 올라, 의회 1당을 넘어 과반수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2차 투표 직전까지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로 예측됐다. 하지만 ‘극우 세력’을 견제하려는 표심이 작용, 결국 7월 7일 결선투표 결과 국민연합과 그 연대 세력은 총 577석 중 143석을 차지하는 데 그치면서 3위로 밀려났다. 국민연합의 실질적 지도자인 르 펜 의원은 “우리의 승리가 늦춰졌을 뿐”이라며 “대통령과 극좌의 부자연스러운 동맹이 아니었다면 국민연합이 절대 과반이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여기서 특히 국민연합의 당대표를 맡고 있는 29세의 청년 정치인 조르당 바르델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제리-이탈리아 이민자 가계에서, 이혼한 어머니와 서민 공공주택에서 성장한 바르델라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국민들 가운데서 나왔음을 강조하며, 청년 유권자를 새로이 공략하기 위해 틱톡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혼 가정과 이민자 집안이라는 바르델라의 출신 배경은 그가 가정의 중요성과 이민 통제를 얘기할 수 있게 하는 생생한 근거가 되어주었다. 만약 바르델라가 정말로 정치적 거물로 성장한다면, 그가 포퓰리즘과 중도 정치 중에서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에 따라서 프랑스, 나아가 유럽과 서방 진영 전체의 향방이 결정될지도 모른다.
 
 
  한국의 ‘비합리적 保守’
 
  현재 유럽의 상황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럽 포퓰리즘은 국민 일반의 변화한 생활 조건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엘리트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성장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 또한 IMF 금융위기와 산업구조의 변동, 수도권 집중 등을 거치며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급변했다. 남녀관계가 변하며 기존의 가족 형태도 위기를 맞이했고, 성장이 정체(停滯)된 사회에서 고착화되는 계층 격차에 대한 울분도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좌우 양당이 과연 변화한 국민들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여 의제를 제시하고 정책을 설계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나마 좌파는 ‘밑바닥 민심’을 꾸준히 반영한다고 주장하며 여전히 기반을 지키고 있지만, 우파는 과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대에 구축한 일반 민심과의 견고한 연결고리를 모조리 상실한 지 오래라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하다. 포퓰리즘의 약진에 유럽에서는 중도좌파 정당들이 몰락한 반면 한국에서는 우파 정당의 지반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오히려 우파 정치인들은 상황의 심각성도 모른 채로, 좌파에서 ‘극우’ 딱지를 붙이지 않을까 눈치 보기에 급급하면서 앞다투어 자신들이 ‘합리적 보수(保守)’라고 좌파 심사위원들을 상대로 하는 경연대회에만 나서는 것 같다. 특히 이들은 자신들이 과거의 ‘구닥다리 보수’가 아니라 ‘세련된 보수’임을 주장하기 위해 매일같이 미국과 서유럽의 사례를 들고 와 자신들이 얼마나 선진국에 적응했는지를 강변한다. 그 외국 사례를 한국 일반 국민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어떤 고민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 ‘선진국 사례’들이 그 나라 국민들에게도 외면받기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합리적 보수’라는 이름의 ‘비합리적 보수’가 횡행하는 사회가 되었다.
 
 
  보수, 공단과 농촌에 뿌리내려야
 
  진정한 ‘합리적 보수’라면 비난받을 걸 두려워하고 알지도 못하는 외국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자국민의 생활환경에서 길어 올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어떤 가치를 지켜내야 할지 고민하고, 그 사람들의 공기를 함께 호흡하며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게 보수의 자세다.
 
  이는 이제 유럽 포퓰리즘 세력이 새로 대세가 되었으니 또다시 맹종하자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보수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철학을 다시 정립하는 일이다. 이러한 철학만 확고하다면, 설령 ‘극우’라는 원색적 비난을 듣더라도 건실한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의 지지를 꾸준히 얻어낼 수 있다. 국민들의 삶과 함께하며 소매에 흙탕물을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보수가 존재할 때, 극단주의의 발호(跋扈)를 막고 사회를 복원해낼 수 있는 것이다. 뉴욕과 파리를 바쁘게 오가는 ‘합리적 보수’ 대신에, 경기도의 공단과 호남의 농촌 속에 뿌리내리는, 그래서 비합리적이라고 손가락질받는 보수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1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dydansror@hanmail.net    (2024-08-08) 찬성 : 2   반대 : 0
극우의 정의부터 정립해 달라. 강경우파는 또 뭔가?.. 극우가 있다면 왜 극좌는 없나?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