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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국사 교과서 편향성 논란

국사 교과서보다 더 심각한 교사용 지도서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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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부 檢定 안 받아, 검정 교과서 저자들의 속내 그대로 드러나
⊙ “친일 반민족 세력들이 반탁운동을 통해 반공애국 세력으로 변신”(미래엔)
⊙ 김일성이 몸담았던 88특별여단을 ‘건국을 위한 준비’라는 단원에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과
    나란히 소개(천재교육)
⊙ “빨갱이의 어원은 partisan… 나치스에 저항했던 세력”이라며, 사실과 다르게 ‘빨갱이’ 긍정
    시도(비상교육)
⊙ “6·25전쟁을 단순한 북한의 남침이라는 하나의 사안으로 보지 않고 당시의 복합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비상교육)
〈한국사〉 교사용 지도서들. 검정 교과서와는 달리 교육부의 검정을 받지 않는다.
  〈한국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면서 교사용 지도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김무성(金武星)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11월 2일 새누리당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선생님들이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보는 교사용 지도서는 내용이 완전히 빨갛다”고 말했다. 교사용 지도서가 도대체 어떤 책이고, 내용이 어떻기에 여당 대표가 그런 소리를 했을까?
 
  교사용 지도서는 글자 그대로 ‘교사가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을 계획하고 진행할 때 수업이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교사용 보조 자료’를 말한다. 이명희(李明熙) 공주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교사들이 수업 시에 참고하도록 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충설명하거나,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심화해서 자료로 제공하는 책”이라고 설명한다. 대개 검정(檢定) 교과서 저자들이 교과서와 함께 집필한다. 일선 학교의 교과서 채택률을 높이기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발행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용 지도서는 검정 교과서와는 달리 교육부의 검정 대상이 아니다. 검정 교과서는 교육부가 집필지침 등을 통해 방향을 제시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지만, 교사용 지도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사실 현재의 〈한국사〉 검정 교과서들은 2년 전 논란 끝에 그 내용이 일부 수정된 것들이다. 교육부가 7종의 교과서에 대해 총 41건의 수정 지시를 했는데, 교학사를 제외한 다른 6종의 교과서 집필진은 수정을 거부했다. 작년에 출판사들이 교육부의 지시대로 수정한 책들을 내놓자, 집필진은 소송을 제기했다. 1, 2심 법원은 교육부의 수정 명령은 적법하다고 판결했고, 이 사안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검정 교과서 집필자들이 만든 교사용 지도서를 보면 그들이 무엇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치려 했는지가 드러난다. 검정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교과서 집필진이 어느 정도 순화하고, 다시 출판사 측이 교육부 요구를 받아들여 수정한 현행 교과서와는 달리, 검정 교과서 집필진의 본심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얘기다.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교사용 지도서들을 입수해 현대사(일제시대~현재) 부분을 살펴보았다.
 
 
  3・1운동, 폭력투쟁적 측면 강조
 
일제시대 화려한 도시의 모습과 빈궁한 농촌의 모습을 대비하고 있는 미래엔 지도서.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많은 〈한국사〉 지도서가 위임통치론, 외교독립론과 관련해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대답을 유도하고 있다. 주로 위임통치론과 임시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걸 소개하는데,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에 대한 망신 주기라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일제(日帝)하의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풍부한 사례들을 인용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 원산총파업, 평양고무공장총파업, 을밀대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한 여성노동자 강주룡 등 옛날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내용들이 이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3·1운동에 관해서도 종래와 다른 해석이 보인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현장에서 채택률이 가장 높은(33.2%) 미래엔 교과서 지도서를 보자. 이 책 259쪽 ‘탐구활동-무력투쟁으로 바뀐 3·1운동’에서는 〈1918년경부터 농민들이 집단적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는 등 무력투쟁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3·1운동의 시기별 투쟁 형태와 일제의 탄압’이라는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일제가 초기부터 시위대에 발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간이 흘러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일제와의 충돌이 크게 늘어나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종래 비폭력평화운동으로 배웠던 것과는 달리, 3·1운동의 폭력투쟁・계급투쟁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엔 지도서는 268쪽에 노동자와 농민들을 짓밟는 자본가, 지주의 모습을 그린 삽화를 싣고 〈일제 강점기 계급모순을 잘 보여주는 삽화이다. 일제는 계급모순을 해결하기는커녕 지주, 자본가의 편에서 농민, 노동자를 억압하고 수탈하였다. 그러므로 계급모순은 곧 민족모순이었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한다〉라고 적어놓고 있다. 같은 책 282쪽에서도 일제하 화려한 도시와 빈궁한 농촌의 모습을 담은 삽화를 보여주면서 ‘사고력 키우기-식민지 조선 사회의 삶이 위와 같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나타난 까닭이 무엇인지 토론해 보자’고 주문한다. 그리고 ‘답’을 제시한다.
 
  〈식민지공업화가 추진되고, 일제 자본이 투자되어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인 중에도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극소수 친일예속자본가들은 큰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반면,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등 일본의 식민지 수탈정책은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농민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대에는 농촌에서 내몰려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농민이 크게 늘어났다. 큰 틀에서 봤을 때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은 일제에 협력하는 지주, 자본가층의 이익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면서 하층 민중(농민, 노동자)을 수탈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시대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기는 하나 ‘계급사관’에 입각한 역사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울러 자본가, 지주 등 ‘가진 자’들은 일제시대 친일 세력의 후예라는 부정적 인식을 은연중 심어준다.
 
 
  실력양성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
  교사용 지도서들은 1920년대에 조만식 등이 주동이 되어 벌였던 물산장려운동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한 것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자, 사회주의자들은 이 운동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가들의 ‘이기적인 계급운동’이라고 비난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은 처음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토산품 생산이 수요를 뒷받침하지 못해 상품 값만 오른 상황이 되어 가난한 대중들은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았다.〉(비상교육 지도서 45쪽)
 
  이에 대해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물산장려운동은 기본적으로 우리 민족도 기업을 세워 경제적 발전을 꾀하려는 운동인데, 이러한 적극적인 성격을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비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경직된 계급의식을 학생들에게 과도하게 주입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비판한다.
 
  동아(구 두산동아) 지도서는 ‘교과서 자료해설’이라는 코너에서 일제시대 경성방직주식회사 창립취지문을 소개한 후 이렇게 설명한다 (171쪽).
 
  〈경성방직주식회사는 김성수가 민족기업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대지주와 상인자본을 끌어들여 설립한 기업이다. 민족기업을 표방하여 한국인만 채용하려 하였고,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인은 조선인의 광목으로’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로부터 해마다 막대한 보조금을 받기도 하였다.〉
 
  미래엔 지도서는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광수의 논설 〈민족적 경륜〉을 소개하면서 〈민족적 경륜이 발표되자 동아일보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고 부기(附記)했다(267쪽). 굳이 《동아일보》 불매운동이 일어났던 사실을 덧붙이는 것은 소위 언론개혁운동의 대상 중 하나였던 《동아일보》 등 메이저 언론들이 일제시대 때 ‘민족지’가 아니라 ‘친일지(親日紙)’였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한국사〉 지도서들은 ‘실력양성론’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명희 교수는 이에 대해 “시종일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민족주의 계열의 실력양성운동을 폄하하거나 친일적(親日的) 운동으로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기술을 하고 있다”면서 “실력양성운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조차도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 즉 친일파(親日派)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교육됨으로써 대한민국을 ‘친일파의 나라’로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경계했다.
 
 
  인민군 2군단장 무정의 비극?
 
  일제하 사회주의운동, 무장독립투쟁에 방점을 두는 〈한국사〉 기술은 교사용 지도서에서 특히 조선의용군 등을 집중 조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비상교육 지도서는 ‘교수・학습 보충자료’에서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에서 활동했던 무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91쪽).
 
  〈무정은 18세에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건너가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포병대위가 되었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4년 중국공산당이 장제스의 중국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 2만5천 리의 대장정에 나섰을 때 무정은 작전과장에 임명되어 중국공산당의 사활을 건 대장정을 성공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41년 옌안에서 중앙당 학교와 항일군정대학 출신의 조선인들을 모아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고, 1943년에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였다. 1945년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6·25전쟁 때 조선인민군 24단장(2군단장의 잘못-기자 주)을 지냈다. 이는 독립운동가가 민족상잔의 비극에 앞장서게 되는 상황으로서 무정 개인이 아닌 조선의용군 전체의 비극이었다.〉
 
  무정의 이력에서 보듯, 그는 1925년 이후에는 조선독립운동가라기보다는 중국 공산주의 혁명가로 활동했고, 6·25 때는 인민군 2군단장으로 남침전쟁의 선봉에 섰던 자였다. 그런 자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지도 의문이거니와,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남침전쟁에 수괴급으로 가담한 무정의 행위를 ‘비극’ 운운하는 말로 덮고 넘어가려는 것도 고약하다.
 
  과거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서부터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온 문제 중 하나가 보천보전투 등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대한 기술이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와 비교하면 〈한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한 서술 분량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교사용 지도서들은 온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해 변함없이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항일무장독립투쟁이 시작되다’(교과서 329~332쪽)라는 단원의 ‘수업지도계획’에서 〈만주사변 이후 만주 지역에 항일유격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음을 설명하고,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을 파악한다〉고 제시하고 있다(지도서 208쪽). 본질적으로 중국공산당 산하 무장세력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은, 이 조직에 김일성이 몸담았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천재교육 지도서는 김일성이 소련으로 건너가 몸담았던 88특별여단을 크게 취급하고 있다. 먼저 ‘학습지도안’에서 〈88특별여단 편성:연해주로 이동한 동북항일연군이 중심. 한국인을 중심으로 조선공작단 조직〉이라고 제시한 후, 265쪽에서는 ‘보충심화자료’를 통해 ‘조선공작단(88특별여단)’에 대해 상술(詳述)하고 있다.
 
 
  88특별여단을 조선건국동맹과 나란히 취급
 
  〈조선공작단은 1945년 7월 해방을 한 달여 앞두고 결성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전쟁 막바지에 일본 점령 지역이었던 북조선에 투입되어 점령지 평정 및 대민 선무공작을 담당케 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세력 가운데 일본군의 공세로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에 소련 지역으로 피신한 이들로 구성된 88여단은 원래 소련 비밀경찰 산하조직으로 결성되었던 부대이다. 이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혹은 소련에서 명명한 88특별여단으로 불린다.
 
  소련은 1945년 독일이 패배하고,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혹은 88여단 내에 있던 조선인들로 이 단체를 결성케 하고 유사시 입북을 준비하게 하였다. 조선공작단 대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였으며, 김일성을 포함한 일부 조선인들은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이 단체는 1930년대 말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 속에서 소련과 국경을 인접한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을 소련 국경지대로 결집시켜 유사시 적 후방으로 침투시켜 도시 게릴라, 사보타주, 선전선동 활동을 하려는 목적으로 조직한 소규모 게릴라 군사조직의 하나였다. (후략)〉
 
  이 정도면 일견 김일성이 몸담았던 88여단의 실체를 그대로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련 비밀경찰이 세계 공산혁명과 소련의 이익을 위해 결성한 88여단 내 조선인의 소규모 집단을 ‘건국을 위한 준비’라는 단원에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과 나란히 소개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김일성이 소련의 앞잡이였던 사실은 기술하지 않아
 
  천재교육 지도서는 ‘보충심화자료’에서 김일성에 대해서도 상술하고 있다(278쪽).
 
  〈(전략) 독서회 활동으로 1930년 길림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32년 4월 항일유격대 활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2군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6년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1937년 6월 국내 조직과 연계하여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의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1940년 소련으로 이동했다가 1945년 9월 귀국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조선공산당이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하자 책임자가 되었고, 1947년 2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인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 6월 남북노동당이 합당한 조선노동당의 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조국전선)의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에는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군사작전과 전시동원체제를 통괄하였다. 1956년 4월 개최된 3차 당대회에서 당위원장, 1972년 12월에 채택한 조선 사회주의 헌법에 따라 국가주석이 되었다.〉
 
  아주 드라이한 이력서를 보는 듯하다. 김일성이 소련군 대위였다는 사실도, 스탈린에 의해 간택되었다는 사실도, 그가 독재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악행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동아 지도서는 ‘교과서 자료해설’에서 조국광복회의 10개조 강령을 소개하고 〈동북항일연군 지휘관 내 한인 간부들이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적 단결을 이루기 위해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국내의 민족주의자 및 공산주의자와 손잡아 함경도 일대로 조직을 확대하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고 기술하고 있다(186쪽).
 
 
  美軍은 일본군의 연장선상에서 용산에 주둔?
 
서울 용산에 일본군에 이어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기술한 미래엔 지도서.
  해방 이후 남북한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과 관련해 〈한국사〉 교과서들은 1980년대 운동권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소련군정에 대해서는 긍정적, 미군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상을 갖도록 서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교사용 지도서는 이를 노골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수업지도계획’에서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통치 정책의 차이점을 설명한다〉고 한 후, 〈①미국: 38도선 이남 직접 통치 → 조선총독부 체제 유지(현상유지정책: 기존의 통치구조, 사회체제를 개편하지 않고 현 상태를 유지하는 통치방식이다), ②소련:통치방식, 공산주의 세력 후원〉이라고 지도하도록 권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명희 교수는 “맥아더 포고령 제1호에서 미국의 점령 목적을 ‘오랫동안 조선인의 노예화된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킬 결정을 고려한 결과, 조선 점령의 목적이 항복 문서 조항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급(及)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미군의 점령 목적은 결코 현상 유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다만 미군정청은 한국의 미래에 대한 방침이 결정될 때까지는 질서유지를 기본적인 임무로 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조선총독부 체제나 총독부의 한국인 관리들을 당분간 이용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면서 “이것에 대해 조선총독부 체제의 유지가 목적이라고 단정하는 반면, 소련군정에 대해서는 간접통치 방식으로서 북한을 후원하는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비판한다.
 
  미래엔 지도서는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20사단의 병영’ 사진 밑에 〈용산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주둔해 있었고, 임오군란 때 들어온 청군도 주둔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광복 이후 21세기 초까지는 미군이 주둔하였다〉는 설명을 달았다(242쪽). 역사적 사실에서 어긋나는 것은 아니나, 미군이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미래엔 지도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영 시가행진’ 사진 밑에 〈미군정의 요구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미군 수송기를 이용하여 귀국하였다. 일진으로 귀국한 이들은 김구, 김규식, 이시영, 장준하 등이었다〉는 해설을 달았다(308쪽). 일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저항자로 추앙하고 있는 장준하가 1진으로 귀국한 임정 인사들 중 하나였던 것은 맞지만,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과 나란히 소개하고 있는 것은 억지스럽다.
 
 
  “일부 우익 세력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
 
해방 후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성향에 대해 알아보자는 미래엔 지도서. 이승만을 맨 뒤에 배치했다.
  신탁통치반대 운동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신탁통치의 본질에 대해 민중이 오해했고, 우익진영이 이를 반공·반소운동으로 악용했다는 식의 서술을 하고 있다. 특히 미래엔 지도서는 신탁통치 찬반 사진 밑에 이런 설명을 달았다(309쪽).
 
  〈우익은 신탁통치를 식민지배의 연장으로 인식하였다. 잔혹한 일제통치를 경험한 대부분의 민중도 여기에 동조하여 우익은 대중동원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탁운동을 독립운동의 연장, 곧 애국운동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때 친일 반민족 세력들이 반탁운동을 통해 반공애국 세력으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민족진영의 대한민국 건국운동의 시발이었던 반탁운동을 우익 진영의 운동으로 폄하하면서 반공애국 세력이 친일 반민족 세력의 후예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을 제기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대해 대부분의 지도서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가르치도록 유도하고 있다. 교사용 지도서라면, 정읍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북한이 1946년 2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해서 공산주의 체제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설명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있다.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수업지도계획’에서 〈교과서 367쪽 ‘이승만의 정읍 발언’ 사료를 읽고 일부 우익 세력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 갖는 의미를 토론하도록 한다〉고 권하고 있다(228쪽). 이 책 229쪽 ‘교과서 과제 해설’에서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소개하면서 ‘활동TIP’에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읽고, 당시 어떤 사람들이 이승만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을지 추론해 보도록 한다〉고 유도하고 있다. 결국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건국 과정은 ‘일부 우익’ 내지는 ‘우익으로 변신한 친일파’들에 의한 것이라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 수립에 대해 토론하자면서 親김구 입장만 제시
 
  비상교육 지도서는 ‘어떻게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토론하기’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운운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과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다” 운운한 김구의 발언을 제시하면서 토론을 권유하고 있다(131쪽). 하지만 제시하고 있는 두 사람의 발언을 보면 김구 쪽으로 기울기가 쉽다. 게다가 〈각 세력 중 한 가지 방식을 선택하여 자신의 입장을 서술해 보자〉고 하면서 ‘과제예시’에서는 김구의 입장에 해당하는 주장만을 제시하고 있다.
 
  〈광복 이후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김구의 노력은 분명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냉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였기에 소련의 영향을 받는 북한과 미국의 영향을 받는 남한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슷한 시기에 우리처럼 미국, 소련 등에 분할 관리되었지만 내부의 노력으로 자주적 통일국가를 수립한 오스트리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정부 수립은 전혀 불가능한 꿈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내부의 의지와 역량으로 차근차근 준비하였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토론을 해보자면서 한쪽의 입장만을 보여주는 것부터가 편파적이다. 게다가 사실관계도 틀렸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던 오스트리아가 중립국가로 주권을 회복한 것은 1955년이었다. 이때는 소련에서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가 집권, 평화공존 노선을 추진하면서 냉전 초기의 첨예한 대립이 어느 정도 무뎌지기 시작할 때였다. 오스트리아가 통일국가로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제정세에 힘입은 바 컸다. 하지만 1948년의 상황은 달랐다. 처음에는 표면적으로나마 좌우합작정부가 들어섰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들이 비밀경찰의 정치공작이나 쿠데타 등을 통해 차례로 공산화되어 갈 즈음이었다. 일단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선 나라에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공산주의자들은 숙청되고, 스탈린의 주구(走狗) 노릇을 충실히 수행할 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1948년은 냉전의 초입이었고, 그만큼 국내외적으로 타협의 가능성이 적었을 때였다. 1948년의 한반도에서 오스트리아식의 해결이 가능했을 것처럼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사실관계를 심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빨갱이’는 좋은 것?
 
  ‘빨갱이’라는 말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선 지도서도 있다. 비상교육 지도서가 그것이다. 이 책은 58쪽 ‘좋은 수업을 위한 제안’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교사: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사회주의자들을 비하해서 어떻게 불렀지요?
 
  학생: 빨갱이요.
 
  교사: 그 빨갱이의 어원이 partisan이에요. 바로 나치스에 저항했던 세력을 말합니다. 이런 비정규 저항군을 프랑스에서는 resistance라고 불렀답니다. 이들이 끝까지 나치스에 저항했기 때문에 결국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빨갱이’의 어원이 ‘파르티잔(partisan)’이라는 주장부터가 근거가 없다. ‘파르티잔’에서 ‘빨치산’이라는 말이 나온 것과 혼동한 것 같다. ‘빨갱이’라는 말은 영어의 ‘reds’처럼 공산주의자들이 빨간색을 상징색으로 삼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부정확한 지식을 가르치는 셈이다. 게다가 ‘빨갱이’를 나치에 저항했던 파르티잔, 레지스탕스와 등치(等値)시킴으로써 ‘빨갱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없애고, 긍정적 존재인 것처럼 가르쳐주려 애쓰고 있다. 그것도 ‘좋은 수업을 위한 제안’이라는 레테르까지 붙여서.
 
 
  제주도에서 5·30총선 못 치른 게 역사에 남을 일?
 
현길언 한양대 명예교수.
  〈한국사〉 교과서들은 4·3폭동이 본질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남로당 주도의 공산폭동이었음을 감추고,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무장봉기라는 인상을 주는 기술로 일관하고 있다. 비상교육 지도서는 한술 더 떠서 폭동 진압에 나선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있다(116쪽).
 
  〈1947년 3월 1일 제주 북초등학교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고 민족독립국가 수립을 촉구하는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시위를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주민들이 항의하자 서북청년단 등이 빨갱이를 소탕한다면서 주민들을 폭행하는 등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경찰의 강경대응과 우익단체들의 불법적 행위에 맞서 좌익 세력과 일부 주민들은 무장대를 조직하였다.〉
 
  이 책은 그 뒤를 이어 ‘영향 파악하기’라는 제목 아래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주도의 경우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됨으로써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총선거 거부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치 제주도에서 5·10총선거를 거부한 것이, 그래서 5·10총선거의 완전성에 흠결을 남긴 것이 역사에 남을 쾌거라는 느낌을 주는 서술이다.
 
  이 책은 99쪽 ‘이 단원의 지도계획’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라는 항목과 관련해 ‘지도상의 유의점’이라면서 〈5·10총선거가 남한 전역에서 실시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해시킨다〉고 하고 있다. 결국 5·10총선거는 남한에서의 완전한 선거도 아니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의 수립에 하자(瑕疵)가 있다는 결론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천재교육 지도서는 더 하다(277쪽).
 
  〈(전략) 이로부터 4·3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약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 중지,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 통일정부 수립 등을 촉구하였다.(중략)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명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었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중략)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후략)〉
 
  이 내용만 보면 제주도에서는 군경과 우익에 의한 무자비하고 범죄적인 양민학살만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산으로 들어간 폭도들에게 원인을 제공한 것도 군경의 잔혹한 진압작전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주도 출신 소설가로 가족들이 우익과 좌익에 의해 번갈아 희생되는 비극을 체험했던 현길언 전 한양대 교수는 《섬의 반란, 1948년 4월 3일》에서 1948년 4월 3일 인민유격대의 공격으로 경찰관 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와 그 가족 등 민간인 사망 8명, 부상 19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날 무장한 인민유격대는 우익인사를 매우 잔인하게 살해했고, 지목했던 당사자가 없을 경우엔 그 노모나 부인이나 어린아이까지 대신 살해했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처음 있는 끔찍한 사건이었다.〉(37쪽)
 
  그러면서 현 교수는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반인권적 사태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거부하려는 그 반란의 목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이 반국가적 반란이라 하더라도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반인권적 사실 또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것이 4·3사건의 실상을 밝히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81쪽).
 
  이것이 학생들에게 가르칠 만한 균형 잡힌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교사용 지도서들은 좌익 폭도들이 저지른 학살은 눈을 감고, 4·3사건의 정당성만을 강변하고 있다.
 
 
  반란군은 ‘장악’, 국군은 ‘점령’
 
금성 지도서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의 성명서를 싣고 있다.
  많은 〈한국사〉 교과서가 여순반란사건을 제주 4·3폭동 진압 출동을 거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일어선 ‘무장봉기’로 기술하고 있다. 지도서들도 마찬가지다. 비상교육 지도서를 보자(120쪽).
 
  〈이에 1948년 10월 19일 지창수, 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기치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 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해 나갔다. 초기 진압에 실패한 정부는 22일 여수, 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 박격포 등을 동원하여 진압작전에 나서 22일에 순천, 27일에 여수를 각각 점령하였다. 진압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의 희생이 뒤따랐으며, 반란군은 지리산 일대로 들어가 유격대로 전환,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반란’ ‘반란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반란군은 지방을 ‘장악’했다고 표현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반란군에게 잃었던 지역을 회복한 것은 ‘점령’이라고 표현했다. 반란군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행위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으면서, 국군은 장갑차, 박격포 같은 어마어마한 무력(?)을 동원해, 민간인들의 희생을 개의치 않고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친 것처럼 기술했다. 거기에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휘’라는 말까지 집어넣어 반미감정까지 조장하는 세심한 배려를 했다.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한술 더 떠서 이 책 234쪽 ‘보충사료’에서 반란군이 발표한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를 소개하고 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우리는 조선 인민의 자식이며 노동자, 농민의 자식이다. 우리는 조국의 방위와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우리는 제주도의 애국 인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하기 위해 우리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 조선 인민의 자식으로서의 사명하에 이것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동포를 위해 결연히 일어섰다. - 여수신보(1948.10.20.)〉
 
  대한민국이 건국한 후 군 지휘계통상의 정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상관과 동료들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의 성명서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 출동 명령을 받은 여수·순천 지역 국군 중에서 좌익 세력은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주도하였다. 제시된 사료는 출동명령을 거부한 병사들이 발표한 성명서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해설’까지 덧붙여서.
 
 
  ‘인구비례 총선은 북한에 불리해서…’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해서는 ‘건국’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제연합의 결정’이라는 항목에서 〈유엔총회(1947.11.1.) 인구비례에 따라 총선거 실시 이후 정부 수립 결정〉이라고 한 후, ‘인구비례’ 밑에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해설을 달아놓았다. 〈인구수에 비례하여 국회의원 선출 등의 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으로, 북한은 인구가 남한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에 인구비례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면 불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소련과 북한이 유엔총회 결의를 거부한 것이, 북한의 입장에서는 타당했다는 투다.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234쪽 ‘보충사료’에서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 일부 조항까지 소개하고 있다.
 
  〈제1조 우리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제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 인민은 자기의 대표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인민회의를 통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제5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생산수단은 국가, 협동단체, 또는 개인 자연인이나 개인 법인의 소유다.… 대외 무역은 국가 또는 국가의 감독 밑에 수행한다.〉
 
  그 밑에는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도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여 1948년 9월 8일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였다. 다음날인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다〉는 해설을 달아놓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권의 수립을 대등하게 놓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남한에서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부득이하게 정권을 수립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국호와 헌법 조문까지도 철저하게 소련공산당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사실 등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이 지도서는 262쪽 ‘보충사료’에서는 1972년 북한이 공포한 소위 사회주의 헌법의 일부도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主流 세력을 親日派로 가르치라고 해
 
  〈한국사〉 교과서 대부분이 그렇듯이, 지도서들도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청산 실패’를 크게 다루면서 비판한다. 특히 두드러진 것은 미래엔 지도서이다. 이 책은 ‘사료읽기’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004)’ 제2조 10호(“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규정을 소개하면서 〈군국주의 체제에서 일본군 소위만 되어도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고 토를 달았다(252쪽). 사실 ‘소위 이상의 장교’는 해방 직후나 반민특위 활동 당시에는 친일대상자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제시대 소위의 위상을 강조하는 것은 만주군 중위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책은 그 아래에 〈위 조항을 본문에 있는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그 대표적 인물을 조사해 보자〉면서 ‘답’까지 제시하고 있다.
 
  〈●일제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자(1항, 10항, 16항): 김태석, 노덕술, 백선엽, 민복기 등
 
  ●일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제11항, 13항): 정춘수, 이광수, 김동환, 모윤숙, 방응모, 박희도, 김활란 등〉
 
  구체적인 친일파의 예로 대한민국을 위해 활동한 인사들(백선엽, 민복기, 김동환, 모윤숙, 김활란)이나 좌파의 주공격 대상 중 하나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등을 명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지켜온 주류 세력이 친일 세력이었다고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농지개혁은 부정적, 토지개혁은 긍정적으로 서술
 
금성 지도서에 실려 있는 북한 토지개혁 법령.
  과거 좌파 성향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농지개혁을 실패한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한국의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던 반면에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년 수확고의 절반을 소작료로 내던 농민들이 수확고의 3분의 1씩 5년간 현물로 납부하면 자기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농지개혁은 농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 그 결과 농지의 92%가 자작농의 것이 되었는바, 이는 일본이나 대만을 넘어서는 성공적인 것이었다. 김성호·장상환·김일영 등의 학자들은 그 결과 이 땅에서 전근대적인 지주 계급이 사라졌고, 그렇게 성립된 자영농 계층과 그들의 교육받은 자녀들은 이후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한국사〉 교과서들과 지도서들은 여전히 농지개혁을 부정적으로 기술한다.
 
  〈지주들은 미리 땅을 처분하거나 정부에 땅을 넘겼고, 소작농은 이러한 땅을 사고 자신의 땅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5년간 땅값을 나누어 내야 했으므로, 자기 소유의 땅이 생겼다고 당장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 금액을 감당하지 못하면 다시 땅을 처분해야 했기 때문이다.〉(비상교육 지도서 117쪽)
 
  〈이 법은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재산에 대한 몰수와 국유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논밭을 제외한 과수원, 임야 등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 농민들의 유상매수 부담이 매우 컸다는 점, 지주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지학사 지도서 350쪽)
 
  오히려 기만적인 것은 농민들에게 ‘경작권’만 주었다가, 나중에 협동농장을 만들면서 북한 농민들을 농노(農奴)로 만든 북한의 토지개혁이었다. 하지만 지도서들은 북한의 토지개혁이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점만 부각시킨다. 더 나아가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234쪽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까지 소개하고 있다.
 
  〈제2조 몰수되어 농민소유지로 넘어가는 토지는 아래와 같음.
 
  ㄱ. 일본 국가, 일본인 및 일본인 단체의 소유지
 
  ㄴ. 조선 민중의 반역자, 조선 민중의 이익에 손해를 주며 일본 제국주의자의 정권 기관에 적극 협력한 자의 소유지와 일제 압박 밑에서 조선이 해방될 때에 자기 비장에서 도주한 자들의 소유지〉
 
 
  越南者들은 親日派?
 
  북한의 토지개혁이 친일청산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더 고약한 것은 그 밑의 해설이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여 1946년 3월에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대상은 주로 친일지주가 소유한 토지였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세력이 북한 주민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나, 이에 반발하여 적지 않은 지주와 그 가족들이 월남하기도 하였다.〉
 
  북한의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지주 등 반공산주의 세력이 월남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 조문까지 소개하고, 해설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이 친일 세력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되풀이하여 강조한 후에 지주들의 월남을 이야기함으로써 마치 공산주의에 반대해 월남한 사람들이 친일 세력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북한은 1953~1958년 농민들에게 주었던 경작권을 빼앗아 협동농장을 만들었다. 비상교육 지도서는 ‘협동농장풍경’이라는 제목 아래 협동농장의 개념, 협동농장화 과정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126쪽). 이 책은 〈농민들이 자연부락 단위의 농업협동조합에 강제 편입되었다〉면서 그 강제성은 인정하면서도, 이 협동농장 체제가 북한 농업생산성의 저하와 1990년대 대기근 사태의 근본원인이라는 점은 전혀 적지 않고 있다.
 
 
  “6·25 통해 평화체제 구축 필요성 깨닫도록 지도”
 
비상교육 지도서는 “6・25전쟁을 단순한 북한의 남침이라는 하나의 사안으로 보지 않도록 지도하라”고 주문한다.
  6·25가 남침이 아니라고 가르치라고 하는 교사용 지도서는 없다. 천재교육 같은 경우는 ‘보충심화자료’에서 ‘북한의 전쟁준비와 소련의 지원’에 대해 상당히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280쪽). 하지만 이 책은 ‘지도상의 유의점’에서 〈6·25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을 파악하고, 6·25전쟁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의 중요성을 학생들이 깨닫도록 지도한다〉고 권유하고 있다(279쪽).
 
  미래엔 지도서는 학도병 이우근이 쓴,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라는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316쪽). 그러면서 ‘주제열기’라는 코너에서 “이우근 말고도 수많은 소년병사와 학도의용군이 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희생되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6·25전쟁은 이데올로기의 대리전이자 민족 내부의 갈등이 얽혀 발발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고 ‘설명’한다.
 
  비상교육 지도서는 한술 더 떠서 ‘좋은 수업을 위한 제안’이라면서 〈6·25전쟁을 단순한 북한의 남침이라는 하나의 사안으로 보지 않고 당시의 복합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라고 주문한다(124쪽).
 
  6·25 남침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을 묻거나, 국난에서 나라를 지킨 국군장병, 미군 등 유엔군, 학도의용군 등을 기리기보다는 염전(厭戰)의식을 고취하면서 ‘평화체제 구축’ 타령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비상교육 지도서를 비롯해 〈한국사〉 지도서들 중에서 정읍 발언을 해야 했던 이승만이나 한일국교 정상화를 강행해야 했던 박정희의 고민에 대해 “하나의 사안으로 보지 않고 복합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라고 권유한 책은 없다. 유독 김일성의 남침전쟁에 대해서만 그런 배려를 하는 속셈은 무엇일까?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소개
 
비상교육 지도서는 논란 끝에 교과서에서 퇴출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게재하고 있다.
  비상교육 지도서는 교과서 수록 여부를 놓고 논란을 빚다가 대부분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퇴출된,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을 ‘교수·학습보충자료’에서 기어코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1950년 6·25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신천대학살을 소재로 하여 한국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작품 속에서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성과 어린아이를 칼과 총으로 공격하고 있다. 피카소는 이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공포, 인간성 파괴 등을 표현하고자 했다.〉
 
  ‘신천대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사건이라고 북한이 주장하는 사건이다. 북한은 기념관까지 지어 이 사건을 크게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가 황석영 등도 인정하듯이 신천사건은 미군이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현지의 친공(親共)주민들과 반공(反共)주민들 간의 대립, 갈등이 빚은 비극이었다. 이를 북한을 비롯한 공산 세력들이 미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날조, 선전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충실한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가 그린 프로파간다 성격의 그림이었다. 그럼에도 이 지도서는 ‘신천대학살’을 실재했던 사실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미군’에 의한 것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갑옷 입은 군인’ 운운하는 설명이 미군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6·25전쟁이 이후 남북한 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해 비상교육 지도서는 ‘지도상의 유의점’이라면서 〈남한의 독재체제 구축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체제 역시 독재로 굳어지고 있음을 균형 있게 설명해 주세요〉라고 주문하고 있다(123쪽).
 
  예전의 고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들이 이에 관해 설명하면서 남한은 ‘독재’로, 북한은 ‘권력강화’로 표현하던 것에 비하면, 일견 균형을 찾아가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승만 ‘독재체제’와 북한의 ‘독재체제’는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승만 체제는 비록 운영 과정에서 권위주의로 흐르기는 했지만 다당제와 정치활동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는 체제였다. 반면에 북한은 일체의 자유가 없는 전체주의 독재체제였다. 이를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균형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5·16 설명하면서 軍部의 불만만 강조
 
  미래엔 지도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서 무력 충돌 발생 시 유엔의 결정에 상관없이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318쪽). 마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자의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이 조약은 북한 등의 ‘무력공격을 받았을 때’ 적용되는 것이지 무력충돌이 있다고 해서 미국이 마음대로, 자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엔 지도서는 5·16의 배경을 ‘판서’해 지도하라면서 〈민간 차원 평화통일운동과 군비 축소 계획에 박정희 중심의 일부 군인 불만 → 군사정변(1961.5.16.)〉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26쪽). 5·16은 6·25전쟁 이후 군부의 성장, 당시 군부가 민간 부문보다 앞서 있었던 사정, 제3세계 국가에서 군부 주도의 근대화 혁명 열풍이 불고 있었으며, 당시 《사상계》 등에서 보듯이 국내에서도 그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점, 장면 정권의 무능, 군부의 정풍운동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되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박정희 등 군부 내 일부 세력의 개인적·집단적 불만이 5·16의 근본원인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선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문제야말로 ‘하나의 사안으로 보지 않고 당시의 복합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반미(反美)감정을 조장하는 수업을 유도하고 있다(지도서 247쪽).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보유한 미국은 신군부 세력의 병력 이동에 동의하였으며, 부산 앞바다에 항공모함을 배치하여 신군부 세력을 지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는 독재권력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확산되었다.〉
 
  당시 미국이 부산 앞바다에 항공모함을 배치한 것은 신군부 세력에 대한 지원이라기보다는 한국 사회 내부의 혼란을 틈타 북한이 도발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측면이 컸다. 이를 신군부 세력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다.
 
  미래엔 지도서는 ‘진압군에 붙잡힌 시민과 학생’ 사진 아래에 〈당시 언론들은 학생, 시민들의 치열한 항쟁을 불순 세력의 난동, 북한의 사주로 매도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330쪽).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많은 언론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들어가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비상계엄령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아 사실을 제대로 알릴 수 없었던 것임에도 당시의 보도 행태를 언론만의 잘못인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는 안티조선운동 등 소위 조중동을 겨냥한 언론개혁운동의 정당성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노무현에 대해서는 긍정적 서술만
 
황교안 국무총리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밝힌 지난 11월 3일 보수단체들은 서울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 앞에서 찬성 기자회견을 했다.
  미래엔 지도서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반미주의운동을 확산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 사건으로 피의자를 변호했던 인물 중 한 명이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이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331쪽). 당시 부산 지역 인권 변호사들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던 고(故) 김광일 변호사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은 당시까지만 해도 인권 변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중심적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노무현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데서 정치적 편향성이 엿보인다.
 
  정치적 편향성은 역대 대통령의 치적에 대한 기술에서도 느낄 수 있다. 미래엔 지도서는 ‘평화적 정권 교체-김대중 정부’라는 제목 아래 다음 내용들을 ‘판서’하라고 권한다(335쪽).
 
  〈① 국제통화기금 지원금 조기 상환, 은행과 기업 외국자본에 매각, 직장인 대량해고
 
  ② 여성부 신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③ 대북화해협력정책,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 6·15남북공동선언, 노벨평화상 수상〉
 
  이승만의 경우는 잘한 내용은 거의 기술하지 않고, 박정희의 경우는 경제가 발전한 건 인정하는 듯 싶다가도 그로 인한 부작용과 독재를 맹공하는 게 일반적 서술이다. 그런데 김대중의 경우는,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관련 법규를 어겨가면서 대북비밀송금을 강행했으며, 이로 인해 관련자들이 나중에 처벌받은 사실, 햇볕정책으로 인해 한미동맹이 약화되고 안보의식이 이완되었으며 남-남 갈등이 심화된 사실,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제1, 2차 연평해전 등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었고, 김정일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한 사실, 그의 아들들이 권력형 비리로 감옥에 간 사실 등 김대중 정권의 부정적 측면은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다. 마치 국정홍보처의 홍보자료를 보는 것 같다.
 
  노무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민대통령-노무현 정부’라는 제목 아래,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표방, 정경유착 단절, 권위주의 청산 추구, 대북지원과 협력 사업 지속적으로 추진, 제2차 남북정상회담 성사 등 그의 ‘업적’만을 부각시키고 있다(336쪽). 그의 업적이라는 것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서민대통령’이라는 주관적인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다.
 
 
  경제성장의 부작용 강조
 
  〈한국사〉 지도서들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노력에 대해서는 일견 인정하면서도, 그 성취보다는 부작용을 열심히 강조한다. 미래엔 지도서를 보자(340쪽).
 
  〈1) [판서]4. 고도성장의 혜택 편중
 
  ①고도성장의 원동력: 수출산업의 적극 육성, 높은 교육열과 근면성을 지닌 국민의 값싼 노동력
 
  ② 구조적 문제점: 소득분배구조 악화, 노동자의 저임금, 지역간 개발 불균형, 도시와 농어촌 간의 소득격차
 
  2) 경제는 고도성장을 이루었지만, 정경유착(*정치인과 기업인이 정책적 혜택과 정치자금을 거래하는 부적절한 밀착관계를 말한다)과 경제독점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고도성장의 원동력으로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구인회 같은 기업인들의 역할은 완전히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정경유착을 강조하면서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강조한다. 아울러 고도성장의 결과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선진국 문턱에 진입하고 산업화의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화도 가능했다는 점을 외면하면서, 성장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한다.
 
  이 지도서는 341쪽 ‘와글와글 역사논쟁’이라는 코너에서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산업화’에 대해 논쟁해 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중에 어떠한 가치를 더 우위에 둘 것인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다소 희생되어도 좋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판단 여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강력한 리더십은 독재와 다르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대립적인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선(先) 민주화냐, 선 경제발전이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란이 있어 왔다. 다만 실증적으로는 경제발전이 민주화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경제발전의 문제를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라면’ 운운하면서 비아냥거리듯이 표현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민주주의를 우선해야 한다는 대답을 유도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정상적인 논쟁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 방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수업지도계획’에서 〈새마을운동노래, 교과서 402쪽 ‘새마을운동 당시 농가 지붕을 개량하는 모습’ 사진을 활용하여 새마을운동의 내용과 한계를 설명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어 지도서 본문에서는 〈새마을운동(1970): ‘근면, 자조, 협동’ 구호, 환경개선, 소득증대 등 → 정부와 농민 간 갈등, 농촌 사회 통제 및 유신체제 정당화에 이용된 측면〉이라고 서술, 결국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지도서 254쪽). 같은 책 255쪽 ‘수업연구자료’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새마을운동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박정희 정부의 안정적인 지배구조의 확립이었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간 격차가 현저하게 벌어졌는데, 이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확산될 우려가 컸다. 이에 따라 어떤 형식으로든 여당의 표밭인 농촌 지역에 대한 정치적 배려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유신체제 성립 직전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점도 박정희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은 유신체제를 강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실제로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257쪽에서 ‘오늘날 농촌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면서 그 예시 답안에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농촌사회의 절대적 빈곤 타파, 생활환경 개선, 도시와 농촌 간의 문화적 격차 해소 등을 명분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일정한 정도 농촌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으나, 농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소할 수 없었고, 오히려 유신체제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세계사 배경 서술에서도 左편향적
 
지난 10월 25일 문재인 새정연 대표(가운데), 심상정 정의당 대표(왼쪽), 천정배 의원(오른쪽)은 서울 종로1가 보신각 공원에 ‘한국사 교과서 체험관’이란 것을 열었다. 이들은 지금 교과서의 내용에 공감하는 것일까?
  〈한국사〉 교과서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매 장(章)마다 세계사에 대한 설명을 하고 들어간다. 여기에서 편향성이 엿보인다. 대부분의 지도서가 러시아혁명과 이 혁명이 제3세계 민족운동에 끼친 영향을 긍정적으로 서술한다. 비상교육 지도서를 보자(11쪽).
 
  〈러시아혁명으로 계급적・민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면서 러시아 내 소수민족 사이에 사회주의운동이 확산되었다. 더 나아가 1919년에 레닌은 사회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코민테른을 만들어 각국의 사회주의 노동운동과 식민지 해방운동을 지원하였다.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국가들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약속에 자극을 받아 민족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반면에 공산혁명으로 인한 폐해들, 그리고 러시아혁명 이후 일시 해방되었던 러시아의 소수민족들은 결국 무력에 의해 다시 소비에트 체제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미래엔 지도서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미국이 유럽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기 때문에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채택되지 않았다〉는 토를 달았다(239쪽). 이 책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판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 등장: 민족자결의 원칙(레닌) → 반제국주의 표방 ②식민지 약소민족의 독립운동 지원 약속 → 사회주의운동 확대〉
 
  결과적으로 소련의 레닌이 내세운 민족자결의 원칙은 순수한 반면, 미국의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는 불순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1930년대 전체주의의 대두와 관련해서는 전체주의의 사례로 이탈리아, 독일, 일본만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천재교육 교사용 지도서는 ‘교수・학습활동’에서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 전체주의 국가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설명하고, 이들 국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조사하여 발표하게 한다〉고 하고 있다(242쪽). 이 책은 다음 페이지에서 ‘전체주의의 등장’에 대해 상술하면서, 역시 이탈리아, 독일, 일본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상 가는 전체주의 체제였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제외하고 있다. 마치 전체주의는 우익만의 것이고, 좌익 전체주의는 없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제시하는 참고 자료도 편향적
 
  교사용 지도서들이 사용하도록 권하는 ‘참고문헌 및 관련 사이트’들이 편향적인 경우도 보인다.
 
  비상교육 지도서는 ‘어떻게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을 토론해 보라고 하면서 참고문헌으로 김구의 《백범일지》(돌베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이승만과 제1공화국》(역사비평사)을 제시하고 있다(131쪽). 이 책은 ‘다큐멘터리 그때 그 시절-포스터로 본 1960~70년대’에서 반공포스터, 표어 등을 찾아 당시의 ‘반공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공부하도록 유도하면서 참고문헌으로 서중석 교수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를 제시하고 있다(167쪽). 신간회에 대해서는 ‘참고하세요’라면서 한길사에서 나온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사》(16)를 참고하라고 권한다(35쪽). 같은 책 80쪽에서는 김삼웅의 《김원봉평전》을 참고도서로 권한다. 모두 대한민국 건국이나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등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고,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에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던 인사들이다.
 
  금성출판사 지도서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수업지도계획’ ‘탐구활동-활동아이디어’ 등을 통해 반복해서 5・18기념재단 홈페이지를 활용하라고 권유하고 있다(246, 247쪽).
 
  앞에서 지적한 내용들은 여러 〈한국사〉 지도서의 내용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만 소개한 것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곳곳에 대한민국이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적대적이고, 사회주의, 북한체제에 호의적인 내용들이 더 많이 숨어 있다. 지도서들은 선생님들에게 제자들을 그런 쪽으로 가르치라고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지도서 저자들이 검정 교과서에서 다 드러내지 못한 그들의 속내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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