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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세밑, 기억이 저무는 사람들의 이야기

2024년 치매인구 100만 명 시대… 이들이 살아가는 법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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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수급자 만들어 요양원 입소시킨 딸… 밤새워 우는 老母
⊙ 기억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다… “우리도 고통과 슬픔을 느낍니다”(하세가와 가즈오)
⊙ 배회, ‘집에 내 공간 없다’고 느낀 것… 할 일 빼앗지 말아야(단노 도모후미)
⊙ 알츠하이머 최대 위험인자는 老化… 高齡化가 낳은 병
⊙ 조기 발견·조기 진단으로 비극 막아야… 가족 조력 必
⊙ 편견은 마음속에 있는 것… 치매 사실 알리면 또 다른 삶
⊙ ‘운동·식습관·숙면’… 불치병 알츠하이머 예방법 3가지
연말이 다가왔다. 치매 노인의 ‘바퀴 의자’를 밀어주는 따스한 이웃이 그립다. 사진=조선DB
  가까이서 본 인생은 비극이 맞는 것 같다. 그곳엔 다양한 군상(群像)이 살고 있었다. 다만 보통의 모습과는 달랐다. 구성원은 기억을 잃은 이들이다.
 
  “빨리 집에 가서 쪽파 다듬어야 혀. 장(場)에 내다 팔아야 한단 말이여. 버스 놓치겄어!”
 
  몸이 기역자로 잔뜩 구부러진 노파(老婆)가 애원하듯 말했다. 한 손엔 싸다 만 가방이 들려 있었다. 9년 차 간호조무사 김영경(가명·61)씨의 말이다.
 
  “지난달 새로 오신 91세 할머니예요. 평생 부추 농사를 지어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매일같이 하루 3대 다니는 버스를 타고 읍내 시장에 나가신 거죠. 아직은 이곳에 본인이 갇혀 있다고 여겨요. 버스 올 때 됐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부추 팔아서 아들 용돈 줘야 한다, 하면 보는 저희도 가슴이 쓰립니다.”
 
 
  “또 수프가 나오면 가서 혼쭐을 내줄게요”
 
  전라북도의 한 요양원. 김씨는 “인생이란 게 참, 허무한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들 손을 보면 지문이 하나도 없어요. 젊은 날 꽃핀 줄도 모르고 일만 하다, 결국 저 몸이 돼서도 자식 걱정만 하는 게 참 서글픕니다. 이리될 줄 알았다면, 당신 하고 싶은 것 하고, 좀 즐기며 사시지….”
 
  경기도 한 요양시설의 점심시간. 디귿자로 된 식탁 한 귀퉁이에서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다.
 
  “메뉴가 이게 뭐야? 이게 수프지, 밥이야? 이런 맹물을 먹고 칼로리 보강이 돼? 이걸로 90kg 체력을 유지하겠느냐고. 자꾸 이렇게 나오면 시장(市長)한테 항의할 거야. 여기 손 좀 봐야 되겠어!”
 

  금테 안경 너머 노인의 눈이 희번덕였다. 식판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샐러드와 닭요리, 그리고 국이 놓여 있었다. 이곳 부원장은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가 “어르신 죄송합니다. 이따 저녁에도 또 수프가 나오면 냉큼 저한테 일러주세요. 가서 혼쭐을 내줄게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능숙한 손길로 입가에 묻은 밥풀을 닦아줬다. 역정을 내던 그는 “당신 뭐야? (명찰을 보더니) 부원장이야? 흠. 부원장 정도면 말이 통하겠구먼. 당신 소임을 다해. 앞으로 또 이러면 내 가만히 안 있어”라고 했다. 부원장의 말이다.
 
  “매일 식사시간 때면 나오는 레퍼토리예요. 저작(咀嚼) 기능이 좋지 않아 죽을 드셔야 하는데, 죽이 나왔다고 항의하는 거죠. ‘어르신, 그런데 시장 이름이 뭐였지요?’ 하면 ‘이명박’이라고 하셔요.”
 
  군(軍) 간부 출신이라고 했다. 여든이 넘은 그의 병실에는 곱게 다린 제복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엔 계급장이 없다. 모두 똑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곳에서 밥을 먹는다.
 
 
  興만 남은 자와 毒氣만 남은 자
 
요양원 입소 시 순탄한 합의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어르신들은 평균 3개월 동안 적응기간을 거친다고 한다. 사진은 서울 인근의 한 요양원 모습. 사진=조선DB
  삼시세끼 식사와 오전, 오후 간식. 체조, 그림 그리기 등 프로그램, 그리고 낮잠, 휴식. 같은 일과에 움직이는 이들의 증세는 천차만별이다. 간호조무사 김영경씨가 일하는 곳은 소규모 여성 전문 요양원이다. 10여 명의 입소자 모두 할머니다.
 
  “하루 종일 혼잣말하는 분이 계세요.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네, 잘 지내셨어요. 두 분 오랜만에 만나셨나 봐요’ 하면서 1인 3역(役)을 하시죠. 그런가 하면 과거 외도(外道)를 의심받았던 한 할머니는 허공에 대고 늘 ‘종민(가명) 엄마, 제가 안 그랬어요.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라 하시고요. 교회 성가대였던 분은 종일 박수 치며 찬송가를 부르고, 거기 맞춰 춤만 추시는 분도 계시고요. 흥(興)만 남은 분, 독기(毒氣)만 남은 분, 40대로 회귀하신 분, 일곱 살 때로 돌아가신 분…. 각양각색입니다.”
 
  김씨는 “재미있는 건 이 작은 곳에도 서열이 있다는 것”이라면서 “터줏대감인 98세 할머니가 먼저 수저를 들고, 60대 할머니가 ‘새파랗게 어린것’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그럴 때 한 번씩 웃는다고 했다. 가장 고될 때는 ‘입소자들이 고집을 피울 때’라고 했다.
 
  “인지(認知)가 조금 남아 있는 분들은 자존심 때문에 기저귀를 끝까지 안 차려 합니다. 소변이 줄줄 흐르는데도 끝까지 거부하세요. ‘옆 할머니가 옷을 훔쳐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도 진이 빠지긴 해요. 무조건 달래야 해요. 부정했다가는 폭력성이 나올 수도 있거든요.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이따 꼭 다시 뺏어드릴게요’라고요. 그러면 나중에 또 잊어버리세요. 사람이 아이로 태어나 다시 아이가 됐다 흙으로 가는구나 싶습니다.”
 
  요양원에는 보통 노인장기요양 2~4등급이 많다. 여기서 증세가 심해지거나, 지병까지 겹치면 대부분 요양병원으로 간다. 요양원은 노인복지법을 따르는 생활시설이고, 요양병원은 의료법 규제를 받는 의료시설이다.
 
 
  일기예보 따로 없는 ‘날궂이’
 
  지방의 한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정순애(가명·62)씨의 말이다.
 
  “입원자 중에 무속인 할머니가 계십니다. 당뇨가 심해 눈이 안 보이세요. 곁에 가서 ‘어머님, 안녕하세요’ 하면 목소리만 듣고 ‘거, 고집이 세겠구먼?’ 하시죠. 폭력성이 있고, 욕을 잘해서 ‘욕쟁이 할머니’로도 통합니다. 앞이 안 보이는데도 딸에게 가겠다고 더듬더듬 돌아다니시는데, 위험하다고 저지하면 마구 때리기도 해요. 그땐 어쩔 수 없이 진정제나 수면유도제를 투여합니다.”
 
  이곳 환자들은 평소에도 기복(起伏)이 심하다고 한다. 필라멘트가 닳아버린 전구처럼 기억이 왔다 갔다 해서다. ‘늙으면 죽어야지, 나 좀 죽여줘’ 하다가, 이내 밝게 웃기도 한다.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날궂이라 하죠. 얌전하던 분들도 특히 비 오기 직전에는 이상행동을 하십니다. 벽에 변을 바른다거나…. 저희끼리는 ‘일기예보가 따로 없다’고 할 정도예요.”
 
  언급이 터부시되는 일. 이곳에선 일상(日常)이다.
 
  “누워 있는데, 기저귀에 변이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볼일 보시고 아무렇지 않게 꺼내서 주물주물하다 벽에다 바르거나, 던지는 겁니다. ‘감이다’라며 핥아먹는 경우도 있어요. 우주복(상하의 일체의 옷)을 입히면 방지가 가능하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신체 억제에 포함돼 남용 시 노인 학대에 해당하거든요.”
 
  병원에서 비위관(鼻胃管·콧줄)을 하고 있는 와상 치매(癡呆) 환자는 별도 병실에 있다.
 
  “합병증(合倂症)까지 와 모든 기능이 정상이 아닌 분들이죠. 이런 1등급 환자는 종사자 입장에서 비교적 수월하다고 할 수 있어요. 제일 돌보기 힘든 환자가 2, 3등급입니다. 어느 정도 인지가 있고, 움직임이 비교적 자유로운 경우죠.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게 낙상(落傷)과 질식이에요. 유독 식탐을 부리는 치매 환자들이 있는데, 떡, 귤 같은 음식을 몰래 숨겨놨다가 통째로 삼켜버리십니다. 실제로 저희 병원에서 질식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어요. 넘어지면 소리라도 나지만, 질식은 특히 정말 신경 써야 해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언젠가 〈노인들(Arrugas·2011)〉이라는 스페인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다. 치매 노인 ‘에밀리오’가 아들에게 떠밀리듯 시작한 요양원 생활을 그렸다. 작품 속 노인들은 다들 찬란했던 시절에 빠져 현실의 시간을 거부한다. 그곳에도 터줏대감이 있고, 지갑을 훔쳐갔다는 의심이 있고, 탈출 시도가 있다. 극적(劇的)인 연출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더했다. 늙는다는 건 뭘까.
 
 
 
‘神이 없다는 걸 알게 해준 병’

 
국내 3대 치매 명의 중 하나인 박기형 가천대 길병원 신경과 교수. 알츠하이머병의 가장 큰 위험인자는 노화라고 했다. 사진=길병원
  현재 국내 치매 환자는 약 96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내년엔 100만 명을 훌쩍 넘길 것으로 보인다. 65세 이상 노인(950만 명) 10명 중 1명 이상이 치매다. 발병률(發病率)은 나이가 들수록 높아진다. 80세 이상은 10명 중 3명, 85세 이상은 10명 중 4명꼴이다. 고령화(高齡化)가 낳은 병인 셈이다. OECD 평균의 약 1.7배인 한국의 고령화 속도에 따라 2050년 이 수는 300만 명이 될 전망이다. 한 최고급 실버타운 관계자는 “치매 사실을 숨긴 유명인사와 전직 고위급 인사들도 가끔 눈에 띈다”고 했다. ‘왜 하필 나에게’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현실일 수 있다.
 
  치매의 정의는 이렇다. ‘퇴행성(退行性) 뇌 질환 또는 뇌혈관계 질환에 의해 기억력, 언어 능력, 지남력(指南力), 판단력, 수행 능력 등 기능이 저하돼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후천적 다발성(多發性) 장애.(치매관리법 제2조 제1호)’ 이 중 알츠하이머형 치매는 약 60%, 혈관성 치매는 30%, 루이소체 치매는 10% 미만을 차지한다. 이 밖에도 종류는 다양하다.
 
  박기형 가천대 길병원 신경과 교수는 “그간 살아온 일생을 다 잊어버리고, 자신의 주체성(主體性)까지 상실하는 끔찍한 병”이라고 했다. 그는 국내 3대 치매 명의(名醫) 중 하나다.
 
  ― 혹자는 ‘신(神)이 없다는 걸 알게 해준 병’이라고도 하더군요.
 
  “음….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신의 의도와 달리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전쟁, 전염병의 영향도 있지만, 로마 시대 평균수명은 29~30세였습니다. 1950~60년대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55세 정도였어요. 치매가 오기 전 돌아가신 거죠. 지금은 여기서 30~40년이 늘었는데, 이 증가세는 굉장히 가파른 겁니다. 몸이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어요. 비근한 예로 퇴행성 치매의 대표적인 원인인 알츠하이머병의 위험인자 중 하나가 아포이(ApoE) 유전자 4형입니다. 3형은 보통이고, 2형은 예방 효과를 보이죠. 인간은 안 좋은 유전자들을 버리면서 진화해왔습니다. 이 흐름대로라면, 2형을 가진 사람이 더 많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4형을 가진 사람이 더 많죠.”
 
  ― 치매를 원인불명이라고들 하는데, 노화(老化)가 원인인 겁니까.
 
  “치매를 일으키는 원인은 수십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알츠하이머병의 경우,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의 뇌 침착(沈着)이 대표적인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의 위험인자로는 노화뿐만 아니라 아포이e4·4유전자형, 가족력, 뇌경색, 당뇨, 고·저혈압, 담배 및 다량의 알코올 섭취, 심한 머리 손상 등 다양해요. 가장 큰 위험인자가 노화지만 ‘딱 이 원인 때문에 그렇다’는 건 없어요. 그래서 원인불명이라는 겁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기억
 
  ― 단백질은 필수 영양소인데 왜 뇌에 침착하면 병이 됩니까.
 
  “단백질 종류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아밀로이드’라는 물질은 상당히 끈적끈적한데,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다만 체내에서 일정 역할을 하고 뇌척수액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돼야 하는데, 이게 한 가닥, 두 가닥씩 엉겨 뇌세포에 염증을 유발하고, 독성(毒性)작용이 있다 보니 뇌를 망가뜨리는 겁니다.”
 
  ― 왜 엉기는 겁니까.
 
  “그 또한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걸 알면 치료가 가능할 겁니다.”
 
  ―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왜 최근 기억부터 소실되는 겁니까.
 
  “새로운 사실, 경험 등 단기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인 해마와 뇌피질(腦皮質)이 손상됐기 때문이죠. 잠자는 동안 이 두 요소가 계속 커뮤니케이션하며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고착화(固着化)시키는데, 이게 고장 났기 때문에 새로운 기억이 들어가질 못하는 겁니다. 물론 기억이 문제 되지 않는 치매도 있지만, 알츠하이머병의 경우 이 때문에 이미 저장된 기억은 꺼내 쓸 수 있고, 일화(逸話) 기억은 떠올리지 못합니다.”
 
  ― 이들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건 어떤 성질의 기억입니까. 예컨대 트라우마 같은 겁니까.
 
  “감정이 남는 거죠. 각자에게 가장 중요하게 남은 감정을 다스리는 게 변연계(邊緣系)입니다. 우리 뇌 가장 중심부에 있어 굉장히 나중까지 유지되죠. 정상 상태일 때는 전두엽(前頭葉)이 이 감정을 억제해주지만, 이게 망가지다 보니 본연의 감정들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저마다 다르겠죠.”
 
 
 
시각·청각·후각의 환각

 
  ― 행복하게 살았다면, 듣기 좋은 말을 하겠군요.
 
  “행복이라는 정의는 각기 다르기 때문에 긍정적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만, 치매 후 공격성을 띠는 이들이 모두 부정적인 사고로 살았다는,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도 전혀 검증된 바는 없습니다.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흔히 ‘기억 상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치매 증상은 다양하다. 정영희 명지병원 신경과 교수는 “치매는 기억력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라면서 “배회, 망상(妄想), 환시(幻視), 공격성과 같은 문제행동들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를 행동심리증상(BPSD)이라 한다.
 
  베스트셀러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의 저자인 영국인 치매 환자 웬디 미첼은 책에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치매 후 시각·청각·후각의 환각 현상을 소상히 기록해놨다. 검은 테이블보를 덮어놓은 식탁이 거대한 싱크홀처럼 보이고, 귓전에서 갑자기 경적 소리가 들리고, 휘발유 타는 냄새가 밀려오기도 한다고 했다. 박기형 교수와의 문답이다.
 
  ― 여러 현장에서 보니, 특히 의심되는 증상이 많이 목격되더군요. 왜 나타나는 겁니까.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우선은 기억장애에 기반하는 게 가장 크다고 판단됩니다. ‘여기 뭘 놔뒀는데, 없어졌네. 누가 가져갔지, 그 사람일 거야, 내가 가져가는 것 봤어’라면서 망상이 고착화되는 거죠. 그래서 뭔가를 계속 감추고, 어디에 감췄는지 기억을 못 하니 다시 의심으로 이어지고요. 이러한 망상 증상에 대해서는 워낙 설(說)이 많기 때문에 한 가지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A 때문에 B가 됐다’는 공식은 없어요. 그러면 치료가 가능하겠죠. 다만 중요한 물건은 특정 장소에 두시라고 유도하면 이런 증상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치매에 안 좋다”
 
  정영희 교수는 “치매 환자는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 물건을 숨긴다거나, 주변을 의심하는 행동이 잦아진다”고 했다.
 
  “따라서 치매 환자를 안정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제재가 너무 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안하다고 꼼짝도 못 하게 하면 오히려 더 안 좋아요. 일례로 치매 환자들이 이사를 하면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매 환자의 경우 새로운 걸 학습하는 건 어렵지만, 오랫동안 몸에 밴 건 익숙하거든요. 동네를 걷기도 하고, 현관 비밀번호도 익숙하게 눌렀지만 이사를 가면 그 모든 게 새롭게 다가옵니다. 결국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치매에도 안 좋죠.”
 
  치매 환자들은 대부분 집이나 요양시설에서 산다. 실버타운은 상위 0.5%를 위한 곳일 뿐이다. 서울 거주 50대 여성 송은영(가명)씨는 10년 전 치매 어머니를 경기도의 한 요양원에 모셨다. 입소자 100명 이상인 대규모 시설이다. 올해 90세인 어머니는 70세 때 경도인지장애(치매 전 단계) 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저작 능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6남매 중 막내인 송씨는 어머니의 입소를 크게 반대했다. 나머지 남매들은 “그냥 두면 증상이 더 악화되고, 가족이 힘들어진다”고 했지만 송씨는 ‘6남매 중 엄마를 모실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한다.
 
  “아버지 또한 엄마의 요양원 입소를 반대했어요. 당신이 직접 돌보시겠다면서요. 그렇게 약 10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안 하셨지만, 스트레스가 몸으로 발현되더군요. 각종 질환이 찾아와 더 이상 엄마를 돌볼 수가 없었죠. 이때 ‘아버지의 삶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6년 전, 더 이상 엄마를 혼자 둘 수 없다며 아버지 또한 같은 요양원에 입소하셨습니다.”
 
 
  孝와 不孝 사이
 
강동실버케어센터 외부에 있는 ‘추억의 버스정류장.’ 치매 어르신의 실종을 막기 위한 가짜 버스정류장이다. 사진=월간조선
  이 대목에서 송씨의 목이 메었다. 불효(不孝)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작년 말 기준 요양원 등 노인의료복지시설은 총 6069개소다. 5년 만에 15%가 증가했다. 개수가 늘며 경쟁도 심해졌다. 당사자 집에 직접 찾아가 입소를 설득하기도 한다. 일종의 영업인 셈이다. 요양보호사 박정은(52)씨는 “사는 곳에 직접 가보면, 요양원에 보내는 게 나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시설에 보내는 게 불효 같아서 망설이는 분 댁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치매 당사자가 다 말라비틀어진 밥을 물에 말아 먹고 계시더군요. 위생 상태도 엉망이었고, 화장실도 단차가 너무 높아 위험했어요. 영양사는 물론, 작업치료사, 간호사, 요양보호사까지 있는 요양원이 낫다고 설득했죠. 공동생활하며 함께 어울리면 심리적인 안정에도 훨씬 좋고, 배회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고요. 경찰서에서 입소자들 지문 등록을 하고, 만일 못 찾으면 요양원 책임이기 때문에 실종 방지에 굉장히 적극적이거든요. 요양원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서비스 경쟁이 심해진 것도 어떻게 보면 이점입니다. CCTV는 필수고, 매일 주요 부위 씻겨드리고, 일주일에 한 번 목욕, 손발톱 정리, 한 달에 한번 이발에 더해 체조 등 각종 프로그램까지 저마다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박씨에 따르면 순탄한 합의하에 입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가족 간 갈등은 있기 마련입니다. 늘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어요. 반대파에게 ‘그럼 네가 모시겠느냐’고 하면 해결됩니다. 이후 당사자를 설득해야죠. 그 과정이 가장 어렵습니다. 씁쓸하지만 ‘아버지, 우리 좀 살려주세요’ 하며 읍소 끝에 모시고 오는 분도 있어요. 혹은 ‘엄마, 지금 공사한다고 수도랑 전기가 끊겨서 한동안 집에 못 가요. 당분간만 여기 계세요’라는 거짓말로 모셔다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입소 당일, ‘여기 싫다. 나랑 계속 같이 살자’며 울먹이는 어르신도 계십니다. 그렇게 입소하면, 한동안 잠도 안 주무시고 하루 종일 우세요. ‘왜 나를 감옥에 가둔 거냐’면서요. 수년째 봤지만 매번 눈물 나는 광경입니다. 저희는 이 적응 기간을 3개월로 봐요. 이후부터 ‘있어야 할 곳’임을 아십니다. 그때 친구도 사귀고 하시는 거죠.”
 
 
  수급자가 된 부자 할머니
 
  이런 일도 있다. 최근까지 충청북도 한 요양원에서 근무했던 조선영(가명·43)씨의 말이다.
 
  “보호자들 간 의견 대립도 있지만, 보통은 치매 당사자가 입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요. 치매 중기쯤 되면 병식(病識)이 없어서 치매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든요. 돈 문제도 있습니다. 치매 어르신들은 돈에 굉장히 민감해요. 일하던 곳에 ‘땅부자’로 통하던 90세 할머니가 있었어요. 딸은 엄마를 입소시키려 했는데, 엄마는 돈이 아깝다며 거부했습니다. 결국 딸은 요양원장과 머리를 맞대 그 재산을 모두 본인 앞으로 옮긴 뒤, 엄마를 수급자(收給者)로 만들었습니다. ‘엄마, 수중(手中)에 돈이 없어야 나라에서 돈을 대준대’ 하고 설득한 거죠. 요양원은 입소자 한 명 더 받아서 좋고, 딸은 엄마를 보내서 좋고…. 그렇게 충분히 집에 계셔도 되는 분이 오기도 했어요.”
 
  현재 요양원 환자는 노인장기요양보험 적용 서비스 비용의 20%, 재가(在家) 환자는 15%를 부담하고 있다. 수급자가 되면 여기서 본인부담금을 40~60% 더 경감(輕減)받는다. 조씨가 있던 요양원에는 입소자 50%가 이런 식으로 저소득층이 됐다고 한다. 그는 이 같은 현실에 환멸을 느껴 퇴사했다.
 
  “할머니가 입소 초반에 그러셨어요. 시집가서 벽돌 한 장, 한 장 손수 쌓아 지은 집이라고, 그 집에 가야 한다고, 가게 해달라고요. 어려운 시절 악착같이 모은 돈을 두고 왔으니, 거기 한(恨)이 맺힐 만하죠.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딸이 그 집을 판 줄은…. 부모를 수급자로 만들어 요양원에 보낸 자녀들은 면회도 잘 안 옵니다. 거의 방치된 채 살아가는 거예요.”
 
  조씨는 “‘여기 계시면서 불편한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했던 얘기가 ‘새끼들이 보고 싶은데 잘 안 온다. 선생님, 저 이렇게 살아서 뭐 합니까’였다”고 했다.
 
  “참 신기한 게 뭔 줄 아세요. 아무리 기억을 잃어도 절대 자식 욕은 안 한다는 거예요. 생신 때마저도 면회를 안 왔는데도, 우리 아들 효자라고, 우리 딸 예쁘다고…. 맞장구쳐드리면 그리 좋아하셨어요.”
 
 
  치매 환자를 속이지 마라
 
현민석 강동실버케어센터 사무국장은 “시설에 모실 때 당사자에게 거짓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사진=월간조선
  하세가와 가즈오(94)는 일본의 치매 전문의다. 1974년 세계 최초로 표준 치매 진단검사 ‘하세가와 치매 척도’를 만든 인물인데, 2017년 본인이 치매 판정을 받았다. 이후 발간한 저서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에서 그는 “치매 당사자를 속이지 마라”고 당부했다. 책의 일부다.
 
  “치매 당사자도 다른 사람의 말이 다 들립니다. 고통과 슬픔도 똑같이 느낍니다. 우리를 빼놓고 치매와 관련한 사안을 결정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치부하고 따돌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존재를 부정당하고 멸시받을 때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큰지 누구나 알 겁니다.”
 
  현민석 강동실버케어센터 사무국장 또한 “시설에 모실 때 당사자에게 거짓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보호자분들이 당장 마음이 아파서 둘러대는데, 만일 거짓말을 하면 희망고문처럼 어르신들은 하염없이 기다리십니다. 그때 심경은 놀이동산에 버려지며 ‘엄마 이따 올게’라는 말을 들은 아이의 절망감보다 두세 배는 클 거예요. 굳이 거짓말을 하실 거면 이렇게 하세요. ‘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잘살게끔 해줘서 이제 나라에서 이런 것도 해줘. 물리치료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주고 보일러도 빵빵하게 틀어줘. 면회, 외출, 외박도 되고 친구들도 많은데, 이게 다 공짜래.’ 어르신들이 돈에 굉장히 예민하거든요. 돈 내고 이런 곳에 온다는 것에 거부감이 강하죠. 단식투쟁을 할 정도니까요. 내가 굶는 한이 있어도 이 돈을 자식한테 줘야 한다는 거예요.”
 
 
  “어르신들이 돈에 굉장히 예민해”
 
서울시 공공요양시설인 강동실버케어센터 전경. 중정을 낀 건물은 사계절 변화를 볼 수 있는 통창 구조다. 현재 대기인원이 200명이 넘는다. 사진=월간조선
  강동실버케어센터는 치매 전담 돌봄 체계를 갖춘 서울시 공공요양시설이다. 지난 10월 17일 개원식을 했다. 요양원(89명)과 데이케어센터(28명)로 나뉘어 있다. 요양원의 경우 벌써 대기자가 200명에 달한다. 입소는 무조건 선착순이다. 초 단위까지 판별한다고 한다. 강동구민이 아니라도 입소가 가능하다. 경남 지역에서 온 입소자도 있다. ‘좋은 요양원을 고르는 법’을 묻자 현 사무국장은 “요양원에 가서 어르신들 표정과 요양보호사들의 말투를 보라”고 했다.
 
  “어르신들의 표정은 숨길 수가 없거든요. 요양보호사의 말투는, 존대가 뱄는지 보는 겁니다. 의외로 반말을 하는 분도 많아요. 하나 더 꼽자면 식사입니다. 일반식 기준, 요양원 종사자와 메뉴가 같은지 살펴보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그는 ‘시(市)의 지원과 관리·감독으로 민간보다 다양한 부대시설과 시범사업이 가능하고, 투명하다는 점’을 공공요양시설의 경쟁력으로 꼽았다. 중정(中庭)을 끼고, 통창으로 이뤄진 건물은 마치 유럽의 기숙사처럼 생겼다. 텃밭에서는 허브, 상추, 방울토마토, 깻잎, 고추 등을 직접 기른다.
 
  ― 여기 입소한 분들은 순탄한 합의 과정을 거쳤습니까.
 
  “합의가 안 돼 입소 날짜를 받았다가 취소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재산 문제 등 사연은 다양하죠. 특히 당사자 설득이 안 돼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 저희는 ‘일단 모시고 와서 둘러보라’고 합니다. 서울 시내에 있으니, 마실 나가신다 생각하고요. 그러면 ‘내가 알던 요양원이 아니네’ 하십니다. 안타까운 점은 둘러본 뒤, 댁에 가시면 다 잊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 입소 첫날 보호자들의 표정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걱정이 많죠.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시고요. 댁에서 오래 모셨던 분들은 절차가 수월한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소 경직돼 있는 분이 많습니다. 낙담한 보호자들에게 종종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망각(忘却)이라잖아요. 지금 어르신은 신의 선물을 너무 많이 받으신 거라고, 그러니까 끝까지 행복할 수 있도록 좋은 얘기만 해드리자고.”
 
 
  너도 나도 시설만 찾는다면…
 
양영애 인제대 작업치료학과 교수. 조기 진단의 중요성과 가정돌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요양시설에는 최대한 늦게 보내는 게 좋다”고 하는 전문가도 있다. 양영애 인제대 작업치료학과 교수(고령자치매작업치료학회·대한고령친화산업학회장)다. 양 교수는 치매 어머니의 간병인이기도 하다.
 
  “지난 20년간 친정어머니와 요양원, 요양병원 등을 모두 다녀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말기 이전에 가면 그만큼 증세가 가속화(加速化)돼요. 예컨대 치매 노인들은 대부분 연하 곤란이 발생합니다. 이때 요양시설에서 가장 편한 방법은 콧줄로 식사를 드리는 거예요. 뇌 기능 활성화와 관련된 저작 활동을 원천 차단하는 거죠. 일본에서는 최대한 마지막까지 직접 씹는 식사를 유도합니다. 밥 먹는 데 두 시간이 걸려도 기다려줘요. 또한 말기 환자들을 하루 세 번씩은 무조건 앉힙니다. 한편 우리는 무엇보다 재활이 필요한 치매 노인들을 눕혀만 놓습니다. 건강하던 사람도 일주일간 누워 있으면 근육이 빠지는데, 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급격한 환경 변화도 우려되는 점이라고 했다.
 
  “치매 어르신에게 낯선 환경은 좋지 않습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에 노인공동생활가정(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9인 이하 요양원)을 둔 것도 그 차원이죠. 그런데 그곳마저 가보니, 노인들을 묶어놓은 경우도 있더군요. 아직까지 현장에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너도 나도 시설만 찾으면 결국 국민들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면서 “가정 돌봄이 가능한 환경 조성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간병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치매는 정말 긴 병입니다. 스트레스는 말도 못 하죠. 오죽하면 부모님을 시설에 보내고 ‘숨통이 트인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가정 돌봄이 좀 더 용이해진다면 상황을 개선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방문재활서비스’ 도입과 ‘주택개보수 지원’ 등을 통해서죠. 치매 어르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운동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하기는 힘들어요. 재활을 받고 싶어도 통원이 어렵죠. 그래서 입원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비용이 가장 크게 발생하는 방법입니다. 사회적 모순인 거죠. 해외에서는 이미 방문재활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노인장기요양보험에는 요양보호사가 방문하는 재가서비스는 있지만, 방문 재활은 없죠.
 
  치매 어르신의 주택개보수 지원도 필요합니다. 지금은 저소득층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이마저도 페인트칠만 하고 끝나는 수준입니다. 문턱도 없애고, 복지용구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해요. 지금은 국가에서 지원받은 복지용구가 집 안에 장식품처럼 진열돼 있는 곳이 많습니다. 또 다른 세금 낭비인 거죠.”
 
갈 곳 없는 남성 치매 환자들
 
  여러 노인복지시설을 다녀보니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이용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거다. 일본의 치매 전문의 하세가와 가즈오에 따르면 80세가 지나면 여성의 치매 유병률(有病率)은 현저히 높아진다. 성호르몬과 우울증 경향의 차이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정설(定說)은 아니다. 참고로 우울한 상태에서 치매 발병률은 2~3배 증가한다고 알려져 있다.
 
  남성이 눈에 덜 띄는 또 다른 이유로 이런 분석도 있다. 이들은 한때 가장(家長)이었다. 가족을 제 손으로 먹여 살렸다. 그래서 진단 이후 무력감(無力感)이 배가될 수 있다는 거다. 치매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안모(37)씨의 말이다.
 
  “기업 임원까지 하셨던 분이라, 집 안에서는 늘 어머니 손을 필요로 했습니다. 먹는 것, 옷 입는 것은 물론 사소한 양말 하나, 칫솔 하나까지도요. 아프고 나서는 그 의존성이 더 심해졌어요. 어머니가 시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상당히 불안해합니다. 두 분이 항상 붙어 있어야 하니 데이케어센터는 꿈도 못 꿉니다. 가장 힘든 사람은 어머니죠.”
 
  막상 시설에 간다고 해도, 불편한 점이 있다. 종사원 대부분이 여성이라서다. 한 요양시설 관계자의 말이다.
 
  “의식 없는 말기 치매 외 치매 할아버지들은 가실 곳이 별로 없습니다. 간호사, 조무사, 요양보호사가 거의 여성이니까요. 이들이 목욕시키고, 기저귀 가는 것을 수치스럽다 여기는 경우도 있거든요. 체구가 크고 힘이 세서 만일 폭력성이 나왔을 때 여성 종사자들의 부담도 있는 게 사실이고요. 채용 시 일정 부분 남성 케어 인원이 보장돼야 할 필요성도 느끼는데, 역차별 논란 우려로 그마저도 녹록지 않습니다.”
 
  조기 발견의 중요성
 
정영희 명지병원 신경과 교수. 인지 치료와 같은 비약물적 치료는 경도인지장애와 초기 치매에서 가장 큰 효과를 낸다고 했다. 사진=월간조선
  긴 병인데다, 고치기도 힘든 치매. 그래서 ‘조기 진단은 곧 조기 절망일 뿐’이라는 인식도 있다. 큰 오산이다. 적어도 ‘현상유지’는 가능하다. 현재로선 이게 치료의 핵심이기도 하다. 양영애 교수는 “건강했던 노인이 곧장 치매로 가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경도인지장애 단계를 거친다”면서 “이때 조속히 발견해야 치매로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국내 노인 인구(950만 명)의 4분의 1(약 240만 명)이 경도인지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엄청난 수죠. 만일 여기서 관리를 못 하면 급속히 치매로 넘어갑니다. 경도인지장애의 치매 유병률은 보통 사람의 약 15배 정도입니다. 조기 발견과 조기 치료가 중요한 이유죠.”
 
  치매는 A(ADL·Active Daily Living·일상생활)·B(BPSD·심리정신행동)·C(Cognition·인지 능력)가 모두 이상(異常)인 상태다. 경도인지장애는 이 중 동일 연령 평균에 비해 인지 기능만 약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치매임상평가척도(CDR)에서 0.5~1에 해당한다. CDR 0은 ‘치매가 아님’, 0.5는 ‘치매 의심’, 1은 ‘경도의 치매’, 2는 ‘중등도 치매’, 3은 ‘심한치매’다.
 
  조기 발견과 조기 치료에는 가족이 지대한 역할을 한다. 양 교수의 말이다.
 
  “여기서 ADL(일상생활)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먹고, 씻고, 용변 처리하는 ‘기본적 일상생활’과 청소하고, 요리하는 ‘수단적 일상생활’이죠. 경도인지장애와 치매 초기는 기본적 일상생활은 무리 없지만, 수단적 일상생활에서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살더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서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거죠.”
 
  정영희 명지병원 신경과 교수는 “한 번 치매가 진행되면 가역성(可逆性)이 줄어들기 때문에 경도인지장애 혹은 정상일 때부터 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면서 “은퇴 후 생활이 단조로워지면 치매 증상을 알아차리기 힘들어져 더욱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현민석 강동실버케어센터 사무국장의 말이다.
 
  “‘남의 집 애가 빨리 큰다’는 말이 있죠. 치매도 자주 들여다보지 않으면 ‘남의 집 애’처럼 어느 순간 확 자랄 수 있습니다. 뒤늦게 발견하면 건강, 시간, 비용까지 놓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조기에 발견하려면 가족 간 꾸준한 소통이 중요해요. ‘다녀왔습니다, 씻을게요, 주무세요’가 아니라 ‘오늘은 뭐 하셨어요, 주말엔 뭐 하고 싶으세요’처럼 한마디씩이라도 더 하자는 거죠.”
 
 
  평소 머리를 많이 쓰면
 
명지병원이 운영하는 ‘백세총명학교’의 미술 치료 현장. 기억을 더듬으며 ‘멈칫’하는 손길이 곳곳에서 보이지만 이내 손놀림이 분주해진다. 사진=명지병원
  정영희 교수와의 문답이다.
 
  ― 약물을 일찍부터 쓰면 치매의 악화를 막을 수 있습니까.
 
  “조기 약물 치료의 시점에 대해선 이견이 있어요. 현재 1차 치료제로 쓰는 게 아세틸콜린 억제제인데,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 효과가 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경도인지장애와 치매 초기 환자를 대상으로 ‘아밀로이드’를 없애는 항체 치료약도 나왔는데, 이 또한 인지 기능 증진 효과는 미지수(未知數)라고 한다. 박기형 교수의 말이다.
 
  “현대의학으로는 알츠하이머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완치는 곧 노화를 막겠다는 것과 같은데, 이는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는 얘깁니다. 불가능하죠. 그러나 알츠하이머병을 조절할 수 있게는 될 겁니다. 그게 의학계의 목표이기도 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최선은 좋은 생활습관을 통해 스스로를 관리하는 겁니다.”
 
  ‘좋은 생활습관’이란 운동, 음식 조절, 그리고 숙면이다. 다시 정영희 교수와의 문답이다.
 
  ― 두뇌 활동을 많이 하면 치매 발병이 더뎌지기도 합니까.
 
  “물론입니다. 전문 용어로 ‘인지적 비축(cognitive reserve)’이라고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거나 인지 활동이 많았던 사람은 치매 진행이 늦어집니다. 한편 문맹(文盲)이나 인지 활동을 적게 한 사람은 뇌 기능에 조금만 손상이 와도 치매가 빨리 찾아오죠.”
 
  그러나 밤을 새워가며 머리를 쓴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박기형 교수의 말이다.
 
  “공부하면 뇌가 튼튼해진다는 게 뇌의 가소성(可塑性)을 말하는 건데, 이를 키운다고 밤을 새우면 부작용이 큽니다. 아밀로이드의 60% 이상은 잠잘 때 없어집니다. 기타 뇌 독성 물질들 또한 수면 상태에서 배출되죠. 이때 해마도 회복하고요. 뿐만 아니라, 수면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하수체 호르몬 변화로 야식이 당깁니다. 이는 비만, 당뇨, 혈관 문제를 유발할 거고, 결국 알츠하이머 확률이 올라가죠. 뭐든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 흔히 ‘디지털 치매’라고 하죠. TV나 유튜브 영상을 많이 시청하면 뇌에 악영향이 있습니까.
 
  “이는 진짜 치매라기보다,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게 되면 집중력이 떨어져 기억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걸 의미합니다. TV와 유튜브 시청의 경우 과하면 좋지 않죠.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을 정적(靜的)으로 만들어 신체 기능을 퇴화시킨다는 겁니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가만히 있어도 근육량이 엄청 빠지니, 근력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당신은 제자리걸음만 해’
 
7년 전 치매 판정을 받고 초기 단계를 유지 중인 황선일(88)씨와 그의 부인 김정희씨. 적극적인 극복 의지와 가족의 조력이 주효했다. 사진=월간조선
  지난 2017년 치매 판정을 받은 황선일(88)씨. 가족의 조력과 적극적 극복 의지를 통해 7년째 CDR 1(경도치매) 단계를 유지 중이다. 40년간 교직 생활을 했던 그는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정말 창피해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부인 김정희(84)씨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이거, 걸리면 못 고친다는데, 대소변도 못 가린다는데’ 싶었지만, 남편의 실수에 일부러 ‘아니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장을 했어!’라고 농담을 던졌어요. 그러면서 같이 땅을 치고 울고 웃고…. 아주 똑 부러지는 사람이었어요. 시집와서 와이셔츠를 요일별로 풀을 먹였을 정도라니까요. 그렇게 총명했던 사람이 어린아이가 돼버렸죠. 남편에게 말했어요. ‘여보, 우리는 지금 캄캄한 터널 안에 있어요. 이 터널을 빠져나가려면 우리가 힘을 내야 해요. 밥도 잘 먹고, 용기 잃지 말고, 우리 열심히 잘 해 봅시다.’”
 
  황씨는 명지병원 백세총명치매관리센터에서 꾸준히 음악, 미술, 운동 등 인지 치료를 받았다. 이지희 사회복지사는 황씨를 “숙제도 늘 꼼꼼하게 해오고 인쇄물을 못 받으면 물어볼 정도로 모범생”이라고 했다. 정영희 명지병원 신경과 교수는 “인지 치료와 같은 비약물적 치료는 경도인지장애와 초기 치매에서 가장 큰 효과를 낸다”면서 “센터에서 다른 치매 환자들과 가족들을 만나면서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를 느끼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치매도 삶의 과정이에요”
 
  평소 운동도 열심이다. 김씨는 “남편이 치매에 맞서기 위해 눈물 날 정도로 노력한다”면서 “동네 뒷산에 올라가다가 같은 부위에 낙상만 세 번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황씨는 “치매는 나아지려는 본인 의지와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주변인들은 이해해주는 것, 그 이상 바라는 도움은 없다”고 했다. 부인 김씨의 말이다.
 
  “치매라고 하면 무서운 병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벌써 요양원부터 알아보는 분도 계시지만, 어지간하면 능력을 떠나서 치매와 맞서봐요. 나부터 포기하지 않을게요. 치매도 삶의 과정이에요. 낫지는 못해도 제자리걸음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희가 느꼈어요. 우리 모두 힘내봐요.”
 
  이어 남편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끼지 말고 삽시다.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갈 때 재산 가져가는 거 아니잖아요.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이젠 속 좀 편해도 되잖아요. 당신은 제자리걸음만 해. 더 바라지 않을 테니. 그렇게 살다가 우리 한 날 한 시에 눈감읍시다.”
 
 
  ‘치매와도 함께 살 수 있어’
 
  젊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초로기(初老期) 치매라고 있다. 65세 미만의 나이에 걸리는 치매다. 조발성(早發性) 치매라고도 한다. 정영희 교수에 따르면 국내 치매 환자의 10%가 여기 속한다. 적지 않은 수다. 속성이 더 공격적이라 진행이 빠르다고 알려져 있다. 몇 년 사이 가족을 못 알아보기도 한다.
 
  일본인 단노 도모후미(丹野智文· 49) 씨는 초로기 치매 환자다. 10년 전 39세의 나이에 알츠하이머형 치매 판정을 받았다. 극도의 공포심마저 느꼈다고 한다. 극단적 생각까지 하던 어느 날 치매 당사자 모임에 참석한 그는 “불안을 극복한 이들은 다들 웃는 얼굴로 살고 있었다”며 “치매와도 함께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지난 10월 26일 강동구치매안심센터와 강동구치매가족지원센터가 공동으로 진행한 ‘치매 시민 특강’ 현장에서 만난 단노 씨는 “치매 사실을 드러내야 주변의 지원과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은 치매 예방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만, 저는 예방이 아니라 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진과 마찬가지죠. 만일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치매는 결코 부끄러운 병이 아닙니다. 저 또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면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편견은 마음속에 있는 거더군요. 편견을 당하기도 전에 지레 고민부터 한 겁니다.”
 
  겉으론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그는 딸의 얼굴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한다. 병원에서는 뇌가 수축된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스키를 즐긴다.
 
  “스키를 타다 경로를 이탈하면 불안감이 증폭합니다. 얼굴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일행을 찾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커다란 인형 탈을 쓰고 스키를 탑니다. 멀리서도 친구들이 절 알아볼 수 있도록요.”
 
 
  ‘제가 당신을 기억하니까요’
 
초로기 치매 환자인 일본인 단노 도모후미(49)씨. 치매 당사자가 할 일을 빼앗지 말라달라고 강조했다. 사진=월간조선
  단노 씨는 치매 가족들에게 “치매 당사자를 ‘아무것도 못 하는 환자’로 대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들을 대신해 뭐든 해주려고 하지 마세요. 의존증이 심해지면 나중에 서로 더 힘들어집니다. 스스로 하도록 기다려주세요. 행동을 빼앗지 않아야 진행이 더딥니다. 빵을 태우고, 또 태워도 대신 구워주지 마세요. 다음에는 잘 할지도 몰라요. 언젠가 빵을 안 태우게 되면 ‘성공체험’으로 끝나지만, 태우는 데서 그치면 ‘실패경험’이 됩니다. 우리도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다만 왜 실패했는지 모를 뿐이에요. 치매 당사자는 사소한 말과 분위기에도 불안함을 쉽게 느낍니다. 위축은 또 다른 실패를 낳죠. 그러니 실수할 권리를 빼앗지 말아주세요.”
 
  그는 “일본도 치매 환자들의 배회 문제가 심각한데, 이는 이들 모두 집 안에 ‘내 공간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요리를 즐기던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가족들은 ‘앉아계세요. 제가 할게요’라고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내가 할 일을 빼앗기게 되고,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거죠.”
 
  단노 씨는 또 “치매 당사자에게 기억을 확인하려는 질문을 하지 말아달라”고도 했다.
 
  “‘엄마, 아까 점심 뭐였어?’를 ‘엄마, 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로 바꿔보세요.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때 우리도 불안합니다. 한편 뭐 먹고 싶냐는 질문은 설렘이죠.”
 
  치매 진단 전까지 그는 도요타에서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더 이상 영업은 못 하지만, 치매에 걸린 후에도 여전히 이 회사 소속이다. 사측의 배려로 도요타 소속 ‘치매활동가’라는 직책을 새로 얻었다. 지난 2015년에는 ‘오렌지 도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보호자 없이 치매 당사자들만 참여하는 모임이다. 단노 씨는 “가족들과 함께 모이면 당사자의 발언 기회는 없고, 가족들이 대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그러나 우리끼리 있으면 오히려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함께 공감하고, 폭소하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했다. ‘오렌지 도어’ 구성원들은 함께 치매 관련법을 공부해 정부에 직접 정책 제언을 하기도 한다. 단노 씨는 “치매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며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며 “치매에 걸려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영화로도 제작됐다. 지난 6월 개봉한 〈오렌지 램프〉다. 단노 씨는 “지금까지 일본 치매 영화는 모두 주인공이 죽거나, 시설에 입소하는 결말”이라면서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제작사에 ‘제발 나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며 웃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강연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강연을 다니다 보면 새로 만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헤어질 때 이런 말을 하곤 해요. ‘다음에 당신을 기억 못 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이때 누군가 이런 대답을 하더군요. ‘괜찮습니다. 제가 단노 씨를 기억하니까요.’ 우리 삶이란 그런 겁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상 밖으로 나온 어르신들
 
  “아이고, 또 깜빡했네.”
 
  주문자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안 나왔다”고 하자 김정자(74)씨가 멋쩍게 웃었다. 김씨가 내온 4잔의 음료 가운데 한 잔은 슬리브(보온 덮개)가 빠져 있었다. 맞은편 테이블에 있던 손님이 “여기선 실수도 자연스럽게 넘어간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서울 동작구치매안심센터 지하 1층 ‘기억다방’이다. 경도인지장애 어르신들이 직접 바리스타로 일한다. 이용객들은 주로 치매안심센터 이용자 및 보호자들이다.
 
  “어휴, 우리 땐 그냥 블랙커피나 밀크커피 아니면 믹스커피였는데. 요즘은 라테, 아메리카노, 뭐가 이리 많은지…. 레몬차, 청포도차 이런 건 쉬워. 커피가 제일 만들기 어려워요. 근데 여기 오는 사람들은 서로 다 이해해줘요. 서로 ‘언니, 우리 어제 일도 잊어버렸잖아’라고 웃으면서 말해요. 여기서 웃는 횟수만 생각하면 한 20년은 더 살 것 같아. 호호.”
 
 
  “나 아직 괜찮구나”
 
‘기억다방’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김정자(74)씨. 6년 전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았다. 사진=월간조선
  김씨는 6년 전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았다.
 
  “일할 때 두뇌 활동을 하니, 기억이 살아나는 기분이 들어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매달 친목회도 하죠. 이런저런 얘기 나누며 같이 울고, 웃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저 스스로 일해 통장에 찍히는 급여를 보면서도 ‘나 아직 괜찮구나’ 하는 걸 느껴요.”
 
  김씨와 함께 일하는 이정희(가명·65)씨는 지난해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았다. 이씨는 “처음에 이 일을 할 땐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앞섰지만 교육을 받고 자신감이 생겼다”면서 “우울감이 기억력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을 체감했다”고 했다.
 
  “지난해 경도인지장애 검사를 했을 때 ‘우울’ 항목이 높게 나왔어요. 그런데 이곳에 꾸준히 나오니까 긍정적으로 바뀌고 기억력도 많이 나아졌어요. 평생 주부로 살아 여기가 첫 직장인 셈인데, 가계에 보탬이 되니 보람도 느껴요.”
 
  손님으로 찾아온 김설자(81)씨는 “노인네들이 집에만 있으면 머리가 침체되고 생각도 없어지는데, 여기 와서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니까 너무 좋다”고 했다. 동작치매안심센터에서 근무하는 김환희 운동처방사는 “바리스타 어르신들은 손님으로 오시는 분들께 치매 검사, 치매 예방 운동 등의 프로그램도 권한다”면서 “때문에 치매 예방 활동 프로그램 신청자 수도 확연히 늘었다”고 했다.
 
  바깥 활동을 하면 정말 기억이 살아날까. 정영희 명지병원 신경과 교수의 말이다.
 
  “예컨대 간단히 장을 보러 가도 물건을 고르고, 값을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치죠. 이건 뇌가 복잡한 과제를 수행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치매 환자가 일상생활 능력을 유지하는 게 그만큼 중요한 거죠. 이런 바깥 활동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기억의 단서들이 곳곳에 남아 있잖아요. 기억을 회상하게 하는 단서들이 뇌 활동을 자극하면서 ‘기억이 살아난다’고 느끼는 겁니다.”
 
 
  김윤채씨의 새해 소망
 
  강원도 태백시에 거주하는 김윤채(68)씨의 말이다.
 
  “냄비를 수도 없이 태워먹고, 난로의 불길이 문틀까지 번지고, 뭘 하나 찾으면 또 하나가 없어지고….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보건소를 찾았습니다. 무릎 수술을 앞두고 있던 차에 치매 판정까지 받자, 우울증으로 체중이 15kg이나 빠졌어요. 그야말로 지옥 같았습니다. 자식들을 힘들게 하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어 무작정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사람 목숨이, 가고 싶다고 가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추스르고 살아보자고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6년 전. 그렇게 찾아간 곳이 태백시 치매안심센터다. 매일같이 나가 색칠하기, 퍼즐 맞추기, 기체조, 난타 등을 배운다.
 
  “집에 혼자 들어앉아 텔레비전만 보다가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움직이니 도움이 되더군요. 슬픈 생각을 할 틈이 없이 시간이 갑니다. 요즘은 ‘왜 하필 나에게’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프로그램이 끝나면 시내에 사는 딸과 함께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어 좋아요.”
 
  집 비밀번호를 까먹어 문을 못 열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좌절이 찾아오지만, 그래도 ‘할 일’이 있는 삶은 크게 다르다고 했다.
 
  “저는 불과 3시간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백지가 돼요.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저를 평소처럼 대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치매라고 너무 배려한다면, 그게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어요.”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의 저자 웬디 미첼 또한 비슷한 말을 했다. 두 딸을 둔 그는 책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항상 엄마이고 싶다”고 했다.
 
  김씨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직 많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요즘”이라고 했다. 지난 9월에는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치매 극복 희망수기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생전 글 한 번 안 써봤는데, 치매를 계기로 이런 상도 탔다”면서 “내년에도 손을 많이 쓰는 일을 찾아 도전해보겠다”고 했다.
 
  곧 있으면 동지(冬至)다. 김씨는 가장 긴 밤 너머의 봄을 계획하고 있다. 훗날 희극으로 남길 인생을 위해서다.⊙
 
건망증일까, 치매일까? 이럴 땐 검진받아봐야
 
  둘의 차이점은 건망증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아, 그랬었지’ 하는데, 치매는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걸 전혀 기억 못 한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건망증은 치매로 진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중병이 초기에는 감기처럼 가볍게 찾아오는 법. 치매도 초기에는 건망증과 비슷한 구간이 있다. 특히 경도인지장애와는 증세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검사를 해보면, 건망증의 경우 모든 항목에서 정상소견이 나오고, 경도인지장애는 인지 기능이 다소 떨어졌다고 나온다. 박기형 가천대 길병원 신경과 교수는 “건망증이 점차 심해지는 것 같다, 작년과 다르다, 사회생활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면 검진을 받는 게 좋다”고 했다.
 
  지난 20여 년간 수십 명에게 치매 진단을 내린 박 교수는 “진료 중 함께 온 보호자가 종종 ‘우리 엄마, 혹은 아버지 치매 맞아요? 치매면 어떡하죠?’ 하고 직접적으로 물을 때가 있는데, 당사자 앞에서 절대 삼가야 할 행동”이라면서 “스스로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언급하면 우울증까지 겹칠 수도 있다. 그럴 땐 의사에게 ‘잠깐 따로 이야기 가능하냐’고 물어보라”고 덧붙였다.
 
  정영희 명지병원 신경과 교수는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낮에는 잘 찾는 길을 어둑어둑한 밤엔 잘 찾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면 검진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거나 단어, 고유명사, 사람 이름 같은 게 생각나지 않아도 마찬가지”라면서 “이때 전국에 있는 치매안심센터에서 무료 검진을 받아보는 걸 추천한다. 만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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