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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아르메니아에서 생각하는 한일관계

과거에 발목 잡혀 가난에 신음하는 아르메니아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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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여 년 전 대학살 때문에 이웃 튀르키예와 앙숙
⊙ 국제적 고립으로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에서도 패배
⊙ 무역로 막혀 빈보다 물가 비싸… 친러 세력만 재미
⊙ 일부 젊은 정치인들, ‘미래’ 위해 튀르키예와의 관계 개선 주장하지만 외면당해
⊙ ‘에덴동산’과 ‘노아의 방주’의 나라…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는 자부심 높아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아라라트산은 튀르키예 영토 안에 있지만, 아르메니아 아이덴티티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사진=유민호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2km 떨어진 산 라자로(San Lazzaro) 섬에는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있다. 이 섬에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있는 것은 베네치아공화국이 1717년 특별법으로 이 섬을 아르메니아인들의 망명지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모습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수도원의 핵심 공간은 도서관이다. 아르메니아는 손바닥 크기의 초미니 북을 처음으로 양산(量産)할 정도로 출판문화가 발달한 나라였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Lord Byron)은 산 라자로 도서관의 명성을 더해주는 인물이다. 28세 때인 1816년 11월 베네치아에 도착한 그는 이 수도원에 머물면서 아르메니아어를 공부했다. 그는 평생 아르메니아를 숭배하고 예찬했다. 바이런은 아르메니아어로 된 시집을 남겼고, 최초의 영어-아르메니아어 사전 초안(草案)을 만들기도 했다. 산 라자로 도서관 정면에는 바이런의 아르메니아어 서명과 함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하지만 바이런은 한 번도 아르메니아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19세기 초반 당시 아르메니아는 이슬람 대제국인 오스만튀르크제국 지배하에 있었다.
 
  바이런이 아르메니아를 찬미했던 이유는 그의 사후(死後) 발간된 아르메니아어 시집, 《아르메니아어 공부와 시(Armenian exercises and poetry)》에 잘 나타나 있다.
 
  “진흙 덩어리로 창조된 인류의 아버지 아담, 그가 머물던 땅(에덴동산)이 바로 아르메니아다. 세상 전부가 홍수로 떠내려간 노아의 땅, 이후 평화와 희망의 비둘기가 돌아온 땅도 아르메니아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덴동산)가 사라지면서 아르메니아의 불행은 시작됐다. (신이 창조한) 아담의 땅은 페르시아와 오스만에 양분된 채 고통 속에 빠져들었다….”
 
 
  ‘중국 식당’이 없는 나라
 
  4월 초 아르메니아를 찾았다. 바이런이 끝내 밟지 못했던 ‘아담의 땅’에 직접 가서, 바이런이 왜 아르메니아를 에덴의 동산, 파라다이스라고 노래했는지 알고 싶었다. 노아의 방주(方舟)가 안착하고, 희망의 비둘기가 날아다닌 ‘성스러운 땅’은 과연 어떤 곳일까?
 
  예레반 국제공항은 한국 국내선 시설 정도에도 못 미치는 작은 공항이었다. 인구 300만 명에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에 불과한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동양인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 국토를 통틀어 차이나 마켓이나 중국 식당이 단 하나도 없는 나라가 아르메니아라고 한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에 대한 중국 정부의 영향은 남다르다. 중국인은 없어도, 중국 자본은 곳곳에 침투한 상태다. 중국산 화웨이 휴대폰이 아이폰 다음가는 최고급 휴대폰으로 통한다고 한다.
 
  공항에서 나오자, 택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0달러 정도면 중심지까지 가지만, 800원 정도 하는 시외버스를 탔다. 현지의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디아스포라와 제노사이드
 
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 사이에 완충국가로 존재했던 고대 아르메니아 이래, 아르메니아는 강대국 사이에서 고난을 겪어왔다. 사진=유민호
  바이런은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와 오스만에 양분’되었다고 노래했는데,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금은 여기에 러시아까지 가세했다.
 
  11세기부터 이슬람의 지배를 못 견딘 아르메니아인들은 국외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diaspora)’의 기원이다.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디아스포라’는 ‘흩어져 퍼트려진 상태’라는 뜻이다. 돌아갈 땅 하나 없이 세계 곳곳을 떠도는 상황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디아스포라’라고 하면 유대인을 연상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디아스포라 역시 그에 못지않다. 오늘날 해외 거주 아르메니아인은 500만 명에 달한다. 아르메니아 국내 거주 300만보다 훨씬 많다. 미국과 러시아에 각각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살고 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은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 디아스포라는 곧잘 대량 학살로 이어진다. 20세기 초 아르메니아인들도 유대인들처럼 오스만튀르크에 의한 제노사이드(genocide)를 경험했다.
 
  유대인들의 생존법이나 20세기 이후 이스라엘의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 역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에 아르메니아인들이나 그들의 역사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아르메니아는 10세기부터 셀주크튀르크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11세기 십자군 전쟁 기간 중 아르메니아는 국가 자체를 통째로 서쪽으로 옮기면서 활로(活路)를 모색했다. 그러나 7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끝난 직후인 1375년,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르메니아는 대제국 오스만튀르크에 굴복했다.
 
  아르메니아가 이후 독립에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550여 년이 지난 뒤였다. 1918년 5월,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1년 6개월 뒤인 1920년 11월, 아르메니아는 소비에트연방에 흡수되면서 독립을 상실했다. 1918년 독립 직전 오스만튀르크가 자행한 제노사이드를 경험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소비에트 치하에서도 공산당에 의한 대량 학살을 경험했다. 이런 고난을 겪으면서 아르메니아인 상당수는 생존을 위해 유럽·중동·미국으로 흩어졌다.
 
 
  ‘국제 정치의 미아’
 
  아르메니아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독립을 되찾았다. 소비에트 해체 과정의 부산물(副産物)이라고 할까. 아르메니아는 독립 이후 인접한 아제르바이잔과 계속해 국경분쟁을 겪었다.
 
  2020년 9월부터 시작된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은 아르메니아의 패배로 끝났다. 아르메니아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해온 땅은, ‘제3국 감시하’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으로 넘어갔다.
 
  어느 나라도 아르메니아를 도와주지 않았다. 2020년 전쟁 당시 초기 상황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의 서막처럼 느껴진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유럽연합(EU)의 대(對)러시아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서방의 지원을 확보했지만, 아르메니아의 경우는 달랐다. 서방 측은 물론 같은 ‘디아스포라 민족’ 국가인 이스라엘조차 등을 돌렸다. 아르메니아가 이란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르메니아의 적국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했던 것이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모두 제정(帝政)러시아나 소련 시절 러시아(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다. 러시아 정교를 믿는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이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과 싸우는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를 지원하는 듯했지만, 립서비스에 그쳤다. 아르메니아는 ‘국제 정치의 미아(迷兒)’로 전락했다. 필자가 아르메니아에 들어가기 2년 반 전에 벌어진 일들이다.
 
 
  갈 수 없는 山 아라라트
 
  예레반에 머무는 동안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친절하고 평화로우며 치안도 좋았다.
 
  반면에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의 모습과 사회주의 소비에트의 흔적이 동시에 드리워진 기묘한 땅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크고 어두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곳곳에 들어선 초대형 조각상의 수준도 상당했다. 소비에트 스타일의 영웅적 표정과 큰 동작의 자세가 인상적이지만, 내면으로 파고드는 종교적 깊이도 느낄 수 있었다. 큰 건물 대부분이 아치형의 큰 대문을 달고 있다는 것도 기독교 국가로서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듯했다. 자동차를 빌려 예레반은 물론, 수도 주변 교회 30여 군데를 돌아다녔다.
 
  아르메니아의 정신적 지주는 예레반을 굽어 내려보는, 해발 5137m의 아라라트(Ararat)산이다.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를 휴화산(休火山)으로, 바이런이 노아의 방주의 안착점이라 생각했던 성스러운 땅이다. 1년 내내 흰 눈에 덮인 아라라트산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낳은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라라트산은 아르메니아에 없다. 튀르키예(터키)에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멀리서 볼 수만 있을 뿐, 직접 발로 갈 수는 없다. 아르메니아 교회 대부분은 아라라트산을 바라보는 식으로 건립돼 있다.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는 자부심
 
아르메니아 교회는 고깔형 급경사 첨탑으로 장식된다. 하늘을 찌르는 유럽 고딕 양식 교회 건축의 출발점이 바로 아르메니아다. 사진=유민호
  아르메니아인의 종교적 열정은 남다르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삼았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보다 91년이나 앞선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는 자부심이 엄청나다. 아르메니아는 신(神)이 지켜주는 땅, 아르메니아인들은 선민(選民)이란 생각이 강하다.
 
  이 같은 믿음 때문이겠지만, 건축물이자 예술작품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정성과 집념이 대단하다. 기본 재료는 전부 응회암(凝灰巖)이다. 유럽의 흰색 대리석과 다른, 짙고 검은 연분홍색 돌이 응회암이다. 뭔가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만, 튼튼하면서도 아름답다. 응회암으로 건립된 교회 기반이나 벽을 보면, 칼로 자른 듯 반듯하다. 티끌 하나 들어갈 틈이나 흠도 없는, 고대 그리스 건축공법을 120% 재현한 것이다.
 
  가톨릭 양식의 교회에 익숙할 경우, 아르메니아 교회의 중앙 첨탑이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뾰족한 프랑스 고딕 양식의 원조(元祖)가 바로 아르메니아 교회 건축이다.
 
10세기 아르메니아 번영의 상징인 가긱(Gagig) 왕. 서기 1000년을 기념한 교회를 만들어 바친 기독교 수호 용사이기도 하다. 사진=유민호
  서방 기독교와 달리, 좁은 교회 안에서 모두 선 채로 예배에 나서는 것도 신선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똑바로 서서 예배했다.
 
  교회 내부는 성상(聖像) 숭배를 금하는 분위기다. 곳곳에 성화(聖畵)가 걸려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장식 하나 없이 십자가 하나만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 국교화가 단행된 301년 이래 지금까지, 초기 교회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11세기 이후 900여 년간의 이슬람 지배, 1920년 이후 70여 년간의 소비에트 통치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는 변하지 않았다. 예레반 곳곳을 돌아다니는 내내 이 도시는 민족적·종교적 정체성(正體性)이 사라지지 않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런이 살아서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를 찾는다면 눈물을 흘리면서 불사신(不死身) 아르메니아 혼(魂)의 부활을 찬미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면서 2023년 한반도 모습을 떠올렸다. 핵심은 역사 문제다. 아르메니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內陸) 국가로 이슬람 강대국인 이란과 튀르키예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중국의 변방 국가로 수많은 외침(外侵)을 당하면서도 살아남은 한국의 역사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국가로서의 종교적 긍지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해올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언제부터 스스로에 대한 민족적 정체성을 갖게 됐을까? 멀리는 삼국 시대, 가까이는 조선 시대로 잡는 사람도 있겠지만, 필자는 불과 100여 년 전부터라고 생각한다. 씨족(氏族), 부족, 양반, 상놈이 아닌,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우리’라는 의식의 출발점은 20세기 초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아르메니아와 한국 모두 역사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아르메니아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이다. 오스만튀르크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와 가까워지자 당시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오스만튀르크 정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학살 희생자가 100만~15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면서 튀르키예에 학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해왔다. 반면에 오스만튀르크와 그 후손인 튀르키예는 전쟁 중에 불가피하게 발생하곤 하는 희생의 수준을 넘어서는 제노사이드(인종학살)는 없었으며, 아르메니아가 주장하는 희생자 수는 엄청나게 과장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빈보다 비싼 물가
 
지역 강국들에 둘러싸인 아르메니아는 바다로 나갈 길이 막혀 있다.
  100년 넘게 이어져 오는 ‘아르메니아 학살’ 논란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수난을 세계에 알리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는 아르메니아 스스로의 목을 죄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를 악마시하고, 튀르키예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면서 양국 간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두 나라는 외교 관계도 맺지 않고 있다. 튀르키예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려면, 조지아를 거쳐야 한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아르메니아에 돌아오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바다에 면하지 않은 내륙 국가다. 지중해로 나가려면 튀르키예를 거쳐야 한다. 북쪽의 조지아를 통해 나갈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이스탄불 앞 보스포루스해협을 거쳐야만 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의 도움이 없이는 지중해로 나갈 수가 없다.
 
  이렇게 꽉 막힌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경제다. 아르메니아에 머무는 동안 필자는 고물가(高物價)에 깜짝 놀랐다. 계란 하나에 한국 돈으로 300원, 1L 우유 한 팩에 2500원, 아침 식사용으로 먹을 만한 빵 하나에 2000원,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 하나에 1200원 정도다.
 
  한국 물가와 비슷하지 않냐고?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을 보면 한국의 경우 3만5000달러 수준인 반면, 아르메니아는 7분의 1인 5000달러에 불과하다. 엄청난 고물가다.
 
  물론 수도 예레반을 벗어나면 물가 수준은 상당히 낮다. 하지만 공장에서 만들어진 일용품의 경우, 어디에서나 비싸다. 필자가 아르메니아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오스트리아 빈의 물가보다도 높다.
 
  왜일까? 식료품을 포함한 일용품 대부분이 러시아에서 수입되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국산품’이라고 하면 거리에서 행상인이 파는 채소 정도가 전부다. 가족 4인이 먹을 만한 채소가 한 묶음에 1000원 미만 정도로 저렴하다. 그러나 포장된 상품을 파는 슈퍼마켓에 가면 값이 3~5배로 뛴다. 대부분 러시아를 경유해서 수입된 물품들이다.
 
 
  친러 정치인·경제인들만 재미 봐
 
아르메니아인들의 반튀르키예 감정은 뿌리 깊다. 2021년 4월 24일 아르메니아인 학살 106주년을 맞아 튀르키예 국기를 불사르는 아르메니아인들. 사진=AP/뉴시스
  필자는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튀르키예에 머물렀다. 최근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고 하지만, 아르메니아에 비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아르메니아가 튀르키예와 우호관계를 맺으면 서민의 숨통을 틔울 수 있다. 아르메니아가 튀르키예와 교류할 경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이 바로 물가안정이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물론 북아프리카산 저가 상품들이 유입되면 독점(獨占)과 폭리(暴利)를 일삼는 러시아 상품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금(金)·구리·담배 같은 아르메니아의 주요 수출품들을 지중해 인근 국가로 내다 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부 꽉 막혀 있다. 100년도 더 전인 20세기 초에 벌어졌던 어두운 역사 때문이다. 조상들을 학살했던 잔인한 이슬람 국가와는 손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아르메니아의 발목을 잡고 있다. 100만, 150만 하는 식으로 학살된 희생자의 수를 되뇔수록 아르메니아의 문은 꽁꽁 닫힐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재미를 보는 자들은 친(親)러시아 정치인·경제인들이다. 워낙 비즈니스 상대가 한정되어 있는 바람에 몇 안 되는 아르메니아 수출 상품조차 저가로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아르메니아인의 여론은 들쭉날쭉이다. 어제는 찬성, 오늘은 반대, 하는 식이다. 이렇게 갈피를 못 잡는 것도 러시아와 얽힌 이해관계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은 러시아가 억지 명분을 내걸고 나오면 수도 예레반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러시아에 반대 못 하고, 거꾸로 푸틴 대통령을 지지한다.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전부 파악하는 젊은이들이야 푸틴을 비난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의도적으로 신경을 끄고 살아간다.
 
  독점은 모든 것을 나쁘게 만든다. 아르메니아 경제가 러시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바람에 피해는 더 커지고 있다. 5% 고소득자와 90% 저소득자로 양극화되어 있는 게 21세기 아르메니아 경제의 현실이다. 사실 필자를 놀라게 했던 고물가 상품들은 상위 5%를 위한 것들이다. 아르메니아 국민의 90%는 슈퍼마켓에 가는 것조차 어렵다. 한 달 평균 수입이 400달러에 불과한 사람들이 2달러짜리 우유, 1달러짜리 화장지를 구입할 수 있을까?
 
 
  과거사에 대한 집착
 
  튀르키예에 대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서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와 비슷하다. 눈앞 현실이 아니라 거기서 한참 동떨어진 과거사가 의식을 지배한다. 식민지 당시의 기억을 후벼 파고, 독도에다 멍게까지 동원하면서 민족감정을 자극한다.
 
  최근에는 제1야당 정치인들이 일본 후쿠시마(福島)까지 가서 ‘제2의 광우병 이벤트’를 펼치고 있다. 필자는 일본 동북산 수산물이 100%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00% 위험하다는 생각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이미 유럽 선진국 대부분은 일본 수산물 수입을 허용한 상태다. 유럽인이 한국인보다 방사성 물질에 강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일본 동북산 수산물을 수입한다 해도, 마음에 걸린다면 사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국제 기준, 과학적 증거, 독립된 개인의 판단력이란 3개의 관점에서 볼 때 ‘방사성 물질 멍게 이벤트’는 선동을 넘어선, 무지(無知)의 극치라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에는 “수염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모든 염소가 선지자들일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럴듯한 슬로건과 피 끓는 명분으로 포장한 선동에 주의하란 말이다.
 

  아르메니아에서 접한 현실은 너무도 암담하다. 파고 들어갈수록, 필자가 가졌던 이 ‘기독교 국가’에 대한 환상이 전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다. 《성경》은 물론, 《쿠란》에도 기록된 ‘에덴동산’은 너무도 어둡다. 재삼 강조하지만, 과거사에 대한 집착이 가장 큰 이유다.
 
  다행히 일부 젊은 정치인들이 과거사를 넘어 미래를 위해서라도 튀르키예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100년 이상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과거사’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큰 바위 얼굴’ 같은 지도자 되길
 
  윤석열 대통령은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G7 회의 후에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서울을 답방할 가능성이 높다. 이 두 행사를 전후해서 증오와 저주의 반일 이벤트가 극성을 부릴 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그러했듯이, 반일로 점수를 따는 것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는 큰 바위 얼굴’ 같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지난 3월 16일 한일정상회담 직전 보여주었던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결의를 모든 국민에게 다시 한 번 보여주기를 바란다. 아르메니아에서 보듯 ‘과거’에만 집착할 경우, 신(神)이 내린 에덴동산조차 어둡고 추운 세상으로 추락해버린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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