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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이 공중전 벌인 카슈미르는 어떤 곳인가

무슬림이 多數임에도 힌두교도 군주가 인도 선택하면서 분단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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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테러조직 ‘자이셰 모하메드’, 인도군에 폭탄 테러 가해 40명 살해… 인도가 보복 공습, 파키스탄과 공중전 벌여
⊙ 모직 제품 ‘캐시미어’의 원산지… 14세기 이후 이슬람 지배
⊙ 주민의 75%가 무슬림이었지만 인도·파키스탄 독립 당시 힌두교도 지배자가 인도 귀속 선택… 65%는 인도, 35%는 파키스탄이 점령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학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학 이슬람학 박사 / 現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 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지난 2월 18일 인도 카슈미르주 잠무에서 경계근무 중인 인도 군인들. 2월 14일 대규모 자살폭탄 공격으로 40여 명이 숨진 후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뉴시스/AP
  지난 2월 14일 파키스탄의 ‘자이셰 모하메드(Jaish-e Mohammed·무함마드의 군대)’라는 단체 소속 22세 청년 아딜 아마드 다르가 인도령(領) 슈미르(Kashmir)의 풀와마(Pulwama) 지역 레트포라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잠무 스리나가 고속도로에서 경비군인을 태운 차량을 목표로 한 테러 공격으로, 인도 군인 40명이 목숨을 잃었다. 테러에는 60kg 정도의 강력한 폭발물이 사용되었고, 살상 반경이 150m에 달했으며, 폭발의 충격으로 시신이 무려 80m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다고 인도 경찰 당국은 밝혔다.
 
  테러 공격에 발끈한 인도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공군기를 파키스탄 영공(領空)으로 보내 테러분자들의 근거지를 공습(空襲)했다. 파키스탄은 “인도가 테러를 자행한 자이셰 모하메드와 무관한 곳을 폭격했고,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공군 미그-21 전투기 2대를 격추했으며, 조종사 한 명을 생포했다”고 발표했다. 인도는 “파키스탄 공군기 F-16 한 대를 격추했다”고 했다. 파키스탄은 이를 극구 부인했다.
 
  미국과 중국이 전방위적(全方位的)으로 맞부딪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국제사회는 카슈미르 현안보다는 비공식 핵(核)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의 갈등이 핵전쟁으로 비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파키스탄이 부인하고는 있지만 인도의 구(舊)소련제 미그-21이 어떻게 파키스탄의 미국제 F-16을 격추할 수 있었는지를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미국이 저렇게 국방력이 허약한 인도와 손잡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懷疑)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총선에 이용하려 파키스탄 공습했나
 
  카슈미르를 두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신경전은 1947년 양국이 영국에서 독립하여 국가를 세운 때부터 지속되어 왔다. 여러 차례 전쟁을 겪기도 했지만 서로 인내력을 발휘하여 더 큰 참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테러나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인도는 늘 파키스탄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파키스탄은 오리발을 내미는 전형적인 양상을 반복했을 뿐, 이번처럼 인도가 직접 파키스탄을 공격한 적은 없었다.
 
  물론 인도 군인 40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자살 테러는 인도령 카슈미르 역사상 최악으로 꼽힌다. 그 때문에 테러를 배후에서 조종한 자이셰 모하메드 근거지인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를 인도가 공습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총선을 코앞에 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가 애국심을 자극해 유리한 정국(政局)을 조성하기 위해 파키스탄 공습을 결정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파키스탄은 확전(擴戰)을 막기 위해 생포한 인도 공군 조종사를 송환했다. 이 조종사는 이미 인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모디 총리의 집권여당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BJP)은 힌두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기에 파키스탄과의 대립은 곧 다가올 선거에서 모디 총리에게 호재로 작동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구식 비행기 두 대는 잃었지만 총선만 생각하자면 한마디로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물론 유례없이 강력한 테러 공격을 당한 나라가 테러를 계획한 단체의 근거지를 공격하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굳이 선거 때문에 했다고 공격의 이유를 댈 필요는 없다. 자국(自國)의 영토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왜 인도령 카슈미르에 거주하는 청년이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근거지를 둔 테러 집단의 사주를 받고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인도 군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했는지 묻는 것이 더 정상적일 것이다.
 
 
  ‘캐시미어’의 원산지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완전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카슈미르는 양털로 만든 담요나 옷으로 널리 알려진 캐시미어(cashmere)의 어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캐시미어 모직 제품은 우리나라에서도 고급 제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캐시미어 모직 제품의 따스함이나 부드러움과 달리 현대 카슈미르는 항쟁·억압·테러로 점철된 차갑고 날카로운 비극의 역사로 가득한 곳이다.
 
  히말라야산맥 서쪽에 자리 잡은 카슈미르 지역은 해발 최저 300m에서 최고 7000m에 달하는 고원지대로 타원형 접시 모양의 지형이다. 총면적은 약 22만km2로 우리 한반도와 같은 크기다. 북동쪽으로는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동쪽으로는 티베트, 남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북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각각 맞닿아 있다. 고대(古代) 인도 불교의 성왕(聖王)인 아소카(재위 기원전 약 265~238)는 카슈미르를 다스리면서 많은 불교 유적을 남겼다. 중국의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602~662)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이곳을 오늘날 중국어 발음으로 ‘자스미뤄(迦濕彌羅)’라고 불렀다.
 
  1320년 몽골의 침략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여, 무슬림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역사적으로 보면 카슈미르는 불교나 힌두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다스렸다. 8세기에 신드(Sind) 지방 통치자들이 카슈미르 침공을 시도했으나 히말라야산맥 남쪽 지역에서 멈추었다.
 
 
  14세기 이후 이슬람 침입
 
  본격적으로 무슬림이 카슈미르를 장악한 것은 튀르크 출신 샤 미르가 1339년 권력을 잡고 술탄 샴숫딘으로 즉위하면서 샤 미르 술탄조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시칸다르(재위 1389~1413) 술탄은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힌두교도들을 박해하면서 이슬람교로 강제 개종시켰다. ‘위대한 왕’이라는 뜻인 ‘부드샤’로 불린 그의 아들 자이눌 아비딘(1420~1470)은 아버지와 달리 비(非)이슬람교인들에게 부과하던 세금을 폐지하고, 힌두교사원을 재건하고, 이슬람교로 강제로 개종당한 힌두교인들이 다시 힌두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부드샤의 후계자들 역시 종교적 관용정책을 폈다. 하지만 수피들과 여러 무슬림의 노력에 힘입어 15세기 말경 카슈미르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샤 미르 술탄조에 이어 시아파 튀르크 차크족이 카슈미르를 1561년부터 1586년까지 잠시 장악하다가, 강력한 무굴(Mughul)제국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했다. 무굴제국은 상공업과 농업을 일으키고 지역을 안정시키며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무굴제국의 일부가 되면서 카슈미르는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正體性)을 상실했다. 재능 있는 장인(匠人)·시인·학자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제국의 수도로 떠나면서 카슈미르의 문화는 예전과 달리 풍요로움을 잃은 것이다.
 
  아우랑제브(1618~1707) 사후(死後) 무굴제국의 카슈미르 지배력이 흔들리면서 지역 유력자들이 외부 아프간 세력을 끌어들여 1752년 무굴제국을 몰아냈다. 그러나 새로운 지배자는 세금을 과하게 거둬들이고 시아들을 박해하는 등 폭정으로 주민들을 괴롭혔다.
 
  아프간에 이어 1819년 펀자브의 통치자이자 시크교도인 란지트 싱이 카슈미르를 장악했다. 1846년까지 지속된 시크교의 카슈미르 지배도 평화롭지는 못했다. 모스크를 폐쇄하고, 소 도축 금지령을 위반하면 사형으로 다스렸다. 무거운 세금을 심지어 창녀에게까지 매겼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가난에 시달렸고, 펀자브나 북부 인도로 대거 이주했다.
 
 
  영국의 식민지배
 
  1846년 제1차 영국-시크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시크교도들의 카슈미르 지배가 막을 내렸다. 영국은 750만 루피에 카슈미르를 잠무의 통치자인 도그라족 지도자인 라자 굴랍 싱에게 넘겼다. 카슈미르 주민의 90%를 차지하던 무슬림의 삶은 시크교도의 통치 시절보다 더 나아진 듯했으나,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힌두교 종교세를 내야 했고, 소 도축 역시 금지되었다. 정부가 여러 모스크를 직접 통제하고 관리했다. 1885년 권좌에 오른 프라타프 싱은 무능했다. 러시아의 인도 침략을 우려한 영국은 카슈미르를 점령, 1921년까지 직접 다스렸다. 영국은 개혁정책을 다수 도입했지만, 무슬림 주민들에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셰이크 압둘라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강제노역 철폐, 정부 공직 무슬림 고용 확대, 모스크 국가관리 완화 등을 요청했으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무슬림들은 1932년 10월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급기야 1946년 5월에는 4년 전 간디가 시작한 인도 독립운동(Quit India Movement)을 본떠 카슈미르 독립운동(Quit Kashmir Movement)을 발족했다. 카슈미르 정부는 이를 무력진압하며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1947년 6월 3일 영국 정부는 인도 독립안(案)을 발표했다. 당초 영국 정부는 550여 개에 달하는 인도 내 여러 소국(小國)이 각기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라고 했다. 한 달 후인 7월 25일에 마운트배튼 경(卿)은 여러 지도자에게 주민들의 종교적 성향을 고려하여 주민들의 뜻에 맞게 인도나 파키스탄에 합류하라고 권고했다.
 
  카슈미르 역시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194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카슈미르 인구의 77%가 무슬림이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대다수인 무슬림의 뜻을 존중한다면 선택지는 당연히 파키스탄이었다. 더욱이 지리적으로도 파키스탄과 더 가깝다. 그러나 힌두교도였던 카슈미르 최후의 통치자 하리 싱은 파키스탄에 합류하길 원하지 않았다. 다만, 파키스탄과 현재의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어 상호 통상과 교류에 장애가 없도록 했다. 인도와는 이러한 협정을 맺지 않았다.
 
 
  카슈미르의 분단
 
카슈미르의 마지막 군주인 하리 싱.
  1947년 8월 영국령 인도가 14일에 파키스탄, 15일에 인도로 각각 독립했다. 카슈미르 정치상황은 불안하게 돌아갔다. 6월에 무슬림들은 카슈미르 서쪽에서 반(反)정부 시위를 벌였고, 9월에는 카슈미르 남부에서 반(反)무슬림 시위가 일어났다. 2만명의 전사(戰士)를 모아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복속하려 한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러던 중 10월 파키스탄 북서 변경의 파슈툰 부족이 카슈미르를 침공했다. 이들은 오늘날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수도인 무자파라바드를 점령했다. 이어 동쪽으로 170km 떨어진 수도 스리나가르 공격을 시도했다. 파키스탄은 파슈툰 부족을 지원하고자 했으나 영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은 분리되지 않은 채 영국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슈툰 부족의 침공에 화들짝 놀란 하리 싱은 인도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인도는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카슈미르를 인도에 귀속시킨다는 협정에 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리 싱은 인도의 뜻에 따라 10월 26일 인도령 가입문서에 서명했다. 이튿날 인도는 군대를 스리나가르에 투입하여 반격에 나섰다. 인도는 이 가입문서에 근거하여 카슈미르가 합법적인 인도령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파키스탄은 이 문서가 조작된 것이고, 하리 싱이 자유의지로 서명한 것도 아니며, 파키스탄과 먼저 맺은 협정이 유효하기 때문에 카슈미르가 인도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하리 싱이 카슈미르를 떠나 자신의 통치령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고, 따라서 주민들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인도의 카슈미르 접수는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제1차 카슈미르 전쟁은 결국 국제사회의 중재로 1949년 1월 1일에 끝났다. 카슈미르의 65%는 인도가, 나머지 35%는 파키스탄이 차지했다. 우리의 휴전선처럼 통제선(Line of Control)이 그어졌다. 이어 양측은 1965년에 다시 카슈미르를 두고 2차 전쟁을 벌였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테러의 온상
 
지난 2월 15일 인도 뭄바이에서 파키스탄 총리 사진을 불태우며 反파키스탄 시위를 벌이는 인도 무슬림들. 인도의 무슬림 인구는 1억7000만명에 달한다. 사진=뉴시스/AP
  2000년대 들어 카슈미르 분쟁은 이번 테러처럼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근거지를 둔 테러집단이 인도령 카슈미르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무력(武力) 공격을 취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인도 정부는 이들 테러집단을 파키스탄 정보 당국이 은밀히 후원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특히 이번 테러를 조직한 자이셰 모하메드는 인도뿐 아니라 파키스탄·미국·유엔도 테러집단으로 지정한 단체다. 소속원은 1000명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는 이 단체의 수괴인 마수드 아즈하르가 아무런 제재도 없이 자유롭게 파키스탄 내에서 활보하고 있다고 불만스러워한다.
 
  이 단체는 알카에다·탈레반과 사상적으로 친근하게 연계되어 있고, 파키스탄에서는 데오반디에서 파생되어 정당으로도 활동하는 시파헤 사하바 파키스탄(예언자 동료의 군대)과 같은 조직이 되길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이셰 모하메드의 목표는 카슈미르를 파키스탄에 복속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서구 세력을 축출하며, 파키스탄을 샤리아가 다스리는 이슬람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 공개적으로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인도 대륙에서 힌두교인과 비(非)무슬림을 모두 몰아내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 200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연합군을 목표로 삼아 공격을 시도했다. 현재는 주로 인도령 카슈미르와 인도, 아프가니스탄, 남부 파키스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 정보부, 오사마 빈라덴, 탈레반이 자이셰 모하메드 조직을 지원했고, 수괴 아즈하르가 오사마 빈 라덴을 위시하여 알카에다 고위지도층과 접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슈미르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인 카슈미르어와 문학을 보존하고 있는 문화인들이다. 그러나 두 핵 강국 파키스탄과 인도의 틈에서 자유와 독립보다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고 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는 아자드 카슈미르, 즉 자유카슈미르라고 하지만 파키스탄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도령 카슈미르 사람들은 인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인도 정부의 철권통치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제사회는 이들의 고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자국이 인도와 파키스탄 중 어디에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 와중에 ‘알라의 자비’를 입으로만 외우는 테러 세력들이 폭탄을 던지고 있으니 카슈미르에서 캐시미어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언제나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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