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 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통일돼서 부모님 다시 만나야… 암이 저를 지배할지라도 항상 웃으면서 싸워 이길 것”
⊙ “대한민국에서 간암 판정받은 것 자체도 너무 감사… 북이었으면 벌써 죽었을 것”
⊙ 탈북할 때 “남조선 가서 우리 아들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라”던 어머니
⊙ “앞으로는 컴퓨터 시대”라며 집 재산 70% 팔아 컴퓨터 사준 아버지
⊙ “김정일 죽었을 때는 ‘죽었네, 잘됐네’… 김정은 처음 등장 때는 센세이셔널”
⊙ “한류 드라마 보고 ‘여기 남아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탈북”
⊙ 편의점·고깃집 알바, 프로그램 개발자로 열심히 살다가 간암 판정받아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헐러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 “통일돼서 부모님 다시 만나야… 암이 저를 지배할지라도 항상 웃으면서 싸워 이길 것”
⊙ “대한민국에서 간암 판정받은 것 자체도 너무 감사… 북이었으면 벌써 죽었을 것”
⊙ 탈북할 때 “남조선 가서 우리 아들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라”던 어머니
⊙ “앞으로는 컴퓨터 시대”라며 집 재산 70% 팔아 컴퓨터 사준 아버지
⊙ “김정일 죽었을 때는 ‘죽었네, 잘됐네’… 김정은 처음 등장 때는 센세이셔널”
⊙ “한류 드라마 보고 ‘여기 남아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탈북”
⊙ 편의점·고깃집 알바, 프로그램 개발자로 열심히 살다가 간암 판정받아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헐러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 간암 4기 투병 중인 탈북 청년 박성렬씨. 방사선 색전술 1차 후의 모습.
북한에서 중상류층으로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주민들의 불행이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탈북(脫北)했다. 체제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으로 와서 대학도 졸업하고, 대학원 마치고 공공기관에 전산 개발자로 취직해 열심히 살았다. 오랫동안 세금 내고 건전한 시민으로 살며 나라와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 8월 26일, 갑자기 간암 4기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 생활 10년 차인 탈북 청년 박성렬(30)의 이야기다.
백살구 열매의 추억
― 고향은 어디인가요.
“함경북도 회령시(會寧市)입니다. 소설가 고(故) 최인훈 선생님, 배우 이순재 선생님이 회령 분이라고 들었어요. 지성호 전 의원도 회령 출신이죠. 한 집 건너 한 명이 탈북하고, 다 무슨 행불자 가족이고 그런 곳입니다.”
― 동네 사람들이 많이 탈북해서 덜 외롭겠네요.
“그렇기는 한데,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서럽습니다.”
― 언제 그런가요.
“제가 처음 한국에 와서 TV를 보는데 〈6시 내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제 고향은 나올 수 없죠. 잠깐이라도 갈 수가 없으니까요. 혼자서 머릿속으로 ‘6시 내 고향-회령편’을 찍습니다. 여기 벚꽃이 만개하듯이 회령에선 백살구꽃이 만발하지요.”
어릴 때부터 백살구 열매를 먹은 것은 모든 회령 사람의 공통된 추억이다. 익기도 전에 따 먹는 것이 포인트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이런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돌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그곳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이 자꾸 생각나요. 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통일 이후에 그 친구들의 삶을 보상해 주고 싶습니다. 체제는 밉지만, 사람까지 미워할 수는 없으니까요.”
1994년생이면 이른바 ‘고난의 행군’ 복판에서 태어난 세대다.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지만, 북한 전역에서 80만~300만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한 지옥 같은 시절이다.
“제 기억은 유치원 때부터인데, 그래도 그때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습니다. 부모님이 열심히 장사하셨어요. 아버지는 평양에 가 계셨고, 어머니는 평양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맛내기 장사를 하셨죠. 조미료가 맛내기입니다. 평양에서 맛내기를 가져다 시골 가서 팔고, 값으로 감자나 옥수수를 받아 도시에서 또 팔았죠. 달력도 사 와서 팔고.”
― 달력도 돈이 됩니까.
“시골에선 모든 물자가 귀하니까요. 달력이 화보처럼 예쁘니까 집 꾸미는 데도 쓰고, 종이가 두꺼우니까 재활용을 많이 합니다. 어머니가 일찍부터 장사하러 다녀서 저는 밥은 굶지 않고 자랐어요.”
“아버지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어”
박성렬은 외동아들이다. 부모님 본인은 굶더라도 아들만큼은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준 걸 그때부터 알았다.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저한테 밥 주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그냥 알아서 혼자 드시는데, 어머니 밥그릇에 밥이 없는 겁니다.”
부모님은 동갑이다. 24세에 박성렬을 봤다. 두 분 다 힘든 티를 하나도 내보이지 않았다. 강했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정신이 있었다. 혼자 탈북해서 왔기에 부모님을 못 본 세월이 10년을 넘어간다.
“북한에선 50대 중반이면 노인입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 빨리 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말 잘 먹고 잘 지내시잖아요. 제 회사 부장님을 보면 제 아버지랑 나이 차이가 거의 없는데, 도저히 동년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가끔 부모님과 전화 통화는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됐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짠하다.
“사람이 어떤 곳에서 태어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제 부모님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그렇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전 대한민국에서 간암 판정을 받은 것 자체도 너무 감사합니다. 북이었다면 바로 죽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더 이겨내려고 합니다. 통일돼서 부모님 무조건 다시 만나야죠. 암이 저를 지배할지라도 항상 웃으면서 싸워 이길 겁니다.”
컴퓨터…. 부모님에 대한 추억의 중심에 있는 물품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집 재산의 한 70% 정도를 팔아 컴퓨터를 사다 주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본체와 모니터를 들고 오던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평양에 오래 있었던 아버지가 “앞으로는 컴퓨터 시대다. 컴퓨터를 모르면 살아갈 수 없다”라며 거금을 투자한 것이다.
“컴퓨터를 배우고, 아버지와 게임도 같이 했어요. 그렇게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TV에 나오는 해커 수준은 절대 아니고 컴퓨터 구조나 기본 원리를 좀 알고 있는 상태에서 대한민국에 왔고 또 컴퓨터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아버지의 선택이 지금의 제 직업으로까지 이어진 거죠. 아버지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어요.”
“김정은, 완전히 다른 정치할 것처럼 굴어”
소년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학업 능력이 아니라 신분이 대학 진학의 최우선 기준인 사회, 그 정도 토대는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다. 1지망은 김일성대 경영학과였다. 그런데 군사학교로 가야만 했다.
“북한은 초등학교가 4년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2012년이거든요. 그런데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죽죠. 그러니까 모든 남자가 다 군대에 가야 한다며 ‘집단 탄원’이라는 걸 시켰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10년 군사 생활을 한다? 인생의 장기 계획이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한순간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군 입대 대신 군부대 소속 군사학교에 들어갔다. 2년 정도 그곳에서 지내다 보니 ‘도저히 여긴 아니다, 미래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김정일이 죽었을 때 북한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울고불고 난리였지만 제 또래 친구들은 ‘죽었네, 잘됐네’ 뭐 이런 식이었죠. 근데 이런 상황에 뭔가 집단적 강요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니까 ‘이게 도대체 뭔 지랄이야’라며 욕하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 북한 청년들이 전부 다 ‘무조건 군대 간다. 나는 총·폭탄이 되어 싸우겠다’라고 한 것이 아니었군요.
“김정은이 처음 나왔을 땐 정말 센세이셔널했어요. 모란봉악단이 나와서 춤추고 영어 섞인 노래 부르고, 자기 아빠랑은 완전히 다른 정치를 할 것처럼 굴었죠. 와이프도 데리고 나오고… 사람들이 다 혹했어요. 왜냐하면,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쪽에도 마케팅 전공자, 미디어 조작 전문가가 있나 봐요. 처음에는 주민들이 변화의 조짐을 느꼈지만 그건 얼마 못 갔습니다.”
― 그래서 더더욱 북에는 미래가 없구나 느끼고 탈북한 겁니까.
“맞아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 기대했지만 결국 다 보여주기식이라는 걸 알고 탈북했습니다.”
군사학교 졸업 직전 탈북
김씨 족속의 세습은 3대를 넘어 4대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실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까.
“김정은이도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쌍합니다. 저렇게 갇힌 곳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잖아요. 북한은 김정은에게도 쇠창살 없는 감옥일 겁니다. 미사일 쏘며 거기서 발악하고 있잖아요.”
― 당시에 부모님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부모님도 이해 불가였죠. 왜냐하면, 아들이 오랫동안 공부를 해왔고 대학에 가서 졸업 후 군대 3년 마치고… 하는 식으로 같이 세워놓은 플랜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닥치니까 많이 당황하셨죠.”
가정적 배경이 대단한 친구들은 현역 입대가 아니라 군사학교나 다른 수단을 택했다. 박성렬은 2년간 군사학교를 다니다 졸업 직전에 탈북했다.
“졸업하면 4년짜리 국방대학에 가고,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합니다. 북에서 현역 군 생활 없이 장교를 할 수 있는 코스죠.”
그렇다면 언제부터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나아가 탈북까지 결심하게 된 것일까?
“열악한 환경이라면 누구에게나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잖습니까. 북에는 인터넷이 없습니다. 물론 최고위층 연구소엔 있겠지만, 일반인은 사용 불가죠. 웹서핑 없이 그냥 다 소프트웨어 파일을 설치해서 써요. 저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한류(韓流)도 접하고 한국 드라마의 유통 플랫폼 노릇을 했습니다.”
― 사람들이 USB 가져오면 복사도 해주고 돈도 좀 벌고 그랬나요?
“저는 학생이기도 해서 돈은 안 받았어요. 친구들과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뿌듯했죠. 많은 한국 드라마를 접하면서 ‘저기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행동하라’
― 현실과 드라마는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죠. 하지만 드라마 내용도 내용이지만, 높은 수준의 드라마를 만드는 엄청난 기술력, 자유로운 상상력에 푹 빠졌습니다.”
― 기억나는 드라마가 있습니까.
“제일 재미있게 봤던 건 SBS에서 방영한 〈신기생뎐〉(2011)입니다. 주인공인 부잣집 아들이 자기 차 몰고 스키장에 가는 장면이 나와요. 북한에선 자기 자가용 몰고 스키장 가서 스키복 쫙 차려입고 보드 타고 스키 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걸 보면서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막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류는 어느 정도나 퍼졌습니까.
“한국에서 본방송하고 며칠 안 돼서 바로 들어왔습니다.”
2014년 탈북 직전에 본 영화가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였다. 태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올 때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이 영화를 틀어줘서 감회가 새로웠다. 동네 바보로 위장한 남파 간첩의 이야기다. 위험한 레퍼토리다. 김일성 사진에 피가 튀는 〈공동경비구역 JSA〉, 북한 사회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층의 실상과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KBS 드라마 〈진달래꽃 필 때까지〉(1998)는 보다가 걸리면 그대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처벌 수위가 높은 영화다.
여기 남아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들어
― 누구나 꿈을 꾸는데, 꿈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상당히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탈북 계획이라든가 시기, 혼자 갈지 부모님과 같이 갈지 등등 구체적인 계획은 어떻게 세웠습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행동하라.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제 부모님 말씀입니다. 졸업하면서 군 생활을 연장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니까 확실히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이렇게 여기 남아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준비했습니다.”
― 어떻게요?
“부모님이 한국으로 탈북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통해 탈북민들과 통화했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두만강만 넘어오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도와주겠다고 하셨죠.”
― 무섭지는 않았습니까.
“얼어붙은 강 위를 걷는데 딱! 딱! 하고 총소리가 나는 겁니다. 정말 날개가 달린 것처럼 정신없이 뛰어서 철조망을 획 넘었죠. 그러고 바로 중국 도로를 가로질러 산에 들어가 숨어 있었어요. 밤새 총소리가 계속 났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죠. 그게 얼음 깨지는 소리란 것을요.”
― 왜 혼자 왔습니까.
“외아들이니까 혼자 올 수밖에 없었죠.”
― 부모님을 설득해 같이 올 생각은 안 했나요?
“부모님은 그때 거기서 사업을 하고 계셨고,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됐어요. 제 미래를 위해 저만 가라고 한 겁니다.”
― 성렬씨가 탈북하면 부모님이 행불자 가족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를 사망 처리했는데 나중에 제 탈북 사실이 알려진 겁니다. 두 분 다 잡혀가서 두들겨 맞고 장사 물품 다 뺏기고 고초를 많이 겪으셨다고 해요. 지금은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북한식 농사는 기계가 아니라 인력에 의존한다. 화력(火力)이 부재하고 근력(筋力)이 지배하는 사회다. 손으로 몸으로 비료나 퇴비를 쥐고 메고 들과 산을 다녀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만큼 돈을 모아 부모님께 보낸다. 중간 연락책이 50~60%를 떼어가지만 그래도 일부라도 가는 것이 어디냐고 위로한다. 언제까지 도와드릴 수 있을지 몰라 갑갑하고 죄송하다.
“잘살아라. 언젠간 꼭 만나자”던 아버지
― 부모님께 남으로 가고 싶다고 얘기하셨나요?
“그렇죠. 한 2년 정도 설득했습니다. 처음엔 ‘네가 뭐가 부족해서 간다는 거냐?’고 하셨어요. 어쨌든 먹고살 수 있고 또 군사학교 가고… 또 그 나름대로 그 세상에서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도 특권(特權)이거든요. 그런데 그 특권이 문제였습니다. 몸은 북한 체제에 있지만 생각은 한국에 있었으니까요.”
― 탈북에 성공해 여기 와 있으니까 다행인데, 회령이면 탈북하다가 중국에서 잡혀 북송(北送)당한 사람들도 많잖아요.
“부모님은 그게 걱정이었던 거죠. 외아들인데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설득에 2년이 걸렸고, 부모님이 뇌물을 써서 북중 접경지대 장교들이 뒤를 봐줬습니다. 도강(渡江)은 쉬워도 그다음 길이 문제잖아요? 부모님도 같이 왔으면 좋은데 그 길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아서 혼자 왔습니다.”
― 탈북 전 마지막 날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가 저를 배웅해 주셨습니다. 잘살아라. 언젠간 꼭 만나자.”
― 어머니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방에 들어가서 혼자 많이 우셨어요. ‘남조선 가서 우리 아들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저는 지난 10년 동안 진짜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어요.”
꼭 해보고 싶었던 편의점 알바
2014년 8월 만 20세 때 한국 땅을 밟았다. 공부가 하고 싶어 숭실대학교 컴퓨터학과에 입학했다. 16학번이다.
― 대학교 입시는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대안학교 다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며 준비했습니다. 한국에 오면 꼭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어요. 드라마에 나오는 대학생들 편의점 아르바이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거든요.”
― 또 다른 아르바이트로는 어떤 일을 했나요.
“대학원 때까지 여러 일을 했습니다. 주차장, 택배 상하차… 제일 기억나는 건 고깃집 알바입니다. 고기 구워드리고 어르신들 입에도 넣어드리면 꼭 팁을 주시더라고요. ‘감사합니다!’라고 큰 목소리로 깍듯이 인사하면 1장을 더 주시기도 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신 거죠.”
―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저는 중퇴자라서 북한에서의 학력은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수능은 아니고 수시 탈북자 전형으로 입학했어요. 고려대 경영학과에도 합격했는데 양아버지(이현일 북한인권정보센터 북한인권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사무총장)가 문과보다는 이과 가서 전문직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복학생들과 나이가 같았다. 열심히 공부했고 동기 5명과 평생 가는 우정을 쌓았다. 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서 대학 생활 내내 재미있게 지냈다.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독서 동아리, 봉사활동 동아리였다.
“북엔 봉사활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북에 있을 때 자본주의 사회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고 배웠는데 이렇게 따뜻한 모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죠. 숭실대학교 사회공헌팀과 같이 봉사활동을 다녔습니다.”
봉사활동은 졸업 후에도 계속했다. ‘사단법인 새삶’과 함께 10년 동안 독서 모임,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탈북민들은 외롭잖아요. 서로가 기대고 의지하며 삶을 나누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 뿌리 내리고 가지를 펴가는 일이니까요. 그러면서 저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의 활동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7월엔 일본으로 건너가 탈북대학생들과 북한인권 상황을 설명하고 조총련 앞에서 규탄 시위도 했다. 최근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았다. 지난 10월 26일 통일부 장관상을 받은 것이다.
MT 가서 술게임 할 때는 벌칙에 잘 걸렸다. 딸기 당근 멜론 게임 박자를 못 따라갔다.
“신입생 자기소개 때 북한에서 왔다고 얘기했어요. 동기들은 ‘어, 그래?’ 그냥 이 정도 반응이었죠. 제가 뭔가를 물어보면 친구들이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참 잘해줬습니다. 팀플 같은 거 할 때는 제가 항상 대장 노릇을 했어요. 프로젝트를 주도해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통일 후 데이터 통합 방안 고민
학부 졸업 후엔 직장과 대학원 생활을 병행했다. 어렵지 않았다. 열심히 일했고 남는 시간에 무언가를 더 하고 싶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아주대학교 MBA 박호환 원장님이 탈북민들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어요. 제 전공에 맞춰 IT 비즈니스를 전공했습니다.”
간암 진단을 받았을 때 대학, 대학원 동기들이 십시일반으로 몇백만원 넘게 모금해 줬다. 건강을 회복해 은혜를 갚을 생각이란다.
― 대학원 공부의 묘미는 뭡니까.
“어떤 분야를 깊이 파고든다는 겁니다. 전공 이야기 나눌 때는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일할 때도 정말 많이 도움이 됐죠.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전공자들끼리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진짜 즐겁게 공부했고 정말 재미있었어요.”
― 전공을 살려 취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기관이 복지부 산하 공공기관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개발·관리하는 곳입니다. 예를 들면, 보건증이라고도 하죠? 건강증명서, 건강 진단서 발급하는 일을 제가 했어요. 보건증도 작년쯤 건강진단 결과서로 개편됐는데 그 작업도 제가 했고요. 그 증명서가 있어야 식당 같은 곳에서 일할 수가 있습니다.”
― 그런 일을 하면서 대학원을 다닌 거네요.
“네. 그런데 IT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나니까 큰 그림이 보이는 거예요. 정부의 큰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통일 후 인적 정보라든지 주민 정보 같은 북한의 데이터를 무리 없이 통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미리 전산화 준비를 잘 하면 혼란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겠다. 각각의 데이터를 활용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보조금을 어떻게 집행할지, 주민 재교육은 어떻게 할지 등등의 구체적인 대안이 나오는 거죠.”
― 저는 통일 후 어느 정도의 사회, 경제, 문화적 혼란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미리 준비해 북한 주민들의 학력이나 범죄 정보, 기타 데이터를 우리 전산 시스템으로 잘 흡수하면 통일 후 혼란은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사용자들의 피드백받을 때 뿌듯”
탈북 청년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대한민국이 강한 게 이거잖아요. 건강진단 결과서 발급받는 데 2~3일밖에 안 걸립니다. 다른 나라는 일주일에서 보름, 심지어는 한 달 정도 걸려요. 우리나라만큼 빠른 곳이 없습니다. 이게 힘이에요. 저희 개발자들, 또 기관 직원 분들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건강보험공단이랑 연계해 이 사람의 데이터를 가져오고 수급자 바우처 등을 지급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죠. 국민이 버튼만 누르면 편하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겁니다.”
그의 직장은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쭉 다녔다. 4년 차 전산 개발자다. 그는 기관의 애로사항도 하소연했다.
“개발자들이 최근 몇 년간 굉장히 핫했잖아요. 돈 많이 번다고. 지금도 그렇죠. 초등학생들도 다 코딩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기관, 공공기관의 개발자들은 많이 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술력이 뛰어나고 회사에 남아 정부 일을 해야 할 분들이 많이 빠져나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 박봉이지만 보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용자들이 편하다고 피드백 주실 때 정말 뿌듯합니다. 직접 글도 올려주시고 전화로 조언해 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건의사항 받아 적어 개발에 반영하면 제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직장 상사들이 많이 예뻐해 주나요?
“부장님이 특히 알아서 척척 일 잘한다고 늘 얘기해 주십니다. 부하 직원의 적극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는데, 저랑 성격이 잘 맞습니다.”
― 회사에서는 탈북민이라는 걸 압니까.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고 그래요. 그렇다고 제가 한 명 한 명 다 찾아가서 ‘저 탈북민입니다’ 할 필요는 없는 노릇이고….”
“처음 간암 판정받았을 때 의외로 덤덤”
이렇게 정신없이 잘 살았는데 갑자기 암에 걸렸다. 2개월 전부터 뭔가 체한 거 같기도 하고 위가 좀 굳는 느낌이 있었다. 건강검진받는 김에 검사했더니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상당히 퍼져 있다고 했다. 간암 4기. 이식도 안 되고 절제도 불가능하다.
“폐, 담낭, 대정맥 쪽으로도 전이되고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론 너무 멀쩡해 보여서 사람들이 저보고 나일론 환자라고 농담하기도 합니다.”
병원에선 방사선 색전술 치료를 제안했다. 회당 약 2000만원 정도 치료비가 나오는데 회사 동료와 동문들이 열심히 모금 중이다.
“탈북민이 다 그렇지만, 월급 받아서 저축 좀 하고 북의 부모님에게 보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참 감사하게도 많은 지인이 도와주셨어요.”
인생을 잘 살았다는 증거들…
보험을 안 들어서 치료비를 온전히 부담해야 한다. 아예 보험 들 생각을 못 했다. 항암(抗癌) 치료는 견딜 만할까?
“너무 힘듭니다. 일단 항암 치료 1차 주사 링거를 한 3시간 정도 맞아요. 맞을 때는 별 느낌이 없는데 집에 오면 메스껍고 울렁거리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온 내장이 그냥 다…. 이틀 정도 지나면 좀 괜찮아집니다.”
― 지금 이 상황이 원망스럽지는 않습니까.
“처음 판정받았을 때 의외로 덤덤했어요. ‘아, 내가 너무 정신없이 살았구나….’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고민도 했습니다. 장기 기증 절차도 알아봤어요. 주변에 있는 많은 분이 기도와 격려를 해주시고 병문안도 와주셔서 지금은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를 챙겨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박성렬이 그만큼 인생을 잘 살았다는 증거다.
“미국에 있는 한인나눔운동(KASM) 나승희 대표님도 여러 번 도와주셨고 항상 먼저 연락을 주셔서 ‘뭐 먹었니, 오늘은 뭐 했니’ 이렇게 계속 살펴주세요. 부모님은 곁에 없지만, 멋진 어른들이 제 곁에 있고 항상 저를 지켜주려고 하시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하나 약사님도 저를 끔찍하게 잘 챙겨주십니다. 성격이 소탈하셔서 그냥 친어머니처럼 저를 후려 패기도 하시죠. 진심으로 모금 활동도 해주셨어요. 반찬 해서 집에도 여러 차례 오셨고 같이 자기도 하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감사드려요.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아서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거 정말로 다 했어요”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간암 판정을 받은 후 북에 계신 부모님과 아직 연락을 못 했다는 사실이다. 연락이 온다 해도 걱정이지만,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근데 과연 제가 이걸 뭐라고 어떻게 얘기해야 해요? 빨리 치료해서 그냥 없었던 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꿈을 꿉니다. 연락이 와도 북에서 도청할지 모르니까 말을 조심해야 해요. 은어도 쓰고 그럽니다.”
― 함부로 얘기할 수 없고 편하게 말 못 하실 텐데, 정말 편하게 부모님과 통화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나중에 이 기사를 보게 되실 무렵엔 저도 아마 건강해져 있을 거지만, 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허락해 주시고 항상 용기 잃지 말라고 자신감 불어넣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물론 제가 완치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만약에라도 제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아들은 여기서 해볼 거 다 해봐서 원 없습니다. 고향 집을 떠날 때 얘기한 것처럼, 하고 싶은 거 정말로 다 했어요. 그리고 너무 죄송합니다.’”
마지막 말은 그의 명백한 실수다. 박성렬은 ‘죄송하다’가 아니고 ‘앞으로 꼭 만나자’라고 했어야 한다.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래 살아 통일 후 남북 통합전산망 구축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부모님 자가용에 태워 모시고 스키장도 다녀와야 한다. 스키장에서 라면도 먹고 눈밭에서 넘어지고 구르기도 해야 한다. 북에 있을 때 해보고 싶던 거 다 해봤다지만, 남에 와서 새로 생긴 하고 싶은 일은 아직 다 못 했을 것 아닌가. 이런 청년이 빨리 사라진다는 건 불공평한 일이다. 간암은 박성렬 인생의 쉼표일 것이다. 결코 마침표가 아닐 것이다.⊙
백살구 열매의 추억
― 고향은 어디인가요.
“함경북도 회령시(會寧市)입니다. 소설가 고(故) 최인훈 선생님, 배우 이순재 선생님이 회령 분이라고 들었어요. 지성호 전 의원도 회령 출신이죠. 한 집 건너 한 명이 탈북하고, 다 무슨 행불자 가족이고 그런 곳입니다.”
― 동네 사람들이 많이 탈북해서 덜 외롭겠네요.
“그렇기는 한데,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서럽습니다.”
― 언제 그런가요.
“제가 처음 한국에 와서 TV를 보는데 〈6시 내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제 고향은 나올 수 없죠. 잠깐이라도 갈 수가 없으니까요. 혼자서 머릿속으로 ‘6시 내 고향-회령편’을 찍습니다. 여기 벚꽃이 만개하듯이 회령에선 백살구꽃이 만발하지요.”
어릴 때부터 백살구 열매를 먹은 것은 모든 회령 사람의 공통된 추억이다. 익기도 전에 따 먹는 것이 포인트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이런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돌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그곳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이 자꾸 생각나요. 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통일 이후에 그 친구들의 삶을 보상해 주고 싶습니다. 체제는 밉지만, 사람까지 미워할 수는 없으니까요.”
1994년생이면 이른바 ‘고난의 행군’ 복판에서 태어난 세대다.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지만, 북한 전역에서 80만~300만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한 지옥 같은 시절이다.
“제 기억은 유치원 때부터인데, 그래도 그때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습니다. 부모님이 열심히 장사하셨어요. 아버지는 평양에 가 계셨고, 어머니는 평양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맛내기 장사를 하셨죠. 조미료가 맛내기입니다. 평양에서 맛내기를 가져다 시골 가서 팔고, 값으로 감자나 옥수수를 받아 도시에서 또 팔았죠. 달력도 사 와서 팔고.”
― 달력도 돈이 됩니까.
“시골에선 모든 물자가 귀하니까요. 달력이 화보처럼 예쁘니까 집 꾸미는 데도 쓰고, 종이가 두꺼우니까 재활용을 많이 합니다. 어머니가 일찍부터 장사하러 다녀서 저는 밥은 굶지 않고 자랐어요.”
“아버지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어”
박성렬은 외동아들이다. 부모님 본인은 굶더라도 아들만큼은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준 걸 그때부터 알았다.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저한테 밥 주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그냥 알아서 혼자 드시는데, 어머니 밥그릇에 밥이 없는 겁니다.”
부모님은 동갑이다. 24세에 박성렬을 봤다. 두 분 다 힘든 티를 하나도 내보이지 않았다. 강했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정신이 있었다. 혼자 탈북해서 왔기에 부모님을 못 본 세월이 10년을 넘어간다.
“북한에선 50대 중반이면 노인입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 빨리 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말 잘 먹고 잘 지내시잖아요. 제 회사 부장님을 보면 제 아버지랑 나이 차이가 거의 없는데, 도저히 동년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가끔 부모님과 전화 통화는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됐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짠하다.
“사람이 어떤 곳에서 태어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제 부모님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그렇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전 대한민국에서 간암 판정을 받은 것 자체도 너무 감사합니다. 북이었다면 바로 죽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더 이겨내려고 합니다. 통일돼서 부모님 무조건 다시 만나야죠. 암이 저를 지배할지라도 항상 웃으면서 싸워 이길 겁니다.”
컴퓨터…. 부모님에 대한 추억의 중심에 있는 물품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집 재산의 한 70% 정도를 팔아 컴퓨터를 사다 주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본체와 모니터를 들고 오던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평양에 오래 있었던 아버지가 “앞으로는 컴퓨터 시대다. 컴퓨터를 모르면 살아갈 수 없다”라며 거금을 투자한 것이다.
“컴퓨터를 배우고, 아버지와 게임도 같이 했어요. 그렇게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TV에 나오는 해커 수준은 절대 아니고 컴퓨터 구조나 기본 원리를 좀 알고 있는 상태에서 대한민국에 왔고 또 컴퓨터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아버지의 선택이 지금의 제 직업으로까지 이어진 거죠. 아버지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어요.”
“김정은, 완전히 다른 정치할 것처럼 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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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렬씨는 숭실대 재학 중 독서모임 등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
“북한은 초등학교가 4년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2012년이거든요. 그런데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죽죠. 그러니까 모든 남자가 다 군대에 가야 한다며 ‘집단 탄원’이라는 걸 시켰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10년 군사 생활을 한다? 인생의 장기 계획이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한순간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군 입대 대신 군부대 소속 군사학교에 들어갔다. 2년 정도 그곳에서 지내다 보니 ‘도저히 여긴 아니다, 미래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김정일이 죽었을 때 북한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울고불고 난리였지만 제 또래 친구들은 ‘죽었네, 잘됐네’ 뭐 이런 식이었죠. 근데 이런 상황에 뭔가 집단적 강요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니까 ‘이게 도대체 뭔 지랄이야’라며 욕하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 북한 청년들이 전부 다 ‘무조건 군대 간다. 나는 총·폭탄이 되어 싸우겠다’라고 한 것이 아니었군요.
“김정은이 처음 나왔을 땐 정말 센세이셔널했어요. 모란봉악단이 나와서 춤추고 영어 섞인 노래 부르고, 자기 아빠랑은 완전히 다른 정치를 할 것처럼 굴었죠. 와이프도 데리고 나오고… 사람들이 다 혹했어요. 왜냐하면,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쪽에도 마케팅 전공자, 미디어 조작 전문가가 있나 봐요. 처음에는 주민들이 변화의 조짐을 느꼈지만 그건 얼마 못 갔습니다.”
― 그래서 더더욱 북에는 미래가 없구나 느끼고 탈북한 겁니까.
“맞아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 기대했지만 결국 다 보여주기식이라는 걸 알고 탈북했습니다.”
군사학교 졸업 직전 탈북
김씨 족속의 세습은 3대를 넘어 4대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실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까.
“김정은이도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쌍합니다. 저렇게 갇힌 곳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잖아요. 북한은 김정은에게도 쇠창살 없는 감옥일 겁니다. 미사일 쏘며 거기서 발악하고 있잖아요.”
― 당시에 부모님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부모님도 이해 불가였죠. 왜냐하면, 아들이 오랫동안 공부를 해왔고 대학에 가서 졸업 후 군대 3년 마치고… 하는 식으로 같이 세워놓은 플랜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닥치니까 많이 당황하셨죠.”
가정적 배경이 대단한 친구들은 현역 입대가 아니라 군사학교나 다른 수단을 택했다. 박성렬은 2년간 군사학교를 다니다 졸업 직전에 탈북했다.
“졸업하면 4년짜리 국방대학에 가고,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합니다. 북에서 현역 군 생활 없이 장교를 할 수 있는 코스죠.”
그렇다면 언제부터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나아가 탈북까지 결심하게 된 것일까?
“열악한 환경이라면 누구에게나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잖습니까. 북에는 인터넷이 없습니다. 물론 최고위층 연구소엔 있겠지만, 일반인은 사용 불가죠. 웹서핑 없이 그냥 다 소프트웨어 파일을 설치해서 써요. 저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한류(韓流)도 접하고 한국 드라마의 유통 플랫폼 노릇을 했습니다.”
― 사람들이 USB 가져오면 복사도 해주고 돈도 좀 벌고 그랬나요?
“저는 학생이기도 해서 돈은 안 받았어요. 친구들과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뿌듯했죠. 많은 한국 드라마를 접하면서 ‘저기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행동하라’
― 현실과 드라마는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죠. 하지만 드라마 내용도 내용이지만, 높은 수준의 드라마를 만드는 엄청난 기술력, 자유로운 상상력에 푹 빠졌습니다.”
― 기억나는 드라마가 있습니까.
“제일 재미있게 봤던 건 SBS에서 방영한 〈신기생뎐〉(2011)입니다. 주인공인 부잣집 아들이 자기 차 몰고 스키장에 가는 장면이 나와요. 북한에선 자기 자가용 몰고 스키장 가서 스키복 쫙 차려입고 보드 타고 스키 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걸 보면서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막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류는 어느 정도나 퍼졌습니까.
“한국에서 본방송하고 며칠 안 돼서 바로 들어왔습니다.”
2014년 탈북 직전에 본 영화가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였다. 태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올 때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이 영화를 틀어줘서 감회가 새로웠다. 동네 바보로 위장한 남파 간첩의 이야기다. 위험한 레퍼토리다. 김일성 사진에 피가 튀는 〈공동경비구역 JSA〉, 북한 사회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층의 실상과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KBS 드라마 〈진달래꽃 필 때까지〉(1998)는 보다가 걸리면 그대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처벌 수위가 높은 영화다.
여기 남아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들어
― 누구나 꿈을 꾸는데, 꿈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상당히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탈북 계획이라든가 시기, 혼자 갈지 부모님과 같이 갈지 등등 구체적인 계획은 어떻게 세웠습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행동하라.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제 부모님 말씀입니다. 졸업하면서 군 생활을 연장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니까 확실히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이렇게 여기 남아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준비했습니다.”
― 어떻게요?
“부모님이 한국으로 탈북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통해 탈북민들과 통화했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두만강만 넘어오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도와주겠다고 하셨죠.”
― 무섭지는 않았습니까.
“얼어붙은 강 위를 걷는데 딱! 딱! 하고 총소리가 나는 겁니다. 정말 날개가 달린 것처럼 정신없이 뛰어서 철조망을 획 넘었죠. 그러고 바로 중국 도로를 가로질러 산에 들어가 숨어 있었어요. 밤새 총소리가 계속 났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죠. 그게 얼음 깨지는 소리란 것을요.”
― 왜 혼자 왔습니까.
“외아들이니까 혼자 올 수밖에 없었죠.”
― 부모님을 설득해 같이 올 생각은 안 했나요?
“부모님은 그때 거기서 사업을 하고 계셨고,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됐어요. 제 미래를 위해 저만 가라고 한 겁니다.”
― 성렬씨가 탈북하면 부모님이 행불자 가족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를 사망 처리했는데 나중에 제 탈북 사실이 알려진 겁니다. 두 분 다 잡혀가서 두들겨 맞고 장사 물품 다 뺏기고 고초를 많이 겪으셨다고 해요. 지금은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북한식 농사는 기계가 아니라 인력에 의존한다. 화력(火力)이 부재하고 근력(筋力)이 지배하는 사회다. 손으로 몸으로 비료나 퇴비를 쥐고 메고 들과 산을 다녀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만큼 돈을 모아 부모님께 보낸다. 중간 연락책이 50~60%를 떼어가지만 그래도 일부라도 가는 것이 어디냐고 위로한다. 언제까지 도와드릴 수 있을지 몰라 갑갑하고 죄송하다.
“잘살아라. 언젠간 꼭 만나자”던 아버지
― 부모님께 남으로 가고 싶다고 얘기하셨나요?
“그렇죠. 한 2년 정도 설득했습니다. 처음엔 ‘네가 뭐가 부족해서 간다는 거냐?’고 하셨어요. 어쨌든 먹고살 수 있고 또 군사학교 가고… 또 그 나름대로 그 세상에서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도 특권(特權)이거든요. 그런데 그 특권이 문제였습니다. 몸은 북한 체제에 있지만 생각은 한국에 있었으니까요.”
― 탈북에 성공해 여기 와 있으니까 다행인데, 회령이면 탈북하다가 중국에서 잡혀 북송(北送)당한 사람들도 많잖아요.
“부모님은 그게 걱정이었던 거죠. 외아들인데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설득에 2년이 걸렸고, 부모님이 뇌물을 써서 북중 접경지대 장교들이 뒤를 봐줬습니다. 도강(渡江)은 쉬워도 그다음 길이 문제잖아요? 부모님도 같이 왔으면 좋은데 그 길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아서 혼자 왔습니다.”
― 탈북 전 마지막 날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가 저를 배웅해 주셨습니다. 잘살아라. 언젠간 꼭 만나자.”
― 어머니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방에 들어가서 혼자 많이 우셨어요. ‘남조선 가서 우리 아들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저는 지난 10년 동안 진짜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어요.”
꼭 해보고 싶었던 편의점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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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 졸업식 때 친구들과 환호하는 박성렬씨 (오른쪽 끝). |
― 대학교 입시는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대안학교 다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며 준비했습니다. 한국에 오면 꼭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어요. 드라마에 나오는 대학생들 편의점 아르바이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거든요.”
― 또 다른 아르바이트로는 어떤 일을 했나요.
“대학원 때까지 여러 일을 했습니다. 주차장, 택배 상하차… 제일 기억나는 건 고깃집 알바입니다. 고기 구워드리고 어르신들 입에도 넣어드리면 꼭 팁을 주시더라고요. ‘감사합니다!’라고 큰 목소리로 깍듯이 인사하면 1장을 더 주시기도 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신 거죠.”
―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저는 중퇴자라서 북한에서의 학력은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수능은 아니고 수시 탈북자 전형으로 입학했어요. 고려대 경영학과에도 합격했는데 양아버지(이현일 북한인권정보센터 북한인권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사무총장)가 문과보다는 이과 가서 전문직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복학생들과 나이가 같았다. 열심히 공부했고 동기 5명과 평생 가는 우정을 쌓았다. 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서 대학 생활 내내 재미있게 지냈다.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독서 동아리, 봉사활동 동아리였다.
“북엔 봉사활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북에 있을 때 자본주의 사회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고 배웠는데 이렇게 따뜻한 모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죠. 숭실대학교 사회공헌팀과 같이 봉사활동을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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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렬씨는 지난 10월 26일 사단법인 새삶 창립 10주년을 맞아 탈북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인정받아 김영호 통일부 장관으로부터 최우수상을 받았다. |
“탈북민들은 외롭잖아요. 서로가 기대고 의지하며 삶을 나누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 뿌리 내리고 가지를 펴가는 일이니까요. 그러면서 저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의 활동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7월엔 일본으로 건너가 탈북대학생들과 북한인권 상황을 설명하고 조총련 앞에서 규탄 시위도 했다. 최근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았다. 지난 10월 26일 통일부 장관상을 받은 것이다.
MT 가서 술게임 할 때는 벌칙에 잘 걸렸다. 딸기 당근 멜론 게임 박자를 못 따라갔다.
“신입생 자기소개 때 북한에서 왔다고 얘기했어요. 동기들은 ‘어, 그래?’ 그냥 이 정도 반응이었죠. 제가 뭔가를 물어보면 친구들이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참 잘해줬습니다. 팀플 같은 거 할 때는 제가 항상 대장 노릇을 했어요. 프로젝트를 주도해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통일 후 데이터 통합 방안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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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렬씨는 아주대 경영대학원에 진학, IT 비즈니스를 전공(마케팅 부전공)하고 졸업했다. |
“정말 감사하게도 아주대학교 MBA 박호환 원장님이 탈북민들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어요. 제 전공에 맞춰 IT 비즈니스를 전공했습니다.”
간암 진단을 받았을 때 대학, 대학원 동기들이 십시일반으로 몇백만원 넘게 모금해 줬다. 건강을 회복해 은혜를 갚을 생각이란다.
― 대학원 공부의 묘미는 뭡니까.
“어떤 분야를 깊이 파고든다는 겁니다. 전공 이야기 나눌 때는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일할 때도 정말 많이 도움이 됐죠.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전공자들끼리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진짜 즐겁게 공부했고 정말 재미있었어요.”
― 전공을 살려 취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기관이 복지부 산하 공공기관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개발·관리하는 곳입니다. 예를 들면, 보건증이라고도 하죠? 건강증명서, 건강 진단서 발급하는 일을 제가 했어요. 보건증도 작년쯤 건강진단 결과서로 개편됐는데 그 작업도 제가 했고요. 그 증명서가 있어야 식당 같은 곳에서 일할 수가 있습니다.”
― 그런 일을 하면서 대학원을 다닌 거네요.
“네. 그런데 IT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나니까 큰 그림이 보이는 거예요. 정부의 큰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통일 후 인적 정보라든지 주민 정보 같은 북한의 데이터를 무리 없이 통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미리 전산화 준비를 잘 하면 혼란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겠다. 각각의 데이터를 활용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보조금을 어떻게 집행할지, 주민 재교육은 어떻게 할지 등등의 구체적인 대안이 나오는 거죠.”
― 저는 통일 후 어느 정도의 사회, 경제, 문화적 혼란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미리 준비해 북한 주민들의 학력이나 범죄 정보, 기타 데이터를 우리 전산 시스템으로 잘 흡수하면 통일 후 혼란은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사용자들의 피드백받을 때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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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렬씨는 한국사회보장정보원에 근무하면서 관련 프로그램 개발을 담당했다. |
“우리 대한민국이 강한 게 이거잖아요. 건강진단 결과서 발급받는 데 2~3일밖에 안 걸립니다. 다른 나라는 일주일에서 보름, 심지어는 한 달 정도 걸려요. 우리나라만큼 빠른 곳이 없습니다. 이게 힘이에요. 저희 개발자들, 또 기관 직원 분들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건강보험공단이랑 연계해 이 사람의 데이터를 가져오고 수급자 바우처 등을 지급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죠. 국민이 버튼만 누르면 편하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겁니다.”
그의 직장은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쭉 다녔다. 4년 차 전산 개발자다. 그는 기관의 애로사항도 하소연했다.
“개발자들이 최근 몇 년간 굉장히 핫했잖아요. 돈 많이 번다고. 지금도 그렇죠. 초등학생들도 다 코딩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기관, 공공기관의 개발자들은 많이 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술력이 뛰어나고 회사에 남아 정부 일을 해야 할 분들이 많이 빠져나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 박봉이지만 보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용자들이 편하다고 피드백 주실 때 정말 뿌듯합니다. 직접 글도 올려주시고 전화로 조언해 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건의사항 받아 적어 개발에 반영하면 제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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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렬씨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작년에 열린 제1회 광진사랑 김치축제에 참여, 김치를 만드는 봉사활동을 했다. |
“부장님이 특히 알아서 척척 일 잘한다고 늘 얘기해 주십니다. 부하 직원의 적극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는데, 저랑 성격이 잘 맞습니다.”
― 회사에서는 탈북민이라는 걸 압니까.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고 그래요. 그렇다고 제가 한 명 한 명 다 찾아가서 ‘저 탈북민입니다’ 할 필요는 없는 노릇이고….”
“처음 간암 판정받았을 때 의외로 덤덤”
이렇게 정신없이 잘 살았는데 갑자기 암에 걸렸다. 2개월 전부터 뭔가 체한 거 같기도 하고 위가 좀 굳는 느낌이 있었다. 건강검진받는 김에 검사했더니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상당히 퍼져 있다고 했다. 간암 4기. 이식도 안 되고 절제도 불가능하다.
“폐, 담낭, 대정맥 쪽으로도 전이되고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론 너무 멀쩡해 보여서 사람들이 저보고 나일론 환자라고 농담하기도 합니다.”
병원에선 방사선 색전술 치료를 제안했다. 회당 약 2000만원 정도 치료비가 나오는데 회사 동료와 동문들이 열심히 모금 중이다.
“탈북민이 다 그렇지만, 월급 받아서 저축 좀 하고 북의 부모님에게 보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참 감사하게도 많은 지인이 도와주셨어요.”
인생을 잘 살았다는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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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항암주사를 맞는 박성렬씨. 암을 극복하고 북한의 부모님들과 만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
“너무 힘듭니다. 일단 항암 치료 1차 주사 링거를 한 3시간 정도 맞아요. 맞을 때는 별 느낌이 없는데 집에 오면 메스껍고 울렁거리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온 내장이 그냥 다…. 이틀 정도 지나면 좀 괜찮아집니다.”
― 지금 이 상황이 원망스럽지는 않습니까.
“처음 판정받았을 때 의외로 덤덤했어요. ‘아, 내가 너무 정신없이 살았구나….’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고민도 했습니다. 장기 기증 절차도 알아봤어요. 주변에 있는 많은 분이 기도와 격려를 해주시고 병문안도 와주셔서 지금은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를 챙겨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박성렬이 그만큼 인생을 잘 살았다는 증거다.
“미국에 있는 한인나눔운동(KASM) 나승희 대표님도 여러 번 도와주셨고 항상 먼저 연락을 주셔서 ‘뭐 먹었니, 오늘은 뭐 했니’ 이렇게 계속 살펴주세요. 부모님은 곁에 없지만, 멋진 어른들이 제 곁에 있고 항상 저를 지켜주려고 하시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하나 약사님도 저를 끔찍하게 잘 챙겨주십니다. 성격이 소탈하셔서 그냥 친어머니처럼 저를 후려 패기도 하시죠. 진심으로 모금 활동도 해주셨어요. 반찬 해서 집에도 여러 차례 오셨고 같이 자기도 하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감사드려요.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아서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거 정말로 다 했어요”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간암 판정을 받은 후 북에 계신 부모님과 아직 연락을 못 했다는 사실이다. 연락이 온다 해도 걱정이지만,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근데 과연 제가 이걸 뭐라고 어떻게 얘기해야 해요? 빨리 치료해서 그냥 없었던 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꿈을 꿉니다. 연락이 와도 북에서 도청할지 모르니까 말을 조심해야 해요. 은어도 쓰고 그럽니다.”
― 함부로 얘기할 수 없고 편하게 말 못 하실 텐데, 정말 편하게 부모님과 통화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나중에 이 기사를 보게 되실 무렵엔 저도 아마 건강해져 있을 거지만, 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허락해 주시고 항상 용기 잃지 말라고 자신감 불어넣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물론 제가 완치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만약에라도 제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아들은 여기서 해볼 거 다 해봐서 원 없습니다. 고향 집을 떠날 때 얘기한 것처럼, 하고 싶은 거 정말로 다 했어요. 그리고 너무 죄송합니다.’”
마지막 말은 그의 명백한 실수다. 박성렬은 ‘죄송하다’가 아니고 ‘앞으로 꼭 만나자’라고 했어야 한다.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래 살아 통일 후 남북 통합전산망 구축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부모님 자가용에 태워 모시고 스키장도 다녀와야 한다. 스키장에서 라면도 먹고 눈밭에서 넘어지고 구르기도 해야 한다. 북에 있을 때 해보고 싶던 거 다 해봤다지만, 남에 와서 새로 생긴 하고 싶은 일은 아직 다 못 했을 것 아닌가. 이런 청년이 빨리 사라진다는 건 불공평한 일이다. 간암은 박성렬 인생의 쉼표일 것이다. 결코 마침표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