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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鎖國主義와 脫亞論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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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종의 리퍼트 대사 습격은 反日-反美-親中 정서를 바탕으로 한 쇄국주의적 思考의 발로
⊙ “서울 다녀온 국회의원은 고참 의원에게 질책당해…, 서울行을 북한행과 동일시하는 분위기”
    (일본 국회의원)
⊙ “지난 1월 한 달 동안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10만명 선으로 1999년 수준”(여행사 간부)
⊙ “중국은 99.9% 한국 배신…, 日中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韓日정상회담 방향 달라질 것”(일본 기자)
⊙ 웬디 셔먼 차관의 발언은 박근혜 대통령 겨냥한 것

劉敏鎬
⊙ 54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지난 2013년 10월 14일 국회 외교부 국정감사가 끝난 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 대사 대낮 피습 사건을 접하던 순간,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일본에서 발생한 두 가지 테러 사건이다.
 
  먼저 1964년 3월 24일 오후 12시5분 발생한 도쿄(東京) 주재 미국 대사 라이샤워(Reischauer) 살해 미수다. 라이샤워 대사는 대사관 앞에서 19세 소년이 휘두른 칼에 머리와 허벅지에 상처를 입고 입원한다. 소년은 자신의 근시(近視)가 미국 탓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칼을 휘둘렀다. 소년은 자신이 전범(戰犯)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정신병 치료 전력자였다.
 
  사건 다음날인 3월 25일,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는 TV 생방송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하버드대학 교수로 더 유명한 라이샤워 대사는 일본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미국 내 지일파(知日派) 인사다. 그는 수술 중 받은 수혈(輸血)을 염두에 두고 “이제 내 몸에 일본인 피가 흐르게 됐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대사 스스로가 사건을 무마하면서, 이 사건은 정신병자의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난다.
 
 
  오쓰 사건
 
1891년 오쓰 사건 직전에 일본 나가사키를 방문해 인력거를 타고 있는 니콜라이 러시아 황태자.
  두 번째는 오쓰 사건(大津事件)이다. 1891년 5월 11일 시가켄(滋賀県) 오쓰초(大津町)에서 발생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후일의 니콜라이 2세) 암살미수 사건이다. 방일(訪日) 중 교토(京都)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던 니콜라이 황태자가 경비 중이던 경찰관 쓰다 산조(津田三蔵)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쓰다가 휘두른 일본도에 찔려 오른쪽 머리에 9cm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황태자를 암살하려던 계획적인 범죄였다. 쓰다는 니콜라이 황태자를 쫓아가면서 살해하려 했지만, 마차를 끌던 일본인이 그를 제압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황태자는 병원에서 긴급치료를 받은 뒤 곧바로 러시아로 돌아갔다.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국가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1891년의 러시아는 일본으로서는 쳐다볼 수도 없는 초강대국이었다. 사건 다음날 메이지(明治) 천황이 기차를 타고 내려와 니콜라이 황태자를 문병하고 사과했다. 러시아 측은 천황에게 병원 밖에서 기다리라고 요구했다. 천황은 치욕스럽게도 하루 동안 문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러시아가 일본에 엄청난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러시아가 결국은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 것이다”라는 소문이 전국으로 번졌다. 일본 특유의 집단적 히스테리가 열도(列島)를 지배했다. 일본인 전체가 ‘반성(反省)’에 들어갔다. 쓰다의 친척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린치가 이어졌다.
 
  천황이 문전박대를 당하는 상황에서, 일본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죄 모드’에 들어갔다.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교토 한복판에서 할복을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황태자 회복을 위한 선물 보내기와 러시아 찬미운동도 벌어졌다. 황태자가 러시아로 돌아가던 날 천황은 배 안까지 찾아가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당시 일본 외교관들은 러시아 배에 들어간 천황이 그대로 납치돼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했다.
 
  일본인들의 우려와 달리 오쓰 사건은 별다른 후폭풍 없이 조용히 끝났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관용’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러시아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을 공격할 정도의 군사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본은 언젠가 러시아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100% 믿었다. 오쓰 사건이 발생한 1891년은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 철도가 완성되는 순간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을 거쳐 일본까지 내려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건 발생 13년 뒤, 운명처럼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러일전쟁이다. 승자(勝者)는 언젠가 러시아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3년 동안 국력을 다지고 또 다져온 일본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황태자 시절 자신의 머리에 흉터를 안겨준 나라로부터 패배를 맛보았다.
 
 
  공통분모는 鎖國
 
  오쓰 사건은 리퍼트 대사 습격 사건과 유사하다. 면밀히 계획된 범행과 칼을 사용한 1인 범죄라는 점, 위협 정도를 넘어서 살해를 목적으로 한 유혈극, 사건 직후 벌어진 국민적 사과운동, 가해국(加害國) 최고 지도자가 직접 나서 이뤄진 사과와 위로….
 
  갖가지 공통점 가운데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심리적인 측면이다. 외국과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고, 무시하며, 나아가 증오하는 심리가 두 사건의 저변에 깔려 있다. 쇄국주의(鎖國主義)다.
 
  오쓰 사건의 범인 쓰다는 자신의 범행동기에 대해 “일본에서 러시아를 쫓아내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본 방문은 전쟁을 위한 현지조사와 준비라고 강변했다. 당시 분위기 속에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일본인들은 쓰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를 영웅시하기도 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黑船)이 나타난 것이 1854년이었다. 12년 뒤인 1866년 도쿠가와(德川) 막부 체제가 넘어가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시작됐다. 개국(開國)이다.
 
  오쓰 사건이 터진 1891년은 개국 25주년이 되던 시기다. 유럽의 새로운 문화가 들어서고 사람들의 생각과 복장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던 때다. 커피와 위스키가 일상화되고, 농경사회이던 일본에 스테이크 레스토랑이 들어선다.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라멘(ラーメン), 샤부샤부(しゃぶしゃぶ), 돈가스도 이 무렵 탄생했다.
 
  나라의 문(門)은 열었지만, 내심 이를 탐탁지 않게, 아니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대흐름 맞추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숨기고, ‘자신에게만’ 좋았던 옛날 타령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매국노(賣國奴)들이 국민들을 호도(糊塗)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쇄국주의는 그 같은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이데올로기였다.
 
 
  한국인을 묶어주는 코드 - 쇄국주의
 
  한국의 언론은 리퍼트 미국 대사 습격 사건을 친북(親北)·종북(從北)·극좌(極左)적 사고방식에 빠진, 얼치기 소영웅주의자의 ‘단독 범행’이라고 분석한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전쟁을 통해 표면화된 냉전류(冷戰類)의 이념을 넘어선, 보다 근본적인 ‘토양(土壤)’에 주목한다. 조선이 세워진 1392년부터 식민지 상태로 접어든 19세기 말까지 무려 500여 년간 풍미했던 세계관, 즉 ‘쇄국주의’가 그 뿌리다.
 
  사람들은 ‘쇄국주의’라고 하면,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진, 역사교과서 속의 유물(遺物)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쇄국주의는 김기종의 칼부림을 가능케 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김기종이 미국 대사 바로 옆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사회라는 ‘공범(共犯)’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품위 있는 고급요리와 외국 대사가 참가하는 격조 높은 모임은 선망의 대상이다. 한국 사회는 그 같은 자리를 김기종에게 허락했다. 초대장이 없었음에도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모임 장소에는 김기종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도 다수 있었다.
 
  김기종의 과거 경력을 보면 도저히 그런 자리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바로 이념을 초월한 쇄국주의 덕분이다. 종북과 멸북(滅北), 좌우로 갈라진 나라지만, 가슴 속에 숨겨진 쇄국주의라는 묘한 코드가 한국인들의 마음을 묶어준다.
 
  북한은 1인 독재국가인 동시에, 지배층을 위한 쇄국주의 국가다. 북한이 말하는 모든 주장과 논리는 쇄국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문을 닫을수록 편해지는 사람들만을 위한 세계관이다.
 
  사실, 언제부턴가 독도·종군위안부 같은 국가적 문제도 쇄국을 위한 ‘소재’로 전락한 느낌이다. 독도·종군위안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로 일관한다. 그런 생각에 따르지 않을 경우 아예 상대도 안 한다. 그 같은 고집불통 쇄국주의자들 때문에 독도·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전력하던 보통 사람들조차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앞서 강조했듯이, 쇄국주의는 외국·외국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를 덕목으로 여긴다. 양놈들, 왜놈들이란 호칭과 함께 ‘우리끼리’라는 심리가 최고의 덕목이 된다. 흥미롭게도 김기종이 운영하는 단체명이 ‘우리 마당’이다. 민족주의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포장을 하지만, 다른 국가 민족과의 공생(共生)논리는 아예 없다.
 
  김기종이 2010년 7월에 저지른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주한일본대사에 대한 테러는 이번 리퍼트 대사 습격의 서곡이었다. 당시 인터넷에 올라온 관련 글들을 보면 자못 비장하다. ‘독도 지킴이, 뻘소리 강연하던 日대사에 시멘트 뭉치 던져’ ‘통일운동을 전개해 온 민족주의자 시게이에에게 도시락폭탄…’.
 
  김기종은 일본 대사에게 돌을 던질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너희는 한국 사람 아니야?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7cm 크기의 돌을 던지는 것이 독도 문제 해결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놈’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과 반감이 ‘정의’로 포장돼 영웅담으로 둔갑했을 뿐이다.
 
 
  韓服에 대한 문화파괴행위
 
지난 3월 6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가는 김기종씨. 개량한복을 입고 있다.
  130여 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오쓰 사건)이 쇄국주의와 연결된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열린 21세기 한국이 왜 쇄국주의의 무대가 되고 있는가?
 
  쇄국주의는 외교 상대국이 얼마나 되고, 인터넷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와 무관하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IS(이슬람국가)의 만행을 보라. 세상이 어디로 가든 상관없이 ‘나만 옳고 나머지는 전부 틀리다’는 논리다. 자신의 정당성과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명사회 논리의 반대편에 선다.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참수(斬首)의 부활은 그 좋은 예다.
 
  쇄국주의의 특징 중 하나로 외면적인 모습을 빼놓을 수 없다. 김기종은 범행 당일 개량한복에다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복은 필자도 즐겨 입는 한국의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김기종이 입은 한복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데올로기로서의 한복이다. 미국 대사 습격 사건은 그동안 쌓아온 한복의 이미지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문화파괴(Vandalism)이기도 하다.
 
 
  중국에 매달리는 500년 舊態의 부활
 
  한국 쇄국주의의 특징 중 하나로 중국에 대한 예외론(例外論), 나아가 친중론(親中論)을 빼놓을 수 없다. 김기종의 과거 행각 중 중국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다.
 
  언제부턴가 중국은 한국의 정치·경제·외교·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 중국발(發) 공기오염 문제에서부터, 사드(THAAD) 미사일 체제 문제 간섭, 한국인 범죄자 사형(死刑), 동북공정(東北工程) 역사왜곡,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중국 관광객들의 추태에 이르기까지, 중국 관련 뉴스가 일상생활의 큰 부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경제대국으로 부상(浮上)한 중국의 위상을 고려할 때 너무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미국·일본과 비교해 볼 때, 중국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관대한지 모르겠다.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을 중국이 강제 북송(北送)해도 비판의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다.
 
  독도 지킴이 김기종에게 ‘탈북자 지킴이’로서 중국 대사에게 돌이나 칼로 항의할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다. 아마 꿈에도 그런 생각은 못 할 것이다.
 
  반일(反日)·반미(反美)운동을 하듯이 반중(反中)운동에 나서라는 말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조선시대 이래 가슴 깊이 새겨진 ‘쇄국주의’의 흔적 때문에 반중 이데올로기 자체를 터부시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왜 쇄국주의가 나오느냐고? 조선의 쇄국주의는 중국예외론에 입각한 쇄국이기 때문이다. 일부 한국인들이 일본·미국을 거부하는 이유는, 천년만년 중국에 매달리기 위해서라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조선 쇄국주의의 끈질긴 인습(因習)이 21세기 들어 한국 정치무대에서 재현되고 있다.
 
  미국 대사 피습 사건 직후 재확인했지만, 외교부 장관의 얼굴이 도통 안 보인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움직이는 듯한데, 막상 미국대사관을 상대해야 할 한국 외교부 수장(首長)의 모습은 안 보인다.
 
  다른 외교 문제를 놓고 봐도 외교 수장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한국의 외교 수장은 어디에 있을까? 피습 사건 당시에는 대통령의 중동(中東) 순방 수행 중이었다고 한다. 만약 중국 대사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일본 대사가 당했다면?
 
  일본에서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친구인 일본 지방의원에게 물어봤다.
 
  —도쿄 주재 미국 대사가 우익의 칼부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면, 그리고 마침 외무성 장관이 수상과 함께 중동 순방 중이었다면,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처할까?
 
  “먼저, 천황이 찾아가 문병을 할 것이다. 총리의 방문 중단은 어렵더라도, 외무성 장관이 귀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서울(한국)의 경우, 중국 대사가 당할 경우에 한해 외교 수장이 즉시 달려오지 않을까?”
 
  필자가 머무는 워싱턴은 전 세계 외교관들이 모이는 곳이다. 각국의 외교 수장들도 부지런히 찾아오고, 서로간의 의견을 듣고, 정보와 이익을 공유한다.
 
  한국의 외교 수장은 그 같은 국제적 활동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다. 외교를 정치로 풀이하는 ‘정무(政務)’의 수장이 아닌, 외교담화나 문서에 관련된 ‘외교(外交) 프로토콜’의 총책임자 정도로 비친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한국 외교부 장관은 일본 대사나 역사전문가 정도로 느껴진다. 대사나 역사전문가가 해야 할 일을 외교부 장관 혼자서 처리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만 얘기하는 외교장관
 
  사실, 한국의 외교부 장관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발언을 하기는 한다. 핵심 내용은 항상 똑같다. 종군위안부 문제나 일본의 역사왜곡, 일본의 군사력 팽창에 대한 것이다. 유엔처럼 글로벌 인권을 논의하는 국제무대에 나가서조차 종군위안부 문제를 거론한다.
 
  전 세계에 과거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것은 좋다. 필자 역시 응원하고 지지한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 관련 ‘얘기만’ 강조하고 반복한다는 데 있다. 북한인권 문제나, 탈북자들에 대한 중국의 반문명적 만행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한국의 외교부 장관더러 반중으로 나서라는 얘기가 아니다. 대사나 역사전문가들이 할 일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놓고, 중국·미국·유럽 전부를 총괄하는 대한민국 외교의 수장답게 활동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문제가 터질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와 직접 만나서 해결하는 것이다. 현재의 한일관계는 그 같은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기본적으로 일본 측의 잘못이지만, 한국 측에도 문제는 있다. ‘독도 지킴이’ 김기종의 탄생이 현재 한국의 외교자세와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반일에는 적극적이면서, 미국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떠오르는 태양’ 중국에 주파수를 맞추는 외교자세가 그런 사람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깨끗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행보에 맞춰 반일에 올인(all in)하는 대사 수준의 외교 수장이 존재하는 한, 제2, 제3의 김기종이 나올 것이다.
 
 
  후쿠자와의 脫亞論
 
19세기 말 脫亞論을 주창한 후쿠자와 유기치.
  2015년 봄, 일본에서 느껴지는 공기는 김기종이 보여준 단말마(斷末魔)적 행동과는 정반대에 서 있다. 지금 일본의 공기는 ‘21세기판 신탈아론(新脫亞論)’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신탈아론은 19세기 말에 있었던 탈아론을 근간으로 한다. 일본의 1만 엔권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게이오(慶應)대학을 세운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가 내세운 사상이다. 정확히는 1885년 3월 16일 《시사신보(時事新報)》 사설로 발표한 글이다.
 
  후쿠자와가 말한 탈아론의 대상은 조선과 중국이다. 대륙과 반도에서 전래된 사고와 문화 그리고 역사관을 버리고, 서방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 탈아론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탈아론은 이후 20세기 초를 전후(前後)한 시기에 일본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 전체가 탈아론이란 깃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아시아를 늙은 세계로, 미국과 유럽을 내일로 향하는 젊은 세계로 해석했다.
 
  탈아론은 일본이 쇄국의 문을 푼 지 30여 년 만에 탄생했다. 19세기 중반 개국 당시의 일본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여 일본의 국력을 키움으로써 구미(歐美) 열강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양을 주목했을 뿐이었다.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처럼,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개국의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일본적인 가치를 지키되, 실용적인 차원에서 서양의 앞선 기술문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개국 이전 일본의 정신은 중국과 조선의 영향하에 구축된 것이다. 중국 고전과 조선 유학이 일본 정신세계를 주도해 왔다.
 
  탈아론은 개국 이후에도 존재하던 조선·중국으로부터의 정신적 유대관계를 아예 끊어버리자는 생각이다. 개국론이 친(親)서양에 무게중심을 둔 반면, 탈아론은 반조선·반중국에 방점(傍點)을 둔 사상이다. 서양의 문물과 정신세계는 계속 탐구하되, 일본의 혼 가운데 조선과 중국에 관련된 부분은 삭제한다는 의미다.
 
  21세기 일본인들은 일본이 아시아권(圈)의 나라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시아는 아시아, 일본은 일본이라고 말한다. 굳이 얘기하자면 일본은 서양과 가치를 공유하는 문명국이라고 말한다. 겉이 노랗고 속이 흰 바나나를 일본인에 비유하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바나나 일본인’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21세기 新脫亞論
 
  2015년 일본의 신탈아론은 19세기 중반 개국론과 19세기 말 후쿠자와의 탈아론을 합친 형태로 나타난다. 집단적 자위권과 적극적 평화주의, 나아가 반테러리즘을 통한 협력 강화와 같은 친서방 정책이 외교의 핵심 이슈로 부상한다.
 
  ‘일본의 군사력 팽창’이란 시각이 한국 내 분석이지만, 사실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것들이 신탈아론의 실체이다. 집단적 자위권은 미국의 강력한 요구를 기반으로 한다. 19세기처럼 서양으로부터 배우고 익히자는 게 아니다. 미국 등 서방선진국들과 함께 글로벌 가치관 형성에 적극 참여하고, 같이 나아가는 수평적인 관계이다. 아베는 그 같은 친서방 정책의 설계자다.
 
  후쿠자와 유기치의 탈아론이 중국·한국으로부터의 ‘적극적’ 이탈을 주문했다면, 아베의 신탈아론은 ‘수동적’ 이탈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과 중국을 동시에 똑같이 대하지 않고, 차별적으로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도 특징이다.
 
  한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신탈아론적 행보는 3월 초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한국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삭제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외무성이 한국을 소개하는 수식어로 사용되어 온 이러한 문구를 전부 빼고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라고만 지칭한 것은, 그동안 일본을 주목해 온 사람이라면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산케이(産經)신문》 지국장에 대한 한국 정부의 법적 대응은 그중 하나일 것이다. 기고문을 통해 수차례 강조해 왔지만, 이 문제는 자유세계 언론인들이 황당해 하는, 언론자유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다. 그런 게 한국 내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밖으로 나가는 순간 문명세계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로 여겨진다.
 
  일본이 안보전략으로 ‘다이아몬드 구상’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다이아몬드 구상’은 원래 ‘민주주의에 기초한 다이아몬드 전략(Democratic Security Diamond)’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아베가 2007년 총리 재임 당시 주창한 21세기판 군사전략으로 2012년 12월 아베의 재집권과 동시에 일본 외교의 근간으로 굳어졌다. ‘다이아몬드 구상’이라니까 낭만적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간단히 말해 미국(하와이)-일본-호주-인도 네 나라를 엮는 군사협력체라 보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군사협력체 앞에 ‘민주주의에 기초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는 점이다. 네 나라 모두 민주주의 이념을 믿고 따르는 나라라는 점을 강조한다. 누가 이 군사협력체의 가상적(假想敵)인지는 너무도 뻔하다. 공산당 독재국가 중국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은 당연히 ‘다이아몬드 구상권’에 포함되지만, 불편한 한일관계가 문제다. “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은 ‘다이아몬드 구상’에서 제외하는가”라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아예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삭제한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물론 대한민국이 비(非)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일본의 탈한국’을 상징하는 예는 될 수 있다.
 
 
  訪韓했다가 질책당한 日국회의원
 
  필자가 일본의 탈한국을 절감한 것은 지난 2월 중순 도쿄에 들렀을 때 참석한 어느 파티를 통해서다. 평소 알고 지내던 워싱턴 지인(知人)들을 주축으로 한 파티로, 50대 정치인·외교관·경제인들이 중심이다.
 
  때마침 아베의 국회 내 소신표명 연설이 화제가 됐다. 총리 연설 때 여당 내 신참 의원들이 의도적으로 고함을 치면서 지지박수를 보내는 응원부대 역할을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저녁이 늦어지면서 한국에 관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파티에 참가한 한 국회의원은 일본 정치권의 대한(對韓) 정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최근 사적(私的)인 용무로 서울에 다녀온 동료 의원이 있다. 갔다 온 뒤 아주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참 의원에게 불려가, ‘왜 한국에 갔다 왔느냐’고 엄청 질책을 당했다고 한다.
 
  서울에 가는 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방문 자체를 아예 터부시하는 공기가 정치권 내에 흐른다. 무슨 일을 해도 부정적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한국과 만나서 되는 일도 없지만, 잘되든 못되든 상관없이 지역 내 유권자로부터도 비난을 받게 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서울행(行)을 북한행과 동일시하는 게 정치권, 그리고 지역 내 분위기다.”
 
  필자는 “인적 접촉을 원천적으로 끊으면 양국 간 관계개선이 어려울 텐데…”라고 말했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지만, 솔직히 말해 한국과 관계를 갖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일본어로 ‘적당히 해(いい加減にしろ)’, 영어로는 ‘그만하면 충분하다(Enough is enough)’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따라서 아예 피하고, 상대를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매번 똑같은 얘기만 하는 상태에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한국은 대통령 말 한마디가 통하는 사회지만, 일본은 다르다. 법적인 절차와 해석이 필요하다.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한꺼번에 통째로 해치우는 식의 정치는 일본, 아니 다른 어떤 선진국에도 통하지 않는다.”
 
 
  한국 찾는 일본인 급감
 
  도쿄에 머무는 동안 일본에서 3위 안에 들어가는 여행사 간부를 만났다. 때마침 중국 관광객이 홍수처럼 밀려들던 시기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도 급증하고 있었다. 2014년 기준으로 일본 방문객 2위가 한국이다. 전체 방문객 1340만 가운데 한국인이 275만명에 달한다. 1위는 대만이다. “한국 관광객 덕분에 경기가 좋을 듯하다”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 여행객 대부분은 한국여행사가 관장한다. 국가적으로는 좋겠지만, 일본여행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한국은 현재 일본여행사의 적자(赤字)가 가장 두드러진 지역이다.
 
  일본여행사는 일본인을 다른 나라에 보내는 과정에서 수익을 낸다. 그런데 한국을 찾는 일본인 수가 급감했다. 2014년 기준으로 228만명으로, 2013년에 비해 17% 줄었다. 2015년 1월 한 달 동안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1999년 수준인 10만명 선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동안 한국인은 35만여 명이 일본을 찾았다.
 
  일본인의 한국 방문이 급감하고 있는 것은 엔저(円低) 탓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동남아(東南亞)나 유럽의 경우를 보면 일본 관광객이 늘고 있다. 한일관계 악화와 한국 내의 불안한 상황이 일본 관광객 감소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日中회담에 앞서 韓中日 3국 회담을 한 이유
 
도쿄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익단체의 자동차 퍼레이드. 10여 대에 이르는 승합차가 도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일본정신을 강변한다. 양적으로 볼 때 2년 전보다 거의 배 정도 늘었다.
  21세기 신탈아론은 한국과 중국을 나란히 멀리하자는 게 아니다. 중국과 관계를 우선시하면서 한국을 왕따시키자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중국과의 관계를 줄이는 쪽으로 가지만, 중국을 우선시하면서 한국과 거리를 두는 방식이다.
 
  3월에 열린 두 가지 지역 내 회의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3월 11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3국 회담과 3월 19일 도쿄에서 열린 일중 양국 간 안보회담이다. 둘 다 차관보급 회담으로 한중일 3국 회담은 3년 만에, 일중회담은 4년 만에 열렸다.
 
  한중일 회담은 3국 정상(頂上)회담, 외무장관 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에 해당된다. 구체적으로 의제를 갖지 않은 채, 앞으로 3국 간의 교류를 강화하는 취지하의 만남이다.
 
  3월 19일의 일중 안보회담은 양국 간의 군사·외교에 관한 의견 교환에 해당된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적극적 평화주의, 중국의 국방비 증강과 영토 문제가 중심 이슈다. 평행선을 달리는, 양국의 입장 차만 확인한 자리라 볼 수 있다.
 
  두 회담을 보면서 흥미로운 것은 개최시기다. 한중일 3국 회담이 먼저 열린 후 일중회담이 열렸다. 한국에서는 3국 회담에 방점을 두지만, 사실 일본은 3국 회담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한중일 3국이 모일 경우, 종군위안부 문제나 영토 문제 등을 놓고 일본이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런 자리에 나가 얼굴을 붉히는 일을 누가 원하겠는가?
 
  필자는 한중일 3국 회담은 한국의 체면을 세워주고, 오랜만에 일본과의 공식접촉에 나서는 중국 외교부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한중일 3국 회담은 일중회담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
 
  중국은 그런 일본의 입장에 동의한 상태다. 한국보다는 일본의 빵이 더 크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5년간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한 워싱턴 주재 일본기자는 말한다.
 
  “중국을 믿었다가 큰 코 다칩니다. 99.99% 가능성으로 언젠가 중국은 한국을 배신할 겁니다. 중국은 아시아 문제를 미국과 직접 상대해 풀어가게 되는 순간, 일본도 잔인하게 배신할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한국은 잘 모르는 듯합니다. 단언컨대, 한일 정상회담보다 일중 정상회담이 먼저 열릴 겁니다.”
 
  그는 “일중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한일 정상회담의 방향도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성은 여성이 상대한다
 
웬디 셔먼 미 국무성 정무차관.
  현재 한국은 한일관계를 스스로 타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타협불가능한 ‘성역(聖域)’으로 만든 상태에서 일본에 먼저 손을 내밀기 어렵다.
 
  아베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일본은, 미국의 든든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 최근 발표된 웬디 셔먼 국무성 차관의 ‘역사관계를 넘어선 관계개선’ 주문이 그 증거다. 과거 얘기하지 말고 빨리 미래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중국식 역사관에 한국이 동조하지 말라는 의미도 깔려 있다.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라면 다른 동맹국인 일본과 친하게 지내라”는 메시지다. 중국이 적이란 사실은 발언의 곳곳에서 느껴진다.
 
  필자는 경고의 주체가 66세의 여성이란 점에 주목한다. 차관보나 국무성 내 다른 남성이 아닌 여성을 통한 경고다.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필자는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미국식 매너에서는 여성은 여성이 상대한다. 남성이 나설 경우, 괴롭힌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가족사까지 곁들여진 셔먼 차관의 발언은 같은 여성인 박 대통령을 향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두고 ‘일본 역사관 동조하는 미국’이라 비난한다. 셔먼 차관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식의 기사도 보인다. 셔먼 차관은 한 세대 가까이 외교 현장을 지켜온 인물이다. 워싱턴 분위기를 이해한다면 셔먼의 발언은 이미 2년 전부터 예견할 수 있었다.
 
 
  고립되어 가는 한국
 
  ‘한미동맹 더욱 공고히’라는 말은 미국 대사 피습 사건 이후 나타난 분위기다. 거의 모든 신문이 관련 사설을 싣고 있다. 병상에서 보여준 미국 대사의 소탈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 모두가 안심할 듯하다.
 
  그러나 절실한 것은 ‘동맹 공고히’와 같은 슬로건이 아닌, 구체적인 방안이다. 전반적인 상황을 볼 때 ‘한미동맹 공고히’는 한국의 자세에 달려 있는 듯하다. ‘미국의 요구를 한국이 얼마나 수용하는가’가 문제이다. 미국 요구의 핵심 중 하나는, 같은 동맹국인 일본과의 관계개선이다. 바꿔 말해 중국과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싫든 좋든 일본은 미국과 일체화되고 있다.
 
  아베의 전후(戰後) 70주년 연설은 미국과 보조를 같이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과거’가 아닌, ‘미래’에 방점을 두는 아베의 연설에 미국이 보증을 선다는 의미다. 모든 상황은 한국이 생각하는 세계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일본을 역사망각국가로 단죄하는 여론이 다시 끓어오를 것이다. 거기에 “중국이야말로 한국의 진정한 친구”라는 식의 주장이 슬그머니 편승할 것이다.
 
  이는 조선 500년간 풍미했던 쇄국주의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지금 한국은 국익에 도움이 될지 여부나,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무관한, 한반도 안에서나 통하는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호령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쇄국주의가 21세기 한국의 지배적 가치로 자리 잡을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건 한국인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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