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슬람 들여다보기

‘제주 난민’ 사태 불러온 예멘은 어떤 나라인가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북예멘은 1918년까지 오스만제국이, 남예멘은 1967년까지 영국이 지배
⊙ 1990년 북예멘 주도로 통일… 1994년 남예멘이 분리독립 선언했으나 북예멘에 진압돼
⊙ 2015년 이후 하디 정부-후티 반군 간 내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견제 위해 개입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6월 18일 제주시 용담동 법무부 제주출입국 외국인청에서 열린 난민 신청자 대상 취업설명회에는 예멘인 400여 명이 몰렸다. 사진=뉴시스
  말레이시아에서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들 때문에 지난 한 달간 여론이 들썩였다. 제주출입국 외국인청에 따르면 5월 초부터 6월 중순까지 예멘인 561명이 입국하여 이 중 549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 내전(內戰) 중인 예멘이 제주도 무사증(無査證) 입국명단에 속해 있는 데다 말레이시아-제주 간 직항 노선이 개설되면서 2016년 7명, 2017년 42명이던 예멘 난민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1991년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하고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하여 2013년 시행할 때만 해도 우리 정부와 국회의 관심은 탈북자였다. 예멘 난민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예멘 난민 수용 반대 목소리가 높아감에 따라 정부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다. 국제사회와 한 약속을 깨고 난민법을 폐지할 수도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예멘 난민 수에 국민이나 정부나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예멘 난민들은 1만km나 떨어진 머나먼 우리나라로 와야만 했을까?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 끝에 자리 잡은 예멘은 북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1458km, 동쪽으로 오만과 288km에 달하는 국경을 맞대고, 동쪽으로는 홍해 남쪽으로 아라비아해에 연한 나라다. 국민 평균 연령이 19.5세이고, 25세 이하 인구가 전 국민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젊은 나라지만, 아랍국가 중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제 사정이 열악하다. 예멘은 굳이 내전이 아니더라도 이미 ‘실패국가’로 불리던 곳이다.
 
 
  자이디 시아와 北예멘
 
예멘 지도. 남북으로 나뉘었던 예멘은 1990년 통일을 이루었다.
  근세기 예멘은 수도 사나를 중심으로 한 북쪽은 1918년까지 오스만제국이, 항구도시 아덴이 축이 되는 남쪽은 1967년까지 영국이 지배했다. 오스만제국이 떠난 북쪽은 자이디(Zaydi) 시아파가 다스렸다. 자이디 시아는 편의상 학계에서 5이맘파로 부르는 시아로, 오늘날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산재(散在)한 7이맘파 이스마일리 시아와 이란에서 국가를 이룬 12이맘파 시아와는 역사적으로 다른 분파다.
 
  자이디 시아는 740년 이라크 쿠파에서 순니 우마이야 정권에 반기를 든 자이드 이븐 알리 이븐 알후세인(694/695년생, 740년 사망)을 이맘(Imam·지도자)으로 추종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자이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인 알리와 예언자의 딸 파티마의 증손자로, 3번째 이맘 후세인의 아들이자, 12이맘파의 5번째 이맘 무함마드 알바키르의 이복형제다. 쿠파의 반란은 실패했고, 자이드는 죽었다.
 
  자이디 시아는 불법적인 순니 통치에 저항하는 것을 종교적 의무로 간주한다. 이란의 12이맘파 시아와 달리 이맘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가 불의로 가득 찬 세상 종말에 다시 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이맘은 결코 잘못을 하지 않는다는 ‘이맘의 무류성(無謬性)’도 수용하지 않는다. 자이디 시아가 순니와 크게 다를 바 없고, 순니에 대한 태도가 온화하다고 하면서 이들을 온건한 시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자이디 시아는 불법적인 순니 통치에 강력히 저항했기에 정치적으로 보면 다른 시아파보다 훨씬 더 전투적이다.
 
  역사상 자이디 시아의 중심지는 카스피해 지역과 예멘, 이렇게 두 곳이었다. 자이디는 8~9세기에 카스피해 남쪽 타바리스탄(Tabaristan) 지역에 거점을 마련했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세력을 상실하고 12이맘파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890년에 성립한 예멘의 자이디 공동체는 1539년 오스만제국에 편입된 후 독립과 복속의 과정을 반복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제국이 붕괴하면서 독립 자이디 이맘조(朝)를 구축했다.
 
 
  분단과 통일, 내전
 
예멘의 독재자 살레는 통일을 이루었지만 결국 나라를 내란으로 몰고 갔다.
  1962년 9월 이맘 아흐마드가 죽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흐마드의 후계자인 아들 무함마드를 일주일 만에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예멘아랍공화국을 세웠다. 권력을 잃은 자이디는 예멘의 북서부 사다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현재 예멘의 시아는 약 800만명에서 1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전체 인구의 35~40% 수준이다. 이맘조가 무너지고 다수가 순니로 개종했지만 아직도 그 비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북예멘과 달리 남예멘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839년 아덴항을 장악한 영국은 남예멘을 인도의 일부로 간주하여 통치했고, 1937년 아덴을 보호령으로 삼고 이를 거점으로 남예멘 지역을 장악했다. 영국이 손에 넣은 남예멘 지역은 전체 예멘의 3분의 2에 달했다. 한 세기를 넘긴 영국의 남예멘 통치는 1963년 본격적인 반영(反英)항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1967년 영국이 철수하면서 남예멘에 남예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 1970년 국호를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바꾸고 친(親)소련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 소련 해군에게 항구를 열어주었다.
 
북예멘과의 통일을 이루었다가 나중에 분리독립운동을 이끈 알베이드.
  남과 북으로 나뉘고 국가의 노선도 달랐지만, 분단된 한반도와 달리 남북 예멘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1970년대에 국경에서 무력(武力)충돌이 발생하여 아랍연맹이 중재 역할을 하긴 했지만, 1980년대에는 비교적 양측 관계가 평온했다.
 
  통일은 소련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루어졌다. 1990년 5월 22일 양측은 통일에 합의하고 예멘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새로운 예멘공화국은 북예멘의 대통령이던 알리 압둘라 살레를 대통령으로, 남예멘의 알베이드 사회당 당수를 부통령으로 하여 출범했다. 북예멘의 수도였던 사나가 새 예멘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남예멘의 수도였던 아덴은 경제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통일 예멘의 앞길은 험난했다. 경제난으로 내부 불만이 격렬해졌다. 결국 통일에 합의했던 남예멘의 알베이드가 주축이 되어 1994년 5월 21일 다시 아덴을 수도로 하는 남예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살레 대통령은 7월 7일 아덴을 점령하여 내전을 끝냈다. 서둘러 내분을 봉합했지만, 후티(Huthi) 반군, 남예멘의 소외감, 극단주의, 살레의 교묘한 독재정치가 통일 예멘의 발전과 국민통합을 계속 가로막았다. 예멘 난민 유입의 결정적 계기가 된 2015년 발발 예멘전쟁은 위의 4가지 요소가 빠짐없이 골고루 작동한 결과물이다.
 
 
  후티 반군의 등장
 
후티 반군의 모체가 된 ‘젊은 신앙인들’의 창설자 후세인 바드룻딘 알 후티.
  한편 자이디 시아 지역인 사다에서는 순니파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사상의 침투를 막고 교육을 통해 자이디 시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1994년경부터 ‘젊은 신앙인(Muntada al-Shabab al-Mu’min)’이라는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후세인 바드룻딘 알후티가 이끌었다. 이들은 2003년 예멘 정부가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용인하자 반정부 목소리를 높이면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2004년 정부가 후세인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다. ‘젊은 신앙인’이 대항하고 나서자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전투 중 사망했다. 이 참극을 계기로 ‘젊은 신앙인’은 후티 반군(反軍)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후티 반군은 후세인의 동생 압둘말리크 알후티가 ‘안사룰라(Ansar Allah)’라는 이름으로 이끌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유대인에게 저주를! 이슬람에 승리를!”이라는 구호에 잘 드러난다.
 
  2011년 이른바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예멘에서도 살레의 독재정권 종식을 요구하는 국민 저항이 시작됐다. 살레는 2012년 면책(免責)을 보장받고 사임했다. 부통령 압둘라 만수르 하디를 중심으로 한 국민대화협의체가 구성되었지만, 후티 반군은 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후티 반군은 전 대통령 살레 지지자들과 함께 2014년 9월 수도 사나를 장악하고 이듬해 1월에는 대통령궁까지 점령했다. 대통령궁이 반군 손에 떨어지기 3일 전에 대통령직을 사임한 하디는 연금(軟禁) 상태에 있다가 2월에 수도를 빠져나와 남부 아덴으로 피신했다. 하디의 요청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 3월 26일 ‘결정적 폭풍’이라는 작전명의 후티 반군 공습을 시작했다. 이후 현재까지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후티 반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통일 예멘에서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낀 남부 예멘인들은 2007년부터 남부운동(Southern Movement)을 시작하면서 정부에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고 나섰다. 정정(政情)이 혼란한 틈을 타서 알카에다는 남서부 지역에 조직을 결성하고 지속적으로 극단주의 정치 이슬람 선전을 이어갔다. 알카에다는 2000년 10월 12일 아덴항에서 급유 중이던 미국 군함 코울호를 공격하여 커다란 손상을 입혔다.
 
 
  국제전으로 번진 예멘내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2011년 4월 이후 예멘에서는 살레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다. 사진=뉴시스
  1978년 북예멘 대통령으로 집권한 살레는 2011년 국민 저항에 맞부딪힐 때까지 비전 없이 정권 유지를 위해 순간순간 정치적 감각만을 발휘하며 권좌를 이어왔다. 한때 그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자이디 시아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후티 반군의 기반이었던 ‘젊은 신앙인’을 지원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후티 반군을 절멸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폈지만, ‘아랍의 봄’ 이후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는 다시 후티 반군과 손을 잡고 하디 정부를 전복시킨다. 하지만 그는 후티 반군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2017년 후티 반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멘전쟁은 형식상으로는 하디가 이끄는 합법적 정부와 이를 무력으로 수도 사나에서 내쫓은 후티 반군 간 내전이다. 하지만 하디의 요청을 받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에미리트・바레인・쿠웨이트・카타르・이집트・요르단・모로코・세네갈・수단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후티 반군 공격을 시작한 국제전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고 아랍에미리트가 가장 강력하게 후원하는 연합군에서 카타르는 두 나라와 외교 불화를 빚으면서 2017년 연합군에서 빠졌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연합군은 후티 반군을 이란이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도움 없이 후티 반군이 현재까지 버틸 수가 없다고 본다. 연합군은 2015년 9월에 오만 연안에서 중무기를 후티 반군에 전달하려던 이란 국적 어선을 적발했다. 2016년 3월에는 미국 해군이 AK-47 소총 1500자루, 대장갑차 휴대용 발사기 200기 등을 적재한 이란 국적 어선을 나포, 이란이 후티 반군을 지원하고 있는 증거로 제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후티 반군의 지도자였던 후세인이 이란의 종교도시 쿰에서 머무르며 공부했고, 레바논 헤즈볼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후티 반군 내에 12이맘파 시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란의 성직자가 안사룰라를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조직으로 비유한 것을 들어 양자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란은 이 모든 의혹을 극력 부인하고 있다.
 
 
  사우디, 이란 견제 위해 예멘내전 개입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는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이란이 아랍세계에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한다는 혁명이념을 내걸고 이란이 중동 무슬림 세계를 혼란과 극단주의의 늪으로 빠뜨렸다고 생각한다. 특히 2003년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에서 제거된 이래 이란이 이라크·시리아·레바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순니 아랍왕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제는 친이란 후티 반군이 국경의 남쪽 예멘을 장악했으니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실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테헤란-바그다드-다마스쿠스-베이루트로 이어지는 친이란 전선에 사나까지 포함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후티 반군을 예멘에서 몰아낼 뿐 아니라 이들의 거점인 사다 지역에 자이디 시아 국가가 들어서 자국과 국경을 맞대게 될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안보를 위해 어떻게 해서라도 이란으로부터 정치적·경제적·사상적 지지를 받는 후티 반군 제거를 이번 예멘전쟁의 목표로 삼고 있다. 무모하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현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국방장관이었을 때 예멘전쟁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여 1979년 이란혁명체제를 종식하겠다는 큰 그림의 일환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시리아내전에 관여해 왔다. 시리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7년간 노력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전히 이란은 다마스쿠스에서 건재하고 있다. 이제 예멘에서 마저 후티 반군을 제어하여 하디 정부를 재건하지 못한다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심각한 위협에 처할 수밖에 없다. 전장을 테헤란으로 옮기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노력이 치열한 곳이 바로 예멘전쟁이다.
 
 
  국민의 80%가 난민 전락
 
  내전을 넘어선 국제전의 피해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예멘 국민이다. 유엔난민기구의 공식집계에 따르면 4월 현재 2200만명이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내부 피란민만 200만명이 넘는 상황이다. 예멘 인구가 약 2700만명이니 국민의 80%가 국내에서 전쟁 난민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로 들어온 예멘 난민은 대다수가 후티가 장악한 지역 출신이다.
 
  북쪽에서 후티 반군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난다고 해도 안전하지도 않다. 중앙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 각 부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합집산하며 싸우고 있다. 알카에다·IS와 같은 테러 조직들 또한 세력 확장을 위해 날뛰고 있다. 후티 반군이 발호하면서 예전에는 엷었던 종파(宗派) 정체성마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제 고대(古代) 로마로 이어지는 아라비아 향료 무역을 담당했던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 예멘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예멘은 실패한 국가의 실상을 모두 보여주는 나라가 되었다.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 통합을 이루기 위해 애쓰기보다 권좌에만 집착한 지도자를 둔 나라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생생히 보여주는 ‘비참한 아라비아(Arabia Misera)’일 뿐이다.⊙
조회 : 8193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4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whatcha    (2018-08-03)     수정   삭제 찬성 : 5   반대 : 3
난민은 비행기 타고 다니나? 보트 타고 오는 난민만 받아라.
  여신    (2018-08-03)     수정   삭제 찬성 : 3   반대 : 2
예멘에 내전 난데.. 남한은 아무 책임이 없어.. 책임이 있는 나라들이 알아서 처리하길..
  ㅣㅣ    (2018-08-02)     수정   삭제 찬성 : 3   반대 : 5
언론플레이 지리네
  ㄹㄹㄹ    (2018-08-02)     수정   삭제 찬성 : 17   반대 : 2
예멘은 명예살인 8세아동과도 결혼 근친혼 여러여자와 결혼 할레는 당연하고 왜 이런거는 기사화하지 않을까요 출산율8.1명 4명까지 부인을 두는풍습 500명이 5000명 알까는거 몇달이면 가능합니다 절대 피암안하죠 성욕은 언제든지 강간 집단강간 성폭행으로 채워야한다고 여자는 때려야한다고 배운이들입니다 무슬림을 몰아냅시다

201808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