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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 70주년 특집

끝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전쟁 ① 필리핀

‌“日의 진정한 사과 있을 때까지 투쟁”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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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70년 전 일본군의 蠻行 생생히 기억
⊙ “1956년 일본 배상금 5억5000만 달러, 한 푼도 피해자에 쓰지 않아”
    (가브리엘라 여성당 헤우스 하원의원)
⊙ 필리핀 정부는 日本과의 협력 고려, 이슈화하지 않아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의 시위.
  지난 6월 1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두 분이 같은 날 별세했다. 김외한, 김달선 할머니가 30분의 시차를 두고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두 분이 숨을 거두면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50명으로 줄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에만 벌써 5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기자는 할머니 두 분이 일본의 사죄를 끝내 받지 못한 채 타계했다는 소식을 공교롭게도 필리핀 마닐라에서 현지 위안부 피해자 취재 중에 접했다. 일본군 종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나라에만 한정된 사안이 아니다. 필리핀도 위안부 강제동원의 피해국 중 한 곳이다.
 
아키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기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인 6월 8일 오전 8시 필리핀 마닐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옆자리에는 자신을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라고 소개한 6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앉았다. 그녀는 “필리핀은 7000개가 넘는 섬이 있는데 루손 섬 서북부 지역의 오지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필리핀 이야기를 한 시간 남짓 나눴다. 그녀는 필리핀은 치안이 좋지 않아 몸조심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어느덧 비행기는 필리핀 상공을 날고 있었다. 입국 수속을 밟고 나오니 현지시각으로 오전 11시30분이었다. 필리핀과 한국은 1시간의 시차가 있다.
 
마닐라의 한 구역(City)인 케손 시티(Quezon City)에 위치한 ‘릴라 필리피나(Lila Pilipinas)’ 사무실.
  기자는 필리핀의 더위를 느낄 틈도 없이 예약해 놓은 차를 타고 필리핀 수도인 메트로 마닐라의 한 구역(City)인 케손 시티(Quezon City)에 위치한 ‘릴라 필리피나(Lila Pilipinas)’ 사무실로 향했다. ‘릴라 필리피나’는 마닐라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1994년 결성한 단체다.
 
  ‘릴라 필리피나’ 사무실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1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도착한 ‘릴리 필리피나’ 사무실을 본 순간, 왜 현지 기사가 이곳을 찾는 데 애를 먹었는지 이해가 갔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의 모습.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다. 닫힌 문을 두드리니 90세 가까이 보이는 필리핀 할머니가 문을 열어줬다. 기자가 인사하자 할머니는 무작정 ‘생큐(Thank you)’를 외치며 기자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안내로 회의실처럼 보이는 작은 방에 들어가니 인터뷰를 약속한 엑스트라마두라(Extramadura) ‘릴라 필리피나’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 관련 취재를 하러 온 것을 환영한다”며 “많은 한국 언론이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전에 취재를 왔다 간 언론사가 있느냐’고 물으니, “현재까지는 《월간조선》이 유일한데 8월 정도에 한국의 한 방송사에서 취재를 온다고 했다”고 답했다.
 
 
  “시장에서 야채 팔다 일본군에 끌려가”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인 에스테리타 바스나노 디(Estelita Basnano Dy·85세) 할머니.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하자, 그는 우선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이야기부터 들어보라고 했다. “당시 여성들이 마치 자원하여 위안부가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본의 주장이 완전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 일본은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조사에서 나온 여성들이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결과를 이유로 들어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역사자료센터는 일본 정부가 운영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이들 조사의 객관성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에스테리타 바스나노 디(Estelita Basnano Dy·85세)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자신이 먼저 증언하겠다고 했다. 아까 기자의 손을 잡고 무작정 ‘생큐’를 외쳤던 할머니였다. 그녀는 70년 가까이 지난 그날의 일을 매우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45년 저는 시장에서 야채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군이 탄 트럭이 오더니 남자들을 무작정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망가는 남자들은 총과 단두대를 사용해서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저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도망을 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얼마쯤 지났을까? 누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봤는데 어떤 일본군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도망가려 했는데 그가 내 머리채를 잡고 본인이 타고 온 트럭에 저를 던졌습니다. 트럭 안에는 저 외에도 몇 명의 여성이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희를 위안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뒤쪽에 있는 방에 던져졌는데 거기서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두 번째 강간을 당했을 때 너무 아파서 세 번째 일본군이 들어왔을 때는 거세게 저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일본군이 내 머리를 잡고 식탁 같은 곳에 내려쳤습니다. 당시 저는 정신을 잃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일본군이 또 강간을 하고 있더군요. 그때 겪었던 고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요.”
 
엑스트라마두라 ‘릴라 필리피나’ 대표.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또 다른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인 피덴샤 데이비드(Fedencia David·89세)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저는 14세에 할머니와 함께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가 열흘 동안 주둔지에 갇혀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강간당하는 나날을 겪었습니다. 11일째 되던 날,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해서 할머니와 함께 나왔지만 결국 할머니는 총에 맞아 사망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일본 군인들에게 계속 강간을 당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3~5명의 일본 군인이 찾아왔고, 계속해서 강간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약 1개월 정도 반복되었고, 어느 날부터인가, 일본군이 더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1992년 12월 피해자로 신고한 후 일본군이 내게 한 잘못에 대해 일본, 캐나다, 남아공 등지에 증언하고 다녔습니다.”
 
  이들의 증언을 듣고 있던 라리아 부스타만테(Laria Bustamante·89세) 할머니는 “이미 많은 위안부 여성이 죽었다. 일본은 정의를 실현하는 일을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며 “지금 몇 명이라도 살아 있을 때 너희가 저지른 범죄 행위를 시인하고, 잘못을 사죄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많은 일본군 상대
 
  엑스트라마두라 대표에게 더 많은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듣고 싶다고 하자, 이미 죽은 분도 많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분도 있는 상태라 직접 듣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다만 ‘릴라 필리피나’에는 회원들이 생전에 증언한 문서가 있다고 했다. 제공 및 공개 여부를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다음은 ‘릴라 필리피나’ 측이 공개한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마리아 로사 루나 헨슨(Maria Rosa Luna Henson)
  1927년 필리핀 파사이시(마닐라 수도권) 루손 섬 태생
 
  1942년 2월 저는 당시 조직되어 있던 항일 게릴라 집단인 후크바라합에 자발적으로 참가했습니다. 저의 역할은 시민에게서 약, 헌 옷, 식량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약 1년이 지난 어느 날 다른 2명과 함께 물소가 끄는 짐수레를 끌고 앙헬레스시에 있는 병원 앞의 검문소를 통과하려고 하다가 잡혀서 일본군이 주둔지로 삼고 있던 그 병원에 감금되었습니다. 거기에는 6명의 여성이 더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많은 일본군의 섹스 상대를 해야 했습니다. 3개월 후 100m 떨어진 방앗간 건물로 이동하여 거기서도 매일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막시마 레갈라(Maxima Regala Dela Cruz)
  1929년 필리핀 루손 섬 태생
 
  1944년 8월 어느 날 어머니와 블라칸주 산일데폰소의 시장에 식료품을 사러 갔습니다. 거기서 일본군에게 잡혀서 일본군이 주둔지로 사용하고 있던 시장 앞에 있는 로라 인산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서로 다른 방에 감금되어 3개월 동안 매일 저녁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아파서 울부짖었고 몇 번이나 실신했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일본군이 문을 잠그는 것을 잊어,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재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탈출한 지 20일도 되지 않은 11월 23일 오전 일본군은 우리가 이사해서 살고 있던 팜판가주 칸다바의 마파니크 마을을 포격했습니다. 집들을 다 태우고 남자들을 고문한 후에 죽이고, 몇십 명이나 되는 여자들에게 여러 가지 약탈품을 담은 봉지를 들린 후 플라(붉은 집이라고 불리던 큰 저택으로 일본군이 주둔지로 사용하고 있었다)까지 데리고 가서 전원을 강간했습니다.
 
마파니크(Mapanique) 강간 사건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수는 약 1000명이다.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기억하는 일본군의 가장 큰 만행은 ‘마파니크 강간 사건’이다. 1944년 11월 일본군이 마파니크 지역을 불시에 습격해 마을을 초토화하고 주민들을 폭행한 사건이다. 이때 100여 명의 여성과 10대 소녀들을 조직적으로 납치·강간하고, 남자들을 고문·학살했다.
 
  ◆아나스타샤 코르테스(Anastacia D.Cortez)
  1923년 필리핀 태생
 
  16세 때 필리핀 육군의 군인이었던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카파스의 형무소에 갇혔다가 탈주해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일본인 협력자(마카필리)가 고발해 남편과 함께 나도 체포되어 과거 스페인군 사령부가 있던 마닐라의 산티아고 요새로 연행되었습니다. 남편은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려 나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고문당한 후에 살해당했고, 저는 1개월 후에 후쿠시마(福島)라는 사령관에게 강간당했습니다. 한꺼번에 3명 이상의 병사에게 강간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고문, 그리고 병사들에 대한 성적 굴종 등은 지금도 나를 괴롭힙니다.
 
 
  ◆루피나 페르난데스(Rufina Fernandez)
  1927년 신가론(마닐라 교외) 루손 섬 태생
 
  1944년 12월 무렵 어느 날 밤 가족 모두가 자고 있는데 갑자기 4명의 일본군이 집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아버지를 목을 잘라 살해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봤습니다. 어머니도 복부를 찔려 살해당했습니다. 심한 쇼크와 공포로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그 후 나는 차에 실려 4명의 여성과 함께 파코 지구에 있는 낡은 교회로 연행되어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당했습니다. 그 후 6명의 일본군이 와서 나를 차례로 강간했습니다. 3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미군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정보가 들어오자 최초로 나를 강간한 장교가 일본도로 나의 목을 치려고 했습니다. 피하다가 팔이 잘렸습니다. 다행히 미군이 저를 발견해 캠프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와니타 하못(Juanita Jamot)
  1924년 필리핀 사마르 섬 칼바욕시 태생
 
  부친은 가난한 어부여서 나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12세에 마닐라로 나와 가정부 일을 했습니다. 1944년 어느 날, 갑자기 15명 정도의 일본군이 트럭을 타고 와 아파트에 사는 모든 남자를 연행했습니다. 나의 남편과 남동생도 연행되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저 또한 일본군에게 잡혀 오라카라고 하는, 철근으로 지은 3층짜리 큰 빌딩으로 끌려갔는데 밤 10시 정도가 되자 일본군이 와서 강간했습니다. 낮에는 군복의 세탁이나 청소, 식사를 시중들게 했습니다. 어느 날 미군의 폭격이 있었고 오라카 빌딩에도 불이 나서 혼란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를 틈타 탈출하려 했지만, 일본군에게 발각되었고 저는 다시 산티아고 요새로 연행되어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샌 어그스틴 교회의 예배당에 감금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필리핀인이 있었습니다.
 
 
  ◆플라시다 카란자(Placida B. Caranza)
  1914년 필리핀 루손 섬 태생
 
  일본군이 제가 살고 있던 루손 섬 동남부 비코루의 쿠리 마을에 왔을 때 나는 28세로 딸 셋, 아들 하나가 있는 주부였습니다. 첫째 딸이 8세, 막내딸은 갓난아기였습니다. 1942년 9월의 이른 아침, 일본군 장교와 필리핀인 통역이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일본군은 음식, 바나나, 파인애플, 야채 등을 요구했습니다. 요구를 들어주니 일본군은 나를 총검으로 둘러싼 뒤 강간했습니다. 강간당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옆에서 울고 있었는데 통역이 울면 살해한다고 위협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일본군은 저희 집을 주둔지로 삼고 오전에는 게릴라 소탕, 밤에는 저를 강간했습니다.
 
 
‘릴라 필리피나’ 소속 할머니들이 마닐라 시장에게 요구하여 만든 기념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성노예가 된 피해자를 기념하여 2003년 4월 마닐라 중심부의 보니파시오 공원에 세웠다.
  ◆토마사 살리녹(Tomasa Salinog)
  1928년 필리핀 파나이 섬 태생
 
  태어난 지 1개월 후에 어머니가 죽었고 목수인 아버지와 파나이 섬의 산 호세에서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1942년 산호세에 일본군이 왔습니다. 어느 날 밤 2명의 일본군이 자택에 침입, 저를 끌고나가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저항했는데, 히로오카라는 일본군 대위에게 군도로 목이 잘렸습니다. 일본군은 울부짖는 나를 고비에르노 길의 일본군 주둔지에 이웃한 이층 건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새벽에 나는 히로오카 대위에게 강간당했고, 그로부터 하루에 2명에서 5명 정도의 일본병에게 강간당했습니다. 나는 13세였고, 초경 전이었습니다.
 
 
  ◆피에닷 니카시오 노블레사(Piedad Nicasio Nobleza)
  1920년 필리핀 파나이 섬 태생
 
  아버지는 마다라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고 나는 14세까지 7년간 마다라구 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20세 때 결혼하여 아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남편은 야채나 쌀, 바나나 등의 농사를 지었습니다. 1943년 집 주위의 풀을 베고 있을 때 2명의 일본군에 잡혀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마다라구 가톨릭 교회로 끌려갔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 약 2주간 감금되어 매일 몇 사람의 일본군에게 강간당했습니다. 아이나 남편이 생각나서 슬펐고 또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것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타 알코버(Cristita D. lcober)
  1926년 필리핀 레이테 섬 태생
 
  내가 16세 때 당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던 레이테 섬의 타클로반시 산호세 지구에 주둔지를 만든 일본군은 마을 사람 전원을 한곳에 모아서 가두고 노동을 명령했습니다. 나도 남동생 2명과 함께 끌려갔습니다. 해안의 활주로가 있는 비행장 근처로 끌려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모래나 돌을 옮기는 중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3개월 후부터 우리 여성에게는 노동 이외에 또 하나의 고역이 더해졌습니다. 매일 밤 2~3명의 일본군이 와서 30명의 여성 중에서 10명 정도를 골라 숙소에서 데리고 나가 근처 해변에서 기다리는 수십 명의 일본군에게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참호 속, 코코넛 야자나 바나나 나무 아래서 우리를 강간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1942년부터 2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1944년 가을 무렵 미군의 공습과 포격이 시작되었고 일본군이 이 주둔지를 버리고 도망쳐 겨우 해방되었습니다.
 
 
  ◆디오니시아 후마핏(Dionisia M. Jumapit)
  1925년 필리핀 세부 섬 태생
 
  1941년 12월에 일본군 비행기가 라푸라푸시를 공격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보르혼의 그라나다 마을로 피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본군에게 잡혔고, 위안부가 있는 남쪽으로 끌려갔습니다. 수없이 강간을 당했는데 저는 현재도 남편과의 불화와 폭력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의 사건이 남편과의 불화의 큰 원인입니다.
 
 
  필리핀 정부, 위안부 문제에 미온적
 
‘릴라 필리피나’ 사무실 내부.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사진이 걸려 있다.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듣고 엑스트라마두라 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녀는 인터뷰 시간의 대부분을 필리핀 정부를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필리핀에는 한국과 달리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법안과 구체적 규정이 전혀 없습니다. 당장 이번에 일본을 방문한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위안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존자 할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나더라도 우리 단체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의 사죄, 보상이 있을 때까지 맞설 것입니다.”
 
  실제 지난 6월 2일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을 국빈 방문한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Benigno Noynoy Aquino) 필리핀 대통령은 위안부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왜 필리핀 정부는 이 문제에 미온적이라고 생각합니까.
 
  “필리핀 정부는 필리핀도 1942년부터 45년까지 일본군 통치라는 피해와 상처를 받았지만, 위안부를 비롯한 과거사가 필리핀-일본 정부 간 관계에서는 마무리되었다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 손해배상, 역사교과서를 통한 교육 등을 원합니다.”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뒤 가정에서도 버림받는 상황을 그린 그림.
  ―필리핀 정부가 돕지 않는다면 위안부 문제로 고통을 겪는 다른 국가들(한국, 대만, 네덜란드 등)과 연대를 통해 일본에 대응하는 방안은 어떻습니까.
 
  “이미 저희는 한국과 태국, 대만 등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 활동가와 함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를 결성한 상태입니다. 5월 22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주최로 열린 ‘제13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도 참석한 바 있습니다.”
 
  아시아연대회의는 1992년 서울에서 처음 시작했으며, 2011년 이후 4년 만에 지난 5월 22일 서울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각국 연구자와 시민단체 관계자 180여 명과 한국, 필리핀의 위안부 피해자 6명이 참석했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위안부로 삼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유럽 쪽의 지지를 얻는다면 일본을 더욱 압박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요. 사실 유럽에는 네덜란드를 제외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지하는 분위기입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허버트 빅스(미국 빙엄턴대학), 디어도어 쿡·하루코 다야 쿡(미국 윌리엄패터슨대학), 존 다우어(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를 비롯해 에즈라 보겔(하버드대),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피터 두스(스탠퍼드대) 등 미국과 유럽, 호주에서 활동 중인 일본학 전공 역사학자 187명은 지난 5월 6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정면으로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집단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외교 경로를 통해 아베 총리에게도 직접 전달됐다.
 
‘릴라 필리피나’는 피해자들이 모두 별세하더라도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 끝까지 맞서겠다고 했다.
  ―정부 지원금이 없을 텐데요. 운영은 어떻게 합니까.
 
  “필리핀 정부는 단 한 푼도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운영은 저희를 돕는 분들의 지원금으로 합니다. 액수가 적어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필리핀은 1956년에 일본으로부터 5억5000만 달러를 배상금으로, 2억5000만 달러를 차관으로 받았습니다. 그럼 이 돈은 어디에 쓰였습니까.
 
  “국가 인프라 건설에 썼습니다. 이 돈과 위안부 피해자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릴라 필리피나는 일본 정부에 대해 기나긴 법정 투쟁을 벌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983년 18명의 생존자가 도쿄 법원에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2003년 성탄절에 일본 대법원은 “일본 사법 시스템은 국제법을 따르는 데 한계가 있다”며 이들의 소송을 기각했다. 2004년 필리핀 대법원에 청원(請願)했으나 2010년 기각됐다. 이에 대한 재심 신청에 대해 필리핀 대법원은 2014년 8월에 다시 기각하면서 원심을 확정했다. 원심은 ‘행정부가 개인의 대일 청구권 행사에 대한 지원 여부를 결정할 전권을 갖고 있으며 개인 청구권 행사를 지원할 어떠한 의무도 없다’이다. 정부는 도와주지 못하니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유엔 특별보고관의 특별보고서에 기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요구 사항

 
  (가) 생존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해 군 ‘위안부’로서 감수해야 했던 고통에 대해 개별적으로 사과할 것. 대다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일본 무라야마(村山富市) 총리의 사과 및 담화에 대해 일본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함.
 
  (나) 대략 20만명의 한국 여성이 일본군의 성 노예로 동원되었고,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편의를 위해 설치된 위안소가 일본 정부와 군 당국의 인지 아래 체계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것.
 
  (다) 성 노예를 목적으로 한 여성들의 체계적인 동원은 반인간적인 범죄이자, 국제 인권법에 대한 위배이고, 평화에 대한 범죄행위일 뿐 아니라 노예 범죄, 인신매매와 강제성을 띤 성매매였음을 인정할 것.
 
  (라) 이러한 범죄행위에 대한 도덕 및 법률적 책임을 다음과 같이 수용할 것.
 
  (마) 생존한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일본 정부의 재원으로 배상할 것.(이와 관련 일본의 지방 법원은 민사 소송을 통한 배상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 개개인의 요구사항이 이루어지도록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이와는 별개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일본군의 성 노예 문제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철저한 조사, 특히 일본 기록문서보존소와 일본 내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일본군 성 노예 문제에 대한 모든 정부 문건 및 공적 자료들을 공개할 것 ▲일본 역사서 및 교육 교과목에 조사를 통해 드러난 역사적 사실들을 반영할 것 ▲일본 국내법하에서, 일본군의 성 노예 모집과 성 노예 제도에 관련된 모든 가해자를 상대로 신원 확인 및 기소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아시아여성기금 지급, 日 정부의 공식 사과 아니다”
 
가브리엘라 여성당(Gabriela Women's Party)의 헤우스(Jesus) 하원의원.
  6월 10일 기자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필리핀 정부에 자국 위안부 할머니 지원을 촉구하는 가브리엘라 여성당(Gabriela Women's Party)의 헤우스(Jesus) 하원의원을 만났다. 헤우스 하원의원은 2013년 당시 우리 국회 여성가족위 소속 새누리당 김희정·류지영·김현숙 의원, 민주당 유승희 의원과 만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현재까지의 양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정보를 교환한 바 있다.
 
  필리핀 국회는 양원제이며 24명의 상원의원과 250명의 하원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헤우스 하원의원과의 문답이다.
 
  ―필리핀 정부는 왜 위안부 문제에 미온적입니까.
 
  “일본과 우호적이고 끈끈한 경제적 관계를 맺는 쪽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필리핀 정부의 입장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솔직히 필리핀 정부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년간 필리핀의 정책은 일본과의 경제적 관계를 나쁘지 않게 하자는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국가 차원의 문제로 다뤄야 합니다. 일본은 이 문제에 공식 사과나 제대로 된 인식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을 성 노예로 부렸으면서도 합법적인 보상을 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필리핀에 있어 일본은 제1의 교역대상국이다.
 
  ―엑스트라마두라 릴라 필리피나 대표가 말한 바로는 필리핀 정부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1956년 일본-필리핀 간 손해배상협정(Reparations Agreement)에 따라 손해배상 및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이라던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하나도 없었습니까.
 
  “전 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혹한 위안부 실태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1989년이었습니다. 필리핀에선 90년대에야 비로소 롤라 로사 핸슨(Lola Rosa Henson)이 외부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위안부 여성을 전쟁배상 협약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금전적 보상은 아시아여성기금(AWF)으로부터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고(故) 롤라 로사 핸슨(1927~1997)은 우리나라의 김학순 할머니(위안부 최초 증언자) 같은 존재다. 1991년 8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이 주최한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가 서울에서 열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그의 뒤를 이어 200여 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신고했다.
 
샌 어거스틴 교회. 100명 이상의 필리핀 포로와 위안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곳이다.
  ―아시아여성기금(AWF)으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았는데 또 다른 보상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이 ‘배상’이 아니라 ‘위로금’으로 해결하려는 의도로 1995년 만든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제적·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임이 자명한데, 이것을 보상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아시아여성기금’은 1995년 태평양 전쟁 중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피해를 본 여성들에 대한 보상을 위해 설립된 민간기구다. 한국, 대만, 필리핀 등의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보상금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 총리의 사과편지를 전달했다. 하시모토 총리는 “나는 일본 총리의 자격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간직했으며, 그리고 ‘위안부’로서 치유할 수 없는 물리적, 정신적 부상을 겪었던 모든 여성에게 다시금 진정한 사과와 심심한 유감의 뜻을 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금은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나온 기부금이었고,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적·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아시아여성기금은 2007년 3월 해체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본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개인당 속죄금(200만 엔)과 의료지원금(300만 엔)을 지급했는데 한국 피해자들은 국가의 ‘법적 책임’을 요구하며 기금 수령을 거부했다. 한국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의 3분의 2 이상이 기금 돈을 받지 않았다. 반면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90여 명은 속죄금과 의료지원금을 수령했다. 원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도 기금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활은 한국 피해자와 비교할 때 훨씬 어려웠다. 한국의 경우 정부 지원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보장이 이뤄졌고, 대만의 경우 정부와 시민의 모금으로 상당한 경제적 지원이 있었지만, 필리핀의 경우 정부 지원이 전무(全無)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 주아니타(Juanita)는 1996년 기금 수령 후 이같이 이야기했다.
 
  “96년 8월 나는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돈을 받았습니다.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나를 부양할 가족도 없으며 릴라 필리피나의 지원에 의존해서 살고 있습니다. 기금을 받았음에도 나는 국가 배상과 공식적 사과를 계속 요구할 것입니다. 나는 아시아여성기금이 내가 받아 마땅한 정의를 실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국가 보상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하시모토 수상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로부터의 공식적 사과가 아닙니다. 이는 하시모토 씨 개인의 사과일 뿐입니다.”(출처: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논문-김정란)
 
산티아고 요새. 인트람로스(스페인 시대부터 있던 성벽도시) 안에 있다. 많은 필리핀 위안부 여성들이 감금되어 강간을 당했다.
  다시 헤우스 하원의원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정부의 관심도가 떨어지니 필리핀 국민도 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겠습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다수의 필리핀 사람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게 됐고,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폭력의 의미도 인지하게 됐습니다. 학계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학생들과 교수들의 연구 대상입니다.”
 
  ―필리핀 위안부 생존자는 총 몇 명입니까?
 
  “현재 약 95명이 생존해 있습니다.”
 
  ―필리핀 의회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와 같은 정당(농민, 여성들을 대표하는 좌파 정당)은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꺼내 일본과 공식적으로 협의해야 한다고 하원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결의안은 단 한 번도 하원을 통과한 적이 없습니다.”
 
 
  필리핀에 세워진 위안소
 
  필리핀 현지 취재 중 연합군 자료에 들어 있는 경찰 보고의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은 1941년 12월, 미국령인 필리핀 루손 섬에 상륙하여 바로 마닐라를 함락시키고, 1942년 1월 3일부터 군정을 시행하였다. 일본군의 군정 아래서 필리핀인은 격심한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저항운동을 했다. 일본군은 게릴라 토벌을 이유로 잔혹한 작전을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마닐라에 군 위안소가 만들어졌다. 마닐라에는 위안소 12채, 병사, 하사관용 5채가 있었다. 포로의 진술로는 이 중에는 한국인, 중국인이 있는 위안소도 있었다.
 
   북부 루손 섬에서는 바욘봉(1번)(Bayonbong)에 위안소가 있었다. 중부 비자야스(Visayas) 지방에는 마스바테(3번)(Masbate)도에 군인 클럽이라는 위안소가 있었다. 파나이(Panay) 섬의 일로일로(4번)(Iloilo)시에는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 세부(Cebu) 섬의 세부(5번)에는 위안소를 경영하는 일본인 업자가 한 명 있었다. 레이테(Leyte) 섬의 타클로반(6번)(Tacloban)에는 필리핀인이 경영하는 위안소가 있었다. 이 섬의 부란엔(7번)(Buranen)에도 위안소가 1944년 8월에 설치되었다. 남부 민다나오(Mindanao) 섬의 부트난(8번)(Butnan)에는 1942년에 필리핀 여성 3명이 있는 위안소가 개설됐다. 또 같은 섬의 카가얀(9번)(Cagayan)에는 1943년 2월에 제3 위안소가 만들어져, 세 곳의 위안소가 있었던 것이 확인됐다. 같은 섬 중앙의 단살란(10번)(Dansaran)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또 이 섬의 다바오(11번)(Davao)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위안소를 운영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일본의 일부 우익인사들은 일본군 ‘위안부’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유의지로 매춘했다고 강조하며,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안부 제도가 공창 제도하에서의 매춘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제도상 양쪽의 형태가 일부 유사한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공창 제도하에서의 매춘은 국가에서 허가제로 규제하는 반면,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과 정부가 운영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군과 정부는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거나, 또는 민간업자를 고용해 통제하고 감독했다. 고용된 민간업자들은 일본군과 정부에 일일보고 혹은 월간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위안부’ 여성들의 동원은 지역경찰이나 헌병과 긴밀히 협력했던 민간업자가 맡았다. 일본 군대는 ‘위안부’ 여성들의 수송을 위해 군용 트럭, 기차와 전함 등의 교통수단을 제공했다. 위안소는 유괴, 속임, 협박 등으로 강제 동원된 ‘위안부’ 여성들이 자유를 구속당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군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2007년 미(美) 의회 조사국 보고서(CRS)를 통해 밝혀졌다.
 
 
  필리핀 정부의 공식 입장은?
 
프랭클린 드릴론(Franklin Drilon) 상원의장.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공식 입장을 듣기 위해 프랭클린 드릴론(Franklin Drilon) 상원의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프랭클린 드릴론 의장은 한·필 의원 친선협회장이기도 하다.
 
  주(駐) 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을 통해 5월 18일부터 인터뷰를 요구했지만, 프랭클린 드릴론 의장 측은 6월 10일까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11일 이렇게 인터뷰가 무산되나 생각하던 찰나 프랭클린 드릴론 쪽에서 연락이 왔다. 프랭클린 드릴론 의장이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원의장으로서 이야기합니다. 필리핀 상원의원 24명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슈화한 적이 없고 이슈화시킬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상원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합의가 된 사항이라는 입장입니다. 더는 드릴 말씀이 없기 때문에 인터뷰는 할 수 없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필리핀 정부는 1956년 일-필 손해배상협정(당시 필리핀은 일본으로부터 5억5000만 달러를 배상금으로, 2억5000만 달러를 차관으로 받았다)에 따라 위안부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손해배상 및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으며,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일본 측의 위로금을 수락한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해외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활상을 사진으로 담는 안세홍 작가는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는 필리핀은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고 했다.
 
산티아고 요새 내 설치된 감옥. 위안부 여성들은 이곳에 갇혀 있다가 강간을 당했다.
  익명을 요구한 필리핀 유력지 기자는 “필리핀에서 어느 지역보다 먼저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할머니가 나타났다”며 “기금을 수령했으면서도 ‘이것은 배상금이 아니다’라고 계속해서 문제해결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모순적이면서도 국가 이익에도 맞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실제 기금 수령은 필리핀에서 제일 먼저 이뤄졌다. 1996년 8월 14일 마닐라시의 하얏트 호텔에서 세 명의 희생자가 이를 수령했다.
 
  또 다른 기자는 “아키노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일왕은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미 간의 치열한 전투가 필리핀에서 치러지며 많은 필리핀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 국민은 이 일을 깊은 회한의 마음으로 오랫동안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당시 피해자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이야기했다”며 “아키히토 일왕은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에 폭격을 가하던 당시 일왕이던 히로히토의 어린 아들이자 왕자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데 계속해서 일본에 대한 노여움과 불만을 품으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참고로 필리핀에선 기사에 기자 이름(바이 라인)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기사의 논조(論調)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테러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인지 기자들은 인터뷰를 꺼렸고, 하더라도 철저히 익명을 요구했다.
 
 
  中과 영유권 분쟁 중인 필리핀, 日 도움 절실
 
산티아고 요새 화약고. 내부에 일본군 밀랍인형을 세워놔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대한민국 외교부 관계자는 “필리핀이 직면한 최대 고민은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이라며 “일본과의 군사안보협력이 절실한 상황인 만큼 일본에 잘 보이면 잘 보였지 싫은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중국과 필리핀은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군도)에 있는 한 섬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섬은 북위 92도 39~48분, 동경 115도 51~45분에 있는 세컨드 토머스 숄(중국명 런아이자오, 필리핀명 아융인 섬)을 말한다. 길이 15km, 너비 5km인 이 섬은 일종의 모래톱이다. 이 섬 한 귀퉁이에는 필리핀의 상륙함 시에라 마드레호가 1999년 좌초된 채 정박해 있다. 필리핀 정부는 이 함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해병대원 12명을 상주시켰으며, 이후 자연스럽게 이 섬을 실효 지배해 왔다.
 
  필리핀 정부는 지난 2013년 상륙함을 이 섬에 고정하려는 공사를 시도했다. 그러자 중국 정부가 함정과 해양감시선 등을 대거 동원해 필리핀 함정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필리핀 정부가 못 쓰게 된 함정을 이 섬에 보내 고의적으로 좌초시켰다면서 이 함정을 철거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필리핀 정부는 이를 거부한 채 해병대원들을 이 섬에 배치했다. 양국은 현재도 이 섬의 영유권을 놓고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섬은 필리핀 서부 팔라완 섬에서 북서쪽으로 200km 떨어져 있다. 반면 중국 본토와는 동쪽으로 1000km 정도 떨어져 있다. 필리핀 정부는 중국 정부가 이 섬을 자국의 영토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고 분노하고 있다. 지난 6월 2일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을 국빈 방문한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이 중국을 나치에 비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지역 편입 등 영토 확장에 대한 유럽의 초기 대응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중국의 움직임에 강공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필리핀 정부의 대응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필리핀 정부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 미국 및 일본과의 군사협력에 적극 나설 수밖에 없다.
 
  일본은 주변국들과의 협력 강화로 중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일본은 분쟁 당사국인 필리핀과 ‘방문부대지위협정(VFA)’을 추진하고 있다. 이 협정은 일본 자위대 소속 항공기와 함정들이 급유와 물자 조달을 위해 필리핀 기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양국의 합동 군사훈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체결될 경우 자위대는 남중국해에서 정찰활동 등을 할 수 있게 되는 등 군사작전 범위를 크게 확장하게 된다. 외신들은 “필리핀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군비 지원을 받고 일본은 필리핀을 근거지로 남중국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일본은 필리핀에 조만간 순시함 10척을 제공할 계획이다.
 
  김재신 주 필리핀 대사는 “무역, 투자, 원조, 인적 교류, 군사 등 필리핀의 대외관계에서 일본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필리핀 위안부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 까닭
 
  한국으로 돌아온 12일 오후 우리의 메인 뉴스는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이날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협상과 관련,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지금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저는 (올해가) 매우 의미 있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이번에는) 일본 정부의 사과 등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 걸 안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물론 아베 정부와의 협상은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낙관은 금물이다. 하지만 이 뉴스를 접했을 때 필리핀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대한민국 정부와 필리핀 정부는 큰 차이가 있었다.⊙
 

  金在信 駐필리핀 대사 인터뷰
 
  “아키노 대통령, 한국인 상대 강력범죄 근절 위한 협조 약속”
 
  ⊙ 日 기업의 對 필리핀 투자액 대폭 증가 추세 주목해야
  ⊙ 獨과 日의 가장 큰 차이점은 戰後 처리 방식
 
  金在信
  ⊙ 57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제14회 외무고시 합격. 주일대사관 참사관, 청와대 외교비서관,
      주 독일 대사, 現 주 필리핀 대사.
 
김재신 주 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필리핀은 한국 여행객이 아주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다. 한국관광공사 관계자는 “2013년 필리핀을 찾은 한국인 방문객 수가 태국에 이어 동남아에서 둘째로 많았다”고 말했다. 한국인 방문객이 100만명을 넘는 동남아 국가는 홍콩과 필리핀, 태국 등 세 나라뿐이다. 인구 1억600만명에 6·25전쟁 땐 7000명이 넘는 군인을 파병했던 전통적 우방 국가 필리핀은 한국인에게 위험한 나라일까. 지난 6월 9일 김재신(金在信) 주 필리핀 대사를 만나 물었다.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한 강력 범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필리핀 정부도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나요.
 
  “필리핀 정부도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한 사건·사고가 빈발하고 있는 데 대해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많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외교부, 내무지방자치부, 국방부, 통상산업부, 관광부 등 5개 부처 장관과 육군 참모총장이 참석하여 우리 대사관을 대상으로 필리핀 정부의 조치 현황을 설명하고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어제(6월 8일) 아키노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나서 가진 면담에서도 우리 국민의 안전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필리핀의 과거사 인식 우리와 달라
 
  ―유독 한국인을 상대로 한 사건·사고가 잦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필리핀 내부에 반한(反韓)감정이 있습니까.
 
  “무역, 투자, 원조, 인적 교류 등 필리핀의 대외관계에서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지난 2013년 태풍 하이옌 피해 복구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아라우(Araw) 부대에 대해, 아키노 대통령이 동 부대를 수차례 방문, 고마움을 표시하는 등 우리나라에 대해 우호적입니다.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한류가 매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필리핀 양대 방송사인 GMA와 ABS-CBN이 각각 1년에 3~4편씩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대사관은 필리핀 내 한국인 대상 사건·사고를 막거나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한인회와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치안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사관 카카오톡으로 각종 치안안전 정보를 주는 것이지요. 이 밖에 안전유의 홍보 소책자를 배포하고 택시기사에 의한 강도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필리핀 공항에 한글로 택시 이용 안내판을 설치했습니다. 또 한인 밀집지역인 앙헬레스(Angeles) 및 마닐라 말라떼(Malate)에 한인 자율 파출소 설치 및 예산을 지원했습니다. 사건·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방문자들이 필리핀의 법제도를 지키며 우리와 다른 필리핀의 문화와 생활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필리핀으로 도피한 수배자를 검거, 국내 송환하는 작업은 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하고 있습니다. 매년 20~30명을 국내에 송환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015년 5월 안양 환전상 살인 공범인 김성곤을 송환했습니다. 2013년 11월에는 조직폭력배 조양은, 9월에는 인질강도범 방기일을 송환 조치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김성곤은 2007년 공범인 최세용, 김종석 등과 공모해 안양 환전소 여직원 살해사건을 일으키고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이후 2008~2012년 한국인 관광객을 연쇄 납치하고 석방금 명목으로 수억원을 빼앗았다. 김성곤과 공범인 최세용, 김종석 등은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납치하고 살해한 혐의도 받고 있다. 필리핀 연쇄 납치 사건은 주요 언론 등의 보도를 통해 꾸준히 다뤄지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김성곤은 필리핀에서 체포된 후 현지 감옥에서 탈옥해 6개월 만에 재(再)검거되기도 했다.
 
  ―아세안 시장이 역동적입니다. 대한민국은 필리핀의 어떤 사업에 투자하면 좋겠습니까.
 
  “우선 제조업과 관련 2009년부터 일본 기업들이 제조업을 중심으로 대(對)필리핀 투자가 대폭 증가하는 추세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기업도 전기·전자, 의류 등 제조업 중심 진출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입니다. 또 아키노 정부의 임기가 1년여 남은 현재 대규모 주택단지, 발전소 건설 등 중대형 건설 프로젝트 건수가 증가하는 상황도 주목해야 합니다. 필리핀 정부는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의 경우 PPP(Publc Private Partnership) 방식을 통해 민간자본을 활용 중입니다. 아울러 EU가 작년 말 필리핀에 ‘일반특혜관세제도(GSP) 플러스’ 대우를 부여한바, 신규 수혜 품목 중에서도 관세혜택이 큰 품목(신발 등)을 생산하고 수출할 경우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피해자 취재를 해보니 필리핀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입장이 대한민국 정부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취재를 많이 하셨겠지만, 필리핀 정부는 필리핀도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년간 일본군의 점령 통치라는 피해와 상처를 받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가 필리핀-일본 정부 간 관계에서는 마무리됐다는 입장입니다. 필리핀 정부는 1956년 필리핀-일본 손해배상협정에 따라 위안부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손해배상 및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보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일본 이외에도 수백 년 동안 스페인, 미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고,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고 이름도 서양식을 쓰는 필리핀은 과거 식민 지배 세력,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獨과 대조적인 日의 자세는 주변국과의 관계 저해 요인
 
  ―과거 한 언론 기고문에 ‘독일인은 자신의 역사적인 과오를 부정하거나, 감추거나, 축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널리 알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쓰셨습니다. 일본은 왜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과거사 문제와 관련, 독일과 대조적인 일본의 자세는 한일관계는 물론, 주변국과의 관계를 저해하는 요인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독일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전후 처리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철저한 과거사 반성은 나치의 이념과 사상에 대한 분명한 단절로부터 시작합니다. 독일에서는 나치와 관련한 모든 것이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나치즘의 상징인 갈고리십자가(하켄크로이츠) 문양은 법적으로 사용이 금지돼 있으며, 1945년 이후 70년간 판매가 금지된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도 2016년 이후에도 계속 금지하기로 최근 결정되었습니다. 나치 범죄에 관해서는 공소시효도 없습니다. 반면 일본은 천황제를 계속 유지하고 또 전쟁 책임이 있던 일부 지도자들이 전후에도 계속 지도자로 활동함으로써 전후처리가 불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일본 사회의 우경화 경향과 함께 일부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은폐·축소하고 나아가 정당화·미화하고자 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도 커다란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김 대사는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 주 일본 대한민국 참사관을 역임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을 담은 ‘드레스덴 선언’을 할 당시 독일 대사가 그였다.
 
  ―주 필리핀 대사와 주 독일 대사 업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독일은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점에서 한반도 통일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고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하는 국가인 반면 필리핀은 개발도상국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가진 경험을 공유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통일 과정이 독일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저도 독일에서 만난 많은 통일 전문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전망이 나오는 이유는 북한을 상대하는 것이 동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렵고, 우리의 통일을 위한 국제적 환경 역시 독일 경우 못지않게 까다로운 탓입니다. 통일 한국에 대한 미·중·일·러 등 관련국의 복잡한 이해득실, 관련국 간 상호 경쟁 관계 또는 견제, 북한 핵 문제 등 난제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통일된 한국은 분단이 지속하는 한반도보다 관련 각국 국익에 더 유리할 것이라는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우리의 모든 외교적 역량을 결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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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문    (2015-06-24) 찬성 : 245   반대 : 126
각나라의 피해자들이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이 문제를 공동 대처하는 것이 효과적 일것 같습니다.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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