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김활란 박사 조카손녀 이강옥氏)
⊙ “한 대학의 총장이 학생 성상납시킬 수 있다는 학자적 상상력에 기함”(김혜숙 전 이화여대 총장)
⊙ “김활란 박사, 학생 전쟁 동원 막으려 동분서주… 1953년 졸업생은 2~3명 불과”(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
⊙ 김준혁 근거로 든 논문에 ‘성접대’ 표현 없어… ‘위문(entertain)’은 ‘접대’, ‘여성 주최자(hostess)’는 ‘호스티스’로 번역돼 사실 왜곡
⊙ “영어 좀 하고, 옷 말끔히 입고, 지프 타면 ‘양××’라 손가락질받던 시절”(김활란 박사 조카손녀 이강옥氏)
⊙ “한 대학의 총장이 학생 성상납시킬 수 있다는 학자적 상상력에 기함”(김혜숙 전 이화여대 총장)
⊙ “김활란 박사, 학생 전쟁 동원 막으려 동분서주… 1953년 졸업생은 2~3명 불과”(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
⊙ 김준혁 근거로 든 논문에 ‘성접대’ 표현 없어… ‘위문(entertain)’은 ‘접대’, ‘여성 주최자(hostess)’는 ‘호스티스’로 번역돼 사실 왜곡
⊙ “영어 좀 하고, 옷 말끔히 입고, 지프 타면 ‘양××’라 손가락질받던 시절”(김활란 박사 조카손녀 이강옥氏)
- 2024년 4월 4일 오후 이화여대 총동창회 회원들이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 앞에서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당시 후보의 ‘이대생 성상납’ 막말을 규탄하고 후보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 현장. 사진=조선DB
여든이 훌쩍 넘은 조카손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했다.
“이모할머니의 사랑은 유난스럽지 않고, 잔잔했어요. 지금도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은은한 사랑 갚을 길이 없다고요.”
평생 독신(獨身)으로 산 김활란 박사(1899~1970년·이화여대 초대 총장)에게 이강옥(86) 선생은 몇 안 되는 유족이다. 살아생전 추억이 있는 가장 가까운 혈연(血緣)이다. 여느 이모할머니와 조카손녀 지간과는 달랐다. 각별했다는 말도 부족하다고 했다. 결혼 전 모친(母親)을 여읜 이 선생에게 김 박사는 할머니이자, 엄마였다.
“저희 딸들 이름을 지어주셨고, 남편과 결혼한 것도 할머니 덕분이었습니다. 저희 언니에게 생전 엄마가 저희에게 어떻게 해주셨는지 일일이 물어보시고, 제 취향에 맞춰 약혼식까지 손수 치러주셨습니다. 남편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만큼, 시동생들까지 네가 공부를 시킬 생각으로 결혼 생활에 임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할머님 말씀 따라 시동생들 대학 공부와 시집, 장가까지 다 보냈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철석같이 지켰어요. 할머니 말씀은 제게 하나님 말씀 다음이었으니까요. 언젠가 만나면, 올해는 시동생이 2학년이겠구나, 그맘때는 뭐가 필요하겠다, 하며 일일이 챙겨주셨지요. 참 세심하고, 자상하셨습니다.”
이강옥 선생 또한 이화여대 출신이다. 1961년 간호대를 졸업했다. 둘은 신촌 지근거리에 살며 왕래가 잦았다고 했다.
“댁에서 잔치 음식을 하시면 소반에 담아서 꼭 우리 집에 보내주셨죠. 간호학과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이대부속병원으로 실습 나가기 전 할머님께서 댁으로 불러 갔더니, 초침 있는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셨어요. 병원에서 일하려면 초침을 봐야 한다면서요. 그 시계를 워낙 애지중지했던 터라 손을 씻을 때마다 베갯잇에 넣어두고 갔었는데, 어느 날 화장실을 다녀와 보니 없어졌어요. 60년도 넘은 일인데, 그 시계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아른합니다.”
지난 4월. 그런 할머니의 이름이 언론지상에 도배됐다. 이 선생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눈물만 줄줄 흘렀다”고 했다.
김활란 박사 유족, 고소 결심
역사학자 출신인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신대 교수이던 지난 2022년 8월 “전쟁에 임해 나라에 보답한다며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김활란”이라며 “미군정 시기(1945년 9월 9일~1948년 8월 15일)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 장교에게 성(性)상납시키고 그랬다”고 주장했다. 유튜브 방송 ‘김용민 TV’에 출연해서다. 구독자 73만 명인 채널이다. 이 말은 4·10 총선을 앞둔 지난 4월 1일 언론에 재조명됐다.
각지에서 후보 사퇴 규탄 시위가 이어졌다. 이화여대 측은 다음 날인 4월 2일 공식 입장문을 내고 김준혁 당시 후보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했다. 총동창회는 사퇴를 촉구하는 온·오프라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1만 명이 넘는 동문들이 참여했다. 김활란 박사가 창립한 한국여성단체협의회도 “피고소인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저급한 언행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에게 치욕감과 모욕감을 줬다”고 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종주했고 수원(정)에서 당선됐다. 이강옥 선생은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을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면서 “살아생전 저희 엄마도 할머니를 둘러싼 갖은 폄훼(貶毁)로 그리 분노하셨는데, 해도 너무한다 싶어 고소를 결심했다”고 했다.
“韓 여성 걸어온 길 전체 모독한 것”
유족의 사자(死者)명예훼손 고소와 더불어 은퇴한 이화여대 교수들도 명예훼손 고발에 나서기로 했다. 김숙희(87) 전(前) 교육부 장관과 제16대 이화여대 총장을 역임한 김혜숙 전 총장이 주축이다. 이들은 소송 배경에 대해 “그저 좌시(坐視)하고 있으면 앞으로도 이런 방식의 왜곡이 횡행하게 될 것”이라며 “법적 처분 여부는 이후 문제고, 사실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지난 6월 5일 뇌졸중으로 마비된 왼쪽 다리를 이끌고 인터뷰 장소에 나온 김숙희 전 장관은 “울화가 치밀어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앞서 지난 4월에는 불편한 몸으로 ‘김준혁 규탄 대회’에도 합류했다. 이화여중, 이화여고, 이화여대를 나온 그는 이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38년을 재직했다. 김활란 박사 이래 이화여대의 7번째 박사로, 김영삼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지금은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내가 김활란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 중 하나다. 4학년 때 선생님의 ‘여성과 직업’이란 강의를 직접 들었다. 선생님은 이대생뿐 아니라 한국 모든 여성의 롤모델이었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던 시절 김활란 선생님의 일생은 한국의 여성사 그 자체다. 이화의 역사가 없었다면 한국 여성 교육과 여성의 지위 향상도 없었다고 할 만큼 이화여대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도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김준혁 의원의 ‘김활란 박사 이화여대생 미군 장교 성상납’ 망언은 이화여대와 수만 명의 동문을 모욕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 여성이 걸어온 길 전체를 모독한 게 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하나.”
“그의 학자적 상상력에 기함”
이날 함께 자리한 김혜숙 전 총장은 “김준혁 의원의 발언을 들었을 때 역대 총장 중 한 명으로서 진저리 같은 느낌이 차올랐다”고 했다. 김 전 총장은 이화여대 72학번으로 1987년 철학 교수 부임 이래 약 반세기 동안 이대에 몸담았다. 총장직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맡았다. 이대 학생들 손으로 뽑은 첫 직선제 총장이었다.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김 의원의 학자적 상상력 속에서는 한 대학의 총장이 자신의 학생들을 성상납시킬 수 있는 존재고, 이화여대생들은 총장이 시키면 그저 따르는 객체로 자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함했다. 본인도 학자니, 자신의 제자들과의 관계에 한 번이라도 대입(代入)해봤다면 그럴 수는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한 나라의 대표 교육기관에서 그런 방식의 일이 있었다고 상정할 수가 있나. 비단 여성들뿐만이 아니다. 법학 전공의 모(某) 남성 교수 또한 해당 발언을 듣고 교육자로서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혹자는 김준혁 의원 규탄에 대해 ‘역사적인 사건을 젠더 문제로 포장해 공격한다’고 하더라. 우리가 정치적인 이해나 분노를 통해 이 사건을 당파적(黨派的) 이슈로 만들었다는 뜻인데 이는 전후 관계를 교묘히 비튼 말이다. 역사적 사실로 포장한 허위의 발언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에 젠더 갈등의 프레임을 씌워서는 안 된다.”
근거 없는 막말이란 비판이 쏟아지자 김준혁 의원은 후보 시절 짤막한 사과와 반박 글을 올렸다. 지난 4월 2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그는 “친일 인사들의 문제가 되는 행적,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성 착취를 강요했던 숨겨진,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나는 국회의원 후보자 신분 이전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학자”라면서 “학문적 논거 없이 일방적인 주장은 하지 않는다. 부디 ‘막말’이라고 폄훼하는 저의 주장에 대한 논거를 꼼꼼하게 검토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몇몇 언론보도와 제3자의 블로그 글, 그리고 논문 두 편을 첨부했다.
근거 논문에 ‘성상납’ 표현 없어
논문은 이임하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 2004년 학술지 《역사연구 제14호》에 게재한 〈한국 전쟁과 여성성의 동원〉이라는 연구논문이다. 김준혁 의원은 이 논문을 첨부하며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은 ‘낙랑클럽(낙랑구락부)’이라는 미군 장교 및 외교관 대상 고급 사교모임을 운영하며 성접대를 주도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첨부 자료 113~114쪽을 보면 김활란, 모윤숙 등이 여성들을 미군 장교나 외교관, 민간 외국인 유흥에 동원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젊은 여성들이 ‘성(性)을 매개로 한 파티’에 동원되어 시중을 들거나 유흥을 돕는 등의 행위가 당대 지도자 위치에 있던 인물인 김활란, 모윤숙 그리고 이승만의 지원 등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고 했다.
해당 논문을 살펴보면, 110~117쪽에 걸쳐 한국 전쟁 기간 김활란·모윤숙 등 일부 여성 지도자가 미군 장교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의 ‘파티 대행업’에 나섰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당시 한국 정부가 모윤숙이 조직한 ‘낙랑클럽’에서 여성들을 동원해 미군 장교와 외교관들을 상대로 유흥을 제공하며 로비와 정보 수집을 했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김 박사가 이대 학생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했다고 볼 만한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논문 116쪽에는 “김활란이나 모윤숙에 의해 동원된 젊은 여성들이 파티에서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미 사회는 미군과 자주 접촉하는 그녀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구절이 있다.
김준혁 의원이 근거로 제시한 또 다른 논문은 김신화·송정경이 2015년 여간첩 김수임에 대해 다룬 영문 논문인데, 이 논문에서 다룬 낙랑클럽의 내용은 앞서 언급한 이임하 논문의 인용구다.
낙랑클럽 회원은 기혼여성
낙랑클럽은 1948년 발족한 민간 교류 모임이다. 제3차 유엔총회에 참가했던 모윤숙(1910~1990년) 작가가 외교·문화 차원의 국제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해 결성을 주도했다. 김활란 박사 등 여류 명사 30여 명이 이름을 올렸다.
김숙희 전 장관은 “1948년 1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장인 인도인 정치가 메논이 처음 방한했을 때만 해도 그는 한국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에 부정적이었다”면서 “그러나 한국에서 만난 모윤숙과 이승만의 거듭된 설득으로 유엔소총회에서 단독 선거안이 통과하게 됐다”고 했다.
이때 모윤숙과 메논의 만남을 이어준 단체가 낙랑클럽으로 알려져 있다. 클럽의 회원은 영어를 구사하는 25~40세 전문학교 이상 학력의 기혼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민간외교 활동과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의 구호·원호 활동을 했다. 회원들의 자부심도 컸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전숙희 작가도 그중 하나다. 한길사가 2005년 펴낸 《8·15의 기억-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에 실린 전숙희 작가의 글의 일부다. 제목은 ‘낙랑클럽이 한국을 알렸어요’다.
〈그러니까 나라를 위한 일이죠. 서로 우선 대화를 나누고 심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가까운 친구가 되도록, 그래야 친구가 될 것 아니겠어요. 미군들은 일본의 속국으로만 알았던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예술, 미풍양속 등을 거의 낙랑클럽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한국이 동양의 아름다운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런 식으로 해방 후에 낙랑클럽이 한 일이 많아요. 한국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다른 나라하고는 모르겠지만,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가까이하는 데는 낙랑클럽이 공헌한 게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낙랑클럽 관여 금시초문”
이러한 낙랑클럽에 김활란 박사는 고문(顧問)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 실질적인 활동은 없었다는 게 가까운 원로의 증언이다. 김활란 박사가 《코리아타임스》 사장이던 당시 2년간 그곳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김세영(95) 전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는 “김활란 박사가 낙랑클럽에 관여했다는 것은 금시초문(今始初聞)”이라고 했다.
“당시 내 주위 사람 모두 다 낙랑클럽은 모윤숙 시인께서 결정하고 운영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모윤숙 시인은 1년에 몇 차례 김활란 박사님을 찾아뵙는 여러 제자 중의 한 분이셨다. 낙랑클럽이 학생들을 동원했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학교와 학생에 대해 아무 권한이 없는 졸업생이 학생들을 동원할 수 있었겠는가?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김숙희 전 장관은 “김활란 선생님보다 스물한 살 어린 모윤숙 작가가 클럽 운영을 위해 김활란 선생님을 쉽게 오라 가라 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준혁 의원의 반박 다음 날. 조상호 더불어민주당 법률위원회 부위원장은 김 의원을 두둔하고 나섰다. 조 위원장은 지난 4월 3일 한 방송에 출연해 미국 방첩부대(CIC)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하며 “김활란 등이 이끈 낙랑클럽은 고급 접대부 호스티스 클럽”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 위원장이 근거로 든 미군 방첩부대 보고서 원문[미군 CIC 정보 보고서: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2(중앙일보현대사연구소, 1996)]에도 ‘성상납’이나 ‘성접대’를 했다는 표현은 없다. 보고서는 1950년대 나돌던 낙랑클럽 내 ‘공식 매춘부’ 존재설과 관련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낙랑클럽(Nang Nang Club)은 여성들이 1948년 또는 1949년 서울에서 귀빈, 한국 정부와 육군 고위 인사, 외국 정부 인사 등을 즐겁게 할(entertain) 목적으로 조직한 사교 모임”이었고 “회원은 주로 이화여대를 졸업한 고학력 여성으로, 미모가 뛰어나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뛰어난 주최자(hostesses)였다”고 했다.
김숙희 전 장관은 “영어에 서툰 이들이 원문의 ‘위문(entertain)’은 ‘접대’로, ‘여성 주최자(hostess)’를 ‘호스티스’로 번역하면서 사실이 왜곡된 것”이라고 했다.
“영어 좀 하면 매춘부라 의심받던 시절”
이강옥 선생은 “내 부친이 6·25 당시 군산 경비 해군 사령관을 지내, 우리 집에서도 미군들이 와 여러 차례 연회를 즐겼다”면서 “그때는 영어 좀 하고, 옷 말끔히 입고, 미군의 지프에서 내리면 무조건 ‘양(洋)××(매춘부를 속되게 이르는 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이 선생은 이어 “우리 집에 미군들이 오가니, 나 또한 학교 아이들로부터 ‘양××’라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역사학자라는 인물이 당시 시대상도 분별 못 하니, 참담할 뿐”이라고 했다.
김혜숙 전 총장은 “현시대에 이르러 일부 남성들이 가진 성문화인 ‘호스티스’를 과거 특정 사건에 투사시켜 본질을 달리 규정한 것은 지적인 방식이라 볼 수 없으며, 나아가 굉장히 천덕스러운 발상”이라면서 “무엇보다 역사학자라는 전문 신분을 활용해 대중을 호도(糊塗)했다는 게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내가 총장이 되자마자 부딪힌 문제가 김활란 박사 동상을 철거하자는 학생들의 요구였다. 그때 학교 역사를 본격적으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김활란 박사 관련 자료 포함 역사서 다수를 찾아봤다. 한일합방 이전의 복잡한 역사 지형을 정리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고, 이 사건 자체가 가진 의미도 여럿일 수 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부터, 근대사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며, 또 여성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분명한 건 위안부 문제 등 한국 여성의 수난사는 있었고, 북한의 기쁨조와 탈북여성의 인신매매를 보면, 한반도 여성의 성 착취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가운데 김준혁 의원은 자신의 발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숨겨진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라는 말을 하며 ‘사실’이 아닌 ‘해석’에 근거한 사료(史料)들을 제시했다. 대중은 역사학자가 한 말이니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김활란 박사가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발언도 그중 하나다. 김혜숙 전 총장은 “김활란 선생이 당시 학도병(學徒兵) 동원을 독려한 일은 있었고, 이와 관련 1차 사료도 남아 있다”면서 “그러나 위안부 참여 독려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했다. 그는 “윤정옥 선생님께 ‘김활란 선생님이 위안부 동원 독려를 한 일이 있느냐’고 여쭤봤더니 ‘전혀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고 했다. 윤정옥(99) 전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초대 대표로, 교수 재직 당시 사비를 털어 일본군 위안부 실태 조사에 나선 인물이다. 김숙희 전 장관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윤정옥 선생님 댁 근처에 살았다. 어느 날 놀러 갔더니, 윤 선생님께서 김활란 선생님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셨다. 일본놈들이 김활란 선생님을 끌고 가 ‘이화생도 전쟁에 동원되도록 연설하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일본놈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학생들에게 달려가 여기서 빨리 도망가라고, 고향집으로 내려가든 어디든 가라고 재촉했다고 한다. 그래서 1953년 무렵 졸업생은 두 명인가, 세 명인가밖에 없다. 선생님이 다 도망을 시켜서다.”
김혜숙 전 총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김준혁 의원의 과거 강의를 찾아봤는데, 정조에 관심이 없던 시기 정조를 연구한 업적은 훌륭하다고 느꼈다”면서 “정조 이후 근대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수차례 책도 쓴 분이 김활란 선생의 위안부 독려가 사실이 아니란 걸 몰랐다고 보기 어려웠다. 만일 몰랐다면 학자로서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저것은 한국 여성의 아우성이다’
김활란 박사는 한국 여성운동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1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됐다. 이후 여성 교육의 발전과 여성의 지위 향상, 농촌계몽, 구국운동, 국제외교, 사회봉사, 복음화운동에 힘썼다. 1927년 여성의 지위 향상과 민족독립투쟁을 위한 근우회 창설을 주도했고, 1939년 제7대 이화여전 교장으로 취임한 뒤 1946년 이화여대의 종합대학 승격을 이뤄냈다.
한국 전쟁 당시인 1950년에는 민간 외교기구인 ‘전시국민홍보 외교동맹’을 만들었고 정부 공보처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무렵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도 발행했다. 이 또한 민간홍보외교 차원이었다. 1949년부터는 7차례 UN총회에 참석해 문화외교사절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여성 권익을 위해 한국 YWCA(1922), 독립촉성애국부인회(1945), 대한민국여학사협회(1950), 한국여성단체협의회(1959) 등을 조직했다.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1965)에 따르면 이화학당 재학 시절 기도를 하던 중 “저것은 한국 여성의 아우성이다. 어째서 네가 저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느냐? 건져야 한다. 그것만이 너의 일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국 여성을 위해 자신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1963년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같은 해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1970년 70세의 일기로 타계한 후에는 대한민국 일등 수교훈장이 추서(追敍)됐다.
“죽는 순간까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이강옥 선생은 “여느 사람은 할머님의 교육열을 결코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라면서 “내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 축하금을 건네시면서 ‘장학적금의 씨앗이 되도록 하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때 받은 장학적금의 씨앗은 지금까지 숱한 열매를 맺었다. 이 선생 부부는 김활란 박사의 가르침에 따라 익명으로 교회와 대학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장학금을 받은 이들이 대학교수가 되기도 했다. 이 선생의 자제들 또한 기부와 기증이 몸에 뱄다고 한다. 할머니 유산의 대물림인 셈이다. 이 선생은 “이모할머님은 죽는 순간까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일 것”이라며 “그 사랑 갚을 길은 없지만, 할머님의 선한 영향력만큼은 자자손손 퍼지길 늘 기도한다”고 했다. 이 선생은 이어 “비록 소송이 계기가 됐지만, 이렇게라도 할머니와의 기억을 언론에 남기게 돼 영광”이라는 말도 했다.
한편 지난 5월 30일에는 제22대 국회가 개원했다. 김준혁 의원은 교육위원회에 배정됐다.⊙
“이모할머니의 사랑은 유난스럽지 않고, 잔잔했어요. 지금도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은은한 사랑 갚을 길이 없다고요.”
평생 독신(獨身)으로 산 김활란 박사(1899~1970년·이화여대 초대 총장)에게 이강옥(86) 선생은 몇 안 되는 유족이다. 살아생전 추억이 있는 가장 가까운 혈연(血緣)이다. 여느 이모할머니와 조카손녀 지간과는 달랐다. 각별했다는 말도 부족하다고 했다. 결혼 전 모친(母親)을 여읜 이 선생에게 김 박사는 할머니이자, 엄마였다.
“저희 딸들 이름을 지어주셨고, 남편과 결혼한 것도 할머니 덕분이었습니다. 저희 언니에게 생전 엄마가 저희에게 어떻게 해주셨는지 일일이 물어보시고, 제 취향에 맞춰 약혼식까지 손수 치러주셨습니다. 남편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만큼, 시동생들까지 네가 공부를 시킬 생각으로 결혼 생활에 임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할머님 말씀 따라 시동생들 대학 공부와 시집, 장가까지 다 보냈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철석같이 지켰어요. 할머니 말씀은 제게 하나님 말씀 다음이었으니까요. 언젠가 만나면, 올해는 시동생이 2학년이겠구나, 그맘때는 뭐가 필요하겠다, 하며 일일이 챙겨주셨지요. 참 세심하고, 자상하셨습니다.”
이강옥 선생 또한 이화여대 출신이다. 1961년 간호대를 졸업했다. 둘은 신촌 지근거리에 살며 왕래가 잦았다고 했다.
“댁에서 잔치 음식을 하시면 소반에 담아서 꼭 우리 집에 보내주셨죠. 간호학과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이대부속병원으로 실습 나가기 전 할머님께서 댁으로 불러 갔더니, 초침 있는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셨어요. 병원에서 일하려면 초침을 봐야 한다면서요. 그 시계를 워낙 애지중지했던 터라 손을 씻을 때마다 베갯잇에 넣어두고 갔었는데, 어느 날 화장실을 다녀와 보니 없어졌어요. 60년도 넘은 일인데, 그 시계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아른합니다.”
지난 4월. 그런 할머니의 이름이 언론지상에 도배됐다. 이 선생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눈물만 줄줄 흘렀다”고 했다.
김활란 박사 유족, 고소 결심
![]() |
지난 2022년 8월 ‘김용민 TV’에 출연해 김활란 박사 관련 발언을 하는 김준혁 의원. 사진=MBN 캡처 |
각지에서 후보 사퇴 규탄 시위가 이어졌다. 이화여대 측은 다음 날인 4월 2일 공식 입장문을 내고 김준혁 당시 후보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했다. 총동창회는 사퇴를 촉구하는 온·오프라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1만 명이 넘는 동문들이 참여했다. 김활란 박사가 창립한 한국여성단체협의회도 “피고소인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저급한 언행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에게 치욕감과 모욕감을 줬다”고 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종주했고 수원(정)에서 당선됐다. 이강옥 선생은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을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면서 “살아생전 저희 엄마도 할머니를 둘러싼 갖은 폄훼(貶毁)로 그리 분노하셨는데, 해도 너무한다 싶어 고소를 결심했다”고 했다.
“韓 여성 걸어온 길 전체 모독한 것”
![]() |
김활란 박사의 마지막 제자인 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 사진=월간조선 |
지난 6월 5일 뇌졸중으로 마비된 왼쪽 다리를 이끌고 인터뷰 장소에 나온 김숙희 전 장관은 “울화가 치밀어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앞서 지난 4월에는 불편한 몸으로 ‘김준혁 규탄 대회’에도 합류했다. 이화여중, 이화여고, 이화여대를 나온 그는 이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38년을 재직했다. 김활란 박사 이래 이화여대의 7번째 박사로, 김영삼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지금은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내가 김활란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 중 하나다. 4학년 때 선생님의 ‘여성과 직업’이란 강의를 직접 들었다. 선생님은 이대생뿐 아니라 한국 모든 여성의 롤모델이었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던 시절 김활란 선생님의 일생은 한국의 여성사 그 자체다. 이화의 역사가 없었다면 한국 여성 교육과 여성의 지위 향상도 없었다고 할 만큼 이화여대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도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김준혁 의원의 ‘김활란 박사 이화여대생 미군 장교 성상납’ 망언은 이화여대와 수만 명의 동문을 모욕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 여성이 걸어온 길 전체를 모독한 게 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하나.”
“그의 학자적 상상력에 기함”
![]() |
제16대 이화여대 총장을 역임한 김혜숙 전 총장. 사진=월간조선 |
“김 의원의 학자적 상상력 속에서는 한 대학의 총장이 자신의 학생들을 성상납시킬 수 있는 존재고, 이화여대생들은 총장이 시키면 그저 따르는 객체로 자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함했다. 본인도 학자니, 자신의 제자들과의 관계에 한 번이라도 대입(代入)해봤다면 그럴 수는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한 나라의 대표 교육기관에서 그런 방식의 일이 있었다고 상정할 수가 있나. 비단 여성들뿐만이 아니다. 법학 전공의 모(某) 남성 교수 또한 해당 발언을 듣고 교육자로서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혹자는 김준혁 의원 규탄에 대해 ‘역사적인 사건을 젠더 문제로 포장해 공격한다’고 하더라. 우리가 정치적인 이해나 분노를 통해 이 사건을 당파적(黨派的) 이슈로 만들었다는 뜻인데 이는 전후 관계를 교묘히 비튼 말이다. 역사적 사실로 포장한 허위의 발언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에 젠더 갈등의 프레임을 씌워서는 안 된다.”
근거 없는 막말이란 비판이 쏟아지자 김준혁 의원은 후보 시절 짤막한 사과와 반박 글을 올렸다. 지난 4월 2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그는 “친일 인사들의 문제가 되는 행적,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성 착취를 강요했던 숨겨진,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나는 국회의원 후보자 신분 이전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학자”라면서 “학문적 논거 없이 일방적인 주장은 하지 않는다. 부디 ‘막말’이라고 폄훼하는 저의 주장에 대한 논거를 꼼꼼하게 검토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몇몇 언론보도와 제3자의 블로그 글, 그리고 논문 두 편을 첨부했다.
근거 논문에 ‘성상납’ 표현 없어
논문은 이임하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 2004년 학술지 《역사연구 제14호》에 게재한 〈한국 전쟁과 여성성의 동원〉이라는 연구논문이다. 김준혁 의원은 이 논문을 첨부하며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은 ‘낙랑클럽(낙랑구락부)’이라는 미군 장교 및 외교관 대상 고급 사교모임을 운영하며 성접대를 주도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첨부 자료 113~114쪽을 보면 김활란, 모윤숙 등이 여성들을 미군 장교나 외교관, 민간 외국인 유흥에 동원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젊은 여성들이 ‘성(性)을 매개로 한 파티’에 동원되어 시중을 들거나 유흥을 돕는 등의 행위가 당대 지도자 위치에 있던 인물인 김활란, 모윤숙 그리고 이승만의 지원 등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고 했다.
해당 논문을 살펴보면, 110~117쪽에 걸쳐 한국 전쟁 기간 김활란·모윤숙 등 일부 여성 지도자가 미군 장교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의 ‘파티 대행업’에 나섰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당시 한국 정부가 모윤숙이 조직한 ‘낙랑클럽’에서 여성들을 동원해 미군 장교와 외교관들을 상대로 유흥을 제공하며 로비와 정보 수집을 했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김 박사가 이대 학생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했다고 볼 만한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논문 116쪽에는 “김활란이나 모윤숙에 의해 동원된 젊은 여성들이 파티에서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미 사회는 미군과 자주 접촉하는 그녀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구절이 있다.
김준혁 의원이 근거로 제시한 또 다른 논문은 김신화·송정경이 2015년 여간첩 김수임에 대해 다룬 영문 논문인데, 이 논문에서 다룬 낙랑클럽의 내용은 앞서 언급한 이임하 논문의 인용구다.
낙랑클럽 회원은 기혼여성
낙랑클럽은 1948년 발족한 민간 교류 모임이다. 제3차 유엔총회에 참가했던 모윤숙(1910~1990년) 작가가 외교·문화 차원의 국제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해 결성을 주도했다. 김활란 박사 등 여류 명사 30여 명이 이름을 올렸다.
김숙희 전 장관은 “1948년 1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장인 인도인 정치가 메논이 처음 방한했을 때만 해도 그는 한국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에 부정적이었다”면서 “그러나 한국에서 만난 모윤숙과 이승만의 거듭된 설득으로 유엔소총회에서 단독 선거안이 통과하게 됐다”고 했다.
이때 모윤숙과 메논의 만남을 이어준 단체가 낙랑클럽으로 알려져 있다. 클럽의 회원은 영어를 구사하는 25~40세 전문학교 이상 학력의 기혼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민간외교 활동과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의 구호·원호 활동을 했다. 회원들의 자부심도 컸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전숙희 작가도 그중 하나다. 한길사가 2005년 펴낸 《8·15의 기억-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에 실린 전숙희 작가의 글의 일부다. 제목은 ‘낙랑클럽이 한국을 알렸어요’다.
〈그러니까 나라를 위한 일이죠. 서로 우선 대화를 나누고 심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가까운 친구가 되도록, 그래야 친구가 될 것 아니겠어요. 미군들은 일본의 속국으로만 알았던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예술, 미풍양속 등을 거의 낙랑클럽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한국이 동양의 아름다운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런 식으로 해방 후에 낙랑클럽이 한 일이 많아요. 한국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다른 나라하고는 모르겠지만,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가까이하는 데는 낙랑클럽이 공헌한 게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낙랑클럽 관여 금시초문”
이러한 낙랑클럽에 김활란 박사는 고문(顧問)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 실질적인 활동은 없었다는 게 가까운 원로의 증언이다. 김활란 박사가 《코리아타임스》 사장이던 당시 2년간 그곳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김세영(95) 전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는 “김활란 박사가 낙랑클럽에 관여했다는 것은 금시초문(今始初聞)”이라고 했다.
“당시 내 주위 사람 모두 다 낙랑클럽은 모윤숙 시인께서 결정하고 운영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모윤숙 시인은 1년에 몇 차례 김활란 박사님을 찾아뵙는 여러 제자 중의 한 분이셨다. 낙랑클럽이 학생들을 동원했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학교와 학생에 대해 아무 권한이 없는 졸업생이 학생들을 동원할 수 있었겠는가?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김숙희 전 장관은 “김활란 선생님보다 스물한 살 어린 모윤숙 작가가 클럽 운영을 위해 김활란 선생님을 쉽게 오라 가라 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준혁 의원의 반박 다음 날. 조상호 더불어민주당 법률위원회 부위원장은 김 의원을 두둔하고 나섰다. 조 위원장은 지난 4월 3일 한 방송에 출연해 미국 방첩부대(CIC)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하며 “김활란 등이 이끈 낙랑클럽은 고급 접대부 호스티스 클럽”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 위원장이 근거로 든 미군 방첩부대 보고서 원문[미군 CIC 정보 보고서: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2(중앙일보현대사연구소, 1996)]에도 ‘성상납’이나 ‘성접대’를 했다는 표현은 없다. 보고서는 1950년대 나돌던 낙랑클럽 내 ‘공식 매춘부’ 존재설과 관련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낙랑클럽(Nang Nang Club)은 여성들이 1948년 또는 1949년 서울에서 귀빈, 한국 정부와 육군 고위 인사, 외국 정부 인사 등을 즐겁게 할(entertain) 목적으로 조직한 사교 모임”이었고 “회원은 주로 이화여대를 졸업한 고학력 여성으로, 미모가 뛰어나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뛰어난 주최자(hostesses)였다”고 했다.
김숙희 전 장관은 “영어에 서툰 이들이 원문의 ‘위문(entertain)’은 ‘접대’로, ‘여성 주최자(hostess)’를 ‘호스티스’로 번역하면서 사실이 왜곡된 것”이라고 했다.
“영어 좀 하면 매춘부라 의심받던 시절”
![]() |
지난 2017년 촬영된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옆 김활란 박사 동상. 사진=조선DB |
김혜숙 전 총장은 “현시대에 이르러 일부 남성들이 가진 성문화인 ‘호스티스’를 과거 특정 사건에 투사시켜 본질을 달리 규정한 것은 지적인 방식이라 볼 수 없으며, 나아가 굉장히 천덕스러운 발상”이라면서 “무엇보다 역사학자라는 전문 신분을 활용해 대중을 호도(糊塗)했다는 게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내가 총장이 되자마자 부딪힌 문제가 김활란 박사 동상을 철거하자는 학생들의 요구였다. 그때 학교 역사를 본격적으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김활란 박사 관련 자료 포함 역사서 다수를 찾아봤다. 한일합방 이전의 복잡한 역사 지형을 정리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고, 이 사건 자체가 가진 의미도 여럿일 수 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부터, 근대사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며, 또 여성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분명한 건 위안부 문제 등 한국 여성의 수난사는 있었고, 북한의 기쁨조와 탈북여성의 인신매매를 보면, 한반도 여성의 성 착취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가운데 김준혁 의원은 자신의 발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숨겨진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라는 말을 하며 ‘사실’이 아닌 ‘해석’에 근거한 사료(史料)들을 제시했다. 대중은 역사학자가 한 말이니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김활란 박사가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발언도 그중 하나다. 김혜숙 전 총장은 “김활란 선생이 당시 학도병(學徒兵) 동원을 독려한 일은 있었고, 이와 관련 1차 사료도 남아 있다”면서 “그러나 위안부 참여 독려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했다. 그는 “윤정옥 선생님께 ‘김활란 선생님이 위안부 동원 독려를 한 일이 있느냐’고 여쭤봤더니 ‘전혀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고 했다. 윤정옥(99) 전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초대 대표로, 교수 재직 당시 사비를 털어 일본군 위안부 실태 조사에 나선 인물이다. 김숙희 전 장관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윤정옥 선생님 댁 근처에 살았다. 어느 날 놀러 갔더니, 윤 선생님께서 김활란 선생님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셨다. 일본놈들이 김활란 선생님을 끌고 가 ‘이화생도 전쟁에 동원되도록 연설하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일본놈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학생들에게 달려가 여기서 빨리 도망가라고, 고향집으로 내려가든 어디든 가라고 재촉했다고 한다. 그래서 1953년 무렵 졸업생은 두 명인가, 세 명인가밖에 없다. 선생님이 다 도망을 시켜서다.”
김혜숙 전 총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김준혁 의원의 과거 강의를 찾아봤는데, 정조에 관심이 없던 시기 정조를 연구한 업적은 훌륭하다고 느꼈다”면서 “정조 이후 근대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수차례 책도 쓴 분이 김활란 선생의 위안부 독려가 사실이 아니란 걸 몰랐다고 보기 어려웠다. 만일 몰랐다면 학자로서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저것은 한국 여성의 아우성이다’
김활란 박사는 한국 여성운동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1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됐다. 이후 여성 교육의 발전과 여성의 지위 향상, 농촌계몽, 구국운동, 국제외교, 사회봉사, 복음화운동에 힘썼다. 1927년 여성의 지위 향상과 민족독립투쟁을 위한 근우회 창설을 주도했고, 1939년 제7대 이화여전 교장으로 취임한 뒤 1946년 이화여대의 종합대학 승격을 이뤄냈다.
한국 전쟁 당시인 1950년에는 민간 외교기구인 ‘전시국민홍보 외교동맹’을 만들었고 정부 공보처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무렵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도 발행했다. 이 또한 민간홍보외교 차원이었다. 1949년부터는 7차례 UN총회에 참석해 문화외교사절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여성 권익을 위해 한국 YWCA(1922), 독립촉성애국부인회(1945), 대한민국여학사협회(1950), 한국여성단체협의회(1959) 등을 조직했다.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1965)에 따르면 이화학당 재학 시절 기도를 하던 중 “저것은 한국 여성의 아우성이다. 어째서 네가 저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느냐? 건져야 한다. 그것만이 너의 일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국 여성을 위해 자신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1963년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같은 해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1970년 70세의 일기로 타계한 후에는 대한민국 일등 수교훈장이 추서(追敍)됐다.
“죽는 순간까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이강옥 선생은 “여느 사람은 할머님의 교육열을 결코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라면서 “내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 축하금을 건네시면서 ‘장학적금의 씨앗이 되도록 하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때 받은 장학적금의 씨앗은 지금까지 숱한 열매를 맺었다. 이 선생 부부는 김활란 박사의 가르침에 따라 익명으로 교회와 대학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장학금을 받은 이들이 대학교수가 되기도 했다. 이 선생의 자제들 또한 기부와 기증이 몸에 뱄다고 한다. 할머니 유산의 대물림인 셈이다. 이 선생은 “이모할머님은 죽는 순간까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일 것”이라며 “그 사랑 갚을 길은 없지만, 할머님의 선한 영향력만큼은 자자손손 퍼지길 늘 기도한다”고 했다. 이 선생은 이어 “비록 소송이 계기가 됐지만, 이렇게라도 할머니와의 기억을 언론에 남기게 돼 영광”이라는 말도 했다.
한편 지난 5월 30일에는 제22대 국회가 개원했다. 김준혁 의원은 교육위원회에 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