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전·구매의욕 줄고, 인간관계, 위로, 휴식에 대한 관심 증가
⊙ 정치권에 대한 신뢰 추락, ‘정치개혁3.0’ 논의 활발
⊙ 기업 간 협력, 업계재편과 M&A 활발
廉東浩
⊙ 46세. 경희대 졸업. 호세이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 저서: 《아시아의 금융위기와 시스템 개혁》《괴짜 경영학》.
⊙ 정치권에 대한 신뢰 추락, ‘정치개혁3.0’ 논의 활발
⊙ 기업 간 협력, 업계재편과 M&A 활발
廉東浩
⊙ 46세. 경희대 졸업. 호세이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 저서: 《아시아의 금융위기와 시스템 개혁》《괴짜 경영학》.
- 쓰나미가 휩쓸고 간 직후인 지난 3월 12일 미야기(宮城)현 동북부 미나미 산리쿠(南三陸町)의 처참한 모습. 쓰나미는 일본인들의 의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지난 3월 11일, 일본은 1000년에 한 번이라는 미증유의 대참사를 겪었다. 9개월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강력한 정치 리더십의 부재 속에서 혼란과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原電)에서 200km 이상 떨어진 도쿄(東京)에서도 기준치를 초과하는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는가 하면 연속적인 핵(核)분열로 임계(臨界)상태에 달할 때 발생하는 방사성 물질 제논도 검출되는 등 국민들은 보이지 않는 방사능 공포에 떨고 있다.
뒤집기를 밥먹듯 하는 정부 발표와 불편한 진실을 감추려는 도쿄전력에 대한 신뢰성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정부 발표만을 앵무새처럼 전해온 언론을 보면서 “태평양전쟁 당시 대본영(大本營)의 언론통제가 재현된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지진재해와 관련해 일본 정부와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래도 낙관론은 있다
방사능 공포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1973년에 발표된 고마쓰 사쿄(小松左京)의 SF소설 《일본 침몰》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소설은 그동안 몇 차례나 영화와 TV 및 라디오 드라마, 만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한 지리물리학자가 도쿄도(都)에 속한 오가사와라(小笠原)제도 근해의 일본해구(海口)에서 기묘한 균열을 발견하고 분석한 결과, 지각변동이 일어나 일본열도가 서서히 침몰해 육지의 대부분이 가라앉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대지진이 잇따르면서 어려움이 가중되지만, 일본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해외로 탈출시키고, 몇 명은 마지막까지 남아 일본열도와 운명을 같이한다. 시코쿠를 시작으로 침몰이 시작된 일본열도는 관동지방 북부가 수몰되면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 소설의 일본열도 침몰과정을 쓰나미나 일본 경제에 빗대어 위기의식과 비관론을 논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희망적 낙관론은 ‘누군가가 해결할 거야’ ‘언젠가는 회복될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적 관측론’과, 수많은 위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슬기로운 예지로 잘 극복해 왔다는 과거 경험론에 기반을 둔 ‘경험적 희망론’으로 나뉜다. 후자(後者)는 “오히려 더 심한 상황이라면 일본은 더 큰 힘을 응집할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발전된 일본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렇다고 이들이 작금의 난관을 속 시원히 해결할 방법을 갖고 있고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높은 교육수준과 기술수준, 그리고 안정된 사회적 인프라와 인내할 수 있는 국민성을 토대로 일본인이 예지를 모은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비관론이든 낙관론이든 3·11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에 커다란 전기(轉機)를 가져온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회 전반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판을 다시 짜자는 의견이 충만하다.
사망 실종자 1만9553명
10월 28일 현재, 집계된 동일본대지진 사망자는 1만5829명, 실종자는 3724명으로 사망 실종자 수는 1만9553명에 달한다. 594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7만1578명이 피난소 생활을 해야 했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만도 11만8816채, 절반 이상 무너진 건물이 18만4843채에 달하는 등 가옥 및 건물 피해는 68만1853채로 집계됐다.
이는 1923년 9만9331명이 희생된 규모 7.9의 간토대지진, 규모 8.5로 2만2000명이 희생된 메이지 산리쿠지진에 이은 피해 규모다.
경제적인 손실도 컸다. 지진으로 손상된 설비와 도로 등의 직접적인 피해액은 정부 시산(試算)으로 16조~26조 엔에 달한다. 또 민간기업의 설비에도 9조~16조 엔의 손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GDP는 최대 0.5% 하락할 전망이다.
정부 시산에는 계획정전으로 인한 경제활동 위축 및 축소에 따른 영향은 반영되지 않았다. 또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성 물질 확산 등에 따른 영향도 계산되지 않았다.
원전사고로 인한 배상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도쿄전력의 추정 배상 규모는 4조 엔. 앞으로 배상액은 더 늘어날 것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폐원자로 비용 1조5000억 엔,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가동한 화력발전용 연료비 증액분도 연간 약 1조 엔에 달한다. 여기에 원전 오염수를 정화하는 데 소요되는 추정 비용이 1톤당 1억 엔이므로, 약 20만 톤을 정화한다면 20조 엔이 소요된다. 원자로 폐기에 따른 원자로의 가동연수 단축 손실을 1기당 연간 약 1000억 엔으로 본다면, 15년 단축된다고 가정할 때 15조 엔을 계상해야 한다. 이러한 비용을 고려해 단순 계산해도 75조~90조 엔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산출된다.
동일본대지진은 외수(外需)의 견인으로 경기침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던 시기에 발생해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 경제에 미친 타격은 장·단기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부품공급체인의 붕괴를, 장기적으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전력공급 부족을 들 수 있다.
쓰나미가 강타한 동북지방은 자동차 부품과 전자부품 업체가 집적해 있던 곳으로 부품공급망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로 인한 자동차와 전기기기의 생산 정체는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원전사고는 재해를 당하지 않은 지역의 원전마저 정지시키는 사태로 확대돼 전력공급 부족을 전국적인 문제로 확대시켰다. 많은 기업이 1995년의 고베대지진보다 피해 규모가 커 부품공급망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예측보다 빠른 2~3개월 만에 회복이 시작됐다. 도요타를 비롯한 대기업의 국내생산체제는 8월 단계에서 거의 정상화되었다.
수치상으로는 더디지만 일본 경제는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완전실업률은 개선폭이 약하지만 6월의 5.3%를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9월에는 전월(前月)대비 -0.4%인 4.3%로 재해 발생 전인 2월의 4.9%보다 개선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정부지출인 공공사업도 8월 들어 플러스로 반전했다. 광고취급액도 지진재해 이후(2월: 5.4, 3월: -4.4, 5월: -13.6, 7월: -12.3) 전년대비 마이너스가 지속되었지만 8월에 3.0을 기록하며 플러스로 돌아섰다.
3월 이후 적자(赤字)로 전락한 무역수지는 수출 둔화로 흑자(黑字)폭은 낮지만 6월 들어 흑자로 전환되었다. 광공업 생산지수는 8월에 94.7로, 지난해 가을 수준과 비슷한 수준으로까지 회복되었다.
內需산업의 해외진출
일본기업은 지금 6중고를 겪고 있다. 고(高)임금, 고법인세율, 엄격한 환경규제, FTA신중론으로 상대적 수출장벽, 엔 강세, 전력공급 불안이다. 이 가운데 3·11 이후 직접적으로 나타난 경영환경 변화는 원전사고로 인한 전력공급 부족이다. 외적 충격으로는, 지속된 엔 강세가 7월 이후 급격히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엔화 환율은 간 나오토 내각이 출범한 2010년 6월의 1달러당 90.92엔에서 15엔 가까이 상승했다.
10월 28일 발표된 도요타 그룹 소속 주요 10개사(社)의 2011년 9월 중간연결결산에 따르면, 지진으로 인한 감산(減産) 등의 영향으로 8개사가 수익감소, 4개사가 최종손익 적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실적악화는 1달러 79~82엔이었던 상정 환율을 75~77엔으로 상향수정한 데 따른 영향이 크다.
이는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업이 입지전략과 경쟁력, 그리고 사업의 정의를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3·11 지진재해 후 기업행동에 나타난 변화는 크게 3가지다.
첫 번째는 해외 생산거점 이전과 활발한 M&A(인수합병) 전개다. 두 번째는 지나친 다(多)품종소량생산과 과도한 고품질 지향을 재고(再考)하고 비핵심 부품을 표준화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세 번째는 국내 산업 간의 경쟁에서 체력을 소모하지 않고 주(主)전장인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국내 사업을 재편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기업의 해외이전 움직임에 대해서는 견해가 양분된다. 먼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산업공동화(空洞化)가 발생해 고용이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산업구조 전환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장기적인 측면에서 경쟁력을 키우는 과정이라는 반론도 많다. 변화가 있을 때마다 산업구조의 변화를 비관적으로 봤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산업구조의 전환을 이뤄왔으므로, 산업구조 전환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간 협력 확대
낙관론의 근거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아시아 시장의 성장이다. 두 나라 간 무역량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확대되고, 두 나라의 규모가 클수록 무역 규모도 커진다는 국제무역에서 말하는 인력(引力)모델(gravity model)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수출품 하면 자동차나 정밀기기를 떠올리지만, 화장품, 의약품, 가정용품, 식료, 교육서비스, 외식, 관광 관련 산업, 소매업, 어패럴 등 종전에 내수(內需)산업으로 여겨졌던 분야가 해외 수출산업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라이온의 세제가 말레이시아에서 시장점유율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중국 대도시에서 시세이도의 화장품 매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환경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기업 간 협력, 업계재편과 M&A가 활발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물류(物流)협력, 소재와 완제품 유통 등, 제조업체 사이에서의 생산회복을 위한 협력이 진행되고 있다. 한 예로서, 일본 청량음료업체들의 포장재와 용기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플라스틱병의 뚜껑 공통화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 각사는 의장을 중시해 뚜껑이 수백 종류나 되었지만 회사 로고를 모두 제거해 통일시킴으로써 생산량을 확대하고 비용도 줄였다.
전력수급대책을 통한 기업 간 협력확대도 주목할 만하다. 동종(同種) 업종 간에 공장의 가동일을 조정하는 수준에서부터 중복 생산하고 있는 제품을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쪽으로 몰아주는 상호생산위탁 수준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업무스타일에도 변화가 일었다. 지난 6월에 실시한 대기업의 IT도입관여자 조사에 따르면, 31.2%에서 IT예산을 증액하여 재택(在宅)근무 시스템과 모바일 시스템 이용을 통한 재택근무 환경을 정비하는 움직임이 가속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막힌 가슴을 뚫어준 孫正義
최근에는 1956년부터 시작됐던 일본의 제1차 남극탐험대가 새삼 화제다. 당시 일본정부는 전후(戰後) 복구로 예산이 없다며 남극탐험을 거부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5엔, 10엔의 성금을 모아 보내오면서 남극탐험은 일본 국민의 희망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사선 ‘소야’의 수리는 전국에서 자원봉사로 모인 장인(匠人)들이 담당했다. 태평양전쟁 패전(敗戰)으로 어두웠던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처음으로 하나로 묶어준 것이 바로 남극탐험대였다.
이 남극탐험대에 일본 국민들이 진한 향수를 느끼고 감동하는 이유는 이처럼 탐험대가 국민을 하나로 만들어준 이유도 있지만, 갖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흔들리지 않고 대원들을 감싸며 안건을 조율하고 난관을 헤쳐나가는 리더의 모습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지금 강력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리더를 갈망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경제성장을 논할 때는 마하티르 총리의 리더십을, 싱가포르의 투명성과 경제를 논할 때는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카리스마를 언급한다.
3·11 이후 일본에서 ‘남자다운 영웅’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은 소프트뱅크의 손정의(孫正義) 사장이다. 그는 지진 발생 후 100억 엔을 기부하고 재해지 청소년들에게 대학 때까지 휴대전화 요금을 면제해 주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지자 그는 간 나오토 총리를 설득해 탈(脫)원전을 선언하게 했고, “재생가능한 자연에너지가 일본의 미래”라며 대형 ‘태양광 발전 구상’을 발표했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일본 국민들은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아 막힌 가슴이 트인다며 환호했다.
조석(朝夕)이 다르게 발표 내용을 번복하던 정부에 대해 그 말 잘하던 정치가, 평론가 할 것 없이 그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비판을 못 했다. 그때 손 사장은 거침없이 정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껄끄러운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일본 국민은 그를 영웅이라고 칭했다. 그가 한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치가가 되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손 마사요시를 나카타초(국회)로!’ ‘손 마사요시를 총리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누군가가 해주겠지’, ‘언젠가는 회복되겠지’하며 가슴 졸이며 기다려왔던 일본인들의 막힌 가슴을 터준 것이다.
‘농경민족형’ 총리
그런데 일본인들의 선택은 사뭇 의외였다.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후, 3명의 총리가 바뀌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간 나오토 총리는 모두 실정(失政)과 실언(失言)으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권좌에서 밀려났다.
뒤를 이은 노다 총리는 환경이 더욱 나빴다. 지진재해복구, 소비세 인상, 엔 강세대책, 경기침체 등 출범 당시부터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앞선 2명의 총리보다 더욱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이처럼 강한 리더십을 갈망하면서도 결국은 조정형 리더를 선택했다. 노다 총리 스스로가 ‘미꾸라지 내각’이라고 칭했듯이 그는 다른 후보에 비해 화려하지도 튀지도 않는 소박한 서민형 정치가다. 당내 기반도 약하고 막강한 후원자도 없다. 강한 리더십도 없고 여당 민주당 내의 내홍(內訌) 또한 심하다. 때문에 미꾸라지 내각이 민주당과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당내 권력투쟁에 종지부를 찍자는 염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내 화합을 위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카드로서 노다 총리를 선출했다고 할 수 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미증유의 자연재해와 유럽발(發) 금융위기, 엔 강세의 위기를 노다 총리의 인간성과 조정력으로 극복해 가자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도가 깔리면서 ‘수렵민족적’인 총리가 아닌 씨를 뿌리고 싹을 키우는 ‘농경민족형’ 총리를 선택한 것이다. 노다 정권은 지금 60%에 달하는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서민파 재상(宰相)에 대한 호감과 민주당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줘보자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자위대에 대한 신뢰도 높아져
지난 9월 입각(入閣)한 지 9일 만에 산업정책의 수장인 경제산업상이 사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전사고 지역에 대해 ‘죽음의 마을’이라는 등의 실언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치가와 정계의 개념 없는 행위와 언행도 문제지만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대응에도 일본 국민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NTT데이터스미스가 20~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6월 24일부터 28일 사이) 정부, 기관, 조직, 개인의 9개로 분류해 신뢰도를 조사했다.
융합적인 새로운 정치시스템 만들자
일본 국민들이 이번 지진발생 이후 대응에서 가장 신뢰도를 높게 평가한 것은 재해지 복구작업에 묵묵히 임했던 자위대(72%)였다. 다음은 성금과 자원봉사로 도움을 준 일본국민(63%)이었고, 그 다음은 유엔(55%)이었다. 다음으로 일본의 대기업(51%), NGO(51%), 일본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41%), 언론(18%), 일본정부(14%), 종교단체·교회(6%) 순으로 나타났다. 재해발생 전인 2010년 조사 결과와 비교하면 일본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13%포인트 감소했다.
나라별로는 지진 직후 ‘도모다치(친구) 작전’으로 신속히 지원에 나선 미국이 51%로 가장 높았고, 이어 200억 엔이 넘는 의연금을 보내온 타이완이 41%, 원전사고 관련 지원을 한 프랑스 25%, 그 다음으로 한국과 뉴질랜드(24%), 인도네시아(20%)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한 후, 쓰나미 피해를 당한 후쿠시마 현(福島縣) 미나미 소마시(南相馬市)의 사쿠라이 시장은 후쿠시마 현과 중앙정부에 긴급 연락을 취하며 대응을 물었다. 그는 “현과 중앙정부는 무엇을 물어도 ‘협의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결국 주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결단을 해야 했던 것은 기초지자체장인 시장 한 명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세금으로 기능 하는 공공 행정섹터에 자신의 생명과 국가를 맡길 수 없다는 의식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개혁 3.0’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표출되고 있다.
정치개혁 3.0이란 일본의 정치변혁기를 3단계로 분류한 것으로, 1단계 변혁은 록히드 사건 이후의 정치개혁, 2단계는 1988년 리쿠르트 사건(리쿠르트사의 정치가와 공무원 뇌물 공여사건) 후의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로 연결되는 정치개혁, 3단계는 지난 3·11 대지진을 계기로 정치개혁을 하자는 움직임이다.
이는 그만큼 이번 대지진에서 일본 정계가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 방향성의 키워드는 ‘융합’이다. 일본 특유의 복잡성이 내재된 수법과 글로벌 수법을 융합시킨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는 세금으로 가동되는 공공섹터, 경쟁과 이윤의 논리로 움직이는 기업섹터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비(非)영리섹터의 참여를 통해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이는 행정단위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고 국민국가의 개념과 기능이 진부해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환경이나 경제 등의 문제는 이제 한 국가를 초월한 큰 단위의 것이 되었으며, 학교나 병원, 일상생활에 관한 것은 기초지자체에서 생각할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서 본다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국가 단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논리다. 따라서 글로벌 감각을 겸비한 다양한 인재를 기업이나 민간에서 정계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 느꼈다”
쓰나미 이후 일본 연예인들의 결혼이 부쩍 늘고, 열애(熱愛) 기사가 많아졌다. 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쓰나미 이후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라는 답이 돌아온다. 쓰나미는 주저했던 결혼을 결정할 정도로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인터넷 조사에서는 쓰나미 이후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고 답한 사람이 전체의 80%를 넘었다.
소비자 의식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사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 등의 구매의욕을 나타내는 표현이나 ‘배우고 싶다’거나 ‘좀 더 숙달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등의 도전, 의욕을 나타내는 표현이나 ‘먹고 싶다’, ‘놀고 싶다’, ‘즐기고 싶다’ 등의 외식(外食)·레저 관련 표현은 감소했다.
반면, ‘결혼하고 싶다’거나, ‘포옹하고 싶다’ 등의 애정에 관한 표현이나 ‘쉬고 싶다’, ‘위로받고 싶다’ 등의 휴식에 대한 의욕을 나타내는 표현은 급증했다.
原電에 대한 의식 변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간 나오토 전 총리는 탈원전을 선언했다가 압력에 밀려 발언을 취소했다. 재계(財界)의 반발이 있지만, 수천 명 규모의 탈원전 시위가 벌어지는 등 일본 사회에서 탈원전은 바꾸기 어려운 흐름이 되고 있다. 적어도 새로운 원전을 건설한다는 말은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정부가 제시해 온 원전 발전 코스트에 대한 진위(眞僞)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의 《2010년 에너지백서》에 따르면, 원전의 발전 단가는 5~6엔(1킬로와트)이다. 그런데 이 계산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오시마 겐이치(大島堅一) 리츠메이칸대학 교수는 과거 38년간의 유가증권보고서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원자력 발전이 다른 발전에 비해 생산단가가 상대적으로 비싸다고 분석했다.
기존 계산 방법과 다른 것은 환경비용(CO₂배출량 1톤당 30달러의 환경비용과 발전소 원자로 폐로비용)과 폐기물처리 등의 ‘사후(事後)비용’,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포함했다. 이 재정지출은 정부의 지출로 계상돼 전력회사의 비용으로 처리되지 않는데 실질적으로는 발전코스트에 포함시켜야 한다. 여기에 원전 발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발전량의 수급(需給)조절에 이용되는 양수(揚水)발전소의 비용도 포함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서 계산하면 비용은 1킬로와트당 1엔이 상승하게 된다. 앞으로 발생하게 될 오염제거와 원상회복조치에 따른 비용을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계산모델의 조건이다. OECD에 따르면 가동연수가 태양광과 풍력발전은 25년, 원전 60년, 수력발전 80년으로 되어 있다. 일본도 가동연수를 60년으로 상정하고 있다.
가동연수가 길어지면 폐로(廢爐)비용과 제반비용이 작아지지만 재료의 열화(劣化)와 기술의 진부화 등으로 안전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30년이 지난 원전은 노후화된 것으로 평가해 기술평가 및 장기보전계획에 관한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따라서 안전성을 고려해 원전 가동연수를 30년으로 상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가동연수를 30년으로 했을 때 원전의 발전 코스트는 12.06엔(1킬로와트)이며, 석탄화력은 9.43엔, LNG화력은 10.87엔으로 원전이 더 비싸게 나온다.
또한 재생가능에너지인 풍력발전(발전원가 11.30엔)이나, 지열발전(12.43엔), 태양광 발전(45.47엔)은 30년이 지나면 점점 발전비용이 감소해 태양광은 7.0엔, 풍력은 7.54엔으로 감소하지만 원자력발전은 그 이후에 어떻게 비용이 팽창할지 모르는 게 현실이다.
일본 국민들에게 3·11 대지진과 쓰나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악몽이다. 대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는 일본열도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할지라도 원전사고는 용납할 수 없는 인재(人災)라는 인식이 강하다.
主客이 전도된 사회
“원전은 절대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던 안전신화(神話)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정부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근거 없는 안전신화의 붕괴는 지도층에 대한 배신감과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로 다가왔다. “또 무엇을 속이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팽배해지고, 이제 더 이상 일본에 안전지대가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사실 일본 국민들이 원자력 산업의 구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고가 난 후였다. 일본에서 원자력 연구를 시작할 초기에는 패전국(敗戰國)으로서 국가가 지키지 않으면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산업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보호정책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산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산업을 보호하는 조직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구조가 일본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뒤집기를 밥먹듯 하는 정부 발표와 불편한 진실을 감추려는 도쿄전력에 대한 신뢰성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정부 발표만을 앵무새처럼 전해온 언론을 보면서 “태평양전쟁 당시 대본영(大本營)의 언론통제가 재현된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지진재해와 관련해 일본 정부와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래도 낙관론은 있다
방사능 공포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1973년에 발표된 고마쓰 사쿄(小松左京)의 SF소설 《일본 침몰》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소설은 그동안 몇 차례나 영화와 TV 및 라디오 드라마, 만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한 지리물리학자가 도쿄도(都)에 속한 오가사와라(小笠原)제도 근해의 일본해구(海口)에서 기묘한 균열을 발견하고 분석한 결과, 지각변동이 일어나 일본열도가 서서히 침몰해 육지의 대부분이 가라앉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대지진이 잇따르면서 어려움이 가중되지만, 일본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해외로 탈출시키고, 몇 명은 마지막까지 남아 일본열도와 운명을 같이한다. 시코쿠를 시작으로 침몰이 시작된 일본열도는 관동지방 북부가 수몰되면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 소설의 일본열도 침몰과정을 쓰나미나 일본 경제에 빗대어 위기의식과 비관론을 논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희망적 낙관론은 ‘누군가가 해결할 거야’ ‘언젠가는 회복될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적 관측론’과, 수많은 위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슬기로운 예지로 잘 극복해 왔다는 과거 경험론에 기반을 둔 ‘경험적 희망론’으로 나뉜다. 후자(後者)는 “오히려 더 심한 상황이라면 일본은 더 큰 힘을 응집할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발전된 일본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렇다고 이들이 작금의 난관을 속 시원히 해결할 방법을 갖고 있고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높은 교육수준과 기술수준, 그리고 안정된 사회적 인프라와 인내할 수 있는 국민성을 토대로 일본인이 예지를 모은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비관론이든 낙관론이든 3·11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에 커다란 전기(轉機)를 가져온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회 전반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판을 다시 짜자는 의견이 충만하다.
사망 실종자 1만9553명
10월 28일 현재, 집계된 동일본대지진 사망자는 1만5829명, 실종자는 3724명으로 사망 실종자 수는 1만9553명에 달한다. 594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7만1578명이 피난소 생활을 해야 했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만도 11만8816채, 절반 이상 무너진 건물이 18만4843채에 달하는 등 가옥 및 건물 피해는 68만1853채로 집계됐다.
이는 1923년 9만9331명이 희생된 규모 7.9의 간토대지진, 규모 8.5로 2만2000명이 희생된 메이지 산리쿠지진에 이은 피해 규모다.
경제적인 손실도 컸다. 지진으로 손상된 설비와 도로 등의 직접적인 피해액은 정부 시산(試算)으로 16조~26조 엔에 달한다. 또 민간기업의 설비에도 9조~16조 엔의 손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GDP는 최대 0.5% 하락할 전망이다.
정부 시산에는 계획정전으로 인한 경제활동 위축 및 축소에 따른 영향은 반영되지 않았다. 또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성 물질 확산 등에 따른 영향도 계산되지 않았다.
원전사고로 인한 배상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도쿄전력의 추정 배상 규모는 4조 엔. 앞으로 배상액은 더 늘어날 것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폐원자로 비용 1조5000억 엔,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가동한 화력발전용 연료비 증액분도 연간 약 1조 엔에 달한다. 여기에 원전 오염수를 정화하는 데 소요되는 추정 비용이 1톤당 1억 엔이므로, 약 20만 톤을 정화한다면 20조 엔이 소요된다. 원자로 폐기에 따른 원자로의 가동연수 단축 손실을 1기당 연간 약 1000억 엔으로 본다면, 15년 단축된다고 가정할 때 15조 엔을 계상해야 한다. 이러한 비용을 고려해 단순 계산해도 75조~90조 엔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산출된다.
동일본대지진은 외수(外需)의 견인으로 경기침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던 시기에 발생해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 경제에 미친 타격은 장·단기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부품공급체인의 붕괴를, 장기적으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전력공급 부족을 들 수 있다.
쓰나미가 강타한 동북지방은 자동차 부품과 전자부품 업체가 집적해 있던 곳으로 부품공급망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로 인한 자동차와 전기기기의 생산 정체는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원전사고는 재해를 당하지 않은 지역의 원전마저 정지시키는 사태로 확대돼 전력공급 부족을 전국적인 문제로 확대시켰다. 많은 기업이 1995년의 고베대지진보다 피해 규모가 커 부품공급망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예측보다 빠른 2~3개월 만에 회복이 시작됐다. 도요타를 비롯한 대기업의 국내생산체제는 8월 단계에서 거의 정상화되었다.
수치상으로는 더디지만 일본 경제는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완전실업률은 개선폭이 약하지만 6월의 5.3%를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9월에는 전월(前月)대비 -0.4%인 4.3%로 재해 발생 전인 2월의 4.9%보다 개선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정부지출인 공공사업도 8월 들어 플러스로 반전했다. 광고취급액도 지진재해 이후(2월: 5.4, 3월: -4.4, 5월: -13.6, 7월: -12.3) 전년대비 마이너스가 지속되었지만 8월에 3.0을 기록하며 플러스로 돌아섰다.
3월 이후 적자(赤字)로 전락한 무역수지는 수출 둔화로 흑자(黑字)폭은 낮지만 6월 들어 흑자로 전환되었다. 광공업 생산지수는 8월에 94.7로, 지난해 가을 수준과 비슷한 수준으로까지 회복되었다.
內需산업의 해외진출
일본기업은 지금 6중고를 겪고 있다. 고(高)임금, 고법인세율, 엄격한 환경규제, FTA신중론으로 상대적 수출장벽, 엔 강세, 전력공급 불안이다. 이 가운데 3·11 이후 직접적으로 나타난 경영환경 변화는 원전사고로 인한 전력공급 부족이다. 외적 충격으로는, 지속된 엔 강세가 7월 이후 급격히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엔화 환율은 간 나오토 내각이 출범한 2010년 6월의 1달러당 90.92엔에서 15엔 가까이 상승했다.
10월 28일 발표된 도요타 그룹 소속 주요 10개사(社)의 2011년 9월 중간연결결산에 따르면, 지진으로 인한 감산(減産) 등의 영향으로 8개사가 수익감소, 4개사가 최종손익 적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실적악화는 1달러 79~82엔이었던 상정 환율을 75~77엔으로 상향수정한 데 따른 영향이 크다.
이는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업이 입지전략과 경쟁력, 그리고 사업의 정의를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3·11 지진재해 후 기업행동에 나타난 변화는 크게 3가지다.
첫 번째는 해외 생산거점 이전과 활발한 M&A(인수합병) 전개다. 두 번째는 지나친 다(多)품종소량생산과 과도한 고품질 지향을 재고(再考)하고 비핵심 부품을 표준화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세 번째는 국내 산업 간의 경쟁에서 체력을 소모하지 않고 주(主)전장인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국내 사업을 재편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기업의 해외이전 움직임에 대해서는 견해가 양분된다. 먼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산업공동화(空洞化)가 발생해 고용이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산업구조 전환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장기적인 측면에서 경쟁력을 키우는 과정이라는 반론도 많다. 변화가 있을 때마다 산업구조의 변화를 비관적으로 봤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산업구조의 전환을 이뤄왔으므로, 산업구조 전환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간 협력 확대
낙관론의 근거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아시아 시장의 성장이다. 두 나라 간 무역량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확대되고, 두 나라의 규모가 클수록 무역 규모도 커진다는 국제무역에서 말하는 인력(引力)모델(gravity model)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수출품 하면 자동차나 정밀기기를 떠올리지만, 화장품, 의약품, 가정용품, 식료, 교육서비스, 외식, 관광 관련 산업, 소매업, 어패럴 등 종전에 내수(內需)산업으로 여겨졌던 분야가 해외 수출산업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라이온의 세제가 말레이시아에서 시장점유율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중국 대도시에서 시세이도의 화장품 매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환경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기업 간 협력, 업계재편과 M&A가 활발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물류(物流)협력, 소재와 완제품 유통 등, 제조업체 사이에서의 생산회복을 위한 협력이 진행되고 있다. 한 예로서, 일본 청량음료업체들의 포장재와 용기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플라스틱병의 뚜껑 공통화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 각사는 의장을 중시해 뚜껑이 수백 종류나 되었지만 회사 로고를 모두 제거해 통일시킴으로써 생산량을 확대하고 비용도 줄였다.
전력수급대책을 통한 기업 간 협력확대도 주목할 만하다. 동종(同種) 업종 간에 공장의 가동일을 조정하는 수준에서부터 중복 생산하고 있는 제품을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쪽으로 몰아주는 상호생산위탁 수준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업무스타일에도 변화가 일었다. 지난 6월에 실시한 대기업의 IT도입관여자 조사에 따르면, 31.2%에서 IT예산을 증액하여 재택(在宅)근무 시스템과 모바일 시스템 이용을 통한 재택근무 환경을 정비하는 움직임이 가속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막힌 가슴을 뚫어준 孫正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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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비전을 보여주는 거침없는 발언으로 리더십 부재에 실망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
이 남극탐험대에 일본 국민들이 진한 향수를 느끼고 감동하는 이유는 이처럼 탐험대가 국민을 하나로 만들어준 이유도 있지만, 갖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흔들리지 않고 대원들을 감싸며 안건을 조율하고 난관을 헤쳐나가는 리더의 모습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지금 강력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리더를 갈망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경제성장을 논할 때는 마하티르 총리의 리더십을, 싱가포르의 투명성과 경제를 논할 때는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카리스마를 언급한다.
3·11 이후 일본에서 ‘남자다운 영웅’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은 소프트뱅크의 손정의(孫正義) 사장이다. 그는 지진 발생 후 100억 엔을 기부하고 재해지 청소년들에게 대학 때까지 휴대전화 요금을 면제해 주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지자 그는 간 나오토 총리를 설득해 탈(脫)원전을 선언하게 했고, “재생가능한 자연에너지가 일본의 미래”라며 대형 ‘태양광 발전 구상’을 발표했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일본 국민들은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아 막힌 가슴이 트인다며 환호했다.
조석(朝夕)이 다르게 발표 내용을 번복하던 정부에 대해 그 말 잘하던 정치가, 평론가 할 것 없이 그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비판을 못 했다. 그때 손 사장은 거침없이 정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껄끄러운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일본 국민은 그를 영웅이라고 칭했다. 그가 한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치가가 되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손 마사요시를 나카타초(국회)로!’ ‘손 마사요시를 총리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누군가가 해주겠지’, ‘언젠가는 회복되겠지’하며 가슴 졸이며 기다려왔던 일본인들의 막힌 가슴을 터준 것이다.
‘농경민족형’ 총리
그런데 일본인들의 선택은 사뭇 의외였다.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후, 3명의 총리가 바뀌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간 나오토 총리는 모두 실정(失政)과 실언(失言)으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권좌에서 밀려났다.
뒤를 이은 노다 총리는 환경이 더욱 나빴다. 지진재해복구, 소비세 인상, 엔 강세대책, 경기침체 등 출범 당시부터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앞선 2명의 총리보다 더욱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이처럼 강한 리더십을 갈망하면서도 결국은 조정형 리더를 선택했다. 노다 총리 스스로가 ‘미꾸라지 내각’이라고 칭했듯이 그는 다른 후보에 비해 화려하지도 튀지도 않는 소박한 서민형 정치가다. 당내 기반도 약하고 막강한 후원자도 없다. 강한 리더십도 없고 여당 민주당 내의 내홍(內訌) 또한 심하다. 때문에 미꾸라지 내각이 민주당과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당내 권력투쟁에 종지부를 찍자는 염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내 화합을 위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카드로서 노다 총리를 선출했다고 할 수 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미증유의 자연재해와 유럽발(發) 금융위기, 엔 강세의 위기를 노다 총리의 인간성과 조정력으로 극복해 가자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도가 깔리면서 ‘수렵민족적’인 총리가 아닌 씨를 뿌리고 싹을 키우는 ‘농경민족형’ 총리를 선택한 것이다. 노다 정권은 지금 60%에 달하는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서민파 재상(宰相)에 대한 호감과 민주당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줘보자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자위대에 대한 신뢰도 높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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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원전 오염 지역으로 투입되는 자위대원들. 동일본대지진 이후 자위대에 대한 일본인들의 신뢰도가 높아졌다. |
NTT데이터스미스가 20~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6월 24일부터 28일 사이) 정부, 기관, 조직, 개인의 9개로 분류해 신뢰도를 조사했다.
융합적인 새로운 정치시스템 만들자
일본 국민들이 이번 지진발생 이후 대응에서 가장 신뢰도를 높게 평가한 것은 재해지 복구작업에 묵묵히 임했던 자위대(72%)였다. 다음은 성금과 자원봉사로 도움을 준 일본국민(63%)이었고, 그 다음은 유엔(55%)이었다. 다음으로 일본의 대기업(51%), NGO(51%), 일본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41%), 언론(18%), 일본정부(14%), 종교단체·교회(6%) 순으로 나타났다. 재해발생 전인 2010년 조사 결과와 비교하면 일본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13%포인트 감소했다.
나라별로는 지진 직후 ‘도모다치(친구) 작전’으로 신속히 지원에 나선 미국이 51%로 가장 높았고, 이어 200억 엔이 넘는 의연금을 보내온 타이완이 41%, 원전사고 관련 지원을 한 프랑스 25%, 그 다음으로 한국과 뉴질랜드(24%), 인도네시아(20%)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한 후, 쓰나미 피해를 당한 후쿠시마 현(福島縣) 미나미 소마시(南相馬市)의 사쿠라이 시장은 후쿠시마 현과 중앙정부에 긴급 연락을 취하며 대응을 물었다. 그는 “현과 중앙정부는 무엇을 물어도 ‘협의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결국 주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결단을 해야 했던 것은 기초지자체장인 시장 한 명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세금으로 기능 하는 공공 행정섹터에 자신의 생명과 국가를 맡길 수 없다는 의식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개혁 3.0’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표출되고 있다.
정치개혁 3.0이란 일본의 정치변혁기를 3단계로 분류한 것으로, 1단계 변혁은 록히드 사건 이후의 정치개혁, 2단계는 1988년 리쿠르트 사건(리쿠르트사의 정치가와 공무원 뇌물 공여사건) 후의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로 연결되는 정치개혁, 3단계는 지난 3·11 대지진을 계기로 정치개혁을 하자는 움직임이다.
이는 그만큼 이번 대지진에서 일본 정계가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 방향성의 키워드는 ‘융합’이다. 일본 특유의 복잡성이 내재된 수법과 글로벌 수법을 융합시킨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는 세금으로 가동되는 공공섹터, 경쟁과 이윤의 논리로 움직이는 기업섹터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비(非)영리섹터의 참여를 통해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이는 행정단위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고 국민국가의 개념과 기능이 진부해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환경이나 경제 등의 문제는 이제 한 국가를 초월한 큰 단위의 것이 되었으며, 학교나 병원, 일상생활에 관한 것은 기초지자체에서 생각할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서 본다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국가 단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논리다. 따라서 글로벌 감각을 겸비한 다양한 인재를 기업이나 민간에서 정계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 느꼈다”
쓰나미 이후 일본 연예인들의 결혼이 부쩍 늘고, 열애(熱愛) 기사가 많아졌다. 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쓰나미 이후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라는 답이 돌아온다. 쓰나미는 주저했던 결혼을 결정할 정도로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인터넷 조사에서는 쓰나미 이후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고 답한 사람이 전체의 80%를 넘었다.
소비자 의식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사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 등의 구매의욕을 나타내는 표현이나 ‘배우고 싶다’거나 ‘좀 더 숙달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등의 도전, 의욕을 나타내는 표현이나 ‘먹고 싶다’, ‘놀고 싶다’, ‘즐기고 싶다’ 등의 외식(外食)·레저 관련 표현은 감소했다.
반면, ‘결혼하고 싶다’거나, ‘포옹하고 싶다’ 등의 애정에 관한 표현이나 ‘쉬고 싶다’, ‘위로받고 싶다’ 등의 휴식에 대한 의욕을 나타내는 표현은 급증했다.
原電에 대한 의식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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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 반대시위를 벌이는 일본인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원전뿐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신감도 심어주었다. |
일본의 《2010년 에너지백서》에 따르면, 원전의 발전 단가는 5~6엔(1킬로와트)이다. 그런데 이 계산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오시마 겐이치(大島堅一) 리츠메이칸대학 교수는 과거 38년간의 유가증권보고서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원자력 발전이 다른 발전에 비해 생산단가가 상대적으로 비싸다고 분석했다.
기존 계산 방법과 다른 것은 환경비용(CO₂배출량 1톤당 30달러의 환경비용과 발전소 원자로 폐로비용)과 폐기물처리 등의 ‘사후(事後)비용’,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포함했다. 이 재정지출은 정부의 지출로 계상돼 전력회사의 비용으로 처리되지 않는데 실질적으로는 발전코스트에 포함시켜야 한다. 여기에 원전 발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발전량의 수급(需給)조절에 이용되는 양수(揚水)발전소의 비용도 포함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서 계산하면 비용은 1킬로와트당 1엔이 상승하게 된다. 앞으로 발생하게 될 오염제거와 원상회복조치에 따른 비용을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계산모델의 조건이다. OECD에 따르면 가동연수가 태양광과 풍력발전은 25년, 원전 60년, 수력발전 80년으로 되어 있다. 일본도 가동연수를 60년으로 상정하고 있다.
가동연수가 길어지면 폐로(廢爐)비용과 제반비용이 작아지지만 재료의 열화(劣化)와 기술의 진부화 등으로 안전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30년이 지난 원전은 노후화된 것으로 평가해 기술평가 및 장기보전계획에 관한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따라서 안전성을 고려해 원전 가동연수를 30년으로 상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가동연수를 30년으로 했을 때 원전의 발전 코스트는 12.06엔(1킬로와트)이며, 석탄화력은 9.43엔, LNG화력은 10.87엔으로 원전이 더 비싸게 나온다.
또한 재생가능에너지인 풍력발전(발전원가 11.30엔)이나, 지열발전(12.43엔), 태양광 발전(45.47엔)은 30년이 지나면 점점 발전비용이 감소해 태양광은 7.0엔, 풍력은 7.54엔으로 감소하지만 원자력발전은 그 이후에 어떻게 비용이 팽창할지 모르는 게 현실이다.
일본 국민들에게 3·11 대지진과 쓰나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악몽이다. 대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는 일본열도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할지라도 원전사고는 용납할 수 없는 인재(人災)라는 인식이 강하다.
主客이 전도된 사회
“원전은 절대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던 안전신화(神話)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정부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근거 없는 안전신화의 붕괴는 지도층에 대한 배신감과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로 다가왔다. “또 무엇을 속이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팽배해지고, 이제 더 이상 일본에 안전지대가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사실 일본 국민들이 원자력 산업의 구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고가 난 후였다. 일본에서 원자력 연구를 시작할 초기에는 패전국(敗戰國)으로서 국가가 지키지 않으면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산업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보호정책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산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산업을 보호하는 조직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구조가 일본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