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총력특집·인도의 모든 것

10명의 인도인으로 본 인도의 역사

아소카 대왕부터 아마르티아 센까지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아소카, 폭력 근절하고 종교의 자유 실현… 불교 발전의 계기 마련
⊙ 아크바르,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공존 바탕으로 무굴제국 중흥시켜
⊙ 간디, 비폭력주의로 독립 쟁취… 네루, 현대 인도 만들어
⊙ 암베드카르,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인도 헌법 기초하고 초대 법무장관 지내
⊙ 에어 인디아 창립한 JDR 타타,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에 앞장
⊙ 아마르티아 센,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연구로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
  인도는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종교에 대한 열망이 높았기 때문에 현세의 일을 기록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게다가 종이가 아니라 보존이 힘든 나뭇잎에 기록을 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료(史料)가 부족하다.
 
  이런 인도의 역사를 간단하게 서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를 대표하는 10명의 인도인을 통해 인도의 역사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이옥순 연세대학 연구교수가 도움을 주었다. 이 교수는 1984년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인도 역사로 석·박사를 받고 지금까지 인도 관련 저서를 펴낸 국내 몇 안 되는 인도 전문가 중 하나다. 이 교수가 선정한 인물들은 고대 2명, 중세 3명, 근현대 5명이다.
 
 
  1. 아소카 대왕
  - ‘비폭력’과 ‘종교의 자유’ 실천
 
  아소카(재위 BC 268~232년경)는 고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이다. 아소카 왕의 조부(祖父)는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이고, 부친은 빈두사라이다.
 
  아소카 왕은 청년 시절 속주(屬州)의 태수로 힘을 키우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형제들과 싸워 이긴 끝에 왕위를 차지했다. 왕의 비문에 의하면 통치 초기에는 조부 이래의 영토확장 정책을 추진하고, 재위 8년에 인도반도 북동부의 칼링가국을 정복했다. 당시 그는 남인도 일부를 제외한 인도아대륙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소카 왕은 칼링가 전쟁 이후인 BC 261년 불교에 귀의, ‘다르마에 의한 정복’을 표방하며 불교 기반의 선정(善政)을 행했다. 아소카 왕은 불교도였지만, 아지비카교, 브라만교, 자이나교, 바가바트교와 같은 다른 종교들도 허용했다. 아소카 왕은 불교 이념을 통치에 반영하면서 비폭력을 진흥해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찬드라굽타 2세
  - 인도의 황금시대를 연 ‘超日王’
 
찬드라굽타 2세
  찬드라굽타 2세는 인도 굽타 왕조의 제3대 왕(재위 380~415년)이다. 그에게는 비크라마디티아[무용(武勇)의 태양]라는 별칭이 있는데, 번역하면 ‘초일왕(超日王)’이다. 그는 중앙 인도에서 세력을 떨치던 나가족을 회유하고 데칸 중부의 패자(覇者) 바카타카 왕조의 루드라세나 2세와 동맹을 맺는 한편, 말와에서 카티아와르 반도에 이르는 강대한 샤카족 왕국을 정복했다.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통해 서아시아와의 활발한 교역을 하면서, 서아시아 문화도 받아들였다. 아잔타와 엘로라의 불교 석굴들과 수많은 불교 스투파와 사원들이 이 시대에 건설됐다.
 
  찬드라굽타 2세 또한 힌두교를 믿었으나 불교 등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유명한 날란다의 불교대학도 왕의 보호 아래 계속 성장했다.
 
  이옥순 교수는 “이 시기 인도를 여행했던 동진(東晉)의 승려 법현(法顯)의 기록을 보면 찬드라굽타 2세 시대를 태평성대였다고 표현했고, 이후 여러 연구 자료를 봐도 인도의 황금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예술, 문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가 발전했다”면서 “세계적인 문학 작품인 《샤쿤탈라》가 이 시기에 나왔고, 지동설을 주장하고 숫자 영(0)을 만든 아리아바타와 같은 수학자도 이 시대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3. 아크바르
  -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공존 추구한 大무굴제국의 중흥주
 
악바르 대제 아크바르
  아크바르(1542~1605년)는 인도의 다섯 번째 이슬람 왕국인 무굴제국의 3대 왕이다. 그는 13세 어린 나이에 등극(登極)한 후 강력한 군사력으로 판도를 부단히 확장하면서 제국을 부흥시켰다.
 
  아크바르는 북인도 지역을 석권하고 구자라트·벵골·오리사·카슈미르·신드 등 광활한 지역을 병탄해 인도 이슬람 왕조 사상 최대의 제국, 이른바 ‘대(大)무굴제국’ 시대를 열었다. 아크바르는 소수 지배자인 무슬림과 다수 피지배자인 힌두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일련의 민족융화 정책을 실시했다. 더 나아가 엄청난 세수(稅收) 감소를 감내하면서 비무슬림에게만 부과했던 성지순례세와 인두세를 폐지하였다. 이러한 아크바르의 민족화해와 문명융합 정책으로 인해 무굴제국은 강대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4. 크리슈나 데바라야
  - 포르투갈인들도 감탄한 유능한 군주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크리슈나 데바라야.
  크리슈나 데바라야는 1509년부터 1529년까지 남인도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통치한 황제였다. 툴루바 왕조의 세 번째 군주인 그는 이슬람계인 델리 술탄국이 몰락한 후 인도에서 가장 큰 제국을 통치했다.
 
  크리슈나 데바라야 왕은 통치 기간 신하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혹하게 다뤘지만, 국민을 위해서는 결혼비와 같은 불쾌한 세금을 폐지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폈다. 그는 새로운 경지를 개간하고 비자야나가라 주변의 관개시설을 확충했다. 매년 제국의 광범위한 지역을 순행하면서 현실을 파악하고 악행자를 처벌했다. 서사시를 좋아해서 많은 시인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방문했던 포르투갈인들은 “크리슈나 데바라야 왕은 유능한 행정가이자 훌륭한 장군이며, 최전방에서 전투를 이끌고 친히 부상자를 돌보았다”고 기록했다.
 
 
  5. 시바지
  - 농민들의 지지 얻어 이슬람 물리치고 힌두교 부흥시켜
 
시바지
  시바지(1627~1680년)는 마라타 왕국의 창시자이다. 그는 이슬람 왕조인 북쪽의 무굴제국과 남쪽의 비자푸르국의 압제에 저항하는 마라타족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데칸 반도 서부에 소왕국을 건설했다.
 
  이옥순 교수는 “시바지는 힌두교도로서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국시(國是)로 삼았다”면서 “시바지 왕은 무굴제국을 상대로 27년간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마라타 왕국은 결국 패했지만 무굴제국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무굴제국은 마라타 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잔존한 마라타 세력은 후일 최후까지 영국 식민 세력에 저항했다.
 
 
  6. 마하트마 간디
  - 인도인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영혼
 
  ‘비폭력’주의를 내세워 영국의 식민통치에 맞선 간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간디는 1869년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간디의 집안은 상인 계급(Bania Caste)에 속했고 식료품상이었다.
 
  간디는 18세 되던 해 영국으로 건너가 법률을 공부했다. 1891년 변호사 면허를 취득한 그는 1893년 남아프리카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간디는 그곳에서 약 7만 명의 인도인들이 백인에게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인종차별 반대투쟁 단체를 조직, 활동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인도에서 벌인 독립운동의 모형이 된다.
 
  1915년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의 독립을 촉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영국의 전쟁 수행을 적극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배신했다. 이때부터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했다. 납세거부·취업거부·상품불매 등 비폭력 저항을 벌였다. 간디는 이후 여러 차례 투옥됐지만 영국의 탄압에 굴하지 않았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후 간디는 힌두·이슬람의 융합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8년 1월 반(反)이슬람 극우파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7. 자와할라 네루
  - 현대 인도를 만든 초대 총리
 
영국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후 인도 최초의 총리였던 자와할라 네루.
  자와할라 네루(1889~1964년)는 인도의 독립 이후 1947~1964년 초대 인도 총리를 지냈다. 사회주의 성향을 지녔던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와는 달리 적극적인 파업과 투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전통은 사회적 모순과 불의에 맞서는 민중운동으로 이어졌다.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이었던 네루는 영국에서 해로스쿨,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수학하고, 런던에 있는 이너 템플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1912년 귀국했다.
 
  네루의 인생을 바꾼 것은 1919년 벌어진 암리차르 학살이었다. 영국군의 발포로 379명이 살해되고 1200명이 부상을 당한 이 사건을 계기로 네루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후 초대 총리가 된 네루는 인도의 기본적 단일성에 바탕을 둔 세속주의를 강조하면서 인도를 현대국가로 개조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을 존중했고, 교육 및 과학기술의 진흥, 소외계층의 복지, 여권 증진, 카스트 제도 철폐 등을 위해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미소(美蘇) 냉전의 와중에 ‘비동맹’을 표방하며 제3의 길을 모색했다.
 
 
  8. 브힘라오 암베드카르
  -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에 앞장선 초대 법무장관
 
브힘라오 암베드카르
  브힘라오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제도상 최하 계급인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출신으로 인도 독립 후 첫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1891년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암바바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신 신분으로 인한 온갖 차별과 수모를 감수하면서 학업에 정진, 뭄바이대학교 엘핀스톤칼리지를 졸업한 후 사회사업가 켈루스카의 후원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암베드카르는 귀국 후 뭄바이 시드넘대학 교수가 됐지만 신분차별은 여전했다. 결국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1922년 영국 그레이법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는 한편, 영국의 런던정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3년 귀국한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의 힌두사원 입역(入域) 금지 철폐운동을 전개하면서 최하층민들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하자 암베드카르는 헌법기초위원장과 법무장관을 맡아 인도공화국 헌법 제정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 그는 인도의 사회적 불평등과 악법을 담은 힌두교 《마누법전》을 폐기하고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실현한 새로운 힌두법전을 제안했지만 좌절되자 바로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옥순 교수는 “암베드카르야말로 불가촉천민의 희망이었다”면서 “우리나라로 치면 백정의 신분에서 법무부 장관까지 올라간 것”이라고 말했다.
 
 
  9. J.R.D 타타
  - ‘노동 자체를 사랑’했던 혁신적 기업인
 
J.R.D 타타
  J.R.D 타타(1904~1993년)는 비행사 출신의 기업가다. 타타는 인도에서 최초로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에어 인디아(Air India)의 전신인 타타에어서비스(Tata Air Service)를 설립했으며, 1977년까지 회장으로 에어 인디아를 경영했다.
 
  에어 인디아는 이후 약 3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항공사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오늘날 세계 굴지의 항공사로 꼽히는 싱가포르항공, 캐세이퍼시픽 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타타 회장은 현장에서 와인 따르는 방법, 승무원의 머리스타일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지저분한 카운터는 직접 세정제로 청소했고, 항공기 화장실 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대가를 받고 눈에 보이는 일만 한다는 자세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노동 자체를 사랑한다’고 할 만큼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가 인도 정부와의 갈등으로 1977년 에어 인디아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에어 인디아의 경쟁력은 하락, 에어 인디아의 명성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타타 회장은 인도에서 처음으로 하루 8시간 노동제, 유급 휴가제를 도입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보장, ‘노동자들을 생각하는 기업인’으로 인도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0. 아마르티아 센
  -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
 
아마르티아 센
  센 교수는 1933년 지금의 방글라데시 마니쿠간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빈곤과 불평등에 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도 인도 출신이다.
 
  그는 《빈곤과 기아》(1981)에서 1943년 벵골 대기근은 단순히 절대적인 식량 생산의 부족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낮은 임금과 도시 지역의 곡물 가격 상승으로 인해 벌어졌다고 밝혔다. 센의 이론은 이후 국제기구에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그가 만든 ‘센 지수(指數)’는 빈곤의 정도를 측정하는 데 상당히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센은 이러한 자신의 연구에 대해 ‘직업적 양심’이라고 표현했는데, 당시 벵골 대기근을 직접 목격한 인도 출신이라는 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센은 인도와 중국의 남녀평등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경제학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을 중시해 온 그는 경제철학 분야에서도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3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